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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신 회고록 베트남전쟁과 나 (초판발행 2006. 6. 20)
(20쪽) 분명한 역사의 왜곡이며 참전 전우에 대한 모독이었다. "강대국 미국이 약소국 베트남을 침략하기 위한 전쟁에 왜 한국군이 말려들어야 되는가"라는 대목에서는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가 치밀었다. 계속 이어지는 주제 발표자의 뜻밖의 발언은 이곳이 대한민국의 국방부 산하기관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할 정도로 궤변과 이적발언으로 이어졌다.
(29쪽) 나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베트남전쟁에 파견될 주월한국군사령관 직책과 함께 전투부대 주력인 맹호사단장 직책을 부여받았다. 채명신(蔡命新) : 주월남한국군사령관겸 사단장에 보함, 육군소장 10826 1965. 8. 17.부
(31쪽) 육사 졸업식은(1948년) 4․3사건으로 제주도에 첫 총성이 울린 뒤 불과 사흘 후인 4월 6일 이었다. 바로 육사5기생이 4․3사태와 뗄 수 없는 운명임을 암시하는 결과가 되었다
(35쪽) “지금 시급한 것은 부정부패를 일소하는 것이니 감찰위원장(4294. 7. 11)을 맡아 주시오.”
“기꺼이 가겠습니다”
나는 단숨에 말해 버렸다. 군인이 전쟁터에 가는 것 말고 또 다른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을 때라 미국 내에서 베트남전쟁 (37쪽) 개입에 비판적이었다. 그런 판에 한국군이 단독으로 참전한다면 국제적으로도 이해가 될 수 없는 시기였다. 결국 베트남 파병은 몇 년을 더 미뤄야 했다.
나는 시험에 통과하여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38쪽)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3관구사령관으로 1년을 재직한 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의 요직을 맡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비전투부대인 비둘기부대가 베트남에 파견되었었고, 베트남의 정세는 점점 확전의 기미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군사 협정 2. 월남공화국내의 政治的 또는 군사적, 불안정으로 인하여 상기 제1항에 명시된 한․미 군사일반협정서 제2항 및 제3항의 적용을 불가능케 하는 긴급사태가 발생하였을 경우에는 COMUS MAC-V는 대한민국 군사지원단장(ROK MAG-V)과 그 예하부대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행사한다. 1965. 2. 8〉
(40쪽) 육군참모총장 김용배 장군이 나를 불렀다.
1965년 3월, 작전참모부장으로 부임한 지 며칠 지나지 않던 그날,
총장과 내가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서자 박 대통령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자 앉게.”
“총장은 먼저 가고, 채 장군은 잠깐 나하고 이야기 좀 할게 있어”
대통령은 약간 억양을 높이며,
“채 장군, 월남에 전투부대 보내면 한국군 잘 싸우겠지. 곧 해결될 거야.”
자신있는 그다운 억양이었다.
(42쪽) “각하 무슨 근거로 그렇게 낙관하십니까.” 저는 전투부대 파병을 반대합니다.“
박 대통령 얼굴빛이 벌개지면서 놀라는 기색으로 변했다.
“무엇이? 한국군이 해결 못한다고.”
“네, 어렵습니다. 게릴라전에 정규군이 승리하려면 많은 희생이 따릅니다.”
박 대통령이 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를 낀 손가락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매우 흥분한 것 같았다. 나는 당황하였다. 평소 그가 그렇게 흥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래! 채 장군 생각이 틀렸어.”
“아닙니다. 베트남의 게릴라들 베트콩은 틀립니다.”
“무엇이 틀려?”
나를 향해 대드는 것과 같은 자세로 억양을 더 높였다. 그리고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채 장군. 지난날의 6 ․ 25 전투경험에다 교육훈련도 잘 되어 있고 반공정신도 강하고 사기도 높잖아!”
나는 박 대통령의 항변에 지지 않고 억양을 높였다.
“각하의 말씀은 다 옳습니다. 그러나 월남전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에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채 장군의 그런 대답은 뜻밖이군. 어째서 그래.”
대통령은 몹시 불쾌한 표정이었다. 한편 당황하는 기색도 보였다. 평소 그가 그렇게 흥분한 적은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나 또한 내심 당황하였다. 그러나 할 말은 해야 되겠다고 생각이 미치자 나는 당황하는 빛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설명을 이어 갔다.
(43쪽) “각하. 2차대전이 끝나자 5년여 동안 인도지나를 점령했던 일본군이 물러갈 때 그들 무기의 일부를 취득한 공산월맹이 독립투쟁을 시작했습니다. 공산월맹은 일본군 점령하에도 비밀조직을 통해 세력을 확대하며 소극적인 투쟁을 해 왔지만, 일본군 철수 후 대규모 무장세력으로 조직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의 대부대가 지난날의 식민지였던 인도지나반도에 진주하자 인도지나반도 전역에서 본격적인 무장투쟁이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공산월맹은 전국토 모든 도시와 촌락을 무장투쟁을 위한 전투기지로 만들면서 주민들을 조직하고 훈련기키며 결렬한 게릴라전을 적국적으로 확대해 나갔습니다.
이에 따라 8년 동안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었으며, 프랑스군이 마지막 거점인 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에서 항복함으로써 전쟁은 월맹의 승리로 끝나고, 1954년 제네바협정에서 17도선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공산월맹으로, 남쪽은 자유월남공화국으로 양분되지 않았습니까.”
대통령의 흥분은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담배를 낀 두 손가락의 떨림도 보이지 않았다. 내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나는 안도하며 다음 이야기로 이어 갔다.
“각하. 이때 월맹의 지도자 호치민(Ho Chi Minh)은 17도선 이북으로 철수하면서 많은 무기와 탄약 그리고 정예 병력 상당수를 남쪽에 남겨 두고 통일을 위한 계속 투쟁을 지시하였습니다. 그 후 17도선 이남에는 미국이 후원하는 고 딘 디엠(Ngo Dinh Diem)대통령 정권이 들어서서 철저한 반공정책으로 공산조직 탄압하자, 공산세력은 일시적으로 지하에 숨어들었던 (44쪽) 것입니다. 그러나 고 딘 디엠 정권의 족벌정치와 부패에 대해 국민들의 불만과 반항이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더욱이 가톨릭 신자인 대통령과 소수 권력층에 대해 국민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불교신자들은 종교적인 불만과 반항을 격화시키자, 이 투쟁이 도화선이 되어 혼란이 퍼져 1963년 11월 두옹 반 민(Duong Van Minh) 장군을 지도자로 하는 군사쿠테타에 의해 디엠 정권이 무너지고 디엠 대통령 형제는 암살당하였습니다.
미국은 디엠 정권 수립시부터 막대한 원조를 제공하였으나, 미국과 디엠 정권 간의 마찰과 갈등이 심화된 가운데 군사쿠데타를 맞았는데, 미국은 새로운 군사정권에 대해 군사 및 경제원조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군사정권 지도자들 간에 권력 싸움이 시작되어 군사쿠데타가 반복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불안이 지속되는 가운데 세력 확장을 위해 지하에서 꾸준히 조직을 강화하여 본격적인 게릴라전에 의한 투쟁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964년 8월 2일과 4일 공해상에서 공산월맹의 함정이 미 해군 함정을 공격한데 이어, 지상에서는 베트콩들이 미군 고문관의 숙소와 기지 등을 습격하여 많은 미국인들을 살해하고 시설들을 파괴하는 격렬한 투쟁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대통령은 줄담배를 피우면서도 열심히 내 설명을 듣고 있었다. 초기에 분노의 빛까지도 보였던 것이, 내 충정에 의한 한마디 한마디에 진지한 얼굴빛으로 변하면서, 때로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했다.
“각하. 지금까지 보고드린 월남정세는 더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왜냐하면, 20년 가까운 게릴라전의 (45쪽) 실전경험을 통해 세계 최강의 게릴라로 성장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긴 세월 월남의 많은 촌락과 산야에다 게릴라전을 위한 전투기지를 완성해 놓았다는 점이 정규군에게는 커다란 장애가 될 것입니다. 베트콩들의 또 다른 강점은 월맹 대통령 호치민이 반프랑스 독립투쟁의 국민적 영웅이며 애국자라는 인식이 남․북 월남의 거의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는 점입니다. 또한 자신들의 투쟁이 반식민지 독립투쟁의 숭고한 목적 달성에 있다는 신념에 불타고 있는 점입니다.
아울러 베트콩은 캄보디아, 라오스 등의 성역지대를 통해 월맹의 지원을 계속 받을 수 있는 지원 루트 등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쉽게 승패를 가릴 수 없는 형태의 전쟁이 월남전쟁입니다.”
대통령은 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미군도 힘들겠구먼.”
“그렇습니다. 각하. 미국은 남․북 월남 전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고 남․북의 모든 월남인들을 몰살시킬 수 있는 엄청난 군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제적인 여론을 감안할 때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또 그와 같은 협박으로 쉽게 항복하리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채 장군. 한국군이 월남에서 잘 싸울 자신이 있다는 내 생각이 과욕일까?”
“각하! 상황의 진전을 좀 지켜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비둘기부대 파견까지는 무난하며, 명분도 뚜렸하고 성공할 자신도 있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앞으로 미군 전투부대가 월남전에 투입되고, (46쪽) 전쟁이 더욱 확대되어 한국에 주둔 중인 2개 미군사단을 월남전선으로 빼돌린다면 이는 우리나라 안보에 결정적인 치명타가 될 것이며 제2의 6․25는 너무도 자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때 가서 판단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나는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던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박대통령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도 바로 그 점을 우려하고 있었는데, 걱정이야! 김일성이가 자신만만하고 의기 양양하게 ‘우리가 밀고 내려가면 잃는 것은 휴전선이요, 얻는 것은 조국통일이다’라고 떠들어 대고 있는데 말이야”
박대통령과 나의 고민과 우려는 바로 그 점에 있었다.
(47쪽)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1월 26일 담화문에서 월남 파병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그 외에 한․미․베트남 3국 간의 협조로 3각 무역체제를 유기적으로 구축, 외화획득의 좋은 기회가 되고 국내 생산이 가능한 군수품 수출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1965년 3월 나와 단독대담 이전에 이미 박 대통령은 전투부대 파견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단독대담 이후 박 대통령은 전투부대 파병을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함께 신중론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사태 진전을 분석하면서 전투부대 파병은 어쩔 수 없는 일로 보되, 보다 신중히 사전준비를 착실하게 대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주야를 가리지 않고 정보분석과 대비책 강구에 몰두했다.
1965년 2월, 미 해군기에 의한 북부 월남에 대한 폭격에 이어, 3월에는 미 지상군 6만여 명이 월남에 도착하는 등 계속 지상군이 증가되어 갔다. 우리나라 비둘기부대에 이어 오스트레일리아 보병대대를 비롯 자유우방국의 지원 움직임도 가시화되고 있었다.
(50쪽) 김용배 참모총장이 급히 나를 불렀다. 나는 총장실을 찾자마자 그가 무엇을 이야기하기 위해 나를 오라고 했는지 대충 눈치를 챌 수 있었다.
“파월 전투부대를 채 장군이 맡아 줘야 되겠어요.”
하고 말하고는 의자에 앉으며 나를 의자에 앉게 했다. 나는 순간 한없는 영예임을 의식하면서도 어려운 전장에 가야 할 무거운 책임을 느꼈다. 그렇다고 당장 가겠다고 할 수 없어 나는 입을 열었다.
“총장님, 감사합니다. 그 막중한 중책을 저에게 맡기시겠다니 영광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 저는 전투부대 편성을 준비하면서 적임자를 건의할까 했는데…. 이병형 장군이 어떻습니까. 6․25전쟁 영웅이고 (51쪽) 전략 전술에 능한 장군입니다.”
총장은 내 말을 받자마자 손을 흔들며,
“아니야, 채 장군이 잘 할거야. 대통령 각하 의중도 아마 채 장군이 틀림없을 거요. 사양 말고 맡아 주오.”
하고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사양하는 것이 상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굳혔다.
“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한국군의 명예를 고양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날 나는 주월한국군사령관 겸 맹호사단장에 내정되었다.
이제 새 인생의 항로에 서게 되었다고 다짐을 하면서 총장실을 나왔다. 밖에 나와 보니 이미 내가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 결정되었다는 소문이 확 퍼져 있었다.
(51쪽) 한국군 작전지휘권 문제, 전투부대 월남 파병이 결정되자 국방부는 합동참모본부 안에 월남에 대한 군사지원을 전담하는 잠정기구로 기획단을 설치하였다.
〈월남지원을 위한 국군부대 증파에 관한 동의 : 합작작 952(1965. 7. 12)로 요청한 월남지원을 위한 국군부대 증파에 관하여 1965. 8. 13. 제52회국회 제11차본회의 에서 원안대로 동의하였으므로 이를 통지합니다.〉
(51쪽) 1965년 8월 19일에 연락장교단을 월남에 파견하였다. 8월 19일 도착한 이들은 다음날 월남군 합동참모본부 참모장 비엔(Vien)장군을 만나고, 이어서 오후에 미군사령관 (52쪽) 웨스트모얼랜드 장군과 참모장 라슨 장군 그리고 관계 참모들을 만났다.
이어 미군측으로부터 전반적인 현황설명을 들었는데, 마지막 순서에서 파월 한국군이 미군사령관 휘하에 예속부대로 되어있는 기구도를 보이며 설명하는 것이었다. 연락장교단은 그 문제를 지적하고 이의를 제기하자, 미군은 확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과 시안에 불과하다는 대답을 했다.
그때까지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 문제가 완전히 해결이 안 된 상태였다. 심지어 한국의 합참 작전국장인 손희선 소장은, 미군과의 회의에서 "한국군이 미군사령관의 지휘를 받는 것은 영광"이라는 발언을 한 사실이 있어, 그것을 빌미로 미군사령부 일각에서는 한국군이 마치 자기들의 예하부대로 간주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한국군 전투부대가 도착도 하기 전에 이런 일이 있었지만, 연락장교단은 지휘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미결로 남긴 채 계속 절충만 하고 있었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은 작전지휘권 문제에 대해 이미 브라운 미국 대사에게 한국에서처럼 미군사령관의 작전지휘하에 두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말해 버렸기 때문에, 미군 고위층에서 월남에서의 한국군 작전지휘권이 미군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나는 이런 정황을 파악하고 이 문제만은 꼭 해결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왜냐하면 파병 반대의 목소리 가운데 미국의 청부전쟁 또는 용병이라는 비난이 빗발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우리 한국군은 미군을 위해 파병하는 것이 아니고 자유월남을 위해 파병하는 것이고, 한국에서는 한국 방위를 미국에 의지하고 (53쪽) 있기 때문에 미군 작전통제하에 있지만, 월남에서는 미군 지휘하에 있어야 할 명분이 없다고 판단했다. 만일 월남에서 미군 작전지휘하에 한국군이 작전에 임한다면 일각에서 청부전쟁 또는 미군의 용병이라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 문제는 매우 심각했다.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작전지휘권은 우리가 가져야 한다는 확고한 목표를 세우고, 먼저 박정희 대통령의 생각부터 바꿔야 된다고 마음을 굳혔다.
주월한국군사령관과 맹호사단장으로 보직이 정해진 다음 청와대 박정희 대통령과 다시 단독 대담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굳게 다짐하며 이번에야말로 대통령의 생각을 바꿔야 되겠다고 별렸다.
대통령은 반갑게 나를 맞아 주었다.
"오, 채명신 주월군사령관 어서 오시오."
나는 절도 있는 거수경례로 답했다.
"각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 싸워 이기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래 그래, 잘 싸워야지"
대통령과 나는 자리에 앉았다. 앉기가 무섭게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각하, 제가 듣기에는 브라운 미국 대사에게 이번에 파견되는 주월한국군의 작전지휘를 미군사령관에게 일임한다고 말했다는데 사실입니까?"
대통령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그래, 한국에서처럼 미군과 협조도 잘 될 것이고 미군의 적절한 지원 받기에도 원활할 것이고. 그게 어째서?"
(54쪽) 오히려 의하하다는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안 됩니다. 각하, 작전지휘권은 반드시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안 된다니…. 왜”
대통령은 긴장한 빛을 띠며 내 말에 수긍이 안 간다는듯 다시 말을 이었다.
"한미 동맹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며 한국의 안보와 우의를 위해서도 미군 지휘하에 있는 편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해"
나는 대통령을 똑바로 보면서 더 강력한 어조로 말했다.
"각하, 이번 파병은 월남공화국 요청에 의해 대한민국 국군이 파견되는 형식이 아닙니까?"
"그렇지 그게 뭐"
"주권국가의 군대로 파견되는데 왜 미군의 지휘를 받습니까. 지금 야당을 비롯하여 반대론자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습니까. 미국의 청부전쟁이니, 미국의 용병이니 하며 떠들어대고 있잖습니까. 왜 우리가 외국에 나가 피 흘려 싸우며 용병이라는 누명을 써야합니까"
대통령은 얼굴빛을 달리하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리고는 화난 목소리로.
"불평분자들의 말을 귀 담아 들을 필요가 있겠는가?"
탁자까지 치면서 화를 냈다. 손가락에 끼었던 담배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심 뜻밖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다시 마음을 다졌다.
"각하, 만약 한국군이 미군 지휘하에서 작전을 한다면 미군들이 힘든 곳, 어려운 국면에 한국군을 투입할 것은 뻔한 일입니다. 매우 어려운 전쟁, 불확실한 전장에서 계속되는 패전으로 많은 희생자가 생긴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국민에게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마 비판자들은 미국의 청부전쟁에 말려들어 저꼴이 되었다고 정치공세로 나오지 않겠습니까?"
대통령은 화난 얼굴을 풀지는 않았지만, 처음 보다는 누그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나더러 어찌란 말이야."
"브라운 대사에게 말한 것은 그저 사적 대담이고 곰곰이 생각하니 월남에서는 독자 지휘권을 갖되 상호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하면 잘 될 것이라고만 말씀하시면 됩니다. 미국과 정식 조약을 맺은 것도 아니고, 지금부터라도 미국 당국자들에게 그리고 국방장관이나 참모총장에게 내 의중이 그렇다는 것만 밝히면 될 것입니다. 나머지는 저에게 맡기십시오"
"알았어"
결론은 결정되었다. 대통령이 한국군 독자 작전지휘권을 결심한 이상 이제 공은 내게로 넘어 왔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은 그날로 국방장관에게 그리고 비서진에게 한국군 작전지휘권에 대한 생각을 알림으로써 그 문제는 새 국면을 맞았다.
국방부는 월남에 파견된 연락장교단에 대통령의 의중을 통보하였고, 연락장교단은 더욱 강력히 한국군의 작전지휘권 확보를 위해 교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미군측의 생각은 우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미군사령관 웨스트모얼랜드 장군과 특히 참모장 라슨 장군은 "한국군의 통제권은 (56쪽) 마땅히 미군에 예속시켜야 된다"라고 집요하게 양보의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개략적인 약정에 '한국군에 대한 지휘통제는 파월 한국군사령관에게 있다'라는 외교적 수사로써만 합의를 이루었을 뿐이었다. 엄밀히 분석한다면 한국군이라는 큰 덩치는 미군 지휘하에 두고 그 소속부대는 한국군사령관이 지휘통제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한국군과 미군과의 관계와 사실상 다름이 없는 약정이었다.
따라서 확실한 지휘권 문제의 해결은 한국군과 미군 야전사령관에게 일임되는 것으로 암시함으로써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대통령이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독자적으로 갖겠다는 의지로 굳혔기 때문에 이 문제는 주월한국군사령관인 내가 풀어야 할 과제로 월남까지 짊어지고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베트남전쟁의 특성과 연합작전 채명신(1)박대통령의 월남전에 대한 견해와 월남전의 실상
1964년 말 2,000명 규모의 비둘기부대(건설지원단) 파월에 대한 국내 ․ 외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을 무렵, 나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보직 명령을 받았다. 그후 업무보고차 청와대를 방문하는 육군참모총장 김용배 대장을 수행하여 박정희 대통령께 인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대통령께서 “채 장군과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여 대통령과 대담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채 장군! 한국군이 월남(남베트남)에 가면 잘 싸울 수 있을 거야. 어떻게 생각 해?”
“각하 무슨 근거로 그렇게 낙관적인 전망을 하십니까?”
“그렇지 않아? 지난날의 6 ․ 25전쟁 경험에다 교육훈련도 잘 되어 있고, 반공정신도 강하고, 사기도 좋지 않은가?”
“각하의 말씀은 다 옳습니다. 그러나 월남전(베트남전)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에 대해서는 저는 정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아니 채 장군의 그런 대답은 정말 뜻밖이군. 어째서 그래?”
대통령은 당황하면서도 불쾌한 표정이었다.
“각하! 2차대전이 끝나자, 5년여 동안 인도지나를 점령했던 일본군이 물러갈 때 그들 무기의 일부를 취득한 공산월맹(북베트남)이 독립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산월맹은 일본군 점령하에도 비밀조직을 통해 세력을 확대하며 소극적인 투쟁을 해왔지만, 일본군 철수 후 대규모 무장 세력으로 조직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의 대부대가 지난날의 식민지였던 인도지나 반도에 진주하자, 인도지나반도 전역에서 본격적인 무장투쟁이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공산월맹은 전 국토, 모든 도시와 촌락을 무력투쟁을 위한 전투기지로 만들면서 주민들을 조직하고 훈련시키며, 격렬한 게릴라전식 투쟁을 전국적으로 확대해 나갔습니다.”
“이에 따라 8년 동안의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었으며, 프랑스군이 마지막 거점인 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에서 항복함으로써 전쟁은 월맹의 승리로 끝나고, 1954년 제네바협정에서 17도선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공산월맹으로, 남쪽은 자유월남공화국으로 양분(兩分)되지 않았습니까?
“이때 월맹의 지도자 호치민(Ho Chi Minh)은 17도선 이북으로 철수하면서 많은 무기와 탄약, 그리고 정예 병력 상당수를 남쪽에 잔치(殘置)하여 계속 투쟁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그 후 17도선 이남에는 미국이 후원하는 고 딘 디엠(Ngo Dinh Diem)대통령의 정권이 들어서서 철저한 반공정책으로 공산조직 탄압하자, 공산세력은 일시적으로 지하로 숨어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 딘 디엠 정권의 족벌정치와 부패에 대해 국민들의 불만과 반항이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더욱이 가톨릭 신자인 대통령과 소수 권력층에 대해 국민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불교도들은 종교적인 불만과 반항을 격화시키고, 이 같은 불교도들의 반정부 투쟁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적인 정치적, 사회적 혼란 속에서 1963년 11월, 두 옹 반민(Duong Van Minh) 장군을 지도자로 하는 군사쿠데타에 의해 디엠 정권이 무너지고, 디엠 대통령 형제는 암살 당했습니다.
“미국은 디엠 정권 수립부터 막대한 원조를 제공하였으나, 미국과 디엠 정권간의 마찰과 갈등이 심화된 가운데 군사쿠데타를 맞았는데, 미국은 새로운 군사정권에 대해 군사 및 경제 원조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군사지도자들 간에 권력싸움이 시작되어 군사쿠데타가 반복되면서, 정치․사회․경제적 불안과 혼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세력 확장을 위해 지하에서 꾸준히 조직을 강화해 온 공산주의자(베트공)들이 본격적이고, 조직적인 게릴라전에 의한 투쟁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964년 8월 2일과 4일, 공해상에서 공산월맹의 함정이 미 해군함정을 공격한데 이어, 지상에서는 베트공들이 미군 고문관의 숙소와 기지 등을 습격하여 많은 미국인들을 살해하고, 시설들을 파괴하는 격렬한 투쟁 상황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그 동안의 월남정세를 요약보고 드렸습니다만, 현재 월남에서 투쟁하는 베트공들은 강력한 프랑스군을 격파하여 승리하였고, 디엠 정권과 그 뒤를 이은 군사정권의 월남공화국 군대와 성공적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베트공들은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월남의 모든 마을과 산야를 게릴라전을 위한 전투기지로 만들고, 20년 가까운 게릴라전의 실전 경험을 통해 세계 최강의 게릴라부대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베트공들의 또 다른 강점은 월맹대통령 호치민이 ‘반프랑스(反佛)독립투쟁의 영웅이며, 애국자’라는 강한 인식이 남․북 월남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투쟁이 반식민지 독립투쟁의 숭고한 목적달성에 있다’는 신념에 불타고 있어 투지와 인내력과 필승의 신념을 갖춘 정신적 강점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울러 캄보디아, 라오스 등의 성역지대를 통해 월맹의 지원을 계속 받을 수 있는 지원 루트 등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최강의 무기나 물질적 우위, 또는 군대의 규모 등 군사력의 우위만으로 쉽게 승패를 가릴 수 없는 형태의 전쟁이 월남전쟁입니다.”
“그럼 미군도 힘들겠구먼!”
“그렇습니다. 미국은 남․북 월남 전 국토를 쑥밭으로 만들 수 있고, 남․북의 모든 월남인들을 몰살시킬 수 있는 엄청난 군사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제적인 여론을 감안할 때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입장이고, 그와 같은 협박으로 쉽게 항복할 것이라곤 기대할 수도 없는 실정이 아니겠습니까?
“소련과 중공이 강력히 지원하고 있고 공산진영과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中南美)의 비동맹국가 그룹은 반미(反美)와 친공(親共) 색채가 매우 강한 나라들이 아닙니까? 남․북 월남 내부와 국제정세도 월남전을 둘러싼 매우 미묘한 입장 차이에서 오는 갈등 등으로 복잡한 전쟁이 아닙니까?”
“그러면 ‘한국군이 월남전에서 잘 싸울 자신이 있다’는 내 생각이 과욕일까?”
“…….”
“채 장군의 말대로라면 전투부대 참전은 힘들겠구먼!”
박 대통령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각하! 좀 더 상황 진전을 지켜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비둘기부대 파견까지는 무난하며 명분도 뚜렸하고, 성공할 자신도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앞으로 미군 전투부대가 월남전에 투입되고, 전쟁이 더 확대되어 ‘한국의 2개 미군 사단을 월남으로 이동시켜야겠다’고 한다면, 이는 우리 안보에 결정적인 치명타가 될 것이며, 제2의 6․25는 너무도 자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때 가셔서 판단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박대통령은 이어서,
“나도 바로 그 점을 크게 우려하고 있는데, 걱정이야! 김일성이가 자신만만하고 의기양양하게, ‘우리가 밀고 내려가면 잃는 것은 휴전선이요, 얻는 것은 조국통일이다!’라고 떠들어 대고 있는데 말야!” 박대통령의 고민과 우려는 바로 그 점에 있었다.〉
〈(35~39쪽) (1) 문제의 배경
1965년 7월, 주월한국군사령부와 맹호부대가 홍천에서 파월을 위한 편성과 교육훈련에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중 육본에 들렸다가 박대통령이 부른신다고 해서 청와대로 달려갔다. 대통령은 나를 무척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그 동안의 진행사항을 보고하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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