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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Royal Navy
출처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57&contents_id=7962&leafId=257
페루 남부 쿠스코시 북서쪽에 위치한 잉카의 마추피추 유적.
카하마르카 전투에서 패배한 후 에스파냐인에게 사로 잡힌 잉카제국의 사파 잉카, 아타우알파. 존 밀레이의 [페루의 잉카를 잡는 피사로]
에스파냐의 콘키스타도르(정복자)들에게 현재 멕시코의 아즈텍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황금과 땅과 노예에 눈이 먼 에스파냐인들의 ‘탐험’은 계속되고 있었다. 코르테스이전에도 후안 폰세 데 레온, 발보아 등이 아메리카 대륙 인근을 기웃거리고 있었고, 코르테스가 오아차카(Oaxaca)의 총독이 된 후에도 바스케스 데 아이욘은 북미대륙을 들쑤시고 다녔으며 코르테스의 부장이었던 알바라도는 과테말라의 총독이 되었다가 ‘화끈한 모험’을 찾아 남미대륙으로 향했다.결국 남미대륙에서 번성하고 있던 잉카도 에스파냐인들에게 ‘발견’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리고 잉카 제국 역시 에스파냐인들의 손에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세계 역사 속에서 대제국을 운영했던 집단은 대개 나라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환인-환웅-단군 이야기, 중국의 삼황오제, 로마의 로물루스-레무스, 수메르의 길가메시 서사, 인도의 라마야나 등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집단은 예외 없이 건국신화를 내세워 집단의 정체성을 강화하려 한다. 잉카제국의 황가(皇家)에는 많은 계파가 있어 서로 자신의 계파를 강조하는 신화를 내세웠다. 이후 잉카제국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했던 에스파냐 또는 메스티소 사가(史家)들이 정리한 잉카의 건국신화들을 종합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개된다.
사람 머리모양의 모체 도자기. <출처: (CC)Patrick charpiat at Wikipedia.org>
세상은 처음에 어둠뿐이었고 아직 해와 달과 별은 생겨나지 않았다. 그 뒤로 세상이 생겨났으나 가장 처음에 생겨난 세상은 기독교 성경 중의 홍수와 비슷한 대홍수가 잃어나 멸망하였다. 이에 잉카의 창조주인 콘티티 비라코차(Contiti Viracocha, “알 수 없는 신”)는 “세상을 만든 자(Pachayachachic)”라는 별명에 걸맞게 세상의 각 족속들을 만들었는데 서로 다른 색으로 칠하여 구분할 수 있게 했다. 아울러 각 족속에게 각각의 성품과 의복과 언어를 주었고 그들을 땅속(또는 동굴, 호수, 높은 산, 샘)에 넣고 세상에 나올 때를 기다리게 하였다. 이후 콘티티 비라코차는 스스로 높은 지대의 길을 다니면서 인간들을 세상에 나오게 하였으나, 인간들이 언제나 그러하듯이 일부는 창조주에게 반항하였고그는 반항하는 이들을 돌로 만들어버렸다. 이후 신은 “안데스의 모든 길과 온 세상의 산 위를 돌아다는 일”을 그의 맏아들인 이메이마나-비라코찬에게 맡겼고 이메이마나는 인간들을 세상에 나오게 함과 동시에아버지 창조신의 명에 의하여 인간들에게 줄 온갖 나무와 꽃과 과실들의 이름을 지었다. 콘티티 비라코차는 둘째 아들 토카푸-비라코찬(세상 모든 것을 품은 창조주)에게 높은 땅 대신 “낮은 땅의 길”로 가게 하여 그곳의 강(江)과 나무의 이름을 짓게 하였으며 인간들에게 과실과 꽃을 주게 하였다.
와리와 티와나쿠의 영역.
많은 건국신화가 그러하듯이 잉카제국의 건국신화도 창조신에 의한 세상의 창조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어떠한 신이 세상을 만들었던 간에 후일 잉카 지역의 역사는 잉카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 잉카제국의 중심이 되는 페루 지역에서 국가단계의 사회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1세기였다. 페루 북부에 여러 개의 도시국가가 생겨났고 이 국가들은 서로 밀접한 연계를 유지하면서 문화적 특징을 공유하였는데 현재 고고학계에서 흔히 ‘모체(Moche)’ 문화로 통칭되고 있다. 이 문화는 다신교적 종교를 믿었고 다른 중미/남미 문명과 마찬가지로 피라미드형의 신전을 짓고 종교행사를 진행하였다.이와 더불어조형물을 비롯한 많은 미술품을 남겼다. 도시국가들은 도시민들을 위한 식량을 생산하는 농지(農地)에 의하여 둘러 싸여 있었고 모체인들은 이 농지를 유지하기 위하여 관개수로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는 엄청난 규모로 늘어났다.
모체문화는 서기(西紀)로 약 800년까지 번성하다가 서서히 퇴장하고 대신 약 6세기경부터 페루 중부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와리(Wari) 제국, 그리고 페루 남부와 칠레 북부를 차지한 티와나쿠(Tihuanaku) 왕국이 모체 문화의 쇠퇴를 틈타 안데스 지역을 남북으로 양분하였다. 한때 와리문화권이 진정한 ‘제국’의 단계까지 진입하였는지에 대하여 논란이 있었지만, 서로 떨어져 있던 와리의 도시들이 사실은 석축(石築) 도로에 의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었음이 밝혀졌고 가장 큰 도시인 와리(후아리, 현재 페루 서북부 앙카시 지역)의 정치종교 유적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하며, 와리를 지배하였던 왕족의 묘역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유적 역시 발견되었다. 와리 왕국은 페루 북부와 중심으로 정복활동을 펼쳐 주변세력을 모두 복속시키고 멀리 떨어진 변경지역에 군사들을 주둔시키고 이를 공물과 세금 등의 공적 재원으로 유지하는 등 중앙집권적 세력의 면모를 보인다. 티티카카호를 기점으로 와리 제국의 남부에 있던 티와나쿠 왕국도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이 두 세력은 서로를 두려워하며 일종의 냉전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대립하면서도 상당한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져 와리와 티와나쿠는 문화와 예술, 건축에서 많은 특징을 서로 공유하게 되었다. 와리와 티와나쿠 역시 서기로 12세기경에 이르러 쇠퇴하고 이후 약 200년 간 범 안데스 지역에는 강력한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공백기가 도래한다.
잉카의 창건주인 망코카팍 묘사도
잉카 제국이란 이름은 잉카인들이 스스로 붙인 것이 아니다. 실제로 잉카인들은 그들의 땅을 ‘타완틴수유’라고 불렀다. 잉카 제국의 공용어인 케추아(Quechua)어로 ‘네 개의 땅이 합쳐진 땅’이라는 뜻이다. 자신들이 살던 나라가 친차이-수유(북쪽 땅), 안티-수유(동쪽 땅), 쿠야-수유(남쪽 땅), 쿤티-수유(서쪽 땅)가 모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일반적인 명칭인 잉카 제국과 고유명칭인 타완틴수유를 같이 사용할 것이다). 지금의 우리에게 보다 잘 알려진 잉카제국이란 이름은 타완틴수유를 다스리는 최고군주를 뜻하는 명칭인 ‘사파-잉카(Sapa Inca)’에서 비롯된다. 일반적으로 사파는 ‘크다, 위대하다’라는 뜻이고 잉카는 ‘군주’라는 뜻이니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대왕(大王)’정도 된다. 잉카제국은 약 1300년경에 초대 잉카인 망코-카팍에 의하여 건국이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잉카의 사관들이 늘 암송해야 했던 건국신화에서 망코-잉카는 잉카 신화에 나오는 태양신인 ‘인티’의 아들이 지상에 내려온 것으로 묘사된다. 즉 태양자(太陽子)인 것이다. 이 때문에 망코-잉카 이후의 잉카들도 모두 태양의 아들로서 자임(自任)하였다. 스스로를 하늘의 아들(天子)라고 하며 하늘 아래(天下)모든 것을 다스린다고 생각했던 중국의 황제들과 인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 타완틴수유의 첫 잉카인 망코-잉카는 대략 1200년경의 인물로 추정된다. 비록 스스로를 태양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망코-잉카를 비롯하여 초기 잉카들은 완성된 ‘타완틴수유’가 아니라 쿠스코 지역을 중심으로 한 조그마한 왕국의 군주였다. 이 당시의 잉카제국은 소규모 왕국과 도시국가들이 난립한 안데스 지역의 고만고만한 왕국에 지나지 않았다.
쿠스코 왕국의 본격적인 팽창은 제8대 잉카인 ‘비라코차-잉카’의 치세 때 시작되었다. 서기로는 1400년대 초중반에 해당된다. 이때 쿠스코 왕국은 주변의 여러 도시국가들과 전쟁 중이었으며 그중 가장 강력한 세력은 쿠스코 동남쪽 현재 아푸리막 지역의 ‘창카’족이었다. 비라코차-잉카와 그의 장자(長子)인 잉쿠르콘이 쿠스코 주변의 세력들을 정리하고 영역을 넓히면서 쿠스코 왕국은 작은 왕국을 탈피하여 대국(大國)이 되는 첫 발걸음을 뗐다. 그러나 창카족은 녹녹치 않은 상대여서 비라코차-잉카는 창카족과 싸우다가 도리어 그들의 반격에 밀려 쿠스코를 버리고 달아나려 하였다. 그러자 비라코차의 둘째 아들인 잉카-유판키가 쿠스코의 병사들과 백성들을 모아 창카족을 훌륭하게 격퇴하였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왕위를 차지하고 9대 잉카인 ‘파차쿠티’가 되었다. 파차쿠티의 치세에 쿠스코의 군대는 현재의 페루 남부 고원지대와 함께 티티카카호 지역까지 모두 점령하였고 고원지대를 나와 현재 페루의 중부해안지대까지 진출하였다. 1438년에 왕위에 오른 파차쿠티는 1463년에 군령권(軍令權)을 아들 투팍-잉카 유판키에게 넘기고 왕국의 수도인 쿠스코를 장엄하게 만드는 데 힘을 기울였다. 쿠스코는 잉카의 신화체계에서 이미 ‘세상의 중심’이었지만, 파차쿠티는 쿠스코에 세상의 중심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실제 규모를 부여하려 했던 것이다. 파차쿠티가 쿠스코에 거대한 건축물을 만드는 동안 군대를 맡은 투팍-잉카 유판키는 적극적인 영역확장에 나섰다. 투팍-잉카 유판키의 지휘하에 쿠스코의 군대는 안데스 산맥을 타고 올라가 북쪽으로 현재의 에콰도르 중부까지 쿠스코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아울러 페루의 해안지역 전체를 점령하고 안데스의 고산을 넘어 동쪽 기슭 정글과 맞닿은 지역까지 이르렀다. 파차쿠티 사후 10대 잉카가 된 투팍-앙카 유판키의 장군들은 볼리비아 고원지역, 현재 아르헨티나 서북부, 칠레 북부까지 왕국의 영토로 만들었고 정복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모두 효과적으로 진압하였다. 이제 쿠스코 왕국은 더 이상 왕국이 아니었다. 사방의 땅을 망라한 ‘타완틴수유’, 즉 현재의 우리가 알고 있는 ‘잉카 제국’이 되었다.
‘타완틴수유’를 구성하는 각 지역.
역사상 모든 ‘제국’의 건설자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목표가 단순히 땅을 뺏고 보물과 황금을 차지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그들이 제국을 세우는 이유는 부강(富强)함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가 무너져 혼란스러운 세계를 다시 안정시켜 사람들이 편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쿠스코 왕국’을 크게 키워 거대한 잉카 제국(타완틴수유)을 만든 사파 잉카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잉카제국이 멸망한 후 에스파냐의 사가(史家)들을 만난 구 잉카 왕족들은 그들이 안데스 지역을 점령하여 타완틴수유로 편입시킨 이유를 설명했는데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면 그 이유가 상당히 익숙하게 들릴 것이다. 즉 선대 잉카들이 타완틴수유를 건설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혼란이 난무하는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고 태양을 중심으로 한 ‘진정한 신앙’을 퍼뜨리기 위해서 였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들은 자신들만이 최고의 문명인이고 주변의 무지한 족속들에게 문명의 혜택을 가져다 주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타완틴수유를 건설한 잉카인들도 로마인들이나 페르시아, 또는 한인(漢人)들과 다르지 않은 제국의 건설자였으며 ‘제국’의 논리는 지역과 문화를 막론하고 동일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비라코차-파차쿠이-유판키 3대에 걸쳐 급격한 팽창을 한 타완틴수유(잉카제국)는 1527년에 그 영토가 2백만 평방 km에 달하였고 그 수도인 쿠스코에는 거대한 석축(石築) 건물만도 4000개에 달하였다. 아울러 당시 대다수의 유럽도시들은 하수설비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전염병이 쉽게 퍼졌지만 쿠스코의 도시설계자들은 돌을 깎아 상수도를 만들고 폐수와 오물을 흘려보낼 복개(覆蓋) 하수도까지 만들어 유럽의 도시에서 흔히 맡을 수 있던 오물냄새는 어디에도 없었다. 제국의 수도인 쿠스코는 1대 망코 카팍이 왕국을 세울 당시 인구가 500명 밖에 되지 않았지만 1500년대에 이르러 쿠스코와 그 주변지역의 인구는 25만으로 늘어났다. 아울러 건국 초기에 1만을 넘지 않았던 잉카 제국은 전성기에 이르러 그 인구가 크게 늘어난다. 물론 연구자마다 수치가 다른데 다소 적은 6백만으로 보는 학자도 있지만 많게는 3750만까지로 보는 사람도 있어 큰 편차가 존재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1400만으로 보고 있다. 참고로 후일 대영제국을 세우게 되는 잉글랜드의 이 당시 인구는 260만에 지나지 않았으며 유럽의 인구대국이라는 프랑스도 1500만 정도였다.
현재 페루의 쿠스코 시 전경. <출처: (CC)Martin St-Amant at wikipedia.org>
각각 중미와 남미를 대표하는 문명인 아즈텍과 잉카는 에스파냐인들에게 멸망 당했다는 점 외에도 비슷한 점이 많다. 우선 나라 자체가 외부의 적이 치기 어려운 지형에 위치하여 있으면서도 뛰어난 인프라와 행정으로 인구와 생산력 측면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두 나라 모두 에스파냐인들의 도래 당시 세워진 지는 약 200년 가까이 되었지만 팽창하여 큰 나라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즈텍의 경우 아직도 팽창과정 중에 있었으며 모크테주마 2세가 귀족연정에 가까운 권력구조를 뜯어고쳐 절대왕정으로 나아가고 있던 중이었다. 국력에 있어서도 전성기에 있었고 쇠퇴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에스파냐의 콘키스타도르인 프란체스코 피자로 원정단의 도착 무렵 잉카제국도 마찬가지였다. 타완틴수유의 영토를 크게 넓힌 위대한 정복군주인 투팍-잉카 유판키가 죽은 지 불과 30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어서 잉카제국은 여전히 전성기의 영토와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투팍-잉카 유판키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와이나-카팍이 즉위하였고 와이나-카팍은 잉카 역사상 최대의 정복사업을 벌여 아버지가 넓힌 제국의 영역을 보다 크게 만들어놓았다. 그의 지휘 하에 타완틴수유의 제국군은 현재의 에콰도르를 완전히 복속시키고 콜롬비아의 일부까지 차지하였다. 아울러 남쪽 아르헨티나와 칠레 방향으로 보다 깊숙이 들어갔다.
1533년의 아타우알파 초상화
그러나 에스파냐인들이 현재 페루의 해안에 도착하였을 당시 타완틴수유(잉카제국)는 갑작스러운 혼란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북방 콜롬비아 방면에서 작전 중이었던 와이나-카팍 황제가 멕시코를 통하여 남미로 퍼지기 시작한 천연두에 감염된 것이다. 잉카인들을 비롯한 신대륙의 주민들은 구대륙의 질병에 대한 면역이 없었고 1527년에 와이나-카팍과 그의 장자(長子)인 니난-쿠요치까지 목숨을 잃는다. 와이나-카팍은 죽기 전에 제국을 둘로 나누라는 유언을 남겼고 새로이 정복한 북방영토는 삼남인 아타우알파에게, 쿠스코를 중심으로 한 남부영토와 황위 자체는 차남인 와스카르에게 주도록 하였다. 이로써 와스카르가 와이나-카팍의 뒤를 이어 사파-잉카가 되었고 황위계승문제가 해결이 된 듯이 보였다. 그러나 한 사람에 모든 권력이 집중된 왕권체제에서 나라를 나누어주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유언을 과연 두 아들은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아니나 다를까, 와스카르와 아타우알파 둘 다 제국의 반쪽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고 타완틴수유는 곧 치열한 내전에 휘말리게 된다.
사실 와스카르와 아타우알파는 배가 다른 이복형제였다. 와스카르의 어머니는 쿠스코에 있던 정통 왕족 출신이었고 무엇보다 와이나-카팍의 정후(正后)였기 때문에 적통왕자라고 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하여 아타우알파의 어머니는 와이나-카팍이 멸망시킨 키토(Quito)왕국 마지막 왕의 공주였으며 새로 정복된 지역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와이나-카팍의 후궁이 된 여인이었다.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타우알파는 장성한 후 와이나-카팍을 따라다니면서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황제는 정작 적통 왕자들인 두 형보다 아타우알파를 더 아꼈다. 와이나-카팍이 콜롬비아 지역에 간 이유는 앞서 말한 데로 그 지역을 정복하고 위무하고자 하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정복민들로부터 이상한 족속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이방인’들을 찾으러 간 것이다. 와이나-카팍은 이 이방인들을 끝내 만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이 퍼뜨린 병에 걸려 죽었고 이방인들에게 제국이 멸망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비록 와스카르가 적통 왕자였는지는 몰라도 군사적인 재능은 아타우알파가 월등하였으며 아울러 그는 아버지를 따라 북방의 정복전쟁에 종군하여 전쟁으로 잔뼈가 굵었고 언제나 부황의 곁에 있었다. 와이나-카팍이 키토에서 죽는 순간 임종을 지킨 것도 아타우알파였다. 이 때문에 황제를 섬겼던 제국군의 장군들의 신임을 얻고 있었으며 와스카르와의 전쟁이 벌어지자 전임 사파-잉카인 와이나-카팍을 따라 북방정벌에 나선 정예 병력은 모두 아타우알파의 휘하에 모여들었다. 이에 와스카르는 쿠스코 전통 귀족들의 병력을 모아 아타우알파와 싸웠다. 아타우알파는 성급하게 선봉군을 이끌고 싸우러 나섰는데 중간에 투메밤바 지역에서 벌어지는 축제에서 마음을 놓고 놀 정도로 와스카르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첫 전투인 칠로팜파에서는 와스카르 곁에 남아있던 유능한 장군이자 왕자인 아토크의 활약으로 축제에 참여하고 있던 아타우알파군이 불시에 기습을 당하여 패하고 아타우알파는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와스카르군이 승리를 자축하며 술에 취하는 바람에 아타우알파는 한 여인의 도움을 받아 탈출할 수 있었고 키토근처에 모인 정예병력을 모두 거느리고 반격에 나섰다. 평화로운 쿠스코 인근에서 모은 병력이 치열한 정복전으로 단련된 북방의 정예군을 이길 리가 없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아타우알파의 북방군은 장군인 차쿨치막과 키즈키즈 등의 지휘하에 쿠스코군을 연파하고 1532년에는 쿠스코를 점령하고 와스카르를 포로로 잡는다. 아타우알파는 전쟁에서 승리하자마자 와스카르의 일족을 멸살(滅殺)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와스카르를 제외한 가족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키토에 머물고 있던 아타우알파는 전쟁이 승리로 끝나자 즉위를 하기 위하여 쿠스코로 향하였다. 그러나 쿠스코로 가는 도중 아타우알파는 카하마르카 근처의 온천에 들러 휴식을 취하면서 전쟁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이 와중에 근처에 수염난 이상한 족속들이 와있다는 말, 그리고 이들이 몇몇 사나운 부족들과 싸워 이겼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만나게 된다.
카하마르카 근처에 와있던 이방인들은 다름이 아니라 콘키스타도르인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거느린 168명의 에스파냐 병사들이었다. 에스파냐 엑스트라마두라의 트루히요(Trujillo)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난 피사로는 또 다른 콘키스타도르이며 멕시코의 정복자가 된 에르난 코르테스의 6촌형 뻘이었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줄인 이름이며 원래 이름은 Hernan Cortes de Monroy y Pizarro). 두 사람 다 콘키스타도르이고 가까운 친척이며 아울러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지만 피사로와 코르테스는 같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많다. 일단 출신부터 따지자면 코르테스는 중급 정도이기는 하지만 귀족 출신이고 어린 나이에 타 지역의 대학까지 다닌 엘리트였다. 코르테스의 부모는 그가 중급귀족의 신분을 넘어 출세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피사로는 가난한 군인의 아들, 그것도 적자가 아닌 서자였고 그나마 부모가 교육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 청소년기까지 글을 알지 못하였다. 출신도 좋지 않고 교육도 받지 못한 청년 피사로가 에스파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에스파냐를 뒤로 하고 1509년에 신대륙으로 향하는 배를 타게 된다. 아메리카로 간 그는 1513년에 다른 콘키스타도르인 바스코 드-발보아의 원정대에 지원하여 파나마를 가로질러 ‘남쪽바다’, 즉 태평양을 발견하는 여정을 같이 했다. 발보아는 지금의 콜롬비아 북부 지역의 총독이 되었고 이후 다빌라란 인물이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세상일이 그렇듯이 발보아 같이 획기적인 공을 세우면 시기하는 자가 있게 마련이었고 발보아는 그의 공을 시기한 다빌라의 모함을 받아 새로이 발견한 태평양 지역을 에스파냐의 왕실에게 바치지 않고 자신의 개인 왕국으로 만들려 했다는 누명을 쓴다. 이에 발보아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피사로는 다빌라의 편에 서서 발보아를 체포하여 법정에 세운다. 발보아는 결국 왕실에 대한 불충을 했다는 죄로 사형을 당하게 되고 피사로는 다빌라를 도운 대가로 시우다드 파나마(파나마 시티)의 시장이 된다. 에스파냐의 식민지들은 배신과 모략의 땅이었고 피사로가 이에 편승하면서 그의 인생 역시 배신과 모략으로 얼룩지게 된다.
프란치스코 피사로. 피사로가 카하마르카에서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으면서 잉카제국 멸망의 도화선이 되었다
1522년에 안다고야라는 인물이 처음으로 남미대륙의 원주민들과 접촉하고 파나마에 돌아오면서 남미대륙은 ‘황금의 땅’이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이에 피사로는 가톨릭 신부인 에르난도 데-루케와 군인인 디에고 알마그로와 손을 잡고 1524년에 남미대륙을 향하여 떠난다. 80명의 병사를 이끌고 떠난 피사로의 첫 번째 원정은 완벽한 실패였다. 그의 병사들은 파나마를 떠나 현재 콜롬비아 북서부 해안지역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날씨도 좋지 않았고 식량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으며 무엇보다도 내리는 곳마다 원주민들이 공격하는 통에 황금을 찾기는 커녕 싸우기만 하다가 지쳐버렸다. 결국 피사로는 포기하고 파나마로 돌아왔다. 2년 후에 다시 남미대륙으로의 원정을 계획하면서 총독인 다빌라에게 허락을 받으려 하였지만 다빌라는 북쪽으로의 원정을 원하고 있었고 피사로가 1차 원정에서 실패한 일도 있었기에 2차 원정계획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때 마침 페드로 델-리오스란 인물이 파나마의 새 총독으로 부임해왔고 델-리오스는 피사로의 원정을 흔쾌히 허락하였다. 2차원정은 훨씬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피사로의 원정대는 적도를 넘어 남쪽으로 항해하였고 툼베스(Tumbes) 지역에서 온순하고 우호적인 부족을 만나 옷감과 음식을 대접받으면서 쉴 수 있었다. 그는 이 부족민들 일부를 데려와 통역을 만들었고 이들로부터 내륙의 ‘황금이 넘치는 땅’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땅의 탐험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두 번째 시도 역시 만족할만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였다. 피사로의 동업자인 알마그로가 파나마에서 다시 80명의 병사를 증원군으로 데려와서 에콰도르 방면으로 가 보았지만 그 곳은 최근에 잉카 제국에 편입된 지역이었고 그 주민들은 에스파냐인들과의 협력을 거부하고 싸우려고 들었다. 이 과정에서 원정대원들의 피로는 쌓여가고 있었다. 결국 피사로는 페루 해안의 갈로섬(Isla de Gallo)에 머무르게 되었고 알마그로는 이번에는 툼베스에서 얻은 황금을 가지고 파나마로 가서 보다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 하였다. 그러나 신임 총독인 델 리오스는 피사로의 탐험이 지지부진하고 원정대를 따라나선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는 것을 이유로 알마그로의 탐험신청을 거부하였다. 오히려 델 리오스는 두 개의 선박을 보내어 피사로를 포함한 원정대 전원을 송환하고 피사로의 원정을 중단시키려 하였다. 이 배들이 갈로섬에 도착하였을 때 원정을 중단할 의사가 전혀 없었던 피사로는 모래 위에 줄을 긋고 원정단원들에게 선택을 강요했다고 한다.
“저쪽에는 페루와 그 보물들이 있고 이쪽에는 파나마와 빈곤이 있다. 자, 한 사람 한 사람 용감한 카스틸랴인으로서 선택할 때이다.”
이때 열 세 사람만 선을 넘어 피사로와 함께 할 뜻을 밝혔고 나머지는 배를 타고 파나마로 돌아갔다. 이후 역사에 “이름난 13인”이라고 알려진 이 사람들은 배가 떠난 뒤 땟목을 만들어 약 15km 북쪽에 있는 무인도로 가서 새로운 지원대가 오기까지 일곱달을 머무르게 된다. 이때 도착한 알마그로와 루케는피사로를데려오는 동시에 원정을 완전히 중단시킨다는 조건으로 델 리오스에게 겨우 허락을 얻어내어 피사로에게 온 것이었다. 그들은 남은 인원으로 탐험을 계속하여 툼베스를 에스파냐의 교두보로 완전히 확보하고 1528년에 다시 파나마로 돌아가 델 리오스를 설득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델 리오스가 계속하여 탐험승인을 거부하자 피사로의 측근들은 파자로가 에스파냐로 돌아가 왕실을 직접 설득하여 승인을 얻을 것을 종용하였다. 피사로는 에스파냐로 가서 국왕인 카를로스 1세를 알현할 기회를 잡았고 자신들은 황금이 넘치는 땅을 에스파냐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탐험하였음을 역설하였다. 카를로스 1세는 흡족해하였지만 곧 이탈리아로 가야 했기에 대신 그의 왕비 이사벨(에스파냐를 통일한 이사벨 여왕의 외손녀)이 피사로의 원정을 최종 승인해주었다. 이로써 왕실의 직접적인 허락을 얻은 피사로는 이제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카나리아 제도로 가서 그의 동생인 에르난도를 데리고 파나마에 도착한 후 1530년 12월에 본격적인 남미원정을 떠나게 된다.
1998년에 비소설 분야에서 퓰리처상을 수상한 제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의 저서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에서는 1532년의 카하마르카 전투가 인류역사 상 매우 중요한 분수령으로 묘사되고 있다. 구대륙(유라시아)와 신대륙(아메리카)의 사회들은 환경적-지리적 요인들 때문에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고 카하마르카 전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 두 사회가 직접적으로 충돌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유라시아의 환경적-지리적 조건은 유라시아, 특히 유럽인들에게 아메리카에는 없는 것들(총, 균, 쇠)를 가져다 주었고 구대륙 사회(에스파냐)가 신대륙 사회(잉카)를 이기고 그 땅을 강탈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521년에 멕시코의아즈텍 제국이 에스파냐에게 멸망 당한 후 잉카제국마저 에스파냐에 무릎을 꿇음으로써, 신대륙에서 원주민이 이룩한 문명은 종적을 감추게 된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저서 [총, 균, 쇠]에서는 1532년의 카하마르카 전투가 인류역사 상 매우 중요한 분수령으로 묘사되고 있다.
피사로의 잉카 정복은 많은 부분에서 코르테스의 아즈텍 정복과 비교가 된다. 코르테스가 테노치팃란을 점령하기 위한 최후의 진격을 시작할 때 그는 에스파냐 병력 1100명에다 그가 우군으로 확보한 틀락스칼라의 5만 전사를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멀지 않은 베라크루즈에 기지를 확보하였으며 유사시에는 에스파냐의 카리브해 식민지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에 비하여 피사로가 파나마에 도착하였을 때 그의 휘하에는 병사 180명과 말 30필 밖에 없었다. 에스파냐 본국의 승인을 받았기 때문에 파나마 총독부의 방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이는 동시에 파나마 총독부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을 수 없으며 병력을 모으고 자금을 확보하는 등의 모든 일을 피사로가 스스로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자신의 휘하에 있던 병력만을 거느리고 남미로 떠났다.
피사로의 탐험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고행길이 되었다. 항해 내내 위궤양으로 고생한 끝에 1532년 4월 겨우 툼베스에 도착했으나 상황은 한심했다. 그나마 에스파냐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툼베스의 주민들은 주변의 사나운 족속인 푸니족에게 공격 당하여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결국 툼베스에 머물 수가 없게 된 피사로는 근처의 큰 섬인 푸냐섬에 가서 원정대를 재정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푸냐섬은 사실 푸니족의 본거지나 다름 없는 곳이었다. 피사로가 도착했을 때 푸니족과 에스파냐군 사이에 긴장감이 돌기는 하였지만 큰 충돌은 없었다. 그러나 에스파냐군에 종군하고 있던 원주민 출신 통역들이 푸니족이 에스파냐군을 습격하려 한다고 하자 에스파냐군은 즉시 푸니족의 추장 몇 명을 사로잡아 고문한 뒤에 툼베스로 보냈다. 결국 이 추장들은 툼베스의 잉카인들에게 학살당하게 된다.
푸니족 전사들은 당연히 격분하였고 그들은 즉시 에스파냐군을 공격했다. 푸니족 전사들은 그 수가 수천 명에 달하였고 100명이 겨우 넘는 에스파냐군을 깔아뭉개버릴 기세로 미친 듯이 달려왔다. 그러나 유럽에서 에스파냐군에 수없는 승리를 안겨주었던 장창병(pikemen)들이 단단한 대형을 형성하여 푸니족의 돌격을 막았고 창병 옆에 서있는 화승총병들이 푸니족에게 사격을 가하면서 무수한 푸니족 전사들이 쓰러졌다. 유럽에서 그 진가가 발휘되었던 테르치오 전술의 재현이었다. 푸니족의 기세가 꺾인 것으로 판단한 프란시스코의 동생 에르난 피사로가 중기병대를 지휘하여 돌격하였고 푸니족 전사들은 에스파냐군이 휘두르는 강철검과 기병창(lance)을 막지 못하고 떼죽음을 당했다. 이후 푸니족은 에스파냐군에 이따금씩 소규모의 습격을 하는 것 외에는 싸우려 하지 않았다. 얼마 후 에르난도 데 소토(Hernando de Soto)가 병력 100명, 마필 50마리와 함께 도착하였고, 피사로의 원정대는 데 소토의 지원병력과 함께 푸냐섬을 떠나 1532년 5월에 페루의 툼베스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미 파괴된 툼베스에 머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에 피사로는 결국 안데스를 넘어 내륙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피사로는 페루 북부에 산 미구엘 피우라라는 마을을 세우고 이를 전진기지로 삼았다.
이때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잉카인들은 피사로의 움직임을 카하마르카에 있던 아타우알파에게 낱낱이 보고했다. 일부 잉카 백성들은 에스파냐인들의 하얀 얼굴과 빛나는 갑옷을 보고 태양이 보낸 사람들이라고 하는 반면 일부는 에스파냐인들을 신이 보낸 악마라며 매우 두려워하였다. 이윽고 아타우알파와 피사로 간에 서로 탐색을 위한 몇 번의 사절이 오간 후 아타우알파는 그가 아끼던 전사인 신쿠인차라(Cinquinchara)라는 인물을 보내어 에스파냐군과 같이 움직이게 하면서 그들이 정확히 어떤 존재들인지 알아오게 하였다. 에스파냐군과 여러 날 같이 지낸 신쿠인차라는 아타우알파에게 돌아가 에스파냐인들이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고 여자들과 방사(房事)를 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은 인간임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동시에 그들이 인디오들을 쇠사슬로 묶어서 마구 부리는 탐욕스러운 인간들이며 이 때문에 그들이 밤에 자고 있을 때 불을 질러 태워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타우알파는 신쿠인차라의 공격제언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 때문에 에스파냐인들도 인간들이라면 인신(人神)인 자기를 어쩌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깔보기 시작하였다.
피사로는 데 소토를 11월 14일에 아타우알파에게 보내 자신들은 신(기독교의 하나님)의 사자로서 그 땅에 왔으며 그 진리를 전해주려 한다고 했다. 아타우알파는 데 소토를 무시하고 그의 정찰전사들이 전해준 소식을 토대로 에스파냐인들이 잉카인들을 마구 사로잡아 노예로 부리고 있다며 마구 따졌다. 그러나 에르난도 피사로는 헛소문이라며 극력 부인하였고 어쩐 이유에선지 아타우알파는 더 이상 따지지 않고 에스파냐인들과 다음 날 만나자고 한 후 헤어졌다.
스페인 트루히요에 세워진의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동상. <출처: (CC)David Jones at Wikipedia.org>
그 다음 날인 11월 15일에 카하마르카에 나타난 에스파냐 병력은 겨우 168명(보병 106명, 기병 62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뒤에 지원군도 없었고 지원을 해줄 수 있는 에스파냐의 식민지(파나마)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만약 잉카군의 장군이 있어 카하마르카에 모인 에스파냐의 병력을 보자면 참으로 가관이었을 것이다.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때 아타우알파는 유사시에 쿠스코에서의 싸움이 잘 되지 않을 경우 투입할 계획이었던 예비병력을 모두 거느리고 있었고 그 수가 8만에 달했다고 한다.
사실 피사로와 에스파냐 병력은 이미 하루 전에 카하마르카에 도착하여 그 요새를 먼저 차지했다. 카하마르카 요새는 한쪽에 거대한 신전이 있고 마찬가지로 거대한 건물들이 삼각형의 넓은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다. 피사로는 자신의 원정대가 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전날 들어오면서 카하마르카의 성벽 밖에 끝없이 펼쳐진 잉카군의 천막을 보면서 아타우알파가 엄청난 병력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나마의 식민지는 말할 것도 없고 내륙 깊숙이 들어온 탓에 전진기지로부터도 멀리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어떤 형태의 지원도 바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피사로는 아타우알파를 요새 안의 광장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우선 요새 안의 광장으로 수만의 병력이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에 잉카군의 병력을 수천 정도로 제한할 수 있었다. 물론 광장 안으로 끌어들이더라도 잉카군은 여전히 수적우위를 지니게 되겠지만 2백이 채 안 되는 에스파냐군에 비하여 닫힌 공간 안에서 원활히 움직일 수가 없을 것이다. 아울러 아타우알파가 스스로 요새로 들어온다면 아타우알파를 습격하여 죽이거나 포로로 잡을 수 있으리라 계산한 점도 있다. 피사로는 코르테스가 테노치팃란에서 모크테주마를 인질로 잡아 상황을 주도하였음을 알고 있었고 잉카에서 같은 작전을 쓰려한 것이다. 만약 일이 틀어져 잉카군과 정면으로 싸우게 된다면 피사로를 포함한 에스파냐인들이 살아 돌아갈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자신들의 수십배의 병력과 싸워야 하는 에스파냐 병사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에스파냐 병사들에게 11월 15일에서 16일로 넘어가던 밤은 매우 길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잠을 설쳤고 일부 병사들은 공포를 못 이겨 바지에 소변을 지리기도 했다고 전한다. 다음 날 아침, 피사로는 광장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신전에 병사들을 배치하고 아타우알파의 진영을 바라보면서 그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잉카 진영은 오전 내내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다가 이른 오후가 되어서야 아타우알파의 행렬이 시작되었다. 아타우알파는 가마에 타고 6000명의 전사들과 함께 화려한 행렬을 이루면서 카하마르카 요새로 접근해왔다. 그러나 카하마르카 요새로부터 1km 조금 못 미치는 지점에 이르자 아타우알파는 행렬을 갑자기 멈추고 피사로에게 전령을 보냈다. 이미 오후가 되었으니 늦게 만나기 보다 다음날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오전 내내 긴장을 풀지 못하고 거의 노이로제 상태에서 보낸 에스파냐 병사들은 폭발 직전이었다. 만약 아타우알파가 다음 날까지 오지 않는다면 병사들은 요새를 뛰쳐나가 공격할 수도 있었고 이는 에스파냐군의 가장 큰 전술적인 잇점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때 피사로는 전령을 보내 요새 안에 식사와 유흥거리가 마련되어 있으니 들어와서 같이 즐길 것을 청하였고 이에 아타우알파가 행진을 재개하여 요새 안으로 들어왔다고 하는데, 사실 에스파냐인들을 깔보고 있었고 누릴 만한 것을 모두 누리던 아타우알파가 단순히 ‘유흥거리’를 보기 위하여 카하마르카로 갔을 리는 만무하다. 이 전령은 보다 급박한 메세지, 또는 아타우알파에게 약간 무례한 메세지를 전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정확히 어떤 말로 아타우알파를 움직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타우알파는 행렬을 다시 움직여 요새 안으로 진입하였는데 대부분의 기록은 아타우알파의 행렬이 비무장이었다고 적고 있다. (현재인의 관점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과거의 전투에서는 지휘관들이 전투 전에 만나 어디에서 싸울 것인지, 심지어 어떻게 싸울 것인지 알려주는 일이 드물지 않았고 이를 예의로 여기는 경우도 있었다.) 아타우알파가 과연 피사로에게 예의 차원에서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분명한 것은 아타우알파는 “싸움”을 예상하고 카하마르카에 온 것은 아니다. 에스파냐인들이 정확히 어떤지 파악하고 만약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경우 에스파냐인들을 자신의 군대에 편입시킬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고 한다.
카하마르카 전투 상상도.
광장에 들어온 잉카의 전사들은 아타우알파의 가마가 지나갈 수 있도록 둘로 갈라져 도열하였다. 아타우알파가 나오자 에스파냐측에서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빈센테 데 발베르데(Vincente de Valverde) 신부가 통역을 데리고 나왔다. 발베르데 신부는 성경을 들고 아타우알파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러나 아타우알파는 무심히 듣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아타우알파는 발베르데 신부가 들고 있던 성경책을 보면서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 지를 물었다. 발베르데 신부는 이 책 안에는 ‘신의 말씀’이 담겨있다고 했는데, 아타우알파가 갑자기 책을 빼앗아 들어 펼쳐보고는 귀를 대 보더니 ‘왜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책을 던져버렸다고 한다. 사실 잉카제국에는 종이에 쓰는 서책 같은 것에 대한 개념이 없어 ‘신의 말씀’이 음성으로서 실제로 들려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발베르데가 신은 오직 하나라는 것만 강조하면서 사파-잉카의 신성성을 인정하지 않아 화가 난 아타우알파가 책을 빼앗아 내동댕이쳤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이 성경책 사건이 실제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긴장감을 견디지 못한 에스파냐군이 잉카군을 공격하는 신호가 되었기 때문이다. 발베르데 신부가 책을 들고 달아나기 시작하자 주변의 골목에 배치되어있던 에스파냐의 소형포 세 문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잉카 전사들이 이때 좁은 지역에 밀집되어있던 까닭에 3문만으로도 광장 안의 잉카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포들이 불을 뿜은 후 주변 건물에 숨어있던 68기의 기병이 세 갈래로 나누어 포격에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잉카군을 공격하였다. 사실 잉카 전사들은 창과 팔매를 들고 있어 완전히 비무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잉카의 돌창과 팔매로 갑옷 입은 에스파냐 중기병의 돌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에스파냐 기병들은 강철검과 창으로 잉카전사들을 도륙하였고 이에 신전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병들도 일제히 싸움에 뛰어들었다. 대포의 사격 역시 간간히 이어졌고 잉카 전사들은 포격과 함께 기병의 갑작스러운 돌격에 질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였다. 아타우알파는 에스파냐군에 사로잡히고 광장에서 온전히 탈출한 잉카전사는 거의 없었다. 이에 비하여 에스파냐군의 피해는 부상 5명에 불과했다. 그 중 하나가 피사로 자신이었는데, 무리하게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으려고 하다가 어느 에스파냐군 병사가 휘두른 칼에 다친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7만이 넘는 잉카 대군은 전투에 개입하지 않았다.
테노치팃란이 함락됨으로써 급속히 무너진 아즈텍 제국과는 달리 잉카제국은 바로 멸망하지 않았다. 에스파냐군은 황제를 사로잡았을 뿐 대부분의 지역은 에스파냐군이 온지도 몰랐고 168명의 병사로 어디를 점령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코르테스가 틀락스칼라를 비롯하여 아즈텍에 적대적인 세력을 규합하여 아즈텍을 무너뜨린 것에 비해 피사로에게는 변변한 동맹세력이 없었다. ‘3도시 동맹’의 연합형태로 나라를 다스린 아즈텍에 비해 잉카는 황제에 의한 중앙집권이 확실히 정립된 상태였기 때문에 지방에 대한 장악력이 아즈텍보다 높았다. 만약 아타우알파가 당장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면 제국의군사들을 동원하여 피사로군을 전멸시키는 것은 쉬웠다. 물론 피사로는 제국 전체를 놓고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당장 카하마르카 근처에 있는 수만의 병력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 때문에아타우알파를 인질로 잡아놓은 것이었다. 잉카의 군 통수권자는 사파-잉카였고 에스파냐군이 사파-잉카를 인질로 잡자 지휘체계가 일시적으로 마비되어 잉카군은 어쩔 줄 몰랐다.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려줄 최고 지휘관이 적들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에스파냐군은 카하마르카에서 7천의 잉카군을 궤멸시킨 후 근처의 잉카 본영을 습격하여 차지했는데 그곳에서 많은 양의 황금과 은과 보석을 발견하고는 이를 약탈했다.
에스파냐군에 의하여 사로잡힌 아타우알파는 카하마르카에 요새에 있는 한 건물의 큰 방에 감금되었다. 그는 에스파냐인들이 그의 본영을 약탈하는 것을 보고 황금에 대한 욕심이 하늘을 찌르고 있음을 알고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크기(길이 7미터, 넓이 5미터, 높이 2.5미터)의 방을 황금으로, 같은 크기의 다른 방 두 개를 은으로 채울 수 있다고 했다. 아타우알파는 그 대가로 자신을 풀어달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피사로는 아타우알파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아타우알파는 신하들에게 명하여 제국 전역의 신전에서 보물을 가져오게 했다. 카하마르카의 큰 방들이 금은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는 동안에도 아타우알파는 자신이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이 비밀로 유지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황위계승전쟁에서 패하고 감금되어 있던 와스카르를 따르는 자들이 아직도 남아있었고 이들에 의해 아타우알파가 포로로 되었다는 정보가 와스카르에게 들어갔다. 와스카르는 비밀리에 피사로와 접촉하여 자기 아버지인 와이나-카팍이 축적한 막대한 양의 보물이 있는 비밀창고의 위치를 알고 있다며 자신이 황위를 되찾는 데 도움을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아타우알파가 비록 패하였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최대경쟁자에 대한 경계를 늦출 리는 없었으며 와스카르의 움직임은 곧 들통이 났다. 아타우알파는 더 이상 와스카르를 그냥 놔둘 수 없었고 결국 암살자들을 보내어 와스카르를 죽여버린다.
1533년 8월 사파 잉카 아타우알파는 가톨릭 교도로 개종한 후 교형을 받아 죽는 굴욕을 당한다. 루이스 몬테로의 [아타우알파의 장례식]
그러나 아타우알파가 황금을 대가로 자유를 약속 받았다는 것은 전해지는 이야기일뿐 사가(史家)들과 현장에 직접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에는 대가로 아타우알파가 풀려나기로 약속 받았다는 말이 없다. 그는 단순히 에스파냐인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리했을 가능성이 가장 많다. 잉카제국의 막대한 부로도 아타우알파가 에스파냐인들에게 약속한 양을 채우는 데는 수개월 걸렸고 아타우알파의 충직한 장군인 루미나위가 보물을 가지고 카하마르카로 왔지만 에스파냐인들은 오히려 루미나위의 병력이 돌변하여 자신들을 공격할 가능성을 두려워하였다. 이에 피사로는 아타우알파를 약식 법정에 세워 우상숭배와 근친상간, 그리고 형 와스카르를 살해한 죄를 적용하여 화형에 처할 것을 명령했다. 잉카인들의 생사관에 따르면 불에 타 죽은 자는 무사히 저승에 가지 못하기 때문에 아타우알파는 화형만은 피할 방법을 물었고 카하마르카에서 그에게 기독교 교리를 설파했던 발베르데 신부는 만약 아타우알파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개종한다면 화형은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아타우알파는 발베르데의 제안을 받아들여 가톨릭 교도로 개종했고 후안 산토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는 1533년 8월 가톨릭 교도로서 교형(絞刑)을 받아 죽었다.
아타우알파의 충직한 장군이었던 루미나위는 아타우알파의 처형 소식을 듣고 북방의 잉카군을 모아 에스파냐군을 대적하려 한다.
일년 후 1533년, 피사로는 쿠스코로 진격해 그곳에 자리를 잡는다. 이때 에스파냐군은 식민정부를 세울만한 인원이 없어 꼭두각시 사파-잉카를 그들의 대리통치자로 내세웠다. 와이나-카팍의 아들이며 와스카르와 아타우알파의 동생인 투팍-왈파를 새로운 사파-잉카로 내세웠으나 그는 세운지 얼마 안되어 천연두에 감염되어 죽고, 뒤를 이어 와이나-카팍의 다른 아들인 망코-잉카 유판키가 사파-잉카로 즉위하게 된다.
사실 아타우알파가 죽은 후 잉카제국이 바로 망한 것은 아니었다. 제국의 영토와 군대는 그대로였다. 아타우알파의 죽음을 막기 위해 보물을 가지고 카하마르카로 오고 있던 루미나위는 에스파냐인들이 약속을 어기고 아타우알파를 죽이자 오던 길을 돌아가 도중에 있는 칼데라호(湖)에 보물을 쳐넣고는 키토에 도착하여 북방의 잉카군을 모아 에스파냐군과 싸우러 나섰다. 1534년에 페루의 에스파냐군에 대한 어느 정도의 증원이 이루어졌고 피사로는 그의 부하인 세바스티안 벨랄카자르를 보내 지금의 에콰도르에서 남하하고 있던 루미나위의 군단을 요격해 격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루미나위의 잉카군과 벨랄카자르의 에스파냐군은 몬테 침보라조(Monte Chimborazo) 화산 인근에서 만났는데 잉카군은 무기의 열세에도 수적인 우위를 내세워 한동안 대등한 싸움을 벌였다. 이때 공교롭게도 침보라조 화산이 폭발했고 신들이 자신들에게 분노하고 있다는 것으로 본 잉카군이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바람에 잉카군은 패하게 된다. 루미나위는 도망치면서 에스파냐군에게 제국의 주요도시 중 하나인 키토를 넘겨주지 않기 위해 키토를 불태워 잿더미로 만든다. 이후 에스파냐군은 루미나위를 사로잡았고, 버린 보물의 위치를 알기 위해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지만 그는 끝까지 그 위치를 말하지 않고 죽었다.
한편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칠레 방면으로 원정을 떠나면서, 쿠스코를 그의 동생들인 곤잘로, 후안, 그리고 에르난도에게 맡겼다. 꼭두각시인 망코-잉카 유판키는 처음에는 에스파냐인들을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환심을 사려고 보물을 모아 에스파냐인들에게 갖다 바쳤다. 그러나 곤잘로, 후안, 에르난도 피사로 삼형제의 횡포가 심해지자 그들에게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1535년 말 쿠스코를 탈출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고 그에 대한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이 와중에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이후 페루의 수도가 되는 리마를 세우고 있었다. 재탈출의 기회는 없는 듯 했으나 그는 이듬 해 4월에 인근지역에서 벌어지는 축제를 주관해야 한다는 것을 핑계 삼아 쿠스코 밖으로 나갈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고 쿠스코를 나오자마자 탈출해 20만의 대군을 모아 쿠스코에 있는 에스파냐인들을 공격했다. 1536년 5월에 시작된 쿠스코 공방전은 약 10개월간 계속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망코-잉카의 군대는 천연두로 인한 사망자가 급증했다. 결국 이 공방전은 약 3만의 원주민 동맹군을 대동한 에스파냐군의 승리로 끝났고 에스파냐는 망코-잉카 유판키를 올란테이탐보 요새까지 추격했다. 여기에서 망코-잉카는 에스파냐의 추격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으나 올란테이탐보는 사실 군사요새에 가까워오래 머물만한 곳이 아니었다. 망코-잉카는 올란테이탐보를 떠나 안데스 고원지대의 빌카밤바로 수도를 옮겼다. 한편 쿠스코에서는 부황(父皇)을 돕지 않고 오히려 에스파냐군을 도와주었던 망코-잉카의 아들 파울루-잉카가 새로운 꼭두각시가 되었다. 이로써 제국은 공식적으로 쿠스코에 있는 에스파냐의 꼭두각시 정권과 빌카밤바에 있는 사파-잉카의 정권으로 사실상 양분되었다. 파울루는 1549년까지 쿠스코에서 에스파냐인들의 대리인 역할을 하다가 죽었고 쿠스코에 있던 잉카제국의 잔존세력들은 원래의 사파-잉카가 있는 빌카밤바로 옮겨 갔다. 빌카밤바의 잉카들은 계속하여 백성들과 군사들을 모아 싸우고자 했지만 이미 제국의 과거 영광을 되찾는 것은 불가능했고 날로 늘어가는 에스파냐인들에 비해 원주민 인구는 천연두가 번지며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빌카밤바의 잉카 잔존정권이 심각한 위협이 되지 않자 후에는 오히려 에스파냐인들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피사로 형제들과 과거의 동업자인 알마그로 사이에 벌어진 싸움은 처음에는 알마그로에게 유리하게 돌아갔으나 1542년의 추파스 전투를 전후해 피사로 형제들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후 알마그로는 피사로 형제들에게 죽고 앙심을 품은 알마그로의 아들은프란시스코 피사로를 암살하면서 내부갈등은 극에 달한다. 1546년에는 새로 신설된 페루 총독부의 총독으로 임명된 누네스 벨라가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동생인 곤잘로 피사로가 세운 식민지인 누에바 카스틸랴를 굴복시키려 했으나, 아냐키토의 전투에서 패하고 누네스 벨라가 죽는다. 에스파냐 왕실은 결국 잉카지역 전역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를 결정하고 페드로 델라 가스카를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하여 반독립적인 식민지들 위에 왕실의 권위를 확립할 것을 명한다. 1548년에 가스카가 새로이 총독부의 수도가 된 리마에서 이끌고 간 총독부 병력은 쿠스코 인근의 야키하와나에서 곤잘로 피사로의 누에바 카스틸랴군을 대파하고 누에바 카스틸랴를 페루 총독부에 편입시킨다.
잉카제국의 마지막 사파 잉카, 투팍-아마루.
한편 빌카밤바에서는 망코-잉카 유판키가 1544년에 사망하고 그 자리를 사이리-투팍이 이어받는다. 이때에 이르러 빌카밤바 정권은 잉카 제국의 후계세력이라기 보다는 단순히 독립왕국 정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에스파냐 세력이 계속 팽창하자 사이리-투팍은 1556년에 당시 총독인 멘도자와의 협상 끝에 빌카밤바에서 내려와 세례를 받고 에스파냐 왕실로부터 ‘사면’을 받음은 물론 에스파냐 왕의 후신(候臣)인 유카이후(候)로 자처하였다. 1561년에 사이라-투팍이 죽은 후 그의 동생인 티투-쿠시가 빌카밤바 정권을 인수하고 다시 에스파냐군에 강경노선을 펼쳤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국세를 되세우기는 어려웠으며, 티투-쿠시는 1571년에 사망하고 그의 자리를 마지막 사파-잉카인 투팍-아마루가 이어받는다. 한편 티투-쿠시가 죽은 것을 모르고 있던 에스파냐 총독부는 티투-쿠시와 연례협상을 하던 사절 두 명을 빌카밤바로 보냈는데 이들이 투팍-아마루의 전사들에게 살해되고 에스파냐인들은 이를 빌미로 원주민 동맹세력과 함께 빌카밤바 정권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했다. 빌카밤바는 함락되고 투팍-아마루는 산달에 이른 아내를 데리고 탈출을 감행하였다가 다른 원주부족들의 배신으로 에스파냐인들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사실 이때 에스파냐 총독은 에스파냐의 법대로라면 마음대로 투팍-아마루를 처형할 권리가 없었다. 그는 에스파냐왕의 대리인인데 비해 투팍-아마루는 국가의 수장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에스파냐의 왕인 펠리페 2세조차 처형을 반대할 정도였다. 그러나 총독인 프란시스코 톨레도는 선대 잉카인 사이리-투팍이 이미 에스파냐의 신하로서 자처하였으며 이 때문에 투팍-아마루의 항전은 ‘반란’에 해당된다는 유권 해석을 내려 본국을 설득하고 투팍-아마루의 처형을 강행했다. 혹시라도 후대에 있을 수 있는 반란의 구심점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1572년 9월, 투팍-아마루는 에스파냐 집행인의 칼 아래 놓였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어머니이신 대지(大地)여! 나의 적들이 나의 피를 어찌 뿌리는지 보게 하소서!”
집행인은 칼을 내리쳤고 마지막 태양자(太陽子)이자 사파-잉카는 이렇게 죽었다. 그리고 안데스 전역을 지배하며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타완틴수유(잉카 제국)의 역사는 종언을 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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