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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도(生死島) 3-2
(하필 이 중요한 때에...)
냉여옥이 눈살을 찌푸릴 때, 사아악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대전의 장지문이 소리도 없이 비스듬히 잘려 떨어졌다. 침입자는
복도를 달려오는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새 방문 앞에 이르
러 있었던 것이다. 그 신속한 이동에 냉여옥이 깜짝 놀라 어깨를
굳혔다.
넘어진 문을 밟고 성큼 들어서는 사내 한 명이 있었다. 흑의로
날렵한 몸을 감싼 그의 손에는 새파란 청광을 발하는 보도(寶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이미 피맛을 본 도신(刀身)이 웅웅 하는
기괴한 소리로 울고 있었다. 그 섬뜩한 소리 앞에서 냉여옥은 문
득 공포스러운 이름 하나를 떠올리고 부르르 떨었다.
『그대는 마도... 철문금...?』
삭풍이 몰아치는 한 겨울 밤에 느닷없이 날 선 한 자루 칼을
들고 뛰어든 자는 마도 철문금이었다. 힐끗 육초량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진 철문금이 냉여옥을 향하고 하얗게 웃어 보였다. 냉
여옥은 그 웃음 앞에서 다시 어깨를 움찔 떨고 말았다. 가지 못
할 곳이 없고, 베지 못할 자가 없다(莫不從之處, 莫不斬之人)고
말해지며, 이미 살아 있는 전설이 되어 버린 대 살수(殺手)가 눈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처소에 난입해 든 것이 호의가 아닌 이상 일전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냉여옥이 입술을 악물었다. 지긋이 그녀
를 노려보던 철문금이 칼끝으로 육초량을 가리키며 천천히 말했
다.
『나는 그 자를 데려가기만 하면 되오.』
그대를 베러 온 것이 아니니 안심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말
이기도 했다. 그러나 냉여옥은 순순히 물러설 수 없었다. 육초량
을 그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 사이에
십여 명의 도찰원 소속 고수들이 쇄도해 들었다.
『그만!』
냉여옥이 차갑게 일갈하자, 막 철문금을 향해 도검을 뿌리려던
자들이 주춤하여 일제히 멈추어 섰다. 그들 모두가 철문금에게
달려든다면 결과야 어떻든 방안에서 난전이 벌어지고 말 것이고,
냉여옥은 그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 한창 중요한 고비에 들어 있
는 육초량 때문이었다.
『조용히 물러가 있어라.』
그녀의 손짓에 십여 명의 고수들이 감히 방심하지 못하고 방밖
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들의 눈길은 여전히 철문금의 온몸을
질긴 그물처럼 휘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지,
철문금이 냉여옥을 바라보며 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훌륭한 판단이요.』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고 느꼈다. 냉여옥이 싸늘한 시선으로 철
문금을 쏘아보며 낮게 꾸짖었다.
『그 일 때문이라면 들어줄 수 없으니 유감이군요. 이곳에서의
소란은 없던 일로 해 주겠으니 그만 돌아가세요.』
『흥, 한 번 마음먹은 이상 빈손으로 돌아가 본 적이 없는 나외
다.』
차갑게 코웃음을 친 철문금이 냉여옥 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성큼성큼 육초량에게 걸어갔다. 그것을 보던 냉여옥의 눈에 살기
가 어렸다.
『관을 봐야 비로소 눈물을 흘릴 자로구나!』
훌쩍 몸을 날려 철문금의 앞을 막아선 냉여옥이 한 손을 뻗어
그를 잡아갔다. 철문금의 눈빛도 차갑게 가라앉았다.
『무례를 용서하시오!』
그가 추호의 사정도 봐주지 않고 마도를 휘둘러 수직으로 쪼개
왔다. 정수리에 떨어지는 칼날의 기세에 머리카락이 쭈뼛 일어섰
다.
『핫!』
느리게 쓸어가던 냉여옥의 손속이 갑자기 빨라지더니 다섯 손
가락을 굽혔다가 일제히 퉁겨 냈다. 거미줄이 뻗어 나가듯 가느
다란 지풍의 줄기들이 철문금의 가슴 앞 다섯 개 요혈을 노리고
비수처럼 찔러갔다. 감히 방심할 수 없다고 여긴 철문금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칼을 휘둘러 눈부신 광채를 방안 가득 뿌렸다.
따당, 땅, 땅-!
몇 번의 요란한 쇳소리가 적막하기만 하던 방안을 뒤흔들며 터
져 나왔다. 냉여옥의 지력들이 철문금의 그 한 칼질에 산산이 흩
어져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음, 하고 신음을 흘린 그녀가 한 걸음
물러서며 허리를 더듬었다. 웅- 하는 창룡음(蒼龍音)과 함께 갑
자기 쏟아져 나온 번쩍이는 금빛이 방안을 밝히며 눈이 부시게
했다. 어느새 손에 한 자루 금빛 연검(軟劍)을 쥐고 있는 냉여옥
이었다.
다섯 번의 눈부신 검격을 몸을 비틀고 흔들어 가까스로 비켜
낸 철문금이 경악하여 눈을 부릅떴다.
『좋은 검에 좋은 솜씨!』
탄성을 터뜨린 그의 신형이 허깨비처럼 그녀의 검봉을 타고 날
아들며 흔들렸다. 이번에는 눈부신 백광(白光)이 방안을 가득 메
웠을 뿐 바람을 가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칼의 모습도 보이
지 않았다. 극쾌(極快)에 극변(極變)을 더한 그 한수는 철문금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듯 싶었다. 도기(刀氣)가 수천
개의 유성이 되어 우박처럼 머리 위에 쏟아지는 듯한 착각이 냉
여옥을 어지럽게 했다.
『흥!』
이쯤 되면 물러서고 싶어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냉여옥이 이
를 악물고 싸늘한 코웃음을 날리며 마주 부딪쳐 갔다. 지지 않겠
다는 오기와, 목숨마저도 가볍게 여기는 듯한 담대함이 그녀의
검로(劍路)에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중궁(中宮)을 밟고 홍문(鴻門)으로 돌아 칠성(七星)의 연운(煙
雲)으로 흩어지는 듯하던 그녀의 신형이 이내 오행(五行)도 아니
고 천문보(天門步)도 아닌 기묘함으로 갈라졌다. 철문금의 눈이
다시 한 번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헛, 귀둔팔보(鬼遁八步)!』
냉여옥이 한 순간에 보여준 이와 같은 신묘한 보법은 오직 귀
둔팔보(鬼遁八步)가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피하지 못할 것이 없
고, 쫓지못할 것이 없다고 알려진 절세의 보법이었다. 놀람의 외
침을 터뜨린 철문금이 땅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고무공이 튀어
오르듯 갑자기 솟구쳐 오른 그가 쏜살같이 뛰어 들며 더욱 칼에
힘을 주어 종횡으로 어지럽게 휘둘러 댔다. 도법의 교묘함과 도
세의 맹렬함이 극에 다다라 있었다.
슈슈슈슈-
천라지망(天羅之網)처럼 덮어 오는 마도의 수천 도기(刀氣) 사
이를 냉여옥의 흐릿한 그림자가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빠져나갔
다. 그녀의 아름다운 흑발이 한 움큼 잘려 허공 가득 흩뿌려지고
있었다. 냉여옥은 등줄기를 훑어 내리는 아찔한 전율을 참지 못
하고 낮게 신음했다. 가볍게 내려선 철문금의 눈에도 경악과 감
탄의 흔들림이 있었다.
『좋아, 이제 보니 그대는 천하에 다시없는 고수였군!』
놀란 철문금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자세를 낮추었다. 냉여옥이
입술을 깨물었다. 강한 적의와 함께 질 수 없다는 오기가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한낱 살수 따위에게!)
이를 악문 그녀가 철문금의 품속으로 파고들 듯 뛰어들며 금빛
연검을 어지럽게 휘둘러 한 순간에 이십 팔 검을 쳐냈다. 어둠
속에서 부싯돌을 쳐 퉁겨내는 석화(石火)의 빠름과, 비연(飛燕)
의 경쾌함이 있었고, 먹이를 노리는 독사의 영활함이 있었다.
그녀의 연검이 낭창낭창하게 휘어지고 흔들리며 베어 가는가
하면, 송곳처럼 빳빳하게 곤두서서 찔러들다가 다시 꺾이며 검신
(劍身)을 뿌려 때려오는 변화가 눈부셨다. 만변(萬變)을 한 순간
에 보여주는 그 놀라운 검기(劍技)에 정신 없이 밀려나는 철문금
이었다. 그가 부릅뜬 눈을 깜박이지도 못하고 냉여옥의 검봉을
찾으며 팔방풍우(八方風雨)의 맹렬한 기세로 칼을 휘둘렀다.
땅땅땅땅-!
찰라의 사이를 두고 스물 여덟 번의 맑은 검명이 스물 여덟 개
의 불똥을 퉁겨 내며 어지럽게 터져 나왔다.
『......』
『......』
불과 일 장의 거리를 두고 서로를 노려보며 마주 서 있는 두
사람의 눈에 감출 수 없는 감탄과 경악이 동시에 떠올랐다.
한 순간에 과도하게 내력을 쏟아낸 탓인지 냉여옥의 얼굴은 창
백하게 변해 있었고, 철문금은 스물 여덟 군데나 베어져 너덜거
리는 옷자락을 거머쥐고 거친 숨을 쉬고 있었다. 잠시 그렇게 냉
여옥을 쏘아보던 철문금이 한 걸음 물러서며 불쑥 말했다.
『가르쳐줄 수 있겠소?』
밑도 끝도 없는 그 말에 냉여옥이 파리해진 얼굴에 한 줄기 웃
음을 띄우고 노래하듯 가락을 실어 낮게 웅얼거렸다.
『운기개관(運氣開關) 보정연검(保精鍊劍) 환단결태(還丹結胎)
포원수일(抱元守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 채 한동안 골똘히 생각하던 철문금이 문
득 놀람의 탄성을 터뜨렸다.
『아, 기정단원검결(氣精丹元劍訣)!』
『그대는 가르칠 만 하군요.』
냉여옥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그녀가 읊어준 그 네 구의 구결은 이미 절전된 것으로 알려진
기검(奇劍) 기정단원검(氣精丹元劍)의 검결 중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운기의 구결이었다. 철문금의 기색에서 그가 그것을 한 번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그대가 설마 검종(劍宗)을 이어받았을 줄이야...』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장탄식을 발한 철문금이 그의 칼을 거
두어 들였다.
『그대의 유성만폭도(流星萬爆刀)또한 도종(刀宗)의 비전(秘傳)
이 아니던가요?』
냉여옥도 부드럽게 말하며 연검을 다시 허리에 두르고 물러섰
다.
검종과 도종은 이미 일백 여 년 전에 사라진 사람들이었다. 각
기 절강과 산서에서 일어나 검과 도로 화신(化神)의 경지에 올랐
던 두 명의 초인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당시 남도(南刀) 북검
(北劍)으로 불리며 절세의 신화를 남긴 서문광도(西門廣道)와 연
우빈(燕宇彬)이었는데, 만년에 서촉의 아미산에서 서로만나 우화
등선(羽化登仙)한 이후 그들의 절기도 단절된 것으로 알려져 있
었다. 그런데 오늘 철문금과 냉여옥에 의하여 그들의 절학이 재
현된 것이다.
<3>
『후우-』
기식(氣息)을 안으로 깊이 호흡해 들인 육초량이 천천히 눈을
떴다. 맑고 무거운 안광이 번쩍이다 곧 사라졌다.
『육가가, 성공하셨군요!』
눈앞의 철문금을 잊은 채 반가운 외침을 터뜨리며 기뻐하는 냉
여옥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육초량의 눈에 심한 갈등이 어렸다.
『모두가 그대의 공이요. 두 번씩이나 목숨을 구함 받았으니 그
은혜가 실로 크오.』
육초량이 가볍게 고개 숙이며 담담히 말했다. 그 말속에 따뜻
함이 실려있지 않다는 것을 느낀 냉여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를 스쳐 철문금을 바라본 육초량이 희미하게 웃었다.
『철형, 오래 보지 못한 사이에 좋아지셨구려.』
『흥!』
코웃음을 친 철문금의 얼굴에 다시 냉랭한 한기가 감돌았다.
『수행자, 그대도 삼 년 전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군. 비단옷에
가죽신이 아주 잘 어울려.』
『......』
철문금의 비아냥거림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자신의 모습을 한
번 훑어본 육초량이 쓴웃음을 지었다. 철문금이 그를 손가락질하
며 경멸의 조소를 던졌다.
『뭔가 그 꼴은. 그 날 사당 안에서 내가 보았던 그 수행자는
어디 갔지? 어째서 어릿광대 하나가 시치미를 떼고 앉아 있단 말
인가?』
육초량이 부끄럽다는 듯 살짝 얼굴을 붉힌 채 묵묵히 그 말들
을 다 들었다. 철문금의 비아냥거림은 계속될수록 점차 적의를
띄어갔다. 그가 목소리마저 스산하게 바꾸며 다시 이죽거렸다.
『제법 참을성도 생겼군. 그것이 호의호식에 미인을 곁에 두고
부귀영화를 꿈꾸게 된 자가 보여주는 느긋함이라는 건가?』
육초량의 얼굴에 은은한 노기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눈길을 떨군 채 철문금의 지독한 말들을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
었다.
『화소음이라는 여인을 기억이나 하고 있나?』
『...?』
육초량이 번쩍 눈을 들어 철문금을 바라보았다.
『철형이 그녀를 어떻게...?』
『흥!』
차갑게 냉소한 철문금이 사나운 눈으로 한동안 노려보다가 천
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음성이 무거운 돌처럼 가라앉았다.
『지금도 그녀를 사랑하는가?』
육초량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철문금이
기어이 노성을 터뜨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이곳에서 주지육림
에 묻혀 세월을 잊고 있었단 말이냐!』
그는 육초량이 지난 가을부터 이 겨울 동안 어떤 위난을 겪고,
어떤 상태에 처해 있었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는 육초량이 다만 냉여옥의 아름다움과 귀족의 호사스러움에 취
해 자신을 잊고 있는 속물로 비쳐지고 있을 뿐이었다.
육초량은 그런 철문금의 지독한 비난 앞에서 치솟는 노기를 가
까스로 가라앉히며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았다. 결과적으로 그 동
안 지순한 사랑을 가진 한 여인을 버려 두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껴야 했다. 마음이 아파졌다. 그러나 육초량의 그런 침묵
이 철문금에게는 자신에 대한 무시로 받아들여졌다. 철문금이 무
섭게 가라앉은 눈으로 육초량을 노려보았다.
『네놈이 그녀를 버린 탓에 그녀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
느냐?』
『...?』
『그리고도 그 뻔뻔한 낯을 하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살아 있다
니... 가증스러운 놈.』
부드득 이를 간 철문금이 가슴속에 가득한 분노를 곧 터뜨리기
라도 할 듯 주먹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그녀는 색화랑 적음상이라는 자에게 순결을 짓밟히고 그 자리
에서 다시 옥풍규에게 겁탈당했다. 짐승만도 못한 그 두 놈이 그
녀의 인생을 망쳐 놓았지. 하지만 네놈도 그 자들보다 나은 건
없다!』
『억!』
육초량의 눈이 놀람과 충격으로 부릅떠졌다.
『흐흐흐.... 그 견딜 수 없는 충격으로 가엾은 그녀는 미쳐 버
리고 말았지. 이제 네놈의 속이 후련하냐?』
『어, 어찌 그녀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육초량의 안색이 창백하게 탈색되었다. 마음에 견딜 수 없는
충격을 받은 듯 그가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육가가!』
냉여옥이 급히 그를 부축하였다. 그녀의 손을 뿌리친 육초량이
가슴속에서 들끓는 비통함을 견디지 못하고 한 모금의 피를 토했
다. 안정을 찾았던 기혈들이 다시 얽히며 난마처럼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려갔다. 고통으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가 가까스로 말했다.
『그녀...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소? 철형이 알고 있다면...
부디 내게 가르쳐 주오...』
냉여옥이 더 보지 못하고 육초량을 가로막고 서서 철문금을 향
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만 해요!』
『아니요, 나는... 나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하오. 비켜... 서
시오!』
가까스로 더듬더듬 말한 육초량이 냉여옥을 밀쳤다. 이글거리
는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던 철문금이 다시 육초량에게 증오가 가
득 담긴 시선을 던졌다.
『너는 그래도 그녀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
『나는, 나는...』
육초량이 말을 계속하지 못하고 가슴을 두드렸다. 뜨거운 것이
목을 타고 넘어오려는 듯 기도를 꽉 막아 숨쉬기조차 거북했다.
육초량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철문금의 눈에 살기가 떠올랐다.
그는 육초량이 그래도 화소음을 사랑한다고 대답해 주기를 기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육
초량이었다. 철문금은 그가 자신의 말을 듣고 망설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화소음에 대한 육초량의 배신이 마치 자기 자
신이 당한 일인 듯 참을 수 없는 적의와 살의로 다가왔다.
『흥! 대답할 수 없겠지. 네놈도 그놈들과 똑같은 놈이니까. 지
순한 한 여인을 농락하고 무참히 내팽개쳐 버린 비열한 놈!』
『으으...』
『그래도 네놈을 잊지 못하고 있는 그녀를 생각해서 오늘은 이
말만 전하고 가겠다. 하지만 앞으로 네놈의 더러운 입에서 그녀
의 이름이 한 마디라도 거론된다면...』
『...』
『그 때는 네놈이 어디에 숨어 있든지 쫓아가 가차없이 베고 말
겠다!』
거칠게 문을 차 던지고 나가는 철문금의 뒷모습을 보며 그를
잡으려는 듯 손을 허우적거리던 육초량이 다시 울컥울컥 선혈을
토하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 * * *
『으음...』
육초량의 파리한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 나왔다.
『육가가!』
반가움으로 그의 어깨를 흔드는 냉여옥의 볼이 눈에 띄게 수척
해져 있었다. 벌써 만 사흘 동안이나 그녀는 밤을 꼬박 새며 육
초량의 곁에 붙어 앉아 그를 주무르고 약을 달여 먹이며 보살폈
던 것이다.
『철문금은...?』
그러나 힘겹게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한 그의 첫 마디는 철
문금을 찾는 것이었다. 냉여옥이 서운한 마음을 감추고 대답했다.
『떠났어요.』
비로소 육초량이 그녀를 한 번 바라보았다.
『여옥, 그대에게 너무 큰 고생을 시켰구려.』
냉여옥은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담담한 기색을 읽고 마음이
무너지는 듯했다.
『육가가!』
왈칵 솟구치는 서러움과 원망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린 그
녀가 육초량의 가슴에 무너지듯 안겨들었다. 잠시 그녀의 등을
쓸어주던 육초량이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 보면 냉여옥에게 두
번씩이나 목숨의 빚을 진 그였다. 그녀의 사랑과 은혜가 누구보
다 클 것이다. 하지만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것이 그
녀 스스로 만들고 꾸민 일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결과
적으로 그는 그녀로 인해 청향과 소음이라는 순진무구한 두 여자
를 버린 결과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육초량이 그녀를 밀어내고 침상에서 내려섰다. 놀란 눈으로 바
라보는 냉여옥을 애써 외면한 그가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
했다.
『내 옷을 가져다 주시오.』
이를 악물고 말없이 육초량을 바라보는 냉여옥의 눈빛이 흔들
렸다. 잠시 기다리던 육초량이 다시 말했다.
『내 옷을 가져다 주시오.』
『육가가... 설마...?』
『나는 가야 하오.』
『아...』
설마 했던 기대가 한 순간에 무너졌다.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으로 비틀거렸던 냉여옥이 입술을 깨물고 육초량의 앞을 막
아섰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일렁였다. 눈꼬리를 파르
르 떨던 그녀가 가까스로 울음을 참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
『당신은 아직 몸도 완전치 않은데... 어디로 가시겠다는 건가
요?』
사뭇 떨려 나오는 음성이었다. 그러나 육초량은 여전히 그녀를
외면할 뿐이었다. 그가 창백한 얼굴을 들어 천장에 시선을 준 채
담담하게 말했다.
『강호.』
그 한 마디를 했을 뿐, 굳게 입을 다무는 육초량이었다. 그의
결연함이 느껴졌다. 한 번 고집을 부리면 말릴 수 없는 사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냉여옥이 원망스럽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화소음이라는 그 여인을 찾기 위해서인가요?』
『......』
육초량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다시는 입을 열지 않겠
다는 듯 굳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그를 보던 냉여옥이 다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꼭 그녀를 찾아야 하나요? 철문금의 말도 듣지 못했나요? 그
녀는...』
이미 몸을 더럽혔고, 지금은 철문금의 사람이 되어 있다고 내
처 말하려던 냉여옥은 육초량의 사나운 눈길을 받고 어깨를 떨었
다. 한동안 무섭게 그녀를 노려보던 육초량이 천천히 말했다.
『그 때문에라도 나는 꼭 그녀를 찾아야 하오.』
냉여옥이 두 눈 가득 처연한 빛을 띠고 육초량의 옷소매를 붙
잡았다.
『그녀가 육가가에게 그처럼 소중한 사람인가요? 그렇다면 저는
당신에게 과연 무엇이지요?』
『당신은 좋은 사람이요.』
냉여옥의 눈에 언뜻 원망과 질투의 불길이 스쳐간 듯했다. 그
녀가 입술을 깨물며 싸늘하게 말했다.
『단지 그것뿐인가요?』
『나는, 나는...』
머뭇거리는 육초량에게 더욱 다가간 냉여옥이 눈빛을 차갑게
빛내며 다그쳤다.
『나는 어떻다는 거지요? 왜 말을 못하나요? 내가 그 여인보다
육가가에게 못해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군요. 그녀가 당신을
보살펴 주었다면 나 또한 그랬고, 그녀가 당신에게 사랑을 주었
다면 나도 그랬어요. 그리고 그녀가 당신에게 의지하고 기댄다면
나 또한 그렇게 하려고 해요. 그런데 당신은 한사코 나를 버리고
그녀를 찾으려고 하는군요. 내가 그녀보다 부족해서인가요?』
휴, 하고 한숨을 쉬고 난 육초량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볼 뿐
쉽게 말하지 못했다. 냉여옥이 간절한 얼굴로 그의 옷소매를 쥐
고 흔들었다.
『육가가. 당신은 내게 참 잘 해 주었어요. 그런데도 저는 못된
짓만 꾸며서 당신을 괴롭게 하였지요. 그것 때문에 저를 아직도
미워하신다면 당신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저를 때리고 괴롭히세
요. 당신이 꾸짖는다면 기꺼이 듣겠고, 당신이 때린다면 즐거이
맞겠어요.』
육초량이 다시 한숨을 쉬고 냉여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의 눈 속에 그녀의 애처로운 모습이 가득 차 있었다.
『아, 여옥. 그런 말은 하지 마오. 그대가 내게 베푼 은혜가 또
한 큰데 내가 어찌 그대를 괴롭힐 수 있겠소.』
『그러면 가가, 가지 마세요.』
냉여옥이 밝은 얼굴로 웃으며 육초량의 가슴에 안겨들었다. 그
녀의 작은 어깨를 보듬어 안았던 육초량이 다시 그녀를 떼어놓았
다.
『내가 가겠다는 것은 꼭 화소음 때문만은 아니요.』
『......?』
『나는 오직 한 자루의 철검 속에서 무한한 자유를 찾고자 하는
수행자일뿐, 다시 내 길을 가려고 하는 것이요.』
냉여옥이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눈빛을 빛내며 다시 그를
붙잡았다.
『당신의 검은 이미 경지에 이르러 있는데 왜 굳이 수행자이기
를 고집하나요? 당금 강호에 홀로 검을 수련하여 당신 만한 성취
를 본 자가 또 누가 있지요?』
『나는 이제야 검의 진경(眞境)을 넘보았을 뿐, 아직도 멀었
소.』
『그렇지 않아요!』
냉여옥이 도리질하며 그의 말을 강하게 부정했다.
『검에 있어서 당신은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어요. 현 무림
에서 당신의 철검을 감히 받아낼 자가 누가 있나요?』
『천하는 넓고 기인이사는 강변의 모래알처럼 많소.』
육초량의 고집 앞에서 냉여옥이 샐쭉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흥, 당대의 고수라고 부끄러움 없이 불릴 수 있는 자들은 불
과 몇 되지 않아요. 제가 그들을 꼽아볼 테니 틀렸으면 틀렸다고
말해 보세요.』
『......』
냉여옥이 서슴없이 손가락을 꼽아갔다.
『우선 생각나는 자로 사국천과 마백조를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들은 각기 권장과 내력에 심오한 데가 있으니 가히 일파 일문
의 종사로 부끄러움이 없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소.』
『다음으로는 우객 초유성과 색화랑 적음상, 비도 독고월과 마
도 철문금 등을 꼽을 수 있어요. 그들은 모두 우열을 가리기 힘
든 자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다만 그들 중 초유성이라는 자는
정말 대단해서 사국천이나 마백조 등과 비교하기가 쉽지 않아
요.』
육초량은 마음 속으로 가만히 초유성.... 하고 되뇌어 보았다.
자꾸만 마음이 끌리는 그 아름다운 사나이를 생각하자 문득 그를
다시 만나보고 싶어졌다. 한 번도 겨루어 본 적은 없었으나 늘
그 섬세한 사나이에 대하여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처음 강호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와 마주쳤던 기억 때
문인지도 몰랐다. 그 때 육초량은 넘쳐나는 투지로 초유성을 향
해 비연참 일격을 쳐냈었다. 그러나 초유성은 멋지게 그것을 타
넘고 웃으며 사라졌던 것이다. 그 때 받았던 그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육초량이었다.
육초량의 상념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냉여옥이 다시 손가락
을 꼽기 시작했다.
『그들이 당금 무림의 정점에 서 있는 몇 안 되는 자들이지요.
그 외의 인물들은 거론할 필요도 없어요. 물론 한 때 명성을 날
리다가 모습을 감춘 몇몇 은거고인들도 있으나 그들 역시 제외하
기로 하지요.』
잠시 쉬었던 그녀가 그윽한 눈길로 육초량을 바라보았다.
『자, 육가가는 그럼 그들 중 어디쯤에 위치할 것 같나요?』
냉여옥의 질문에 육초량은 선뜻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
국천과는 몇 번 겨루어 낭패를 당한 적이 있으니 마백조와도 그
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냉여옥이 다시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사국천과 마백조는 각기 일문을 거느리는 괴수들이니 그들을
이괴(二魁)라고 부르기로 해요. 그 외의 사인(四人)은 오직 독보
강호하는 자들이니 사기(四奇)라고 하고요.』
육초량은 그녀가 즉석에서 정한 그들 이괴(二魁) 사기(四奇)의
서열 매김이 매우 적절하다고 여겼다. 그는 자신이 사기의 말석
을 차지하고 있는 마도 철문금보다 약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나는 아무래도 그들 속에 낄 자격이 없는 것 같소.』
냉여옥이 천만의 말씀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당신은 그들 중 누구보다도 강할지 몰라요. 저의
판단이 틀림없어요.』
쓰게 웃는 육초량이었으나, 그의 마음이야 어떻든 냉여옥이 단
호하게 말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이괴야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사기의 아래
는 아닐 거라고 확신해요. 해서 육가가와 저를 이절(二絶)로 부
르겠어요.』
그 말을 하고 난 냉여옥이 배시시 웃었다. 자기 자신을 육초량
과 나란히 놓은 것이 조금은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헛기침으로
무안을 감춘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자, 중원 무림이 이처럼 이괴 사기 이절에 의해 눌려 있는데
도 당신은 여전히 자신이 단지 수행자라고 고집부릴 수 있나요?
그건 자기 자신을 너무 비하시키는 일이에요.』
『.....』
냉여옥의 은근한 눈이 집요하게 육초량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
았다.
『가가, 이쯤에서 수행자의 길은 그만 두세요. 가가께서 더 높
은 무학의 경지를 원하신다면 저는 황궁의 무고를 당신께 열어
드릴 수도 있어요.』
『......』
『가가만 좋으시다면 저는 또 당신을 제 대신 도찰원의 원주 위
에 봉하도록 폐하께 천거해 드리겠어요.』
그것은 실로 큰 유혹이었다. 도찰원주라면 조정의 문무대신들
은 물론 관부와 민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감찰하는 권력의
핵심 요직이었다.
동창과 금의위가 있었으나, 동창은 궁내의 일들을 관장하고 있
을 뿐, 환관을 경계하는 대신들의 견제 때문에 가정제 대에 이르
러서는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금의위는 황제의 신변을 경호하는 일로 그 기능이 축소되어 있
어서 사정기관으로서의 위상에서는 도찰원에 미칠바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당대에는 오직 도찰원만이 전권을 장악하여 막강한 사
정과 감찰 기구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것은 냉여옥이 황제의 총
애를 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가가만 허락하신다면 저는 또...』
냉여옥의 얼굴이 목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계속했다.
『가가에게 시집가겠어요.』
『하...』
육초량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마음만 먹는다면 인
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부귀영화와 권세가 그의 손에 들어
올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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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귀영화 와 권세를 얻는다면 책임 과 의무라는 굴레가 자유를 억압 하겠지요 ?
즐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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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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