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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 全國의 風景돌아보기, 江原地方 江陵大都護府 官衙, 神福寺址-崛山寺址
*江陵大都護府 官衙 -史蹟 제388호
江陵郵遞局의 뒤쪽에 있으며, 高麗~朝鮮時代에 걸쳐 中央의 官吏들이 江陵에 내려오면 머물던 건물터이다.
朝鮮時代記錄에 高麗 太祖 19년(936) 建立한 83칸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客舍門(국보 51호)만 남아 있으며,
고려시대 建築物 가운데 現存하는 몇 안되는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1993년 江陵市廳 건물건축계획으로 실시한
發掘∙調査에서 高麗·朝鮮의 官衙建物터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는 자리로 알게 되었다.
조선시대 <臨瀛誌>의 기록으로 이 유적의 중요성과 옛 江陵府의 歷史와 文化를 알려주는 重要한 遺蹟으로 평가받고
있다. 몇 차례 補修했으며, 日帝强占期에는 학교건물로 이용하기도 하고, 학교가 헐린 뒤 1967년 江陵警察署가
들어서게 되고 현재는 마당에 客舍門만 남아 있다. 南山의 五星亭, 南大川옆 月花亭, 鏡浦의 放海亭은 客舍의 일부를
옮겨 지은 것이다 원래 명칭은 ‘江陵臨瀛館’이었으나 2014년 ‘江陵大都護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掘: 팔 굴 *衙: 마을 아 *瀛: 바다 영)
2013.04.09에 찍은 사진을 올린다.
(01) 江陵大都護府 官衙 前景 -史蹟 제388호-
왼쪽부터 殿大廳-中大廳-臨瀛館 三門이다.
(02) 江陵大都護府 官衙 石築담장
(03) 江陵 臨瀛館 三門 -국보 제51호
高麗時代 江陵客舍의 正門으로, 客舍建物은 없어지고 門만 남아 있다. 客舍는 高麗∙朝鮮時代 각 고을에 두었던
地方官衙의 하나로 王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 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宮闕을 향해 절하는 望闕禮를 했으며,
王이 파견한 中央官吏나 使臣들이 묵기도 했다. 高麗 太祖 19년(936) 83칸의 건물을 짓고 臨瀛館이라고 했으며,
문은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柱心包樣式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앞면 3칸에는 커다란 널판문을 달았으며,
배흘림 기둥에, 簡潔하고 소박하지만 細部建築材料에서 보이는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려시대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04) 江陵 臨瀛館, 왼쪽에서부터 西軒-殿大廳-中大廳
高麗 太祖 19년(936) 創建되어 朝鮮時代까지 여러차례 重創∙重修되었으나 日帝强占期에 撤去되어 2006년에 復元했다.
(05) 江陵 臨瀛館 展大廳
客舍의 正廳인 臨瀛館의 중심 건물이며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左右 西軒과 東大廳보다 지붕이 한段 높으며
王의 殿牌를 모셔 두고 儀禮를 거행하던 장소이다.
(06) [臨瀛館] -展大廳의 扁額
高麗 恭愍王이 1366년 洛山寺에 後嗣를 빌러 가다 비에 막혀 江陵에 머물 때 쓴 御筆로, 臨瀛館建物을 철거할 때
客舍門(臨瀛館 三門)에 걸었다가 臨瀛館을 復元하면서 展大廳에 옮겨 걸었다. (*嗣: 이을 사)
(07) 望闕行禮 儀式
外職(地方職)에 근무하는 官員이 직접 王을 뵙지 못할 때 殿牌와 闕牌를 만들어 모시고 宮闕을 향해 禮를 올리는
儀式이다. (*牌: 패 패)
江陵官衙
江陵官衙강는 高麗末에 設置되어 朝鮮末期에 폐지된 江陵大都護府의 行政官廳이 있던 곳으로 官衙는 官署∙官司∙
官廳 등으로도 부르며 地方에 파견된 牧民官이 執務하던 곳이다. 江陵官衙는 여러차례 重修해 朝鮮末까지
유지되었으나 日帝强占期에 대부분 철거되어 江陵臨瀛館 三門과 七事堂만 남았다가 2006년 臨瀛館, 2012년 衙門,
東軒, 別堂, 倚雲樓 등을 復元했다.
(08) 江陵官衙 衙門
(09) 江陵官衙 東軒
地方首領이 駐在하는 官廳의 本建物로 一般行政業務와 裁判 등을 행하던 곳으로 官衙의 행정업무 중심건물인
政廳이다.
(10) 棍杖과 곤장틀 (*棍: 곤장 곤 *杖: 몽둥이 장)
棍杖은 朝鮮時代 刑罰 중에서 杖刑에 속하는 罪人을 다스리는데 쓰던 刑具이다.
(11) 倚雲樓, 江陵官衙에 있던 樓閣 (*倚: 의지할 의)
(12) 敬慕齋 全景
오른쪽 敬慕齋 建物은 江陵 金氏 副正公派 堀山公 齋室로, 원래는 1811년 江陵 神福寺 50m 앞에 건립했으나
老朽되어 2009년 4월 건립했다. (*堀: 굴 굴)
(13) 七事堂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호
朝鮮時代에 7가지 公務(戶籍·農事·兵務·敎育·稅金·裁判·風俗)를 보던 官廳建物이다. 처음 建立年代는 확실하지 않으나
朝鮮 仁祖 10년(1632) 再建하고, 英祖 2년(1726) 크게 擴張했다. 高宗 3년(1866)에는 鎭衛隊의 廳舍로 쓰였으나
燒失되어 府使 趙命夏가 이듬해에 再建했다. 日帝强占期부터 1958년까지 郡守나 市長의 官舍로 사용하다가
1980년 옛 모습을 되찾았다. 앞면 7칸·옆면 3칸의 팔작지붕 ㄱ字形 構造로, 本建物보다 높은 樓마루와 연결부분에는
다락방을 두고, 본 건물 왼쪽 1칸에는 온돌방을 설치했다.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를 두고 온돌방과 툇마루를 좌우에
두어 대청마루와 연결시켰다. 七事堂은 전체적으로 뒤의 山勢와 調和를 이루고 있는 건물이다.
(14) 은행나무 保護樹 -강원 강릉 1호
七事堂 境內에 있는 樹齡 560년, 높이 12m, 胸高둘레 3.2m, 나무 폭 12m이다.
江陵 神福寺址
江陵市 內谷洞에 있는, 統一新羅時代 梵日國師가 創建한 것으로 전하며, 創建과 관련된 說話가 전한다.
新羅의 한 處女가 우물에 비친 햇빛을 보고 그 물을 마셨는데 곧 아이를 배어 낳게 되었다. 집안사람들이 아이를
내다버렸으나, 아이의 주위로 빛이 맴돌아 怪異하게 여겨 다시 데려와 길렀는데, 그 이름을 ‘梵’이라고 했 다.
梵이 出家해 僧侶가 된 후 고향에 돌아와 神福寺와 掘山寺를 創建했다고 한다. 神福寺의 절터는 三層石塔을
기준으로 뒤에 金堂趾, 양쪽 옆에는 回廊趾가 있는 전형적인 高麗時代의 配置樣式이다. 절터에는 寶物로 지정된
三層石塔과 石造菩薩坐像이 있으며, ‘神福’, ‘神福寺’라고 새긴 기와조각이 出土되고 있다. (*掘: 팔 굴)
(01) 江陵 神福寺址 石佛坐像과 三層石塔
(02) 江陵 神福寺址 石造菩薩坐像 -보물 제84호
江陵 神福寺址 三層石塔(보물 제87호)을 향해 供養하고 있는 모습의 菩薩像으로, 왼쪽 다리를
세우고 오른쪽 다리를 꿇어 앉은 자세를 하고 있으며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무엇인가를 잡고
있는 모습이다. 圓筒形의 높다란 冠을 쓰고 있는 얼굴은 豊滿하며 滿面에 웃음을 띠고 있어
福스럽게 보인다. 관 머리카락은 어깨너머로 길게 늘어져 있으며, 옷자락은 몸의 屈曲을 따라
자연스럽게표현해 菩薩像의 寫實性을 더해준다. 팔찌, 목걸이, 옷주름은 굵은 띠처럼 描寫했으며,
전체적으로 둥글고 鈍重한 彫刻手法을 보이는데. 이는 平昌 月精寺 八角九層石塔(국보 48호) 앞의
供養菩薩像과 類似한 것으로 같은 地方系列의 특징으로 보인다. 規則的인 間隔의 옷주름, 단순해진
裝身具, 臺座의 彫刻手法 등에서 화려한 新羅的 要素가 사라지고 高麗初期의 鈍化된 表現樣式이
나타나고 있다. (*隔: 사이 뜰 격)
(03) 江陵 神福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87호
神福寺의 옛 터에 남아있는 높이 4.55m의 花崗石 3層石塔으로, 2층의 基壇을 쌓고 3층의
塔身을 올린 것으로, 각 부분의 모습들이 特異하다. 바닥돌의 윗면에는 연꽃이 엎드려 있는 듯한
모양의 조각으로 둘렀고, 아래층 기단의 4면에는 眼象을 3개씩 새겨 넣었다. 塔身 各層의 몸돌과
지붕돌은 하나의 돌로 새겨 얹었다. 塔身에는 부처의 舍利나 佛經 등을 모셔 두는데, 1층의 몸돌에
이를 安置하는 방인 龕室모양의 조각이 있다. 1층의 몸돌에 비해 2·3층의 몸돌은 갑자기 크기가
줄어들어 매우 얇다. 지붕돌도 얇아 귀퉁이 끝은 치켜 올림이 희미하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 수는
3단이다. 드물게 머리장식이 온전히 남아있는데, 각 부분의 높이에 비해 폭이 넓어 安定感을 준다.
탑 앞쪽에는 한 쪽 무릎을 세우고, 두 손을 들고 있는 石造菩薩坐像(보물 제84호)이 있는데, 이런
모습은 平昌 月精寺 八角九層石塔(국보 48호)과 비슷해 江原道地方의 특색이 아닐까 짐작된다.
塔의 基壇과 몸돌 밑의 널돌 괴임과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3단으로 되어있는 점은 高麗前期의
石塔樣式을 따르고 있다. (*龕: 감실 감)
江陵 崛山寺址 -사적 제448호
굴산사지는 江陵市 邱井面 鶴山里 윗골마을에 있는 면적 66,698㎡의 절터이다. 崛山寺는 新羅 文聖王 13년(851)
梵日國師가 창건한 寺刹로, 우리나라 九山禪門 중의 하나인 闍崛山門의 中心寺刹이었다. 高麗時代에 地方豪族들의
支援으로 번성한 후 朝鮮時代 文獻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朝鮮初 이후에는 廢寺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굴산사지당간지주(보물 제86호), 범일국사의 것으로 推定되는
崛山寺址 僧塔(보물 제85호), 江陵 崛山寺址 石佛坐像(강원도문화재자료 제38호) 등이 남아있어 당시 崛山寺의
規模를 짐작할 수 있다. 掘山寺址 一帶는 周邊이 農耕地로 변해 정확한 寺域範圍를 알 수 없었으나, 2002년
颱風 ‘루사’의 水害로 緊急發掘調査해, 크기는 東西 140m, 南北 250m로 확인되었다. 또한 土層은 3개층의
文化層이 확인되었는데, 1·2文化層은 流失되고 3문화층은 남아있는 부분이 많이 확인되었으며, 法堂址·僧房址·
回廊址·塔址 등도 확인되었다. (*闍: 사리 사 *崛: 우뚝 솟을 굴 *豪: 호걸 호)
(04) 崛山寺址
멀리 白頭大幹(太白山脈)稜은 白雪이 덮여 있다.
(05) 石泉. 江陵端午祭의 主神 梵日國師를 孕胎하게 한 우물.
良家집 處女가 바가지에 샘물을 뜨니 해가 계속 떠 그 물을 마셨더니 姙娠해 14개월 후에 사내아이를 出産하니
그가 곧 梵日國師라고 전한다. -三國遺事 祖堂集
(06) 소나무 保護樹 -江原 江陵 11호
江陵 邱井面 鶴山里 崛山寺址의 浮屠(江陵 崛山寺址 僧塔) 앞에 있는 堂山木으로, 樹齡 540년, 樹高 10m,
胸高直徑 3.12m, 樹冠直徑 12m이다.
*堂山木: 마을의 守護神으로 모시며 祭祀지내는 나무
(07) 江陵 崛山寺址 僧塔 -보물 제85호
崛山寺址 僧塔은 高麗時代 掘山寺를 세운 梵日國師의 舍利를 모신 僧塔으로 推定하고 있다.
掘山寺터의 위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모든 部材가 8角을 기본으로 造成되고 부분적으로는
변화된 手法을 보인다. 舍利를 모시는 塔身을 중심으로 아래는 받침부분이, 위는 지붕돌과
꼭대기장식이 놓였다. 2단의 8각 基壇 중간 받침돌에는 각 면에 天上사람이 樂器를 연주하는
모습을 새겼는데 8具 모두 서로 다른 樂器를 演奏하고 있다. 몸체는 8角의 낮은 塔身과
지붕의 경사가 급한 지붕돌로 이루어지는데, 지붕돌 처마끝의 치켜 올림이 없어 밋밋하다.
(08) [鶴山] 標石. 1991년 11월 건립
溟州鶴山 오독떼기/(江原)無形文化財 第五號
梵日國師 誕辰地/(重要)無形文化財 第十三號/江陵端午祭 守護神
* ( )부분이 省略되어 헷갈리는데 원래는 아래와 같다.
*江陵鶴山오독떼기(江原無形文化財 第五號): 강릉 일대에 전해오는 農業勞動謠.
오독떼기는 농사지으면서 피로를 잊고 능률을 올리기 위해 부르는 農謠로 ‘들노래’,
‘농사짓기’소리라고도 한다. 土俗民謠의 하나인 오독떼기는 地方에 따라 노래가 달라질 수 있다.
*江陵端午祭 -國家無形文化財 제13호
端午는 陰曆 5월 5일로 ‘높은 날’ 또는 ‘신 날’이란 뜻의 ‘수릿날’이라고도 한다. 江陵端午祭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祝祭로, 마을을 지켜주는 大關嶺山神에게 祭祀지내고, 마을의
平安과 農事의 번영, 집안의 太平을 祈願한다. 端午祭를 드리지 않으면 마을에 큰 災殃이 온다고
믿어 大關嶺서낭堂에서 서낭神을 모셔와 江陵市內의 女서낭神과 함께 祭祀드리는데, 大關嶺山神은
金庾信 將軍, 端午祭에서 主體가 되는 서낭신은 梵日國師, 女서낭신은 江陵의 鄭氏處女로 전해진다.
江陵端午祭는 文化的 獨創性과 뛰어난 藝術性을 인정받아 2005년 UNESCO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고, 2008년 유네스코 人類無形遺産 대표목록으로 登載되었다. (*庾: 곳집 유)
(09) 江陵 崛山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86호
崛山寺 옛터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幢竿支柱이다. 掘山寺는 梵日國師가
唐나라 留學時 왼쪽 귀가 떨어진 僧侶가 고향에 자신의 집을 지어 달라는 요청으로 지은
사찰이라고 한다. 幢竿支柱는 절 입구에 幢이라는 깃발을 달아 두는 장대인 幢竿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으로, 寺刹 앞에 세우며 神聖한 領域을 표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두 支柱의 4면은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밑면에는 돌을 다룰 때 생긴 거친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고, 남쪽 支柱의 끝부분은 약간 파손되었다. 전반적으로 素朴하나 규모가 커 웅장한
造形美를 보인다. (*幢: 기 당 *竿: 낚싯대 간)
(10) 江陵 崛山寺址 石佛坐像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8호
崛山寺址에 전해지는 3具의 石佛 중에 완전한 2具는 작은 庵子에서 모시고, 머리 부분이 없어진 1구는 우물에 있다.
石佛 3具는 모두 한 손이 다른 손의 검지를 감싸고 있는 智拳印을 하고 있는데, 이는 毘盧遮那佛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모습으로 함께 모시기 위해 만든 毘盧遮那三尊佛로 생각된다. 얼굴은 둥글고 긴 楕圓形이고, 어깨는 움츠린 듯하며,
옷의 표현이 두꺼워 몸의 屈曲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 佛像은 둥글고 긴 얼굴과 平板的인 身體에 曲線的인 彫刻 등
高麗前期에 유행한 自然主義 樣式을 따르고 있으며, 地方의 彫刻性格도 드러내고 있다.
金津港
江陵 玉溪面 金津里에 있는 漁港으로, 江陵의 最南端 港口이다. 땅이 검고 潮水가 드나들어 ‘먹진’, ‘黑津’이라고 했으나
1916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建南里를 병합하여 金津里로 바꾸었다. 바닷물이 맑고 깨끗하며 1960~70年代의
港口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金津港에서부터 正東津港까지 海岸道路가 조성되고 遊覽船도 운항해 觀光地로
자리잡고 있다. (*潮: 밀물 조)
(11) 金津港
(12) 金津港 防波堤
(13) 防波堤의 護岸用 四脚 블록 Tetrapod
*Tetrapod: 防波堤나 護岸 등의 被覆劑로 사용되는 가지가 4개 달린 異形블럭이다. 가지(pod)가 4개(tetra)라고
테트라포드(tetrapod)라고 하며, 略稱으로 TTP라고 부르기도 한다. (*脚: 다리 각)
(14) 金津港의 海岸道路
북쪽으로 계속 가면 深谷港-正東津港에 이른다. 아취 위에는 나무로 깎은 솟대 위에 있는 새를 얹었다.
(15) 아취 위에 나무로 깎은 솟대 위에는 새를 얹었다.
-(3-4) 全國의 風景돌아보기, 江原地方 東海-三陟地區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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