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너는 나를 향해 추억을 겨눈다.
우리 둘 중의 하나는 죽어야 해. 그러면 누가 살아야 하는 걸까?
너는 나를 죽여야 해. 나는 너를 죽여야 해.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우리 둘 다 살고 싶어.
“뭐야 제로스. 이게 단거야?”
[예, 리나씨. 의뢰인은 분명 그 봉투에 모든 조건을 달았으니까요.]
“선금은?”
[당신의 통장으로 입금시켰습니다.]
“특별한 지시사항은 없던 거야?”
[전혀.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됩니다. Midnight.]
“그딴 촌스러운 이름 집어쳐. 알았어.”
[… 리나씨.]
“응.”
[안녕히.]
“……?”
꼭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처럼 말하지 마. 불안을 조성하지 마.
눅눅한 서류 봉투에 담긴 빠듯한 종이에 적인 그 남자는
달처럼 하얗고 호수처럼 깊은 눈을 가진 사람.
“신부?”
고해합니다. 내가 이 사람을 죽였나이다.
“어디서 봤는데….”
그 정신없는 삶 속에서 이런 사람의 기억은 없었어.
“모르는…… 사람?”
검은 옷으로 온몸을 가린 붉은 아가씨가 성당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세상은 어긋나 있었다.
신이시여 당신은 정말 있나이까.
“라파엘 신부님을 찾아 왔습니다.”
“아아, 자매님, 죄송하지만 오늘을 뵙지 못할 것 같습니다.”
“왜요?”
“기도에 들어 가셨으니까요. 라파엘 형제님은 기도에 빠지시면 좀처럼 끝내질 않으셔서.”
“그렇군요. 아주 급하진 않으니까요. 언제 오면 만날 수 있을까요?”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찾아주세요. 오늘 중에 형제님께 말을 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신부님.”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새벽처럼 하얀 너, 피처럼 붉은 그녀.
이런 깨끗한 장소에 발을 들인지가 언제던가.
겸허하고 압도적인 분위기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베일에 가린 눈만 깜박인다.
저 멀리 눈물 흘리는 마리아여. 그대의 미소는 누굴 위한 것인가.
자애로운 신이시여 당신은 존재하나이까.
이 더러운 양마저도 용서할 만큼 당신은 인자하나이까.
신이시여 그대를 대신해 목숨을 거두는 이 잔혹한 살인자를 받으시나이까.
기도한다.
기도해서
깨끗해질 수 있다면
그대를 위해 기도한다.
검은 가방 안에서 느껴지는 묵직함 감촉, 그것 너머에 있는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휴대 전화 역시 그녀의 손처럼 까맣게 물들여있다.
까만 색, 어떤 것이 묻어도 더러워지지 않는 색.
그러나 너무나도 탁해지는 순수한 색.
“여보세요? 제로스?”
[네, 듣고 있어요. 벌써 일이 끝났나요?]
“아니. 부탁할게 있어.”
[리나씨가 부탁이라니 별일이네요.]
“라파엘 신부, 아니 제르가디스 그레이워즈의 과거에 대해서 좀 알아봐줘.”
[…… Wheel of Fortune.]
"응?“
[아름다운 붉은 마녀. 당신도 결국은 인간이군요.]
“무슨 소리야?”
[그건 영원히 말하게 될 비밀입니다.]
“어이, 제로스.”
비밀스러운 보라색, 그대의 향기는 맞출 수 없는 신비로운 천속에 가려진 어둠.
제르가디스 그레이워즈, 라파엘 신부여. 당신은 이 몽환의 악몽 속에서
무얼 찾기 위해 기도하는가.
그대는 누구인가.
역겨울 정도로 아름다운 빛이 쏟아진다.
“제르가디스 그레이워즈씨.”
“당신입니까? 절 찾아왔던 게.”
“네.”
“지금은 라파엘 이라 불립니다만.”
“죄송해요 신부님. 이름을 부르면 안 돼는 건가요?”
“별로, 상관없습니다.”
그 은빛은 차고 날카로운데 어째서 당신은 가을의 향기를 가졌을까.
흐드러지게 피어난.
“이쪽으로.”
단정한 신부복 역시 검은색. 그러나 그의 손은 하얗다.
어째서일까. 저 푸른 사파이어와 같은 라피즈 라즐리의 푸른 눈이
미치도록 그립고 사무치도록 외로운 걸까.
“차 한잔?”
“네. 주세요.”
“그럼 허브티로 드리겠습니다.”
깨끗하다. 오래된 벽, 묵직하게 눌러지는 십자가. 작은 마리아 상.
손때 묻은 묵주. 그리고 부드러운 작은 십자가.
“여기서 기도하셨나요?”
“뭐, 여기서 밖에 기도할 수 없죠. 물이 그렇게 뜨겁진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처럼 시원한 허브티의 냄새.
차를 마시는 정갈한 모습. 저 깨끗함을 부서야 한다.
“실례지만 성함이.”
“…… 소피아입니다.”
“혹시 전에도 제게 찾아온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왜요?”
“글쎄요. 그 검은 망 안에 가려진 당신의 얼굴이 낯이 익어서요.
주님은 가혹하게도 인간에게 망각이란 벌을 내려
그리운 얼굴마저도 잊게 만드니까요.”
웨이트리스가 은색 쟁반에 주문한 것을 가져왔다.
시럽이 듬뿍 뿌려진 과일 파르페, 딸기 케이크 한 조각, 진한 헤이즐넛.
“잘못 놓으셨어요. 파르페와 케이크가 제 겁니다.”
“네? 네….”
얄궂은 남자는 생긋 웃으며 생크림을 입에 넣었다.
“제로스, 이거 확실한 정보야?”
“제 정보를 의심하시는 건가요, 리나씨?”
“아니.”
“쿡, 그럼 답은 나왔잖습니까?”
환상에 사로잡힐 저 보라색 눈동자. 구역질이 날만큼 아름다운 색.
남자의 얇은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왜요? 무언가 걸리나요?”
“내가 어디서 왔지?”
“네?”
“내가 어디서 왔냐고.”
“그걸 왜 저한테 물어요? 갑자기 찾아와서 일을 달라고 한 건 리나씨잖아요.”
“…… 그랬나?”
“네. 제 거처는 어떻게 알고 왔는지.
왠 붉은 천사가 갑자기 쳐들어와 횡포를 부리는데 못 말릴 사람이더라고요.”
“짜증나는 소리 좀 하지마.”
눈살이 찌푸려다. 그녀의 검은 그림자를 치워낸다.
흉측한 화상의 흉터가 들어난다.
“야!”
“당신은 알고 있잖아요? 그림자 안의 당신은 말이에요.”
“무슨 소리야.”
“파란 가을의 향기도,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의 아련한 기억도,
재속에 버려진 당신의 흉터도.”
“치워.”
“네네, 그런 무서운 눈 하지 말아요. 내가 아는 당신은 거기까지니까.”
“분한데? 난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냥 중간 관리자잖아요? 전.”
“흐응?”
“킥킥,
나의 집시 딸이여
나를 위하여 불을 피워다오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은 불꽃을
내 너의 영혼을 쓰다듬노라
부디 다시 만나길.”
어느새 자기 몫의 음식을 다 먹은 남자는 집시의 노래를 흘리며 사라져 버렸다.
후회할 사람이여, 눈물 흘릴 사람이여, 남겨질 사람이여.
자크 루이 다비드의 [헥토르의 시신에 대한 안드로마크의 고통과 후회]처럼
아파할 사람이여.
그대의 수레바퀴는 종말을 고하니
이제 어디 가서 그의 붉은 눈물을 또 볼 수 있을까.
“…… 당신은 누구야? 제르가디스. 왜, 자꾸, 기억에 남아?”
푸르게 웃던 소년이여, 그것은 정녕 그대인가.
“의뢰는 의뢰일 뿐이야. 난 당신을…….”
선혈이 낭자할 봄의 언덕위에 기아의 여신이 내려와 숨결을 뿜었다네.
“죽일 거야.”
“다시 오셨군요.”
“오늘은 꼭 볼일을 봐야 해서요.”
“저한테서요?”
“네.”
“그런가.”
묵직한 기름 냄새. 희미한 화약 냄새, 총구의 끝은 그를 향해 있다.
“누가 당신에게 의뢰했지?”
“말투가 싹 바뀌시네요, 신부님.”
“글쎄.”
“미안하지만 가르쳐 줄 수 없어요. 난 모르니까.”
“그런가.”
“그럼 안녕히.”
“당신은 아름다웠어. 소피아.”
“미안. 내 이름은 인버스에요.”
총구가 뜨거운 열을 발사했다.
소음기를 달았음에도 그 넓은 성당의 스테인 글라스가 옅은 울음소릴 토해냈다.
남자의 푸른 눈동자가 미친 듯이 커졌다.
죽음의 충격일까.
하필이면 왜 그의 눈을 본 걸까.
지금의 사격은 심장을 빗겨갔다.
그녀의 검은 베일이 발치에 떨어졌다.
붉은 머리칼이 쏟아지듯 흩날렸다.
고통을 토해내며 각혈하는 남자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냉혹한 악마는 아직 가슴에 남아있어.
“너와…… 코스…… 모스…… 다시… 보고 싶……었……는…데….”
“……아니야…, 네가 그 제르일 리가 없어.”
“리나…… 너에게… 해…… 주고…… 싶었는데…….”
“…코스……모스…… 제, 제르……?”
“……리……나…… ㅅ……ㄹ…….”
지겨운 피가 발치에 고인다. 그 창백한 얼굴이 생기를 잃었을 때 잔혹한 신은
기억을 돌려주었다. 제르가디스 그레이워즈. 제르. 제르. 제르.
왜 그대를 접한 순간 그대를 몰랐던 걸까.
기억이 돌아온들 그는 이미 죽었는걸.
널 찾기 위해, 널 다시 만나기 위해
그 뜨거운 열기에서도 살아나와
널 위해 그 집을 다시 세워 가꾸었는데.
함께 흙장난을 하던 코스모스 길 앞에서
미래를 약속하며 수줍게 웃고
어린 손으로 만든 꽃반지를 잃어버려 미친 듯이 울 때도 있었는데.
이 징그러운 화상을 견디며 널 기다렸는데.
난 왜…… 널 죽인거니.
“제르?”
“제르?”
“제르가디스?”
“제르가디스!”
“왜!”
“왜! 어째서!”
거짓말만 아니었어도.
“제르! 제르으~!”
“나도…… 너…….”
“찾고있었단 말이야.”
“…… 나도…… 너……”
리나, 지금은 비록 헤어지지만 꼭 언젠가 여기 같이 돌아오자.
약속하는 거야. 이렇게 예쁜 코스모스 길에 돌아와서
그때는 우리 떨어지지 마는 거야.
그러니까 리나도 어기 잘 간직해.
응, 약속해 제르. 네가 올 때까지 여기를 간직할게.
무슨 일이 있어도.
Wheel of Fortune.
제로스 당신의 직감은 너무 잘 맞아.
난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렸어.
그것도 너무 장난같이 말도 안 되고 현실성 없는 것처럼.
난 내가 죽일 사람의 얼굴을 봤고 뒷조사도 해보고
그의 이름을 알았는데도
그럴 쏘았어.
왜? 왜 그랬을까?
난 그저 이 일이 끝나면 코스모스 밭에 돌아가려고 했는데.
왜, 그 집에 돌아가서 이젠 그를 기다리려고 했는데.
어째서 그는 신부님이 돼 있고, 나는 살인자가 되어 만나는 거야?
이거 무슨 영화야? 나 비현실적인 꿈꾸고 있어?
이봐, 제로스 말해줘….
당신은 왜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한 거야.
왜…….
알고 있었어?
“제르…….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안녕? 제르…… 나 돌아왔어…….”
“신부님…… 고해합니다…….
제가…… 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던 사람을…… 잊어버린 채
그 사람을 죽였습니다.
당신을 원망합니다.
죽어서도 우린 같은 길에 걷지 못합니다.
마지막 순간에서야 그를 기억나게 해준 당신을 저주합니다.
신이시여.”
나의 처절한 기도가 들리시나이까.
“제르…… 나도…… 널…….”
비극의 연인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다만 결말은 달라.
우린 결국 만나지 못하니까.
난 검고, 넌 하야니까.
이왕이면…… 같은 곳에 같으면 좋겠지만.
“처음이군요. 당신이 두 번째 총알을 사용한 것은.”
그 아름다운 붉은 천사도 지고 말았다.
“비록 더럽긴 해도 이 입으로 빕니다. 두 분이 같은 길을 가기를.”
붉고 연한, 가느다란 코스모스 다발이
20년을 헤매이고 결국 마지막에 가서야 알았던
연인들의 몸 위에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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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또 저질렀습니다.
하핫
부도덕한 vice가 이해 되지 않는 분이 많으셔서
짤막하게 내용정리하려 이렇게 시간을 뺐습니다.
기본은 제로리나입니다.
태어나서부터 줄곧 온 방이 까맣게 칠해진 방에 갇혀 산
제로스는 평생을 빛이라곤 붉은 빛이 나는 달로 그려진 둥그런
형광등입니다. 어머니에게 감시당하며 살고 있던 그에게
어느날 리나가 과외 선생님으로 오게 되죠.
높은 과외료에 그저 사는 이야기를 해 주면 된다는 말에
리나도 이상하긴 하지만 그 알바를 받아들입니다.
이미 한번 실연을 겪었던 리나는 제로스와 대화하면서
제로스는 자신에게도 찾아올 수 있는 빛의 희망을 느끼고
리나는 마음 깊숙히 숨어 있는 어둠을 느끼며 묘한 분위기가 흐릅니다.
어둠은 모두 제로스의 상징이고 빛이나 밝음은 리나의 상징이죠.
그러나 어둠과 빛은 서로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밤이 가야 아침이 오고 낮이 가야 밤이 오는 것처럼
리나와 제로스는 새벽의 짧은 순간을 틈타서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나의 강력한 사랑 고백을 제로스는 차버리죠.
리나와의 과외가 끝나던 날 제로스는 자신의 진짜 마음을 리나에게 보여줍니다.
밤이 빛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먹어버리는 수 밖에 없다는 걸
암시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얼마 후 통신에도 일체 접근이 불가능하던 제로스에게 전화가 걸려옵니다.
어머니에게 묶여있던 제로스가 스스로를 밤이라 상징하며
밤이 풀려날 때라고 하지요.
즉 그는 어머니를 죽이고 자기 자신도 자살함으로서 해방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 해방의 순간을 자신이 유일하게 만났던 진정한 빛에게
허락받고 싶었고 그런 그를 말릴 수 없다는 걸 아는 리나가
그의 손목을 긋는 걸 허락함으로서 자신이 구원을 갈망한 빛에서조차
어둠은 해방되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만.
제 글실력이 안돼서 그만 그런 게 나오고 말았네요^^;;;
위의 글도 글발이 안돼서 내용을 덧붙입니다...
킬러인 리나와 신부님인 제르가디스.
둘은 아주 어릴적에 잠시 만났었고 너무나 좋아했던 사이입니다.
그러나 제르가디스가 집안 사정으로 멀리 이사를 가버리고
거기다 리나는 어렸을 때 화재로 기억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얼굴에 큰 흉터를 입죠. 여차 저차 살다가 누군가에게
살인 기술을 배워 킬러가 되고 제로스를 통해서 의뢰를 받으며
먹고사는데 그녀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과거란
불탄 집과 코스모스 길, 그리고 제르라는 이름뿐입니다.
그러나 제르가디스를 살해하라는 곳에서
그가 같은 제르라는 것을 결국 눈치 채지 못하고 그를 쏘지요.
제르가디스는 그녀가 화상을 가리기 위해 늘 베일로 얼굴을 가리기 때문에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기에 그녀가 소피아라고 이름을 속여서
더욱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리나 중심이기 때문에 그가 신부님이 된 과거는...
어쨌든, 코스모스밭, 그리고 제르가디스와 리나의 사랑을 그리고 싶어서
써 봤습니다.
제로스는... 제르와 리나의 관계는 몰랐고
단지 직감이 좋을 뿐인 놈입니다.
중간에 그가 부른 노래는 실제 집시의 노래 중 하나로
본 내용과 그리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건 집시라는 의미죠.
뭐....ㅠㅠ
허접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힘들게 읽어주신 분은 더더욱 감사합니다.
그리고 히나리아.... 완결이 나긴 했는데
처리가 영 안돼네요.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첫댓글 새드엔딩은 슬프지만 여운이 남기 때문에 좋다는....(그건 뭔가;;;;)
제르리나라...멋지네요..잘보고갑니다.^-^
언제나 글 잘읽고있어요 ㅜㅜ 간결하면서도 여운이 진하게 남는 글이 좋아요! 잘읽었어요 건필하세요~
ㅠㅠㅠㅠㅠ진짜 올때마다 읽고 감동감동하고있습니다 ㅠㅠ 으어어 나도 쓰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