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사도(生死島) 3-1
제 1 장 마도(魔刀) 철문금(鐵門金)
<1>
팔월도 저물어 들에는 황금빛으로 익은 벼이삭들이 물결치듯
일렁거렸다. 이마를 스치는 바람이 서늘해졌고, 자고 나면 시린
기운이 바람에 섞여 옷깃 속으로 파고들었다. 머지않아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그 때쯤이면 온 들에 국화도 만발할 것이었다.
섬서성(陝西省) 범양현(范陽縣)밖 산곡읍(山谷邑)은 사연수(奢
延水)가 무정하(無定河)와 합쳐지는 곳이었다. 무정하는 섬서지
방을 관통하여 황하로 흘러드는 큰 강이다. 흑수(黑水), 금하(金
河), 사연수(奢延水)의 세 물길을 받아 뉘엿뉘엿 흐르는 그 강은
섬서의 젖줄이기도 했다.
일천 리 무정하변에는 경관이 빼어난 곳이 많았다. 그 중 사연
수가 유입되는 산곡현도 그랬다. 석산(石山)의 수려함이 맑은 강
물에 한 폭의 수채화처럼 어우러지고, 십 리에 걸쳐 늘어진 강변
의 양류림(楊柳林)은 금빛 모래와 좋은 조화를 이루었다.
저물어 가는 석산 그늘 아래의 양류 언덕에 서서 하염없이 흘
러가는 무정하의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연초록의 치맛자락과 함께 치렁한 검은 머리
카락이 날려 그녀를 흡사 한 그루 수려한 버드나무처럼 보이게
했다.
『아, 저 물줄기를 따라 천리를 흘러가면 그이를 만날 수 있을
까?』
그녀의 선 고운 입술 사이로 촉촉한 한숨이 스며 나왔다.
『큰언니, 어서 돌아와요. 저녁밥이 다 되었어요.』
재색으로 물들어 가는 땅거미 속에서 문득 들새의 지저귐처럼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석산에 메아리를 만들어 주며 들려왔다. 여
인이 조용히 돌아섰다. 한 아름의 들꽃을 안고 댕기머리를 팔랑
이며 뛰어오는 작은 계집아이의 얼굴에 눈부신 웃음이 가득 번져
있었다.
『수수, 너로구나.』
여인의 얼굴에도 어둠을 밀어내는 웃음 한 줄기가 피어올랐다.
수수가 들꽃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천애원(天涯院)에 이르는 소로의 양옆에는 파란 잎을 하늘거리
는 국화꽃들이 줄지어 심어져 있었다. 구월이 되면 그것들은 찬
서리 속에서 온통 노란 국화꽃을 피워낼 것이다. 그러면 천애원
전체는 황국의 물결로 뒤덮이고, 차가운 가을 바람이 스쳐갈 때
마다 황홀한 금빛의 파도가 되어 일렁일 것이었다.
천애원은 오갈 데 없는 백여 명의 고아 소년 소녀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따뜻한 우애와 신뢰로 살아가고 있는 아담한 장원이었
다. 처음 그것은 강소성 대의향(大儀鄕)의 득승산(得勝山)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아이들이 피부가 검고 눈빛이 맑은
한 장한(壯漢)의 인솔로 스무 대의 수레에 나누어 타고 이곳에
옮겨온 것은 지난 여름이었다.
사월 어느 날 밤, 아이들이 모두 대형(大兄)이라고 부르는 그
사나이는 어디에서인가 창백한 안색에 눈빛이 몽롱한 한 여인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 며칠 후 아이들을 재촉하여 짐을 싸서는 그
동안 정들었던 득승산을 버리고 천리나 되는 이 먼 곳으로 이주
해 온 것이다. 장장 두 달에 걸친 긴 여정이었다. 석산에 의지하
여 무정하를 바라보는 언덕 위의 장원을 구입한 장한은 그곳에
다시 천애원의 현판을 걸었다.
언제나 자상하고 따뜻한 웃음을 지닌 사나이. 그가 천애원을
운영하고 백여 명의 소년 소녀들을 돌보는 가장이었다. 또한 그
는 그 봄부터 여름 내내 여인의 곁에서 더할 수 없는 정성과 애
정으로 그녀를 돌보았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노래 소리에도 두려워 숨기만 하던 여인이
었다. 구석에 웅크려 떨기만 하는 그녀의 애처로움은 마치 잡혀
온 한마리 사슴과 같았다. 그러던 그녀가 차차 좋아지더니, 여름
이 다 갈 무렵에는 말을 하고 사람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모
두가 그 사나이의 정성어린 보살핌 때문이었다.
그 때부터 그녀는 매일 무정하변을 산책하였다. 그리고 돌아올
때마다 한 아름의 황국을 캐와 천애원 주위에 심기 시작했다. 그
리고 그것을 가꾸는 일에 온통 정신을 기울였다. 오직 그것만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녀가 할 줄 아는 일인 것 같았다.
황국이 뿌리를 내리고, 파란 잎을 싱싱하게 피워 올리자 그녀
의 얼굴에 다시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창백한
아름다움으로 빛났으며, 우아한 기품을 되찾아갔다. 아이들은 모
두 그런 그녀를 큰언니고 부르고 좋아하며 따랐다.
『어머, 큰오빠가 나와 있네? 보나마나 큰언니를 기다리는 거지
뭐.』
작은 입을 삐죽 내밀어 보인 소녀가 여인의 손등을 살짝 꼬집
고 사나이에게로 달려갔다. 하하, 웃으며 수수를 번쩍 안아 드는
사나이는 철문금(鐵門金)이었다.
『소음, 오늘은 무정하에 좋은 구경거리가 있었나보구려?』
환한 웃음으로 여인을 맞이하는 사나이의 눈에는 그러나 한 줄
기 아픔이 스며 있었다. 화소음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
다.
『죄송해요. 무정하변의 노을이 너무 고와서 그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철문금의 눈이 쓸쓸해졌다.
『또 육초량 그를 생각했던 모양이구려. 괜찮다고 했지 않았소.
숨기려 할 것 없다고....』
『......』
『자, 어서 들어갑시다. 아이들이 모두 당신이 와야 저녁을 먹
겠다며 기다리고 있소.』
철문금이 부드럽게 화소음의 손을 이끌었다. 이 순간 그는 강
호인 모두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인 마도(魔刀) 철문금(鐵門
金)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가슴속에 말못할 아픔을 하나 지니고
있는 사나이에 불과했다.
흐린 불빛 아래에서 철문금은 화소음과 마주앉아 있었다. 조용
히 차를 따르는 그녀의 손마디가 유난히도 파리해 보였다.
(슬픈 여인...)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철문금이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만 돌아가 자도록 하시오. 나는 내일 새벽에 잠시 이곳을
떠날 것이요. 잘하면 그대의 황국이 만개했을 때쯤 돌아올지도
모르오.』
『어디로...』
『하하, 그것은 돌아와서 가르쳐 주리다. 그동안 아이들을 부탁
하오.』
일렁이는 불빛 아래 화소음의 눈빛이 흔들렸다. 무정하에서 피
어오른 밤 안개가 장지문을 촉촉이 적시고 있는 밤이었다.
* * * *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는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한줄기 물이 흘러들 듯, 바람이 불어가듯, 가볍고 민첩하게 이동
해 가고 있는 흑의의 야행인이었다.
풀잎의 끝을 밟으며, 그 미세한 탄력으로도 공기처럼 가볍게
도약해 가는 놀라운 초상비(草上飛)의 경공 신법으로 전진해 가
던 그가 훌쩍 한 그루 노송의 가지 위에 뛰어 올랐다. 바위 언덕
아래 거대한 괴물이 웅크리고 있듯, 괴괴한 적막을 두르고 음산
한 모습으로 가라앉아 있는 거대한 장원 한 채가 내려다 보였다.
산서성 옥추산 서쪽 백여 리 밖에 금사탄(金沙灘)의 절곡을 끼고
세워진 귀문(鬼門)의 총단이었다.
흑의인이 가볍게 몸을 던져 허공을 밟듯 장원의 담을 넘어 들
어갔다. 물샐틈없는 고수들의 매복도 그의 환영(幻影)처럼 흐르
는 신법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귀문 십이신 중의 한 명인 귀곡신(鬼谷神) 초두(楚斗)의 눈이
걷잡을 수 없는 공포로 부릅떠졌다. 그는 귀문에 몸담기 전 이미
한 쌍의 음양금륜(陰陽金輪)으로 중원 무림을 공포에 떨게 했던
거마(巨魔)였다. 그 때부터 몰인정과 무자비로 악명이 높던 그의
두 팔이 지금은 잘려지고 없었다. 오늘 밤 장원의 경계를 책임지
는 당직이었다는 것이 그의 불행이었다.
막 귀수전(鬼首殿)의 순찰을 마치고 나오던 길에 바람처럼 움
직이고 있는 야행인의 그림자를 발견한 그는 내심 무료하던 참에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웃었다.
(쥐새끼 같은 놈.)
자신의 눈에 띈 침입자의 불행을 비웃으며 어둠 속에 몸을 감
추고 숨을 죽였다. 살인을 하기 전의 이 꽉 조여오는 긴장과 흥
분이 좋았다. 언제나 첫 경험을 하듯 달구어진 흥분이 혈관을 타
고 팽팽하게 부풀어오르는 것이다. 그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아
무 것도 모르는 듯, 야행인이 그가 몸을 숨기고 있는 귀수전 앞
을 스쳐 가고 있었다. 바로 지금이었다.
『합!』
초두는 고양이가 쥐를 덮치듯 그의 독문 병기인 한 쌍의 금륜
으로 야행인을 덮쳤다. 정수리와 협복을 좌우로 나누어 노리며
십자로 쳐 나가간 추혼비환(追魂飛還)의 절기였다. 바람을 끊는
귀성(鬼聲)과 함께 불시에 날아든 기습 앞에서 야행인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놈, 걸려들었다.)
초두는 곧 두 손 가득 전해질 둔탁한 삭골(削骨)의 느낌을 예
감하며 득의의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그의 즐거움도 찰라였을
뿐, 당황한 듯하던 야행인의 신형이 유연한 호선을 그리며 반 바
퀴 돌아 물러섰다. 동시에 그의 품에서 뻗어 나오는 창백한 한
줄기 빛을 본 듯했다. 그리고 초두는 처음으로 지옥의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끄으으... 누, 누구....?』
보검의 검신을 타고 흐르는 피를 뿌리고 있는 사내의 차가운
눈이 달빛을 받아 빛났다. 아름다운 사내였다. 여인의 섬세한 그
것처럼 선이 고운 그의 입술이 보일 듯 말 듯 움직였다.
『우객(雨客) 초유성(草流星)』
『아, 네가 바로...』
초두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그는 망연한 표정으로 초유성과,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두 팔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단 한
번의 검격에 당한 믿지 못할 일이었다.
(상대가 아니었다.)
뼈저리게 후회했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육초량이라는 수행자 하나가 이곳에 잡혀 있다고 들었다.』
『...?』
『그가 있는 곳을 말해 준다면 고통 없이 죽여주겠다.』
초유성의 음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초두의 가슴을 찔렀다.
극도의 무심함을 담은 그것이 오히려 날카로운 살기보다 더 무서
운 것임을 초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온통 이 사내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빨리 죽여주기를 갈망했다.
『그런 적이 있었소. 그러나 그는 이미 이곳에 없소.』
『...?』
초유성의 추수(秋水)처럼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길 앞에서 초두
는 생전처음 맛보는 공포에 질려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있었다.
* * * *
섬서성 남단에 있는 종남산(終南山)은 달리 주남산(周南山),
진산(秦山), 태을산(太乙山)이라고도 했다. 서쪽은 감숙성, 동쪽
은 하남성에 미치고, 소위 진령산맥(秦嶺山脈)을 형성하며, 위수
(渭水)와 한수(漢水)의 분수령이기도 한 그곳은 명승고적이 많기
로 유명한 중원의 명산이었다.
그 북쪽 기슭에 종남산의 삼십 육 봉 중 하나인 북천(北天) 마
애봉(磨崖峰)이 있었는데, 북쪽 사면이 마치 칼로 잘라 놓은 듯
매끄럽게 깎여 천 길의 험한 절벽을 이루고 있었다.
그 마애봉의 거울 같은 암벽을 등지고 마애암(磨崖庵)이라는
이름의 작고 초라한 암자가 서 있었다. 그곳의 샘물이 자비관음
수(慈悲觀音水)라고 불릴 만큼 신비한 효능을 지닌 약수라는 것
을 아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마애암에 이르는 만추(晩秋)의 울창한 숲길을 한가롭게 오
르고 있는 아름다운 사나이가 있었다. 초유성이었다. 마애봉 주
위를 온통 울긋불긋하게 물들여 놓고 있는 단풍들의 황홀한 아름
다움 앞에서 초유성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모았다.
『발이 그처럼 분주하니 마음인들 한가로울 리가 있겠습니까?』
마애암에 오르자 채마밭에서 무를 뽑고 있던 노승이 진무른 눈
을 비비며 밝게 웃어 보였다. 어린 상좌승 한 명을 데리고 암자
를 지키고 있는 명적(鳴寂) 화상이었다. 초유성이 정중히 합장했
다.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시주님은 몸도 마음도 한 동안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
생각말고 이곳에서 명년 봄까지만 푹 쉬십시오.』
초유성의 행색을 한 번 훑어본 노승이 따뜻한 미소를 띄고 고
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하, 이 가을이 더디 가 주기만 한다면야 스님의 말대로 겨
울을 편히 쉴 수 있겠지요. 하지만 어디 사람의 마음을 알아서
빨리 가 주기도 하고, 더디 가 주기도 하는 지혜가 세월이라는
놈에게 있어야 말이지요.』
『허허허...』
덧없이 웃고 만 노승이 휘휘 손을 저었다.
『아가씨께서는 지명(知明)이를 데리고 암자 뒤로 산밤을 주우
러 가셨을 게요.』
『그럼...』
다시 한 번 합장해 보이고 난 초유성이 노승이 가르쳐준 대로
곧장 마애암의 뒤편 산비탈로 향했다.
깎아지른 마애봉을 코앞에 두고 있는 산비탈에는 밤나무들이
많았다. 그것들 속에 열 두엇쯤은 되었을 어린 상좌승과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서 밤송이를 벗기는 데 열중하고 있는 여인이 있었
다. 멀찍이 떨어져서 그녀의 천진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초유
성의 눈빛이 더욱 서늘하게 가라앉아 갔다.
『아야!』
밤송이의 가시에 찔린 듯, 여인이 뾰족한 비명을 지르며 손을
털었다.
『그러게 제가 뭐랬어요. 까 드린다고 구경만 하시라고 했잖아
요.』
어린 상좌승이 재미난 듯 깔깔 웃었다.
『아, 아파... 지명 스님은 내가 아파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
요?』
『히히히.... 밤송이 하나 가지고 그렇게 쩔쩔매니 여자들은 도
대체 무엇에 쓰는지 몰라?』
웃으며 달아나는 어린 상좌를 쫓아 일어서던 여인이 아, 하는
탄성을 발했다.
『초대협.』
반가움으로 목덜미까지 빨갛게 물들이는 그녀는 옥청향이었다.
『소저, 그 동안 별 일 없으셨소?』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어떤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청향의 눈길을 보며 초유성이 조용
히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마애암은 초유성이 가끔씩 들려 며칠 묵어가곤 하는 암자였다.
노주지인 명적 스님이 편하기도 했지만, 언제 와 보아도 인적 하
나 없이 적막한 한가로움이 좋았기 때문이다. 초유성이 옥청향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은 두어 달 전이었다. 사흘을 머물고 난
그는 혼자서 훌쩍 산을 내려갔다가 근 한달 여 만에 다시 돌아온
길이었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나서 그가 청향의 방으로 찾아왔다.
산 속의 밤은 빨리 찾아오는 법이다. 해가 떨어지자 마애봉의
그늘이 곧 깊은 어둠으로 암자를 삼켜 버렸다. 귀뚜라미 울음만
이 더욱 적요로운 가을밤이었다.
흐릿한 유등의 불빛 아래 앉아 초유성은 청향의 눈부신 아름다
움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씀해 주세요. 육가가를 찾으셨나요?』
초유성이 슬며시 눈길을 거두며 외면했다.
『유감스럽게도 찾지 못했소.』
『아...』
청향이 낙심 어린 탄성을 흘리며 이마를 짚었다.
『허나, 그의 소식은 들었소이다.』
『어디, 그 분이 지금 어디 있다 하던가요?』
반짝 눈을 빛내며 상체를 기울여 오는 그녀를 보던 초유성의
눈 속에 작은 흔들림이 스쳐 갔다.
『그는 정무공주 냉여옥의 손에 의해 구출되어 북경의 황궁으로
이송되어 갔다 하오.』
『냉여옥...』
그녀에 대해서는 청향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녀의 반짝
이던 눈에 깊은 우려와 근심이 떠올랐다.
『육가가께서는 잡혀가신 건가요?』
초유성이 미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도 그녀가 그에게 연정을 품고 있는 듯싶소.』
『아...』
청향의 얼굴에 얼핏 그늘이 가라앉았다.
『육가가도 그렇다고 하던가요?』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요.』
『아니에요!』
도리질하며 강하게 부정하던 청향이 풀이 죽은 모습으로 고개
를 떨구었다. 단지 철부지 어린 시절에 부모님들의 뜻에 의해 정
혼하게 된 사이일 뿐, 그 후로 서로가 장성할 때까지 쭉 헤어져
살아왔다는 사실이 상기되었던 것이다. 그녀 자신은 비록 육초량
에 대한 연모의 정을 깊이 간직해 오고 있었다고 하나, 육초량의
마음까지 그러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분을 탓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저는
어쨌든 그 분을 만나야 해요. 만나서...』
그렇게 말하고 나자 가슴이 답답해지는 청향이었다. 그를 만나
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만일 그의 마음이 이미 떠
나 있다면 그것을 확인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에게 매달려
사랑을 호소하겠다는 것인지 그녀 스스로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
다. 청향은 그러한 자신의 혼란 속에서 한동안 어쩔 줄 모르고
당황했다.
(아니야, 왜 꼭 그의 마음이 떠나 버렸다고 단정하는 거지? 그
렇지 않을 수도 있잖아.)
그녀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육초량의 마음도 자신과 같이 감출
수 없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다시 눈을 빛냈다.
『어쨌든 저는 육가가를 찾겠어요. 그 분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
것이 저의 숙명이니까요.』
초유성의 서늘한 눈길 아래서 청향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 다짐
해 주기라도 하듯 볼을 붉히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2>
초유성은 깊은 잠에 빠져든 옥청향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마음 한 구석에서 아련한 아픔이 조금씩 물들어 왔
다. 막무가내로 당장 그를 찾아 떠나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그녀
를 달래다 못해 수혈을 점한 그였다. 그리고는 잠들어 있는 청향
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빛나는 아름다움과, 물들지 않은 순수함으로 고귀한 여인
의 어디에 그런 열정과 고집이 숨어 있던 것일까?)
자신의 가슴속을 들여다보듯 고개 숙이고 생각에 잠겨 있던 그
녀가 돌연 발딱 일어서서는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려고 했다. 그
일을 떠올리고 초유성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슨 말로 달
래도, 내일 날이 밝으면 함께 가자고 해도 그녀는 한사코 뿌리치
기만 했었다. 가다가 죽더라도 지금 당장 그에게 달려가겠다는
그녀의 완고한 고집과 집념 앞에서 초유성은 문득 두려워졌다.
그래서 기어이 눈물을 터뜨리고 만 그녀의 수혈을 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 번 폭발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무섭게 타오르는 활화산 같은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곱게 잠들어 있는 얼굴을 내려다보
던 초유성이 가볍게 한숨을 쉬고 외면했다.
『아, 수련..... 그대는 어디에 있는 것이요. 나는 지금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구려...』
초유성이 낮게 독백했다. 그의 영원한 여인인 수련을 찾아 중
원 대륙을 방황하기 팔 년째였다. 지칠 줄 모르던 그의 열정이
옥청향을 보살피면서부터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흔들려
가고 있었던 것이다.
『생사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초유성이 깊이 탄식하였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병부상서 양처
량은 그녀가 생사도(生死島)로 보내졌다고 했었다. 한데 생사도
라는 낯선 이름을 알고 있는 자들조차도 없었다. 관부의 고위 관
료들은 물론, 강호의 고수나 소식통들도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유성의 안타까움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잠든 옥청향을 바라보는 그의 눈가에 다스릴 수 없는 고뇌가
어리고 있었다.
(누구?)
초유성의 예민한 감각이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한 긴장으로
떨렸다. 비수처럼 날카롭게 쏘아져 오는 한 줄기의 살기를 느낀
것이다.
『흥!』
차갑게 코웃음 친 그가 탁자를 찬 힘으로 몸을 던져 바람처럼
창문을 뚫고 날아 나갔다. 어둠 속에서 십여 장 밖을 쏜살처럼
날아 달아나고 있는 야행인의 흑의 자락이 보였다. 그것을 쫓아
다시 몸을 날리려던 초유성이 멈칫하다가 천천히 돌아섰다.
『형이시오? 용케 찾아왔구려.』
엷은 웃음을 띄고 돌아선 그의 앞에 막 일어나려던 자세 그대
로 구부정하게 굳어버린 채 당황하고 있는 흑의인이 있었다. 색
화랑 적음상이었다.
『여우같은 놈.』
분하다는 듯 내뱉은 그의 말뜻은 어떻게 자신의 조호이산지계
를 알아챘느냐는 것이었다. 초유성이 싱긋 웃었다.
『오직 형의 목에만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독고월이라면 모를
까, 나야 어디 그리 간단하겠소?』
적음상이 독고월을 따돌리고 옥청향을 빼냈던 그 기상천외한
방법을 이미 그녀로부터 들어 알고 있던 초유성이었다. 그가 그
때 지었을 독고월의 낭패한 표정을 상상하고 하하 웃었다. 방심
해 보인 듯한 순간이었다.
『죽엇!』
적음상의 허리춤에서 번갯불이 번쩍이며 뿜어졌다. 발검이 곧
격검이자 회검(回劍)인 그만의 가공할 뽑아치기 일격이었다.
『헛!』
적음상이 이처럼 급습해 올 줄 미처 몰랐다는 듯 헛바람을 들
이킨 초유성의 허리가 선 자리에서 허깨비처럼 뒤로 꺾였다.
피이잉-!
그의 가슴 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일검의 검영이
아직도 섬광을 뿌리고 있을 때였다. 왼 발의 뒤꿈치를 축으로 하
여 한 바퀴 맹렬하게 돌아 뒤로 빠진 초유성이 다시 하하 웃었
다.
『형의 그 섬전일수(閃電一手)는 오히려 무디어진 듯하오. 이
아우의 사정을 봐 준 것이요?』
『으으음...』
긴 신음을 뱉어 낸 적음상이 초유성을 뚫어질 듯 쏘아보았다.
(아무래도 어려운 놈이다.)
그는 다시 한 번 그것을 느껴야 했다. 적음상에게 있어서 초유
성이야말로 기필코 넘어야만 할 벽이었다. 눈빛을 번쩍이던 적음
상이 움직이는 기척도 없이 와락 달려들었다.
『다시!』
부르짖으며 그가 스스로를 내던지듯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검을
뿌려왔다. 또 한 발을 물러선 초유성이 지지 않겠다는 듯 허리의
고검을 뽑아 마주쳤다.
카카캉-!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어둠을 밝히며 새파란 불통들이 어지
럽게 흩날렸다. 단지 일검을 뿌린 듯 보인 적음상의 검봉은 그러
나 열 다섯 번을 동시에 찌르고 베어간 것이었다. 강하게 떠밀리
듯 정신 없이 뒤로 밀려나며 가까스로 열 번을 막아내고 다섯 번
을 흘려 보낸 초유성의 얼굴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가
슴과 어깨의 옷자락에 다섯 군데의 검흔(劍痕)이 남아 있었다.
베어져 너풀거리는 그 사이로 엷게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며 물러서고 있는 적음상의 얼굴에도 숨길 수 없는
감탄의 빛이 가득했다. 혼신의 힘을 다한 자신의 뇌격십오검(雷
擊十五劍)을 거뜬히 받아넘긴 자에 대한 경외심이기도 했다. 그
들 두사람은 실로 현세에는 다시 만나보기 힘든 호적수들이었다.
『나에게는 꼭 그녀가 필요하다.』
말을 하면서도 적음상의 눈은 초유성의 틈만 노리고 있었다.
여차하면 달려들어 치고 옥청향을 강탈해 가겠다는 꺾을 수 없는
그의 의지를 바라보던 초유성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에게는 이 아우가 꼭 필요하다오. 그러니 형이 포기하시
구려.』
『나는 네놈에게 이미 모든 것을 빼앗겼다. 이제 그녀마저도 빼
앗길 수는 없다!』
이를 가는 적음상의 눈이 다시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가 이 최후의 일격에 삶과 죽음을 걸고 말겠다는 듯 검자루를 잡
아갈 때였다.
『적- 음- 상-!』
마애봉의 천 길 절벽에 부딪쳐 쩡쩡 울려오는 메아리로 그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마애암 아래의 송림 속에서였다. 적음상
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찰거머리 같은 놈. 도대체 언제까지 따라다닐 셈인지...』
『하하... 형은 그 자를 지옥까지라도 달고 가야 할까보오.』
초유성이 느긋하게 웃으며 어깨의 긴장을 풀고 시선을 돌렸다.
송림을 지나 마애암을 향해 치달려 오고 있는 봉두난발의 괴한이
희미한 달빛 아래 멀리 내려다 보였다.
『그녀는 반드시 내가 데려간다!』
사납게 외친 적음상이 재빨리 몸을 날려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
다.
* * * *
우우우우--
넓은 실내 가득 은은한 뇌성(雷聲)이 차오르고 있었다. 보이지
않았지만, 거대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공기의 파동이 서서히 흐
르고 있는 곳에 육초량이 정좌한 채 지긋이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호흡을 따라 길게 토해지고 또 빨려 들어가는 기의 정(精)
이 뽀얀 안개처럼 아른거렸다. 그의 운기는 조약(調藥), 정극(靜
極), 산약(産藥)의 단계를 지나 촬(撮), 저(抵), 폐(閉), 흡(吸)
의 사자결(四字訣)에 의한 봉로(封爐)의 조화를 거쳐 통삼관(通
三關)의 용신(用神)에 이르려 하고 있었다. 그런 육초량의 곁에
서 냉여옥이 삼엄한 안색으로 호법(護法)을 서고 있었다.
용신(用神)은 의(意)로써 기(氣)를 이끌고 곧장 화후(火候)에
이르는 중요한 단계다.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되는
시기인 것이다.
밖에서는 겨울의 칼날 같은 바람이 불어가고 있었지만, 실내는
서늘하고 유정(幽靜)하기만 했다. 육초량의 연공을 바라보는 냉
여옥의 눈에 기쁨과 은은한 감탄이 어렸다. 지난 석 달 동안 그
녀는 육초량을 위하여 실로 눈물겨운 헌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어의(御醫) 당문경의 고통이 가장 컸다고 해야 할 것이
었다. 그는 냉여옥의 매일 계속되는 닦달에 견디지 못하고 아예
어전을 떠나 육초량의 곁에 붙어살아야 했던 것이다. 가정제마저
머리를 흔들고 내감을 시켜 황궁 보고의 열쇠를 냉여옥에게 맡겨
버렸을 정도였다.
그렇게 석 달이 지났다. 실로 길고 지루한 그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신의 당문경의 금친이신(金針移神)의 의술과 황궁의 영약들
은 육초량의 토막 난 삼백 육십 대혈들을 하나하나 이어가는 데
조금씩 효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경맥이 통하고 흩어졌던 기의 이산(離散)이 정동(正動)하
여 자리를 찾아가자 육초량의 기력은 실로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어갔다. 그것은 당문경조차 자신의 의학 지식을 의심해야
할 만큼 거대하고 불가사의한 자생력이었다.
육초량은 흡사 전신이 토막 나기 전에는 한 줌의 기만 남아 있
어도 스스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불사지체(不死之體)의 몸인
양, 스스로의 맹렬한 자연지기로 남은 세맥(細脈)들을 이어가고
뚫어갔다. 북천일마 단목굉의 건곤일선기공(乾坤一線氣功)이 움
직이기 시작하여 그의 체내에 잠재되어 있던 혼원기(混元氣)를
끌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육초량의 전신에 미미한 진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기의 요동이 느껴질 정도로 극대해졌다.
냉여옥의 눈에 긴장이 감돌았다.
『컥!』
『크흐윽!』
정무전(正武殿) 밖에서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냉여옥의 눈에 당황한 빛이 어렸다. 누군가 침입자가 있는 것이
다.
북경성은 황제가 거하는 황궁 외에 내궁(內宮)과 외궁(外宮)으
로 나뉘어져 있었다. 내궁은 황족과 대신들의 거처가 있는 곳으
로 일반인들이 감히 출입하지 못하는 금지(禁止)나 마찬가지였고,
성민들은 외궁에 머물러 살았다.
냉여옥은 그녀의 신분에 걸맞게 내궁(內宮) 안에 정무전(正武
殿)이라는 사저(私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도찰원의
고수 삼십 인을 배치해 두고 있었다.
그녀의 신변 경호를 맞고 있는 그들은 하나 같이 도찰원 내에
서도 뛰어난 일급 고수들이었다. 그런데 순천부(順天府)의 내궁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온 그 자는 도찰원의 고수들을 거침없이
베어 넘기며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대단한 자인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사국천
이나 마백조가 직접 온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냉여옥이 긴장
하며 육초량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지금 가장 중요한 고비를 맞
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만일 그의 몸에 조그만 충격이 가해지기라도 한다면 그는
주화입마에 빠져들어 죽거나 영영 폐인이 되고 말 것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재밌게 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합니다,
즐독 입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잘 보고 갑니다.
점입가경! 잼나는 생사도 감사 합니다!
고맙습니
감사합니다 .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하고 깁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