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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우리 동네 목욕탕 STAYC SUMIN
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2021 동아일보
여름의 돌 / 이근석
나는 토기처럼 앉아 형의 작은 입을 바라보았다. 그 입에선 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형한테선 지난 여름 바닷가 냄새가 나, 이름을 모르는 물고기들 몇 마리 그 입 속에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무너지는 파도를 보러 가자, 타러 가자, 말하는
형은 여기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미래를 이야기했다. 미래가 아직 닿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형을 들뜨게 했다. 미래를 돌 속에 있어. 우리가 아직 살아보지 못한 미래가 번져있어. 우리가 이 돌을 미래로 가져가자. 그 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다.
그동안 우리는 몇번 죽은 것 같아, 여름, 여름 계속 쌓아올린 돌 속으로 우리가 자꾸만 죽었던 것 같아. 여기가 우리가 가장 멀리까지 온 미래였는데 보지 못하고 보이지 못하고 우리가 가져온 돌 속으론 지금 눈이 내리는데
내리는 눈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내리는 눈 속으로 계속 내리는 눈 이야기,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우리가 우리들 속으로 파묻혀가는 이야기들을
우리가 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계속
전화벨이 울리고 있다
2021 세계일보
돌고래 기르기 / 한준석
미소는 돌고래로 기르기 좋습니다
돌고래의 주파수를 라디오로 들어요
나는 무심하게 시작되어집니다
축축하게 연필심이 밤새 헐었습니다
돌고래는 미소에 좋습니다
나는 웅크리기 좋은 무게로 태어났어요
돌고래의 고도는 새떼의 무게 같아요
새들이 흩어지는 사이로 연필 소리가 들립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나가는 새를
잃어버렸다 말할 수 있을까요
나무에 없는 새들을 세어보는 일은
열 손가락으로 모자라고
두 팔로는 충분한 일입니다
돌고래를 기르기에는 남해에 사는 당신이 좋습니다
눈 내리는 남해로 가는 버스 창밖
길러 본 적도 없는데
둥글게 헤엄치는 돌고래를 바라봅니다
나는 당신의 웃음을 빌려 가벼워지고 싶습니다
일기예보에 오늘 아침은 잔기침을 주의하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안정은 멀리 있습니까
나는 이런 예감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눈 감으면 버스의 흔들림만 남겨집니다
나는 돌고래가 아닙니다
나는 버스에서 내릴 줄 압니다
잘 가, 돌고래는 휘어지는 몸짓으로 수평선을 밀어내고 있어
끝에서 끝이 부드럽게 멀어져야 좋은 미소
나는 돌고래로 기울어질 수 있습니다
돌고래는 미소를 기르기에 좋습니다 슬픔을 조심합니다
세계는 서로를 미끄럽게 기를 줄 알고
나는 입김에서 햇빛으로 조용하게 옮겨집니다
나는 한 종류의 돌고래가 됩니다
2021 한국일보
작명소가 없는 마을의 밤에 / 신이인
오리너구리를 아십니까?
오리너구리,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아에게 아무렇게나 이름을 짓듯
강의 동쪽을 강동이라 부르고 누에 치던 방을 잠실이라 부르는 것처럼
나를 위하여 내가 하는 일은
밖과 안을 기우는 것, 몸을 실낱으로 풀어, 헤어지려는 세계를 엮어,
붙들고 있는 것
그러면 사람들은 나를 안팎이라고 부르고
어떻게 이름이 안팎일 수 있냐며 웃었는데요
손아귀에 쥔 것 그대로
보이는 대로
요괴는 그런 식으로 탄생하는 겁니다
부리가 있는데 날개가 없대
알을 낳지만 젖을 먹인대
반만 여자고 반은 남자래
강물 속에서도 밖에서도 쫓겨난 누군가
서울의 모든 불이 꺼질 때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알고 계셨나요?
기슭에 떠내려오는 나방 유충을 주워 먹는 게 꽤 맛있다는 거
잊을 수 없다
모두가 내 무릎에 올려두었던 수많은 오리너구리
오리가 아니고 너구리도 아니나
진짜도 될 수 없었던 봉제 인형들
안에도 밖에도 속하지 못한
실오라기
끊어낼 수 없는
주렁주렁
전구 없는 필라멘트들
불을 켜세요
외쳐보는 겁니다
아, 이상해
2021 경인일보
핑고 / 황정현
극지의 순록은 우아한 뿔을 가졌다
거친 발굽으로 수만 년을 걸어왔다
죽은 자식을 동토에 던지며 발길을 돌려야 했고
비틀걸음으로 얼음산을 넘어야 했고
살점을 떼어 어린 자식의 배를 불려야 했고
뿔을 세워 침입자에 맞서야 했고
온몸을 쏟아 무리를 지켰다
죽어서도 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치열한 싸움에서
늘 이기고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당신은 무덤을 등에 지고 돌아왔다
무덤은 살고 당신은 죽었다
무덤 속에서 얼음이 자라고 있다
얼음은 흙을 밀어 올려 산이 될 것이다
얼음의 계절이 오면 순록은
바늘잎나무숲으로 순례를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당신의 길이 보인다
2021 전북일보 당선
저녁의 집 / 유수진
아침이라면 모를까
저녁들에겐 다 집이 있다
주황빛 어둠이 모여드는 창문들
수줍음이 많거나 아직 야생인 어둠들은
별이나 달에게로 간다
불빛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건
다 저녁의 집들이다
한 켤레의 염치가 짝짝이로 돌아왔다
수저 소리도 변기 물 내리는 소리도 돌아왔다
국철이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설거지를 끝낸 손가락들이
소파 한 끝에 앉아
어린 송아지의 배꼽, 그 언저리를 생각한다
먼지처럼 버석거리는 빛의 내부
어둠과 빛이 한 켤레로 분주하다
저녁의 집에는 온갖 귀가들이 있고
그 끝을 잡고 다시 풀어내는 신발들이 있다
적어도 창문은 하루에 두 번 깜박이니까 예비별의 자격이 있다
깜박이는 것들에겐 누군가 켜고 끄는 스위치가 있다
매번 돌아오는 관계가 실행하는 수상한 반경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있고
스위치를 딸깍, 올리면 집이 된다
별은 광년을 달리고 매일 셀 수 없는 점멸을 반복한다
그러고 나서도
어수룩한 빛들은
얕은 수면 위로 귀가한다
2020 경인일보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 / 이유운
당신이 또 여름이 왔다고 말하는 것은
축축하게 땀으로 젖은 내 등을
바람으로 깎아놓은 거친 손으로 훑어준다는 것을 의미했다
손가락 끝이 유독 단단했던 당신의 손톱은 언제나 창백한 회청색이었다
손톱이 왜 파랗지요 하고 물으면
요 안에는 바람이 담겨 있어서 그렇다고 대답하던
당신의 입술에는 뼈가 없었다
당신의 손이 습한 등을 훑으면 와사삭 소름이 돋아서
정말로 당신의 손톱에는 바람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은 바람으로 나를 만지며…
내 등뼈는 당신 덕에 조약돌처럼 둥글어졌다
그리하여 아주 먼 미래에
누군가 내 등을 만지면
나는 바람으로 깎여 둥글고 부드러운 짐승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 먼 미래를 생각하면서
당신의 부푼 무릎 위에 바람의 모양을 그렸다
이제 그 먼 미래가 되어서 바람으로 깎인 나는
이 즈음에는 꼭 당신을 생각한다
바람을 담고 있던 당신의 손톱과
바람의 모양대로 부푼 당신의 무릎
나는 여름이 오면 반드시 당신의 뼈를 떠올리게 되어 있다
내가 만져보지 못한 당신의 뼈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하고
2020 강원일보
문자와의 사랑 / 박성민
심심하면 자전거를 타고 소양강 돌다리까지 달렸다
강변에 먼저 와 있던 문자는 조용히 앉아
막 피어난 안개로 손을 씻고 있었다
나는 물풀처럼 흔들리며
흐르는 물살이 입은 햇살이 부러웠다
강 건너 우두동의 저녁을 향해
문자는 어른처럼 익숙한 휘파람을 불었다 나는
그녀가 알아듣지 못하게 잠긴 목소리로
처음 `그대'라고 불러 보았다
저녁 강이 비치는 하늘은 깊은 분지를 향해 흘러갔다
나는 역 광장에서 서성이며 미군부대 헬기가 뜨기를 기다렸다
담 밖 꽃 진 나무들이 어떻게 바람소리를 내는지 궁금했지만
서울로 가는 길이어서인지, 기적소리 길게 레일을 벗어날 때
검은 안개 본 적 있니? 미군부대 녹슨 철조망에 기대어
헝클어진 머리 문자는 짓궂게 웃기만 했다
2020 한국일보
침착하게 사랑하기 / 차도하
몸에 든 멍을 신앙으로 설명하기 위해 신은 내 손을 잡고 강변을 걸었다 내가 물비린내를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빛과 함께 내려올 천사에 대해, 천사가 지을 미소에 대해 신이 너무 상세히 설명해주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이미 본 것 같았다
반대편에서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어왔다
저를 저렇게 사랑하세요? 내가 묻자
신은, 자신은 모든 만물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저만 사랑하는 거 아니시잖아요 아닌데 왜 이러세요 내가 소리치자
저분들 싸우나봐, 지나쳤던 연인들이 소곤거렸다
신은 침착하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는 신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강을 보고 걷는다
강에 어둠이 내려앉는 것을, 강이 무거운 천처럼 바뀌는 것을 본다
그것을 두르고 맞으면 아프지만 멍들지는 않는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연인들의 걸음이 멀어지자 그는 손을 빼내어 나를 세게 때린다
2019 서울신문
랜덤박스 / 류휘석
내겐 매일 허들을 넘다 실패하는 광대들이 살아요
불필요한 기념일이 빼곡한 달력, 숨 쉴 날이 없어요
나 대신 종이에 누워 숨 쉬는 사람들
밤이 되면 광대는 잠을 자고 나는 일어납니다
나는 허들을 치우고 부서진 광대들을 주워 종이 상자에 집어넣습니다
그늘을 뿌리는 거대한 인공 나무, 물을 줘요 잘 자라서 더 크고 뾰족한 허들을 만들어내렴
그렇지만 모든 게 나보다 커져서는 안 돼,
광대들은 일도 하지 않고 아침마다 이불을 걷어냅니다 나는 토스트처럼 튀어 올라 침실을 접어 내던져요 나를 어지럽히는 벽시계와 발목에 생긴 작은 구멍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커집니다
방이 비좁아서 나는 밖에 있습니다 밖이 끝나면 집에 돌아가 상자를 만들어야 해요 재사용 종이는 거칠고 단단해서 반성에 알맞습니다
천장에 붙어 기웃거리는 가녀리고 얇은 나의 광대들
반성이 시작된 집은 무덤 냄새가 나는 요람 같아요
나는 탄생부터 기워온 주머니를 뒤집습니다 바닥은 먼지로 가득찹니다
도무지 채워지질 않는 상자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실패와 실종
내가 죽으면 광대들은 허들을 넘을까요
궁금해서 죽지도 못합니다
2019 조선일보
당신의 당신 / 문혜연
새들의 울음은 그들의 이름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이름을 갖게 될까요
원래 인간은 제 이름보다 남의 이름을
더 많이 부르는 종이잖아요
나는 당신의, 당신은 나의 이름을
새들에게 우리는 우리일까요
우리를 대신할 말을 찾아요
수많은 단어들이 사라져요
뻐끔거리던 입술들이 짝을 짓습니다
입술을 부딪치며, 서로에게 옮아가는 인간들
새들은 인간과 상관없이 날아다닙니다
새들은 새들이고, 우리는 우리입니다
부리를 부딪치는 새들은
정다운 만큼 가벼운가 봐요
자신을 닮은 사람을 세 번 만나면 죽는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요
지렁이와, 지렁이 모양 젤리
그걸 공포라 할 수 있나요
머리와 꼬리를 알 수 없는 젤리는
달콤하고 모호한, 주인모를 관계들
우리는 점점 닮아 가는데
누가 누굴 닮은 건지 모를 때는
어떻게 할까요, 당신은 지금
2%의 당신 자신과, 98%의 당신의 당신
순도 높지 않은 당신, 그리고 나
끝 모를 바닥으로 가라앉아요
새들은 언제나 아득한 높이에서 웁니다
그림자도 생기지 않을 물에는
새의 밑면만 지나갑니다
깊이 가라앉은 바닥, 그곳에서 우리는
떠오를 수 없는 낮은 음, 낮은 울음
새들의 이름은 그들의 인사가 됩니다
우리의 울음도 우리의 내일이 될까요
안녕, 당신, 안녕
유언 같은 안부를 주고받아요
우리는 새들의 세계에서도, 서로의 이름만 부르고
인간은 역시, 새들에게는 이해받을 수 없나봅니다
2018 한국경제
새살 / 조윤진
입 안 무른 살을 혀로 어루만진다
더없이 말랑하고 얇은 껍질들
사라지는 순간에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세계들이 뭉그러졌는지 세어본다
당연히 알 수 없지 시간은 자랄수록 넓은 등을 가진다
행복과 안도가 같은 말이 되었을 때
배차간격이 긴 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타게 되었을 때 광고가 다 지나가버린 상영관에 앉았을 때
나는 그렇게 야위어 간다
뚱뚱한 고양이의 부드러운 등허리를 어루만졌던 일 운동장 구석진 자리까지 빼놓지 않고 걷던 일
그런 건 정말 오랜 일이 되어
전자레인지에 돌린 우유의 하얀 막처
손끝만 대어도 쉽게 쭈그러지지
톡 건드리기만 해도 감당할 수 없어지는
만들다 만 도미노가 떠올라 나는
못 다 한 최선 때문에 자주 울었다
잘못을 빌었다
눈을 찌푸릴수록 선명해지는 세계
얼마나 더 이곳에 머무르게 될 지 아직 알 수 없지
부드럽게 돋아났던 여린 세계들 그런 세계들이 정말 있었던 걸까
2018 한국일보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저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저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제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저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2018 경인일보
한순간 해변 / 이명선
검은 얼굴의 아이가 있어
조류를 타고 해변까지 밀려온 대륙의 아이가 있어
뿔뿔이 흘러가는 하늘에 흰 수리는 원을 그리며 비행하고 있어
거듭 얼굴이 풀어져
뭍으로 오르려는 눈꺼풀이 흩어져
반복의 역사는 번복되는 아이들로 가득해
창창한 것은 꿈의 세계야 검은 눈물로 적셔지는 땅도 있어
우리에게 바다는 수평선 너머에도 있지만
아이에겐 수평선 너머의 바다엔 해변이 없어
불시에 버리고 온 대륙처럼
감은 눈 속에서 모래 언덕이 푹푹 꺼지고 있어
반신반의 하는 얼굴이 있어
간절함은 체험이 아니야 찢기는 세계에 발을 담그면 붉은빛의 인내가 필요해
국경을 물고 가는 새야
하늘을 균일하게 나누면 새들로부터 망명한 낙원이 있을까
한참을 뛰어가도 숨이 차지 않는 해변이 있어
검은 얼굴의 아이가 부르던 난민의 노래가 밀려나가는
2017 경향신문
백색소음 / 이다희
조용히 눈을 떠요. 눈을 뜰 때에는 조용히 뜹니다. 눈꺼풀이 하는 일은 소란스럽지 않아요. 물건들이 어렴풋한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눈길로 오래 더듬으면 덩어리에 날이 생기죠. 나는 물건들과의 이러한 친교에 순응하는 편입니다.
벽에 붙은 선반에 대하여,
나에게 선반은 평평하지만 선반 입장에서는
필사의 직립(直立)이 아니겠습니까?
옆집에서는 담을 높이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점점 높아지는 담에 대하여, 시멘트가 채 마르기 전에 누군가 적어 놓는 이름에 대하여. 며칠째, 습한 날씨가 계속되고 투명한 문신 같은 이름이 피부에 내려앉습니다.
피부가 세상에 가장 먼저 나가는 마중이라면
나는 이 마중에 실패하는 기분이 듭니다. 나는 이 습기에 순응합니다.
하지만 만약 손에 닿지도 않은 컵이 미끄러진다면
컵을 믿겠습니까? 미끄러짐을 믿겠습니까?
유일한 목격자로서
이 비밀을 어떻게 옮겨 놓을 수 있을까요.
도대체 이 습기는 누구의 이름입니까.
눈꺼풀을 닫아도 닫아지지 않는 눈이
내가 사라지고도 내 곁을 지키는 잠이
오래 나를 지켜봅니다.
2016 조선일보
생일 축하해 / 안지은
걷던 길에서 방향을 조금 틀었을 뿐인데, 신기하지
낯선 골목에 당신의 얼굴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니
네게선 물이 자란다, 언제 내게서 그런 표정을 거둘거니
누군가가 대신 읽어준 편지는 예언서에 가까웠지
막다른 골목길에서 나의 감정을 선언하니
벽이 조금씩 자라나고, 그 때에
당신은 살아있구나, 눈치 챘지
문장의 바깥에 서서
당신은 긴 시간동안 사람이었지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언젠가 손을 맞잡았던 적이 있지, 짧게
우리라고 불릴 시간은 딱 그만큼이어서
나에겐 기도가 세수야
당신을 미워하는 건 참 쉬운 일이지
오래 마주보고 있기엔 당신의 눈동자는 너무나 투명해
표정은 쉽게 미끄러지고
벽을 등지고 걸으면 내 등이 보이는 오늘
누구랄 것 없이 녹아 흘러내리지만
언제나 당신은 젖지 않지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당신의 종교가 되길 바랄게
기일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