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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망의 동산 원문보기 글쓴이: 끄싱개
우리의 참 가족
마태복음 12장 46~50절
설 교 : 2014년 5월 18일 주일예배(새세움교회)
찬 송 : 41장(내 영혼아 주 찬양하여라). 43장(즐겁게 안식할 날).
557장(에덴의 동산처럼). 558장(미더워라 주의 가정).
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에게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닝다 하니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어떤 교회에서 황장로님이라는 분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시던 분이셨는데 이 땅에서는 못 뵌다고 생각하니 목사님과 성도들이 마음이 쓸쓸했습니다.
장로님의 장례식장에서입니다. 고인과 오래도록 친분을 나누셨던 변장로님께서 그 시신을 어루만지시며 마치 살아있는 친구에게 하듯 다정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황장로야, 황장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잘 믿고 갔어. 하늘의 상급이 클 거야. 이 땅의 일들은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의 품으로 잘 가시게. 나도 뒤따라 갈 거야.”
그 모습을 바라보던 목사님의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두 장로님은 예수 안에서 한 형제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실향민이신 두 분은 기쁨을 나누고, 슬픔을 나누며 외로움을 달랬습니다.
우리 교우들의 관계가 이렇게 된다면 자식이 하나이면 어떻고 둘이면 어떻겠습니까? 내 슬픔과 기쁨을 함께 해주는 믿음의 벗들이 있다면 형제가 많지 않기로 어떻겠습니까?
오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합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들어 있는 오월은 가정의 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5월이면 좋은 가정을 꾸미기 위해 노력하고, 화목한 가정을 위해 여러 종류의 세미나를 엽니다. 이처럼 따뜻한 교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도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참 가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참 가족이란?
1. 교회의 회원이 참 가족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골육이 있었습니다. 양친과 여섯 이상의 형제들입니다. 그들은 같은 성(性)을 사용하는 가족들로서 혈통은 유다지파였고, 양친 모두가 다윗의 족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형제 모두가 같은 호적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다른 우애가 있었을 것입니다. 가족들이었기에 사랑했고 좋아했을 것입니다. 가족은 이처럼 허물도, 미움도 없는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인간의 관계에는 나름대로 이해관계가 있지만 가족은 이해관계가 없습니다. 그냥 좋아하는 관계입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이름 아래 함께 모인 가족입니다. 새세움 성(性)을 가진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일이면 교회로 나옵니다. 여러 프로그램을 함께 하고 즐거움을 함께 합니다.
교회 안에서 함께 성찬을 나눕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면 식사를 함께 하기도 합니다. 교인 명부에 우리 이름이 올려져 있고, 교회가 어떤 결정을 할 때 참여해 권리를 행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한 회원이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같은 성찬(聖餐)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난 사람의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는 고아가 많습니다. 교회는 가정이 아니라 고아원이 되고 있습니다.
목사는 고아원 원장이 되었습니다. 3백 명이 모이는 고아원, 수 천 명이 모이는 고아원, 아무리 교인수가 많고, ㅇㅇ예배당이라는 간판을 걸어도 교인들이 거듭나지 못하면 그것은 고아원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 안에서 한 가족이 되고, 교회가 가정이 되려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예수의 피로 세우신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스위스의 폴 투루니에는 결혼이 3단계의 주기를 거친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밀월의 단계입니다. 이 기간에는 부부간의 사랑과 신뢰로 일심동체가 됩니다. 서로의 감정이 하나가 됩니다.
그러다가 2, 3년이 지나면서 현실 직면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이때는 정서적 이혼 상태가 됩니다. 소위 한 지붕에 두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말이 부부요, 한 가족이지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한 집에서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셋째 단계는 체념의 단계, 이 단계에서는 여러 유형으로 나타납니다.
체념형입니다. − “다른 도리가 없지 않는가?”
체면형이 있습니다. − “남이 부끄러워서라도 살아야지.”
책임형이 있습니다. − “자식을 위해 십자가를 져야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교회에 등록했을 때는 좋은 교회를 만났다며 좋아합니다. 그러다가 무슨 일로 시험을 당하거니 남․여전도회장을 하고 나면 교회와 간격이 벌어집니다. 걸핏하면 “교회 옮겨봐?” 합니다. 그러다가 체면 때문에, 남편과 아이들 때문에, 내가 맡은 일 때문에 눌려 앉습니다. 교회에 대한 애정은 이미 식어버린 상태입니다.
이런 교회 생활은 정말 불행한 것입니다. 우리는 한 가족으로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생활을 잘 하는 비결은 시험받을 일을 스스로 피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첫 사랑을 잃어버리면 회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2. 영적인 가족이 참 가족입니다.
예수님은 30여 년 동안 육신의 가족들과 함께 하시다 선교사역에 들어갔습니다.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했고, 이적과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악의적인 소문이 나타나자 형제들은 예수님을 붙들러 나왔습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요 7:5). 같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왔는데 형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가 이 모양이 아닙니까? 서로의 아픔을 숨겨주지 못하는 곳이 아닙니까? 누가 특이한 행동만 해도 수군거리고, 말거리가 되지 않습니까? 교회는 숨겨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편안하고 아늑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진장을 조성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과 육신적으로는 함께 했지만 영적으로는 참 가족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계시는 예수님에게 형제들이 왔다는 소식을 들고 함께 있는 제자들을 가리키며 “이들이 바로 나의 모친이며 동생들이다”(마 12:50)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적인 관계보다 영적인 관계를 중요시 했습니다.
교회는 종교클럽이 아닙니다. 교회는 건물만이 아닌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한 교회에 등록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차원의 가족에서 한층 더 깊은 형제자매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머리는 항상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우가 좌우에 함께 서 있는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의 허물과 실수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자기 자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눈길로 서로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가족입니다.
양은 같은 쪽, 목자들에게 머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잘 이룹니다. 서로 나란히 걷고, 나란히 풀을 뜯어 먹습니다. 추우면 서로를 껴안고, 무서우면 매에 매에 소리를 내어 서로를 격려합니다.
염소는 다릅니다. 염소들은 서로를 향해 있습니다. 항상 들이받고, 으르렁 거립니다. 서로가 제일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염소들의 뿔은 꺾어지고, 뿔로 서로에게 상처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서로 하나가 된 형제자매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원수지간을 풀고, 화목케 하시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화목케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효도하는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3.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참 가족입니다.
예수님은 둘러앉은 자들을 보고 내 모친, 내 형제라 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그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육신의 가족과 이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렸습니다. 세상의 즐거움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진정한 즐거움은 서로에게 있었습니다. 서로에게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들은 정말 즐거움이 없는 사람들이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교회는 따뜻한 가족이 돼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갈수록 “친정”이 아니라 “시집”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가족적인 교회를 만들어 가는 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새세움교회, 즉 교회 새로 세움입니다.
교회는 부부 관계와 같습니다. 부부간에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남편이 듣기 싫어하는 말음 “당신이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있어요?”. 아내가 듣기 싫어하는 말은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기나 해!”라고 합니다.
남편이 싫어하는 말 순위는 “당신에 집안이 다 그렇지 뭐”, “정말 지겨워 못살겠다.”, “동네 창피해서 못 살겠다.”, “돈도 제대로 못 벌어다 주면서 왜 큰소리쳐요?”, “허풍 좀 그만 떨어요!”, “옆집 아무개 아빠 좀 봐요.”라고 합니다.
다음은 아내가 싫어하는 말 순위인데, “됐어요, 벌써 포기한지 오래요.”, “다른 여자들 하는 거 좀 봐!”, “제발 주제파악 좀 하고 살아!”, “당신도 돈 벌어봐!”, “하루 종일 집안에서 뭐해, 좀 치우지 않고!”, 거울 좀 봐라“ 라고 합니다.
이런 관계는 상당히 육신적은 부부관계로 타락되어 가는 가정입니다. 부부간에 진정한 사랑을 이루지 못 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부부, 사랑스런 부부간에는 어떤 언어들이 많아 나와야 할까요?
어려운 시대에 남편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은 어떤 것일까요?
“여보 사랑해”, “다시 태어나도 당신밖에 없어요.”, “당신만 믿어요.”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아내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여보 사랑해”, “당신 갈수록 멋있어”, “당신 안 만났으면 나 큰일 났을 거야.”, “당신 음식 솜씨가 일품이야.”
오늘부터 여러분도 당장 사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일 아침의 식탁이 변할 것이고, 사랑 받는 아내․남편들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참 가족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들은 친척을 넘어서서 한 혈통이었습니다.
순교자 중의 한 사람이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친척은 성도이다”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순교할 정도이니 얼마나 외롭게 신앙생활을 했겠습니까? 부모님께 버림을 받고, 형제들과 정이 끊기고, 친척들 간의 교류도 단절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서로가 유일한 친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신가정에서 혼자 신앙생활을 하며 목사님이 되어 목회를 하는 분이 말하기를 부모형제와 살아온 세월보다는 교우들과 살아온 세월이 더 많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부모들의 따뜻한 사랑, 친척들의 따뜻한 정보다는 교인들이 베풀어준 은혜가 많고, 위로가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가 기쁠 때, 그의 졸업식장에는 언제나 교인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교인들은 부모보다 더 나를 위로했고, 격려했고, 힘이 되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에게야말로 교인들이 진정한 가족이요 친척이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대형화되어 가면서 경쟁체제로 돌입했습니다. 교인들 간에 협동과 사랑보다는 시기와 질투가, 이웃교회 간에는 교인들 뺏기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큰 교회는 더 큰 교회가 되기 위해 대형 버스로 교인들을 실어 나릅니다. 작은 교회는 큰 교회의 행위를 비난하기 바쁩니다.
교회는 자꾸 기능화 합니다. 유능한 사람, 배운 사람, 가진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행세를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아닙니다. 사도들이 꿈꾸었던 예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가족입니다. 서로에게 좋은 가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교인들 간에 우선적으로 사랑의 관계로, 한 형제의 사랑으로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묘지에서 장례식이 마쳐 가는 중이었습니다. 50년 동안 함께 살아온 아내를 떠나보내는 78세의 할아버지, 갑자기 관 위에 엎어지며 울부짖었습니다.
“여보, 난 정말 당신을 사랑했소.”
“아비지 진정하세요.”
자녀들이 아버지를 위로했지만 노인은 취토를 거부하며 동일한 말만 고백하는 것입니다. 장례식은 모두 끝났지만 노인은 돌아가지 않겠다고 거절했습니다. 장례식을 집례란 목사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습니다.
“선생님의 슬픔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노인은 비통한 어조로 울먹였습니다.
“난 정말 아내를 사랑했소. 당신은 나를 이해 못 할 것이오.”
그러고 나서 목사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난 그 말을 함 번도 못했단 말이오.”
어느 인류학자는,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을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이상한 동물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 가족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합시다.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갑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가 전정으로 한 가족이 되는 은총을 내리시기 소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