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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예술가 아티스트 중국화가 B 20세기 경진학파 중국근대화가. 중국현대화가
2021년 02월 19일 16:06 시나 컬렉션 소스: 이페어케이
푸쉐차이 溥雪斋 보설재
보설재(1893~1966)와 명조(名伒), 호설도인(號雪道人), 정원(深園), 남석거사(南石居士), 송풍(松風) 주인 등이다.만주족, 청종실. 청조 말기에 건청문행, 어전행보, 교리내정소장의 서화, 금기서화에 능통하고 산수사 법당인, 화풍이 정교하고 빼어난, 보인대학 미술과 주임, 중국 미협 북경지회 부주석, 북경고금연구회 주석을 역임했다
溥心畬 푸신추,
또 다른 중요한 청종실 화가인 푸신추, 1896~1963)는 명유(名遺), 호는 서산일사(西山日士)이다.학당에 왕년에 1915년에 법률과 정치 독일 베를린 대학, 1928년 박사 학위를 받고 일본 교토 제국 대학 교수. 임귀국 후 국립 북평예전(北平藝專)으로 교편을 잡았으며, 중국화학연구회의 평의를 거쳤다.뛰어난 집안 환경 때문에 고대의 회화 명적을 보고, 모사할 수 있으며, 산수·인물·화훼가 겸능하고, 서예·시사·산수화 창작과 남북 종화법이 잘 조화되어 있으며, 화풍의 기상이 고화려하여 장다첸과 함께 "남장북보"라고 부른다.1949년에 대만으로 가서, 타이완사범대학 미술과 주임을 역임했다.『한옥당시문집』 『응벽여음집』 『김문고략』 『사서경문집증』 등의 저서가 있다.
청종실에서는 송원의 진적을 모사하고 사생에서 회화 기법을 익혀 유명한 화사가 된 부의재(19011966)를 비롯하여 송린(松 邻)이라는 호를 지었다.1958년 북경화원 화사로 초빙되었다.
부심총(普心畬), 부설재(普雪齋)는 1925년 관송방(關松房) 등과 함께 송풍화사를 조직하였다.본명은 고알 은제, 자는 야윈, 유석암 주인 등 필명을 사용한 관송방(19011982)이다.만주족은 소년기에 고궁, 고물진열소 및 개인 소장 고대의 명화를 모사하여 청록산수를 잘 썼으며, 서화와 도자기를 감정하여 『청대릉묘고』를 저술하였다.
모사에 뛰어나 화단으로도 치쿤 등이 유명하다.치쿤(18941944), 자는 징시(景西), 호는 징시거사(井西居士), 베이징(北京) 사람이다.일찍이 안료를 만들어 여러 명가를 알게 되었고, 강균으로부터 그림을 배워 모고에 정밀하고, 화풍이 세밀하여 소청록산수에까지 이르렀다.
마진·유규령 등은 고궁의 옛 장랑인 세녕(世寧) 등이 중서화법을 녹여낸 사실적인 작품들을 본떠 짐승 소재 개척에 나섰다.
유규령(18851967)은 자는 요진, 호는 나비은, 천진 사람이다.일찍이 고대 원체 회화와 수채화, 소묘를 독학하여 낭세녕 화법을 연구하여 날짐승으로 만들었는데, 조형의 기초가 좋고 화풍이 섬세하고 수려하여 사실감이 매우 강하여 동류의 제재 작품 중에서 일가를 이루다.1912년부터 그림을 팔며 생활해 왔으며 1956년 톈진 미협 부주석에 선출됐다.
이런 종류를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화풍도 사실적 그림의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일본
5.호사와 후기의 중국화학연구회
중국화학연구회는 금성이 서거한 1926년을 경계로 앞과 뒤의 두 시기로 나뉜다.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금성 4차 중-일 공동 참가 전시회 그림은 9월 귀국 후 오는 6일 상하이. 병들어 죽다.아들 김개번은 저우자오샹과 갈등을 빚었고, 그해 12월 베이징 첸량(錢 钱)골목 15번지 금성지묵다각에서 별도로 호사화회를 창립했다.호사(湖社) 명칭은 금성(金城)의 별호인 '연근호어은( 。湖)어은(漁恩)'의 '지(之)'자를 화회(畵會)명으로 따서 기념하고 있다.회화 회원은 대부분 '호수'자를 호수로 한다.
진카이 번 金开藩 김개번
호사화회는 김개번을 사무총장으로 혜효와 함께 부유했다.
1927년 11월 《호사반월간(湖社半月刊)》을 출판하고, 얼마 후 월간으로 바꾸었다.호패형, 혜효는 동등하게 편집되었다.1936년 3월까지 100기가 발행되었다가 폐간되었다.
중국화학연구회는 여전히 저우자오샹이 회장을 맡고 있고, 천반딩(陳半丁)·쉬종하오(徐宗浩) 부회장이 맡고 있다.
《湖社月刊》
《예림월간》.
1928년 1월간 《예술순간(藝 。刊)》은 72호 이후 1930년 1월부터 《예림월간(藝林月刊)》으로 바뀌어 1942년 6월까지 폐간된 총 118호 주조상이 주필을 맡았으며, 실제 편집은 젊은 화가 유능창(劉凌昌)이 맡았다.
두 그림은 주요 회합이다.여전히 수강생을 모집하여 회화 기술을 전수하고 있으며, 호사는 반달에 한 번씩 견학 성격의 연구회를 열어 정기적인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간행물을 통해 창작과 고금동·중외 예술을 소개하고 활동 정보를 전파하고 있다.
그때 두 회화 모임수백 명의 구성원을 거느리고 있는 두 회화에서 일부 구성원을 제외한 나머지 구성원들 사이에 벽이 뚜렷하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 매년 열리는 전시회와 성적전, 두 간행물에 소개된 화가와 작품, 인원이 교차한다는 사실이다.그러므로 그들을 하찮게 여기다평진에서 동기로 활약한 화가들은 더 확실했다
호사 활동 때 사진
1. 호사의 무게요구성원
호사의 입장에서 말하면, 그 지방은. 호사'이다.구성원 중에 금성 가문에 속하는 그림이 있다가문에는 금성의 아들인 김개번(1895~1946)과 자잠암(字潛岩), 호음호(號湖湖), 김개화(金開華·호술호), 조카개의( 。開·일자공희공), 개업(字 字 勤·호 계근) 등이 있다.
호사의 핵심 구성원.…중요한 것은
혜효동 惠孝同
혜효동(19021979) 호저호, 북경인, 만주족, 화회 부총간사, 《호사월간》 주필, 《호사천진지회》 회장, 산수화가, 청록산수에 능하고 서예에도 뛰어나다.1956년 이후, 북경 화원 예위원회 주임 위원을 지냈다
호패형과 제백석 胡佩衡和齐白石
후페형(18)92-1962) 명석전(名錫铨), 호랭암(號 冷岩), 하북탁현(河北涿縣) 출신으로 베이징(北京)에 오래 살았다.1919년 북경대학 화법연구회(畵法敎會)의 지도교사로, 《회학잡지(畵學誌)》 편집장을 지냈으며, 중국화학연구회 평의(平議)를 거쳐 1927년 호사화회(湖社畵會) 발기에 참여하였으며, 《호사월간(湖社月刊)》을 주관하여 북평각 미술대학에서 가르쳤다.1956년 이후 북경화원 화사와 원무위원, 산수화가가 "법고와 창작은 서로 어울려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만년에 수상·계·악 등지의 사생(史生)을 거쳐 풍격도 바뀌었고, 화풍도 고풍스럽고 색채도 짙어 기세가 드높았다.《왕석곡 화법 폭로》《냉암화예》《나 산수화 어떻게 그렸나》 등 다양한 저서가 있다.
진함동(18)981962)자 중영(中英), 호동호(號), 절강산음인(浙江山陰人)이 호사화회(湖社畵會) 창립, 임평의(任平議), 주교 화조화(花鳥畵)에 참여하여 뼈 없는 화훼보다 길다.
진연독(19)02-1967). 명후, 호매호, 광동매현 사람들은 금성에서 산수를 배우고, 뒤로 적을 공격하며 시와 음률을 길렀다.북평각 예술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진중문(18)96-1974)명유(名裕), 자는 중문(仲文), 호는 유호(柳湖)이다.허베이 준화인은 1915년 베이징대학 법정학과에 입학하여, 과외로 중국화학연구회에 참석하여 베이핑의 각 예술대학을 거쳐 1956년 베이징화원 화사, 원무위원으로 부임하였다.산수화가, 정감상에, 《중국 회화학사》가 있다.
서연손(18)98-1961)명조, 별호인 서리홍루주는 본관은 허베이선현(河北深縣)으로 베이징에서 태어나 조양대(朝陽大)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며, 서세창(徐世昌)정제 때 총통부 과원을 거쳐 1920년 중국화학연구회에 들어가 호사(湖社)로 옮겼다.공필인물화가. 1956년 북경화원 부원장을 지냈으며 임솔영, 오광우 등이 그림을 배웠다.
마진(190)0-1970), 본명은 석린, 자는 백일, 호는 운호이다.왕년에 궁정화가 조서촌으로부터 낭세녕 화마기법을 배워 북평 사법강습소 녹사를 거쳐 금성에 제사를 지내고 중국화학연구회 조교, 평의를 거쳐 호사로 옮겼다.1958년 베이징의 중국화원 화사로 활동하면서 그의 여동생 마롄여공화조(馬連如工花鳥)와 인물들.
오경정(19)04.1972) 본명은 희증(熙曾), 호는 경호(景湖)이며 본관은 소흥(绍興)이며, 베이징(北京).금성·진사(陳師)에서 산수를 지도하였는데, 처음에는 '4왕'에서 시작하여 송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50년대 이후 명산대천을 두루 돌아보며 옛것을 밀어내는 데 힘썼다.공력이 깊고 원숙하며 필치가 고아하고 윤택하다.베이징화원 부원장, 중국미술가협회 서기처 서기를 지냈다.
오광우(19)08-1970). 본명은 현증(顯曾), 오경정의 동생이다.19261942년 중국화학연구회에서 조교(助敎)와 공인물화(工人物畵)를 익혔고, 북평예전등교, 북경화원화사(北京畵院畵師)를 지냈다.
이 상달은 글자가 뛰어나다.네, 호는 오호, 산수공으로 일찍이 장학량 자녀에게 그림을 배우도록 가르쳤다.
장진복은 자는 복을 받는다.부,호 남호,가흥인,공시서화,매화 능숙하게 지으며,<남호시폐>를 저술하고 있다.
관평, 자는 중강호평호, 강소성 출신으로 관직의 여류이다.
유자구(음호)진소매(승호) 등은 천진, 조몽주(명호), 안소상, 계관지 등은 1950년대 이후 동북에서 교편을 잡으며 호사의 외지를 넓히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호사는 광둥 등지에도 지회를 두고 있다.
호사 성원 중에 있다황균, 손국생(효호) 같은 재능 있는 소년 화가들은 훗날 유명 화가가 된다.
호사회원 중환김장, 서총우, 손송소, 풍당, 풍제 등이 중요한 여성 화가들이다.
김장(188), 김장(1884-1939, 호도도, 금성의 삼매로 19001905년 영국으로 건너가 미술을 공부했다.1909년 금성을 따라 북경에 가다.민현 왕술근(계증)의 부인이며 당대 문사학자 왕세양의 어머니로 산수와 꽃에 자랐다.특히 물고기를 잘 그렸는데, 중국화학연구회 평의를 거쳐 호량지락집을 지었다.
서총우(19)02-1980, 명혜, 호총호, 호남 장사꾼.1921년 중국화학연구회에 들어가 금성(金城)에서 화조(花鳥)를 잘 다루었다.1957년 베이징화원 화사로 초빙됐다.
풍당호쓰촨성 출신, 펑제(棣棣)와 쌍둥이 자매, 궁화조(工花鳥)다.
2. 텐진호사분회와 호사 중의 천진 화가
호사화회 중에 있다적지 않은 천진 회원, 호사가 개최하는 회화 전람회는 북평에서 전시한 후, 관례로 천진에서 계속 전시한다.
1931년부터호사는 천진에서 국화전습사를 개최하여 산수, 화훼, 인물 등 3개 과목의 특습을 한계로 하여 겸습을 허용하고 화회평의의 우수자를 교수로 임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신청자들이 매우 몰려들어 예정된 100인 정액을 초과하였다.
혜효동임천진국화 전습사 사장.
평진양에서 활약하다.지, 톈진의 중국화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화가로는 천샤오메이(陳少梅), 류쯔구(劉子久) 등이 있다.
천샤오메이 진소매 陈少梅
진소매(19091954), 호승호, 호남형산인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진가언(매생)을 따라 시문 서예를 익혔고 15세에 중국화학연구회에 들어가 호사로 옮긴 뒤 1931년 톈진(天津)으로 건너가 호사천진지회(湖社天津支會) 업무를 주관하며 그림을 팔았다.천샤오메이(陳少梅)는 천자(天資)가 뛰어나고, 공력이 뛰어난 산수(山水), 인물화가로 화풍(畵風)과 남북 각지의 장점을 잘 조화시키고, 기사(工字)와 기능(技術)을 겸비한 서법(書法)이 예찬( 。 。)을 취하여 화면과 통일된 화풍을 이룬다.
류쯔주(劉子久, 1891~1975), 명광성(名光城), 호음호(號 饮湖), 쯔주쿠(資久), 톈진(天津) 사람이다.중앙측량학교를 졸업하고 조교로 남아 1922년 설립된 톈진미술연구회에 참가했다가 중국화학연구회에 입사해 호사를 이어받았다.1930년대 회진돼 1934년부터 톈진시립미술관의 비서, 국화반 교사, 관장을 지냈으며 1949년 톈진시립미술관이 톈진시예술관으로 자리를 옮겼다.천진국화연구회 주임, 천진시 미협 부주석을 역임하였다.산수화가들은 50년대 이후 현대 생활소재를 전통 필묵으로 표현하는데 주력하여 산수화 혁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당대 화가 왕송여·손극강 등은 그림을 배우기도 했다.
이학조(18941972) 천진 출신. 이름은 서령(瑞瑞)이고 호는 침호( 枕湖)다.장화암을 처음 배웠고, 금성의 조언을 받아 송원을 자행하였다.톈진 허베이(河北)여자사범학교 교수 출신으로 베이징 옌다(延大), 베이핑예(北平藝) 전문학교 등을 지냈다.
장종, 자는 자원, 호는 담호, 천진 사람도 천진에 가서 화예를 전하였다.
호사 평의를 지낸 장기익(19151968), 호군진(號君震), 북경사람들은 문장력이 뛰어나 원숭이 그림 그리는 데 뛰어나다.1956년에는 허베이사범학원(미술과), 톈진메이원(天津美院) 등에서 가르쳤다.
또 중·일전엔 호사와 가깝게 지내는 톈진(天津) 화가이자 금석서예가 팡야오(方若·정해인)가 참여했다.《호사월간》에 《각첩 팩스록》 등의 저서를 연재한 적이 있다.
3. 호사와 동북 중국 화계
조몽주(趙夢朱)·계관지(啓觀之)·안소상(安少翔) 등은 1950년대 초 선양(瀋陽)의 동북미전(東北美典·노신미술학원)에 가서 교편을 잡았다.
조몽주(趙夢朱, 1892~1984). 본명은 사희(思熙), 호는 명호(明湖), 허베이슝현(河北雄縣) 출신으로 베이징(北京)1911년 베이징공부학당(工部學堂) 문양과를 졸업한 뒤 1940년대 베이징여자서화연구회를 창립해 공필(工筆)·무골(無骨) 화훼(花)에 능했다.1949년 베이징 중국화회 부회장을 지냈고, 50년대엔 동북미 전임교수로 자리를 옮겨 랴오닝미협 명예주석에 올랐다.
조몽주(趙夢朱)에게서 화훼를 처음 배운 안소상(安少翔, 1914~1)은 1934년 보인대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고물진열소 국화연구관에서 고화를 모사한 후 베이징(北京)에서 계관지(啓觀之), 종질부(宗質夫) 등과 설려화회를 조직하여 인물화를 교육하였다.호사화회(湖社畵會) 평의를 거쳐 1950년대 동북미전(東北美典)을 거쳐 선양국화회(瀋陽國畵會)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계관지(1915-)는 원래 이름은 유춘(育春), 산둥(山東)성 옌타이(煙臺) 출신이다.1938년 보인대학교 미술과, 호사화회 평의를 졸업하였으며, 50년대에는 동북미전(東北美典)을 가르쳤다.산수화가.
그들은 동북지역 중국 화단에 대해 개척의 공로가 있다.
4. 《호사월간》과 《예림월간》
두 간행물은 화사의 활동을 힘있게 뒷받침해 주고 있어 내용상으로는 동질감과 보완적 역할도 한다.
『호사월간』은 금성의 예술적 성과와 이론적 성과를 일관성 있게 소개하는 것으로, 북방 화단에서 '광대한 교주'로서 금성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금성의 '화학강의'는 창간부터 종간까지 연재됐다.근대의 대표적인 중국화 창작 이론 저서다.금성의 중국화에 대한 기본 인식은 《문인화의 가치》에서 천사가 진술한 관점과 거의 일치하며, 화가의 인품·절조·천자·경력·식견을 강조하였다."그림공부와 함께 본과 문인학사들은 적성의 예술을 기탁합니다" "예술의 본체에는 반드시 특별한 정신이 있습니다" "오늘날 예술에서 불멸의 화품은 옛날 옛 사람들이 그 날 정신에 부쳤습니다"
이런 인식에 근거해 금성은 당시 이른바 '베이징 시내 사람들의 양대 미신' 중 하나였던 왕스취안(王石谷)에 대해 "화성(畵聖)으로 불린 석곡은 결국 능품"이라며 "예술에 있어서는 못하는 것이 없고 정신적인 면에서는 우(愚)를 범했다"며 "비기예(非) 미순(未純)는 있는데 그림의 품격이 낮다"고 분석했다.
해상화파의 깃발인 임백년, 장자상에 대해서도 "늦은 화훼는 장자상, 즉 종임백년이 아니다.학자는 상서로운 자는 속세에, 종백년은 야에 흐른다."그는 청대 남전의 화훼 작품이 "기운으로 이기기만 하면 힘이 미치지 못하는데, 오늘날 남전의 화자가 많이 들어가고 섬약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고 자상·백년으로 그 폐단을 고치려 하지만 고대를 갈수록 더 멀어져 구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근데 조지겸 씨 작품결이라고 생각하셔서새롭고 기발한 배치가 진실에 가까우면 다 취할 수 있다. "붓으로 늠름하고, 섬세하고 달콤한 기운을 씻으면 비록 충동질과 혼융의 원인이 식자에 의해 병들지만, 마음대로 발라지고, 규칙에 맞게 행동한다."는 말이 세상의 들여우보다 훨씬 낫다.
금성(金城)은 당시 '미술혁명'의 주장을 신랄하게 비판했다.자신도 중국화학연구회에서 호사에 이르기까지 예술적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금성은 전통 계승에 대한 시선은 문인화가 아니라 송원을 쫓는 것으로 명청 이래 화가 화파의 취사에 일가견이 있다.
『화학강의』에서 특히 귀중한 것은 중국 회화 재료의 연구와 회화 기법에 대한 소개로, 그 자신의 다년간의 연구와 창작 실천의 결정체이다.
화회활동에 협력하여 《호사월간》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면에서 좋은 역할을 하였다.
하나는 당(唐)의 역대 제왕상 등 시대별, 화풍별 고대 회화 명작과 당대 명화가들의 작품을 싣고 평론해 학습자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제공했다.
석도화어록 등 고대 회화책과 당대 학자들의 연구서인 주계인(朱啓钤)을 모은 '존소당사수록(存所堂寺水錄)', 방약(方若)의 '각첩팩스록(閣帖 传真 传真錄)', 수석공(壽石工)의 '서학강의', 김개번의 화사(畵史) 저서, 그리고 진사증(陳師曾)·임국(林纾)·축지(賀履之)·호패형(胡培 。形)·위비闇) 등의 사론·창기법 이론을 선별하여 실었다.
회원들을 발표했다 워크 작품과 다량의 이론 연구도 적지 않은 글을 게재한 작품으로, 일본 화가들의 교류가 역할을 했다. 참고부족한 점은 김 씨 가문의 색채와 일부 군정요원의 그림을 지나치게 찬양하고 간행물을 훼손하는 학술적 이미지다.
《예림월간》의 내용은 《호사월간》과 많은 비슷한 장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문사 방면에 더욱 편중되어 있다.고서화 작품 외에도 고미술, 금석 작품, 사진 작품, 외국 미술 작품도 많이 소개돼 신흥 목각에 대한 지지와 프랑스 문화재 보호 법령의 편파 소개로 편집자들의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당시 가장 오래 지속돼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미술 간행물로, 1930~40년대 중국 미술의 모습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문헌이다.
육여론
1. 호수 안팎
20세기 초기의 북방 지역에서 활약한 화가는 두 그림과 친하거나 소원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작품이나 논저 등은 두 화회의 간행물에 응당 추중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호사화회 내외의 화계 엘리트들은 대부분 당시 베이징 지역의 중요 미술대학인 예를 들면 국립 북평예전, 보인대학교 미술학과 교직을 맡아 화회와 학교의 미술교습이 서로 겉으로 드러나면서 상호 이익이 증가하였고, 이 시대 징진지역의 중국화 인재들이 성장하는 양적인 환경을 구성하였다.
이 시대의 화가는 학양, 식견, 문화 구조가 전 세대와 크게 다른데, 베이징 지역의 특수한 인문 환경, 고궁의 황실 소장품 출시와 대량의 사립 서화 문물 수집은 전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였다.적지 않은 사람들이 유학하여 해외 유학에 대한 폭넓은 식견을 가지고 있으며, 게다가 출판물에 대한 소개로 남북 간, 중국과 외국 간에 더 많은 교류가 있다.그들은 예술관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지만,전통을 수호하는 입장에 있어서는 일치한다.중국화학연구회가 가장 먼저 제안한 '고법(古法) 정련, 박채신지(博采新知)'는 당시만 해도 보수적 구호가 아니라 포용성과 개방성이 있었다.
20세기 초기의 북방 중국화 창작의 전체 면모를 보면, 중국화의 세 주요 화종이 화조, 산수화로 가장 현저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주수 제재에도 새로운 면모를 보였다.이 시기의 산수, 화조화 창작은 송원의 전통을 거슬러 올라가서 남종과 북종, 원체와 사의를 융합하고 사생을 중시하며, 서화의 빛과 색채 요소를 적절히 흡수하여 청대와는 다른 예술적 면모를 형성하는데 이미 큰 진전을 이루었다.하지만 작품 속에서는아직 옛사람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한 채 새로운 시대상을 느낄 수 없다.
인물화가 약하고 서연손과 진연독, 류링창, 오광우, 임곶영, 왕숙휘 등 인물화가 30~40년대 작품들은 고전적 소재로 현대적 인물을 그려내기에 여념이 없다.북측 화단에 진홍수 임백년필의 뜻을 담아 들여온 유명(18841935)의 그림은 여전히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사녀화다.
이것은 시대의 한계이고, 한계는 북방 화단만이 아니다.
2.제백석과1940년대경진화단
20세기 40년대 일본인 북방 지역의 점령을 겪었다 시대와 내전 당시에 점령된 지역의 발전을 잃으면 중국화의 문화 환경을 이전에 호수의 활동사와 40중국학 연구회가 잇따라. 초그렇다면 우선 그것들을 쉴 수가 없었다 남긴 영향력은 오히려 넓고 깊다.두 화회와 미술대학에서 양성된 중국 화인재는 이후 발전함에 있어서 급료를 계승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50~60년대에는 미술대학의 중국화 교습과 새로 설립된 화원의 지도와 창조가 되었다.핵심적인 일을 하다.
1940년대 제백석의 영향이 두드러지면서 이 시기의 북방 중국화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가 됐다.
진반정·진사증·제백석 세 사람의 예술은 모두 오창석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웅건한 화풍으로 북방 화단을 풍부하게 하였다.
제백석
본명은 순지(純智·1864~1957)로, 자는 빈생( 号生), 호는 백석(白石), 별호는 차산음관주인( 。山音館主), 부평( 。平) 노인 등은 후난(湖南)성 샹탄(尙談)으로 개명했다.일찍이 목수를 지냈으나 후친원(胡闿園), 왕개운(王闿運), 번판산(樊樊山) 등의 문인을 만나 시서화와 전각(戰刻)을 배워 민간 화사에서 문인화가로 전환하기 시작했다.40대 이후 집을 나서 '오출오귀(五出五歸) 몸가짐 반나절'을 하며 눈을 크게 뜨고 베이징 등지에서 야다산인(八大山人)·서위(徐衛)·김동심(金東心) 등의 작품을 만나 그 영향을 받았다.
제백석은 여러 차례 베이징을 거쳐 1919년 57세에 정식으로 베이징에 정착해 그림을 팔며 인을 새기고 살아가는데, 그의 화풍은 베이징 화계에 잘 보이지 않아 "모든 그림은 무능하게 들어간다" "오초목의 무리도"와 같은 강렬한 좌절감을 느꼈다.
제백석의 그림은 1920년대 초, 진사와의 교면이 있은 후, 진사의 권고를 받아들여, 새로운 뜻을 나타내고 화법을 변용하여 본래 좋아하던 팔대산인의 냉일한 풍격을 버리고, "자발홍화묵잎 일파만파" 화풍이 웅강함, 열렬함, 아속과 결합하여 그 동안 뚜렷하게 오창석 금석의 의미 있는 사풍을 이루었다.제백석은 서위·팔대산인·오창석을 '구원을 주구로 삼가문 아래를 돈다'는 학화의 모델로 삼았다.
1922년 5월 금성.진 등에서 프로모션사는 도쿄에서 개최되며 2차 중-일 연합사는 전시회에 가서 진 작품이 동시에 가지고, 제백석이 성공해 전시된 그림을 다 팔렸고, 제백석은 한점 꽃, 산에 100선에 팔리고 있다. 은화가은화가 250.당시 치바이스의 베이징 윤격은 다른 화가들의 반쪽이었다.제백석은 감격에 겨워 "연지를 찍어서 살구를 만들었는데, 백금자 종이 여러 사람이 칭찬했다.평생 유명 화가를 죽이는 게 부끄러웠고, 해국은 노화가를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해외 정보 피드백, 제백석 그림 힘 있게 끌어올렸다경계의 지위.
제백석의 시, 책, 그림, 인은 1940년대에 예술적으로 절정에 달했을 때 많은 알짜배기들이 이 시기에 생겨났다.제백석은 북평 함락 기간 동안 위선적인 관청의 각종 접대활동을 완곡하게 거부하였으며, 1939년 "백석노인은 마음의 병환으로 손님 접대를 중단하였다"는 고백을 붙였다.항전 승리 후, 다시 윤례를 내걸어 그림을 팔아서 인쇄를 하는 생활을 회복하였으며, 그림의 이름은 익성하였다.
말년의 치바이스는 오묵오주( 污墨 误 朱)에 그 연인이 허노부(許老夫)는 없을까라며 미래세대가 그의 예술에 동의할까 걱정했다.1950년대 이후 예술가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중앙미술대 명예교수를 받았다.1953년 중국미술가협회 주석에 선출돼 중앙문화부로부터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그는 도이치민주공화국예술과학원 명예원사, 1955년도 국제평화상을 받았다.1963년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되기도 했다.
제백석은 죽을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그의 예술적 길을 이어받은 사람은 이고선, 이가염, 왕설도, 구석명(겸사왕몽백), 허린려, 누사백 등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제백석의 예술은 1920년대 임풍면·서비홍의 추앙을 받으며 예전교수로 초빙됐다.서비홍은 옛 화가 중 가장 시대적인 사람으로 제백석을 꼽았다.제백석은 진사증 외에 저우자오샹, 후페이형 등과도 교류가 적지 않았다.'호사월간' '예림월간'은 제백석을 많이 추대한 반면 예술관념이나 창작로에서는 호사의 주장과 확연히 달랐다.
제백석예술의 성숙과 사회적 공감을 얻는 것은 북쪽 화단이 창작 취향의 전환으로 새로운 역사의 단계에 들어섰다는 의미인 것 같다.
제백석과 동년배인 노화가 황빈홍이 북평에 머물던 고희년은 산수화 창작에서도 예술의 절정에 이르렀다.
황빈홍 黄宾虹
황빈홍( 1865~1955), 명질(名質), 글씨가 소박하고, 쓰이샹(予向), 다첸(大千) 등의 필명으로, 만년에는 빈홍(빈홍)으로 본관은 안후이충(安徽 。)현으로 저장(浙江)성 진화(金華)에서 태어났다.
황빈홍은 문화적 소양이 깊은 걸출한 화가이자 문사, 금석, 저서 등에 정통한 학자다.중년에 상해에 가서 국학보존회에 참석하여 《국수학보》를 편집하였다.훗날 문학으로 혁명을 선전하는 남사 창설에 참여하였다.상해에서 30년 동안 줄곧 창작, 저술과 편집, 교학에 종사하였다.《미술총서》《신주국광집(神州國光集)》 등의 서적을 편집 출판하였으며, 중국금석서화예관학회(金石書畵觀學會)·정사(貞社)·한지우사(寒之友社)·해상제포관(海上題 。館) 금석서화회(金石書畵會) 등의 동아리 구성원이다.1937년 이후 10여 년간 북평에 머물면서 고물진열소와 북평예전(北平藝專)을 맡아 평일에 두문작화(頭門作畵)와 저술하였다.1943년 상하이(上海)에서 첫 개인전 '80·서화 전시회'가 열렸고, 1947년 항저우(杭州)의 예전(藝典·현재 중국미술학원) 초청으로 상하이(上海)를 거쳐 항저우(杭州)로 부임했다.1949년 이후 베이징민족미술연구소(현 중국미술연구소) 소장, 화둥미협(華東美協) 부주석 등을 지냈다.
황빈홍은 많은 화사화론, 금석학 연구 저서를 남기고 펜으로 쓴 5자결(평·원·유·중·변)과 묵육법(농·담·파·적·초·숙)을 정리했다.황빈홍은 평생 명산대천을 두루 돌아보며 산수화를 창작하여 황산, 신안화파에서 시작하여 북송을 계승하여 내미를 중시하였으며, 젊은 시절에는 화풍이 담백하고 아름다웠으며, 만년에는 혼후화자로 전환하여 연구자들은 전자를 백빈홍, 후자를 흑빈홍이라고 불렀다.그는 근세에서 가장 문인의 품격을 갖추고 소양하면서도 화리를 깊이 꿰뚫고 있는 일대 산수화의 대가이다.
1940년대 북방 중국화계에는 당대 미술사에 남을 두 가지 사건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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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도》.
첫째는 1943년 10월 장자오허(19041986)가 서화 스케치 기법을 전수받아 거대한 인물화 장권인 유민도를 완성했다는 점이다.장자오화(蔣曹和)는 이 시기 사회 하층민들의 고달픈 생활상을 표현한 여러 인물화를 이 시기 가장 현실적인 인물화로 꼽았다.
1947년 서비홍이 국립북평예총장으로 재직할 때 벌어진 중국화 수업내용을 둘러싼 논쟁은 3명의 국화교수가 교화조 시설 개선을 요구하며 "서비홍이 국화를 훼손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전단을 뿌리는 등 베이징 국화계 기수 천반정(陳半丁)·수석공(壽石工)·푸쉐차이(普雪齋) 등 많은 사람이 저서를 냈다.이에 서비홍을 비판하였다. 서비홍은 기자회견을 열어 《신국화 건립의 절차》를 발표하고, 소묘훈련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옛사람들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에 반대하며, 사법조화를 제창하는 주장을 폈다.
이 논쟁은 5·4 이래 중국화 발전에 관한 논쟁이 새로운 시대적 조건에서 계속되었다.1950년대 중반 허무주의와 보수주의의 논점으로 발전한 것은 또 뒷말이다.
(전문은 북경 화원편 《경파 회화 연구》에서 발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