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곳:
http://mlbpark.donga.com/mp/b.php?m=user&p=1&b=bullpen&id=201710090009648778&select=&query=&user=santa123&site=donga.com&reply=&source=&sig=h4aTGg2g63aRKfX@hcaXHl-gihlq
먼저 앞서 오랜 근친 결혼으로 인한 유전병으로 다른 합스부르크 귀족들 외모는..
그렇다면 합스부르크의 저주를 벗어나, 출중한 외모를 가졌던 둘을 꼽아봅니다.
경어는 생략합니다.
1. 마리아 테레지아
십대 시절 미인으로 유럽에 소문났다고 한다.
그래도 합스부르크라고 턱이 살짝 튀어나와 있지만,
다른 합스부르크에 비하면 축복받은 인물임이 틀림없다.
성격은 괭장히 유쾌하고 쾌할했다고 한다.
첫눈에 반한 남자를 시녀에게 시시콜콜 말했을 정도이며, 술도 잘마시고 깔깔대는 성격이었다 한다.
그리고 그 첫눈에 반한 남자와 연애 결혼을 했다.
(무려 그 시대에.. 그것도 합스부르크라는 최고 귀족이..)
이 사람이 바로 마리아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이다.
2. 신성로마 제국의 존 스노우
오스트리아의 존 경, 또는 아우스트리아의 돈 후안.
(Don Juan de Austria, sir Jhon of austria)
Don이 '경(sir)'이란 뜻이고,
합스부르크를 당시에 아우스트리아(오스트리아) 가문이라 불렀다.
나라이름 오스트리아와는 다르다. 그냥 발음이 동명일뿐.
영어로 치면, 오스트리아 가문의 존 경. 스페인어로는 아우스트리아의 후안 경 되시것다.
이 양반은 신성로마제국판 존 스노우다. 즉 바스타드(서자)이다.
아버지는 당시 전 유럽을 진동케 한 카를 5세이다.
카를 5세는 바이에른 방문 중에 유명했던 독일의 여자 가수, 바르바라 볼룸베르크에게
한 눈에 반했고, 사생아가 태어나게 된다.
어머니는 그 직후, 브뤼셀의 궁정 관료 히에로니무스 케겔과 결혼했다.
헤로민이라 이름 붙여진 아이는 황제의 오랜 친구였던 아드리앙에게 맡겨진다.
카를 5세 나름의 배려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권력에서 멀어진 왕족은(심지어 사생아는) 굉장히 험한 꼴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드리앙은 헤로민을 플랑드르의 궁정악사인 프란스에게 맡긴다. 그 밑에서 각종 언어와
교육을 엄격하가 받는다.
7살이 되자
황제의 명령으로 황제 성의 집사장인 키하다 부부에게 위탁되 교육받는다.
왕겜으로 치면, 마에스터 루윈과 카셀 경을 합한 인물쯤으로 사생아지만 굉장한 애정을
쏟고 있는 증거라 하겠다.
헤로민이 11살때 카를 5세는 죽게 된다.
카를 5세는 죽으면서 유언으로, 헤로민에게 성직자가 되면 좋겠다고 남긴다. 그것이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남이자 후계자인 펠리페 2세는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브뤼셀로 귀환한다.
바야돌리드로 이주한 그는 키하다에게 자신의 사냥터로 헤로민을 데려오게 한다.
집사장 키하다는 이때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당시에는 왕권에 위협을 가하는 형제, 왕족들을 서슴없이 암살하고, 살해하던 중세였다.
키하다는 떨리는 마음으로 11살 꼬맹이 헤로민과 함께 말을 타고 사냥터로 향한다.
펠리페 2세가 나타나자, 키하다는 헤로민에게 말에서 내려 황제께 예를 표하라 말한다.
헤로민이 무릎을 꿇자 펠리페2세가 말했다.
"네가 그 아이로구나."
"네 아버지가 누군지 아느냐?"
"모릅니다. 폐하"
"우리는 같은 아버지의 아들이다. 우리는 형제다."
그리고 펠리페 2세는 예상과 달리, 헤로민을 두 손으로 껴안았다.
아마도 키하다는 마음을 쓰러 내렸을 것이다.
그 이후 펠리페는 헤로민을 '나의 사랑하는 동생'이라 불렀다.
그에게는 갓난아기 때 사망한 동생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자랐다면 헤로민과 똑같은 나이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후안'. 펠리페는 헤로민에게 후안이란 이름을 붙여준다.
펠리페는 아들 뻘인 동생 후안을, 실제 아들보다 더 애지중지하며 다녔다.
미덥지 못한 친아들 카를로스에 비해, 후안은 정말이지 비범한 재능을 타고났던 것으로 보인다.
펠리페는 직접 각종 지식을 후안에게 과외했는데, 스펀지 처럼 빨아들였다 한다.
펠리페는 유명한 지도 덕후 였다.
그의 취미는 지도를 펼쳐놓고 대국적인 전략을 짜며 워게임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후안의 손을 잡고 함께 다니며, 자주 워게임을 진행햇다고 한다.
이는 후안에게 대국적인 시야와 대전략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하지만 출생의 한계는 명확했다.
그는 왕족이나 대공에게만 허락된 '전하'라는 존칭으로 불리지 못했고,
공식 행사에서도 왕족들의 맨 뒤 , 그란데스 계급의 맨 앞에서 행진했다.
1568년, 21살때 그라나다에서 모리스코(강제 개종된 중동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에 자원해 입대한다.
지역 총사령관인 몬데하르 후작이 전략적 실패로 후퇴하자,
펠리페는 후안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전투에서 총사령관인 후안은 후방에 대기하지 않고, 최전선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웠다.
후안은 그라나다의 반란군을 격파하고, 동쪽으로 진군했다.
반란군이 점령한 갈레라로 향한 후안은 전투에 돌입한다.
이 전투 역시 후안은 뒤에서 있기 보다, 역시 앞에서 병사들과 함깨 싸웠다.
지휘관이 함께하자 병사들은 사기가 올라, 도끼와 바스타드 소드 등을 휘드루며 용맹하게 싸웠다.
어찌나 격렬했던지 후안 바로 옆에 있던 부관이 사망하고, 후안도 헬멧에 총탄이 박히는
일도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동생 바보 펠리페는 후안을 크게 꾸짖었다.
지휘관은 전투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안전한 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이다.
병사들에게 온 후안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를 대하는 병사들의 태도가 완전 달라진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 핏줄로 낙하산으로 내려온, 20대 초반의 애송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병사들은 책상물림으로 유명한 펠리페보다,
자신들의 지휘관이 군사적 재능으로 유명한 카를 5를 더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병사들은 이제 후안을 '전하'로 부르고 있었다.
(사생아인 한계로 왕족에게만 허락된 전하라는 칭호를 받지 못한 후안임을 생각하면
병사들의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럽의 역사를 흔들어논 대 사건이 터지고 만다.
베네치아의 공업단지에 대규모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당시 베네치아는 일개 선박장이 아니었다. 현대로 치면 XX공단, 테크노 밸리처럼
대규모 방위산업체 단지였으며, 입주한 회사의 숫자는 무려 330개였다. 배 뿐만 아니라
대포, 롱소드, 갑주, 방패 등을 생산하는 방산단지였으며, 모든 부품의 규격화로 공장처럼
균일한 품질과 규격의 제품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오스만 제국은 유럽을 침공할 절호의 찬스라 생각하여, 대규모 선박을
동원하기 시작한다.
이 소식을 들은 유럽은 유럽연합군인 신성동맹을 조직하지만, 절차 상 굉장히 대응이 늦어지게 된다.
연합군의 총대장은 누가 할 것인가, 돈은 누가 얼마나 낼것인가로 첨예하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결국 제국의 펠리페2세가 전비의 반을 지출하기로 하면서 발언권이 세지게 된다.
이에 펠리페는 신성 동맹군의 총 사령관으로 당시 26살에 불과한 후안을 임명한다.
연합국들은 대경실색했다.
유럽 전체의 국운이 걸린 싸움인데 20대 애송이라니...
각국에서 반발이 심했고, 교황 역시 여러 차례 다른 인물을 추천했지만
펠리페는 요지부동이었다.
(동맹군 중에는 오스만을 여러차례 때려부순 구호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 '아이슬 아담' 같은 백전 노장들도 많았다)
자신을 고깝게 보는 시선들 속에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후안이 첫 번째로 한 행동을 무엇일까?
그는 전군의 지휘관들을 한 자리에 초대한다.
그리고 당시에는 무척 이색적인 행동을 한다.
바로 '프리젠테이션'을 한 것이다.
그는 커다란 칠판을 뒤에 놓고, 장군들에게 향후 대전략과 세부 계획등을 발표하고, 설득했던 것이다.
중세 관점으로 총대장은 당시 까라면 까는 것이었기 때문에,
후안에게 모두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이 젊은 사령관이 비범한 인물임을 알아챈다.
게다가 후안은 전술적 외에도 상당한 강점이 있었는데,
인간적 매력이 넘쳤다는 것이다.
당시 동맹군은 수백년동안 전쟁으로 치고 받으며 앙숙이던 베네치아와 제노바,
기질적으로 안 맞는 스페인과 독일군이 몰려 있어 시비가 계속 생겼다.
20대 중반에 불과한 후안은 둘을 불러 다독이며 분쟁을 중재하는데 탁월했으며,
대화할 수록 그의 매력에 빠지는 군사들이 많았다.
그는 작은 쾌속정을 타고 배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일선의 최하단의 병사들에게 손을 흔들거나 안부를 묻는 등 사기를 올리는 쇼맨쉽도 뛰어났다.
그는 당시 로마때부터 이어진 선박 앞에 있는 충각을 해체하고
더 많은 대포를 달 것을 지시하는 등 혜안을 선보였다.
이윽고 벌어진 레판토 전투에서 그는 역시 최전선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웠다.
레판토 전투는 물위에서 벌어진 육상전이라 불릴 정도로
겔리선들이 충돌하여, 말 그대로 선박을 타고 백병전을 서로 펼치는 아비규환이었다.
당시 기록화를 보면, 오스만의 궁수는 물속에 빠지면서도 활을 쏘고 있고.
동맹군의 병사는 배의 잔해를 밟고서
투핸드 소드를 휘둘러 오스만의 도끼병과 난전을 벌이고,
양측 지휘관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직접 칼을 들고 백병전을 벌이는 처절한 사투였다.
결국 이 전투는 신성동맹군의 대승리로 끝이 난다.
레판토 전투 후에, 후안은 자신의 병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 또는 '프린스(왕자)'라는 존칭으로 불리게 된다.
처음에 후안에게 전하라는 존칭을 금지한 펠리페 2세가 나중에 허락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이는 돈 후안의 업적을 사람들이 존경의 마음을 담아 그리 불렀고,
펠리페가 묵인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에도 후안은 튀니스를 점령하고,
경험많은 외교관이었던 그랑벨 추기경과 만나
그 밑에서 겨울동안 국제 정서와, 국가 경영, 북유럽 문제 등에 대해서 배우는 등 먼치킨이 되어간다.
그러나 하늘은 재능있는자를 빨리 데려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네덜란드에 파견된 후안은 돌림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그의 나이 겨우 31세 였다.
첫댓글 안타깝네요 좀 더 살았다면 합스부르크가의 공작이나 후작도 됐을텐데
후안과 테레시아 둘 다 자주 소설화 되지요.
그당시 초상화가 얼추 미화된것도 좀 감안해야
네덜란드에서 후안이 삽질한건 언급이 안되네요... 기본적으로 후안을 네덜란드로 보낸건 당시 불거지던 구교신교대립이었습니다. 펠리페는 후안에게 적당히 타협할것을 원했으나 후안은 가톨릭에 입각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죠...결국 뭐...현지 귀족들에게 지지도 못받고 병사...
........먼 훗날 모자가 재회했을 때 어머니가 ‘사실 너는 황제의 아들이 아니고, 그 당시 내가 만나던 말 사료 상인이 네 진짜 아버지야.’라고 그랬다는 것이다. 이거야 유전자 검사를 할 수도 없는 일이니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생김새로 보면 나는 말 사료 상인 쪽에 한 표!
[네이버 지식백과] 카를 5세, 세계제국을 꿈꾸다 - (3) 제국의 황혼이 시작되다 (서양 근대 인물 열전)
이런썰도 있네요 ㅋㅋㅋㅋ
ㅎㅎ...난 오래살겟군..재주가 없어서..ㅋㅋ
잼있어요.^^
역시나 턱스부르크 집안...
왕위 계승권을 놓고, 골육상쟁이 일상화된 배경에서 펠리페 2세의 애정은 역사에 기록될 만큼 눈물겹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