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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도(生死島) 2-25
『쫓아라!』
진필생이 창백해진 얼굴로 악을 썼다. 의외의 사태에 어리둥절
해 있던 자들이 아우성을 치며 육초량이 사라져 간 어둠을 향해
메뚜기 떼처럼 뛰어 나가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으음...... 이제는 그 누구도 어쩔 수 없을 만큼 놈은 커버렸
다.』
폭풍이 휩쓸고 간 듯 폐허가 되어 버린 방안에 혼자 서서 진필
생이 중얼거렸다.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가 성큼 옥풍
규의 처참한 주검 앞으로 다가갔다. 조심스런 눈길로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펴본 진필생이 서슴없이 옥풍규의 품속에 손을 넣었다.
진필생의 손에는 어느덧 유마검보(幽魔劍譜)가 들려 있었다.
피에 젖은 그것을 재빨리 품속에 갈무리하고 돌아서는 그의 입가
에 한 줄기 흡족한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 * * *
『사자검(獅子劍) 육초량이 도대체 어떻게 생긴 자지?』
『근자에 들어 그 자의 이름이 하북 무림을 떠들썩하게 하는 것
으로 보아 대단한 자인 모양이야.』
『한데 그가 왜 무림맹과 정도 오파의 명의로 무림의 공적으로
선포되었는지 모르겠군.』
『그건 그가 무림맹의 태상을 죽이고 그에게서 한 권의 비급을
탈취해 간 때문이라더군. 무슨 유마검보라던가...』
『허어, 그렇다면 정말 대단하겠는걸. 그 자가 혼원장공이라는
비급도 가지고 있다던데...』
『쉬잇, 이건 비밀인데... 그 자는 그밖에도 탄지십팔해라는 비
급도 가지고 있대.』
『뭐? 그럼 천제무황경상의 다섯 비급들 중 이미 세 권이 그 자
의 손에...』
『쉬이, 이 사람아, 소리가 너무 커. 그 일 때문에 지금 강호가
온통 벌집 쑤셔놓은 것 같은데 입 조심해야지.』
한단부(邯鄲府)의 북쪽 경내에 속해 있는 작은 마을 낙안읍(落
雁邑)의 허름한 주루 안이었다. 서로 이마를 맞대고 수군대던 세
사나이는 그 복색으로 보아 하북 무림에서 행세하는 자들인 듯
싶었다. 그 한편에서 묵묵히 식사를 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일남일녀가 있었다.
거친 수행자 행색의 사나이는 바로 육초량이었고, 그와 마주앉
아 있는 아름다운 여인은 냉여옥이었다.
(내가 무림의 공적으로 선포되었다고? 게다가 세 권의 비급을
가지고 있다고? 이건 지독한 흉계로군.)
젓가락을 내려놓은 육초량이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를 냉여옥
이 넌지시 건너다보고 있었다.
(후후, 소문이란 참으로 빠르군. 하루 밤새에 하북무림 전체에
그 일을 모르는 자가 없게 되었으니 말이야.)
그녀는 남모르게 흡족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한 소문을
은밀히 흘린 장본인이 바로 그녀 자신인 까닭이었다.
(이젠 올가미가 점점 더 죄어들기 시작했다. 조금만 지나면 이
사나이는 발붙일 곳이 없게 되고... 그 때가 되면 싫어도 나에게
올 수밖에 없겠지.)
냉여옥의 그런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육초량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서두릅시다. 북경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소.』
『무엇이? 그 애송이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서 오히려 두 권의
비급을 더 차지했다고?』
대전 안이 쩌르릉 울리는 호통과 함께 발을 구르는 인물이 있
었다. 세가닥 염소수염에 금빛 용포를 입고 있는 냉막한 인상의
그는 비천맹주 사국천이었다. 그의 눈에서 한 줄기 싸늘한 흉광
이 일렁였다.
『찾아라! 놈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당장 찾아내라. 본좌가 다
시 한 번 그 놈의 손속을 시험해 보고 말겠다!』
음울한 분위기가 각내(閣內)의 칙칙한 어둠을 더욱 무겁게 가
라앉혔다. 불조차 밝혀지지 않은 어둠 속에서 석상처럼 앉아 있
는 자의 어깨 너머로 짙은 재색의 침묵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질식할 듯한 어둠을 느끼게 하는
인물. 귀문(鬼門)의 마백조(馬白爪)였다.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나는 그의 눈이 더욱 귀기를 느끼게 했
다.
『무정귀(無情鬼)!』
차가운 일성이 텅 빈 어둠을 가볍게 흔드는가 싶었는데, 그 어
둠 속 어디에서인가 스며 나온 듯 기척도 없이 나타나 부복하는
흑의인이 있었다.
『삼가 명을 기다립니다.』
감정이라고는 실려있지 않은 건조한 음성이었다.
『본문의 십이사신을 모두 주마. 가서 육초량 그 아이를 잡아와
라. 아니면 네 목을 들고 오도록. 기한은 열흘이다.』
『존명!』
무정귀의 신형이 안개가 흩어지듯 기척 없이 사라졌다. 귀문
(鬼門)의 총단이었다.
* * * *
북경까지는 이제 천리길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육초량은 열흘
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북경이 가까워질수록
어깨의 짐도 가벼워졌지만, 이 며칠 동안은 그렇지 못했다. 계속
되고 있는 냉여옥의 침묵 때문이었다.
어쨌든 북경까지만 데려다 주면 그는 훌훌 털고 자유로운 그의
길을 가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그녀로부터 받은 목숨의 빚을 비
로소 갚고 자유를 되찾는 것이다.
육초량은 발걸음을 조금 더 빨리 했다. 그는 되도록 관도가 아
닌 산 속의 소로를 택해 북상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이 이미
무림의 공적으로 낙인찍히고, 세 권의 비급을 가지고 있다는 터
무니없는 소문에 휩쓸린 이상 사람들의 눈에 자주 띄어 좋을 것
이 하나도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무림맹은 물론, 비천맹이나 귀문의 힘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
니었다. 무림맹의 방대한 조직과, 비천맹의 실혼수라(失魂修羅)
들, 그리고 귀문의 열화신통(熱火神筒)은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육초량은 앞으로 남은 천리길이 어쩌면 그가 지나온 삼천리의
여정보다 더욱 험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마음이 더
욱 무거워졌다.
(사나이가 한 번 한 약속이다. 반드시 지킨다.)
그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약속대로 냉여옥을 무사히 호
위해 북경 그녀의 조부 댁까지 데려다 주리라는 각오를 새롭게
했다.
한 여름이 지나고 어느덧 가을을 알리는 팔월의 저녁이 찾아왔
다. 팔월에 접어들자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해진 바람이 불어
왔다. 냉여옥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이슬을 맞으며 노숙할 수가
없었다. 산그늘을 더욱 짙게 하며 밀려드는 어둠 속에서 육초량
은 오늘밤을 지낼만한 곳을 찾아 부지런히 주위를 살폈다. 인가
라도 눈에 띈다면 하루 밤 신세를 청할 셈이었으나 워낙 험한 산
중이라서인지 인가의 불빛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행히도 골짜기 하나를 건너자 우거진 측백나무 숲 사이로 어
렴풋이 보이는 낡은 사당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으로 향하는
육초량의 뒤를 냉여옥이 시종 우울한 얼굴로 말없이 따랐다.
사당은 낡고 황폐하여 금방이라도 귀신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
았다. 바닥에는 켜켜이 먼지가 쌓였고, 휘장처럼 늘어진 거미줄
과, 퀴퀴한 곰팡내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한쪽이
무너져 내린 지붕 사이로 스며드는 교교한 달빛이 사당 안을 가
까스로 밝혀주고 있었다.
서늘한 밤 기운이 산중에 이르러서는 어슬한 추위마저 느낄 만
큼 냉랭해져 있었다. 육초량은 대충 바닥에 쌓인 먼지를 털어 내
고, 반 넘어 떨어진 문짝을 쪼개 불을 지폈다. 활활 타오르는 모
닥불이 사당 안의 퀴퀴한 곰팡내와 어둠을 멀리 밀어내고 훈훈한
온기를 가져다 주었다.
냉여옥이 비로소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 듯 육초량 곁에 다가앉
아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여옥 낭자, 고생이 심하군.』
육초량의 무뚝뚝한 말에 그녀가 오래간만에 배시시 웃었다.
『저 때문에 오히려 육가가의 고생이 더 심한 걸요. 미안해요.』
그녀의 초췌해진 안색을 바라보던 육초량은 문득 애처로운 생
각이 들었다. 그가 거친 손을 들어 가만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
었다.
『이제 한 열흘만 더 가면 북경이요. 그 때는 곧 편한 잠자리와
좋은 음식을 대하게 될 터이니 조금만 참구려.』
『그 다음에는 어쩔 셈인가요? 이대로 위험한 강호행을 계속할
건가요?』
『나야 오직 검의를 찾아 천하를 독보하는 몸. 걱정할 것 없
소.』
『아, 당신은 너무도 많은 적을 만들었어요. 그러지 말고 북경
에서 소녀와 함께 지내는 게 어떻겠어요?』
육초량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그대의 집이 무슨 수십만 대군으로 에워싸인 황궁도 아닐 텐
데 내가 어디에 있건 나를 노리는 자들이 단념하겠소? 내가 함께
있으면 오히려 그대의 집마저 화를 당하게 될 터. 역시 나는 그
대를 북경까지 데려다 준 후 떠나는 게 좋겠소.』
『저를 걱정해서인가요?』
냉여옥의 서늘한 눈이 육초량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소.』
그녀를 마주보며 육초량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지난 두 달 여의 여행 동안 육초량은 그녀에게 정이 들어 있었
다. 그것은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도둑처럼 찾아온 것
이어서 미처 방비할 수도 없었다. 이 영악한가 하면 순진하기도
하고, 철없는 말괄량이인가 하면 어느새 정숙한 여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종잡을 수 없는 아가씨는 그에게 처음에는 거리낌을 주
었고, 다음에는 호기심을 갖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육초량은 그녀의 생사에 깊이 관여하게 되면서
단지 그녀와 맺은 약속 이외에 그 스스로도 이름지을 수 없는 묘
한 감정으로 냉여옥을 보살피게 되었다. 그것은 어느덧 그녀에게
기울어가기 시작한 애정 때문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대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소. 그대를 위해서
라면 백 번이라도 검을 뽑겠으나, 매번 그대를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요.』
『......』
냉여옥의 눈이 기쁨으로 반짝였다. 그녀가 육초량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항상 나를 쫓아다니는 혈풍을 나로서도 피할 수 없는데 어찌
아무 죄도 없는 그대마저 위험 속에 함께 있게 할 수 있겠소?』
『아, 당신이 나를 그처럼 생각해 주신다니 소녀는 그것만으로
도 행복해요.』
냉여옥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음성이 두근거리는
가슴의 고동을 싣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육초량이 그녀의 손
을 살며시 잡았다.
『만일 나로 인해 낭자의 백옥 같은 몸에 상처라도 생기게 된다
면 나는 평생을 가슴아파해야 할 것이요.』
『아아...』
냉여옥이 몸을 던져 육초량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육초량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녀의 작은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오. 나는 내 생명을 걸고서라도 그대를 지
켜줄 것이오. 북경까지는 이제 열흘. 그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
소.』
육초량의 단단한 가슴에 안겨 그의 체온과 체취와, 숨결을 온
몸으로 느끼며 냉여옥은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이 무쇠 같은
사내가 드디어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놓기 시작했다는 기쁨이었으
며, 또한 샘솟듯 우러나는 애정이었다.
이것은 그녀에게 있어서도 뜻밖의 일이었다. 처음 그녀는 자신
의 미모와 심계로 육초량을 사로잡아 그를 자기의 치마폭 아래
두고 마음대로 부리겠다는 생각을 가졌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녀
에게 있어서 일종의 연극과도 같은, 재미있는 놀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냉여옥은 어느새 자신도 모
르는 사이에 스스로 파놓은 애정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었다. 남
녀간의 일이란 왕왕 그렇듯이, 육초량에게 있어서도, 냉여옥에게
있어서도 뜻밖의 결과를 준비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제 5 장 냉여옥(冷麗玉)
<1>
파아앗-!
무너진 지붕 위에서 벼락같은 검격이 떨어져 내렸다.
(왔다!)
이미 심상치 않은 기운들을 감지하고 있던 육초량이 몸을 틀어
냉여옥을 보호하며 불붙어 있는 나무토막 하나를 집어 수직으로
쳐 올렸다.
『으아악-!』
참혹한 비명과 함께 화목(火木)이 떨어져 내리던 자의 복부에
깊숙이 박혔다. 매캐한 연기 속에 누린내가 실려 확 퍼졌다. 화
목이 그 자의 뱃속에서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은 채 장기를 태우
고 있었던 것이다.
『이놈!』
호통소리가 사방에서 울려왔다. 뚫어진 벽과 창틀을 뛰어넘어
한 몸인 듯 쳐 오는 사 인의 검격이 음험하고 악독하기 짝이 없
었다.
『흥, 귀문의 귀졸들이로구나!』
싸늘하게 비웃은 육초량의 철검이 검집에서 뽑히는 기세를 타
고 눈부시게 마주쳐 나갔다. 종으로 횡으로 질풍처럼 긋고 뻗어
나가는 그의 섬전 같은 검격은 일시에 칠십이변(七十二變)을 베
어 가는 출운산격(出雲算擊)이었다.
『으헉!』
『흐윽!』
미처 막아보고 말고 할 여지도 없이 네 명의 암습자들이 각기
육초량의 비정한 일격에 맞아 쪼개졌다.
『이야앗!』
죽은 자를 차 던지며 다시 밀려드는 십여 명의 귀졸들을 향하
고 육초량이 무시무시한 기합성을 터뜨렸다. 그의 몸이 하나가
열로 나뉜 듯, 눈부시게 튀어 나가고 물러서며 자유롭게 휘돌았
다. 극치에 이른 분수(分水)의 보(步)가 좁은 공간 속에서 육초
량의 그림자를 허깨비처럼 둥둥 떠 보이게 했다.
그 현란한 보법에 체중을 싣고 마음껏 오가며 휘두르는 검격이
눈을 어지럽게 했다. 출운산격에 이은 일자낙홍(一字落紅)과 십
해출횡(十海出橫)의 폭풍검이 쾌속한 중에 무거움의 조화를 아우
르며 정신 없이 떨어졌다.
그 눈부신 검격 앞에서 다시 처절한 비명들이 연이어 터져 나
왔다. 유성우(流星雨)에 꿰뚫린 구름이 흩어지듯, 십여 인의 귀
졸들이 육초량의 사나운 검에 맞아 양단되며 흩어졌다.
육초량의 신들린 듯한 움직임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흡사
전신(戰神)이라도 되는 듯한 무위(武威)를 떨치며 순식간에 십
오 인의 암습자들을 베어 넘긴 사나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
가 냉여옥을 한 팔로 감싸 안고 사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와
함께 사방에서 날아든 불덩어리들이 순식간에 사당을 불길로 휩
싸 버렸다. 간발의 아찔한 차이였다.
『열화신통!』
육초량이 걸음을 멈추고 경악하여 부르짖었다.
『흐흐흐... 놈, 맛보기를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
음침한 웃음소리를 끌고 측백나무 뒤의 어둠 속에서 한 인물이
천천히 나섰다. 시체처럼 푸르뎅뎅한 얼굴에 깡마른 몸집의 무정
귀(無情鬼)였다. 그 뒤를 따라 십여 명의 귀졸들이 각기 열화신
통(熱火神筒)을 겨누며 나타났다.
『여옥, 이곳에 납작 엎드린 채 꼼짝하지 말고 있으시오.』
육초량이 다급하게 속삭이고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 직후, 그
는 뒤로 물러서는 듯하다가 갑자기 몸을 틀며 땅을 박찼다. 그의
신형이 흐릿한 잔상을 끌며 무정귀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부딪쳐
들어갔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다수의 적을 상대로 하여 수없이 싸워오면서 터득
한 실전의 전술이었다. 절대적인 세불리(勢不利)에 처해있을 때,
상대방은 그것을 믿고 조금이나마 마음이 느슨해지기 마련이었
다. 그 틈을 타 이쪽에서 의외의 움직임을 보이면 십중팔구 그들
은 당황했다. 은연중에 서로를 의지하게 되는 다수의 단점이었다.
그러면 번개같은 움직임으로 상대의 허를 찔러 자신의 열세를 가
리고 적장을 잡는다. 그것으로 승패의 명암이 갈릴 때가 한두 번
이 아니었다.
『앗!』
예상대로 당황한 귀졸들이 잠깐 동안 혼란스러워했다. 그들이
미처 열화신통을 발사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찰라의 순간이었다.
씨이이-
필살이 비연참(飛燕斬) 일격이 떨어진 곳은 의외에도 무정귀의
머리 위가 아니었다. 그의 검은 곧장 열화신통대(熱火神筒隊)의
대주(隊主)인 열화신(熱火神)의 정수리를 쪼개갔다. 당황한 열화
신이 엉겁결에 신통을 들어 육초량의 일격을 받았다.
퍽!
가볍게 신통을 양단한 육초량의 일격이 그대로 열화신의 정수
리를 쪼개고 돌아왔다. 열화신통이 절단되며 쏟아져 나온 불꽃들
이 사방으로 현란하게 흩어져 날았다. 주위에 있던 자들이 크게
놀라 불씨를 피해 달아나기 바빴다. 그러자 그들 열화신통대는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했다.
『이놈!』
그제서야 사태를 판단하고 사납게 휘둘러온 무정귀의 혈도(血
刀)가 육초량의 온몸을 도기(刀氣) 속에 가두고 단번에 쳐버릴
듯 목덜미 위에 떨어져 내렸다.
『흥!』
가볍게 코웃음을 친 육초량이 날카로운 좌수도(左手刀)로 그의
도신을 쳤다.
땅-!
맑은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도신을 타고 밀려드는
육초량의 엄청난 내가진력이 무정귀의 넋을 빼앗았다. 헛바람을
들이킨 그가 칼을 던져 버리고 뛰듯이 물러났다. 한 차례의 진동
으로 호구가 찢겨 칼을 잡을 수 없게 되어버린 그였다.
천하제일기공(天下第一氣功)이라는 북천일마 단목굉의 건곤일
선기공(乾坤一線氣功)의 운기 비법을 대오한 육초량이었다. 그의
기법은 이미 일양초동(一陽初動) 심각위묘(心覺爲妙)의 경계에
든 바가 있었다. 그런 내력을 모르는 무정귀가 단번에 낭패를 본
것은 당연했다.
씨이이-
열화신의 정수리를 쪼개고 빠져나갔던 검봉이 휘파람소리를 내
며 꺾어져 날아들었다.
『으헉!』
막 중궁(中宮)을 차고 신형을 틀어 칠성(七星)을 밟아가려던
무정귀의 십팔변보(十八變步)가 육초량의 사나운 일자낙홍 일격
에 풍비박산(風飛雹散)나 흩어졌다. 허리가 동강난채, 그의 하체
는 상체를 허공 중에 띄우고도 놀랍게 몇 보를 더 옮기다가 풀썩
무너지는 것이었다. 귀문의 사귀 중 두 번째로서, 한자루 혈도를
휘둘러 중원 무림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던 왕년의 거마(巨魔)
혈도(血刀) 낭중(浪中)의 비참한 최후였다.
육초량은 숨돌릴 틈 없이 맹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시 노
호를 터뜨리며 귀졸들의 무리 속으로 뛰어드는 그의 모습이 성난
사자와도 같았다.
엎드려 그 모든 것을 낱낱이 보고 있던 냉여옥의 얼굴이 놀람
으로 파랗게 질려갔다. 설마 혈도 낭중이라는 절정의 고수가 육
초량의 일검을 받아내지 못하고 당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눈앞
에 보고도 믿지 못할 노릇이었다.
도대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육초량의 놀라운 발전에 냉여옥
은 왈칵 두려움을 느꼈다. 불과 석달 전 그는 구룡탄에서 사국천
의 일장에 중상을 입었다. 그런데 두 달 후에는 당당히 철협 강
사옥을 맞아 겨루더니,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을 뿐인 지금은 왕
년의 초 거마 혈도 낭중을 일검에 베어 버리는 모습을 보여준 것
이다.
(어쩌면 이제는 사국천이나 마백조와 상대하여도 지지 않을지
몰라.)
냉여옥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저 자를 내 사람으로 잡
아 놓던지, 아니면 더 크기 전에 여기서 없애야 할 것인지를 결
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귀문의 무리들에게 맡겨 그를 없애기에
는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었다. 이 때를 놓치면 영영 기회
가 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녀의 눈에 심한 갈등이 어렸다. 처음 육초량을 제거하자고
미가불이 주장했을 때 그것을 일축해 버렸던 냉여옥이었다.
-- 내가 한 번 점찍은 이상 누구도 내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
이것이 그녀의 호언장담이었다. 냉여옥은 손만 쓰면 쉽게 육초
량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었다.
-- 그도 한 명의 사내에 불과하다. --
이러한, 다분히 조소가 깔린 생각이 그녀에게 자신감을 갖도록
해준 것이었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나도록 그녀는 육초량을 자신
의 예속물로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처음의 조소와는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경이와 찬탄으로 그를 새롭게 보게 되었
고, 이제는 오히려 자기 자신이 그에게 빠져드는 것을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육가가, 너무 떨어져 있으면 소녀는 무서워요!』
벌떡 몸을 일으킨 냉여옥이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아수라장이
된 장내의 검명(劍鳴)과 비명들 속에서도 똑똑히 들릴 만큼 높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그녀의 그 한 마디로 장내의 상황이 순식간
에 다른 양상을 띠어가기 시작했다.
냉여옥의 심계는 실로 치밀하고 무서웠다. 그녀는 육초량에게
일깨워주기 위하여 소리친 것 같았으나, 그것은 또한 교묘하게
귀문의 문도들에게 자기의 존재를 환기시켜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귀문의 무리들은 오직 정신 없이 몰아치는 육초량의 검격에서
몸을 빼느라고 미처 냉여옥에게 눈길을 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스스로를 드러낸 일성(一聲)은 그런 그들에게 숨
통을 터 주었다.
아차, 하는 사이에 냉여옥의 근처에 있던 수라신(修羅神)이 비
쾌하게 몸을 날려 그녀를 잡아갔다.
『악, 육가가!』
냉여옥이 뾰족한 비명을 터뜨렸다. 그녀는 무기력하게 수라신
의 손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누구도 그녀가 스스로 잡히기를
원했다고는 추호도 의심하지 못했다.
재빨리 마혈을 제압한 수라신이 그녀를 방패로 삼으며 물러섰
다. 육초량이 몰아쳐 가던 귀졸들을 놓아두고 득달같이 달려들었
을 때는 이미 냉여옥이 수라신의 손안에 떨어지고 난 뒤였다.
『흐흐흐, 이놈, 날뛰지 마라. 눈앞에서 계집이 죽어 가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수라신이 음침하게 웃으며 냉여옥의 정수리를 지긋이 눌렀다.
조금만 힘을 주면 그녀는 그대로 절명하고 말 것이었다. 일이 이
렇게 되어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비열한 놈!』
자신의 검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이 상태에서는 냉여옥을 구
해낼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육초량의 망설임을 보며 냉여
옥은 내심 긴장으로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과연 그가 자신의 안
전을 염려하여 항복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이들을 치고 혼자
서라도 빠져나갈 것인가...
항복하여 이 자들의 손에 떨어진다면 그것은 죽음을 맞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과연 그가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지켜주려고 할
까?)
이런 상황이야말로 자신에 대한 그의 마음을 시험해 볼 수 있
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 냉여옥이었다. 목숨을 건 위험 속에
서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그녀야말로 실로 독선과 이기
심으로 똘똘 뭉쳐진 여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검을 버리고 순순히 무릎을 꿇어라!』
수라귀의 싸늘한 일갈이 다그쳐 왔다.
(다 틀렸다.)
육초량은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로서는 냉여옥이 저 흉악
한 놈들의 손에 떨어져 봉변을 당하도록 놔둘 수 없었다. 그녀의
안전을 책임지기로 한 약속 때문만은 아니었다.
땅-
피에 젖은 철검이 덧없이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 * * *
귀문의 엄중한 호위 속에 극비리에 호송되어 닷새만에 도착한
곳은 한 거대한 장원이었다. 육초량과 냉여옥은 장원 뒤편의 산
속에 마련된 지하 뇌옥에 갇혔다. 세 치 두께의 단단한 석문으로
닫혀진 음침한 뇌옥 안에서 냉여옥은 버려진 듯 홀로 앉아 시름
에 잠겨 있었다.
(내가 너무 몰인정한 짓을 했다.)
그녀는 때늦게 후회와 번민으로 갈등하고 있었다.
도착한 즉시 끌려나간 육초량은 만 하루가 지나서야 만신창이
가 된 몸으로 돌아왔었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이라는 말 그대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찢기고 터져 엉망이 된 그였다. 이
사람이 과연 그 사납던 육초량인가 하고 의심이 갈 만큼 그는 지
독한 고문으로 망가져 있었다.
그러나 안타까움과 후회로 상처를 돌보아 주는 냉여옥을 보며
그의 눈은 그래도 웃고 있었다.
『이 정도로 놈들이 나를 어쩌지는 못해. 하하..... 여옥, 걱정
마오. 곧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요.』
그 상태에서도 자기를 안심시키기 위해 억지로 웃어 보이는 육
초량에게서 냉여옥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녀는 죄책감으로 눈
물을 흘렸다. 그것은 그녀가 처음으로 흘린 진실된 마음의 눈물
이기도 했다.
『아, 육가가. 이 모두가 저의 미련함 때문이에요. 저를 욕하고
때려 주세요.』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용서를 빌고 싶은 충동
을 가까스로 눌러 참았다. 한 번 거짓말을 하고 나면 그것을 감
추기 위해 또 다시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었다.
냉여옥은 두려웠다. 이 모든 일이 암중에서 자신에 의하여 만들
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육초량이 그 동안 속아왔던 것에
대해 분노하고, 그래서 다시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지 모른다는
것 때문이었다.
다음날 그는 다시 끌려나갔다. 그리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곧 도찰원의 수하들이 자신의 종적을 찾아낼 것이었다. 그리고
미리 지시한 계책대로 일을 벌리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단번에 뇌
옥을 깨고 육초량을 구해 이곳을 벗어나리라는 것이 한 가지 희
망이었다.
도찰원의 찰포사자들과, 흑룡보 비문의 고수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늘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의 실종을 눈
치채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낼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너무 지체하고 있다. 죽일 놈들, 어디서 무슨 짓을 하
고 자빠져 있담...)
냉여옥은 사흘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인 그들에게 욕을 퍼부었
다. 나가기만 한다면 하북의 특호사령들과 비문의 수하들을 모두
불러모아 놓고 본때를 보여 주고 말겠다고 벼르는 그녀였다.
* * * *
『지독한 놈. 흐흐, 네놈이 내 손에서 언제까지 입을 다물수 있
는지 두고 보겠다.』
독사 같은 눈빛을 한 자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낚시바늘처럼
생긴 작은 은빛 갈고리를 내려놓았다. 그것은 상대의 몸 속을 헤
집으며 전신의 근골과 맥들을 하나하나 토막내고 쪼갤 수 있도록
고안된 지독한 고문기구였다.
뱀 같은 사내는 귀문의 형옥(刑獄)을 관장하고 있는 한옥신(寒
獄神) 전규(全揆)라는 자였다. 수많은 고문술과 참형의 방법에
달통해 있는 그는 귀문의 십이신 중에서도 가장 악랄하고 잔혹한
자였다. 그의 무정한 손에서 육초량은 만 이틀을 시달리고 있었
다. 피부를 찢고 쪼개는 체형으로 안 되자, 전규는 오골침이라는
그의 비장의 고문기구를 들었다. 그리고 육초량의 살 속을 헤집
으며 경맥들을 찾아 하나하나 자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삼백 육십 대혈에 삼천 육백 개의 대소 세맥들이 하나씩 절단
되는 고통은 이미 죽은 자라도 치를 떨 만큼 지독한 것이었다.
육초량은 전규의 오골침이 하나의 경맥을 끊어놓을 때마다 그곳
에 응집되어 있던 진기가 폭발하는 고통으로 의식을 잃어야 했다.
드디어 전규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손을 놓았을 때, 육초량
의 기경팔맥은 걸레처럼 찢겨 너덜거리고 있었다. 절망적인 상태
였다. 그러면서도 육초량의 핏발선 눈은 전규를 향하고 한껏 부
릅떠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다.
『데려가라. 내일 다시 시작한다!』
전규가 피곤한 듯 손을 흔들고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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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
즐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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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 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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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요악한 여자에게 당하면서도 그걸 모르니 아직도 멀었다^^
즐감하고 감니다
즐독 ㄳ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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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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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초량 헛수고를 열심이 하고 있네요 ?
즐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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