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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도(生死島) 3-6
무정하변에서 화소음과 철문금을 남겨 두고 떠나온 그는 쓸쓸
한 마음을 가눌 수 없어 발길 닿는 대로 방황했다. 호북의 양주
(襄州)에서 잠시 머물다가 한수(漢水)를 따라 남하하여 동정호에
까지 이른 것이다. 그리고 이곳의 수려한 경관이 좋아 머물렀으
나, 마음 속의 울적함은 쉬 풀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꼭 화소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일은 다만 그를 지금
의 깊은 우울과 권태 속으로 밀어 넣은 계기가 되었을 뿐, 사실
육초량의 이 헤어나지 못할 듯한 우울증의 전조는 지난 겨울 냉
여옥을 떠나면서부터 서서히 찾아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 번 무기력 속으로 빠져들고 말자 그의 마음은 그대로 정지해
버린 사물이 되어버린 듯했다. 눈부시게 성장하던 검도 더 이상
의 발전을 멈춘 채 정지해 버렸다. 그 답답함이 또 육초량을 더
깊은 우울과 나태의 함정 속으로 몰아 넣었다.
육초량은 매일 호수 가에 나와 덧없이 낚시를 드리워 놓은 채
공지 화상이 그에게 던져 주었던 운심(雲心)이라는 화두에 다시
몰두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집착을 끊는 일>이라고 수 백 번
도 더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었으나 그것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의 이 우울과 권태로움이야말로 육초량이 최
초로 맞는 시련이고, 기필코 넘어야만 할 벽인지도 몰랐다.
* * * *
『하하, 젊은 사람이 왜 그리도 잡생각이 많소?』
육초량은 갑자기 들려온 걸걸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
켰다. 십 여장 정도 떨어진 길가에 거구의 화상 한 명이 서서 그
를 보며 웃고 있었다.
『하하하, 청수사(靑水寺)에 가는 길에 벌써 보름째나 그대의
똑같은 모습을 보아 왔소이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계양촌의 글
선생이라고 하더구만.』
느긋하게 다가온 괴화상은 사십을 넘겨 보였다. 곁에 다가와
선 그의 넉살이 귀찮다고 생각한 육초량이 외면하고 다시 물 위
에 드리운 낚싯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것에 개의치 않겠다는
듯 거구의 화상이 다시 말을 던져 왔다.
『젊은 사람이 벌써 그렇게 의기를 잃고 있으면 장차 어찌 큰
사람이 되겠소? 허구헌날 이곳에 나와 고기를 잡는 것도 아니
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들어 보기나 합시
다.』
『운심(雲心).』
육초량은 자신도 모르게 불쑥 뱉어내고 아차 했다. 내가 쓸데
없는 소리를 했다고 뉘우치는 데, 거구의 화상은 자못 놀랐다는
듯 왕방울 같은 눈을 부릅뜨고 육초량을 뚫어질 듯 바라보는 것
이었다.
『허, 난제(難題)로다. 난제야...』
탄성을 터뜨린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상체를 숙여왔다.
『마음 속에 무명겁화(無明劫火)가 타오르고 있으니 어느 하늘
의 구름인들 제대로 보기나 볼꼬?』
육초량이 퍼뜩 의아한 시선을 던지자 이번에는 괴화상이 짐짓
그를 외면했다.
『마곡산 기슭에 현도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소. 그곳에 무치
(無痴)라고 하는 대은(大隱) 한 분이 살고 계신데, 그분이야말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대선사(大禪師)시라오. 젊은이가 스스로
난마(亂麻)처럼 얽힌 무명사(無明絲)를 끊어낼 수 없거든 한 번
찾아가 보시오. 그 분이라면 어쩌면 통쾌하게 그것을 끊어줄지도
모르지. 아미타불...』
거침없이 말하고 난 괴승이 한 번 합장해 보이고는 바랑을 추
스르며 휘적휘적 멀어져갔다.
(묘한 중놈이로군.)
그를 바라보던 육초량이 가볍게 실소하고 다시 벌렁 누워 버렸
다.
그럭저럭 계양촌에 눌러앉은 지도 두 달이 지났다. 오월과 유
월이 꿈결처럼 지나갔고, 칠월에 접어든 날씨는 한 걸음만 옮겨
도 한 되의 땀이 쏟아질 만큼 무더웠다. 그 삼복의 더위 속에서
육초량이 한 자루 철검을 들고 죽립을 눌러쓴 채 계양촌을 나서
고 있었다.
『아니, 글 선생, 어디 가시오?』
그를 본 사람들이 의아하여 물을 때마다 육초량은 여전히 웃으
며 고개를 숙여 보일 뿐이었다.
『이상한걸? 오늘은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으려나?』
사람들은 가벼운 의구심으로 고개를 갸웃거렸을 뿐, 그것이 육
초량을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 * * *
『이 근처일 텐데...』
마곡산의 서쪽 능선에 올라선 육초량이 부지런히 사방을 살펴
보았다. 그러던 그의 입가에 한 줄기 웃음이 걸렸다. 한 마장쯤
떨어진 맞은편 능선의 죽림 사이로 숨듯이 파묻혀 있는 작은 암
자의 귀퉁이가 보였던 것이다.
『저곳인 모양이로군.』
이마의 땀을 닦은 그가 다시 죽립을 눌러쓰고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죽림에 둘러싸여 있는 암자는 황폐하기 그지없었다. 안에서 우
렁차게 들려오는 코고는 소리가 아니었더라면 그것은 아무도 살
지 않는 버려진 암자로 여겨질 만큼 을씨년스러웠다. <현도암(玄
道庵)>이라고 쓰여진 낡은 현판이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듯 비
스듬히 매달려 있었다. 육초량은 실망감으로 허탈해졌다.
(역시 괜한 짓을 했는가보다.)
계양촌을 떠나면서 문득 달포 전에 만났던 괴화상의 말이 떠올
라 혹시나 하는 호기심 반 기대감 반으로 찾아온 그였던 것이다.
그냥 돌아갈까, 하고 잠시 망설이던 육초량은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한 번 만나 보기나 하자고 마음먹고 성큼 발을 들여놓았
다.
『하하하, 젊은이가 찾아올 줄 알았소.』
몇 번을 소리쳐 부르자 겨우 대답하고 나온 자가 그 거구의 괴
화상이라는 데에는 어이가 없었다.
『무치(無痴)라는 대은(大隱) 한 분이 계시다고 하지 않았소?
그 분을 만나고 싶소이다.』
『잘 찾아왔소. 헌데 그대는 지금 무치에게 무치를 묻고 있구
려.』
『...?』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결국 자기가 자기 자랑을 그렇게 해댄
것이었다.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육초량은 묵묵히 거구의 괴승
무치를 노려보았다. 이 놈의 허풍 떠는 버릇을 단단히 고쳐줄까?
하고 잠깐 생각하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쓸데없는 일이라고 여
긴 것이다.
『가겠소.』
한 번 눈을 흘겨주고 돌아섰다. 그러나,
『잠깐만!』
무치의 다급한 일성이 그런 육초량을 돌려세웠다.
『그대는 운심을 물으려고 온 것이 아니요?』
『...?』
『왔으면 듣고 가고, 그게 싫으면 보고라도 가야지. 잠깐만 기
다리시오!』
다급히 말한 그가 허둥거리며 다시 암자 안으로 뛰어 들어갔
다. 육초량이 한동안 어이없어하며 서 있는데, 손에 여섯 자 정
도 길이의 죽봉(竹棒)을 든 화상이 여전히 허둥거리며 뛰어 나
왔다.
(무엇 하려는 것일까?)
의아하여 바라보는 데 무치가 돌연 한 소리 고함을 질렀다.
『두 눈을 부릅뜨고 똑똑히 보아라!』
씨이잉-!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죽봉이 바람을 가르며 떨어졌다.
『허!』
의외의 일에 깜짝 놀란 육초량이 펄쩍 뛰어 물러섰다. 그러나
정작 더 큰 놀라움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어느새 따라붙은 무치의 죽봉이 사나운 휘파람소리를 내며 여
전히 후려쳐 오는 것이었다. 육초량의 눈에 긴장이 감돌았다. 미
끄러지듯 발을 끌고 다가서며 연거푸 후려치는 무치의 솜씨가 만
만치 않아 보였다.
이를 악문 채 눈을 부릅뜬 무치가 더운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사납게 죽봉을 휘둘러 육초량을 때려왔다. 그 손속의 재빠름과
죽봉 끝에 미친 진력의 충만함이 놀랍기만 했다. 그것에 더해진
무치의 무서운 투지는 불을 뿜는 듯했다. 그는 마치 생사대적을
눈앞에 둔 듯 조금의 조심도 없이 때리고 찍으며 후려쳐 왔다.
그 눈부신 변화가 또 육초량의 눈을 어지럽게 했다.
(강적이다!)
육초량은 내심 부르짖으며 이리저리 피하고만 있었다. 이와 같
은 놀라운 봉법(棒法)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그였다. 눈앞
에 어른거리는 봉이 마치 천 개, 만 개인 듯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무치의 몸 전체가 죽봉의 푸른 기운에 감싸여 있어서 그
를 똑바로 볼 수조차 없었다.
벌떼가 달려들 듯 붕붕거리며 어지럽게 쳐 나오는 무치의 죽봉
은 육초량에게 호흡을 바꿀 여유마저 주지 않았다. 왼 손, 오른
손, 그리고 양손을 한꺼번에 쓰며 번개처럼 때려 오는 죽봉의 공
세 속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찔러오는가 하면 어느새 칼이 되어 베어 오고, 다시 몽둥이로
변하여 후려쳤다. 앞인가 하여 물러서면 어느새 반대쪽의 봉 끝
이 훑어왔고, 그것을 겨우 피해 내면 이번에는 처음의 것이 바람
처럼 다가왔다.
무치의 눈코 뜰 새 없는 그 눈부신 공격 속에서 육초량은 몇
번이나 철검의 손잡이를 잡았다가 도로 놓곤 하였다. 어지럽게
몸을 움직여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한 치의 틈을 노리고 있었지
만, 무치의 경이롭기만 한 봉법(棒法)은 도무지 검을 뽑을 여유
조차도 주지 않는 것이다.
빈틈! 하고 느낀 순간 그것은 찰라에 변하는 죽봉의 또 다른
변화 속에 사라져 버렸다. 무수히 드러나면서도 순식간에 감추어
져 버리는 허(虛)는 이미 허가 아니었다. 그것을 노리고 무리하
게 쳐들어갔다가는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오는 죽봉에 맞아 머리
가 깨지거나 정강이가 부러질 것이 뻔했다.
그가 봉인지, 봉이 그인지 분간할 수 없는 어지러움이 육초량
을 질리게 하고 말았다. 고슴도치처럼 수염을 뻣뻣이 곤두세우고
풀무질하듯 거친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봉을 휘둘러 쳐오는 무치
화상이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한 바탕의 어지러운 꿈속에서
불쑥 뛰쳐나온 요괴이거나 악귀 같이 여겨지기만 했다.
불끈 이를 악문 육초량이 발끝에 걸리는 돌멩이를 걷어차며 힘
껏 뒤로 몸을 뺐다. 땅,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차낸 돌멩이가
무치의 죽봉에 맞아 산산이 부서졌다. 그 순간에 육초량은 이장
여를 미끄러지듯 물러서서 봉이 미치는 거리 밖으로 몸을 빼낼
수 있었다.
『차합!』
반호흡의 여유를 얻을 수 있게 된 육초량이 비로소 철검을 뽑
아 들고 다시 땅을 박찼다. 이번에는 그가 무치를 바라보고 똑바
로 쳐들어갔다.
씨잉-!
몸을 던지며 날린 비연참(飛燕斬)의 일격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무치가 몸을 기울이며 죽봉을 휘둘러 그것을 막았다. 눈앞에서
죽봉이 비스듬히 양단되는 것이 보였다. 일검의 공격이 성공한
듯 싶었다. 그러나 육초량은 곧 아차! 하고 뉘우치고 깜짝 놀라
더욱 어지럽게 몸을 흔들며 물러섰다.
무치가 이제는 반씩 나뉜 죽봉을 두 손에 하나씩 들고 마치 쌍
검을 휘두르듯 더욱 기세를 올리며 쳐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
나였던 상대가 갑자기 둘로 불어난 듯한 느낌이 육초량을 당황하
게 했다. 왼 손의 죽봉을 받아내고 틈을 엿볼 양이면 어느새 오
른 손의 죽봉이 벼락처럼 때려왔다. 그런 다음에는 다시 왼 손이
었다.
(이건 당할 수 없다!)
육초량은 몇 번씩이나 솟구치는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
로 이겨내고 있었다. 도대체 이런 류의 봉법이 있다는 건 아직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이와 같은 달인(達人)이 어떻게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은 채 이 궁벽한 촌구석에 숨어 있었던 건지 믿을
수 없었다.
『치잇!』
분함의 휘파람을 불어낸 육초량이 어금니를 악물고 살기를 띄
워가기 시작했다. 그는 봉법을 관찰하던 이제까지의 소극적인 자
세를 버리고 사납게 검을 쳐내기 시작했다. 한쪽 팔이나 다리,
혹은 갈비뼈가 몇 개쯤 부러지는 상처를 입는 한이 있어도 눈앞
의 이 무례하고 경우도 없는 괘씸한 중놈을 베어 버릴 작정을 한
것이다.
육초량의 폭풍검(暴風劍)은 이미 중원 무림에 그 사나움이 제
일로 꼽히고 있었다. 야수의 흉포함으로 돌변한 그의 살검이 사
정없이 떨어졌으나 그에게 맞서고 있는 무치의 죽봉은 그 기세가
조금도 줄어들 줄을 몰랐다.
거칠게 몰아치는 난풍구도(亂風九道)의 검격이 무치의 죽봉과
뒤섞이며 따당, 땅, 하는 맑은 소리를 쉴새 없이 터뜨렸다. 누가
공격을 하고 누가 그것을 막아내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
이 치열하게 얽힌 두 사람이었다.
『그만!』
귓속이 웅웅 울려오도록 굉장한 고함을 터뜨린 무치가 그 큰
몸집을 마치 놀란 토끼처럼 가볍게 움직여 물러섰다. 그리고는
죽봉을 내던지고 비 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껄껄 웃었다.
그러나 그를 보는 육초량의 눈에는 아직 가시지 않은 노여움이
남아 있었다.
『무슨 뜻이요!』
육초량이 여전히 철검을 겨눈 채 사납게 소리쳤다.
『보여주려고 했을 뿐, 별다른 뜻은 없었소이다.』
날리듯 가볍게 대답하는 무치였다. 육초량은 그런 무치를 보며
어이가 없었다. 대체 뭐 이런 자가 다 있나? 하는 눈길로 바라보
는데, 무치는 여전히 천연덕스럽기만 했다.
『느끼고 있었지만, 그대는 실로 대단하구려. 소승의 생각보다
훨씬 뛰어났소이다.』
엄지손가락마저 세워 보이며 너스레를 떠는 무치였다. 그의 넉
살에 악의가 없다는 것을 느낀 육초량도 검을 거두고 말았다.
『다시 한 번 시험하려 든다면 베어 버리고 말겠소!』
눈을 흘겼으나 과연 내가 이 괴상한 중놈을 벨 수 있을까? 하
는 의문이 마음 속에 가득 떠올랐다
* * * *
『사부님은 언제 만나보셨소?』
밑도 끝도 없이 물어오는 무치의 말에 육초량은 어리둥절해졌
다. 그는 황폐한 암자의 불당 안에서 무치와 마주앉아 있었다.
『그대의 사부가 누구인지 나는 알지 못하오.』
분이 아직 덜 풀린 육초량이었다. 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무치는 하하, 웃기만 했다.
『그대는 운심(雲心)을 생각한다 하지 않았소?』
『...?』
『그 때문에 묻는 말이요. 그 빌어먹을 화두야말로 사부가 사람
을 골탕먹이는 독창적인 수법이니까. 나도 한때 그것 때문에 골
머리를 꽤나 앓았다오.』
그의 험상궂은 상호를 바라보던 육초량이 문득 떠오르는 한 생
각에 정색을 했다.
『하면, 그대의 그 말은 바로 소림의 공지 노승이...?』
『하하, 왜 아니겠소. 바로 그 어르신이 소승의 사부님이외다.
그래 언제 만나 뵈었소?』
육초량은 아연실색하여 한동안 무치를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년 전 겨울에 소림사에서였소.』
그 말을 듣는 무치의 고리눈 속에 따뜻한 흠모와 그리움이 떠
올랐다. 그가 상체를 기울이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안녕하시겠지요?』
잠시 망설이던 육초량이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돌아가셨소이다.』
『무엇!』
크게 놀란 듯 벌떡 일어선 무치가 사나운 눈으로 육초량을 쏘
아보았다.
『그런 말을 하다니... 네가 보았단 말이냐!』
『물론이요. 임종의 자리를 지켰던 사람 중 하나니까.』
『으으...』
주먹을 불끈쥐고 몸을 부들부들 떨던 무치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 때의 상황을 자세히 말해 주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육초량은 공지 노승이 열반에 들 때의
상황을 세세하게 말해 주었다. 대방이라는 젊은 무승이 소림승
중 제자로 유일하게 자리하고 있었다는 말을 듣자 무치가 눈을
빛냈다.
『드디어 사부님께서 열 여섯 개의 천강좌(天剛座) 중 그 동안
비어 있던 일좌(一座)를 채우셨구나!』
그가 일어나 옷깃을 단정히 여민 후 서천(西天)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그대로 엎어져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그칠 줄 모르고 울어대는 무치의 바위덩이처럼 커다란 등을 바
라보며 육초량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공지 노승이 아무
도 모르게 키워놓은 이런 자들이 대방 말고도 열 다섯 명이나 더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무치 화상처럼 그들 모두가 깊이 숨어서 자신을 감추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실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공지 노승에
의하여 만들어진 그들 소림의 숨겨진 힘은 어쩌면 중원 무림을
통틀어 가장 강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절로 숙연해지
는 육초량이었다. 그는 땡초처럼 보이기만 했던 공지 노승의 무
서운 능력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어쩌면 무치 화상을 비롯해서, 숨겨져 있는 노승의 제자들 모
두는 공지 노승이 그랬듯 평생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스
스로를 감춘 채 살아갈지도 몰랐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일제히
강호로 쏟아져 나온다면 그것은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어마어마
한 힘이 될 게 틀림없었다.
밤이 깊어서야 겨우 울음을 그친 무치 화상이 퉁퉁 부은 얼굴
로 육초량을 바라보며 멋쩍게 웃었다.
『실례했소이다.』
『별 말씀을...』
육초량은 무치에게 정중하게 고개 숙여 보였다.
『그대는 사부님의 운심관(雲心關)을 깨기 위한 마지막 벽에 부
딪친 듯하오. 해서 내가 사문에 전해오는 비전을 사부님 대신 그
대에게 전할까 하는데 어떻소?』
불당 뒤에 딸린 작은 선방이었다. 무치가 둘둘 말린 두루마기
하나를 꺼내 육초량에게 밀어놓으며 엄숙하게 말하고 있었다.
『나 또한 그대와 같은 전철을 밟았던 터. 사문의 이 그림 한
장을 두고 나는 석 달을 고심한 끝에 겨우 사부님의 운심관을 열
수 있었소. 그대에게도 이것이 도움이 되리라고 믿소.』
무치가 내민 두루마리를 펼쳐 본 순간 육초량은 또 한 번 커다
란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죽림을 막 빠져나오고 있는 한 마리의
대호(大虎)를 그린 그림이었는데, 그 그림 속에는 그림이 아닌
무언가가 있었다. 살아 있는 기(氣)였다. 그림 속에 충만한 기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새파란 흉광을 뿜어내며
노려보고 있는 대호의 눈동자에서 뻗어 나오는 강렬한 힘이었다.
(살아 있다.)
육초량을 그렇게 느꼈다.
제 3 장 소림무승(少林武僧) 대방(大方)
<1>
텅 빈 선방에서 육초량은 벽에 걸어놓은 대호출림도(大虎出林
圖)를 마주하고 서 있었다. 벌써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무치 화
상은 불당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고, 육
초량은 육초량 대로 선방에 틀어박혀 꼼짝하지 않았다.
육초량은 죽림을 벗어 나오고 있는 대호의 거대한 기와 맞서서
시간을 잊고 있었다. 그 놈의 눈은 신기하게도 살아있었다. 자리
를 바꾸어도 대호의 흉흉한 눈은 놓치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 눈에 어려 있는 기의 강렬함과,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꿈틀대
는 근육의 긴장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경이로운 느낌 앞에
서 육초량은 지금 사흘 동안이나 사로잡혀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
다.
(이겨야 한다!)
벌써 수 백 번이나 이를 악물고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단지 그림일 뿐이라고 애써 생각하려 하였으나 그림 속
의 대호는 그 때마다 더욱 강렬한 눈빛으로 정신을 압박해왔다.
한 순간이라도 긴장의 끈을 놓치면 그것이 그림을 박차고 뛰어나
와 목 줄기를 물어뜯을 것만 같은 위기감 때문에 꼼짝할 수가 없
었다.
사흘 간을 계속된 그의 긴장은 이제 극도로 팽팽해져서 곧 끊
어질 듯 위태롭기까지 했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육
초량의 심신은 점점 더 쇠약(衰弱)해져 갔다. 」같타??의식속
에서 무치의 부릅뜬 눈이 보였다. 사나운 기세로 폭풍처럼 몰아
쳐 오는 그의 죽봉이 정수리를 때렸다. 육초량은 경악하여 의식
을 바로잡았다.
(이것은 환상일 뿐이다. 흔들리면 안 된다.)
스스로에게 외치며 눈을 부릅떴지만, 무치의 사나운 얼굴과 눈
은 사라지지 않았다. 심마(心魔)였다.
맹렬한 바람 소리와 함께 무치의 죽봉이 두개골을 부수어 놓을
듯한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아찔한 순간, 육초량은 그의 인내심
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흔들리지 않도록 온 정신을 쏟았다.
팍! 하고 정수리에 닿았던 죽봉이 꺼져 버림과 함께 이번에는
단목굉의 괴기한 얼굴이 무섭게 그를 노려보며 달려들었다. 소림
의 석굴 속에서 엄청난 힘으로 자신을 때려오던 그의 권각(拳脚)
이 기억되어졌다. 단목굉이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흉흉함으
로 달려들어 무시무시한 주먹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한 대만 맞아도 당장에 뼈마디가 모조리 부서져 버릴 듯한 흉
맹함이었다. 그러나 육초량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을 고스란히
가슴에 얻어맞은 순간, 단목굉은 사라지고 사국천의 냉막한 모습
이 와락 다가왔다. 그가 차갑게 웃으며 손을 뻗어 목을 죄어왔다.
숨이 막혔다. 거부할 수 없는 엄청난 힘 앞에서 육초량은 목뼈가
부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의식은 끊임없이 그에게 이 모든 것이 환상이라고 말해 주고
있었지만, 마음 속에 가해지는 고통과 공포는 현실 그대로였다.
이제는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
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막막한 혼돈이 육초량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갈(喝)!』
육초량이 혼신의 기를 쥐어짠 엄청난 일갈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 모든 환상들이 갑자기 사라지고 눈앞에는 전혀 다른 것들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화소음의 빛나는 나신이 어둠 속에서 한 사나이에게 처절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그녀의 절망에 찬 비명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가슴 가득 부딪쳐 왔다. 그 자가 흉측한 미소를 흘리며 일어서자,
이번에는 또 다른 자가 짐승처럼 그녀를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그 자의 허리가 꿈틀거릴 때마다 화소음이 처절한 비명을 터뜨렸
다. 그것은 화소음이 아니었다. 그녀는 냉여옥이었고 옥청향이었
다. 처절하게 짓밟히고 있는 그녀들의 눈부신 나신이 찢기고 긁
혀 피투성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으으...』
육초량은 기혈이 끓어오르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
다.
(이것은 환상이다!)
자신의 신음소리에 놀라 번쩍 정신을 차린 그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는 금강의 부동심을 생각
하며 눈을 부릅떴다. 거기에 이미 육초량의 존재는 없었다. 그의
눈만이 시퍼렇게 살아서 어두운 허공 속에 두 개의 태양처럼 떠
있을 뿐이었다.
텅 비어 버린 머리 속에 일체의 것들이 사라져 버리고 완전한
허무가 채워졌다. 어느 한순간, 절대공(絶對空)의 정지상태가 왔
다. 그것은 텅 빈 충만이었다. 문득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웅장한
목소리 하나가 울려나왔다. 자신의 것이기도 하면서 아니기도 한
그것이 그의 영혼을 송두리째 잡아 흔들었다.
-- 불이동(不移動) 역불기(亦不起) --
바로 그것이었다. 일체의 작위(作爲)가 없는 본래의 순박함이
야말로 청정한 본연지심(本然之心)이며 만물귀근(萬物歸根)의 무
위법(無爲法)인 것이고, 묘법연화(妙法蓮花)의 진의(眞意)인 것
이다.
육초량은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폭발을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찾아든 정적 속에서 조금씩 벗겨져 떨어지는 미망(迷忘)
의 껍질들을 보았다. 몸과 마음이 허공에 뜬 듯 쇄락(灑落)해졌
다. 그는 비로소 그림을 그림 아닌 것으로 보고, 환상을 환상 아
닌 것으로 보았던 것이 그것들 위에 자신의 집착이 더해진 때문
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집착의 실체를 보고, 그것에서 벗어났을
때, 육초량은 비로소 일체의 두려움도, 일체의 미혹도 없는 순연
한 그의 진성(眞性) 속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본래의 눈으로 본다면 나무는 그저 나무일뿐이다. 그러나 그것
에 나의 집착이 생기고, 그럼으로써 나만의 의미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나무가 아닌 또 다른 무엇이 되어 나에게 다가오게 된다.
나에 의하여 의미를 부여받게 된 그것은 어느새 그 의미로써 나
를 사로잡고 나에게 나무가 아닌 다른 것으로 보아주기를 강요하
는 것이다. 목수는 필요에 의해서 선뜻 나무를 베지만, 그 사람
은 이미 나무를 벨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육초량은 정기가 충만한 눈으로 대호출림도를 바라보았다. 그
것의 눈 속에 여전히 살아 있는 강렬한 기는 이제 더 이상 위협
이 되지 못했다.
(벤다!)
느낀 순간에 그의 마음은 벌써 검을 뽑아 대호의 정수리를 쪼
개고 있었다. 뜻으로 나를 이기고 상대를 제압한다는 심즉발(心
卽發)의 의검(意劍)의 경계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어두컴컴한 불당 안에서 무치는 꼼짝하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
는지 알 수 없었다. 한동안 뜰 아래 서있던 육초량은 불당을 향
하여 깊이 머리를 숙였다. 공지 노화상에 대한 진심에서 우러나
온 경의였고, 깨우침의 길을 열어 준 괴승 무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었다. 다시 한 번 황폐한 암자를 둘러본 육초량이 성큼성
큼 걸음을 옮겨 그곳을 떠나갔다.
『사부, 그는 드디어 혼자의 힘으로 그 어려운 관문을 돌파했군
요. 그가 다시 강호로 나간 이상 우리들은 그저 마음 편하게 낮
잠이나 자고 있어도 될 것 같습니다.』
일만배(一萬拜)의 절을 올리고 있던 무치의 눈가에 반짝 눈물
한 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그는 마치 공지 노사부가 앞에 있기라
도 한 듯이 말하고 있었다.
『저희들 십육좌(十六座)야 이제 사부님의 욕설을 듣지 않아도
되니 잘됐지만, 사부께서는 심심해서 어쩌시려는지... 극락에 가
셨거든 그곳의 보살님들께만은 운심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행
여 그곳에서 쫓겨나 다시 환생하실까 두렵습니다.』
무치는 연신 중얼거리면서도 절을 올리는 일만은 쉬지 않고 있
었다. 그의 절은 앞으로도 이틀은 더 계속되어야 할 것이었다.
* * * *
삐이익-!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어둠에 잠긴 대파산(大巴山)의 정적을 흔
들었다. 귀주성(貴州省) 서쪽의 변경이었다.
대파산은 운귀고원(雲貴高原)에서 떨어져 나와 사천(四川)과
귀주(貴州)의 두 성(省)에 걸쳐 우뚝 솟아있는 험산이었다. 헤아
릴 수 없이 많은 봉우리들과 깊은 계곡, 인적이 닿지 않은 원시
림과 함께 늘 구름을 이고 있는 웅장한 산정(山頂)을 두고 사람
들은 그것을 십만대산(十萬大山)이라고도 부르며 신성(神聖)을
부여했다. 사천을 달리 파촉(巴蜀)이라고도 했으니, 그것은 대파
산에 대한 경외심 때문이기도 했다.
파촉(巴蜀)의 상징이며, 파촉인들의 기상이기도 한 그 대파산
의 한 줄기인 소영봉(逍靈峰)이 때아닌 소란으로 어지럽혀지고
있었다.
열 하루의 교교한 달빛 아래 한 사나이가 바람처럼 빠르게 치
달리고 있었다. 원시의 갈참나무 숲을 날 듯이 달리고 있는 그의
몸놀림은 무게가 없는 것인 듯 가벼워 보였다. 살짝 밟기만 해도
허리까지 빠져 버리고 마는 낙엽더미 위를 치달리면서도 바스락
거리는 소리 하나 내지 않는 절정의 경신술이었다.
작은 체구에 허리가 굽었고, 유난히 긴 두 팔이 무릎 아래까지
늘어져 있는 노인이었다. 그 모양만으로 본다면 영락없이 한 마
리의 성성이가 재빠르게 달리고 있는 것과 같았다.
『흥, 네놈들이 아무리 노부를 잡으려고 해도 헛일이다.』
힐끗 뒤를 돌아본 노인이 가벼운 비웃음을 흘렸다.
『노부가 달리 대도(大盜)라는 명성을 누리며 그 험한 강호에서
밥을 먹고 살아온 줄 아느냐?』
노인은 바람처럼 내달리면서 쉬지 않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
음먹은 것은 모두 자기 것이라고 큰소리치는 대도(大盜) 지음서
(池陰緖)였다. 무림의 골칫덩이로 이름 높은 그가 환갑을 바라보
는 나이가 되도록 여전히 활개를 치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독보적인 경신술 때문이었다. 그것은 가히 무림의 절학이라고 할
만큼 대단해서 그를 뒤쫓아 잡을 사람이 드물었던 것이다.
『흐흐흐, 비급이 결국 노부의 손에 들어왔으니 노부는 이 길로
깊이 은거하여 십 년 뒤에 천하제일의 고수가 되어 나오련다. 그
때 노부를 업신여기던 놈들이 어떤 얼굴들을 하게 될지 궁금하
군.』
갈참나무 숲을 가볍게 벗어난 지음서는 연신 득의의 웃음을 흘
리며 기암괴석들이 난립해 있는 석군(石群)들 속을 달리기 시작
했다. 그를 뒤쫓는 호각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어느덧 여유를
되찾은 지음서가 한 바위 아래 멈추어 서서 잠시 호흡을 골랐다.
탁한 숨을 뱉어내고 두어 번 깊이 심호흡을 하여 기운을 되돌린
다음에 다시 몸을 날린 순간이었다. 바위 뒤에서 불쑥 뻗어 나온
손 하나가 허공에 떠 있는 그의 허리띠를 재빨리 낚아챘다.
『허억!』
크게 놀란 지음서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내려와라!』
냉랭한 일성과 함께 그의 허리띠를 쥐고 있는 손이 힘껏 잡아
당겼다. 지음서는 그 무서운 힘에 감히 저항해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끌려갔다.
『으악! 사국천!』
뒤를 돌아본 지음서가 두 눈을 까뒤집고 비명을 터트렸다. 땅
바닥에 그를 거칠게 내동댕이친 자는 바로 비천맹주 사국천이었
다.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청의 무복을 입고 있는 대한들이 지음
서를 둘러쌌다. 지음서의 낯빛이 핼쑥해졌다.
『사맹주, 무엇 때문에...』
『흥!』
교교한 달빛 아래 뒷짐을 지고 서서 냉소를 날리는 사국천의
모습이 차갑고 오만하기만 했다.
『황궁에서 비급 한 권을 슬쩍해 왔다지?』
(어느새 이 자의 귀에까지 그 소문이...)
지음서의 눈에 아득한 절망감이 떠올랐다.
『내놔라!』
코앞에 들이민 사국천의 손을 보며 지음서는 재빨리 눈을 굴렸
다. 사국천이 버티고 서 있고, 주위를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이
십여 명의 대한들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어디에도 몸을 뺄 수
있는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휴, 하고 한숨을 쉰 지음서가 비급
을 꺼내려는 듯 품속에 손을 넣었다.
『물건을 드리면 그뿐, 설마 이 보잘것없는 늙은이의 목숨까지
원하지는 않겠지요?』
천천히 손을 빼내던 지음서가 자, 받으시오! 하고 소리치며 갑
자기 맹렬하게 손을 뿌렸다. 허공 가득 번쩍이는 수십 개의 은침
들이 사국천과 비천맹의 고수들을 향해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땅을 박차고 몸을 날리는 지음서였다.
『어리석은 수작!』
사국천이 가볍게 옷소매를 펄럭여 은침들을 떨구며 소리쳤다.
동시에 한 줄기 차가운 검광이 허공에 떠오른 지음서를 노리고
뻗어 나왔다.
『크아악!』
미처 방향을 잡기도 전에 허리가 반쯤 잘린 지음서가 처참한
비명을 터뜨리며 떨어져 뒹굴었다. 눈을 부릅뜬 채 마지막 숨을
끄르륵거리고 있는 지음서 앞에 버티고 선 자는 팔패(八覇) 중의
수좌인 갈평이었다. 그의 검신을 타고 한 방울의 피가 흘러내렸
다.
갈평이 몸을 굽혀 막 지음서의 품속에서 비급을 꺼내는 순간이
었다.
『어림없는 짓!』
한 소리 호통과 함께 맹렬한 파공성이 그의 뒤통수를 찔러왔다.
『허엇!』
크게 놀란 갈평이 비급에서 손을 놓고 미끄러지듯 옆으로 비켜
서며 일검을 쳐냈다. 땅, 하는 맑은 소리가 났다. 그의 검에 맞
아 퉁겨져 나가는 것은 한 개의 작은 돌 조각이었다.
『마백조, 무슨 뜻이냐!』
그것을 본 사국천이 뒷짐을 풀고 한 걸음 나서며 사납게 소리
쳤다.
『흐흐흐, 그 자를 쫓던 것은 본좌였는데, 중간에서 가로채려고
하다니... 사국천, 네놈은 과연 양심이라는 것이 있느냐?』
석군의 그늘 속에서 강시처럼 깡마르고 음산한 자가 천천히 걸
어 나오고 있었다. 귀문의 문주 마백조가 틀림없었다. 사국천의
미간이 좁혀졌다.
(하필 이 때에 놈이 당도하다니...)
사국천은 입맛을 다시며 곤란하게 되었다고 중얼거렸다. 마백
조는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국천, 좋게 말할 때 물러서라.』
싸늘한 살기를 담은 마백조의 눈이 사국천을 노려보았다. 그의
뒤에 유령들처럼 늘어서 있는 귀문의 삼십 여 고수들을 훑어본
사국천이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물건에는 임자가 따로 없는데 너는 마치 네 것인 듯 말하
는구나. 본좌가 꼭 가져가야겠다면 어쩌겠느냐?』
사국천이 태연히 지음서의 주검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비
급은 이미 그의 품속에서 반쯤 빠져나와 달빛 아래 드러나 있었
다. 그것을 보는 사국천의 눈이 강렬하게 불탔다. 그가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허리를 굽혀 비급을 취하려는 순간이었다.
『어림없는 짓!』
마백조가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그것을 경계하고 있던 비천맹
의 고수 한 명이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쳐냈다. 그 기세가 사나
웠으나 마백조는 서슴없이 깡마른 손을 내뻗어 오히려 검을 꽉
움켜잡았다. 마치 강철의 집게에 물린 듯 끼기긱, 하는 역겨운
소리가 났다. 뚝, 하고 청강검이 수수깡처럼 부러져 버렸고, 마
백조의 사정없는 발길질이 그 자의 배를 걷어찼다. 동시에 마백
조는 부러뜨린 장검의 검편을 사국천에게 맹렬하게 던졌다.
사국천은 할 수 없이 몸을 틀어 검편을 쳐내야 했다. 아무래도
마백조를 그대로 두고서는 비급을 취할 수가 없겠다고 판단한 그
가 성큼 다가서며 사권(四拳) 팔장(八掌)을 때려댔다. 조금도 물
러서지 않고, 푸르뎅뎅한 얼굴에 더욱 음산한 귀기를 띈 마백조
가 강철같은 손가락들을 뻗어 사국천의 장력을 흩치며 할퀴어갔
다.
카카캉-!
그의 손가락들이 사국천의 권장과 격돌하자 강철이 긁히는 듯
한 쇳소리가 났다.
『흥, 철골마조(鐵骨魔爪)!』
한 걸음 물러섰던 사국천이 다시 벼락같은 속공으로 삼십 육
권을 쳐내고 열 여덟 번의 발길질을 했다. 한 번 숨을 바꾸어 쉴
시간에도 미치지 못하는 눈부신 속공이었다.
『사국천, 많이 늘었구나!』
마백조도 지지 않고 그의 깡마른 팔과 다리를 부지런히 놀려
풍차처럼 휘둘렀다.
캉, 캉, 캉-!
사국천의 일권 일각에 부딪칠 때마다 그의 몸에서 귀청을 울리
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온몸이 마치 강철을 부
어 주조한 것인 듯했다. 마백조는 이미 금강불괴의 신체를 이루
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내력을 집중하여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
에서 철그덕거리는 듣기 역겨운 마찰음이 울렸다.
마백조의 철권 철각은 일체의 변식도 배제한 채 오직 가장 빠
른 직선으로만 뻗어 나가는 단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장
창을 계속하여 찔러내고 있는 듯 강맹하기 짝이 없었다. 사국천
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갔다. 일권 일장을 신중하게 쳐내고 있는
그의 모습은 엄숙하기까지 했다. 그는 한 수 한 수에 혼신의 내
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달빛 아래 서로 어우러져 신랄하게 손속을 나누고 있는 두 사
람의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조이게 할 만큼 흉험하기 그지없
었다.
사국천과 마백조가 아낌없이 독문절기(獨門絶技)를 쏟아내며
생사를 다투는 격전장 주위에는 어느덧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 있
었다. 비천맹과 귀문의 고수들 외에도 각지에서 몰려든 군웅들이
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그들의 눈은 오직 쓰러져 있는 지음서
의 품속에서 반쯤 빠져나와 그 모습을 살짝 드러낸 낡은 책자에
꽂혀 있었다. 비천맹과 귀문간에 본격적인 혈투가 전개된다면 그
틈에 혹시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몰려든 자들이
었다.
그들의 탐욕으로 이글거리는 시선 앞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
는 사국천과 마백조는 마치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들개 떼에 둘
러싸인 채 사냥한 고라니 한 마리를 다투고 있는 늑대와 표범의
형국이었다.
그들과 떨어진 한 바위 곁에서 느긋하게 팔짱을 낀 채 그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결전을 구경하고 있는 사나이 하나가 있었다.
허름한 마의에 철검 한 자루를 허리에 매달고, 머리카락은 뒤로
넘겨 질끈 묶었다. 훤칠한 키에 떡 벌어진 어깨와 곧은 허리가
강철처럼 단단해 보이는 육초량이었다.
(썩은 고기에 꾀어드는 쇠파리 같은 자들.)
육초량은 모두에게 경멸의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사국천과 마
백조의 싸움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 깊은 곳에서는 은은한 감
탄의 빛이 어려 있었다. 그는 내심 과연 이괴(二怪)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는 자들이라고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압!』
사국천의 입에서 엄청난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우르르르-!
은은한 뇌성과 함께 청광을 번쩍이며 어둠을 가르는 강기의 폭
풍이 장관이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독 입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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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합니다! 즐독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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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하고 깁니다.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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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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