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65
12월5일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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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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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DepaXBywEjU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0764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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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진정한 회개의 잣대는 다름 아닌 삶의 변화입니다!>
대림 제2주일이자 인권 주일입니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피조물임을 자각하는 주일입니다. 인간은 첫째가는 하느님 피조물이기에 그 어떤 제도나 이데올로기보다 우선해야 하는 가치 있는 존재임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신분, 국적, 빈부 여부를 떠나 생명을 지닌 한 그 어떤 인간이라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특별히 실직이나, 사업의 실패 등 경제적 파탄으로 인해 깊은 수렁 속에서 고생하시는 분들, 너무도 막막해 앞길이 전혀 안 보이는 분들, 희망을 상실한 분들을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기도가 필요한 주일입니다.
직원을 소중히 여기는 경영 마인드로 유명한 한 경영자의 외침은 어려운 이 시대 모든 경영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할 소중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해고를 통한 인원 감축! 우선 인건비를 대폭 줄여보자는 마인드인데, 결코 바람직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서로를 위해 피해야 할 유혹입니다. 그로 인해 예견되는 피해자들의 고통과 국가적 손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희 회사는 인원 감축이라는 뼈아픈 해결책이 아니라 3교대를 4교대로 늘리는 고용 증대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잉여시간을 직원교육과 재충전에 투자한 결과 생산성 향상, 안전사고 감축, 노사화합이란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이 회사 경영자의 인본주의적 사고방식, 근로자들과 고통을 분담하려는 마음 씀씀이가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이 회사에서 사직서를 쓰면 최고 책임자와 면담을 거쳐야 한답니다. 그리고 최고 책임자로부터 "도대체 왜 사직서를 썼느냐? 좀 더 함께 일할 수는 없겠냐?"는 듣기 행복한 만류의 말을 들어야 한답니다.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 무리한 방법보다는 함께 고통을 분담하고, 함께 나누고, 함께 협력하는 방법을 통해 우리 앞에 놓인 이 난관을 함께 견디고 함께 안개 속을 헤쳐나가는 우리 가정, 우리 직장,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은혜로운 대림 시기도 어느덧 두 번째 주일로 접어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자비로운 아버지의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 주변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웃들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그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도록 합시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 앞에 망연자실하게 넋을 잃고 앉아있는 이웃들 삶을 개선시키는 구체적 "구원의 손길"이 됩시다.
진정한 회개의 잣대는 다름 아닌 삶의 변화입니다. 억압받는 이웃들을 향한 적극적 투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관대한 나눔, 그것은 회개의 가장 좋은 표시입니다. 우리 삶이 그저 단순한 하나의 반복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들을 향한 끝없는 개선의 길, 나날이 성장하고 쇄신되는 참된 회개 생활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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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5LP7BmruKD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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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지는 사람은 길을 내지 못한다. 지금의 행복에 길들지 않기를.>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직무가 소개됩니다. 요한의 직무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그분의 길을 미리 닦아놓는 역할입니다. 이를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라고 합니다. ‘회개’란 무엇이 행복인지 아는 것입니다.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는 사람이 회개했다고 하면 이제 술을 덜 마시는 것이 행복임을 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집을 나온 아이가 회개했다고 하면 그래도 집에서 부모님과 사는 것이 행복임을 안 것입니다.
박보영 목사가 안성에서 있을 때 길거리 아이들을 데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아이들은 다시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살 때 입었던 더럽고 냄새나는 옷을 다시 줍니다. 그리고 입어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코를 막고 억지로 입고는 자기들 손으로 내다 버리고 샤워를 두 시간씩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길거리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그리스도 없이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하지 않으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간신히 주일미사에 나오기는 하겠지만 일상을 살아갈 때는 그리스도께서 동행하심을 까맣게 잊고 삽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그들도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살기보다는 뱀의 뜻에 따라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채우는 것을 더 행복으로 여겼습니다. 회개는 그리스도를 부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런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돈도 없고 먹고 마실 것도 없고 명예도 없는 광야에서 사는 것이 더 행복임을 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삼구를 포기할 때 하느님의 어린양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광야로 나오지 않으면, 곧 삼구를 포기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사랑이신데 삼구는 사랑과 반대되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불과 물처럼 한 공간에 공존할 수 없는 욕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는 것이 세상의 즐거움을 다 포기하는 것보다 행복함을 믿지 못한다면 누가 광야로 나오겠습니까?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먼저 그 길을 간 사람이 필요한데, 그 사람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일단 믿고 광야로 나와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삶 자체가 무엇이 행복인지 증명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삶이 그랬고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그랬습니다. 이 분들의 삶을 보며 많은 사람은 ‘저런 삶이 진짜 행복일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고 그 광야의 삶으로 나아올 결심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삶을 살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이분들이 먼저 세상의 행복에 길들지 않은 누군가를 만났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회개의 세례는 먼저 그 길을 간 사람이 가지 못한 사람에게 길을 내주는 것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히말라야’(2015)는 엄홍길 대장과 박무택과의 우정을 그립니다. 엄홍길 대장으로부터 산을 배우고 싶었던 박무택은 지옥훈련을 거쳐 엄홍길 대장과 극한의 어려움을 견뎌내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됩니다. 그런데 엄홍길 대장은 세계 최초 16좌 등정을 코앞에 두고 더는 산을 타서는 안 된다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 이에 박무택이 대장이 되어 에베레스트를 등정합니다. 이 과정에서 박무택 대장은 동료들을 구하려다 조난합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악천후로 베이스캠프에 있었던 어떤 누구도 그들을 구하러 오르지 않았습니다.
책도 쓰며 가족과 삶을 즐기고 있었던 엄홍길 대장은 소식을 듣고 이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산을 오르기로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쓸데없는 도전이라며 말립니다. 명예가 따르지 않는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시체를 찾는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후배를 추운 그곳에 홀로 둘 수 없었던 엄홍길 대장은 아픈 다리에도 그들의 시신을 찾아 내려옵니다. 어떤 명예도 없는 도전. 다만 우정을 지키기 위한 두 달이 넘는 도전이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엄홍길 대장은 박무택 대장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6좌 등반을 완주합니다.
살다 보면 현실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길을 낼 것인가의 선택이 참으로 많이 찾아옵니다. 이때 현실에 안주하는 삶은 아무런 길도 내지 못하지만,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을 지닌 사람은 새길을 냅니다. 그런데 그 길이 이 세상으로 내려오시지 못하는 그리스도를 세상으로 내려오게 만드는 길이 됩니다.
길을 내는 사람들의 특징은 지금 여기에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더 높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항상 이렇게 묻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행복인가?” 이 질문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길을 개척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영화 ‘메이즈 러너’(2018)는 실험용으로 기억이 삭제되어 한 공간에 갇혀 살아야 하는 젊은 청년들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토마스만이 길을 알 수 없는 미로와 무서운 괴물을 무릅쓰고 그곳을 탈출하려 합니다. 그런 그를 보고 그를 따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지금 자신들의 세상에서 계급을 정하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둘의 투쟁은 끝이 없습니다. 다만 희생이 따르더라도 나가는 길을 찾게 된 토마스는 다른 이들도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는 길을 만들어줍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은 세상의 틀에 갇혀 사는 학생들에게 책상 위로 올라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왜 이 위에 섰을까? 이 위에선 세상이 무척 다르기 보이지. 잘 알고 있는 거라도 다른 시각에서 봐라. 틀리거나 바보 같아도 반드시 시도해라.” 키팅 선생님이 학교에서 쫓겨나자 학생들은 교장 선생님의 위협에도 책상 위로 올라섭니다.
누군가 길을 내주지 않으면 아무도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없습니다. 지금 세상이,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쫓고 있는 돈이 행복의 정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 이해할 수 없다면 행복할 수 없다고 여기십시오. 그래서 행복에 대해 다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은 결국엔 주님의 길을 고르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남들이 하니까 다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른 사람이 다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것과 반대되는 광야의 삶에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지금의 행복이 최선인지를 끊임없이 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복을 위해 찾아간 그 길로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그 길은 다른 이들이 그리스도라는 행복을 만나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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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전례의 주제는 우리에게 오시는 구세주를 잘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회개’이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주시는 구원은 어떤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이웃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마음 자세를 온전히 새롭게 바꾸어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즉 인간이 자신의 순수성을 되찾는 것 그것이 우리가 모두 필요로 하는 구원이다. 구원에 이르는 첫 단추는 바로 근본적으로 나 자신을 변화하는 것으로 하느님 앞에 회개라고 할 수 있다.
바룩 예언자는 참된 회개는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바룩 5,7) 되게 하는 데 있다. 즉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주님을 맞아들이고 모시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들을 없애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당신 영광 안에서 안전하게”(5,7) 나아갈 수 있다. 하느님 안에 우리가 머무르는 삶이 될 때, 참된 해방을 알게 되고 또한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 자체가 이미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 루카 3,1-6: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루카 복음은 좀 지나칠 정도로 개개 인물들을 역사를 열거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의 신학적 차원을 말하는 것이고, 예수께서 이러한 보편적인 역사 안에 들어오셨고, 이제 그분이 역사의 중심이며, 역사에 충만한 의미를 부여하시는 분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의 오심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보편적인 역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6절)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서 주님의 오심에 대비하여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내적 쇄신을 의미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내적 쇄신을 실현하는 성사적 행위를 수행하였다. “그는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3절) 이 세례는 근본적으로 마음의 ‘회개’를 불러일으켰고, 그 마음의 회개는 ‘물’이라는 상징을 통해 표현되었다. 여기서 물은 인간을 새롭게 하고 깨끗하게 해주며 하느님으로부터의 ‘죄의 용서’를 선포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어서 “주의 길을 마련하여라.”(4절)는 것은 주님의 오심을 알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윤리적 차원에서의 큰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분명하다. 낮아져야 할 산들은 바로 복음 첫머리에 말한 티베리우스, 헤로데 그리고 다른 정치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던 이기주의, 특권의식, 권력의 남용 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메워져야 할 ‘골짜기’들과 ‘언덕’들은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불신과 실망과 낙담과 운명론과 체념에 빠져있는 태도를 말한다. 즉 우리의 마음 안에 주님께서 임하실 수 있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비우고 내적으로 모든 면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윤리적인 면에서 항상 새롭고도 신선함을 갖추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영원한 과제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마음에 장애를 가질 수 있는 나약한 인간이다. 그러나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가운데 하느님께서도 우리 안에서 당신이 시작하신 ‘훌륭한 일’을 완성하실 수 있다. 이러한 완성은 이렇게 순화된 영적 감각에서 이루어진다. 우리 신앙인은 이 순화된 영적 감각을 통하여 ‘선’을 알고 행할 뿐 아니라, ‘가장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어, 사랑과 정의 안에 계속해서 성장해 갈 수 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필립 1,10-11)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여기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날’을 두 번(필립 1,6.10)이나 반복하고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그날에 우리는 우리의 성덕과 정의의 결실을 내어 놓아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대림은 항상 우리를 깨어있게 하고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옳은 일을 가려서 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 자체로 우리는 이미 구원에 다가서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있는 높은 언덕들인 이기주의나 특권의식 또한 권력의 남용 등, 골짜기들인 실망과 좌절 그리고 우리 사이의 불신 같은 것을 없애는 우리 자신의 내적인 준비와 사랑의 실천이 따라야 할 것이다. 이 대림시기를 지내면서 더욱 우리의 삶을 하느님 안에 살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시간 속에서 가장 옳은 일을 가려서 할 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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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
“......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2-6)
요한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6-8).” 또 요한복음에는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라는 세례자 요한 자신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요한 1,31) 하느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맡기신 임무는,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일, 또 사람들을 메시아 예수님에게 인도하는 일, 메시아 예수님을 잘 맞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일입니다. 그 ‘준비’는 ‘회개’입니다. 여기에 인용되어 있는 이사야서의 말씀에서 ‘주님의 길’은,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는 길’이기도 하고, ‘내가 주님께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는 “회개하여라.”입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는 “탐욕과 이기심을 버려라.”이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는 “교만과 위선을 버려라.”이고,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는 “죄 때문에 비뚤어지고 거칠어진 생활을 바로잡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여라.”입니다.
1) “세례자 요한의 활동이 꼭 필요했을까? 그냥 예수님께서 곧바로 활동을 시작하셨어도 되지 않을까?”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기 전에 먼저 세례자 요한을 보내신 것은, 예수님 쪽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위한 ‘배려’ 라고 생각됩니다. 만일에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 등장하셔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당신 자신을 메시아로 소개하셨다면?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예언자가 먼저 와서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준비시키는 것이 사람들을 위해서 훨씬 더 유익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첫 제자가 되었다는 점이 그것을 잘 나타냅니다.(요한 1,35-39) (그렇다고 해도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과 회개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모두 거부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위해서 세례자 요한을 먼저 보내셨지만, 메시아를 갈망하면서 기다리는 사람들과 믿으려고 노력하고 회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만 받아들였습니다.)
2) “그 당시의 사람들을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예언자가 미리 와서 예수님을 소개하는 일이 필요했겠지만,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신 뒤에는 세례자 요한 없이도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까지도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그의 회개 선포를 듣고 있는가?” 예수님 승천 후에는,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님에 관한 복음이 널리 퍼졌습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이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처음부터 인류 구원을 계획하셨던 ‘하느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는 점에서도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오늘날에도 중요하고, 또 예수님을 잘 맞아들이려면 회개부터 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의 회개 선포는 오늘날에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회개 선포를 듣고 있습니다. 특히, 인류의 회개는 아직도 미완성인 상태라는 점에서, 그의 회개 선포는 더욱더 필요합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는 그 자신의 선포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포입니다.
3) “이미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앙인들에게도 회개 선포가 필요한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모든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지만, 신앙인들이(신앙인들부터) 더 많이, 더 모범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죄를 뉘우치는 일만 회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나의 삶을 일치시키는 일이 회개입니다. 따라서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고, 세례를 받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더욱더 ‘끊임없이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례는 종점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4) “구체적으로 회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죄를 뉘우치고 고해성사 보는 것으로 회개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는 ‘삶 전체’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신앙인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한다고 생각만 하는 것과 말만 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고, 실제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라고 말했는데(루카 3,8), 실제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라는 뜻입니다.(루카 3,10-14)> 삶 전체가 변화되는 것이 회개이기 때문에, 회개는 한 번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것도 회개이고, 벗어난 다음에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면, 그 길에서 벗어나서 올바른 길을 찾아서 걷는 것이 회개이고,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면,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5) 회개는 대림 시기나 사순 시기에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인의 인생 여정 자체가 회개의 여정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자체가 회개하는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때가 회개가 완성되는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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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입니다. 너무도 생생한 꿈을 꾸었습니다. 교육이 있어서 연수원으로 갔습니다. 연수원에서는 숙소를 배정하게 됩니다. 저의 방은 317호 였습니다. 지나가며 보니 다른 방들은 독방이거나, 두 명이 지내는 방이었습니다. 제 방은 317호인데 2층에 있었고, 어렵게 찾아가 보니 그곳은 20명이 한 방에 있었습니다. 그나마 저의 침대는 아직 자리에 없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과 20명이 함께 지내는 것도 자신이 없었고, 아직 침대도 없었기에 자리를 배정한 담당자를 찾아갔습니다. 담당자는 제가 잘 아는 선배였습니다. 선배는 곧 침대를 갖다 놓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불편하지만 며칠만 참으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다같이 20명이 사용하는 방이었다면 저는 그렇게 불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독 저만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 같아서 불만이 컸던 것 같습니다. 돌아보니 사제라는 이유로 특별한 대접을 받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성지순례 중 버스에 탑승할 때면 내리기 쉬운 맨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불편을 감수하고 두 명 씩 침실을 배정받지만 저는 독방을 사용했습니다. 식사를 할 때도 맨 먼저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봉성체를 갈 때도, 환자 방문을 할 때도 봉사자들이 차량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꿈’은 그동안 제가 특별한 대접을 받고 살았음을 돌아보게 한 것 같았습니다.
며칠 전 카톡으로 가슴이 뭉클한 이야기를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큰 아들의 집으로 갔는데 아들의 집 비밀번호가 어머니의 집 비밀번호와 같았습니다. 큰 아들은 어머니가 비밀번호를 쉽게 기억하도록 어머니의 집과 같은 비밀번호를 만들었습니다. 둘째 아들의 집도 같은 비밀번호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집으로 갈 때는 적어도 비밀번호 때문에 걱정할 일은 없었습니다. 물론 아들의 결단도 있었겠지만 그것을 기꺼이 받아준 며느리들의 배려도 있었습니다. 어머니라면 언제든 오실 수 있도록 비밀번호를 공유한다는 것은 쉬운 일 같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도 현실입니다. 아파트의 이름이 대부분 어려운 외국 말인 것은 시골에서 어머니가 찾아오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중단되었지만 미국도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려고 하였습니다.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오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에 긴 장벽을 설치하였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가족들과 친지들이 서로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교황이 된 후에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람페두사였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넘어오는 난민들이 도착하는 항구였습니다. 교황님의 방문 후에 유럽은 난민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국경을 열어 주었습니다. 교황님은 북한이 초청을 하기만 하면 북한을 방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교황님의 방북으로 북한의 신앙의 문도 활짝 열리면 좋겠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높은 산은 깎아내고, 골짜기는 메운다.’입니다. 이는 인종, 혈통, 세대, 이념, 사상, 신념, 신분, 종교 때문에 차별과 멸시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지난 2년간 코로나19의 팬데믹을 겪으면서 장벽과 차별로는 코로나19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연대와 협력 그리고 나눔과 사랑으로 코로나19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백신과 치료제는 공유제로 국가와 빈부의 차별 없이 나누어야 합니다. 인류가 함께 노력하여 코로나19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나가야만 우리는 비로소 마스크를 벗고, 일상의 삶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품성은 사랑이고, 하느님의 모습은 끝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희생과 나눔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것을 이웃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을 닮은 모습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인권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높은 산을 낮게 하고 깊은 골짜기를 메우고 험한 길을 고르게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험한 산과 거친 들판을 건너고서야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었듯이 우리 안에 직면한 문제들을 풀어내고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일도 쉬운 일만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우리들의 사랑이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출 때 그래서 우리가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아름다운 기도로 남겨 주었습니다.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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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대림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준비하는 시기이면서, 종말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길을 닦는 시기입니다. 특별히 대림 시기 초반부에는 종말론적 성격을 부각시켜, 언제 오실지 모르는 그리스도를 깨어 기다려야 함을 강조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하느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실 종말이 임박했으니 생활 태도를 바꾸라고 말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구원의 역사가 결정적으로 이스라엘 땅에서 시작되었음을 알리고자 구체적인 인물과 사건을 언급합니다.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제십오년은 기원후 28년경이며, 본시오 빌라도는 26-36년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의 총독이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방의 영주였고, 그의 이복 동생인 필리포스는 갈릴래아 호수 북동쪽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였습니다. 한나스와 그의 사위 카야파는 당시 대사제로 복무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요한에게 내립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부근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죄는 하느님을 등지는 행위이며, 죄 지은 인간이 하느님께 되돌아서는 방향 전환이 바로 회개입니다. 이처럼 회개한 사람은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면 등진 이웃을 향하여 방향 전환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입니다.
내 삶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마음의 움직임이 큰 곳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나의 삶을 하느님과 나누다 보면,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새롭게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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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홍성남 마태오 신부님]
2021.12.04 (토) 수원교구 구미동 성당 대림특강
<웃어야 산다>
https://youtu.be/EiYIGlBUy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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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회개는 무너짐과 채워짐의 지속적인 체험>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대림 2주일인 오늘 주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입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실 수 있도록 평탄한 길을 마련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높은 산이 된 우리의 이기심, 깊은 골짜기가 된 우리의 상처들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무너지고 채워져야 합니다. 무너짐의 두려움과 억울함의 상처들을 주님께 내어 맡기며 그분의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오늘은 우리 인생 여정에서 “무너짐과 채워짐의 체험”을 통해 우리를 진정 회개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크신 섭리에 대해 묵상한 것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 제가 아는 분의 감동적인 무너짐과 채워짐의 체험을 소개할까 합니다. 토론토 유학 시절이었던 2013년 8월 어느 날 제가 이곳 토론토에서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 저의 academic adviser 셨던 할머니 교수님께로부터 메일이 왔습니다. 자기 남편이 베네딕도회 봉헌회에 입회하려고 준비중이었는데 절벽에서 떨어지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미국에 있는 St. Vincent 수도원에 갈 수가 없어 베네딕도회 신부인 제가 대신 와서 미사와 함께 입회식을 거행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저는 기꺼이 교수님 댁에 가서 입회식을 거행해 드렸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교수님 남편 할아버지와 자주 만나 저는 베네딕도회 영성에 대해 가르쳐 드리고 그분은 저의 영어를 봐 주시면서 아주 친밀한 가족과 같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사고 후의 변화된 삶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자신은 사고 나기 전까지 세상에서 실로 잘나가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사업에도 성공하고 인생을 즐기며 자신만의 세상에서 행복해 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등산을 하다가 높은 절벽에서 떨어졌습니다. 떨어지는 순간 “이제 나는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침 지가는 사람이 발견을 하고 헬기가 와서 수송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생존할 가능성이 없다고 했는데 기적처럼 살아났으며 재활에 성공했습니다. 육신의 죽을 위기에서 다시 살아난 체험이 그분에게는 영적인 눈을 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 할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Everything is Miracle!”
그 사고 이후 지난 시간의 모든 허영과 아집과 교만이 절벽에서 함께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리고 매 순간 모든 것이 감사와 기적이요 은총임을 깨닫고 있는 중이라고 고백하십니다. 지금은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지난 시간을 뒤로하고 베네딕도 봉헌회 회원으로써 기도하고 일하며, 특히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예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평화로움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비단 이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무너짐을 통한 채워짐의 충만을 체험할 때가 있습니다. 아픔과 시련을 통해서, 혹은 감당하기 힘든 감사로운 체험을 통해서도 자신이 온전히 무너지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함을 체험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높은 산은 우리가 주님을 볼 수 없도록 가로 막은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을, 그리고 깊은 골짜기는 우리가 주님께로 갈 수 없도록 방해하는 과거의 아픔과 상처를 비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나의 내면에 쌓아 올린 높은 아집의 산이 무너지고 과거의 상처들이 주님의 은총으로 채워질 때 주님께서 오실 평탄한 길이 마련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회개는 무너짐과 채워짐의 체험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의 내면에 가득 쌓여진 자아의 높은 이기심의 산을 무너뜨려 나의 내면에 가득 고여 있는 어둠의 죄스러운 상처들 안에 쏟아 부을 수 있을까요? 이것은 단적으로 말해,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바룩서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 영광 안에서 안전하게 나아가도록,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 되라고 명령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높은 산을 낮추고 골짜기를 메우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정화와 기도를 통해 은총의 선물을 깨어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이 무너짐과 채워짐의 체험을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적인 체험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눈으로 하느님의 마음으로 자신과 이웃과 세상을 보기 시작하게 되고, 그래서 어쩌면 그곳에는 높은 산도 골짜기도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치 지구 밖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그저 둥근 원의 모습인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울퉁불퉁한 삶의 모습 그 자체가 하나의 은혜로운 선물들의 순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전부였던 것이 그저 하느님을 향해 가는 여정에 작은 도구에 불과했고,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너무도 아픈 골짜기 같은 시간이었지만 깊은 곳에 흐르는 마르지 않는 영적인 지하수를 얻기 위해 뚫어지는 아픔을 감내해야 했던 시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할아버지 이야기처럼 절벽에서 떨어져도 그것이 은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골짜기도 산도 모두 그분 안에서 무너지고 채워져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구원이요, 하느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구원을 지금 여기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우리 삶의 산과 골짜기에 찾아 오십니다. 그분의 오심을 알아뵈올 수 있도록 메마른 광야와 같은 우리 마음을 용서와 회개의 눈물로 정화하고, 당신 성령의 불로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주님께 내어 드립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나오는 자비와 의로움으로, 당신 영광의 빛 속에서 우리 모두를 즐거이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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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 명상의 집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부산 분원에서 운영하는 분도 명상의 집입니다. 최근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보급하기 위한 토마스 머튼 영성 배움터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단체 및 개인피정과 면담과 고해 성사, 미사 등을 통해 베네딕도회의 영성을 나누고 있으며 젊은이들을 위한 영적 힐링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문의: 010-6650-4574) 09:0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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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방기태 루이스 신부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인간은 ‘어떤 것’ 이 아니라, ‘어떤 인격’ 입니다.(간추린 사회교리 108항)
인권 존중은 한 나라의 사회, 경제, 발전의 전제 조건입니다.(모든 형제들 22항)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회칙 <모든 형제들>을 반포하신 지 어느덧 1년이 지났습니다. 교종의 회칙은 ‘착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혈육을 뛰어넘고, 인종을 뛰어넘고, 지역을 뛰어넘어 이 시대에 사마리아인과 같은 참 이웃이 되라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코로나 팬데믹의 상황에서 인간 생명의 고유한 영역이 바이러스라는 미생물에 의해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언제 종식될지도 모른 채, 점점 더 진화되어 가고 있는 바이러스와의 총성 없는 전쟁은 기존 우리의 생활 양식, 인식 관계, 사회 조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FT32항 참조) 친구 간의 만남은 뜸해 졌고, 가뜩이나 멀어진 이웃 간의 간격은 더 벌어졌고, 방역이라는 이유를 들어 각 나라는 유례없는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습니다.
이런 뜻하지 않은 삶의 장벽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포용보다는 배타적으로, 연민보다는 혐오와 증오로, 다가감보다는 경계로, 관용보다는 폭력으로 점철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언론 보도를 통해서 생명 경시, 인격 모욕, 인권 유린, 인종 차별 등 인간이 인간에게 해서는 안 되는 불행한 사건 사고들을 자주 접하고 있습니다.
이런 언론 보도를 접할 때마다 우리에게 있어서 더욱 심각한 것은 ‘무감각의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반복적으로 쓰고 버리는 인간의 무감각적인 행태가 자연환경 훼손은 물론 인간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주원인이라고 진단하셨습니다.(LS138항~162항 참조)
인간이 발생시킨 환경 오염에 의해서 죽어 가는 자연의 소중한 생명체들, 또한 인간의 삶과 동행하고 있는 반려동물에 대한 잔인한 학대 등에 관해서 그 심각성을 진단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무감각이 결국에는 우리 이웃의 아픔, 어려움 그리고 그들의 위기의 현실까지도 방치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소위 ‘어떤 인격이 아닌, 어떤 것으로’ 우리의 이웃을 바라보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사는 이 지역, 이 도시, 이 나라,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은 다가옴이 아니라 다가감입니다.
우리가 먼저 신앙인으로서 다가가서 우리의 이웃에게 연민을 느끼고, 내가 소중하듯 내 이웃도 소중하다는 인권의 연대 의식을 가지고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존중받는 그런 가정, 교회 공동체, 사회 구성원이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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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최광득 토마스 신부님]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루카 3,4)
건강하십니까? 건강이라는 말은 다들 아시다시피 몸이나 정신에 아무 탈이 없이 튼튼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건강에 대한 안부를 물을 때는 주로 신체적인 건강을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들의 신체적인 건강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기에 가끔은 미사를 중단하거나 참례자 숫자를 줄여가면서 조심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가 신앙 안에서 ‘건강하세요.’라고 인사한다면 신체적인 건강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영혼의 건강을 조금 더 강조하는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신앙생활에 소홀해진 신자분들이 많아졌습니다. 육신의 건강을 조심하고자 하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이로 인해 영혼의 건강까지 해칠까 염려되는 대목입니다.
그러면 영혼의 건강은 어떻게 챙길 수 있을까요? 가톨릭교회에서 제시하는 방법은 주로 두 가지입니다. 먼저 회개하는 것이고, 다음은 예수님의 마음을 닮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루카 3장 4절)하면서 우리가 회개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바빌론 유배 시절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를 통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듯이, 우리들도 회개를 통해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개는 우리들의 영혼을 깨끗하게 만드는 일이고, 예수님의 마음을 채우는 준비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대림 시기를 맞이하여 우리의 영혼이 조금 더 건강해졌으면 합니다. 그리고 건강해진 우리로 인해 사회도, 환경도, 세상도 더 건강해졌으면 합니다.
다들 오늘도 건강하시길 바라며 제2독서에 나오는 바오로 사도의 편지글을 다시 한번 전해드릴까 합니다.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십시오.”(필리피서 1장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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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창선 요한 세례자 신부님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오시는 주님의 길을 닦는 마음>
자색 촛불을 하나 더 밝히며 우리 안에 오시는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대림 제2주일입니다. 이맘 때 중심인물의 한 분인 요한 세례자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귓전을 울립니다. 그분의 신탁은 메시아가 오시는 길을 천상의 지혜로 마련하라는 기쁜 소식입니다.
한국교회는 40년 전부터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로 지내왔습니다.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을 깨닫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행복한 세상을 가꾸기 위함입니다. 또한, 2011년부터 대림 제2주간은 ‘사회교리주간’입니다.
레오 13세 교황의 「새로운 사태」(1891),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생명의 복음」(1995)과 프란치스코 교황의 「찬미 받으소서」(2015)를 포함한 역대 교황들의 회칙은 가정, 노동, 경제생활, 정치공동체, 환경보전, 평화증진 등 제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사회교리는 인간의 존엄, 공동선, 경제정의(가난한 이들 우선), 보조와 연대, 비폭력의 원리로 ‘사랑의 문명’을 향한 ‘새 복음화’의 길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기원전 8세기)와 함께 바빌론 유배를 당한 바룩은 예루살렘 재건에 대한 위로와 희망의 말씀(제1독서 : 바룩 예언서 5장 1절-9절)을 전합니다.
‘의로운 평화, 거룩한 영광’의 이름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 되라는 명령입니다. 자비와 정의의 주님은 영광의 빛 속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주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려고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를 위해 늘 기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제2독서 : 필리피서 1장 4절-6절 8절-11절)
그는 공동체의 사랑이 성령의 은총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기를 바랍니다.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주님의 날을 맞이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로움의 열매를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3장 1절-6절)은 대림 시기의 중심인물인 요한 세례자의 등장과 함께 그리스도의 공생활 연대기의 시작을 알립니다.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제15년(기원후 27-28년), 본시오 빌라도(26-36년)는 유다 지역 로마 총독입니다.
분할된 헤로데 왕국은 헤로데 안티파스(갈릴래아 지방), 그의 동생 필리포스(갈릴래아 호수 북동쪽), 리사니아스(헤르몬산 북쪽 산악지역) 영주들이 다스릴 때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는 한나스와 카야파 대사제입니다. 한나스(6-15년)는 로마 권력에 의해 물러나고, 그의 사위인 카야파(18-36년)가 계승합니다. 물러난 한나스의 전직을 우대(요한 18장 13절.19절.22절)하는 걸 보면 그의 영향력이 계속됨을 알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 사가만이 요한 세례자는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루카 3장 2절)임을 밝힙니다. 주님께서 그가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루카 7장 26절)이라고 하십니다. 메시아가 오시는 길을 닦는 선구자로 성경에 기록된 사람(이사야 예언서 40장 3절 / 말라키 예언서 3장 1절)이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거룩하신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세례자는 요르단 부근 광야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루카 3장 3절)합니다. 회개는 자기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자신 생각과 태도를 바로잡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애주가가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다가 나쁜 버릇을 고친 뒤 자선하듯이 말입니다. ‘되찾은 아들’(루카 15장 11절-32절)처럼 아버지께 ‘불순종’이던 죄인이 회심하여 돌아오는 기쁨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듣는 우리는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모든 이의 구원을 선포하는 그 소리는 이사야(기원전 8세기) 예언서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이사야 예언서 40장 3절 / 루카 3장 4절)
주님의 길을 어떻게 준비할까요? 산상설교는 내적 참회로 단식과 기도와 자선(마태오 6장 1절-18)절을 강조합니다.
지난날 자신의 부끄러운 삶을 성찰하고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탐욕과 교만의 산과 언덕을 모두 낮추고 분열과 절망의 골짜기를 메우면 겸손한 어린이가 됩니다. 굽고 거친 내면의 길이 바르고 평탄해지면 ‘구원의 빛’이 비칩니다.
세례는 평생 한 번 받지만 완덕의 길을 걷는 회개는 평생 걸립니다. 사해의 쿰란 공동체 회원들은 날마다 물에 잠겨 몸을 정화하는 규칙을 지킵니다. 기도와 성사로 씻고 또 씻은 뒤 주님만을 바라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요한의 소리는 지나가도, 주님 말씀은 영원합니다. 자비와 진리로 정화된 영혼은 이제 ‘사랑의 샘’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은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삶”입니다.(데살로니카 1서 5장 16절-18절) 주님 말씀을 모신 깨끗한 마음의 샘에서 사랑이 샘솟는 줄 압니다. 삶의 뿌리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와 함께하는 힘든 삶에도 오시는 주님의 길을 기쁜 마음으로 준비함은 참 행복의 길입니다. 새 희망을 품고 대림 촛불 앞에서 주님 은총에 감사기도를 드리며 선악을 분별합니다. 어두운 세상에 가까이 함께하러 오시는 주님을 깨끗한 내면의 성전에 모시렵니다. 저희가 언제나 주님과 사랑의 일치를 이루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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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제 우리는 대림 2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늘은 한국교회가 정한 인권주일이며, 사회교리주간의 시작되는 날입니다.
2020년 10월 3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전야에 반포된 프란치스코 교종의 세 번째 회칙 「모든 형제들」은 인간의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를 다루고 있는데, 특히 코로나19의 전 세계적 확산으로, “안이하고 냉담하며 세계화된 무관심이 어떻게 지배하는 지를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30항)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는 지난 2021년 5월 4일 새 문헌 「교회의 삶과 사명에서의 시노달리타스」를 발표하였고, 교종께서는 10월 9일, “친교, 참여, 사명”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세계주교 시노드”(2021-2023)의 개막연설에서 “함께 걸어가는 길(여정)”이란 뜻의 ”시노달리타스“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원리로 ”경청과 참여“를 말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함께 가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바깥에서나 무엇보다 먼저 형제와 이웃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경청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세상과 함께 걷는 일’에 적극 참여하는 것입니다. 교종께서는 이러한 구체적임 참여를 통한 ‘친교’를 이루며 그 속에서의 ‘사명’의 실행을 요청하십니다.
오늘 <제1,2독서>는 같은 메시지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서 바룩 예언자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나오는 자비와 의로움으로, 당신 영광의 빛 속에서 이스라엘을 즐거이 이끌어 주시리라.”(바룩 5,9)고 말하며,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필리 1,10-11)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6)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과 영광’을 보기 위해, 우리는 지금 의로운 사람, 세례자 요한과 함께 ‘광야’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듣습니다. 곧 ‘시노달리타스’가 시작됩니다. 그것은 ‘들음’(경청)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들은 바에 대한 참여를 요청합니다. 곧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일, 그분의 길을 곧게 하는 일’에 참여토록 합니다. 바로 그 안에서 친교를 이루기를 요청합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4-6)
요한은 자신이 단지 ‘미리 주님의 길을 닦는 이’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루카 3,3)라고만 말합니다. 곧 그는 용서를 위한 회개는 선포하였지만, 결코 자신이 죄를 용서할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셔서 바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사명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사명을 지니셨습니다. 그렇게 요한은 자신의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우리의 사명에 충실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용서를 입었고, 하늘나라를 선사받았고, 하느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리니, 우리의 사명은 무엇보다도 먼저 입은 용서를 우리도 행하는 것이요, 하늘나라를 사는 것이요, 그분의 구원 안에 머무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을 보내면서,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알아보고, 신뢰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6) 하였으니,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는 길’을 함께 걷는 이 일이야말로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프란치스코 교종의 세 번째 회칙 [모든 형제들](54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최근의 감염병 확산으로 우리는 두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던져 응답함 수많은 길동무들을 다시 한 번 알아보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섦은 우리 공동 역사의 결정적 사건들을 용감하게 써내려온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엮여있고, 그들을 통하여 지탱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그 누구도 혼자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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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루카 3,5)
주님!
사방이 탁 트여 어디 하나 숨을 곳이 없는 곳,
발가벗겨진 광야로 불러내어 제 실상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어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소서.
오늘도 제 마음의 광야에
숨어계시는 현존으로 속삭이는 사랑의 노래를 듣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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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3,6)
대림 제2주일인 오늘은 '마흔 번째 맞이하는 인권주일'이자, '사회교리주간(12.5-12.11)의 첫 날'입니다.
'인권주일'은 인간의 기본권과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다시금 일깨웁니다.
'인간의 기본권과 생명의 존엄성'은 사회나 국가나 정치권력에서 나오지 않고, 인간의 본성과 그것을 창조하신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Imago Dei)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권은 참으로 소중하고 모두가 평등합니다.
하지만 지구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습들을 보면, 이러한 인권이 힘과 돈, 정치권력, 종교와 이념 논리에 의해 심하게 유린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에 앞서 선구자로 파견된 세례자 요한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에 뒤를 이어 오시는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두의 구원을 위해 오십니다. 그분은 "보시니 참 좋았다." 라는 하느님 원창조 질서의 회복인 모두의 구원을 위해 오십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루카3,4)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선인 모두의 구원'을 위해 강자가 약자를 힘들게 하는 것을 반대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서로 연대하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처럼 지금 여기에서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사회교리'가 말하고 있는 핵심입니다.
'사회교리'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요 사회적 존재로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소명을 이루기 위한 '사회. 경제 생활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모두의 구원을 위해 힘을 모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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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님맞이>
루카 3,1-6 (세례자 요한의 설교)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님맞이>
님께서
길이 없어
못 오실까마는
오시는 님
맞는 설렘으로
님의 길 내렵니다
다른 이 삼키던
나의 골짜기
메우고
다른 이 거부하던
나의 산과 언덕
허물고
다른 이 트집 잡던
나의 굽은 데
곧게 하고
다른 이 아프게 하던
나의 거친 길
평탄케 하여
오시는 님
한걸음에 편히 오시게
님의 길 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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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기에 결혼한 조카도 많고 또 자녀를 낳아 저로서는 이른 나이에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조카들이 모두 열심히 살고 있기에 다들 자기 자리에서 나름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카 중 한 명이 조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법정 분쟁까지 가게 되어 큰 손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무척 속상했습니다. 조카에게 큰 손해를 안겨 준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괜히 미워졌습니다. 무엇보다 사제인 제가 조카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것이 없다는 사실이 더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기도 중에 이런 생각이 떠올려졌습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을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조카의 일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은 기도이기에 열심히 기도로만 함께하는 것입니다. 걱정은 되지만, 굳이 걱정에 휘말려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세속적으로는 솔로몬 왕 이후로 한 번도 두각을 드러낸 적이 없었습니다. 특히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가 세계를 통치하고 있었고, 유다 땅은 로마인의 총독 본시오 빌라도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본시오 빌라도 밑에서 로마에 아부하는 헤로데 일가의 3형제가 유다 땅을 나누어 영주로 있었습니다. 또한 종교적 지도자 구실을 하던 이스라엘의 대제관직도 카야파의 손에 들어가 하느님의 백성은 세속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죄를 뉘우치고 세례를 받으라는 구원의 소리가 광야에서 들려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요르단강 주위의 지방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하면서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독립을 시도해 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하는 일에만 집중합니다.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받아들일 준비를 시키는 것, 회개하고 죄의 용서를 받도록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이가 정치적인 한계에서 벗어나, 하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더 큰 가치 안에서 참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또 반드시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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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해소를 위해….>
어떤 부부가 커다란 갈등에 빠졌습니다. 남편이 아내 몰래 투자했는데 큰 손실을 본 것입니다. 물론 미리 아내와 상의할 수도 있었지만, 평상시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에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 주제에 무슨 투자야?”라는 식의 무시하는 말을 할 것이 뻔해서 한번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기대와 달리 역시 큰 손해를 본 것이었지요.
아내에게 투자 실패를 말했습니다. 아내는 더 남편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가장으로 여겼고, 아이들에게도 남편의 무능을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런 아내에 대한 미움이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한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말합니다.
“좋아요. 주님 때문에 당신을 용서하겠어요.”
이 말에 남편이 기뻐했을까요? 아내가 용서하겠다는 말은 자신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믿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모든 문제의 책임이 남편에게만 있다는 행동에 더 마음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는 갈등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상대방보다 우의에 둘 때 진정한 용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같은 위치에서부터 용서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용서하려면 먼저 자기 잘못부터 찾아서 고백해야 합니다. 서로 자기 잘못을 고백해야 용서도 가능하고 갈등도 해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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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를 기다리고 계신 하느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대림 제2주일입니다. 대림 초 두개에 불이 당겨졌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 만큼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주님의 빛이 환히 비춰지길 희망하며 기쁨의 성탄으로 한 발 더 내딛기를 빕니다.
피아노 조율은 언제 해야 합니까? 피아노 조율은 ‘연주가 끝난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니고 중요한 연주 앞에서 조율’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렇게나 산 다음에 후회하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하기 전에 우리의 삶을 조율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데 함부로 헛되이 삽니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여정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바로 나를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신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지상적인 마음가짐에서 하늘을 향한 마음으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는데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였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들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을 보리라” 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곧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보를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삶의 양식을 바꾸고 하느님께로 향한다는 것은 분명 광야에 길을 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마음 보따리를 바꾼다는 것은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일이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단호한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남의 잘못은 잘 보지만 자기 허물은 보지 못하는 연약함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니 결국 돌이킬 마음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고해성사를 자주 보지 않는 사람은 고백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비출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거울을 보며 외모를 단장하듯이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을 비춰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은 영혼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한번 살펴보십시오. 우리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골이 패인 것은 없는지? 혹 골이 있다면 그 골을 메워야 합니다. 서로의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좋은 점과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다른 그를 ‘나와 틀리다’ 고 단죄하며 거리를 둡니다. 그러나 이유가 어찌 되었든 잘못되었으면 고쳐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분명, 골짜기는 메워져야 합니다. 산과 언덕들도 낮아져야 합니다.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 교만함이 있었다면 겸손함으로 낮아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내려오신 그 마음에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던 그 모습으로, 간음한 여인의 처지에로 내려가서 허리를 굽혀 땅 바닥에 무엇인가 쓰시던 그 예수님의 마음에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굽은 데는 곧아져야 합니다. 마음이 굽으면 모든 사람과 사물이 다 굽어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물이 굽으면 그 그림자도 굽어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굽은 마음을 곧게 하십시오.
시기와 질투로 보면 증오와 저주를 낳게 되고 영혼이 망가집니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고, 인정해 주는 올곧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거친 길은 평탄케 해야 합니다. 거친 마음은 상처만 남깁니다. 남이야 손해를 보든 말든 나만 잘살면 된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화는 불입니다.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할 수도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나무를 태울 수도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이규경) 잘못된 열심은 영혼에 상처만 남긴다고 했습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기대로 화를 키워서는 안 되겠습니다.
시리아의 성 이사악은 “죄인이든 의인이든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회심하는 이들을 가장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돌이키는 일은 한두 번에 끝날 일이 아닙니다. 매일이 마음을 돌이키는 회개의 때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10,22)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죄기 드러날 때 고백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라 자백입니다. 회개는 자발적인 것입니다. 아무도 내 죄를 알지 못하고 추궁하지 않는데도 하느님 앞에 부끄러워 고백하는 것입니다.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필리피1,10-11) 하고 권고합니다. 따라서 하루하루가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나무랄 데 없는 축복의 날 되길 희망하며 ‘내가 바라는 하느님’을 기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나’로 거듭날 수 있는 한 주간되길 바랍니다.
한 알코올 중독자가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가정을 살리기 위해 알코올 중독자 부인에게 성경을 한 권 주면서 하느님을 믿으라고 권했습니다. 부인은 열심히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부인은 성경을 통해서 많은 위로를 받고 그것을 보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의 신앙을 비웃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한 남편이 집에 들어와 아내의 손에 있는 성경을 빼앗아 난로 속에 집어 던져 버렸습니다. “어디 네 성경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자.” 다음날 아침 남편은 난로 속의 재를 치우다가 타다 남은 성경 몇 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눈에 딱 들어오는 성경구절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마태복음 24장 35절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 순간 남편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심한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결국 그는 살아있는 말씀에 두 손 들고 주님 앞에 나오게 되었답니다.
오늘 복음의 끝부분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3,6)는 말씀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향한 우리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할 준비를 갖추고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일까?’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를 생각하며 아기예수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회개의 핵심은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잘못했다고 발만 동동 구르고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전과는 다른 삶의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회개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내가 그분을 알기 전부터 나를 사랑하셨고 용서해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향한 삶의 추구로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지나치게 세상과 땅만 바라보지 않고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교부 떼르뚤리아노는 말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죽는 날까지 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회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척도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께서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회개는 한없이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다시 발견하는 데서 얻어지는 결실입니다. 자비의 하느님! 너그러우신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끊임없는 회개의 원천”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주님께서 언제나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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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희망, 기쁨, 회개, 사랑-
-“그리움이
깊어지면
병이 된다 하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은
기도가 되고, 별이 됩니다.
당신
영혼의 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어, 수호천사 별이 되어
언제나
당신을
비출 것입니다.”-1997.4
새날 밤마다 잠깨면 일어나 우선 바라보는 하늘의 별입니다. 초겨울 하늘의 별은 유난히 총총히 빛납니다. 대림2주일 역시 밤하늘의 빛나는 별들을 바라봤을 때 떠오른 24년전 별이란 시였습니다. 그대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노래한 기도시입니다.
우리만 주님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그 이상으로 우리를 그리워하고 사랑하십니다. 우리 영혼의 하늘에 빛나는 별로, 수호천사 별로 떠올라 언제나 우리 광야 인생 여정을 비춰 주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결정적 역사의 시점에 광야의 요한에게 떠오른 주님의 별이었습니다. 흡사 영롱하게 빛나는 대림초 둘이 "깨어 살라!" 촉구하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별처럼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 시작을 보면 티베리우스 황제를 비롯하여 5명의 역사적 실제 인물이 나오는데 바로 요한의 출현이 우연이 아닌 하느님 섭리의 필연적 역사적 사실임을 알립니다. 때가 되자 말씀의 빛나는 별이, 광야의 요한에게 떠오른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요한에게 내렸다’
결정적 순간의 장면이 아름답고 신선한 충격입니다. 그대로 대림의 광야 여정중인 우리의 체험처럼 생각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요한의 출현은 대림 광야 여정중의 우리에게 참 깊은 깨우침과 가르침을 줍니다.
광야 여정하니 문득 2014년 안식년중 산티아고 순례 여정이 생각납니다. 대림의 광야 여정 역시 우리 인생 여정을 요약합니다. 산티아고 순례여정중 목적지 산티아고에 가까워질수록 기쁨이 더해지듯 우리의 인생 광야 여정 역시 주님의 집에 가까워질수록 날로 기쁨이 더해짐을 은연중 느낍니다. 아, 대림의 광야 여정은 귀가 여정으로 바로 죽음 준비를 위한 주님의 자비로운 배려임을 깨닫습니다.
전례의 아름다움은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합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은 교회 전례의 아름다움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바로 이런 전례 은총이 광야 여정중인 우리 삶을 날로 아름다움으로 빛나게 합니다. 지난 주에 이어 아침 성무일도 세 후렴의 아름다운 가사와 곡도 잔잔한 위로와 기쁨을 줍니다.
“시온산은 우리 힘과 피난처이니, 구세주는 그의 성과 보루가 되리라. 성문을 열라.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도다. 알렐루야.”
“목마른 자는 물있는 데로 가거라. 만날 수 있을 때에 주를 찾으라. 알렐루야.”
“보라, 우리 주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 주시리라. 알렐루야.”
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 대림 제2주일 하루도 끊임없는 기도노래로 바치려 합니다. 이런 교회의 전례 은총이 광야 여정중인 우리를 ‘알렐루야’로 시작해 ‘알렐루야’로 끝맺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별처럼 아름다운 주님 찬미로 시작하여 주님 찬미로 끝나는 알렐루야 광야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광야 인생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대림시기요,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믿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주님을 기다렸다 기쁨으로 맞이하는 대림의 날입니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주님 명령에 응답하여 아름다운 대림 광야 여정이 되기 위한 네 구체적 처방을 제시합니다.
첫째, 희망입니다.
대림의 희망입니다. 대림의 광야라지만 희망의 빛이 환히 길을 비춥니다. 우리가 가는 대림의 여정은 바로 영원한 도반,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자 희망이신 주님과 함께 하는 빛의 여정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바룩 예언자는 우리 모두 희망의 옷으로 갈아입을 것을 권합니다.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바 교회요, 교회의 지체들인 우리 하나하나입니다.
“예루살렘아, 슬픔과 재앙의 옷을 벗어 버리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입어라.”
“예루살렘아, 하느님에게서 오늘 의로움의 겉옷을 걸치고, 영원하신 분의 영광스러운 관을 네 머리에 써라.”
“예루살렘아,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 어디서나, 너의 광채를 드러내 주시고, ‘의로운 평화, 거룩한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너를 부르실 것이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높은 곳에 서서, 동쪽으로 눈을 돌려 보아라.”
얼마나 고무적인 희망찬 말씀인지요! 한마디로 희망으로 빛나는 옷을 입고, 관을 쓰고 동쪽으로 눈을 돌려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을, 형제들을 보라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빛나는 희망의 옷을 입혀 주시고, 희망의 관을 씌워 주십니다.
둘째, 기쁨입니다.
대림의 기쁨입니다. 대림의 희망에 저절로 따라오는 대림의 기쁨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 맞이하는 기쁨입니다. 바룩 예언자의 말씀이 우리의 기쁨을 배가합니다. 기쁨의 예언자 바룩입니다. 외적 환경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샘솟는 기쁨입니다. “주님이 큰 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바로 오늘 화답송 후렴도 이를 입증합니다. 우울이나 심각함은 결코 영성의 표지도 아니고 하느님께 모독이 됩니다.
“하느님의 명령으로 숲들도 온갖 향기로운 나무도, 이스라엘에게 그들을 드리우리라.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나오는 자비와 의로움으로, 당신 영광의 빛속에서 이스라엘을 즐거이 이끌어 주시리라.”
얼마나 은혜롭습니까! 이스라엘이 상징하는 바, 미사은총을 가득 받는 우리들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대림 광야 여정을 축복해 주시는 데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기쁨의 예언자 바룩에 이어 기쁨의 사도 바오로가 옥중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필리비 교회 신자들은 물론 대림시기를 지내는 우리 모두를 향한 바오로의 축복의 기도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기도할 때마다 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주님 만날 날이 하루하루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성탄을 앞둔 대림만이 아니라 죽음도 이렇게 기쁨으로 맞이했으면 소원이겠습니다.
셋째, 회개입니다.
특히 대림은 회개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요한입니다. 우리의 세례를 늘 새롭게 하는 회개와 용서입니다. 바로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것이며 그분의 길을 곧게 하는 회개의 구체적 실천입니다. 이사야의 주님 말씀을 받아 그대로 전하는 요한의 주님 말씀이 그 구체적 상징적 처방입니다.
“골짜기는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바로 이것이 회개의 내적 혁명, 피흘리지 않는 사랑의 혁명입니다. 우리 사이의 불평등으로 깊어진 골을 메우는 것이며, 교만의 산과 언덕을 겸손으로 깎아 낮추는 것이며, 거짓과 위선, 허영과 왜곡으로 굽은 길은 곧게 하고, 불화와 불평불만으로 거친 길은 평화와 안정의 평탄한 길로 바꾸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모든 피조물, 모든 중생,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봅니다.
그대로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약한 자들을 도와주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절망한 자들에게 희망을 주시고, 당신께 마음을 연 모든 이들에게 생명을, 진정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일에 참여하는 우리의 회개의 실천입니다. 바로 회개의 구체적 실천은 대림시기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새삼 대림시기 역시 은총의 선물임과 동시에 실천해나가야 할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넷째, 사랑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회개의 열매가 사랑과 겸손입니다. 무엇보다 오실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며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그리움의 설렘에 잠깨어 쓰는 날마다의 강론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사랑이 감동스럽습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은 이처럼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남녀의 성적 사랑을 초월한 보편적 아가페 형제사랑입니다.
얼마나 주님을, 형제들을 사랑하는 바오로인지요! 바로 다음 말씀 역시 시공을 초월하여 필리비 신자들을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바오로 사도의 간곡한 순수한 아가페 사랑이 가득 담겨 있는 ‘사랑의 결정체’같은 말씀입니다.
“사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애정으로 여러분 모두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증인이십니다. 그리고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 더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때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부디 이런 사랑 충만한 대림 광야 시기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바오로의 말씀에 그대로 공감하니 강론을 쓰는 제가 흡사 바오로가 된 기분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회개한 영혼들에게 선사되는 겸손, 지식, 이해, 분별의 지혜등 풍부한 축복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광야의 대림시기, 우리의 영원한 도반 이신 희망의 주님을, 기쁨의 주님을, 회개하게 하는 주님을, 사랑의 주님을 선택하여 열렬히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행복한 대림 광야 여정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오소서, 주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평화,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새날,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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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QL7D3ShW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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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 6)
먼저 사람이
있고 구원이
있다.
모든 출발은
우리가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출발도
도착도
사람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사람 앞에
소중한
사람이 있다.
너무 중요한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다.
사랑해야 할
사람이 있다.
마땅히
당연히
누려야 할
사람의 존엄함을
다시 생각한다.
하느님께서
손수 빚어
만드신
사람들이다.
사람 안에
하느님께서
탄생하신다.
사람과 함께
살려고 사람이
되셨다.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이시다.
서로에게
머리를
숙여야 할
하느님의
사람들이다.
사람이
구원이다.
사람으로 사는
기쁨을 다시
사람들에게
일깨워주신다.
소중함을
다시
배운다.
존중을
다시
깨닫는다.
사람을 위해
울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인권과 구원은
사람과 사랑처럼
연결되어 있다.
구원은
맞바꿀 수 없는
우리 인격을 향한
가장 좋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보신다.
하느님이
없는 사람은
없다.
우리의
현실에서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우리는
사랑의 사람들이다.
반갑고 고마운
사람들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소중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전해야 할 것은
사랑과 존중이다.
무시할 수 없는
그래서
사랑해야 할
사람의 삶이다.
사람의 길에
대림이 있고
사람의
성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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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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