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사도(生死島) 3-5
생사도에 저와 같은 인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진필생이었다. 그의 얼굴이 놀람으로 굳어졌다. 진필생은
비로소 자신이 생사도주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는건 아
니가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가 심중에 세워놓고 있는 계략
들이 모두 물거품이 될 것이었다.
(이건 위험하다.)
그가 진땀을 흘리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굉음을 내며 다시 문
이 닫혔다. 한동안 깊은 적막이 흘렀다.
『어서 오시오 공야형.』
생사도주가 먼저 정중하게 말해 왔다. 그것이 또 진필생을 곤
혹스럽게 했다.
쿵, 쿵, 쿵-!
대전 바닥을 밟으며 거침없이 발을 옮기는 그의 무거운 발자국
소리가 진필생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대단한 기세였다. 진필생을
스쳐 생사도주 앞에서 걸음을 멈춘 그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
다.
『하명하시오.』
『하하하...』
생사도주의 웃음 속에는 은근한 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가 진
필생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어조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공야형께 하명이라니, 감당할 수 없구려. 단지 형께 부탁 한
가지를 하고자 할 뿐이요.』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진필생은 문득 한 생각을 떠올리
고 온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공야형이라고? 그렇다면 그가 설마, 설마... 그란 말인가?)
놀람과 두려움으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진필생의
머리 위에서 진력이 충만한 음성이 다시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사공형. 나는 그대로부터 그런 말을 들을 처지가 못됨을 잘
알고 있소. 할 말이 있거든 서슴지 말고 하시오.』
어딘지 비꼬는 듯한 말투에도 생사도주는 그저 가볍게 웃을 뿐
이었다.
* * * *
생사도주(生死島主) 사공영호(詞空靈昊)는 한 세대 전 강호에
군림하던 세 명의 초인들 중 한 명이었다. 거의 동시대에 출현한
그들 삼인은 각자 강호를 종횡하면서 무적의 신화를 만들어 갔
다. 사람들은 각기 지닌 개성과 성격이 뚜렷한 그들 삼 인을 남
존(南尊) 북마(北魔), 일신(一神)이라고 부르며 경외와 두려움으
로 우러렀다.
사공영호는 그 중 남천일존(南天一尊)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
다. 그는 언제나 광명정대하였고, 의기를 부르짖으며 대정지기
(大正之氣)를 과시하였다.
남무림의 우상으로 군림하던 그와는 달리, 정사(正邪)를 가리
지 않고 오직 자신의 기분 여하에 따라 죽이고 살리는 일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하던 괴팍한 마두가 또 있었다. 사람들은 두려움으
로 그를 멀리하며 뒤에서 북천일마(北天一魔)라고 불렀다. 단목
굉(檀木宏)이 바로 그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공야승(孔爺乘)은 오직 한 자루 검으로 드
넓은 중원 천하를 주유하며 삼 초를 겨룰 적수를 찾지 못했던 위
대한 검사가 있었다. 그의 검에 대하여 세상은 경악과 경이로움
으로 술렁이며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서슴없이 검신(劍神), 또는 중원일신(中原一神)
이라고 불렀다.
일세대 전에 불멸의 명성과 위업을 쌓았던 그들 삼 인의 초인
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앞을 다투어 무림에서 그 종적을 감
추었던 것이 삼십 년 전이었다. 그 이유가 알려지지 않은채 세상
에는 다만 구구한 억측과 호사가들에 의한 갖가지 그럴듯한 말들
만이 떠돌아 그들을 더욱 전설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들 중 남천일존 사공영호가 당대에 이르러 생사도라
는 신비한 집단의 수좌(首座)로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진필생은 경악과 숨길 수 없는 두려움으로 자신의 위치도 잊은
채 고개를 들어 어둠 속에 우뚝 서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칠흑
의 어둠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 같은 형형한 눈이 보였다.
그 아래 어렴풋이 보이는 검은 수염이 삼국연의(三國演義) 속에
서 묘사되고 있는 관운장의 그것처럼 탐스러웠다.
(공야승!)
진필생은 하마터면 소리내어 그 이름을 부르짖을 뻔했다. 자신
의 입을 틀어막으며 이건 예사 일이 아니라고 마음 속으로 소리
쳤다. 급히 고개를 숙이는 그의 눈 깊은 곳에서 한 줄기 당황한
빛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진필생.』
생사도주 사공영호의 진중한 음성이 그를 불러왔다.
『이 분께서는 석년의 검신 공야형이시다. 앞으로 너를 도와줄
것인즉, 추호라도 결례됨이 없이 예우토록 하라!』
『삼가 명을 받듭니다!』
진필생은 떨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대전 바닥을 파고
들기라도 할 듯 깊이 부복했다.
『공야형, 잠시동안이면 되오. 본좌를 도와 주시리라 믿소.』
『사공도주. 어차피 그대의 말을 거역하지 못할 처지인 몸. 나
더러 그대의 문지기가 되라 한들 내가 어쩔 수 있겠소?』
냉랭히 말한 공야승이 꿇어 엎드려 있는 진필생을 향해 가볍게
포권하는 것이었다.
『공야승이요. 이제부터 그대의 수하가 될 몸. 잘 부탁드리오.』
『이, 이건... 이건 정말...』
진필생이 당황하여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고 전전긍긍했다.
『진필생. 지금 곧 공야형을 모시고 중원으로 돌아가라.』
사공영호의 웅장한 일성이 쩌르릉 울렸다. 중원의 이목이 닿지
않는 남해의 절해고도인 생사도였다.
<3>
-- 석년의 검신(劍神) 공야승(孔爺乘)이 진필생의 간청에 못
이겨 오랜 은거를 청산하고 하산하였다. --
이 놀라운 소식은 순식간에 중원 무림 전체를 경악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다시 강호에 발을 들여놓은 검신의 존재는
실로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 보이지 않는 긴장과 흥분이 어디
를 가나 장마 비를 머금은 무거운 구름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공야승 한 사람으로 인해 무림맹의 세력은 더욱 강해졌고, 상
대적으로 비천맹과 귀문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에 대
하여 고민하고 있는 것인지, 사국천과 마백조는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깊이 침묵하고 있었다.
『그대는 끝내 본인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을 부리겠다
는 것이요?』
진필생의 노기 띤 음성이 울려나왔다. 그 앞에 꿋꿋이 서 있는
사람은 수석 호법이자 무당의 장로인 청송자(靑松子)였다. 그의
얼굴이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진필생, 네가 어찌 그와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더냐! 나는
신검문의 재건을 돕기 위해 이곳에 와 있는 것이지 그대 개인의
야욕에 이용당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흥, 어리석은자 같으니. 머지않아 무림은 혈풍에 잠기고 오직
우리의 무림맹 만이 독보강호하게 될 텐데 그 때의 영화를 미리
포기하다니...』
진필생의 비웃음을 받은 청송자의 몸이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가 터져 나오려는 노기를 가까스로 참으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처음 무림맹이 결성되던 때를 잊었느냐? 우리 모두는 강북 무
림의 정기 회복을 위하여 신검문을 재건하자는 데에 뜻을 모았
다. 그랬기에 각지에서 모여든 군웅들을 규합하여 무림맹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둘 수 있었던 거다. 이제 스스로 그 명분을 저버렸
으니 누가 그것을 따르겠느냐?』
『태상과 강사옥이 서로 반목한 끝에 모두 죽어 이미 대가 끊기
고 강호에서 사라져 버린 신검문이다. 거기에 무슨 미련이 그리
도 많다는 말이냐.』
이죽거리는 진필생에게 한 걸음 다가서는 청송자의 눈에서 독
한 살기가 쏘아져 나왔다. 그가 진필생의 가슴을 가리키며 소리
쳤다.
『너는 맹주 노릇에 단단히 재미를 붙인 모양이로구나. 그래서
이제는 무림맹을 너를 추종하는 자들의 사사로운 집단이라고 착
각하게 되었으니... 너의 어리석음이야말로 고금제일이다!』
진필생의 눈에도 싸늘한 살기가 떠올랐다. 그가 손에 들고 있
던 섭선을 탁, 소리가 나도록 접어 그것으로 청송자의 미간을 찌
를 듯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미 삼십 육 명의 타주와 오십 칠 명의 향주들이 나와 뜻을
함께 하기로 했다. 무림맹이 강호에 홀로 우뚝 서는 날 그들의
가문과 문파는 나와 영화를 함께 할 것이다. 너 고리타분한 도사
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현실을 바라보아라. 너의 고집으로 인하
여 무당의 도관들이 불타고, 산이 도사들의 피로 적셔진다면 너
는 그 때 땅을 치며 후회해도 소용없다!』
이를 부드득 간 청송자가 기어이 살기를 참지 못하고 그의 송
문고검(松紋古劍)을 뽑아들었다.
『네가 무림맹을 이용하여 오히려 강호에 풍파를 일으키려 한다
면 제일 먼저 내 검을 꺾어야 할 것이다!』
그의 검 끝이 파르르 떨리며 가슴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진필
생의 입가에는 여유 있는 조소가 떠올라 있었다.
『어리석은 자. 권주는 마다하고 기어이 벌주를 마시려고 하는
구나.』
『비열한 놈. 네놈이 가증스러운 위군자(僞君子)였다는 것을 진
작에 알아차리지 못한 나의 어리석음이 한스럽다!』
부르짖은 청송자가 그대로 몸을 날려 진필생의 미간을 찍어갔
다. 쾌속하고 정확한 솜씨였다. 두 걸음을 미끄러지듯 물러서서
예봉(銳鋒)을 피한 진필생이 코웃음을 쳤다.
『흥! 일점도홍(一點桃紅)따위로 감히...』
일초의 검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청송자가 다시 낭랑한 기합성
과 함께 어지럽게 검을 휘둘러 밀어갔다. 어지러운 검광이 순식
간에 진필생의 온몸을 가두고 그물처럼 죄어들었다. 무당의 진산
절기(鎭山絶技)인 태극혜검(太極暳劍)이었다.
진필생의 얼굴에 비로소 신중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가 다급히
여섯 번 발을 바꾸어 딛고, 여덟 번 몸을 틀며 손에 들고 있던
섭선을 맹렬하게 휘둘렀다. 땅, 하는 맑은 소리가 터져나오고 삼
엄했던 검광이 씻은 듯 사라졌다.
청송자의 검은 여전히 진필생의 가슴을 겨누고 있었다. 일장
여를 밀려난 진필생의 눈에 흉흉한 살기가 어렸다. 그가 음침하
게 웃고 나서 입을 열었다.
『흐흐흐, 제법 쓸만한 솜씨였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너는 결국
나의 손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가 머리 위에 늘어져 있는 한 가닥의 금색 줄을 잡아당겼다.
이 놈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가 하고 의아해 하던 청송자가
눈을 부릅떴다. 한쪽 벽이 미끄러지듯 물러나더니 그 속에서 검
은 수염을 배 아래까지 늘어뜨린 흑의의 노인이 걸어 나오고 있
었던 것이다.
머리를 빗어 올려 상투를 틀었고, 칠 척이 넘는 큰 키와 당당
한 제구가 위압적이었는데, 찍어누르듯 내려다보는 형형한 안광
이 절로 가슴을 시리게 했다. 그를 바라보던 청송자의 낯빛이 핼
쑥해졌다.
『헉, 공야 선배...!』
한 손에 거무튀튀한 한 자루의 묵검(墨劍)을 들고 거목(巨木)
처럼 우뚝 선 흑염 노인의 입에서 웅장한 일성이 흘러 나왔다.
『청송. 너는 진맹주의 명을 따라야만 한다.』
비록 창백하게 질려 있는 안색이었지만 여전히 눈만은 살아 있
는 청송자였다. 그가 맑은 정기를 잃지 않고 있는 눈을 들어 흑
염 노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공야 선배. 오직 검 한 자루로 천하를 오시하던 선배께서 어
찌 이런 하오문의 잡배 같은 자와 어울려 스스로를 욕되게 하시
는지 빈도는 참으로 모르겠습니다.』
흑염 노인 공야승의 눈에 미미한 아픔의 빛이 흘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위압적인 음성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사람마다 길이 다르고 뜻이 다른 법. 여러 소리 할 것 없다.
너의 뜻을 고집할 테냐, 아니면 진맹주의 뜻에 순종하겠느냐. 한
가지만 택하라!』
청송자가 부드득 이를 갈았다.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값있는 일. 선배, 실례하
오!』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가 흰 수염을 흩날리며 곧장 공야승에게
로 부딪쳐 갔다. 그의 송문고검이 현란한 검화를 뿌리며 순식간
에 사십 구 검을 쳐냈다. 그 신속함과 기묘한 변화가 조금 전 진
필생을 상대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것을 보는 공야승의 눈에
언뜻 안타까움이 어렸다.
『좋은 솜씨다.』
찬사를 발한 그가 가볍게 일보를 양보하여 청송자의 예봉을 흘
렸다. 한 걸음을 물리는 것으로 청송자의 필생 절학을 간단히 젖
히는 그의 운신이 놀랍기만 했다.
『과연 검신이요!』
청송자가 진심에서 우러나는 탄성을 발하며 훌쩍 몸을 던져 도
약했다. 그의 송문고검이 폭우가 쏟아지는 듯한 은빛 검광을 뿌
리며 만천화우(滿天花雨)의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허공을 가득
뒤덮은 번쩍이는 검광이 눈부셨다. 무당이 자랑하는 태극혜검 중
의 정수인 일회초망(一回初忘) 일 초였다.
싸늘한 검광을 온몸에 두르고 오연히 서 있던 공야승이 허, 하
고 감탄성을 터뜨렸다.
『과연 무당검이다!』
찬탄과 함께 그가 가볍게 묵검의 손잡이를 잡아갔다.
(살아서 굴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어서 깨끗함을 보존하라!)
귓속을 파고드는 공야승의 전음이었다. 청송자의 눈에 언뜻 따
뜻한 빛이 일렁였다.
파아아-!
찬연한 묵광 한 줄기가 공야승의 허리에서 뽑혀 수직으로 쳐
올라갔다. 역류하는 번갯불을 본 듯한 착각이 청송자의 머리 속
을 뜨겁게 달구었다.
『감사...』
사력을 다해 외친 한 마디였지만 그것은 머릿속의 생각이었을
뿐, 입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했다. 복부에서 가슴까지 일직선으로
길게 쪼개진 청송자의 몸이 탁자를 부수며 처박혔다. 단 일 검의
처참한 결과였다.
진필생은 질린 눈을 부릅뜨고 그것을 바라볼 뿐, 숨조차 쉬지
못했다.
스르릉-
묵검이 다시 검집을 찾아 서서히 들어가는 가벼운 소리만이 실
내의 무거운 침묵을 흔들었다.
『아-!』
한참 만에야 진필생이 부르르 몸을 떨고 탄성인 듯, 신음인 듯
묘한 한숨을 터뜨렸다.
『참으로 굉장한 모습이었습니다.』
떨리는 음성으로 겨우 말한 그가 안색을 어둡게 하고 머리를
저었다.
『한데... 이자를 죽이고 말았으니 조금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무당에서 알게 된다면 그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
었다. 진필생은 가능한 한 그를 사로잡아 약을 복용시켜서라도
수하로 만들 작정이었다.
『검에는 오직 생과 사 그 두 길이 있을 뿐, 다른 편법은 없다.
그것이 검을 택한 자들의 공통된 운명이다. 죽거나 살뿐이다.』
공야승의 감정 없는 목소리가 무겁게 진필생의 가슴을 눌렀다.
* * * *
『자, 받으시오.』
진필생이 한 알의 검은 환약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재촉하고
있었고, 공야승은 그의 곁에 서서 무심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
보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진필생의 손에 놓여 있는 환약을 보며 망설이고
있는 자는 무림맹의 오대 호법 중 일인이자, 청성의 장로인 진천
일권(震天一拳) 관일평(關一平)이었다. 그가 공야승을 힐끔거리
며 물었다.
『이, 이것이 무슨 약이요?』
하하, 웃은 진필생이 느긋하게 입을 열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오보단혼산(五步斷魂散)에 칠채연환초(七彩連環草)를
적당히 섞고, 그 위에 본인이 약간의 재주를 부려 놓은 것이외
다.』
『무엇이!』
관일평의 눈에 흉흉한 살기가 어렸다. 오보단혼산(五步斷魂散)
은 복용하면 다섯 걸음을 떼어놓기도 전에 절명하고 만다는 극독
중의 극독이었다. 게다가 칠채연환초(七彩連環草)는 남만의 오지
(奧地)에서만 구할 수 있다는 독초로써, 한 종지의 독즙으로 백
마리의 황소를 죽일 수 있다는 지독한 것이었다.
『노부더러 아예 이 자리에서 죽으라는 말이요?』
관일평의 흉흉한 살기를 받으면서도 진필생은 여유롭기만 했
다. 살기 등등하여 그를 노려보던 관일평이 고개를 떨구었다. 공
야승의 형형한 눈길을 받은 까닭이었다.
『노부가 이미 진맹주의 뜻에 따르기로 했는데... 독을 먹고 죽
으라는 것은 너무한 것이 아니오?』
『죽다니, 누가 죽는단 말씀이오?』
짐짓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뭉을 떨던 진필생이 다시 하하, 하
고 웃었다.
『이것이 먹고 죽는 것이라면 내 어찌 관호법에게 드리겠소이
까? 육 개월 간은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이니 안심하시오. 육 개
월마다 한 번씩 본인이 드리는 해약을 복용한다면 평생동안 지금
과 다름없이 사실 수 있소이다.』
『으음-』
관일평이 깊이 신음하였다. 진필생의 말은 곧 평생동안 자신을
종으로 부리겠다는 것이었다. 입술을 악문 관일평이 침울하게 물
었다.
『만일 제 때에 해약을 복용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오이까?』
『칠일간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맛보고, 다시 칠일간 전신 경
락이 굳어지고 뒤틀리는 고통을 겪어야 하며... 그 후에는 또 칠
일간 혈관의 모든 피와 인체의 수분이 썩어드는 고통을 맛본 후
에야 겨우 죽게 될 것이요.』
진필생이 태연하게 뱉어내는 말을 듣던 관일평의 온몸이 두려
움으로 뻣뻣하게 경직되어 갔다.
『하하, 그러나 관호법께서는 조금도 염려하실 것 없소이다. 그
약은 단지 관호법의 마음이 변치 않도록 잡아두기 위한 수단일
뿐이요. 그대가 충성하기만 한다면 내 어찌 제때에 해약을 드리
지 않겠소?』
『으으음...』
그래도 관일평이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본 진
필생이 품안에서 작은 옥병 하나를 꺼냈다. 옥병 속에서 나온 것
은 한 알의 완두콩 만한 녹색 단환(丹丸)이었다.
『자, 이것이 해약이요.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면 먼저 한 알을
드리리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장탄식을 발한 관일평이 먼저 한 알의 해약
을 받아 소중히 간직한 다음 진필생이 내민 대추알 만한 흑색 환
약을 집어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것은 침과 섞이자 곧 녹아 목
구멍을 타고 흘러 내려갔다. 곧 한 줄기 맹렬한 열기가 단전에서
피어올라 온몸으로 흩어져 가는 듯하더니 임독양맥이 만나는 하
작교(下鵲橋)에 모여서 묵직한 느낌으로 응결되었다.
관일평의 표정을 살펴보던 진필생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관호법. 수고하셨소. 아무 염려말고 그만 돌아가 푹
쉬도록 하시오. 내 곧 별도의 명을 전하리다.』
읍하고 물러가는 관일평을 바라보는 진필생의 입가에 득의의
미소가 어려 있었다.
* * * *
『무엇이?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게요?』
성격이 불처럼 화급하기로 이름 높은 아미의 금화사태(金華師
太)가 노성을 터뜨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눈처럼 허옇게
센 그녀의 머리카락들이 곤두섰다. 그러나 그녀의 이글이글 타오
르는 눈길 앞에 앉아 있는 진필생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
의 곁에 공야승이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앉아 있었고, 금화사태
의 뒤에는 개방의 청죽신개와 공동의 당운표, 청성의 관일 평 등
무림맹의 오대 호법 중 삼 인이 묵묵히 서있었다.
『세 분께서는 어찌 아무 말도 없으시오? 벌써 저 간교한 자와
뜻을 함께 하기로 한 거요?』
『......』
세 호법을 노려보던 그녀의 불같은 시선이 다시 진필생에게 향
했다.
『나는 살만큼 산 몸. 죽음 따위로는 나를 위협하지 못한다!』
그녀가 성큼 몸을 일으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는
진필생의 눈에 희미한 조소가 떠올랐다.
『잡으시오!』
『삼가 명을 받드오.』
일제히 대답한 삼 인의 호법들이 몸을 날려 금화사태를 가로막
았다. 금화사태가 그들을 한꺼번에 흘겨보며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기껏 진필생의 개가되고 말다니. 그 동안 쌓은 명성이 아
깝지 않소?』
그녀가 철장을 쿵 소리가 나도록 찍으며 눈을 부라렸지만,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얼굴을 붉힌 채 묵묵히 침묵을
지키던 세 사람 중 관일평이 힐끗 진필생의 눈치를 한 번 보고는
앞으로 나섰다.
『사태, 조심하시오!』
외친 그가 벼락 같이 그의 진천권을 때려냈다. 천 근의 암경
(暗勁)을 실은 무거운 권경이 금화사태의 가슴을 무너뜨릴 듯 거
침없이 뻗어 나갔다.
『흥, 고개를 돌리면 피안이라 하였거늘 기어이 미망(迷妄)의
끈을 놓지 못하는구나!』
싸늘하게 일갈한 금화사태가 철장을 풍차처럼 휘두르며 마주쳐
나갔다. 그 틈을 노린 청죽신개의 죽장이 날카로운 휘파람소리와
함께 옆에서 쓸어갔다. 그것을 보던 당운표가 하-, 하고 길게 한
숨을 쉬고는 번쩍 몸을 날렸다.
청죽신개와 관일평을 맞아 고군분투하고 있던 금화사태의 얼굴
이 어두워졌다. 두 명만으로도 이미 벅찬데, 당운표마저 가세해
들자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리 번쩍, 저리 번쩍 하
면서 숨돌릴 틈 없이 몰아치고 빠져나가는 당운표의 권각이 곧
금화사태를 칠 듯 칠 듯 하면서도 치지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비
켜가곤 했다. 그 틈을 탄 금화사태의 철장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관일평과 청죽신개를 휩쓸어갔다.
순식간에 실내는 권장의 회오리와 날카로운 파공성으로 가득
찼다. 가까스로 십여 초를 넘긴 금화사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미 무리하게 진기를 운용하고 있는 그녀였던 것이다. 갈수록
철장의 흉맹함이 둔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온 힘을 다해 철장을 휘둘러 눈앞의 관일평을 밀어낸 노사태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차합! 하는 우렁찬 기합성을 터뜨리며 마
지막 힘을 다해 진필생을 노리고 쏘아져 나갔다. 크게 놀란 삼
인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그들의 삶과 죽음이 이미 진필생의 손
안에 쥐어져 있는 탓이었다. 진필생이 금화사태의 철장에 맞아
죽는다면 육 개월 뒤에는 그들도 처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 생각이 세 사람을 당황하게 했다.
만리비객(萬里飛客) 당운표(唐雲豹)의 경공 조예는 역시 명불
허전이었다. 몸이 번쩍 한 순간 가장 멀리 있던 그가 가장 먼저
금화사태의 등뒤에 이르렀다.
『사태, 그러면 안 되오!』
허둥대며 외친 그가 달려온 기세를 일장에 고스란히 실은 채
금화사태의 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방향을 틀어 피할 줄 알았
던 금화사태가 등으로 그 사나운 일장을 받았다.
펑-!
가죽부대가 터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났다. 금화사태가 답답
한 신음과 함께 한 줄기 선혈을 뿜어내며 더욱 맹렬하게 진필생
에게로 날아갔다.
『내가 네놈과 함께 죽으리라!』
악귀와 같은 형상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악문 노사태가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철장을 내리쳤다.
휘이이-!
그녀의 철장이 진필생의 정수리 위로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 아래에서 진필생은 아무 것도 모르는 듯 입가에 차가운 비웃
음을 띈 채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앉아 있기만 했다.
『아!』
삼 인의 호법들이 놀라 일제히 외쳤다.
금화사태의 철장과 진필생을 바라보고 있는 공야승의 눈에 언
뜻 망설이는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곧 낮은 탄성을 발하며
묵검을 잡았다.
번쩍-!
호흡을 멈춘 찰라에 한 줄기 묵광이 번개처럼 허공을 양단했
다. 따당! 하는 무거운 쇳소리가 났다. 갑자기 허전해 진 손안의
느낌이 마음까지 허전해지게 했다. 금화사태는 육십 년 동안 자
신과 함께 해 온 철장이 반듯하게 잘린 채 덧없이 눈앞을 날아
사라져 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부릅뜬 눈에 언뜻 절망이 어리
고,
사아악-!
그대로 쳐 나간 묵광이 추호의 사정도 없이 그녀의 노구(老軀)
를 정수리부터 양단하고 있었다.
<4>
호남성(湖南省) 북단의 동정호(洞庭湖)는 그 둘레가 칠백 칠십
여 리에 달하는 거대한 호수였다. 그 큰 규모와 함께 그것은 또
한 더없이 수려한 경관으로 이름 높은 중원의 명소이기도 했다.
동정산 남쪽 마곡산(磨谷山) 기슭에 자리한 계양촌(鷄揚村)은
삼십여 호(戶)가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주
민들의 대부분은 동정호에 기대어 사는 어부들로써 순박하고 부
지런한 사람들이었다.
동정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계양촌 북쪽 언덕 위의 모옥(茅
屋)에서 한가롭게 낚싯대를 메고 나오는 사나이가 있었다. 그를
본 마을 사람들이 정겹게 인사를 했다.
『글 선생, 오늘도 낚시하러 가시나 보오?』
『그렇게 매일 고기를 낚아 올리니 머지않아 우리들은 모두 밥
을 굶게 되는 것 아니오?』
『어디, 글 선생이야 그저 낚시를 담그고 있을 뿐 한 번도 고기
를 잡아오는 걸 보지 못했는데?』
『하하, 솜씨가 영 형편없는 모양이오 그려. 그렇다면 선생, 내
이따가 자식놈을 시켜서 큰놈으로 몇 마리 보내 드리리다.』
사나이가 마을 사람들의 정다운 인사말에 일일이 미소로 답하
였다. 그가 당산나무를 돌아 보이지 않게 되자 그를 바라보던 사
람들이 저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사람이야. 저 건장한 몸매와 거친 손마디로 보아
서는 영락없이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무사인 것 같은데...』
『그러게 말이야. 처음 그가 마을에 들어왔을 때는 그 뭐랄까,
그에게서 느껴지는 섬뜩한 살기와 피 냄새 같은 것을 맡고 불길
한 일이 생길까봐 여간 걱정한 것이 아니었지.』
『사람이란 겉모습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거야. 어쨌거나 그가
마을에 와 아이들을 맡아 가르치면서 그 개차반 같던 놈들이 좀
의젓해졌나?』
『암! 요즘에는 우리 대두아(大頭兒)가 글세 아침저녁으로 제
어미와 내게 꼭 문안 인사를 드린단 말일세. 허허, 그 참.... 그
개구쟁이 고집통 녀석이 의젓해져 가는 걸 보면 난 정말 살맛이
난다니까.』
객지에서 어쩌다가 흘러 들어온 낯선 사나이는 언덕 위에 버려
져 있던 모옥을 손수 수리하여 살면서 마을의 아이들을 모아 글
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과묵했고, 쓸쓸해 보였다.
하는 일이라고는 아침나절에 아이들을 가르치고, 낮 동안 잠시
호수에 내려가 낚시를 하는 게 전부였을 뿐, 그 외의 시간은 무
엇을 하는지 집 밖으로 나오는 일이 드물었다.
점차 마을 사람들은 그의 무거운 침묵과 거동을 믿음직한 눈으
로 바라보며 자신들의 마을에도 드디어 글 선생이 생겼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게 되었다.
사나이는 오월의 쨍쨍한 햇빛 아래 벌렁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었다. 한가롭게 드리워져 있는 낚싯대 끝에 흰나비 한 마리가
살짝 내려앉아 날개를 쉬었다.
『운심(雲心)의 득(得).』
사나이가 문득 낮게 중얼거렸다.
『구름의 한가롭고 자유로움은 그것에게 집착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여름으로 접어든 햇빛의 따가움에 살이 타는 것도 아랑곳없이
누워 있는 그의 가라앉은 눈이 한가롭게 떠 있는 뭉게구름에 머
물러 있었다. 육초량이었다.
『운심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했으나 아직 멀었다.』
육초량이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고, 마음이
자유로워져야 검 또한 자유롭게 될수 있는 것. 아, 어렵고 또 어
렵다.』
그의 긴 탄식 소리에 놀란 듯 나비가 날개를 저으며 망망한 호
수의 푸른 물을 바라보고 날아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고맙습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
감사드립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 합니다!
즐독 ㄳ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즐독 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즐감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
즐독합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