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호 : 16932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3-04 02:27
제 목 : [F/W] 시간의 장인.....1
Future Walker
8. 시간의 장인…………1.
석양의 하늘은 어두웠지만 평야는 오히려 밝게 빛나고 있었다. 검붉
은 색으로 물든 켄턴 성벽 위에는 검은 그림자가 된 사나이들이 평야
를 바라보고 있었다.
쥬리오 시장은 딤라이트를 바라보았다.
딤라이트는 흉벽을 짚고는 어깨로 숨을 쉬고 있었다. 차마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딤라이트는 땅을 바라보
고 있었다.
무스타파가 말했다.
"딤라이트. 그레이 휠드런의 지휘권을 박탈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하지 않겠나."
"무스타파!"
검을 뽑아들 필요도 없었다. 딤라이트의 눈 자체가 예리한 나이프처
럼 무스타파를 향해 쏘아졌다. 하지만 무스타파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의 거무튀튀한 얼굴이 움직였을 때, 그것은 표정을 짓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말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충성을 맹세한 주군을 배신하고, 헌신을 서원
한 오렘을 배신하고, 우정을 약속한 친구를 배신했다. 더이상 우리의
지휘자로서, 기사로서 대우할 수 없다고 본다."
딤라이트는 목이 메인 목소리로 힘들게 말했다.
"어떻게, 어떻게 지금 그런 말을 하는가…… 어떻게 이토록 슬플 때.
무스타파. 제발…… 그 이야기는 잊어주게. 아니, 잊을 수 없다면 잠
시 보류해두세. 부탁이네."
무스타파는 씁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딤라이트는 힘들게 고개를 돌려 데이든 평원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뒤덮은 검은 안개는 꿈틀거리고 흐물거리며 말할 수 없이 역
겨운 모습으로 떠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도열한 기치창검은
음습한 적의로 빛나고 있었다.
데스나이트들. 언제부터 저 모습이 익숙하게 느껴진 것일까. 딤라이
트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스나이트들은 당연히
거기 있어야 된다는 듯한 모습으로 평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
고 그 앞, 최선두에 선 한 명의 기사가 있었다.
완벽한 괴물에 올라탄 채 켄턴의 성벽을 쏘아보고 있는 그 기사는 다
른 기사들에 비해 훨씬 작은 체구였다. 원래 하늘을 나는 기사였던 만
큼 덩치가 작은 것은 당연하다. 갑주도 월등히 가벼운 것을 걸치고 있
었지만 투구만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레이 휠드런의 눈이 그 투구 아래에서 빛나고 있었다.
천공의 기사들과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는 솔로쳐가 주먹 거리 내에
들어오는 것이라면 뭐든지 후려칠 듯한 모습으로 으르렁거리고 있었
다.
"불합리해, 부조리해, 불가능해! 핸드레이크의 이름에 걸고, 젠장!
마법사의 이름에 걸고 맹세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웃기는군. 어쨌든 백
번 양보해서 죽은 놈들이 살아난 것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여기더라
도, 그렇다면 왜 드래곤 솔져들은 부활하지 않는 거야!"
광분한 솔로쳐를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하던 시몬슬은 드래곤 솔져라
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온몸에 '전투용 도구 : 위험물품'이
라고 적어둔 것 같은 전사가 이마에 '전투 준비 완료' 라고 써붙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묵묵히 황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그래서 소환자인 솔로쳐를 찾아왔던 전사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파괴하더라도 다시 부활한다면……"
솔로쳐는 고개를 돌려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용아병은 근엄하게 말
했다.
"다시 파괴하면 됩니다. 솔로쳐."
용아병의 기지(?)는 솔로쳐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어버린 솔로쳐는 입술을 꾹 깨문 채 평원에 도열한 데스나이트
와 그레이의 모습을 쏘아보았다.
그 때 서녘 하늘에서 붉게 타오르던 태양이 마침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데스나이트들의 진열에서 작은 움직임이 일어났다. 쥬리오 시
장은 눈을 가늘게 뜨며 평원을 바라보았다.
선두에 서있던 그레이가 손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그러자 데스나이트
들의 진열에서 한 기사가 앞으로 달려나왔다. 기사는 들고 있던 거대
한 할버드를 한손만으로 빙글 돌려 거꾸로 쥐었다. 히든보리 사집관은
그 무거운 할버드를 부지깽이 다루듯하는 모습에 신음을 토했다. 데스
나이트는 할버드를 거꾸로 쥔 채 켄턴성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데스나이트가 타고 있는 '것'의 다리는 모두 네 개였지만 '그것'은
실팍한 앞다리 두 개만 사용하여 달리고 있었다. 가느다란 뒷다리는
어깨 위로 넘겨 마치 팔처럼 앞으로 뻗어나와 건들거리고 있었다. 그
기이한 움직임을 바라보던 성벽 위의 사람들은 역겨움과 어지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히든보리 사집관은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말했다.
"무기를 거꾸로 쥐었으니, 아무래도 사절인 듯합니다만."
쥬리오 시장은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데스나이트를 태운
괴물은 그런 괴상한 모습으로 달리는 것치곤 상당한 준족이어서 데스
나이트는 곧 성문 앞에 멈춰섰다. 데스나이트는 들고 있던 할버드를
땅에 꽂아넣고는 빈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사절의 전통적인 모습. 쥬
리오 시장은 못마땅한 얼굴로 성벽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저격의 위험
을 생각한 히든보리 사집관은 재빨리 시장을 만류하고는 직접 흉벽 너
머로 몸을 내밀었다.
"사절인가?"
"그그렇렇다다! 그그레레이이 휠휠드드런런의의 전전갈갈을을 가가져
져왔왔노노라라!"
딤라이트와 솔로쳐가 동시에 이를 갈았다. 딤라이트의 경우 그것은
동료의 배신에 대한 순수한 분노와 슬픔 때문이었지만 솔로쳐의 경우
에는 일부러 그레이 휠드런의 이름을 거론하는 데스나이트의 속셈에
대한 분노였다. 과연 그 이름을 들은 성벽 위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
금까지보다 훨씬 증폭된 불안이 감돌았다.
히든보리 사집관 역시 잠시 입을 다문 채 데스나이트를 쏘아보다가
조금 늦게 대답했다.
모든 사람들은 불안스러운 눈으로 히든보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히
든보리가 대답하기에 앞서 솔로쳐가 재빨리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얼
떨떨한 눈으로 돌아보는 히든보리를 향해 솔로쳐는 낮고 빠르게 속삭
였다.
"이상하오. 항복 권고가 아니군. 사절은 킨 크라이를 먼저 거론하고
있소."
"아…… 그렇군요."
"조건이 나올 것 같소. 유념해서 회담을 진행하시오."
히든보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데스나이트를 향해 외쳤다.
"그 짐승을 내놓는 대신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뭐지?"
데스나이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켄켄턴턴의의 자자유유와 안안녕녕을을 보보장장한한다다."
히든보리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조건을 예상하고 있었던 솔로쳐 역시
이런 파격적인 조건에는 어안이 벙벙해져버렸다. 그러나 딤라이트는
여전히 슬픈 표정이었고 무스타파는 무뚝뚝한 얼굴로 검붉은 하늘을
쏘아보고 있을 뿐이었다. 천공의 기사들의 무반응을 예의주시한 솔로
쳐는 다시 히든보리에게 속삭였다.
"시간을 끄시오."
"어, 그, 그 제안을 검토할 시간을 달라!"
"즉즉시시 대대답답하하라라!"
히든보리는 거칠게, 하지만 간곡함이 배어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당신들과는 다르다. 켄턴 전체
에 관련된 일인 만큼 우리들은 서로 의논을 해봐야 한다."
데스나이트는 못마땅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원래가 무시
무시해보이는 몰골인 만큼 그가 못마땅해 한다는 것은 예사일이 아니
었다. 하지만 잠깐의 침묵 후, 데스나이트는 꽂아두었던 할버드를 다
시 뽑아들며 외쳤다.
"내내일일 저저녁녁에에 다다시시 오오겠겠다다!"
그리고 데스나이트는 몸을 돌려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그 때 딤라이
트가 외쳤다.
"이봐! 너! 나는 딤라이트 이스트필드다. 그레이 휠드런에게 내가 만
나고 싶어한다고 전해라!"
데스나이트는 몸을 반쯤 돌린 채 성벽 위의 딤라이트를 잠시 바라보
았다. 그러나 데스나이트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자신들의 대열로 돌아갔다.
사절은 대열에 도착하자 그레이를 향해 다가갔다. 먼 거리였지만 딤
라이트는 사절이 그레이에게 뭔가 말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레이는 고개를 조금 움직였다. 무거운 투구와 검은 안개, 머나먼 거
리에도 불구하고 딤라이트는 그레이의 눈빛이 자신과 마주쳤다는 것을
맹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그레이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구령도 없고 지
시도 없었지만 데스나이트들 전부는 그레이의 움직임과 동시에 일제히
몸을 돌려 멀리 떨어진 숲에 설영된 본영으로 돌아갔다. 그러리라고
짐작된다는 말이다. 검은 안개가 그들의 뒷모습을 감추었기에 그들의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기 어려웠다.
솔로쳐는 재빨리 말했다.
"저 목청 좋은 친구의 말은 모든 켄턴 시민들에게 들렸을 거요. 시장
님께서는 시청으로 돌아가시자마자 시민들에게 시달리겠군. 나는 좀
천천히 돌아갈 테니 수고스럽겠지만 시민들을 상대하고 시민 대표들과
논의를 진행해주시오. 뭐, 논의라고 해봤자 결론은 뻔하지만."
쥬리오 시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폰 한 마리와 켄턴 시. 누가 보
더라도 데스나이트의 친절함을 칭송할 제안이다. 쥬리오 시장과 히든
보리 사집관이 성벽을 내려가자 솔로쳐는 딤라이트에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
"이야기 좀 합시다. 딤라이트, 무스타파."
딤라이트는 아직까지도 억장이 무너진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
에 솔로쳐는 무스타파의 이름까지 거론해야 했다. 무스타파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솔로쳐는 말했다.
"저 제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받아들이기 쉬운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니, 젠장. 그게 아니고 말이오. 그레이는 킨 크라이를 몹시 원하
고 있는 모양이오. 그렇잖소?"
"……당연하잖습니까?"
"뭐요?"
"이제는 인정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는 한 때 천공의 기사였습니다.
(딤라이트가 눈을 허옇게 뒤집었지만 무스타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킨 크라이와 켄턴 시는 동등한, 아니 킨 크라이 쪽이 더
높은 가치를 가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흐음……"
솔로쳐는 팔짱을 끼었고 그러자 그의 뒤에 서있던 시몬슬과 용아병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끼었다.
"무스타파 당신의 경우라면 어떻겠소. 아이라와……"
무스타파는 솔로쳐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기사의 서약을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라면, 나라 하나와도 바꿀 수
있습니다."
솔로쳐는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마음 속으로는 놀라움의 감정을
억누르며 솔로쳐는 재빨리 생각했다. 이건 아이덴티티의 문제인가 보
군. 천공의 기사는 어쨌든 하늘을 날아야 한다는 것인가. 그런 솔로쳐
를 향해 이번에는 무스타파가 질문했다.
"저도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마법사님께서 말씀하신
것 말씀인데, 어찌해서 저들 간악한 자들은 부활했는데 드래곤 솔져들
은 부활하지 않는 것입니까?"
"아아, 핵심을 찔러주셨소."
솔로쳐는 그렇게만 말했다. 잠시 기다리던 무스타파는 달갑잖게 말했
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런 대답을 할 때는……"
"그렇소. 나도 모르겠다는 말이지."
솔로쳐는 다시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시몬슬은 불안한 얼굴로 뒤로
조금 물러났다. 솔로쳐는 누구에게 화를 내는 건지도 분명하지 않게
분노하며 말했다.
"보통의 경우 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많은 이론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 가능성이 없는 것을 솎아내는 소거법을 사용하여 가장 합리적인 해
답을 선택하오. 하지만 이번의 경우에는 수많은 이론은커녕 하나의 해
답도 떠오르지 않소. 죽은 자는 모두 되살아나는가? 틀렸소. 켄턴의
시민들이 늘어나는 경향은 보이지 않소. 지금까지 켄턴의 시민으로서
되살아난 자는 저 웃기는 별명을 가진 프리스트뿐이오. 되살아난 자들
은 다시 죽지 않는가? 틀렸소. 어제 데스나이트들은 분명히 죽었소.
그럼 다시는 부활하지 않는가? 틀렸소! 저기 데스나이트들은 모두 두
번째로 부활했소! 그런데 드래곤 솔져의 경우에는 첫번째의 부활도 이
루어지지 않았어. 어떤 자는 몇번씩 부활하는데, 어떤 자는 한번도 부
활하지 않아. 도대체가 일관된 규칙성을 찾아볼 수가 없어! 제기랄,
시몬슬! 나를 죽여라! 나도 두번째로 부활하는지 어디 보자! 나를 죽
여라아앗!"
계속 화를 내던 솔로쳐는 결국 자신의 말에 극도로 흥분해서는 시몬
슬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나를 죽이란 말이다! 명령이
다!' 실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우습게 여기는 마법사의 정신이 잘 살
아있는 요구라 하겠지만 당황한 시몬슬은 거의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
되어 솔로쳐 님, 솔로쳐 님. 하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무스타파는
근엄한 얼굴로 검을 세워들며 '소환자의 명령이시라면……' 어쩌고 하
는 용아병을 말리느라 애써야 했다. 딤라이트는 그들 모두를 내버려둔
채 성벽을 내려와버렸다.
검붉은 석양빛을 받아 구릿빛으로 타오르는 성벽 계단은 몽환적이었
다. 계단을 밟아내려오며 딤라이트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의 절망이
그의 발걸음을 더욱 흔들리게 만들었다. 손으로 성벽을 짚어가며 힘들
게 계단을 내려서던 딤라이트는 결국 마지막 몇 개의 계단을 남겨두고
계단에 주저앉고 말았다.
몰염치한 추억들은 마구잡이로 딤라이트의 머리속을 어지럽혔다. 일
스, 해 뜨는 바다. 금빛으로 빛나는 아침의 모래사장. 하얀 절벽을 따
라 달리며 바라보던 실키안 레이크의 석양. 일스의 정원은 바다다. 그
들은 해풍을 따라 피어나는 장미꽃을 경배하고 수평선으로부터 정의를
배운다. 하늘 높이 날아오르면 바다의 잔 파도들은 사라지고 한없는
해원만이 그들을 둘러싼다.
'그레이. 너는 그것을 모두 잊었나. 이런 지독한 꼴을 당하기 위해
우리는 이 터무니없는 시간 속에 떨어졌단 말인가.'
누군가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딤라이트는 고개를 들었다. 어두워져가는 하늘 아래 작은 소녀가 그
를 바라보고 있었다. 딤라이트는 메마른 목소리로 소녀의 이름을 불렀
다.
"레이디 케이트."
케이트는 혼자였다. 뭔가 구색이 맞지 않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원래 여성의 옷차림에 대한 안목이 별로 없는데다가 슬픔 때문에 넋이
나가다시피한 딤라이트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케이트는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말했다.
"저, 딤라이트 경…… 슬퍼보여요."
"괜찮습니다. 무슨 일로? 다이앤 양은 어디 있습니까."
"다이앤은 집에 있어요. 저는, 저는 경을 만나려고 왔는데요."
딤라이트는 잠시 멍한 얼굴로 케이트를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딤라이
트는 케이트의 신발이 몹시 더러워져 있는데다가 얼굴에는 땀이 가득
말라붙어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끈이 풀린 모자는 위태위태하게 머리
에 얹혀져 있었고 치마끈의 매듭도 시원찮았다.
딤라이트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간신히 정답이 도출되었다. 혼자
서 나온 거야. 그러고보니 옷차림도 이상하군. 혼자서 옷을 입고서는
몰래 나온 것인가.
딤라이트는 일어설까 하다가 그러면 케이트가 올려다보아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대로 자리에 앉은 채 말했다.
"제게 용건이…… 볼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예. 저…… 그런데 정말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지요?"
케이트는 잠시 주저주저하며 딤라이트의 눈치를 살폈다. 딤라이트는
힘들게 미소를 지어보였고 그러자 케이트는 안심하며 말했다.
많이 늦었고 앞으로도 연재는 방만할 듯합니다. 죄송합니다. 신문 연
재라는 건 머리 아픈 일이군요. 환타지의 신문연재라는 의의가 장해서
두드리긴 합니다만… 골치 아픕니다.
드래곤 라자의 애니메이션 제작은 계약했습니다. 얼마 전에 계약했지
요. 녹색전차 해모수, 레스톨 긴급구조대 등을 기획한 금강기획이라는
회사입니다. 무슨 생각으로 계약했냐 하시면… 세계 시장의 45% 를 제
작해내는 한국이라면, 자국 소설을 이용한 환타지 애니메이션 하나 쯤
은 가져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계약했습니다.
45% 나 제작하면서 그 대부분이 하청이라는 것은 슬프더군요.
94년에 시작된 모 글이 드디어 100 회를 돌파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실 명작.) 이 자리를 빌어 다시 축하드립니다. 축! 100 회!번 호 : 16933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3-04 02:28
제 목 : [F/W] 시간의 장인.....2
Future Walker
8. 시간의 장인…………2.
"저,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야기라고 하셨습니까?"
"예. 저…… 오후에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요. 마굿간에서 비명소리
같은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그래서 다이앤에게 물어봤어요."
킨 크라이로군. 딤라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리폰이 마굿간에 있다고 하던데요. 저, 그러니까 주인이 없어
져서…… 왜 저렇게 울고 있는 건지 물어봤거든요. 주인이 없어져서
그렇다고 하던데요."
딤라이트는 다시 목이 메이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 말이 정말인가요?"
"예. 그래서 킨 크라이는 슬퍼하고 있을 겁니다."
케이트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딤라이트는 조그마한 소
녀의 턱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슬픈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딤라이트는 케이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이 소녀는 나를 위
로하기 위해 무단외출을 감행한 것인가. 저 나이에는 참으로 대단한
모험일 텐데.
그러나 다음 순간 들려온 케이트의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그럼, 지금은 킨 크라이에게는 주인이 없는 거죠?"
"예? 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리폰을 타는 것은 많이 어려운가요?"
"글쎄요.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페가서스와 그리폰은 서로 다른 생
물이니까요."
"그래도, 배우면 가능하겠지요?"
딤라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칫했다. 그는 잠시 케이트를 바라
보았고 머릿속으로는 비명을 질렀다. 딤라이트는 이 소녀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짐작했다.
케이트는 손을 들어올리며 열성적으로 말했다.
"주인이 없다면, 어, 그러니까 주인이 없으니까…… 임자가 없는 거
에요. 그렇죠?"
딤라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케이트는 자신의 손놀림에 홀려
서는 더듬더듬 말했다.
"그럼 새 주인을 얻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죠?"
"레이디 케이트……"
"그레이 경은 말했어요. 그리폰은 하늘 끝까지라도 날아오를 수 있다
고요. 그렇죠? 그리고 지금 킨 크라이는 주인이 없으니까, 에……"
케이트는 마지막 말을 얼버무리려 했다. 하지만 딤라이트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고 그래서 케이트는 끝까지 말해야 했다.
"그럼 그 그리폰을 제게 주실 수도 있겠죠?"
딤라이트는 자신의 감정에 스스로 놀랐다. 그 순간 딤라이트는 이 작
고 연약한 소녀의 뺨을 후려갈기는 자기 모습을 떠올렸던 것이다. 게
다가 그 욕구는 상당히 강렬했다. 지금 이 소녀는 그레이의 그리폰을
탐내고 있단 말인가? 그레이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가지지 않은 채, 아니, 그를 이미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며……
딤라이트는 재빨리 무릎 위로 두 손을 깎지끼고는 고개를 숙여 케이
트의 눈을 피했다. 기대감에 젖어 반짝이는 케이트의 눈빛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딤라이트는 깎지를
껴 하얗게 변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왜…… 왜 그리폰을 가지려고 하는 겁니까."
케이트는 반색하며 대답했다.
"하늘에 올라가려고요."
어머니였나. 죽은 어머니 말인가. 하늘에 있는 우리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제기랄, 지겨워! 우습지도 않군. 킨 크라이를 타고 하늘 끝까
지 올라간다 하더라도 케이트가 그녀의 어머니를 만날 수는 없을 것이
다. 케이트 주위의 어른들은 간특하게도 어린애를 속일 수 있다고 생
각했고, 그래서 지금 그 어린애는 내 속을 뒤집어놓고 있는 것이다.
딤라이트는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미안합니다만 그레이는 살아있습니다. 킨 크라이는 그의 것입니다."
케이트는 고개를 한껏 쳐들고는 부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예? 어, 아닌데요? 다이앤은 그랬어요. 그레이 경은 귀신이 씌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고……"
그 빌어먹을 하녀년이! 딤라이트의 두뇌의 이성적인 부분은 켄턴 시
전체에 그런 소문이 퍼지고 있으므로 다이앤을 탓할 바가 못된다고 판
단하고 있었지만 그의 감성은 다이앤에 대한, 그리고 케이트에 대한
증오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딤라이트는 다시 한번 간신히 자신을
억제하며 말했다.
"그런 소문은 믿지 마십시오."
"그럼, 그레이 경이 살아있다면 킨 크라이는 왜 그렇게 우는 거에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주인이 죽었으니까 그렇게 울고 있는 거……"
그 순간 딤라이트의 증오가 그의 인내심을 넘어섰다.
"데스나이트가 되었든 어쨌든 그레이는 살아있어! 죽은 것은 네 어머
니지! 하늘 끝까지 올라가봐야 네 어머니는……!"
딤라이트의 말끝이 사그라들었다. 케이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딤
라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한 딤라이트는 숨을 몰아쉬며 케이트를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
엔 조금 전의 그녀와 똑같았다. 하지만 뭔가가 빠져있었다. 지금까지
그녀를 이루고 있던 무엇인가가 사라져버리고 딤라이트의 눈 앞에는
그녀의 껍데기만이 남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딤라이트의 마음 속으로
천천히, 하지만 멈출 수 없는 회한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때 케이
트의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거짓말……"
"레, 레이디 케이트."
"거짓말이야……"
"레이디 케이트. 미안합니다. 실수였어요."
"거짓말이었어……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었
어……"
딤라이트는 당황했다. 케이트는 그의 말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
었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죽은 거에요…… 죽었어……"
죽음? 순간 딤라이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소녀는 죽음이라는 단
어를 그가 사용하는 의미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다. 케이트는
죽음을 알고 있었다. 왜? 어떻게? 순간 딤라이트는 이 도시에 찾아들
었던 재난과 재앙을 떠올렸다. 제길, 이 도시의 꼬마가 죽음을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다.
"엄마는 무덤에 있어……"
"레이디 케이트. 아니, 잠깐. 그러니까 그건 말입니다."
"엄마는…… 죽었어요. 그래요. 죽었어요. 레티의 프리스트처럼, 경
비대원들처럼. 죽은 거에요. 그래요."
케이트는 자신의 말을 음미하듯 천천히, 그러나 확고하게 말했다. 딤
라이트는 입을 벌렸으나 그의 입술과 혀는 말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케이트는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죽었어…… 죽었어…… 죽었어……"
"레이디 케이트?"
딤라이트의 당혹스러운 목소리에 대한 대답은 케이트의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였다.
"아아아악!"
반쯤 일어나던 딤라이트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케이트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쥐며 비명을 질러대었다. 그것도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
니라 연이어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대었다.
"아아아악! 아아아악! 아아아악!"
성벽 주위를 오가던 경비대원들과 시민들이 깜짝 놀란 눈으로 바라보
고 있었다. 딤라이트는 다시 일어나려 애썼다. 그러나 케이트는 비명
을 지르며 그대로 몸을 돌려 달려가기 시작했다.
"레이디 케이트!"
딤라이트는 고함을 지르며 그녀의 뒤를 따라 달렸다. 하지만 케이트
는 죽을 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고 월등히 다리가 길긴 하지만 무장을
한 딤라이트의 걸음은 그렇게 빨라질 수가 없었다. 딤라이트는 갑옷을
팽개치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동시에 멀건히 구경하고 있는 켄턴
시민들에 대해 욕설을 퍼붓고 싶다는 생각도 떠올렸다. 하지만 둘 중
어느 것도 기사에게 어울리는 행동은 아니었고 그래서 딤라이트는 입
을 다문 채 다리가 빠져나가라 달려야만 했다.
황혼의 대로는 붉은 비단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 길게 늘어진
케이트의 그림자는 환상적이었다. 그의 발 바로 앞에서 노닐고 있는
그림자였지만 딤라이트는 케이트를 붙잡을 수 없었다. 소녀는 소리높
이 비명을 지르며, 그리고 기사는 말도 없이 달리며 두 사람은 켄턴의
대로를 거의 일주했다.
무작정 케이트를 따라 달리던 딤라이트는 주위의 모습이 바뀌어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해가 지기 전에 케이트를 잡아야 된다는 생각 때
문에 딤라이트는 주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완전한 밤이 찾아오
면 조그마한 케이트의 모습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려워지리라. 그래서
딤라이트는 풀숲을 헤치고 비탈길을 따라 오르면서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지 못했다.
순간, 앞을 달리던 케이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딤라이트는 재빨리 멈춰섰다. 암청색 어둠은 이미 사위를 물들이고
있었고 주위는 우석거리는 소리로 가득한 숲의 자장가를 연주하고 있
었다. 이런, 여기가 어디지? 딤라이트는 자신의 숨소리까지도 억제했
다. 보이지 않는다면, 소리, 소리를 찾아야 한다. 가벼운 발자국 소리
일 것이다.
엉뚱한 소리가 들려왔다.
흐느끼는 소리. 딤라이트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숨이 막혀 꺽꺽거
리는 울음소리. 작은 소녀가 사무치는 슬픔 때문에 낼 것 같은 울음소
리. 딤라이트는 소리의 방향을 가늠했다. 랜턴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주위는 이미 숲이었고 그래서 딤라이트는 발에 채이는
돌멩이와 종아리에 걸리는 풀잎에 방해를 받으며 힘들게 울음소리를
추적했다.
이건 길이 아닌 것 같은데. 짐승의 길인가?
딤라이트는 발에 닿는 땅의 감각과 주위의 나무를 보며 그렇게 판단
했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오가는 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아가씨가 이용하는 지름길인가? 그런데, 그렇다면 이 길은 어디로 통
하는 거지?
딤라이트의 의문에 대한 해답은 매우 고통스럽게 돌아왔다. 딤라이트
는 커다란 돌덩어리를 걷어찬 오른쪽 정강이를 움켜쥔 채 소리없이 신
음을 흘렸다. 아이고, 내 다리! 뭐야, 이건.
순간 딤라이트는 섬뜩함을 느끼며 다리의 고통까지도 잊어버렸다. 그
가 걷어찬 것은 단순하지만 분명히 사람의 손길이 닿았던 돌이었다.
직육면체이며, 땅에 세워져있고, 작은 글이 새겨져있는…… 묘비였다.
여기는 묘지인가?
어둡고 캄캄한 묘지였다. 어둠 속으로 솟아있는 묘비들의 그림자가
마치 숲처럼 보였다. 정신없이 달리던 딤라이트는 이곳의 위치를 정확
하게 가늠할 수 없었다. 어느쪽이 성벽 방향이지? 주위에는 불빛도 건
물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지름길로 온 건지는 모르
지만, 그렇게 많이 달린 것 같지도 않은데 시내에서 이렇게 떨어져버
린 건가.
그 때 다시 흐느껴우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딤라이트는 담대한 기사였지만 어두운 밤 묘지 한가운데 서서 묘비들
사이에서 들리는 울음소리를 들으면서도 완전히 침착할 수는 없었다.
목 뒤와 어깨가 긴장되며 딤라이트는 통증까지도 느꼈다. 하지만 완전
히 굳어버린 등허리 쪽의 긴장은 가실 줄을 몰랐다. 딤라이트는 심호
흡을 하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시 울음소리가 들려왔을 때 딤라이트는 거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
었다. 그래서 딤라이트는 천천히, 묘지를 밟거나 하지 않으려 애쓰면
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던 방향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딤라이트는
자신을 비웃었다. 멍청한 놈. 죽은 자가 묘지를 무서워하나. 하지만
그것은 그냥 호기였을 뿐이다. 묘지 전체에 배어있으면서 시시각각 그
의 몸을 파고드는 감각은 그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묘지는 다른
땅과 다르다. 뻔뻔스러울 만큼 명명백백하게 죽음을 증거하는 이 장소
는 궁궐이나 항구나 들판이나 논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이질적인 어
떤 장소였다.
울음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들려왔다.
딤라이트는 멈춰섰다. 검푸른 하늘에선 벌써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케이트는 무덤에 쓰러진 채 흙과 풀을 움켜쥔 채 흐느끼고 있
었다.
"레이디 케이트."
"엄마, 엄마…… 엄마."
딤라이트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바닥보다 그렇게 넓지
도 않은 케이트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케이트는 목이 막혀 꺽꺽
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딤라이트는 천천히 케이트를 일으켜 앉혔
다. 케이트는 몸부림치려 지만 딤라이트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으며 똑바로 앉혔다.
일어난 케이트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어둠 속이지만 옷에 덕지덕지붙
은 흙덩어리와 풀물이 든 손, 그리고 눈물과 흙먼지로 범벅이 된 얼굴
은 대충 알아볼 수 있었다. 게다가 케이트는 딤라이트의 얼굴을 똑바
로 보게 되자 다시 목을 놓아 울음을 터뜨렸다.
"흐어어어엉!"
딤라이트는 뭐라 말하려 하다가 입을 다물고는 손수건을 꺼내어 케이
트의 얼굴을 대충 닦았다. 그리고는 케이트의 코에 손수건을 가져가며
조용히 코를 풀 것을 제안했다.
"흥."
"흐으응! 우아아아……앙."
딤라이트는 다섯 배쯤 무거워진 것 같은 손수건을 주머니에 대충 쑤
셔넣고는 케이트의 머릿카락을 쓸어넘겼다.
"레이디 케이트. 울지 말아요."
"어마, 엄마, 어마, 주어, 죽어, 엄마 죽어, 주었어, 으허어어엉!"
"그렇습니다. 레이디 케이트. 하지만 그렇게 슬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케이트는 딤라이트의 얼굴을 흘끔 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시커
먼 그림자뿐이었다. 케이트는 그 그림자를 향해 앙칼지게 외쳤다.
"살려내요!"
"예?"
"살려내요! 우리 엄마 살려내요! 살려내라고요!"
이런 난감한 요구라니. 딤라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말
없이 케이트를 안아올렸다. 느닷없이 허공으로 올라오게 된 케이트는
경황 중에서도 질겁하며 딤라이트의 목에 매달렸다. 딤라이트는 퍽 어
색한 자세로 케이트를 안아든 채 말했다.
"일단 관사로 돌아갑시다. 그리고 씻고나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요."
"우리 엄마 살려……"
"레이디 케이트. 여기는 춥고 어둡습니다. 가서 씻고 저녁이라도 먹
고나서 이야기를 하죠."
"저녁 먹고?"
"예."
"저녁 먹고나서 우리 엄마 살려내는 거?"
말이 되냐. 딤라이트는 이젠 힘없는 미소라도 짓고 싶었다. 그러나
케이트의 요구에 대답한 것은 그가 아니었다.
"어, 케이트니?"
딤라이트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하마터면 검
을 뽑아들 뻔했지만 케이트를 안고 있었기에 그런 무서운 사태는 일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다행이었다. 딤라이트는 상대가 사람이라
는 것을 간신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곳에는 한 여자가 서있었다. 딤라이트가 그 그림자를 보자마자 트
롤이나 오거일 거라고 착각했으리만큼 굴강한 몸집과 위압적인 팔뚝을
자랑하는 여자였다. 그 여자는 두툼한 허릿살 위에 그 우람한 손바닥
을 얹어놓고는 딤라이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딤라이트는 강렬한 압
박감 속에서 간신히 질문했다.
"저, 누구신지……"
"엄마!"
딤라이트는 빠져나간 자신의 턱이 땅 위를 굴러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케이트는 와락 몸부림을 쳤고 딤라이트는 간신히 케이트가 땅
에 곤두박질치기 전에 그녀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땅에 내려지자마자
케이트는 그 장대한 체구의 여인네를 향해 줄달음질쳤다. 그리고는 여
인의 큼직한 앞치마 - 딤라이트는 그것이 군용 천막이 아닌가 의심했
다. - 를 움켜쥐고는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 여인의 얼굴을 올려다보
았다.
"엄마……? 엄마!"
여인네는 곧 그 웅장한 체구에 어울리는 장엄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
아함을 표시했다.
"에구머니! 케이트? 너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거냐? 이 지저분한 몰골
하고! 너 제정신이야? 이 흙 좀 봐. 이게 사람 새끼 몰골이야, 동네
강아지 몰골이야!"
케이트는 거의 휘둘리다시피 조사를 당하며 간신히 말했다.
"어, 어? 엄마 안죽었어?"
딤라이트는 여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고 생각했다. 여인은 케이트
의 작은 몸을 통째로 흔들며 고래고래 고함질렀다.
"이녀언! 이년! 그게 어미한테 하는 말버릇이야? 이제는 어미를 죽은
것 취급해?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야! 죽었다고? 죽어? 이년! 네가
죽어봐라, 이년!"
여인은 우레 같은 목소리로 케이트와 딤라이트의 혼을 쏙 빼놓고는
그대로 묘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케이트의 몸을 가볍게 들어
올려 무릎에 얹고는 그 공성추 같은 팔을 뒤로 당겼다. 여인은 곧 못
이라도 때려박을 듯한 기세로 손을 휘둘렀고, 그 손바닥과 케이트의
조그마한 엉덩이가 서로 마주치며 굉음이 울려퍼지자 딤라이트는 그만
헛바람을 삼키며 눈을 감고 말았다.
케이트는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러대었지만 여인은 한 점 흔들림없
는 달인의 손놀림으로 케이트의 엉덩이를 무참하게 유린했다. 딤라이
트는 케이트의 목을 따는 비명소리에 왠지 즐거움 같은 것이 섞여 있
다고 생각했지만 주위를 가득 메운 공포스러운 기운 때문에 그런 느낌
을 곧 잊어버렸다. 한참 후, 여인은 씨근거리며 팔놀림을 멈추고는 이
마를 쓱 훔쳤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딤라이트를 바라보았다. 그 눈
빛을 받으며 딤라이트는 직립부동자세가 되었다.
바싹 굳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딤라이트를 향해, 여인은 퉁명스
럽게 말했다.
"누구슈? 칼잡이오?"
하마터면 관등성명을 댈 뻔했지만, 딤라이트는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스의 딤라이트라고 합니다. ……레이디."
여인이 당혹하고 놀랄 거라고 생각했던 딤라이트의 기대는 무참하게
뭉개져버렸다. 여인은 일스의 딤라이트가 뉘집 강아지 이름인가 하는
표정으로 딤라이트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딤라이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갑자기 의심의 기운이 서렸다.
"여기서 우리 귀염둥이랑 뭐하고 있으셨수, 딤라이트 씨?"
딤라이트의 입 속에서 수많은 말들이 동시에 튀어나오려고 아우성을
지르고 있었지만, 딤라이트의 머리 속에서는 한 가지 단어만이 끈질기
게 맴돌고 있었다.
귀염둥이라고?
================================================================
머리 속에 빅뱅이 일어난 기분입니다… 왜이리 어지러운 건지. (알콜
결핍이 아닌가 의심해보는 타자. 이 기회를 틈타 술이나 진탕… 윽.)
외로움은 흩뿌리고, 기쁨은 모아가고…
좋은 밤 되세요.
번 호 : 17035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3-05 23:33
제 목 : [F/W] 시간의 장인.....3
Future Walker
8. 시간의 장인…………3.
레이저는 갑작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파하스 씨!"
"왜?"
"당신 파하스입니까?"
"……저능하다고 해줄까, 멍청하다고 해줄까? 자네가 조금 전에 나를
그 이름으로 불러놓고는 이런 황당한 질문이냐?"
루손은 킬킬거렸지만 레이저는 차분하게 말했다.
"둘다 사양하겠습니다. 그럼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당신 부모님은 대
시인을 존경한 겁니까?"
"뭐야?"
"당신 부모님이 대시인을 존경했기에 당신에게 그런 이름을 붙인 겁
니까?"
파하스는 그제서야 레이저의 질문을 이해했다. 파하스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는 고아였다."
"고아……"
"다섯 살 때 첫번째 노래를 만들었고, 열살 때 처음으로 검을 쥐었
지. 열다섯살 때 처음으로 사랑했고, 열일곱살 때는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후회하진 않아."
레이저는 그대로 파하스의 말을 받았다.
"레이디를 위해 든 검이었으니까. 그리고 스무살 때 강간마 오크빌을
죽이고 현상금이 붙게 되었습니다. 강간마 오크빌은, 어쨌든 귀족이었
으니까. 스물 일곱에 헤게모니아를 종단하고 시간의 바늘에 입맞췄지
요. 서른살 때 당신은 열다섯의 당신이 처음으로 사랑했을 때 당신의
연적이었고 그 이후로 일생 동안 당신의 적수였던 부캐넌 백작을 쓰러
트리고 그의 검을 가졌지요."
파하스는 물기어린 눈으로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고마운 일이군. 100년이 지나도 내 보잘 것 없는 이야기를 이렇듯
소상하게 기억해주는 이가 있다니."
"진짜 파하스로군요."
"그렇다네."
"그럼……"
레이저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턴빌 시를 바라보았다.
"저건 진짜 거인이군요."
"동의하겠어. 자네가 어디 가서 그렇게 말하겠다면, 맞장구도 쳐주
지."
파하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턴빌 시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하
게는 턴빌 시청 지붕을 뒷꿈치로 자근자근 밟고 있는 거인을 바라보았
다.
거인의 발길에 채인 지붕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거인의 주먹에 맞은
종탑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분수대가 무너진 것인지 물길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고 그 옆에선 불길이 질 수 없다는 듯이 솟아오르고 있었
다. 거인은 그런 식으로 턴빌시에 미증유의 대파괴를 선사하고 있었지
만, 파하스가 보기엔 아무래도 가볍게 몸을 푸는 것 정도로 보였다.
팽개쳐진 듯한 모습으로 땅바닥에 드러누운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던 아프나이델이 힘없이 머리를 들어올렸다.
"설명을 할까요, 들을까요."
세운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그 주먹 위에 다시 이마를 얹은 모습으로
앉아있던 운차이는 한쪽 눈만 떠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고는 다시 눈
을 감았다.
"해."
"에, 저건 거인입니다."
"이……익!"
운차이는 무시무시한 욕설을 퍼붓는 대신 아프나이델을 확 노려보았
다. 아프나이델은 숨을 들이켰고 그 모습을 보던 아일페사스의 눈꼬리
가 하늘로 치솟아올랐다.
"너! 왜 그런 눈으로 나이드를 쏘아보는 거야?"
운차이는 아일페사스를 한번 바라보기는 했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도로 눈을 감았다. 아프나이델은 심호흡을 하고 - 먼저 아일페사스를
말리고 - 설명을 시작했다.
"저 거인은 루트에리노 대왕을 찾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저 거인을
붙잡아두고 제레인트를 먼저 턴빌로 보내었습니다. 하지만 저 거인을
오랫동안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레인트의 안위
가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루트에리노 대왕에게 데려다주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턴빌에 도착했고, 이후의 상
황은 아시는 바대로입니다."
운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녀석들은 갑자기 나타났지. - 이
말은 어폐가 있다. 정확하게는 지축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나
타났다고 해야 하니까. 어쨌든 거인의 모습을 본 경비대원들과 턴빌
시민들은 대혼란에 빠져버렸고 그 혼란을 틈타 파는, 아니 신스라이프
라고 해야 되나. 어쨌든 그 자는 콜리의 프리스트들과 함께 사라져버
렸다. 신스라이프를 추적하려 했던 운차이는 거인의 횡포 때문에 턴빌
을 탈출하기로 결심했고, 턴빌 외곽에서 아프나이델 일행과 만나서 이
곳까지 도망쳤던 것이다.
운차이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턴빌 시민들에게 소화제를 선물해야겠군."
"예?"
"턴빌 시민들은 네 심장을 꺼내 씹어먹으려들 테니까."
아프나이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옆에 앉아있던 엑셀핸드는 노기
가 충천한 얼굴로 말했다.
"이놈! 그러면 우리더러 어쩌란 말이냐! 우리도 저 거인이 단지 대왕
을 찾는 줄 알았단 말이다. 거인이 저런 횡포를 부리는 것은 너희 인
간들이 그를 공격했기 때문이 아니냐!"
운차이는 혀 차는 소리를 내었다. 그의 말이 맞기는 하다. 턴빌 경비
대원들은 자포자기적인 공황상태에서 거인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
했고 화살이 날아와 박히자 거인은 미친듯이 화를 내며 "우타크! 어디
있느냐!" 턴빌시에 쑥을 재배하기로 결심했다.
"지금 거인에 의해 쑥밭이 되고 있는 턴빌 시의 시민들은 이렇게 말
할걸. 애초에 데려온 쪽이 잘못 아니냐고."
"끄응!"
엑셀핸드는 이것이 부당한 질책이라고 생각했지만 더 이상 변명의 말
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것은 드워프의 성격이 아니다. 이루릴은 슬픔
이 가득한 표정으로 턴빌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인으로 하여금 턴빌을 떠나게 해야 합니다. 그에게 루트에리노 대
왕의 소재를 알려주면 되지 않을까요."
아프나이델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그런 소재 같은 것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게 문제인가요?"
아프나이델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이루릴을 돌아보았지만 이루
릴은 턴빌 쪽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그렇군. 그게 문제될 것은
없지. 이미 속였으니 또 한번 속일 수도 있는 거지. 그러나 이번에는
에델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글쎄요. 거인은 이제 더이상 인간을 신뢰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의 죽음은 속임수에서 비롯된 것이었잖습니까? 그리고 조금 전 그는
다시 한 번 인간에게 속았습니다. 어쩌면, 거인은 복병을 숨겨놓고 자
신을 유인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푸후…… 상당히 가능성 있군요."
제레인트는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루릴은 고개를 가로저
었다.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나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머
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어요. 생각들이 자꾸 끊어집니다. 거인을 유인
한다라. 어떻게, 어디로 유인하면 좋을까요."
이루릴은 잠시 대답을 미루고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저
성스럽고 활기찬 인간이 왜 이런 광경 앞에서 저렇게 무력하고 나른한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그런 의심은 네리아도 하고 있었다. 제레인트,
이상해. 다른 때라면 가장 먼저 제대로 들지도 못할 무기 집어들고 턴
빌로 달려갈 사람인데.
그 때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있던 그란이 입을 열었다. 바이서스어였
다.
"거인의 폭력으로부터 턴빌을 구하는 것도 합당하지. 그러나 다레니
안께서는 말씀하셨다."
운차이는 그란을 바라보았다.
"다레니안……"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의 교차점을 찾으라고. 그
런데 그 교차점은 파다. 그러니 우리는 그녀를 추적해야 되지 않을
까."
"후작을 쫓고 싶다는 것 같군. 턴빌은 저렇게 내버려두고?"
"……그래. 후작과 그 똘마니들은 파를 쫓아갔다. 쳉과 미도…… 그
러니 우리도 그녀를 쫓아가야 되지 않을까."
"빌어먹을, 도대체 어떻게들 된 거야, 모두!"
운차이는 결국 노성을 터뜨렸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이 마음에 안들어. 피크닉이라도 나와
있는 것처럼 이 경치 좋은 언덕에 앉아서 거인에 의해 박살나는 턴빌
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말만
종알거리는 너희놈들도 마음에 들지 않아. 파하스! 레이저! 즐거운 구
경인가? 그 꼴같잖은 말만 쏟아내는 입에다가 너희들의 주먹이라도 쳐
넣어! 아프나이델! 너 혼자서 저 사지에서 탈출했나? 다른 자들은 마
차 타고 유람하듯이 나온 줄 알아? 왜 혼자서 죽어가는 시늉을 하는
거야! 제레인트! 머릿속이 엉망이라고? 네놈의 머릿속이 언제 엉망이
아닐 때가 있었냐! 네놈이 생각하고 움직이는 녀석이었나? 네 앞길은
테페리가 주관하지 않느냐! 그란! 모두 다 파를 쫓아가니 너도 쫓아가
겠다고? 네가 몰려다니는 들개 새끼냐!"
느닷없이 쏟아진 운차이의 폭언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운차
이는 억울함과 분노가 담긴 시선들 하나하나를 되받아주고는 자신의
롱소드를 쥐며 일어났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운차이의
폭언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네리아가 당황하며 말했다.
"어, 운차이?"
운차이는 아무 말 없이 말을 향해 걸어갔다. 네리아는 주춤주춤 따라
걸으며 말했다.
"어디…… 가는 거야? 운차이?"
운차이는 앰뷸런트 제일의 고삐를 틀어쥐고는 등자에 발도 올리지 않
은 채 안장에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검을 뽑아들고는 왼손에 고삐를
감아쥐며 말했다.
"Crifentha unew gereh, fictyr-factey ash na thene ki zhapair!
Rackdarph!"
운차이는 으르렁거리는 말만 남겨놓고는 검을 돌려 앰뷸런트 제일의
볼기를 철썩 갈겼다.
"하아!"
그리고 운차이는 곧장 턴빌 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트라이던
트를 감아쥐며 에보니 나이트호크 위로 뛰어올랐다. 파하스는 당혹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 네리아 양?"
그대로 운차이를 뒤따라갈 기세였던 네리아가 잠시 멈추며 파하스에
게 외쳤다.
"파하스! 혹시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어, 그러니까, 영원히 거기 주저앉아서 사이좋은 앵무새처럼 서로
지저귀고 있어라, 얼간이들아…… 이런 뜻일 겁니……"
"고마워요! 그럼!"
네리아는 에보니 나이트호크의 배를 콱 걷어찼다. 에보니 나이트호크
의 거대한 검은 동체가 검은 질풍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남겨진 사람들과 이종족들은 얼이 빠진 얼굴로 운차이와 네리아의 뒷
모습을 바라보거나 서로를 바라보았다. 혼란에 빠진 일행 가운데서,
파하스는 가슴 속으로 무엇인가가 꾸물거리며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
다.
그것은 대시인의 자각이었다. 한 자루 검과 한 대의 하프를 들고 헤
게모니아를 종단하며 모든 미녀에게 사랑을 바쳤고 모든 남자들에게
시비를 걸었던 자의 분노였다. 죽었다 깨도, 실제로 그러하긴 하지만,
남자가 나를 모욕할 수는 없어. 단순하고 유치하다고 말할 수도 있는
감정이었지만 시인이라는 것은 원래 그렇다. 그들은 감정의 종복이며
노래의 노예. 파하스는 부들부들 떨었다. 챠넬의 후손 앞에서 감히 어
느 놈이 거인을 대적하느니 마느니 하는 것이냐!
"나도 간다!"
에델린은 조그마한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사내의 얼굴에
놀랐다. 파하스의 눈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머릿결을 뒤로 넘기
고는 그 길다란 검을 힘있게 들어올리며 말했다.
"우정은, 사귀어온 시간을 돌아보는 것이기에 앞서 함께 걸어갈 시간
을 내다보는 것. 헌신은, 타인에게 자신을 바치기에 앞서 스스로에 충
실해지는 것. 나는 운차이와 네리아와 함께 걷겠다. 그것으로서 나에
게 헌신하겠다."
제레인트는 머리칼을 쥐어뜯고 있었다. 운차이의 말이 그의 머릿속을
온통 헤집어놓고 있었다. 그래. 내가 생각하고 움직이는 녀석이었나?
언제 어느 때라도 내 앞길의 갈림길은 테페리께서 알려주시는 것. 그
것은 나의 기득권, 그래서 오히려 잊어버린 권리. 테페리라는 길잡이
가 있거늘, 내가 감히 앞길을 모르겠다는 둥 생각이 잘 안된다는 둥의
건방진 말을 꺼내었단 말인가?
지금 나는?
제레인트는 와락 일어나서는 아무 말 없이 후치에 올라탔다. 다른 자
들도 각자의 말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파하스는 긴 검을 뽑아들어 앞
으로 내뻗으며 고함질렀다.
"너 이 젠장맞을 남부 촌놈아! 거기 섰거라! 이랴!"
"하아! 이랴!"
기수들은 각자의 말에 구령을 보내었다. 날렵한 동작으로 센츄리온에
오른 아일페사스는 신나게 고함지르려다가 아프나이델이 아직도 꾸물
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덕분에 엑셀핸드도 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이드! 뭐해요? 어서 가자!"
"응? 아아, 응."
아프나이델은 더듬거리며 엑셀핸드를 세레니얼에 태우고는 그 스스로
도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는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얼
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아일페사스는 센츄리온을 세레니얼 옆으로
붙이며 아프나이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프나이델의 입술이 벌어지
며 혼잣말 같은 말이 새어나왔다.
"영원히……"
"응?"
"영원히 거기 주저앉아서, 앵무새처럼 서로 지저귀고 있어라……"
아일페사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저것이 말에게 내리는 명령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잠시 후 아일페사스는 아프나이델이 운차이의 말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러나 아프나이델은 아일페사스의 질문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있
었다. 그는 말을 달리는데 필요한 최선의 관심만 빼놓고는 자신 속으
로 완전히 함몰되어 있었다. 그런 몰입 속에서 아프나이델은 더듬거렸
다.
"앉아서 중얼거린다…… 앉아서 중얼거린다……"
아일페사스는 욕구불만을 느꼈다. 비탈길을 내려가는데도 불구하고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아프나이델의 모습에서도 불안감을 느꼈
다. 하지만 아프나이델은 그런 위험 속에서도 이마에 땀이 맺힐 것만
같은 완전한 집중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서서 걸어가지 않는다?"
일행의 마지막이 그런 식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남겨진 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잠깐 동안 드러나지 않았다. 레이저와 루손은 언덕 위에 선 채
달려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손은 콧날을 만지작
거리다가 레이저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봐, 레이저."
"응?"
"나는 절대로 거인에게 다가가지는 않아. 알았지?"
레이저는 싱긋 웃었다.
"걱정마. 나도 그런 생각은 없으니까."
"그래?"
"그래…… 지금 내게는 더 급한 일이 있어. 그리고 그 급한 일에는
너도 관련되어 있고."
레이저는 두 팔을 벌리며 극적인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루손의 퉁명스러운 대답이었다.
"우리 친구, 누구? 이름을 말해야지."
레이저는 무릎이 꺾이는 기분 같은 것을 느꼈다.
"나크둠 말이야……"
"뭐! 나크둠이 살아난다고? 진짜?"
루손은 레이저가 기대하던 모습을 보여주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 모
습이 레이저가 기대를 버렸을 때 표현되었다는 점이지만. 그래서 레이
저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니, 그럴지도 모른다는 점이지. 나는 확인해야겠어. 거인도 살아
났고, 파하스도 살아났고, 그 후작이라는 사내는 죽자마자 살아났어.
나크둠도 살아날 수 있는 것 아닐까? 가서 확인해야겠어."
"그렇구나. 그래. 어서 가자!"
"간단해서 좋군…… 나도 너처럼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이 친구
야."
"응? 무슨 뜻이야?"
"혼잣말이야."
루손은 꺼림칙한 표정으로 레이저를 쏘아보더니 말했다.
"늙은 오크들이 말하길, 혼자서 중얼거리는 오크는 때려죽이거나 추
방해야 된다고 하던데……"
"……그건 정신나간 오크를 처리하는 원로들의 지혜인가 보군. 다행
스럽게도 난 미친 것이 아니니까 나를 때려죽이지는 않아도 돼."
"그래? 알았어."
루손은 그렇게 말하더니 곧 글레이브에 끈을 묶어 어깨에 걸쳤다. 그
리고는 기다리지도 않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루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이저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그 뒤
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생각에 잠겼다.
현상들. 현상의 배후에는 의미가 있는 이유가 있겠지. 죽은 자들의
부활의 원인은 뭘까. 첫번째 이유는 역시 콜리의 프리스트들의 의식.
그리고 파 L. 그라시엘. 파는 신스라이프가 된 것일까. 이 사태들은
도대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파가 필요조건인 것인가."
말을 꺼내던 레이저는 흠칫했지만 걸어가기 바빴던 루손은 레이저의
말을 듣지 못했다. 레이저는 소리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자
신의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크둠이 만일 부활하고, 그 부활의 원인이 파라면.
그렇다면 그 부활을 무효로 돌리지 않게 하기 위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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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최정식님. 감사합니다.
완연한 봄날이네요. 좀 더울 지경. 타자는 봄바람이 나버리고 싶습니
다. 으하하. (실상은? 눈꼽붙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담배 빡빡 피워대
며 달마조사와 비슷한 표정을 지은 채 모니터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고
있음. 봄바람이 잘도 나겠다… 으윽.)
번 호 : 17036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3-05 23:34
제 목 : [F/W] 시간의 장인.....4
Future Walker
8. 시간의 장인…………4.
"파를 죽여야 해."
할슈타일 후작은 으르릉거리고 있었다. 궤헤른은 후작에게 건네기 위
해 들고왔던 찻잔을 집어던지고 말았다.
"그만 좀 하세요! 그렇잖으면 이유를 설명해주시던가! 왜 그녀를 죽
여야 된다는 겁니까? 나는 후작님에게 도덕적인 비판을 가할 사람은
아닙니다. 나는 지금 설명을 요구할 뿐이란 말입니다!"
후작은 모포를 목까지 끌어올리며 궤헤른을 멀건히 바라보았다. 궤헤
른은 끈기있는 표정으로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 저 속에서 예지가 춤
추고 열정이 휘몰아쳤던 시절이 있었지. 그런데 지금의 저 눈은 뭐란
말인가. 후작의 몸은 모포 아래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후작의 입이
슬그머니 열렸다.
"파를 죽여야 해."
궤헤른은 넌덜머리를 내며 후작을 내버려두고는 모닥불가로 돌아갔
다. 자리에 앉으려던 궤헤른은 흠칫 하며 쳉을 보았다. 쳉은 묵묵히
후작을 쏘아보고 있었다. 궤헤른은 땅바닥에 앉으며 말했다.
"보다시피, 정신이 혼란스러우신 상태니만큼……"
"그렇게 보이는군요."
쳉은 그렇게 말하며 궤헤른에게 찻잔을 건네었다. 궤헤른은 한 모금
을 들이켰다. 하지만 차 맛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쳉의 바로 옆에
앉아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던 것
이다.
입장 곤란하군.
쳉은 찻잔을 든 손을 무릎에 걸치고는 궤헤른을 돌아보았다.
"당신의 주인이 저 지경이니,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어쩌
실 생각입니까."
"어쩌다니오?"
"우리는 파와 콜리의 프리스트들을 쫓아갈 겁니다. 나는 마법과 신학
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내가 보기엔 파는 신스라이프의 유령에게
그 몸을 뺏긴 것처럼 보이더군요. 되찾을 겁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어
쩔 생각입니까."
사무엘은 무서운 표정으로 쳉을 쏘아보다가 - 그는 아직 쳉에게 한
방 맞았던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숨쉬기조차 힘든 마
당이었으니까. - 말했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는 우리 마음대로다, 호위무사."
쳉은 고개를 조금 돌려 사무엘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무엘은 윗입술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어쩌다가 저 빌어먹을 도시에서 함께 탈출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네
가 우리 동료나 손님이 된 것은 아냐. 조심스럽게 말하는 법을 배우
지, 그래?"
"그거 불공평하군."
"뭐?"
"나는 지금 같이 탈출한 인연 때문에 미의 납치에 대한 앙갚음을 하
지 않고 있는데. 불공평하지 않아?"
사무엘은 곧장 일어섰다.
"이 놈이……!"
그러나 쳉은 사무엘의 입장을 우습게 만들어버렸다. 그것도 아무 행
동도 하지 않음으로써. 쳉은 사무엘이 일어나든 말든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투로 무릎에 얹어두었던 팔을 끌어당겼다. 쳉은 천천히
차를 마시기 시작했고, 사무엘은 기성을 지르며 그런 쳉을 걷어차려했
다. 그러나 사무엘은 곧 자신의 행동을 후회해야 되었다.
"으아아가악!"
사무엘은 정강이를 부여잡고 펄쩍펄쩍 뛰었다. 쳉은 다가오는 사무엘
의 발을 찻잔으로 막아내었던 것이다. 철제 찻잔에 부딪힌데다가 뜨거
운 찻물이 그의 다리를 지져대었다. 사무엘을 그 지경에 빠트린 쳉은
사무엘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재빨리 니크와 가이버를 바라보았다.
니크와 가이버 모두 험악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고 그러자 쳉
은 한손으로는 미를 가리며 다른 손은 장작 쪽으로 가져갔다. 그 때
궤헤른이 외쳤다.
"모두 앉아!"
"파를 죽여야 해!"
궤헤른의 고함소리에 기겁한 후작이 다시 비명처럼 외쳤다. 가이버는
싸울 맘이 없어져버렸고 니크는 처량한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궤헤른 역시 일그러진 얼굴로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다가 사무엘에게
고개를 돌렸다.
"적당히 하고 앉아라."
"궤헤른! 이 자식이……"
"앉으라니까."
사무엘은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궤헤른과 쳉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갑자기 저쪽으로 걸어가버렸다. 궤헤른은 그런 사무엘의 등을 잠깐 바
라보다가 쳉에게 말했다.
"당신과 함께 다니지는 못하겠군."
"피차일반이군요. 그런데, 당신네들은 어쩔 생각이신지?"
"왜 그럴 묻지요?"
"후작이 계속 반복하는 말 때문에. 당신들은 후작의 부하잖습니까.
파를 쫓아가 그녀를 죽일 겁니까?"
"……우리는 일단 좋은 의사나, 좋은 수도원 같은 곳을 찾아볼 생각
이오. 후작님께서는 정양할 필요가 있으니까. 솔직히 나로선 많은 것
이 혼란스럽고, 파와 콜리의 프리스트들을 추적해서 그들을 붙잡고 이
것이 모두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은 생각도 많소."
"그, 그건 절대 바, 받아들이지 않겠다. 궤헤른."
궤헤른과 쳉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할슈타일 후작은 모포를 머리
위까지 끌어올린 채 궤헤른을 쏘아보고 있었다. 궤헤른은 의아쩍은 표
정으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후작은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외쳤다.
"거, 거기 앉아있어! 다가오지마!"
반쯤 일어나던 궤헤른은 다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억장이 무너지
는 기분이었다.
"후작님…… 아무 짓도 하지 않습니다. 안심하시고 말씀하십시오."
후작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쳉과 궤헤른, 그리고 가이버와 니크를 흘
끔흘끔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조금씩 말이 새어나왔다.
"우, 우리는 파를, 파를 따라가야 한다. 그리고, 그리고 그녀를 죽여
야 한다. 아, 아니, 그녀가 아니다. 신스라이프를 죽여야 한다."
쳉의 눈살이 조금 찌푸려졌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쳉의
눈치를 살피던 궤헤른은 되도록 부드럽게 말하려 애쓰면서 후작에게
말했다.
"왜 그래야 되는지 설명해주십시오."
"며, 멸망은 완성의 귀결이기 때문이다. 끝나지, 끝나지 않은 것은,
와, 완성되지 않는다. 끝이 없는 노래는 미, 미완성이다. 끄, 끝맺음
이 없는 이야기는 미완성이다. 죽음이 없는, 없는 인생은 미완성이
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얼간아! 그래야 내가 죽을 수 있단 말이다!"
궤헤른은 거의 움직일 뻔했다. 주먹을 꽉 쥔 채 자신을 억누른 궤헤
른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후작님이 돌아가신다고요?"
"그래, 그래!"
"후작님께서는…… 신스라이프 때문에 부활하신 것입니까? 그래서 신
스라이프가 죽어야 후작님도 돌아가신다는 겁니까?"
"아냐."
궤헤른은 어리둥절해버렸다.
"아니라니오?"
그러나 후작은 궤헤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후작은 모포 속으
로 더욱 움츠러들 뿐이었다. 궤헤른은 답답했지만 후작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후작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궤헤른을 향한 것은 아
니었다.
"퓨, 퓨쳐 워커."
남자들의 눈이 모두 미에게 쏠렸다. 아달탄의 목을 쓸어내리고 있던
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미를 부르셨나요."
"너는, 너는 알고 있겠지."
"무엇을……?"
"네가 해, 했던 말, 이젠 이해해. 너의 행동, 이젠 이해해. 네가 설
명해줘. 말해줘."
미는 고개를 조금 갸웃한 채 후작을 바라보았다. 헐떡거리던 후작은
입술을 핥고나서 말했다.
"무, 무엇을 못견디지. 사람은 무엇을 못견디지."
"……심심한 것을 견딜 수 없죠."
뭔가 대단한 문답을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은 황당함을 느꼈다. 쳉은
그런 기대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저 물끄러미 미의 얼굴
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심심한 것, 지루한 것, 그, 그건 뭐지."
"변화가 없는 것이죠."
"너, 너는 어떻게 미래를 알 수 있지."
미는 잠시 대답을 멈춘 채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몇 번이나 다
시 말을 하려 애쓰다가 그냥 입을 다물고는 간절한 눈으로 미를 바라
보았다. 미는 조용히 대답했다.
"과거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제길! 좋아…… 시간은, 시간은 누가 만들지."
"유피넬과 헬카네스."
"유, 유피넬과 헬카네스 양자의 관심을 받는 것은 누구지."
"인간."
"왜지. 왜 그렇지."
"인간이 시간을 만들어내니까."
궤헤른의 턱이 홱 돌았다. 궤헤른은 먼저 미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빠르게 미에게 되돌아왔다.
후작은 이제 거의 더듬지 않았다. 반면 미는 점점 더 표정과 음색을
잃어갔다.
"너는 어떻게 미래를 알 수 있지."
"내가 미래를 만드니까."
쳉의 눈썹이 급격하게 꿈틀거렸다. '내가'라고? 미는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다. 후작은 이제 거의 원래의 날카로움을 되찾은 음색으로 말했
다.
"창조하는 자는 당연히 창조되기 전부터 그것이 무엇이 될지 알아야
겠지. 너는 미래를 만드니까 미래를 안다. 미래를 알기에 미래를 만들
수 있다. 설계도가 있어야 만드는 것처럼."
"예."
"파가 네게서 뺏아간 것은 뭐지."
"미래."
"그래서 너는 미래를 볼 수 없지. 뺏겼으니까."
"예."
"미래를 모르므로, 너는 이제 미래를 만들 수 없지."
"예."
"너는 누구지."
"나는 인간입니다."
모닥불 속에서 반쯤 타오르던 나뭇가지가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궤
헤른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할슈타일 후작은 모
포 속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그리고 미는 쳉의 어깨에 기댄 채 졸린
표정으로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는 쳉의 팔을 끌어안으며 젖은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으음…… 쳉. 미는 졸려. 그런데 미 이상한 기분이 들어."
쳉의 눈에 당혹이 떠올랐다. 쳉은 고개를 돌려 궤헤른을 바라보았고,
두 사람의 눈이 잠시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당신도 본 거요?
그렇소.
그럼, 그건 꿈이 아닙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쳉은 궤헤른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
리고는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피곤해서 그래. 턴빌에서 빠져나올 때 너무 힘들었으니까."
"음. 그게 아니고 미 꼭 뭔가…… 꿈 같은 걸 꾼 것 같아. 이상해.
술에 취하면 이런 기분일까? 흐음."
"그만 쉬어."
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쳉의 무릎 위에 머리를 척 얹었다. 가이버와
니크 등이 바라보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거기다가
미는 아달탄을 끌어당기며 중얼거렸다.
"아달탄, 미 이불."
아달탄은 왈왈거리는 대신 미 옆에 길게 드러누웠다. 미는 눈을 감은
채 방긋 웃고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쳉은 그런 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미의 숨소리가 한층 가지런해지자 겨우 고개를 들어 궤
헤른을 바라보았다.
궤헤른은 후작을 쳐다보고 있었다. 후작 역시 어느 새 온몸에 모포를
둘둘 감은 채 쓰러져있었다. 몸을 있는대로 웅크린, 참 보기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궤헤른은 후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를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궤헤른은 쳉을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자연히 낮아졌다.
'이봐요, 쳉. 분명히 봤소. 그렇죠?'
'그렇습니다. 그 대화, 전부 기억합니다.'
'그럼 무슨 뜻인지도 알겠소?'
'아니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나도 그렇소. 이거야 원. 이봐, 가이버, 니크. 자네들도 다 보고 들
었나?'
긍정을 뜻하는 대답이 두 사람에게서 돌아왔다. 궤헤른은 이맛살을
심하게 찌푸린 채 모닥불을 응시했다. 잠시 후 궤헤른은 힘들게 말했
다.
'나는 뭔가 불가지에 속하는 것을 본 것 같소. 잘못 본 것은 아니군.
다른 사람들도 모두 보았으니. 여기에는 짐작할 수 없는 어떤 힘의 개
입이 있는 것 같고, 그런 것에 대해 설명이나 해석을 붙이기는 꺼려지
는데.'
'그래요. 그런데……'
'뭐요, 쳉?'
쳉은 잠시 자신의 무릎 위에 누워있는 미를 내려다보았다.
'미가 인간이라면, 후작은 인간이 아닌 것일까요.'
'무슨 말이오?'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당신의 후작은.'
'그, 그렇소.'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그럼, 인간이 아니면 뭐란 말이오!'
'한 가지는 짐작이 됩니다.'
'그게 뭐요?'
'당신의 후작님은 죽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요.'
'그리고 나는 조금 전 당신의 후작이 인간이 아니라고 말했죠. 그렇
다면, 혹시 후작이 죽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것 아닐
까요?'
궤헤른은 한방 맞은 표정으로 쳉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쳉의 얼굴에
는 언제나와 똑같은 무표정함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멸망은 완성의 귀결. 완성되려면, 끝이 나야 한다는 말인 것 같은
데, 그럼 당신의 후작은 인간으로 완성되기 위해 부활을 거부하고 끝
장나기를 바라는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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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카다브라! 이 글을 보시는 모든 분들께 즐거운 꿈을.
좋은 밤 되세요.
번 호 : 17284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3-09 23:10
제 목 : [F/W] 시간의 장인.....5
Future Walker
8. 시간의 장인…………5.
치터리는 물끄러미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옆에 서있던 육전대원이 헛
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그럼, 우리는 쫓겨난 셈이군요, 프리스트님."
"그렇군요."
"그가 어디로 갈 생각인지 아십니까?"
"짐작합니다만."
육전대원은 잠시 기다렸다. 파도는 부두에 부딪혀 물방울을 튕겨올리
고 있었고 해원을 가로지르는 갈매기들은 기이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
다. 북부의 항구에 선 남부의 프리스트는 고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을 찾아가고 있을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운차이 발탄…… 그를 찾아가고 있겠지요."
육전대원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다른 두 명의 육전대원들은 호기심
으로 그들 일행을 바라보고 있는 일스 사람들의 무례한 시선들을 일일
이 되쏘아보고 있었다. 일스 사람들은 조금 놀랐고 심지어 불쾌하기까
지 했지만 수많은 이방인들과 먼 곳의 물품들이 오가는 이곳 항구에서
조금 낯선 모습의 방랑자 네 명에 대해 오랫동안 신경을 쓸 사람은 별
로 없었다.
치터리는 말했다.
"슬픈 그림자는 햇빛 아래 설 수 없겠지요."
항구 특유의 소란스러움이 아스라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입항하는 배
는 별로 없었다. 썰물이 빠져나가는 시간인지라 출항하는 배들만 있었
다. 남부인들에게는 좀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치터리는 몸을 조금 움
츠리며 말했다.
"슬픈 그림자는 가문의 이름을 계승할 수 없겠지요."
"예. 그는 외로운 사내입니다. 육지에는 그의 자리가 없습니다."
"용력은 이제리스 해협의 군주를 무릎 꿇리고 담력은 블루 드래곤을
맞상대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주지 않은 것은 가질 수 없는…… 우
리는 그를 무엇이라 불러야 될까요."
육전대원은 잠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수평선 위로 붉게 솟
아오른 배를 바라보았다. 일스의 뱃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게 만들
었던 붉은 서펜트의 문양이 멀리 수평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육전대원은 낮게 말했다.
"어쩌면, 그래서 그는 행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뜻인지?"
"꺼리낌없이 바다로 떠나갈 수 있으니까요."
치터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육전대원은 허리에 두 손을 얹은 채 멀어
져가는 레드 서펜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질 수 없는 이름은 버리고, 가질 수 있는 이름조차 버리고…… 자
유롭지 않습니까. 어쩌면 그는 발탄 가문이 살해된 것에 대해 분노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그를 얽어매는 사슬이 생겨난 것에 대해 분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
니다."
"사슬이라……."
"운차이가 없어지면, 발탄은 그가 이어야 합니다. 육지에 그의 자리
가 생겨나는 것이지요. 그의 아버지와도 만나야 하며, 그를 이상한 눈
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과도 만나야 합니다. 그 모든 것들에 앞서, 그
는 자신의 집과 부모를 떠나와야 되겠지요. 바다라 불리우는 자신의
집에서. 그림 오세니아라 불리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치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육전대원은 싱긋 웃었다.
"투정일까요?"
치터리 역시 웃어버렸다.
"정확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는 어린 아이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바다의 아이. 그러
나 부럽군요"
"어떤 이는 저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안 것으로 나는 만족합니다."
"예. 저도 저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니까요."
일스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델하파를 떠나오며 신차이는 마지막으로
항구를 돌아보았다. 일스는 자이펀과 바이서스의 전쟁에서 중립을 지
키고 있는 만큼, 육전대원들과 치터리는 저곳에서 머물다가 적당한 자
이펀행 배나 자이펀 상단과 함께 남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시도는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 항해의 목적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
다거나, 보상이 없는 항해로 끝나고 말 것 같다는 우려 때문은 아니었
다. 일스의 주점에서 난동을 부릴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 이시
도의 짜증의 주된 원인이었다.
"일스의 검객과 겨뤄봤다면, 사이록의 수평선의 완성에 많은 도움이
되었을 텐데."
"우우우우!"
레드 서펜트의 선원들은 폭풍 같은 야유를 퍼부으며 이시도를 돛대에
매달고 싶다는 표정을 지어보였고 그래서 열흘 쯤 투덜거리려고 작정
하고 있던 이시도는 반나절 정도만 투덜거렸다. 한손으로 돛줄을 쥔
채 델하파를 바라보던 신차이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내 아우와 만나거든 그와 겨뤄보게. 발탄에 전수되는 모든 검법을
대강 익힌 자일세."
"음? 잠깐만요, 선장님. 그거 소개의 말로는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발탄에 전수되는 모든 검법을 극한까지 수련한 무사일세. 라고 말씀하
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사실이 그러니 어쩔 수 없는데. 발탄 가문은 호구지책을 생각할 정
도로 몰락했는걸. 운차이도 어린 시절부터 유목민들과 대상들을 따라
다니느라 대강 익히는 정도로만 만족해야 했어."
"흐음. 풋내기를 상대로 목검을 휘두르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그렇직. 적어도 이시도 군 자네라면 육전대원을 상대로 한다던
가……"
주위의 선원들 사이에서 발랄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시도의 팍
구겨진 얼굴을 보며 신차이 역시 싱긋 웃었다.
"하하하. 그래도 만족할 걸세. 이보게, 이시도. 그래도 발탄이란 말
이야. 운차이와의 만남은, 자네에겐 몇 번의 주점에서의 난동보다 더
도움이 될 것을 약속할 수 있네."
"선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한시라도 빨리 만나보고 싶군요. 하지
만 항해 목적은 뭐로 합니까?"
"항해 목적? 이런, 이시도 군. 자유무역선이 좋은 이유가 뭔가. 아무
거나 사면 되지. 헤게모니아에서는 양모나 모피가 괜찮지. 신용장 받
아둔 것 몇 장 있기는 하지만 헤게모니아에서 통과될지 모르겠군. 뭐,
필요하면 수단은 언제든지 있는 법. 그래. 일단은 헤게모니아와의 상
로 개척 정도로 해두세나. 외해로 나왔군. 조타수! 진로 북서북. 돛을
내려라! 탄느완까지 신나게 달려보세나."
평소보다 훨씬 쾌활한 선장을 보며 이시도 역시 쾌활해졌다. 그리고
주위의 다른 선원들도 신나게 자신들의 위치로 달려갔다. 레드 서펜트
는 자유무역선이고, 정박한 항구에 상품이 없다면 신상품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일스의 앞바다로 나온 레드 서펜트는 북대양을 향해 나아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차이와 이시도는 장기판을 펼쳤다.
두 사람은 짐짓 무시무시한 얼굴로 전투의욕에 넘치는 대화들을 주고
받으며 장기에 임했다.
하지만 5분도 있지 않아 두 사람은 의자에 늘어진 채 느긋하게 하늘
을 바라보고 구름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생각날 때마다 한번씩
장기말을 움직이기는 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술잔을 들여다
보거나 빈 파이프를 채우는 일에 사용했다. 가끔 한 사람이 두 수를
두는 일도 발생했지만 알아보았을 때마다 말없이 한 수를 물렸다. 두
사람 모두 상대를 재촉하지 않았고, 자신도 재촉하지 않았다. 더듬더
듬 주고받던 대화의 말미에서, 이시도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배를 탄지 한 12년 되어갑니다."
"그런가. 나는 20여년 쯤 되는군."
"신기합니다. 배 위에서는 정말 시간이 잘 가는 것 같지 않습니까?
벌써 황혼입니다."
"뭔가를 하고 싶어할 필요가 없으니까."
"예?"
신차이는 다시 파이프를 채우고는 바닷바람으로부터 파이프를 보호하
며 주의깊게 불을 붙였다. 바다 사나이의 투박하고 거친 손이 그럴 때
는 한없이 섬세하게 움직였지만 주위에는 그런 섬세함을 감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신차이는 파이프를 피워물며 말했다.
"어떤 야심만만한 육상의 모험가가 세상의 끝까지 걷겠다는 서원을
세운다면, 그는 평생을 바쳐도 그 맹세를 완수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을 걸세. 하지만 자네가 이물에서 고물까지 걷겠다는 서원을 세우
면, 자네는 1분 안에 그 맹세를 지킬 수 있을 걸세. 달린다면 그보다
훨씬 적은 시간으로도 가능하겠지."
이시도는 빙긋 웃었다.
"우습잖은가? 바다는 육지보다 더 넓어. 하지만 우리는 그런 맹세를
하고 지킬 수도 있지."
"배잖습니까? 바다가 아니라."
"바로 그렇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자유로운 이유고. 우리는 배에
갇혀있지만 자유롭네."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육지의 모험가를 보세. 그는 땅에 갇혀 있네. 동의해주게. 우
리가 배에 갇혀있는 것처럼, 그는 세상에 갇혀있네. 하지만 그는 그를
가두고 있는 세상만 보네. 우리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세상 너머도 볼
수 있지만."
신차이는 장기판을 흘끔 바라보았다가 자신이 둘 차례가 아니라는 것
을 확인하고는 파이프를 들어올려 수평선을 가리켜보였다.
"보게. 눈만 돌리면 볼 수 있네. 이 배를 작은 육지라고 생각하게.
실제로 배는 하나의 우주니까. 우리는 이 우주를 벗어나면 죽게 되지.
바다에 빠져죽는 거야. 그런 점에서 육지의 모험가와 마찬가지지. 육
지의 모험가 역시 자신의 우주를 벗어날 도리가 없지.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를 눈으로 볼 수 있네. 육지의 모험가는 꿈에
도 볼 수 없는 것, 자신이 속한 세계를 뛰어넘는 무엇을 자연스럽게
볼 수 있다네."
신차이는 다시 파이프를 입으로 가져왔다. 담배연기가 바람에 흩어졌
다.
"이것은 육지의 모험가가 꿈꾸는 또다른 세계들, 즉 하늘나라, 천
국, 지옥도 괜찮군. 혹은 초차원, 이계, 이상향…… 이렇게 그들은 보
지도 못하면서 상상만 하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르지. 우리는 볼 수
있네. 만질 수도 있고. 빠질 수도 있지."
"하하하. 알 듯 모를 듯합니다. 그러니까, 땅개들도 우리들도 갇혀있
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땅개들의 감옥에는 창문이 없고, 우리들의 감
옥에는 사방이 모두 창문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래서 땅개들은 창문밖
의 세상을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들은 눈만 뜨면 볼 수 있다?"
"그렇네."
"그런데 말씀하신 것들이 시간이 잘 가는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신차이는 팔짱을 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드래곤을 움직여야 될 것
같은데. 하지만 저 구름이 날아들어와 달을 가리면 드래곤의 움직임이
상당히 제한될 테니…… 바람을 먼저 보내는 편이 나을까. 하지만 그
건 너무 뻔한 수. 어떻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의 시간을 나눌 필요를 적게 느끼지."
"예?"
"예로써 설명하지. 모하메드는 조각을 좋아하지. 직접 손을 놀리는
것도 좋아하고 감상하는 것도 좋아하지. 하지만 모하메드가 카레한 탑
3층의 인간의 층에 있다면, 그는 조각을 할까, 감상을 할까."
이시도는 잠시 인간의 층에 있는 그 무수한 조각상들을 떠올렸다.
"감상하겠지요?"
"그렇겠지."
"그런데요?"
"우리는, 육지의 형제들처럼 그들이 속한 세계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의미를 만들어내기 위해 무수한 사고(事故)와 사고(思考)를 벌이는 짓
을 답습할 필요가 없단 말일세. 장군이네."
이시도는 신음을 토하지도, 한숨을 내쉬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
다. 다만 손으론 그의 별을 움직이며 눈으론 돛대 꼭대기를 올려다보
았다.
"예. 그들은 의미가 있다고, 게다가 주의깊게 찾으면 찾을 수도 있다
고 믿고 있긴 하지요. 천치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하지만 그것과 시
간이 잘 가는 것과의 관계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장군입니다."
신차이는 신음을 토하고, 한숨을 내쉬고, 억눌린 비명을 질렀다. "우
으윽!" 이시도의 태양을 겨냥하여 장기판을 멋지게 가로지른 신차이의
드래곤은 어디선가 날아온 이시도의 별에 맞아 죽었다. 더군다나 이시
도의 별은 드래곤이 막고 있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신차이의 태양을
압박하게 되었다. 신차이는 굴욕적인 퇴각을 시도했으나 옆으로 물러
난 태양은 이시도의 바람과 마주치게 되었다.
"낭패로군. 우리는 있지도 않은 의미를 찾아헤매기 위해 시간의 길을
계속 헤맬 필요가 없다는 말일세. 달을 내줘야 하나."
"시간의 길을 헤맨다라……"
"길은, 그 위를 걷는 자에게만 길게 느껴지네. 길 위를 걷지 않는 사
람에게 그것은 아무 데도 가지 않는, 항상 그곳에 있는 땅의 한 모습
일 뿐이지."
"그런가요. 장군입니다. 저녁 식사가 준비된 모양인데요."
신차이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며 장기판을 쏘아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 모르지만, 장기판 한 구석에서 느닷없이
중앙으로 진출한 이시도의 마법사가 잔인하게 웃으며 신차이의 태양을
향해 지팡이를 내밀고 있었다.
"이건 믿을 수 없어! 어떻게 마법사가 이렇게 빠르게……"
"마법사가 믿을 수 있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셨습니까?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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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타자입니다. 이두박근 단련하시는 분이 많군요. 돌도 자연의 소
중한 재산입니다. 아껴 던집시다. 으으윽.
드래곤 라자의 애니화에 대해 많은 우려를 보내주신 여러분들께 진심
으로 감사드립니다. 속마음으로는 범작만 나와줘도 만족하겠다고 생각
하고 있습니다만. 하하하. 범작이라도 되어준다면 언젠가 나와줄 수작
의 밑거름이 될 수 있겠지요. 수작은 많은 범작들이 있어야 나오는 거
니까.
번 호 : 17285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3-09 23:11
제 목 : [F/W] 시간의 장인.....6
Future Walker
8. 시간의 장인…………6.
"마법사란 믿을 수가 없어."
거인은 점잖게 말했고 운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믿을 수 없지."
그러나 거인이 말하는 마법사와 운차이가 말하는 마법사는 서로 다른
사람이었다. 거인은 아프나이델을 향해 말하고 있었지만 험악한 소갈
머리의 소유자 운차이는 거인의 말에 동조하는 척하며 어느샌가 사라
져버린 레이저에 대해 빈정거리고 있었다. 네리아만이 까르륵 웃었을
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운차이를 향해 혀를 차보였다. 아프나이델 역
시 등 뒤에서 중얼거리는 운차이를 무시하며 다시 한번 거인을 향해
외쳤다.
"믿어야 됩니다! 당신은 정말 죽은 거란 말입니다. 부활한 거라고요.
생각해보세요. 당신의 눈, 그리고 오른쪽 다리. 누가 그랬습니까?"
거인은 앉은 자리에서 주먹을 들어 성벽을 후려쳤다. 꽈가강! 성벽이
박살나며 거대한 돌과 흙더미가 아래로 무너져내렸지만 다행히도 인명
피해는 없었다. 턴빌 경비대원들은 일행들이 거인을 붙잡아놓는 동안
시민들을 모두 안전하게 대피시킨 후였다. 거인은 우레 같은 목소리로
고함질렀다.
"몰라서 묻느냐!"
아프나이델은 호흡을 여러번 들이킨 다음에 말했다.
"그, 그럼 기억하시죠? 당신이…… 예?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거인은 멍한 얼굴이 되었다. 하나밖에 없는 거인의 눈은 일행을 내려
다보고 있었지만 실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촛점은 전혀 맞지 않았
다.
턴빌 경비대원들과 데커드 시장은 일행들의 등 뒤 멀찌감치에서 각자
의 무기를 쥔 채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아프나이델과 거인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표면상의 대책, 즉 일행들의
교섭이 원만하지 못할 경우 거인을 매우 아프게 만들어준다는 대책을
심도있게 고려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일행들도 그들이 무조건 달
아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범람하는 기억의 파도 속에서 표류하던 거인이 불확실한 목소리로 웅
얼거렸다.
"뭐…… 나는 쓰러졌었고…… 음. 하지만 다시 일어났을 때 놈들이
없었다. 기절했던 것일까?"
"기절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죽었던 거란 말입니다."
거인은 자신의 가슴을 꽝꽝 때렸다.
"이놈! 아무리 거인이라도 죽은 자가 이렇게 움직일 수 있단 말이냐!
그럼 나는 뭐냐!"
"당신은 어떤 인간의 이상한 마법의 부작용으로 깨어난 것입니다. 적
어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됩니다."
"마법? 마법이라고?"
거인은 다시 멍한 표정으로 아프나이델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거인
의 혼란은 길지 않았다.
"어쨌건 나는 지금 살아있다. 그리고 살아있는 나는 루트에리노를 응
징하리라!"
아프나이델은 욕설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
다.
"뭐, 이해는 합니다만 불가능한 소망이십니다. 대왕은 벌써 300년 전
에 돌아가셨으니까요."
"뭐야?"
"믿어주십시오. 당신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3세기만에 다시 부활하신
거란 말입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어떻게 믿으란 말이냐?"
그 때 제레인트가 앞으로 나섰다. 제레인트는 거인이 자신을 잘 볼
수 있도록 두 팔을 활짝 펼치고 말했다.
제레인트는 말문이 막힌다는 표정으로 거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말들이 흘러나왔다.
"저거…… 거인 맞나?"
"엘프는 어떻습니까."
이루릴의 음악적인 목소리가 들려오자 모든 사람들은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거인도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이루릴을 내려다보았다.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 맹세하겠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거인이시여.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이신 거인께서 그리
도 의심하시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만."
엑셀핸드는 잠시 고개를 돌려 무너진 성벽과 폐허가 되다시피한 건물
들, 거인의 발자국으로 엉망이 된 대로 등을 훑어보았다. "온화하다
고?" 그러나 이루릴은 조용히 웃었다.
"거인께서는 이미 여러번에 걸쳐 많은 이들에게 속임을 당하셨습니
다. 하지만 저희들이 말을 걸자 또다시 신뢰를 가지고 귀를 열어주시
는군요. 거인께서 열린 마음을 가지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인은 이제 얼굴 전체로 웃었고 그 얼굴을 바라보던 모든 이들 역시
웃을 수 있게 되었다. - 한 사람만 빼고. 운차이는 싸늘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건 열린 마음이 아니라 멍청하다고 하는 거지." 발끈
한 네리아는 창대로 운차이의 엉덩이를 후려쳤고 운차이는 네리아를
향해 눈을 부라렸지만 네리아는 딴청을 피웠다.
"당신의 머리가 아니라 당신의 가슴에 질문하겠습니다. 제 말을 믿어
주실 수 있습니까?"
"……저 마법사의 말이 진실이라고 말할 건가?"
"그렇습니다."
"믿을 수밖에 없군. 그렇다면 루트에리노는 존재하지 않는 거냐?"
이루릴은 아프나이델을 돌아보았고 아프나이델은 황급히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복수를 포기해야 된다는 말이군…… 그 놈의 자손은 어디 있느냐!"
안심하고 있던 에델린은 기겁한 나머지 입술을 깨물었고, 그녀의 우
람한 송곳니는 입술을 거의 관통할 뻔했다. 루트에리노 대왕의 자손이
면 바이서스의 왕가다. 만일 거인이 그 사실을 안다면 바이서스는 고
대왕국 어쩌고 하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될지도 모른다. 아프나이델은
이루릴이 대답하기에 앞서 먼저 말해야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이상
한 어투로 외치고 말았다.
"그 놈의 자손 말입니까?"
거인마저도 황당한 표정으로 아프나이델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실
수를 깨닫지 못하고 눈을 희번덕거리는 아프나이델을 향해 거인은 얼
떨떨하게 질문했다.
"그……렇다."
"저, 대왕의 자손을 어쩌시려는 겁니까?"
"복수다."
"왜, 왜입니까? 그들은 루트에리노가 아닙니다. 루트에리노 대왕에
대해서 복수하겠다면, 저는 찬성하지는 않겠지만 이해할 수는 있습니
다. 하지만 아무 죄도 없는 자손들에게 왜……"
"이노옴! 닥쳐라!"
거인은 고함을 내지르며 땅을 꽝 내리쳤다. 아프나이델은 귀를 틀어
막으며 무릎을 꿇었고 조금 떨어져있던 다른 이들도 충격음과 땅의 울
림 때문에 비틀거렸다.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아프나이델
을 향해 거인은 추상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너희놈들이 그렇게 말한단 말이더냐! 너희 인간들이!"
"예?"
"어떻게 인간이 자손에게 죄없다 말할 수 있느냐! 거인도 아니고, 드
래곤도 아니고, 엘프도 아니고, 드워프도 아닌, 너희 인간들이!"
제레인트는 황당한 표정으로 거인을 올려다보았다.
"저, 무슨 말씀입니까? 저희 인간들은 선조의 죄가 자손에게도 이어
진다는 말씀입니까?"
"당연하지! 간악한 놈들. 자신에게 이로운 것만 이어받고 자신에게
해로운 것은 내몰라라 하겠다는 거냐? 너희들은 선조의 모든 것을 이
어받으며 죄만은 이어받지 않겠다는 거냐? 멍청한 주제에 욕심만 사나
운 종족 같으니. 뭐라고? 죄 없는 자손? 너희들이 선조의 죄를 상속받
기를 거부한다면, 선조가 남긴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그와 같아
야 하지 않느냐!"
"다른…… 것들……"
"네놈들의 선조가 찾아낸 알량한 지식! 지혜! 깎아낸 산과 개간된 들
판! 너희들의 배를 불려줄 그런 것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받으면서, 선
조의 죄는 책임지지 않겠다는 거냐!"
거인이 땅을 내리치자마자 운차이의 등 뒤로 숨었던 네리아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상당히 말이 되는 거 같다……"
그녀의 속삭임은 운차이의 귀에만 들어왔다. 운차이는 입매를 일그러
뜨리며 거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어머니의 허물
을 이어받은 그의 사촌형을 떠올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저 거인의
말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신차이는 죄가 함께 하는 라이브스
의 이름을 상속받기를 거부함과 동시에 그를 보호할 발탄의 이름에 대
한 상속까지도 포기하고 바다로 떠났던 것일까?
제레인트는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아."
거인은 제레인트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제레인트는 거인이 아닌 다
른 곳을 보고 있었다. 일행들은 제레인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
보았다.
무너진 벽들과 아직껏 군데군데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두 명의 그
림자가 나타났다. 운차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크게 떴다. 크고
작은 두 명의 그림자. 네리아는 거인의 눈치를 살피며 그란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란. 어서 와요."
일행과 잠시 헤어져 숨겨두었던 사람을 데리러 갔던 그란은 쓰게 웃
으며 대답했다.
"솔직함에 의지하여 말하자면, 그곳으로의 이동은 고려하기 싫군. 넌
어때?"
"마, 마찬가지에요."
그란 하슬러의 왼쪽 조금 뒤에서 걷고 있던 돌맨 할슈타일은 질린 표
정으로 거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거인은 의아쩍은 표정으로 그란과
돌맨을 바라보았다. 역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제레인트는 환하게 웃으
며 말했다.
"선조의 죄와 상관없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프리스트?"
"거인이여. 당신이 저 광경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기를. 저 남자는
저 소년의 양부와 피로써 피를 씻기를 바라는 원수지간이지요. 저 소
년의 아버지는 저 남자에게 못할 짓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저 남자
는 저 소년을 데리고 왔습니다. 왜 그런지 물어볼까요? 그란. 왜 돌맨
을 데려왔죠?"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말해보세요."
"……후작의 부재로 인하여 미아가 되었으니까."
"예. 보호자가 없는 소년을 이렇게 낯선 도시에, 게다가 커다란 재난
을 당한 도시에 내버려둘 수 없으니까 데려오신 거죠?"
그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돌맨은 잠시 그란을 바라보다가 고
개를 숙였다. 제레인트는 눈을 감은 채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인이여. 당신 말대로 선조의 죄는 우리에게 이어질 지도 모르겠습
니다. 말씀하신대로 우리는 선조의 유산을 취사선택해서 받을 수는 없
겠지요. 하지만 그 때문에 우리는 이미 사라진 선조를 용서하는 대신
그 후손을 용서할 수도 있을 겁니다. 거인이여. 당신은 루트에리노를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이미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대신
그 후손을 용서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거인은 그냥 말해도 깊이 울리는 그 목소리로 제레인트에게 물었다.
"내가 왜 그래야 되나?"
"용서는 가장 큰 복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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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로냐프강의 출판을 축하드립니다. 래픽님.
텔레비젼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리얼리티를 제공한다. 따라서
소설은 리얼리티를 지향할 필요가 없다. - 피터 애크로이드. (왜 썼냐
고요? 글쎄요.)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7418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3-13 01:00
제 목 : [F/W] 시간의 장인.....7
Future Walker
8. 시간의 장인…………7.
드라일 산맥 중턱에 있는 아름다운 호수 큐리담에 저녁이 찾아들고
있었다. 마쉬랜드에 소재한 77개의 호수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호수다.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새들을 노려 그날의 마지막 사냥을 시
도하려는지 매 한 마리가 붉은 하늘을 빙빙 돌고 있었다. 매끄럽게 하
늘을 활공하던 매는 이윽고 박새 한 마리를 발견했다. 매는 소리없이
허공을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아직 자신의 위험을 깨닫지 못한 박새는
여유있게 날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새들이 그렇듯이 머리 뒤까지 볼
수 있는 넓은 시계를 가진 박새는 곧 자신의 뒤쪽 높은 곳에서 날아드
는 매를 발견했다. 급속한 반전비행. 박새는 본능적으로 아래로 날기
시작했다. 나무 사이로 파고들면 매는 지 못한다. 하지만 매의 치명
적인 속도는 이미 박새의 지척거리까지 매를 이르게 했다. 박새는 마
지막 수단으로 미친듯이 빙글빙글 날았다. 그 때, 매는 발톱을 내밀었
다.
순식간에 큐리담 호수 표면에 박새의 깃털이 흩뿌려졌다.
박새는 더 이상 빠르게 날 수 없게 되었고, 매의 두 번째 공격은 공
격이라기보다는 사냥감을 집어드는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추락하는 듯
한 비행을 하는 박새를 간단히 잡아올린 매는 드라일 산맥 어딘가의
절벽 틈에 있을 자신의 보금자리를 향해 일몰의 미명을 가로질러 날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던 눈동자가 있었다. 매가 붉은 석
양 속으로 사라져 버리자, 그 눈동자의 주인은 눈을 아래로 내려 땅을
보았다. 호수 주변의 넓은 초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기
이하게도 기침 소리 하나도 나지 않았다. 오직 풀을 밟는 소리만이 간
혹 들릴 뿐이었다.
그 때 갑자기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호수 주변에 앉아 있거
나 서 있던 사람들 모두가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돌아보았
다.
숲을 헤치며 달려온 기수는 빠른 동작으로 말에서 내렸다. 그는 아무
런 소리 없이 곧장 매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잘 훈련된 말은 제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한 번 본 다음, 지금까지의 고요함을 깨기 싫다는 듯이 조용히
일어나 기수를 따라 걸어왔다.
매를 바라보던 사람은 나무 아래에 털가죽 하나를 깔고서 정좌하여
있었다. 재빨리 달려온 기수는 무릎을 꿇으면서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신스라이프."
신스라이프 - 현재는 작은 처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수를 따라 걸어왔던 사람들은 별다른 말 없이 기
수와 신스라이프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앉았다. 사나이들이 모두 앉
자 신스라이프는 여성의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됐지?"
기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에게는 아직도 상대의 모습을 똑바로 바
라볼 배짱이 없었다. 작은 여자의 모습을 하고,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
리로 말하지만, 그 정체는 66년의 죽음을 뛰어넘은 시체인 것이다. 그
래서 기수는 땅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스빌과 인근 산촌을 다 조사해보았습니다만 시원찮은 대답 뿐입니
다. 드라일 산맥은 1년 중 요즘이 가장 불안한 때라고 합니다. 날씨가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고 녹기 시작한 눈들이 눈사태를 일으킬 가능
성도 크다고 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드라일 산맥을 넘겠다는 산사
나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신스라이프 - 파는 언짢은 표정으로 기수를 바라보았다.
"물렁한 놈들. 그래, 헤게모니아 최고의 산사나이들을 배출해왔다는
고스빌에서 저까짓 산봉우리 하나를 넘을 자가 없단 말이더냐."
몰려앉아있던 남자들 중에서 쥬블킨이 상체를 앞으로 조금 내밀며 말
했다.
"신스라이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돌려 쥬블킨을 바라보았다. 쥬블킨은 여인의 눈
속에서 빛나는 남자의 눈빛에 괴리감을 느끼며 웅얼거렸다.
"꼭 저 산을 넘어야 될 필요가 뭔지요? 북해로 가시겠다면 탄느완으
로 가서 배를 타고 가시는 것이 훨씬 안전합니다. 왜 목숨이 위험할지
도 모르는 저 산을 넘어야 되는 겁니까. 그렇게도 급한 이유가 뭔지
요?"
"내게 설명을 요구하는 거냐?"
"……신스라이프. 저희들은 모두 당신만 믿고 가족도, 고향도, 평생
동안 일구어온 모든 것들도 다 버리고 달려온 자들입니다. 이런 저희
들이 최소한의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 부당합니까?"
"부당하냐고 물었나? 대답해주겠다. 당연히 부당하다. 어처구니없는
요구다."
쥬블킨의 얼굴이 굳었다. 다른 사내들의 얼굴도 모두 딱딱하게 바뀌
었고 주위의 고요함은 이제 묘한 질량감을 띄게 되었다. 그 묵직한 고
요 속에서 신스라이프는 말했다.
"너희들이 평생 동안 일궈온 것이라고 했느냐? 무엄한 놈들. 그 전에
너희들이 무엇 때문에 태어난 건지 생각해보아라. 너희들은 너희들의
아비들이 자기 스스로는 바칠 수 없는 봉사를 위탁시키기 위해 준비해
둔 자들 아니더냐? 너희 아비들이 나에게 봉사하라고 만들어낸 자들이
너희 아니냐?"
사내들의 얼굴에 이제 증오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전직 의사, 전직 푸줏간 주인, 전직 농부, 전직 대장장이들은
평생의 노고가 깡그리 무시되는 수모를 가만히 견디고 있었다. 그들의
첫사랑, 그들의 작업의 즐거움, 그들의 결혼식날의 떠들썩함, 태어나
자라나며, 그들 혼자서라면 결코 느낄 수 없었을 기쁨과 슬픔을 주던
그들의 자식들…… 사내들의 어깨가 힘없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어깨를 힘껏 들어올리며 외쳤다.
"크, 큰아버님은 여기 이 사람들 때문에 부활했습니다! 감사하게 여
길 줄 알아야 합니다!"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곳에는 그의 조카 발레드 신스라
이프가 얼굴을 떨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턴빌 탈주의 날, 발레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들을 따라왔었다. 어쩌면 그는 신스라이프 유가족
의 책임자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이들을 따라온 것일 수도 있고, 죽
은 아들의 추억에 정신병자가 되다시피한 그의 늙은 아내로부터 도망
친 것일 수도 있다. 그렇잖으면 그의 재산이 줄어드는 것과 비례하여
점점 그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정부의 모습으로부터 도망친 것일 수도
있고. 어쨌든 발레드는 신스라이프와 콜리의 프리스트들을 따라 이곳
까지 달려왔고, 지금 분노하고 있었다. 신스라이프는 눈매를 찡그렸
다.
"뭐라고?"
"이, 이 사람들은 평생 동안 자신을 희생하며 당신만을 위해 살아왔
어요. 나는 모, 몰랐지만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압니다.
같은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사람들이니까요. 이 사람 중 몇 명과
는 오랫동안, 수십년 동안 친교를 가져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사람들이 콜리의 프리스트일 거라고는 죽어도 짐작하지 못했습
니다. 그들이 얼마나 자신을 희생했는지 알 수 있잖습니까! 이들을 무
시하지 마십시오. 그래서는 안됩니다."
"걸을 수 있게 해준다는 이유로 신발을 공경하란 말이냐?"
"이 사람들은 다, 당신의 도구가 아닙니다!"
"천만에. 내 도구야. 그것도 시원찮은 도구지. 이 멍청한 놈들 때문
에 나는 하마터면 부활하지 못할 뻔했다. 이 놈들의 애비들이 살아있
었다면 멍청한 자식들의 모습에 피를 토할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소유물이 아니오!"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다른 프리스트들도 놀란 눈
으로 고함을 지른 프리스트를 바라보았다. 턴빌에서 작은 잡화점을 하
고 있던 도르네이였다. 도르네이는 벌겋게 된 얼굴로 신스라이프를 바
라보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들과 우리는 별개요! 우리는 아버지들의 뜻을 존중했지
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들의 뜻이기 때문에 당신을 부활시킨 것은
아니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그 일을 한 거요. 당신은 모릅니다.
제길, 죽었다가 느닷없이 일어난 당신은 우리들의 일생을 모른단 말이
오!"
신스라이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르네이를 쏘아보았다. 도르네이
는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당신은 척살당하는 희생자들을 보지 못했소. 우리는 봤소! 몇년에
한번씩, 마치 즐거운 잔치나 되는 것처럼 그것을 보러 갔소. 아파서
비명을 지르는 희생자들의 몸 위로 떨어지는 몽둥이를 보러 갔소. 피
가 튀고 살이 뭉그러지고 뼈가 부서지는 모습을 보러 갔단 말이오! 그
런 날 저녁이면 우리들은 방에 틀어박힌 채 울었소. 모여서 서로를 위
로해줄 수도 없었지. 이 빌어먹을 정체가 탄로날지도 모르니까! 그래
서 우리들은 각자의 골방에 틀어박혀서 혼자 슬퍼해야 했소. 도대체,
도대체 왜 저 사람들이 죽어야 한 건지 알 수 없었소! 우리는 오로지
당신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소. 당신이, 당신이 설명해주기를 바랐소.
그래요, 어리석은 책임회피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단 말이오!"
도르네이는 숨을 가누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콜리의 프리스트
들은 도르네이의 외침을 들으며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의 차가운 슬픔
을 느꼈다. 신스라이프는 끝까지 말해보라는 듯이 묵묵히 도르네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런데 당신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았소. 아
니, 설명까지도 바라지 않소. 한 마디만 해줬어도 되었을 거요. 그것
은 의미있는 일이었다고, 옳은 일이 아닐지 몰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었다고, 너희들의 슬픔을 이해한다고! 그렇게 한 마디만 해주셨어도
되었을 거요. 어떻게 말하더라도 그것이 옳은 일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당신은, 아니, 당신이 여덟 명의 목숨을 앗은 것을 인정
하고, 여덟 명의 생명만큼이나 고귀하고 의미있는 일에 매진할 거라고
맹세해준다면, 가식에 불과할 뿐이라도 그렇게 말해준다면!"
매일 의자에 앉아서 돈만 세었기 때문이야. 도르네이는 이마에 흐르
는 땀을 내버려 둔 채 어깨로 숨을 쉬며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매
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의자에 앉아서 장사만 하던 늙은이에게 이런 강
행군이나 이런 연설은 너무 어려운 일이야. 도르네이는 왜소해 보이지
않기 위해 어깨를 펴려 했지만 그의 어깨는 자꾸 무력하게 움츠러들
뿐이었다.
신스라이프는 헐떡거리는 도르네이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나?"
도르네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스라이프는 마주 고개를 끄덕여주고
는 말했다.
"그럼 앉게."
"대답을 주시오! 그렇잖으면 앉을 수 없소."
"대답? 아니, 그전에. 앉지 않겠다면 어쩌겠다는 말이지?"
"떠날 거요."
"떠난다고?"
도르네이는 로드를 힘주어 짚으며 말했다.
"이미 평생을 탕진했지만, 그래도 새출발할 시간은 남아있을지 모릅
니다. 자비로운 콜리에게 죄를 빌며 보낼 시간은 오히려 충분할지도
모르지요. 하나뿐인 인생을 이렇게 무의미하게 보낸 것이 참을 수 없
이 허무하지만, 자초한 일이니만큼 당신을 원망하지는 않겠소. 이 모
든 것이 콜리의 뜻이리라 믿고 고향의 가족들에게 돌아가겠소."
신스라이프는 은은한 눈빛으로 도르네이를 바라보았다. 문득, 도르네
이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저런 젊은 처녀가 자신을 이
렇게 바라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적
이 있기는 있었나? 도르네이는 확신할 수 없었다. 신스라이프는 조용
히 말했다.
"누구 맘대로?"
도르네이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신스라이
프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도르네이를 똑바로 바라본 채
일어나서는 그대로 걸어왔다. 문득 불안감을 느낀 도르네이는 두 손으
로 로드를 쥐며 걸어오는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신스라이프는 걸으며 말했다.
"돌아가겠다고? 네가? 누가 보내준다고 했나."
"당신은 나를 강제할 수……"
그 순간 신스라이프의 손이 갑자기 앞으로 뻗어나왔다. 도르네이는
엉겁결에 로드를 들어올려 막으려했지만 신스라이프는 바로 그 로드를
노리고 있었기에 도르네이는 신스라이프의 손에 로드를 건네준 꼴이
되었다. 신스라이프의 오른손이 로드를 움켜쥐자 깜짝 놀란 도르네이
는 재빨리 로드를 끌어당겼다. 하지만 신스라이프의 오른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르네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뚱뚱한 편인 도르네이가
조그만 처녀에게서 로드를 빼앗으려고 낑낑거리는 모습은 코믹하게까
지 보였지만 주위의 아무도 웃을 생각은 못했다. 신스라이프는 도르네
이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내가 너를 강제할 수 없다고?"
"이, 이거 놔! 물론, 당신은, 나를 강제할 수 없소! 뭐란 말이오? 당
신이 뭔데 나를 강제한단 말이오? 오히려 내, 내가 당신을 강제해야
합당하오!"
"어째서?"
도르네이는 로드를 놓았다. 화급하게 뒤로 물러난 도르네이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 아무 것도 지불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내 모든 것을
지불했어. 당신을 부활시키기 위해 내 평생을 지불했어! 당신은 그냥
누워있다가 일어났을 뿐이야. 당신은……"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줬지."
"뭐요?"
"네가 너의 평생을 무엇인가에 쾌척할 수 있게 해줬지. 내가 너를 만
든 셈이야. 네 몸뚱아리는 네 부모가 만들었지만, 너 자신은 내가 만
들었다."
"……난 그것을 원망하오! 당신이 준 것을 저주하오. 당신을 저주하
오!"
"뭘 원하나."
도르네이는 씩씩거리며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신스라이프는 들고
있던 로드를 빙글 돌려 땅에 세우며 다시 말했다.
"뭘 원하나."
"콜리 앞에 떳떳하기를 원하오. 모든 이 앞에 떳떳하기를 원하오. 제
길, 나 자신에게 떳떳하길 원하오!"
"언제까지?"
"예?"
"언제까지 떳떳할 수 있으면 좋겠나. 10년이면 되겠나? 한 달? 사흘
쯤 떳떳하면 되겠나? 오늘 저녁까지만 떳떳하면 되겠나?"
"무슨 말이오? 떳떳하다는 것은 언제까지나 그렇다는……"
"웃기지마."
도르네이는 울컥하는 표정으로 신스라이프를 쏘아보았다. 신스라이프
는 세워들고 있던 로드를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말했다.
"내가 죽었을 때, 만일 하루만에 부활했다면 나는 떳떳했을 것이다.
마음씨 착한 자들은 내 행운을 기뻐해줬을지도 모르지. 내가 1년만에
부활했다면 사람들은 조금 이상한 눈으로 나를 봤을 것이다. 66년만에
부활한 나는 이제 모든 이들에게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불경한 늙은
이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신스라이프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한손으로 로드를 들고는
그 무게를 가늠하듯 위아래로 까딱거리며 말했다.
"어떤 원한이 한 사나이로 하여금 원수를 죽이게 만들었을 때, 그 사
나이는 그 순간 떳떳하며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1년
쯤 지나면 사나이는 그것이 최선의 길이었는지를 의심할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나 원수의 자손이 찾아와서 사나이의 자식을 죽이기라도 한다
면 사나이는 회한을 느낄 것이다. 젊은 날의 혈기 때문에 자식을 잃은
사내는 눈물도 흘리지 못할 것이다."
도르네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항변하려 했다. 그러나 그 때 도르네
이는 신스라이프가 쥔 로드의 끝이 어느새 자신의 가슴을 똑바로 겨냥
한 채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갑자기 공포가 다가왔다. 도
르네이는 입을 벌린 채 꺽꺽거리며 로드의 끝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신스라이프는 자신이 들고 있는 로드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
는 것처럼 한가롭게 말했다.
"너도 마찬가지다."
도르네이의 눈은 이제 더이상 커질 수 없을만큼 커진 채 충혈되어 있
었다. 신스라이프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턴빌 탈주의 그 날, 너는 자랑스럽고 떳떳했을 것이다. 하지만 머나
먼 이곳까지 고생스럽게 걸어오고나자 너의 마음 속에 들끓던 떳떳함
은 차갑게 식었지. 불평하고, 짜증을 내며, 다른 의미를 찾게 되지.
이제 그 날의 떳떳함과 그 날의 의미는 더이상 너에게 의미있게 다가
오지 못하니까. 그러나 새로 찾아낸 의미가 있고, 그것이 너를 만족시
키더라도 그것은 시간의 흐름 끝에서 사그라들 것이라는 점에서 똑같
은 것이다."
신스라이프는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의미는 스스로 붕궤되지 않아. 시간이 의미를 바뀌게 할 뿐이다. 첫
사랑의 희열이 결혼 후 권태기의 짜증으로 바뀌는 것은 뭐지? 상대에
대해 더 잘 알았기 때문에? 천만에. 옛날의 의미는 그 때의 의미일 뿐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은 얼마 가지 않아 사라질 운명의 새 의미
를 찾아내어야 한다."
신스라이프의 말 끝에서, 그의 손이 갑자기 움직였다.
사내들의 틈에서 비명이 솟아올랐다. "으아악! 도르네이!" 신스라이
프는 도르네이의 가슴을 찔렀고, 갈비뼈가 나뉘어지는 지점을 정확하
게 찌른 로드는 놀랍게도 도르네이의 복부를 꿰뚫어 선혈과 함께 등
뒤로 튀어나왔다. 갑작스럽게 당한 재난에 도르네이는 꼬치에 꿰인 고
깃덩이처럼 된 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손이 로드를 빼내려는 듯이 힘
없이 움직였지만 그것은 안타까운 꿈틀거림으로 끝났다. 도르네이는
자신의 손을 들어올려 바라보았다. 그의 손은 붉게 물들어있었다.
"피……."
신스라이프는 로드를 놓았다. 잠시 비틀거리던 도르네이는 그의 몸에
서 흘러나온 피웅덩이 속으로 쓰러졌다. 털썩. 핏방울이 튀어올라 신
스라이프의 가슴에 묻었다. 신스라이프는 물끄러미 도르네이의 시체
를 내려다보았다.
"이, 이 무슨 악독한!"
발레드는 비명처럼 외쳤다. 그리고 다른 콜리의 프리스트들도 흥분하
여 일어섰다. 쥬블킨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콜
리의 프리스트들은 어느 새 각자의 무기를 꼬나든 채 신스라이프를 노
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서는 발레드가 기성을 지르고 있었
다.
"무슨 짓입니까!"
신스라이프는 발레드의 외침에 대답하는 대신 발을 들어올렸다. 그의
발이 도르네이의 등에 올라갔다. 신스라이프는 도르네이를 밟은 채 로
드를 움켜쥐었다.
"우음!"
신스라이프의 입술 사이로 짧은 신음소리가 나오고나서 로드는 위로
쑥 뽑혀나왔다. 콜리의 프리스트들 중 많은 이가 고개를 돌려 외면했
다. 신스라이프는 피에 물든 로드를 옆으로 팽개치고나서야 몸을 돌려
발레드를 마주보았다.
"나를 불렀나?"
"그렇습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란 말입니까?"
"황혼의 막간극이라고나 할까."
"뭐요?"
발레드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신
스라이프는 피식 웃었을 따름이다. 갑자기 팔짱을 낀 신스라이프는 등
뒤를 향해 말했다.
"일어나게, 도르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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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는 노래 연습 중입니다. 친구가 장가를 가거든요. 결혼식장에 찾
아가서 축가 불러주겠다고 해놓고는 슬픈 웨딩케익을 불러줄 생각입니
다. 음하하. (몇 주 진단이 나올까.)번 호 : 17419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3-13 01:01
제 목 : [F/W] 시간의 장인.....8
Future Walker
8. 시간의 장인…………8.
다음 순간, 콜리의 프리스트들은 온몸을 떨며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도르네이의 몸이 들썩거렸다. 먼저 그의 손이 꿈틀거리고, 갑작스럽
게 도르네이는 머리를 들어올렸다. 얼떨떨한 눈으로 주위를 바라보던
도르네이는 갑자기 얼굴을 찌푸렸다. 지독한 피냄새가 그를 당황하게
만든 것이다. 잠시 후 자신이 피웅덩이 속에 코를 박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도르네이는 기겁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으아아아! 뭐, 뭐야?"
도르네이는 앉은 채로 뒤로 화다닥 물러났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
신의 손에 묻은 피와 붉게 물든 몸을 내려다보던 도르네이는 갑자기
전율했다.
"나, 나? 죽었……는데?"
도르네이의 질문은 대상이 없었지만 설령 도르네이가 그의 동료 중
누군가를 지적해서 질문했다 하더라도 대답해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사내들은 모두 도르네이와 신스라이프를 번갈아 쳐다
보며 절대로 설명될 수 없는 현상에 대한 설명을 찾아내어보려는 안타
까운 시도로써 자신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사내들을
향해, 신스라이프는 나직하게 말했다.
"짐을 챙겨라."
쥬블킨이 간신히 대답했다.
"예?"
"고스빌로 가서 쉰다. 내일 탄느완으로 출발하기 위해선 푹 쉬어야
될 테니 서두르도록."
"탄느완……입니까?"
'그렇다.' 라는 대답없이, 신스라이프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도로
앉았다. 그리고는 가슴 앞에 무릎을 모아 끌어안은 채 어둠이 짙어가
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았다.
고스빌 초입에 위치했다는 지리적 이점으로 손님 확보에 상당히 유리
한 위치에 있었지만, 그래도 파타로 주점 역시 다른 주점이나 여관처
럼 한산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파타로 주점의 데브는 그런 시간을 자
신만의 방식으로 사용하곤 했다. 데브가 그의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는
방법은 몹시 위험한 방법이었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수학적 확률론에
대한 심오한 도전이자 심리학적인 파탄상태에 이르는 치명적인 수단이
었다.(때론 주머니도 파탄난다.) 그래서 파타로 주점의 홀로 들어서던
파타로는 시니컬하게 웃으며 자신의 고용인에게 말했다.
"이놈아. 그렇게 신바람 내며 테이블 닦는 이유가 뭔지 짐작하겠는
데."
"예?"
"후다닥 청소하고나서 도박장으로 달려갈 생각이지?"
데브는 싱긋 웃으며 파타로의 말을 못들은 척했다. 하지만 파타로는
그런 데브를 향해 여전히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예?"
"손님들이 닥쳤거든. 그것도 수십 명이다."
데브의 걸레가 갑자기 멈췄다. 신나게 테이블을 닦아대던 동작 그대
로 굳은 채, 데브는 고개만 돌려 파타로를 바라보았다.
"농담이죠?"
"밖을 봐."
그제서야 데브는 주점 밖에서 뭔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고 있음
을 깨달았다. 데브는 화다닥 걸레를 팽개치고는 문으로 달려갔다.
'아이고 맙소사!'
좌절한 데브의 눈에는 수백명으로 보이는, 하지만 실제로는 수십 명
정도인 손님들이 자신들의 말을 좁은 마굿간에 집어넣기 위해 소란을
떨고 있었다. 이건 비겁해! 왜 저녁 시간도 한참 지난 이런 시간에 저
렇게 많은 손님들이 들이닥치는 거야! 데브는 마음 속으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런 데브의 얼굴을 보며 파타로는 즐겁게 웃었다.
"자, 서둘러야겠다. 저 많은 손님들 식사 준비하는 것도 예사일이 아
니겠는데. 너도 어서 서둘러라. 손님들 방 정돈하고 시트 모조리 꺼내
거라."
파타로는 즐거운 밤이라는 듯이 휘파람까지 불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데브는 소리없이 욕설을 퍼부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몸을 돌렸
다. 죽었다. 저 많은 손님들 시중이라니! 저건 도대체 뭐하는 사람들
이지? 침실을 향해 달려가려던 데브는 갑자기 정지했다. 데브는 몸을
돌려 창문을 통해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군. 상단은 아닌데. 군대도 아니고, 순례자들이나 모험가도 아
닌 거 같고. 오랜 주점 생활로 손님들의 발자국만 봐도 그 손님의 직
업을 때려맞힐 수 있다고 장담하는 데브였지만 이 야심한 시각에 느닷
없이 닥친 손님들에 대해서는 도통 짐작할 수가 없었다. 많은 숫자.
하지만 제멋대로인 복장. 얼레? 저건 뭐야. 모두들 로드를 들고 있어?
흐음. 순례자들인가. 하지만 그렇다면 왜 복장이 저 지경들이지?
갑자기 데브의 눈이 커졌다.
홀로 들어서던 손님들 중에 그의 시선을 확 잡아끄는 여자가 있었다.
모두들 남자로만 이루어져 있는 무리들 가운데 유일한 여자인 점도 시
선을 끄는 요인일 수 있었지만 데브가 놀란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데브는 그 여자를 알고 있었다.
데브는 반갑게 웃으며 그 여자에게 다가갔다.
"어이!"
데브는 당황하며 걸음을 멈췄다. 손을 내미는 것은 아예 시도하지도
못했다. 파는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보았던 것이다. 파는 주
위를 둘러보다가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를 부른 건가?"
데브는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파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그의 눈빛
이 바뀌었다.
"아, 실례했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어서
앉으십시오."
그리고 데브는 재빨리 몸을 돌려 홀을 빠져나왔다. 침실을 향해 올라
가며 데브는 낮게 투덜거렸다.
"흥, 비밀이 많은 계집애. 이번에는 뭣 때문에 정체를 숨기고 있는
거야. 아는 척하면 죽이려고 들겠지. 그래봐야 양치기 주제에 도대체
무슨 비밀이 저렇게 많은 거지."
계단을 올라가던 데브의 걸음이 갑자기 멈추었다. 데브는 멍한 표정
으로 계단을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려 홀 쪽을 바라보았다. 파는 사내
들과 함께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데브는 계단참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며 파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보니…… 도대체 저 계집애는 뭐지? 저희 언니보다 더 알 수
없는 년일세. 싸움은 어떻게 그렇게 잘하고…… 어라? 그러고보니 왜
이상하다는 생각을 못했지? 남자라도 그렇게 싸울 수는 없을 텐데?'
데브는 갑작스러운 생경함을 느끼며 파를 바라보았다. 파를 자세히
바라보던 데브는 한층 더한 의혹을 느꼈다. 저런 얼굴이었나? 이상하
다. 표정이 좀 바뀐 거 같은데. 정체를 숨기고 있어서 그렇겠지? 그
럼, 파는 왜 자기 정체를 숨기고 저 무리 속에 있는 거지?
데브는 자신이 고스빌의 주점 종업원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
의 비밀에 접근하고 있다는 식의 망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손끝이 짜릿해지는 것도 느꼈다. 자아, 이건 도대체 뭘까. 데브, 데
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입은 굳게 다물고, 관찰하는 거야. 데브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침실로 올라갔다.
신스라이프는 그런 데브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다가 차분히 고개
를 돌렸다.
'멍청한 놈. 안 보이는줄 아는군. 이 여자를 아는 놈일까. 그건 그렇
고 이 여자의 몸은 굉장하군. 이렇게까지 밝은 눈이라니, 대단한걸.'
자신의 생각에 침잠한 채 파의 몸에 만족하고 있던 신스라이프는 갑
자기 이상한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발레드와 쥬블킨 등이 주춤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뭔가?"
"예? 아아, 저, 큰아버님."
발레드는 당황하며 입을 열었지만 그의 말은 갑자기 사라졌다. 발레
드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신스라이프는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왜?"
발레드는 몇 번이나 침을 삼킨 다음에 힘들게 말을 꺼냈다.
"저, 아까 도르네이 일 말인데요. 어떻게 된 것이지요?"
"어떻게 되다니."
"왜…… 죽지 않는 겁니까?"
신스라이프의 입매가 조금 올라갔다. 신스라이프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고, 그러자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던 도르네이가 황급히 고
개를 숙이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신스라이프는 도르네이의 정
수리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흥. 죽지 않다니. 분명히 죽었었다."
"예? 예. 예. 죽었지요. 그런데…… 살아났잖습니까? 어떻게 된 거지
요?"
발레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쥬블킨이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격하게
질문했다.
"예. 신스라이프. 어떻게 된 겁니까? 여덟번째 희생자로서 부활은 끝
나야 합니다. 그런데 왜 부활이 또 일어난 겁니까?"
신스라이프는 쥬블킨을 바라보며 짧게 혀를 찼다.
"너는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하는 건지도 모르면서 네 평생을 그것에
바쳤군."
쥬블킨은 입술을 깨물었다. 신스라이프는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뻗으
며 편한 자세로 말했다.
"네가 아는 바대로 지껄여보아라.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부활한
건지."
"예? 아니…… 그럼 혹시 제가 아는 바와 다른 것이?"
"그 네가 아는 바라는 것을 말해보란 말이다. 그래야 네가 어떻게 잘
못 알고 있는지를 말해줄 수 있으니."
쥬블킨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내들
모두와, 그리고 다른 테이블에 앉은 사내들까지도 쥬블킨의 대답을 기
다리며 침묵했기에 홀 안은 어색한 침묵으로 가득했다. 싹싹하게 웃으
며 홀로 들어서려던 파타로는 홀 안을 점령하고 있는 정적에 놀랐다.
그는 주춤했고, 그런 그를 향해 가까이 있던 사내 하나가 손짓했다.
'잠시 있다가 나오시오.' 겁을 집어먹은 파타로는 도로 부엌으로 들어
갔다. 파타로가 들어가고나자 아무런 지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명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들은 부엌으로 통하는 문의 좌우
에 기대어섰고, 그러자 쥬블킨은 내키지 않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66년 전, 당신은 우리들의 아버지, 혹은 형이나, 어쨌든 우리들의
선조들과 약속했습니다. 당신을 부활시키고 영생을 준다면 당신의 모
든 재력을 사용하여 우리들의 복권을 도와주겠다고 말입니다."
신스라이프는 킥킥 웃었다. 쥬블킨은 말을 멈추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흐음…… 옛날 이야기처럼 말하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나로선 위화
감 느껴지는 일이군. 나에겐 엇그제 같은 일이거든?"
"그러시겠군요.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까마득한 옛날 일입니다."
"좋아. 말해봐."
쥬블킨은 잠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좋은 건가? 그동안
보아오던 모습과 다르군. 쥬블킨은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우리들의 선조는 그 약속을 받아들였고 종단의 종규에서 그 사용이
가장 엄격하게 제약되던 권능을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신이 부
탁한 영생의 권능이지요. 하지만 거기서 당신은 복잡한 조건을 달았습
니다. 죽어가는 당신의 그 늙은 몸으로 영원히 사는 것은 거절했지요.
그래서 문제가 복잡해졌습니다. 그냥 영생이라면 아홉 명의 인명을 희
생시키면 될 겁니다. 그 정도의 희생자라면…… 흐음. 당신의 재력으
로는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물론 그래."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끄덕였고 발레드는 숨소리마저 낮춘 채 쥬블킨
의 말에 집중했다. 쥬블킨은 두어번 헛기침을 하고나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의 선조는 복잡한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었습니
다. 대개의 사람들은 아홉이라는 숫자에 현혹되어 있지만, 사실 콜리
는 여덟 명의 희생으로 부활을, 그리고 아홉 명의 희생으로 영생을 부
여합니다. 그래서 선조들께서는 당신의 부활과 당신의 영생을 분리시
키기로 결정했지요."
"분리라……"
쥬블킨은 갑자기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당신이 스스로를 부정했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늙은 당신이
바로 신스라이프입니다. 당신에게 영생을 준다는 것은 늙은 신스라이
프에게 영생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걸 거부했지요! 결
국 당신은 자신이 아닌 다른 것으로의 영생을 원했던 것입니다!"
신스라이프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좋아. 계속해봐."
"그러니, 도대체 권능을 사용할 대상이 모호해지는 형국이었을 겁니
다. 분리시킬 수밖에 없었지요. 당신의 부활, 그리고 영생을 받을 대
상.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분리된
다음 다시 합쳐져야 되니까요."
발레드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쥬블킨은 잠시 호흡을
가누었다가 말했다.
"그래서…… 선조들께서는 여덟 명의 희생으로 당신을 부활시키고,
아홉 명의 희생으로 그 여자에게 영생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둘을 합
친 거지요."
발레드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자, 잠깐만. 쥬블킨 씨. 여덟 명이라니? 일곱 명이었소. 일곱 명의
죽음에서 큰아버님은 부활하셨고, 그리고 그 여덟번째 남자가 죽었을
때 그 여자가 나타났소. 어떻게 된 거요? 한 명이 모자라잖습니까?"
쥬블킨은 갑자기 싱긋 웃었다.
"당신의 큰아버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십니까?"
발레드는 의아한 표정으로 쥬블킨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고, 그가 쓰게 웃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무
슨 말이지? 발레드는 갑자기 등골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무슨…… 말이오?"
쥬블킨은 신스라이프를 똑바로 바라보며 발레드에게 대답했다.
"당신의 큰아버님은 자연사한 것이 아니오. 우리들의 선조들에 의해
죽임당했지. 신스라이프 그 자신이 바로 첫번째 희생자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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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그러고보니 내일이 화이트데이로군요. 남성 여러분. 사탕 대신
우리 전통의 엿을 선물하며 그윽하게 말하는 겁니다. '엿먹어라…'(설
마 따라하실 분?)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7699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3-18 03:04
제 목 : [F/W] 시간의 장인.....9
Future Walker
8. 시간의 장인…………9.
발레드는 무의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쥬블킨의 말의 의미를 이해했
음을 나타내는 끄덕임, 동시에 그 의미를 자신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끄덕임이었다. 그러나 조금 후 발레드는 멍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가
로저었다. 신스라이프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지었다.
"혼란스러워보이는군, 발레드."
"큰아버님…… 어떻게 믿을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습니까?"
"나로선 손해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모르겠습니다.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르겠습니다."
"죽음을 재난이라고 생각하는 놈은 이해할 수 없지."
"예?"
신스라이프는 발레드를 똑바로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발
레드는 여인의 눈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며 손끝이 싸
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저 눈꺼풀 너머에서 그를 보고 있는 것은 무
엇인가? 발레드는 판단할 수 없었다.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조금 가로젓고는 쥬블킨을 바라보았다.
"계속해."
쥬블킨은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다.
"당신 자신의 죽음을 통해 첫번째 희생자는…… 예. 바쳐졌습니다.
당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여덟번째 희생자까지를 통해 당신을 부활시키
는 것은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아홉번째의 희생자를 통해 영생을 받아
야할 대상은 또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 때는 없었지."
"예. 그렇지요."
질린 표정으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던 발레드는 쥬블킨에게 묻는 눈
짓을 보내었다. 쥬블킨은 턱으로 신스라이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여자 말입니다. 저 여자는 66년 전 그 때, 존재하지 않았습니
다."
"그렇……군요."
"부활을 부여할 자는 신스라이프, 그러나 영생을 부여할 자는 존재하
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 자는 신스라이프와 합쳐져야 될 사람입니
다. 그건 보통 사람은 안되는 것이지요."
"무슨 말인지?"
"당신을 예로 들어봅시다. 발레드. 여덟 명의 희생자로 신스라이프를
부활시키고, 아홉 명의 희생자로 당신에게 영생을 줬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신스라이프를 합친다? 불가능합니다. 당신은 이미 영생자이니
까요. 발레드 자신이 영생을 구가할 뿐이지요. 당신과 신스라이프를
합치려면 당신은 사라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영생자인 발레드는
없어지므로 신스라이프는 합쳐져야할 상대를 잃게 되는 거지요."
"그렇습니까."
쥬블킨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발레드
는 쥬블킨이 신스라이프가 아니라 그 몸, 즉 파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쥬블킨은 파의 얼굴, 파의 몸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래서 특별한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
래로 향하는 흐름의 교차점, 원하는 곳에서 그 교차점을 만들 수 있
는, 원하는 시점에서 현재를 고정시킬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원하는 시점에서…… 현재를 고정시켜요?"
신스라이프는 모처럼 찾아왔던 안온한 소속감이 점차 사라져가는 것
을 느꼈다.
그를 위해 준비된 사람들, 그의 목적을 위해 움직일 사람들, 그에 대
해 궁금해하고 그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자들이 나누는 그에 대한 대
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스라이프는 점차 이 공간에서 멀어져가는 자
신을 느꼈다.
익숙하지 않은 몸 때문일까,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 시간 때문일까.
신스라이프는 테이블 위의 촛불을 바라보았다.
초는 길고 가느다랗다. 늦은 시간에 찾아든 손님들을 위해 주인장이
새로 내온 초일 것이다. 그 표면을 타고 흐르는 촛농의 줄기는 아직
가늘고 이질적이다. 방금 태어났을 터인 불꽃은 홀 안에 어둠과 빛의
경계선을 만들지는 않았다. 그저 그곳에서 혼자 타오르고 있을 뿐. 불
꽃 같지 않은 불꽃이다.
촛불을 응시하고 있던 신스라이프는 그 불꽃의 끄트머리에서 피어오
르는 가느다란 검은 연기를 볼 수 있었다. 노려보고 있으면 눈물이 날
정도로 가느다란 연기였지만 신스라이프는 눈의 아픔을 무시하며 그것
을 계속 응시했다.
신스라이프는 가늘어지는 불꽃이 검은 연기로 승화되는 한 점을 찾아
보려 했다. 빨간 불꽃. 가운데는 월등히 밝다. 그 밝은 안쪽 불꽃이
위로 찌르듯이 솟아오르다가 검붉은 테두리를 뚫으며 순간 검은 연기
로 바뀌는 한 점.
"뭐 하시는 겁니까?"
질문의 의미보다 그 속에 담긴 당혹감이 몽환상태에 빠져있던 신스라
이프를 일깨웠다.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
고 있는 쥬블키과 발레드의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에는 커다란 당혹
감이 담겨있었다. 신스라이프는 시선을 조금 떨구었고, 불꽃을 만지고
있는 자신의 손가락을 보았다. 불꽃의 테두리를 따라 섬세하게 움직이
며 검은 연기의 시작점을 어루만지는 손가락. 그의 손가락이 아니다.
이 처녀의 손가락.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다.
순간, 신스라이프는 끔찍한 복통을 느끼며 급하게 상체를 숙였다.
이마로 땀이 배어나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눈 앞에서 무수한 불꽃들이 떠다녔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신스라이프는 입을 크게 벌렸다. 구토감. 하지만 입술과 눈 주위
로 피가 몰리는 느낌만이 신스라이프에게 다가왔다. 신스라이프는 입
을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입술이 뭉개지도록 입을 움켜쥐었다.
"신스라이프?" "큰아버님!"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 사내들이 급하게 일어나는 소리. 그 순간 신
스라이프는 상체를 폈다.
"아무 일도 아니다."
반쯤 일어났거나 완전히 일어선 사내 모두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신스
라이프를 바라보았다. 신스라이프는 평온했다. 조금 전까지의 모습 그
대로 신스라이프는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오만한 눈으로 사내들을 바
라보고 있었다. 쥬블킨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
다.
"괜찮으신 겁니까?"
"그래."
"불편하시다면…… 말씀하십시오. 익숙하지 않은 몸이실 텐데."
"아무렇지도 않아."
발레드는 주춤주춤 다시 앉았다. 뭐지? 설마 생리통이라도 느끼는 것
일까? 어라? 그러고보니 여자의 몸…… 발레드는 머리를 휘저었다. 혼
돈스럽고 망측스러운 기분만이 느껴져 발레드는 불쾌해졌다. 신스라이
프는 발레드와 쥬블킨의 중간 쯤 되는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야기 다 끝났나?"
쥬블킨은 신스라이프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바는 대개 다 말했습니다만, 저, 그런
데 제 말을 들으셨습니까?"
"들을 필요가 있나? 어차피 잘못 알고 있을 텐데."
"저희들의 아버님께서 저희들을 속였다는 말씀입니까?"
"말하지 않음으로 속인 것도 속인 것이라면, 그렇다."
"그분들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모두 머저리라는 사실."
"네?"
굳은 얼굴로 되묻는 쥬블킨을 무시하며, 신스라이프는 의자에서 일어
났다.
"먼저 자러 가겠다."
쥬블킨은 엉거주춤하게 일어나며 말했다.
"어, 잠시만…… 제가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지 말씀해주셔야지요?"
"때가 되면 말해주겠다."
신스라이프는 계속 걸어가며 말했다.
"그래도, 어, 식사도 하셔야하지 않습니까? 종일 드신 것이 별로 없
는데……"
신스라이프는 몸을 홱 돌려 쥬블킨을 쏘아보며 외쳤다.
"넌 내가 굶어죽기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고함소리의 여운은 한참 동안 고요한 홀 안을 떠돌았다. 콜리의 프리
스트들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신스라이프
역시 자신의 고함소리에 놀라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후 신스라이
프는 이층을 향해 달려올라가버렸고 프리스트들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
다가 모두 고개를 돌려 쥬블킨을 바라보았다. 발레드가 쥬블킨에게 질
문했다.
"어, 어떻게 된 거지요?"
"모르……겠습니다. 그냥 실수하신 걸까요?"
"저런 것을 실수할 수도 있습니까? 단어를 잘못 고른다거나 할 수야
있지만 어떻게 말투가……?"
쥬블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발레드는 그런 쥬
블킨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것은 실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
말 신스라이프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 확실한 겁니까?"
"예? 어, 하지만 조금 전까지는 누가 봐도 신스라이프였잖습니까."
발레드는 입을 다물었다.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그 스스로가 질문
을 정확하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되어 있는 상태였다. 쥬블킨 역시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은 채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밤의 깃털들이 바이서스 임펠의 하늘로부터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바이서스의 수도 바이서스 임펠의 외성을 따라 불빛이 아른거렸다.
외성 경비대원들이 성벽 위에 피워둔 불빛 때문에 밤하늘에서 불빛만
보고도 외성의 거대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점점이 이어진 불빛
들이 검은 평원 위에 거대한 원을 그리고 있는 모습, 그리고 그 안쪽
에서 반짝이는 불야성의 모습은 대륙의 모든 마법사들의 마음의 고향
이자 모든 전사들의 꿈의 도시의 풍모를 한껏 자랑하고 있었다.
차가운 밤바람 속을 날며, 시오네는 웃을 수는 없었다. 박쥐로 변신
했을 때는 표정을 구사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시오네는 웃고 싶었다.
거기 오만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랑거리인 도시여, 성벽
이여, 첨탑이여, 궁성이여. 게으른 옹알거림으로 꿈틀거리는 어린 인
간의 도시여. 화염이 너를 뒤덮고 사막을 가로질러 달려온 병사들이
너의 어린 살점을 떼어내는 그 날이 올 것을 추호도 생각지 못하는 작
고 작은 도시야.
시오네는 몇 개의 바람을 지난 다음 그녀를 이끌어줄 바람과 만났다.
궁성 임펠리아로 부는 바람에 몸을 싣고 시오네는 한가롭게 활강했다.
반짝이는 가로등들이 마치 빛의 강인 것처럼 그녀의 몸 아래로 흘러
갔다. 오가는 사람이 없는 야심한 밤, 검은 대로는 퍽이나 넓고 외로
워 보였다. 하지만 박쥐의 시각체계에서 시오네는 전혀 다른 것을 보
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듣고 있었다. 비상하게 발달한 코의 주름을 통
해 집중된 초음파는 목표물에 부딪혀 아스라한 반향을 일으킨다. 바이
서스 임펠의 많은 지역은 대부분 돌로 된 건물들과 포장된 대로인지라
반사음은 모두 깨끗하고 선명하다. 가로등의 쇠붙이에 부딪혀 돌아오
는 반사음은 날카롭게까지 느껴질 정도다. 시오네는 완전히 소리로만
이루어진 세계를 보며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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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표지판은 몇 개입니까? - 되돌아가는 길, 신미영(SeaWing)
멋진 말이죠? 하하.
불량 작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으윽으윽.
원고지 몇 매 되지도 않는 신문소설이 머리를 더 아프게 만들고 있습
니다. 그 빡빡한 분량 안에 어떻게 내용을 채워넣을지 궁리하는 시간
이 내용 구상하는 시간보다 더 많이 걸리는 것 같습니다. 아아… 변명
이 길어질 것 같은 느낌. 그만 접고 저기 가서 무릎 꿇고 손들고 있도
록 하겠습니다.
번 호 : 17700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3-18 03:04
제 목 : [F/W] 시간의 장인.....10
Future Walker
8. 시간의 장인…………10.
멀리서부터 둔탁하게 다가오던 반향음이 마침내 가까이 다가왔다. 임
펠리아의 거대한 돌벽에서부터 우렁찰 정도의 반사음이 다가온 것이
다. 시오네는 지금까지 그녀를 실어나르던 바람에서 살짝 비켜났다.
날개를 몇 번 파닥인 후, 시오네는 임펠리아의 성벽 군데군데 서있는
성탑 중 최북단 성탑 위로 날아들었다. 바이서스 왕가를 수호하는 독
수리와 영광의 아샤스에게 바쳐진 독수리상의 부리에 매달린 시오네
는 잠시 기다렸다. 뜰에는 두어 명의 궁성 수비대원들이 오가고 있었
지만 밤의 어둠 속으로 날아온 조그마한 흡혈박쥐를 발견한 궁성 수비
대원은 아무도 없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시오네는 궁성 건물을 향해 가볍게 날아들었다. 임
펠리아의 구조는 이미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시오네는 건물 이층의
동쪽 끝에 위치한 발코니로 가볍게 날아들었다.
방 안의 불은 꺼져있었다. 발코니에 내려앉자마자 폴리모프한 시오네
는 이제 검은 로브로 몸을 감싼 여인의 모습이 되어 조용히 발코니 문
옆에 기대어섰다.
시오네는 문을 가볍게 밀어보았다. 하지만 역시 발코니문은 잠겨있었
다. 예상하고 있었던 시오네는 별 실망도 하지 않았다. 시오네는 문의
손잡이 주위의 허공에서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거의 들리지도 않는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일런스(silence)."
잠시 기다린 시오네는 조금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손을 휘저으며 캐
스트했다.
"노크(knock)."
딸깍. 하는 빗장 벗겨지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오네가 문
을 밀자 문은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시오네는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열린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달빛이 방바닥에 푸르스름한 사각형을 만
들어놓았다. 인간이라면 한참을 기다려야했을 테지만 시오네는 곧 침
대가 있는 위치를 찾아내었다. 시오네는 발자국 소리도 없이 차분하게
걸어가서는 침대 옆에 멈춰섰다.
데밀레노스 공주는 편안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잠자리라 모두
풀어놓은 머릿결은 자연스럽게 흩어져 있었고 그 속에서 공주의 얼굴
은 하얗게 떠올라보였다. 시오네는 그 얼굴을 보며 오른손을 품 안으
로 가져갔다. 다시 밖으로 나온 그녀의 손에는 커다란 나이프가 들려
져있었다.
시오네는 칼집에서 나이프를 뽑아낸 다음 칼집을 방바닥에 던졌다.
달빛 속에 드러난 칼집은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고급품이었다. 칼을
보는 안목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라면 이 칼집이 자이펀 제품이라는 것
을 단번에 알아볼 것이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지만, 숙련된 암살자인 시오네는 그
저 입술을 조금 올렸을 뿐이었다. 시오네는 칼날을 조심스럽게 만지며
함의 부탁을 떠올렸다.
'자연사인 것처럼 처리해달라고 했었나, 함?'
시오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데밀레노스 공주의 심장에
꽂힌 나이프는 누가 보더라도 자이펀 군대에서 사용하는 군용 나이프
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시오네는 왼손을 뻗어 시트를 끌어내
려 공주의 가슴을 노출시켰다. 잠옷 속에서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공주의 가슴이 잘 보였다. 시오네는 이를 크게 드러내며 소리없이 웃
었다.
남자의 손길도, 조물거리는 아기의 손길도 닿지 않은 가슴이지. 사랑
의 화살이 날아와 박히길 바라는 하얗고 순수한 가슴이여. 안타깝지만
네 품을 찾아드는 것은 자이펀과 바이서스 두 나라를 한꺼번에 집어삼
킬 불꽃의 씨앗이란다.
시오네는 두 손으로 나이프를 쥔 다음 팔을 크게 들어올렸다가 힘껏
내려찔렀다. 나이프가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방안으로 퍼져
나가기도 전에 살이 꿰뚫리는 끔찍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데밀레노스 공주의 몸이 크게 경련했다. 그녀의 부릅뜬 두 눈이 허공
을 응시했고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며 들리지 않는 비명소리를 토해놓
았다. 시오네는 나이프를 더욱 깊숙이 박아넣기 위해 몸을 앞으로 기
울이며 두 손에 체중을 실었다. 앞으로 숙인 그녀의 눈이 데밀레노스
공주의 눈과 마주쳤다.
데밀레노스 공주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며 뭐라고 말을 꺼내려 했
다. 시오네는 차갑게 웃었다.
"떠들면 안돼지……"
시오네는 그대로 머리를 숙였다. 그녀의 메마른 입술이 데밀레노스
공주의 입술을 천천히 내리눌렀다.
그 순간 시오네는 황급히 머리를 들어올렸다.
"이게 뭐지?"
마법? 잔뜩 긴장한 시오네는 마나의 움직임을 느껴보았다. 하지만 방
안의 마나는 완전한 평형상태였다. 시오네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데밀
레노스 공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때 그녀의 등 뒤로부터
엄청난 소리가 울려퍼졌다. 쿵! 시오네는 펄쩍 뛸 듯이 놀라며 몸을
돌렸다.
발코니 문이 닫혀있었다. 하지만 시오네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닫힌
문 앞에 서있는 검은 그림자였다. 시오네는 엉겁결에 몸을 돌리며 외
쳤다.
"누구냐!"
그림자는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을 중얼거렸다.
"태초의 반역자, 비밀의 원수. 지순한 진리의 광휘여."
마법인 줄 알고 대비하려던 시오네는 룬어가 아닌 것을 깨닫고는 주
춤하고 말았다. 그래서 사내의 손으로부터 엄청난 빛이 터져나와 방
안을 가득 메웠을 때 시오네는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었다.
"아아아악!"
동공을 파고드는 무지막지한 빛에 시오네는 비명을 토하며 눈을 가렸
다. 눈을 가린 그녀의 귀에 늙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70년, 70년이라고. 허, 허. 말했잖아? 엘, 엘프도 내 솜씨를 치, 칭
찬해줬다고. 뱀파이어, 뱀파이어 쯤은 간단히 소, 속을 거라고 했잖
아?"
"정말 놀랍습니다, 구다이 씨."
시오네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리고 시
오네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시오네는 억지로 눈을 떠 대답이 들
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방문이었다. 그리고 방문 앞에는 네 명
의 사내들이 문을 가린 채 서있었다. 시오네는 사내들 사이에 서 있는
갈색 머리의 중년사내를 발견하고는 앙칼지게 외쳤다.
"카알! 네놈이!"
카알은 약간 피로해보이는 표정이었지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반갑군요, 시오네. 갈색산맥에서 헤어진 후로는 처음이지요?"
시오네는 입술을 부르르 떨며 카알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려 침
대를 보았다. 그곳에는 데밀레노스 공주가 가슴에 나이프가 박힌 채
쓰러져있었다. 시오네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데밀레노스 공주의 시
체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의 그 입술 감각은? 갑자기 시오네는 으르렁
거리며 데밀레노스 공주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시오네는 믿을 수 없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공주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으로 만져지는 것은 사람의 살결이 아니었다. 시오네
는 이를 갈며 발코니문쪽을 돌아보았다.
발코니문 앞에는 덩치가 작은 늙은이가 한손으로 뒷짐을 쥔 채 서있
었다. 앞으로 나온 손은 가슴 높이에 뛰어두었는데 그 손바닥 위에는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밝은 광채가 떠있어 사내의 얼굴을 제
대로 볼 수 없었다. 시오네는 눈을 잔뜩 찡그린 채 말했다.
"윌…… 오 위스퍼? 정령사구나!"
"그, 그렇소."
윌 오 위스퍼의 빛 뒤에서 늙은이의 목소리가 대답해왔다. 시오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밝은……? 넌 인간이잖아!"
늙은이는 껄껄 웃으며 손을 위로 톡 쳐올렸다. 늙은이의 손바닥 위에
서 맴돌던 광채는 마치 공처럼 튀어올라 천장 아래에서 맴돌았다. 늙
은이는 애정이 가득 깃든 눈으로 광채를 바라보며 말했다.
"들었니? 저, 정말 이렇게 기쁠, 기쁠 수가 없구나. 무, 물론 너희들
의 애정도 고맙지만, 역시 정령이 아닌 거, 것으로부터 칭찬을 들으니
조, 좋구나. 하하하. 자, 자, 이제 너도 나오거라."
늙은 정령사는 침대를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늙은이의 쪼글쪼글한
손이 마치 무용수의 그것처럼 부드럽게 움직이자 데밀레노스 공주의
모습이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시오네는 이를 깨물었다.
데밀레노스 공주의 몸으로부터 작은 빛살들이 무수히 솟아올랐다. 솟
아오른 빛덩어리들은 천장으로 뛰어올라 맴돌았고 그래서 방 안은 빛
으로 가득 차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밝아졌다. 그 밝은 빛 속
에서 시오네는 침대 위에 인형이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만큼이
나 커다란 인형의 가슴에는 나이프가 꽂혀있었다.
카알은 피로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개하지요. 여기 이 분은 그랜드스톰에서 오신 도스펠 씨."
턱을 만지작거리며 천장 아래를 맴돌고 있는 윌 오 위스퍼를 바라보
던 프리스트가 카알의 소개에 황급히 손을 내리며 인사했다. 카알은
빙긋 웃으며 손을 돌려 반대편에 서있던 거구의 젊은이를 가리켰다.
"퍼시발 군이야 구면일 테지요."
샌슨은 빙긋 웃으며 검을 뽑아들었다. 프림 블레이드의 검신이 윌 오
위스퍼의 빛을 받아 눈부시게 번뜩였다.
"반갑군, 시오네. 당신을 위해 와인과 장미를 준비…… 젠장! 다, 당
신을 위해 많이 준비했지!"
잔뜩 긴장하고 있던 시오네는 놀라지도 못했고 정령사와 도스펠은 샌
슨을 싹 무시해버렸다. 샌슨 옆에 서있던 네번째 사내는 후드를 깊이
내려쓰고 있어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의 어깨가 조금 떨리는 것
은 잘 보였다. 카알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으하아암. 그래요. 준비 많이 했지. 들킬까봐 마법사 대신 우리 시
대 최고의 정령사를 데리고 왔을 정도니 우리의 준비를 칭찬해도 좋을
거요. 구다이 씨를 소개하겠소. 70년 동안이나 정령과만 대화를 나눠
온 정령사요. 그 고명한 솜씨는 보는 바와 같소."
늙은 정령사 구다이는 입이 헤벌어진 채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시
오네는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카알을 바라보았다.
"준비를 했다는 것은,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말이군……"
"그래요."
"어떻게!"
"두 분의 조력이었소. 우선 여기 알리 씨를 소개하겠소."
네번째 사내가 후드를 들어올렸다. 시오네는 후드 아래에서 드러난
전 자이펀 국방대신의 얼굴을 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알리
는 엄격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Tou daphmerq ge une ina ferhichii……"
샌슨은 궁금한 표정으로 카알을 돌아보았고 그러자 카알은 선선히 웃
으며 말했다.
"암살자치곤 살기를 너무 많이 노출시킨다고 하셨네."
시오네는 두 팔을 확 벌리며 외쳤다.
"저 놈이 나의 접근을 간파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새 이렇게 준비
할 수 있었단 말이냐!"
"올 줄 알고 있었으니까. 언제 올 줄은 몰랐기에 우리는 매일 공주의
침실에서 밤을 새워야 했소. 피곤하고 낯부끄러운 일이 이제야 끝나
니……"
"어떻게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음? 아아, 이런. 피곤해서 자꾸 말이 새는군. 물론 두 분의 조력 때
문이오. 하지만 두번째 조력자께서는 이곳에 계시지 않으니 소개해드
릴 수가 없군요."
"여기 없다고?"
"그렇소. 금방 데려올 수도 없지."
"그게 누구냐!"
카알은 대답 대신 싱긋 웃었다. 그 때 구다이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조, 조심해!"
구다이가 외치는 순간, 질문을 계속 던지며 준비하고 있던 시오네가
두 팔을 확 들어올렸다. 도스펠은 황급히 디바인 마크를 꺼내었고 샌
슨은 고함을 내지르며 곧장 앞으로 돌격했다. 그러나 시오네는 눈깜빡
할 사이에 캐스트를 마쳤다.
"미러 이미지(Mirror image)!"
순식간에 방 안에 네 명의 시오네가 나타났다. 돌격하던 샌슨은 협공
당할 것을 염려하여 주춤하며 발을 멈췄다. 네 명의 시오네는 빠른 손
놀림으로 레이피어를 뽑아들고는 네 명의 사내를 향해 육박했다. 그러
나 그 때 구다이가 재빨리 외쳤다.
"태초의 반역자, 비밀의 원수. 지순한 진리의 광휘여! 진실을 드러내
는 너의 날개짓을!"
정령을 부를 때 구다이는 절대로 더듬지 않았다. 시오네는 공포에 질
린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저것을 잊었어! 순식간에 내려진 구
다이의 명령에 의해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윌 오 위스퍼들이 움직
이기 시작했다. 광채가 한 곳으로 모여들자 샌슨은 팔을 크게 들어올
렸다.
"찾았다!"
프림 블레이드가 허공에 빛의 장막을 그려대며 시오네를 향해 쏘아져
갔다. 시오네는 얼떨결에 레이피어를 들어올렸지만 샌슨은 무지막지하
게 내려치던 검날을 살짝 뒤틀었다.
시오네는 선뜻하는 느낌에 몸을 떨었다. 바닥을 내려다보던 그녀의
입술에서 비명도 신음도 아닌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끄어어어……"
바닥에는 레이피어를 쥔 시오네의 오른손이 뒹굴고 있었다. 시오네는
무의식 중에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샌슨은 조금의 헛동작도
없이 어깨로 시오네의 몸을 들이박았다. 시오네는 숨이 턱 막히는 고
함을 내지르며 침대 위에 쓰러졌다. 침대 위에 쓰러진 시오네를 향해
도스펠은 주저없이 디바인 마크를 내밀었다.
"대지가 거부하는 시체여, 사라져라!"
"캬아아악!"
시오네는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앉은 채로 물러나던 시오
네는 침대 머리에 부딪혔고 그러자 시오네는 몸을 돌려 두 손으로 벽
을 긁어대었다. 시오네는 벽에 머리를 찧어대며 한사코 디바인 마크로
부터 멀어지려했고 도스펠은 그런 시오네를 향해 딱딱하게 굳은 얼굴
로 디바인 마크를 내밀었다.
"캬아아악! 저리 가! 비켜! 살려줘!"
시오네를 향해 뻗어가던 도스펠의 손이 멈췄다. 하지만 도스펠은 팔
을 내리지 않았다. 디바인 마크는 그대로 시오네를 향해 겨냥한 채 도
스펠은 침대 발치에 멈춰섰다.
카알이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카알은 벽을 뚫고서라도 도망갈 기세
인 시오네를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좋은 대접까지야 해줄 순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소란을 피울 건
또 뭐요. 시오네."
"캬아악, 캬아아악! 저리 가, 저리 가!"
시오네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도리질을 했다. 카알은 고개를 가로젖
고는 샌슨을 향해 눈짓을 보내었다. 샌슨은 시오네를 경계하며 침대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고, 잠시 후 끙끙거리며 큼직한 물건을 꺼내었
다. 하지만 정신없이 도리질을 하며 비명을 지르던 시오네는 샌슨이
꺼낸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자 카알은 차분하게 말했
다.
"당신 관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이곳에라도 들어가시오."
시오네의 눈이 번쩍 빛났다. 관이라고? 시오네는 고개를 돌렸고 침대
옆에 놓여있는 관을 보자마자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시오네가 관 속에 들어가자 관뚜껑이 저절로 날아올랐다. 텅!
날아오른 관뚜껑은 정확하게 관을 덮었다. 샌슨은 다시 침대 밑에 손
을 집어넣어 망치와 못을 꺼내었다. 샌슨은 손에 망치를 들고 못 몇
개는 입에 물며 말했다.
"이거오 추우하까오?"
입에 못을 문 채 말해서 발음이 부정확했지만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
다.
"그래. 충분해."
그러자 샌슨은 탕탕 소리를 내며 관뚜껑에 못질을 하기 시작했다. 도
스펠은 디바인 마크를 꼬나든 채 관을 경계했고 구다이와 알리, 그리
고 카알은 관 주위에 둘러서서는 샌슨이 관을 못질하는 것을 바라보았
다. 샌슨이 못질을 끝내고 물러나자 도스펠은 관뚜껑 위에 디바인 마
크를 내려놓았다. 샌슨은 디바인 마크를 못질해서 관뚜껑 위에 고정시
키고난 다음 손바닥으로 관뚜껑을 몇 번 내리치고는 싱긋 웃었다.
"자, 튼튼합니다."
"휴우…… 겨, 겨우 끝났군."
구다이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카알은 미소를 지으며 모든 사
람들에게 인사했다.
"수고들 하셨습니다."
"저 뱀파이어가 자기편으로부터 배신당한 것을 알면 뭐라고 할까요,
카알?"
샌슨은 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카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퍼시발 군. 저 여자 역시 자기편을 배신하고 데밀레노스 공주를 살
해하려 했어. 피장파장이지."
"하지만, 그것 자체가 함에게 농락당한 것이잖습니까."
카알은 대답하기에 앞서 샌슨의 손을 살폈다. 못질을 하느라 샌슨은
프림 블레이드를 놓고 있었다. 카알의 시선을 알아차린 샌슨은 붉으락
푸르락하며 말했다.
"제가 질문하는 겁니다, 예!"
카알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아, 그래. 뭐…… 그렇긴 하지. 자신의 복수심을 가누지 못한 댓
가라고 할 수밖에. 자, 이제 관을 옮기도록 하지. 관을 옮기는 것은
나와 도스펠 씨가 담당할 테니 퍼시발 군 자네는 쟈크에게 가보게."
"지금이오?"
"그래. 쟈크에게 가서는 함에게 연락을 보내라고 해. 잠깐…… 전갈
을 바꾸지."
방문을 나서려던 샌슨은 몸을 돌려 카알을 바라보았다. 카알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감사하다는 말과, 직접 대면을 요구한다는 말을 덧붙이게."
"예? 직접 대면이오?"
"그래. 휴전 협상에 나도 나갈 테니 함도 나오라고 전하는 거야. 알
겠지? 대충 그런 의미로 정중하게 써서 보내라고 해. 이런 식으로까
지 협상하겠다는 의미를 분명히 했으니, 아마도 반드시 나올 걸세. 그
친구의 얼굴을 보고 싶군."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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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교차가 큰 날씨입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7947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3-23 01:53
제 목 : [F/W] 시간의 장인.....11
Future Walker
8. 시간의 장인…………11.
빛의 탑은 사상 최대의 혼란으로 돌입했다. 마법사들은 자신들이 그
저 조금 흥분했다고 생각했지만, 시민들로서는 심장이 오그라붙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바이서스 임펠 내에서 마법사 길드 '빛의 탑'은 그 앞을 오가는 시민
들에게 항상 묘한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건물이었다. 시내의 적당히
지저분한 거리에서도 다시 주위의 지저분한 건물들로부터 '저렇게 지
저분한 건물과 함께 서있어야 하다니!' 하는 힐난을 듣기에 적당한 2
층짜리 목조건물의 2층이 그 이름 위대하사 빛의 탑인 것이다.
바이서스 임펠의 나이 많은 시민들만은 경외감 때문에 대화에 빛의
탑을 거론하는 일을 퍽 삼갔지만 발랄한 청년이나 소년들은 빛의 탑이
거기 있다는 것은 알고 있을지언정 거기서 가장 미약한 경외감도 느끼
지 못했다. 1년에 한번이라도, 아니 10년이라도 빛의 탑의 2층 창문을
통해 반인반수가 뛰쳐나온다거나 (나이 몹시 어린 축들의 기대다), 지
붕이 날아갈 정도의 대폭발이 일어난다거나(우주적 공포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는 연령층의 기대다), 금발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엘프가 벌
거벗은 채 백마를 타고 나온다거나(외로운 밤 때문에 처절하게 방황하
는 청소년들의, 간절하지만 말도 안되는 기대다.) 한다면 바이서스 임
펠의 시민들도 만족감을 느끼며 그것이 마법사의 길드라는 사실을 인
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빛의 탑은 항상 고요하고 조금 지저분
한 건물일 뿐이었다. 그래서 바이서스 임펠의 시민들은 그것을 부를
때 조금 우스꽝스러운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여행자가 바이서스 임펠의 시민들에게 길을 물어보았다고 하자.
친절한 시민은 상냥하게 설명해줄 것이다. "그러니까 죽 전진한 다음
오른쪽 두번째 골목을 돌면 왼편에 빛의 탑이 보일 텐데……" 바로 이
부분에서 바이서스 임펠 시민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을 테고
물정 모르는 여행자는 어리둥절해버리고 말 것이다. 그것은 늙어빠져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는 과수원 주인이 어린 서릿꾼에게 죽이겠다는
식으로 고함을 지를 때 어린 악마들이 짓는 미소와 비슷한 것이다.
그래서 빛의 탑 바로 근처에 사는 수도 시민들은 항상 은근한 경멸과
무시로 빛의 탑을 대해왔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그랬다는 말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이 되자 모든 것은 처절하리만큼 달라졌다. 시민들
은 숨까지 헐떡거리며 모든 것이 평온했던 어제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른들의 공포와는 별도로, 적어
도 골목을 주름잡는 악동들만은 미쳐버릴 정도로 신나하고 있었다.
인파 한가운데서 스터벅은 잠시도 쉬지 않고 입을 나불거리고 있었
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의 수다에 노이로제를 일으키거나 머리를 내저
으며 도망치던 주위의 이웃들은 넋을 잃은 얼굴이 되어 스터벅의 수다
를 경청하고 있었다. 스터벅은 건실한 에델브로이의 신자였고, 두 딸
의 아버지이며, 건실하면서도 자상한 인격을 갖추었다고 스스로 믿고
있으며, 끈기있지만 승률은 높지 못한 도박꾼이었지만, 이웃들이 그의
그런 면들 때문에 스터벅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아니었다. 스터
벅은 빛의 탑 바로 맞은편에서 작은 잡화점을 운영하는 사나이였던 것
이다. 게다가 그는 사건을 맨처음부터 목격하기도 했다.
향후 수년간 우려먹을 것이 분명한 이야기를 스터벅은 다시 신나게
펼쳐보였다.
"뭐? 처음부터 다시? 아, 그래. 지금 막 온 사람도 있으니까. 그럼
모두들 조용히 하고 잘 들어봐. 그러니까 오늘 아침 해뜨기 직전이었
지. 어제 진탕 퍼마셔서 머리가 아팠지만 나는 한번도 가게 문 여는
시간을 놓쳐본 적이 없다고.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에델브로이의 가호
속에 벌떡 일어났다네. 가게문을 열려고 밖으로 나왔지. 기지개를 켜
려고 몸을 주욱 펴는데 말이야. 남쪽 하늘에서 뭔가가 날아오는 것이
보이더라고. 난 그냥 새일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잠시 후, 들어봐.
난 아무래도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단 말이야."
주위의 인파들은 아버지의 원수가 콧잔등을 후려치고 지나간다 하더
라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집중력을 보였다. 스터벅은 그런 청중을
주욱 둘러보고나서 말을 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건 새일 수가 없었어. 우리 큰아버지가 트리키 가문
의 숲지기였다는 거 알고 있나? 나도 어릴 때 큰아버지를 따라 숲을
많이 싸돌아다녔지. 그래서 새란 새는 대부분 구분한단 말이야. 바로
그랬기에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도 있었겠지. 그건 말이야, 잘
들어. 그건 날개가 없었단 말이야!"
주위의 시민들 중 숲지기 큰아버지가 없다 하더라도 날개가 없는 새
라면 누구에게도 이상하게 보였을 거라고 말하는 시민은 없었다. 그들
은 심지어 스터벅을 향해 엄숙한 경의를 보내기까지 했다. 스터벅 역
시 이런 경천동지할 사건의 목격자로서 가져야할 위엄을 맘껏 뽐내면
서 말했다.
"나는 달아나지 않았어. 제자리에 꼿꼿이 서서 그것을 관찰했지. 에
델브로이의 가호 속에 있는 나에게 무엇인들 무섭겠나." 무서워서 다
리가 굳어버린 것이 아니냐고 묻는 시민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
이 무엇인지를 똑똑이 알 수 있었지. 그것은 사람이었어. 유피넬과 헬
카네스에 맹세코, 그것은 사람이었지. 나는 술이 덜깬 것이 아닌가 싶
어 두 눈을 비벼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사람이었단 말이야." 사람
이었다는 말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지만 짜증내는 시민도 없었다. 스터
벅은 열정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나는 입을 쩍 벌린 채 그 사람을 바라보았지. 화살처럼 곧게 날아온
그 사람은 바로 내 머리 위에서 몇 번 맴돌았지. 바로 이 위를!"
스터벅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켜보이기까지 했고 시민들은 스터벅의
벗겨진 머리가 거룩한 징표나 되는 것처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그 사람이 밑으로 내려오는 거야. 난 용기를 쥐어짜서 말
했지. '안녕하시오! 좋은 아침이죠?' 그러자 그제서야 그 사람은 나를
알아본 거야. 그 사람은 이 정도 높이에 뜬 채 나를 돌아보는데, 후
하! 나는 하마터면 심장이 멎어버릴 뻔했지. 눈이 세 개더라고! 바로
여기, 그래. 여기에 눈이 하나 더 있더란 말이야!"
스터벅은 자신의 미간을 찌를 듯이 가리켜보였고 시민들은 바로 그
장소에서 스터벅의 세번째 눈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커다랗게 떴
다.
"나는 질린 표정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았어. 그러자 그 사내는 싱긋
웃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야. '안녕하시오. 스터벅. 아, 내가 당신의
이름을 안다고 해서 너무 놀라지는 마시오. 나는 바로 이 앞의 건물
에 사는 사람이며, 당신과 이 주위의 이웃들에 대해서라면 그들의 버
릇이나 취미까지도 소상하게 알고 있소.' 생각해보게. 바로 이 앞의
건물이라니, 그건 빛의 탑이잖나! 그래서 나는 단숨에 짐작할 수 있었
지. '마법사이십니까?' 그러자 그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지. '하하! 시
몬슬이라고 하는 풋내기 마법사요.' 이렇게 정중하게 말하는 거였어."
시민들은 시몬슬이라는 이름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발음해보며 그 이
름에 신비로와했다. 그 때 시민들 중 하나가 자신의 외가쪽으로 그 비
슷한 이름을 가진 친척이 있다고 말하여 시민들을 더욱 놀라게 만들었
다. 스터벅은 주의가 다른 곳으로 돌려지는 것을 보자 재빨리 목소리
를 높였다.
"자! 그래서 나는 말했지. '퍽 즐거워보이는군요?' 실제로 그 시몬슬
은 무지무지하게 흥분한 얼굴이더라고. 그러니 나 같은 사람에게 인사
를 다 건넬 정도였겠지. 시몬슬은 고개를 이렇게 끄덕이며 말했어.
'그래요. 기뻐하셔도 좋소, 스터벅. 당신은 내가 가져온 소식을 처음
으로 듣는 사람이 될 거요.' 그 자는 그렇게 말하는 거야. 바로 나에
게."
시민들의 주의는 순식간에 스터벅에 옮겨갔다. 아니, 스터벅이 그토
록이나 고귀한 위치에 서게 되다니! 그런데 그게 무슨 소식일까? 시민
들의 고조된 시선을 충분히 즐기며 스터벅은 시몬슬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위엄있게 말했다.
"오늘은 이 수도에게 잊혀지지 않을 날이 될 거요. 300년을 거슬러,
일곱 빛깔의 지팡이의 주인은 다시 바이서스 임펠로 돌아오실 거요.
앞으로 두어 시간쯤 후. 나는 그 전령으로 온 사람이오. 자, 이제 빛
의 탑을 깨울 때가 되었소. 서둘러야겠소."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시민들은 스터벅의 기대를 배신했다. 시민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았던 것이다. '일곱 빛깔의 지팡이의
주인이 누구야?' 스터벅은 절대로 시몬슬에게 되물었었던 적이 없다
는 듯한 태도로 자신의 이웃들을 한심스럽게 쳐다보며 외쳤다.
"이 멍청한 작자들아, 무지개의 솔로쳐잖아!"
스터벅은 자신이 외친 이름에 대해 이웃들이 보내온 반응을 보며 생
애 최고의 기쁨을 느꼈다. 그의 아내와 그의 딸들은 남편이자 아버지
인 그의 말에 말 울음소리 정도의 가치도 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지
금 이 이웃들이 보여주는 반응이 그에게 터질 듯한 희열을 주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솔로쳐! 솔로쳐라니, 대마법사 솔로쳐 말인가!"
"북방을 휩쓸고 데스나이트를 물리치고 헐스루인 공주를 가르쳤던 그
솔로쳐?"
"무슨 말이야? 솔로쳐는 까마득한 옛날에 죽었잖아?"
"부, 부활?"
이웃들은 그제서야 빛의 탑을 바라보며 모든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
다. 그래서였기 때문이다. 세월마저 숨가빠할 시간이 지나고나서 그들
의 까마득한 사조가 귀환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 마법사가 저토록이
나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해한다는 것과 공포는 별개의 문
제였다. 마법사들의 광란을 돌아본 시민들은 다시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빛의 탑 꼭대기에 올라선 한 노마법사는 생애 쌓아온 모든 기술을 펼
쳐보이겠다는 식으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삼아 갖가지 종류의 영상
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먼저 그는 허공에 커다란 장미 봉오리를 만들
어내었다. 그 장미 봉오리의 꽃잎 사이에서는 엘프의 손이 아닌가 싶
은 하얀 손이 나와있었는데, 그 손에는 빨간 장미가 들려져있었다. 그
리고 그 장미에서는 다시 하얀 손이 나와있었다. 이런 식으로 끝없이
장미와 손이 반복되었다. 그 옆의 여마법사는 으르렁거리는 팬텀 스티
드를, 게다가 꼬리가 있어야할 위치에 머리가 달려있어 양쪽이 다 앞
쪽인 팬텀 스티드를 수십 마리 소환하여 바이서스 임펠의 하늘을 달음
박질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양쪽이 다 앞쪽이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도 달려가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
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간신히 참아넘길 수 있었지만, 한 젊은 마법사
가 불러낸 영상은 급히 출동한 경비대원들을 발작하게 만들었다. 수도
경비대장 콜라이드는 옆으로 보면 그 공포가 덜할 것이라고 믿는 것처
럼 곁눈질로 하늘을 바라보며 외쳤다.
"저거, 저 드래곤 정말 안전한 겁니까?"
빛의 탑에서도 가장 온화한 마법사 키뤼시나는 온화하게 웃었다.
"물론 안전하답니다, 콜라이드."
동료 마법사들로부터는 덜 미쳤다는 이유로 은근히 따돌림당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경비대원들을 상대하는 일을 자임해야 했던 슬픈
여마법사 키뤼시나는 사랑스럽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하늘의 절반을 꽉
채우다시피한 채 꿈틀거리는 드래곤을 가리켜보였다. 하지만 콜라이드
는 절대로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글쎄요. 내가 특별히 까탈스러운 성격은 아닙니다만, 일곱 개의 머
리가 달려 있고 그것들이 상대방의 몸통을 뜯어먹으려드는 드래곤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게다가 저 몸통들은 자신의 몸
통이기도 하잖습니까? 맙소사, 난 머리가 어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건 메타포일 뿐이에요."
"예?"
키뤼시나는 다시 빙긋 웃었다.
"저들을 용서하세요, 콜라이드. 저들은 그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에게 그날 배운 것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아이들과 같답니다. 아
버지 앞에서 노래 부르고 춤추는 어린아이. 당신에게도 아이들이 있
겠죠?"
"내 자식들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뛰어다니며 노래를 불러대는 날개
달린 원숭이를 만들어내지는 않습니다만. 어이쿠, 저리가!"
날개 달린 원숭이는 낄낄거리며 콜라이드의 정수리에서 펄쩍 뛰어올
랐다. 원숭이는 그대로 하늘로 솟아오르며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넋을
잃게 만드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한 감정 풍부한 처녀
는 원숭이의 노래에 눈물을 글썽였고 늙수그레한 거한들도 눈을 찔끔
거리며 거칠게 눈가를 비볐다. 비록 그 원숭이의 노래가 스터벅의 가
게에서 팔리는 잡동사니들의 가격 명세표를 줄줄 불러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감동을 잃는 시민은 아무도 없었다.
키뤼시나는 미안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원숭이를 대신하여 콜라이드
에게 사과한 다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지경이니……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빛의 탑은 개방되지 않는 편
이 좋은 거죠. 완전히 돌아버린 마스터들이 빛의 탑 내부만을 좋아한
다는 것은 콜라이드 당신에게도 퍽 다행스러운 일 아닐까요."
"충심으로 동감하고 싶습니다. 내 대원들이 아무리 날쌔다한들, 저렇
게 빠른 티테이블을 무슨 수로 검거하겠습니까."
그 작은 티테이블은 황홀감에 젖어 사람들의 다리 사이로 8자를 그리
며 달리는 개들과 함께 경비대원들의 다리 사이를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그 티테이블에 입이 달려있었다면 주위의 개들과 마찬가지로
목이 쉬도록 짖어대었을 것은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 때 까마득한 하늘에 떠있던 마법사 - 독특하게도 물구나무선 채로
하늘을 날고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는 별로 신기해보이지 않았다. - 가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우렁차게 외쳤다.
"솔로쳐 님께서 오신다아!"
마법사들의 광란은 극에 달했다. 장미 봉오리를 만들어내던 마법사는
이제 사방으로 장미 꽃잎을 날려대는 장미 폭풍을 만들어내어 시민들
로 하여금 숨이 막히게 만들었다. 빙글빙글 돌고 있던 팬텀 스티드들
은 너무 많이 돌아서 어지러움을 느끼며 추락했다. 다행히도 팬텀 스
티드들은 사람들의 머리에 부딪히기 직전 보다 작고 부드러운 것으로
바뀌었지만 그것은 사람들을 더욱 당혹하게 만들었다. 시민들은 하늘
에서 떨어지는 스컹크들을 피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괴성
을 지르며 아무 방향으로나 미친듯이 달려갔다. 사람들의 혼란에 더욱
놀란 스컹크들은 엉덩이를 곧추세운 유명한 자세를 취한 다음 거침없
는 발사를 개시했지만 스컹크들이 발사한 액체에서는 갓 구운 바닐라
케이크 향이 퍼져나와 시민들을 포복절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솔로쳐가 나타났다.
남쪽 하늘로부터 길다란 지팡이에 올라탄 솔로쳐가 시민들의 머리 위
로 날아왔다. 그가 탄 지팡이는 시민들의 머리 위를 가볍게 한 바퀴
돌고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황금빛 비둘기들이 날아오르고 그 사
이사이로 날개 달린 원숭이들과 빛발들이 한없이 하늘로 솟구쳤다. 장
미 꽃잎은 이제 모든 사람들의 머리와 어깨에 더이상 쌓일 수 없을 정
도로 쌓여있었고 대로에는 포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꽃잎이 깔려 장
밋빛 강이 만들어질 지경이었다. 바로 그런 대로 가운데로 솔로쳐는
그의 백발 위에 장미꽃잎을 한껏 얹은 채 당황하며, 심지어 놀라기까
지 하며 내려서고 있었다.
"이게 왠 난리람. 어쨌든 확실히 빛의 탑이 맞긴 맞나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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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모님이 보내주신 메일입니다. 읽다가 즐거워 이렇게 써봅니다.
천리안 사람들이 영도님에게 보이는 반응
-그사람? 천리안을 무지하게 싫어하나봐. 천리안에는 아이디도 없고
동호회에도 한번 안오잖아? : 하하, 절대로 천리안을 싫어하지 않습니
다. 이상하군요… 가입하지 않았다고 싫어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천
리안만 쓰시고 하이텔을 안 쓰시는 분은 전부 하이텔을 싫어하시는 것
은 아니잖습니까.
-영도님? 너무하지. 왜 천리안에만 퍼가는게 금지냐구. : 어라? 저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는데요? 비평 보내주시면 허락한다고 말했을 뿐입
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군요.
-꺄아~~타자님 소설은 너무 재미있어!!! : (이분 아마 타자의 친척이
아닌가 생각되는데요… 친척 중에 천리안 쓰는 사람이 누구더라?)
-원래 작가들은 다 천리안에 오지 않잖아? 타자님도 그렇지 않을까?
: 작가들은 천리안에 안 가나요? 어라… 천리안에서 활동 중인 작가분
들의 이름도 많이 들었는데.
-영도님...답장을 안해주기로 유명하지. : 할 말 없습니다… 으윽.
-천리안이라는 통신회사가 있다는거 알기나 하실까? --; : 하, 하하.
물론 알고 있습니다. 몇년 전인가, 나우누리도 없을 때 타자는 천리안
과 하이텔을 놓고 어느 걸 고를까 하다가 하이텔을 선택했죠. 이유는?
당시 종량제라는 것이 엄청나게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좀 괴짜라고 하던데? : 아니오. 상당히 괴짜입니다.
-타자님이 천리안에 오시기를 바라느니 드래곤 로드가 이혼하는거 바
라겠다. : (이분은 가정법률 관계에 종사하시는지…)
-이영도요...? 누굽니까? : 너무 어려운 질문이군요.(나는 과연 누구
인가!)
-난 그분하고 이야기하는데 안녕하세요에서 오타가 4번이나 났어. 흑
흑... : 저는 수도 없이 냅니다… 그것도 글에서… 으윽.
-대화하는 도중에 축구를 판타지화 시키면 어떻냐고 물어봤는데 그럼
쥬라기 월드컵이냐고 말하시더군요. : 어라? 이 대화는 기억이 나는데
요… 아아, 어느 분인지 알겠습니다. 하하.
-드래곤라자가 제일 재미있었지. 그런데 그거 쓴 사람 이름이 방지나
던가? : 방지나 님을 모욕하지 마세요. 하하하. (아아, 지아스데자 완
결을 축하드립니다.)
음, 각 통신망에 악명이 높은가 봅니다. 물론 안녕전화에서도 악명이
높겠지만요. 하하하.번 호 : 17948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3-23 01:53
제 목 : [F/W] 시간의 장인.....12
Future Walker
8. 시간의 장인…………12.
"솔직히 놀랐네. 젊은이들. 아주 인상적이었네."
솔로쳐는 기쁜 얼굴로 말했다. 빛의 탑의 마법사들은 그것이 그들의
기량에 대한 칭찬이라고 생각하고는 희희낙낙해했지만 나름대로 건전
한 상식을 가진 키뤼시나는 솔로쳐의 말을 똑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은 저희들의 꿈이자 소망이십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군…… 많은 세월이."
솔로쳐의 독백은 키뤼시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솔로쳐는
숨길 수 없는 감동으로 목소리를 조금 떨며 말했다.
"살아 생전, 나는 항상 핸드레이크의 작은 제자 솔로쳐였지. 늙으막
까지 그랬단 말이야. 내가 대륙의 북방을 정벌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
던 말이 뭐였는지 아나? 걱정마십시오. 당신의 옆에는 내가 있습니다.
언뜻 듣기 좋은 말 같지? 하지만 그렇지 않아. 핸드레이크였다면 그
런 말을 꺼낼 필요가 없었겠지. 그들은, 그들은 무의식중에 나를 조력
이 필요한 인간, 그들과 같은 별볼일 없는 인간으로…… 관두지. 그
들도 물론 훌륭한 무사들이었고 장군들이었지……."
솔로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빛의 탑의 마법사들은 그들에게 익숙치
않은 인간관계의 복잡한 문제에 잠시 얼떨떨해했지만 키뤼시나는 다시
한번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로쳐는 낮으막하게 말했다.
"그래도, 나는 한번만이라도 내 사부님처럼 동료 장군들에게 미움받
고 경원시당하기를 바랐네. 친절하게 건네어지는 도움의 손길이 아니
고. 건방져보이나? 하하하."
"자존심과 고독의 문제군요. 이해합니다, 솔로쳐."
솔로쳐는 환하게 웃으며 키뤼시나를 바라보았다.
"고맙네, 아름다운 후학이여."
나이 마흔을 넘겨 원숙함이 가득한 키뤼시나는 이런 호칭에 쑥스러워
하는 척함으로써 솔로쳐를 웃음짓게 만들었다. 솔로쳐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민들의 눈에 서린 경외감과 황홀감은 솔로쳐의 주름살 가득한 눈가
를 촉촉하게 만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이다.
시간은 그의 이름에 전설의 마력을 더하여 핸드레이크의 이름과 같은
정도의 위엄과 신비를 부여했다. 이것은 켄턴의 시민들이 그를 기억하
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켄턴의 시민들은 그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다. 솔로쳐는 수도의 시민들마저 그를 되살아난 전설로
서 대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솔로쳐는 기세좋게 말했다.
"일단은 수도 방문의 목적부터 해결해야겠지. 수도 경비대장 콜라이
드라고 하셨나? 오래간만에 와서 길을 도통 모르겠군. 세류델헨 성으
로 안내해주겠나?"
"안내하기에 앞서……" 콜라이드는 자신이 배짱이 대단한 사람임을
증명해보였다. "뭔가 신원을 확인할 것이 필요합니다만."
"응? 무슨 말인가. 내가 솔로쳐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아니오. 저는 당신이 솔로쳐이기에 더욱 증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
니다. 당신이…… 언데드가 아닌지."
콜라이드는 이렇게 빛의 탑의 마스터들이 모두 뛰쳐나온 거리에서 감
히 그들의 사조를 의심할 정도로 배짱센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부
하들은 그렇지가 못해서 모두들 눈이 튀어나올 듯한 얼굴로 그들의 대
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진노한 마스터들이 이 거리 일대를 초토화시켜버리거나 눈에
들어오는 모든 시민들에게 3년이 세번씩 세번 반복될 동안 악운만이
가득하라고 저주를 거는 일 등은 일어나지 않았다. 빛의 탑의 마법사
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재미있어 죽겠다
는 식으로 웃어대었고 어떤 마법사는 웃다가 못견뎌 제자리에서 공중
제비를 돌기도 했다. 그 가운데서 솔로쳐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콜
라이드를 바라보았다. 솔로쳐는 뭐라고 말하려 하다가, 문득 손을 들
어 태양을 가리키며 말했다.
"햇살이 참 곱지 않나, 콜라이드?"
콜라이드는 헛기침을 했다. 태양빛 아래를 태연하게 걸을 수 있는 언
데드는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안내하겠습니다."
"여보게. 내가 만일 언데드였다면 내 후배들은 겉모습 따위에 신경쓰
지 않고 벌써 오래전에 나를 박살내놨을 걸세. 난 그들이 한번 주저해
보지도 않을 거라는데 이 지팡이를 걸어도 좋아.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부활하긴 했네. 그리고 난 지금 그 사실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전하를
찾아뵙고자 하는 것이네."
"잘 알겠습니다. 일동 차렷!"
콜라이드는 재빨리 몸을 돌려 경비대원들에게 구령했다. 경비대원들
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국빈 호위의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그들
의 어깨에서 꺅꺅거리는 원숭이나 그들의 다리 사이로 질주하는 티테
이블이 없었다면 그들은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별 만큼이나 엄숙해보
였을지도 모른다.
먼저 달려간 경비대원에 의해 임펠리아에 솔로쳐의 방문 소식이 전해
졌다. 궁성의 안살림꾼이자 영접꾼 노릇도 하는 궁내부장 리핏 트왈리
전은 절망적으로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죽었다가 되살아난 궁정마법
사' 를 맞이하는 예법이 어떻게 되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리핏 트
왈리전은 침착하게 생각하려 애썼고 마침내 솔로쳐가 죽는 그 날까지
궁정마법사였음을 떠올렸다. 혹은 그런 기록을 보았음을 떠올렸다. 그
이후로 핸드레이크나 솔로쳐가 있었던 지위에 도전하려드는 마법사는
없었고 그래서 궁정마법사는 궁성 수비대의 대장으로 직위가 변경되어
대대로 마법사가 궁성 수비대장을 맡아왔다……라는 것까지 떠올리고
는 리핏 트왈리전은 흡족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기억들이 닥
쳐올 당혹스러운 사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떠올린 리
핏 트왈리전은 흡족해졌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침울해졌다.
그래서 솔로쳐는 리핏 트왈리전이 아무런 대비도 못한 상태에서 궁성
임펠리아의 도개교를 당당하게 걸어들어왔다. 뒤로는 환호하는 시민들
과 그들을 반쯤 돌아버리게 만들 정도의 환상을 계속 만들어내는 빛의
탑의 길드원들을 대동한 채. 그래서 궁성의 안뜰에 서서 들어오는 솔
로쳐를 보던 리핏은 절망적인 심정 속에서 자신의 왼손을 입안에 쑤셔
넣고 졸도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려야 했다.
하지만 의외의 인물이 리핏을 구원했다.
솔로쳐가 마침내 성문을 통과하여 기절해버리고 싶어하는 리핏에게로
걸어들어올 때, 궁성 안뜰에서 밀짚 모자를 눌러쓴 정원사가 어슬렁거
리며 걸어왔다. 솔로쳐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이 인물을 바라보았
다. 정원사는 눌러쓰고 있던 밀짚모자를 위로 올리고는 솔로쳐를 바라
보았고, 그 아래에서 여자의 얼굴이 나타나자 솔로쳐는 조금 놀랐다.
정원사 역시 놀란 표정으로 솔로쳐와 성문 밖에서 열광하는 군중들을
번갈아보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정원사는 손을 바지에 쓱쓱
문질러 닦고는 솔로쳐에게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데미라고 부르세요."
솔로쳐는 그 손을 마주잡고 잠깐 흔들며 말했다.
"아, 궁성의 정원사이신가 보군요. 데미 양."
데밀레노스 공주는 미소를 지었다.
"예. 그런데 성함이?"
"솔로쳐라고 하오."
데미 공주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솔로쳐를 바라보았다.
"혹시 아름다운 별명을 가지신 그 솔로쳐 말씀인가요?"
"무지개의 솔로쳐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요."
데미 공주는 솔로쳐를 위로부터 아래로 주욱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아래에서부터 위로 훑어보았다. 데미 공주는 잠시 고민에 잠긴
표정으로 솔로쳐를 보다가 힘들게 말했다.
"음…… 요즘 그쪽 세계 날씨는 어떤가요."
"뭐요?"
"천국 말이에요. 뭐, 날씨 이야기는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무난한 인사고 저 같은 정원사에겐 특히 관심있는 인삿말이랍니다."
솔로쳐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막 천국의 날씨에 대한 해괴망
측한 이야기를 지어내려고 결심했을 때 궁성 본관의 정문에서 또다른
사내가 걸어왔다. 사내는 솔로쳐를 향해 약간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무지개의 솔로쳐. 환영합니다. 저는 카알 헬턴트라
고 합니다."
퍼걸러의 지붕에 있는 덩굴들 사이로 봄햇살이 떨어졌다. 데미 공주
는 자신의 뜰의 퍼걸러에 300년만에 부활한 대마법사가 앉아있는 것은
자신의 꽃에 별로 영향력 있는 사건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꽃밭
앞에 쭈그려 앉은 채 퍼걸러를 싹 잊었다.
엄숙한 걸음걸이로 다가온 궁내부원은 다기가 든 쟁반을 들고 와서는
카알과 솔로쳐가 앉아있는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차를 따르려 했다. 하지만 카알은 손을 들어 궁내부원을 제지하고는
손수 찻주전자를 기울여 솔로쳐의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솔직히, 좀더 조용한 방법으로 찾아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솔로쳐는 입술을 조금 뒤튼 채 카알의 얼굴을 마주보았지만 눈 앞의
사내의 정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카알 헬턴트라고 합니다." 이것
이 카알이 솔로쳐에게 준 자신에 대한 정보의 전부였다. 그래서 솔로
쳐는 어쩔 수 없이 익숙지 않은 추리에 도전해야 했다. 정체를 밝히지
않는 사람을 상대로 정체를 추측하는 것. 헬턴트라는 성을 보니 국왕
은 분명히 아니고, 직함을 밝히지 않았으니 궁성의 관료도 아닐 것이
다. 그렇다면 허수아비 국왕을 등에 업은 전통적인 베일 뒤의 국왕인
것일까? 하지만 카알의 손을 본 솔로쳐는 그런 낭만적인 생각도 포기
해버렸다. 카알의 거친 손마디는 분명 대귀족의 손이 아니었다. 카알
은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이 그들 시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물론 저희들은 당신을 환영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렇
게 찾아주셨던 것처럼 빠르게 사라지신다면 그들이 절망할 것은 분명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당신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당신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당신 국왕이오?"
솔로쳐의 갑작스러운 질문은 카알을 당황하게 했다.
"예?"
"나는 전하를 만나러 왔소만."
자. 이제 말해보거라, 어린 아가야. 솔로쳐는 진지한 태도로 카알의
대답을 기다렸다. 솔로쳐는 솔직한 심정으로 '제게 말하시는 것이 곧
국왕 전하께 말씀하시는 겁니다.' 혹은, '국왕 전하께서는 아무나 만
나주시지 않으십니다.' 어쩌고 하는 대답이 나오면 카알의 머리를 지
팡이로 후려칠 생각을 하며 즐겁게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당신의 국왕이 아닐 텐데요, 솔로쳐."
"뭐요?"
"당신은 죽었잖습니까. 기사라도 그 충성의 서약은 죽음이 그를 평안
하게 할 때까지로 제한합니다. 더군다나 당신은 기사도 아닌 마법사이
시잖습니까."
솔로쳐는 잠시 당황하여 카알을 바라보았다. 은근한 유혹, 교묘한 은
유 등에 대해서는 준비하고 있었지만 이런 원론적인 질문을 던져올 줄
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카알은 정말 궁금하다는 식으로
질문해왔다. 솔로쳐는 기침을 몇 번 하고 말했다.
"그야 이 시대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국왕 전하께 설명드려야 할
것 같아서기 때문이오."
"이 시대에 일어나는 일들이오?"
"부활 말이오. 나나 천공의 기사, 그리고 데스나이트들에게 일어난
일 말이오."
카알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시겠지만, 사실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이 부활하셨습니다."
"그야 당연하지!"
"예?"
"당연하다고 했소. 시간을 비끄러맬 수 있는 자가 우리들 뿐만은 아
닐 테지. 당연히 많은 자들이 부활했을 거요. 아아, 정정. 그렇다고
모든 죽은 사람들이 부활한 것은 아닐 테지. 예를 들면…… 루트에리
노 대왕 같은 이는 부활하시지 않았을 거요."
카알은 눈이 번쩍 뜨여지는 것을 느꼈다.
"과연 말씀하신 바대로입니다. 대왕님의 부활 소식은 없습니다."
솔로쳐는 신이 나서 말했다.
"그럴 줄 알았지! 그래, 또 예를 들어볼까? 흐음. 아마도 여덟 별 중
부활한 이는 아무도 없을 거요. 세류델헨 전하나 에리네드 전하께서도
부활하시지 않았을 거요."
"무지개의 대마법사님의 추측에 틀린 바 없습니다. 놀랍군요."
무지개의 대마법사라는 호칭에 솔로쳐의 미소가 커졌다.
"놀랄 것 없소. 원인을 아는 자는 당연히 결과도 짐작할 수 있는 거
지."
"원인을 아시는 겁니까? 조금 전 시간을 비끌어맨다고 하셨는데……"
"아아, 알고 있지. 그래서 수도로 날아온 거 아니오. 나는 켄턴에서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것을 배웠소."
솔로쳐는 잠시 말을 멈춘 채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레이의 일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와, 그리고 그의 그리폰에 일어났던 일. 그러나
그에게 결정적으로 확신을 준 것은 딤라이트의 어린 애인인 케이트였
다. 솔로쳐는 케이트에 대해 생각하느라 다시 빙그레 웃었다. 카알은
자꾸 바뀌는 솔로쳐의 표정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상념은 빠르게 지나갔고 솔로쳐는 다시 침착하게 말했
다.
"그래서 결국 이 사태의 원인을 알게 되었지. 아, 다시 정정. 원인은
아직 모르오. 하지만 그 규칙에 대해서는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소."
카알은 상체를 앞으로 바싹 내밀며 말했다.
"규칙을 아신다고요?"
"그렇소."
"어떤 규칙이지요?"
"국왕 전하께 알려드릴 참이오."
솔로쳐는 그렇게 말한 다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찻잔을 들어올렸
다. 그리고는 짓궂은 눈으로 찻잔 너머 카알을 바라보았다. 솔로쳐를
살살 구슬려 대답을 들으려고 마음먹었던 카알은 세 가지 깨달음을 느
끼며 아찔해했다. 첫째, 솔로쳐는 카알의 속셈을 모조리 짐작했다는
것. 둘째, 그래서 솔로쳐는 거꾸로 카알을 안달복달하게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셋째, 자신이 거기에 깜쪽같이 넘어갔다는 것.
카알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좋습니다. 샌슨 퍼시발 군을 기억하십니까?"
"알고 있소."
"제 친구입니다. 제가 그곳으로 보냈지요."
"전하가 보낸 것이 아니란 말이군."
"예."
"네놈은 국왕을 등에 업은 이 시대의 실권자 같은 게냐?"
카알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빙그레 웃었을 뿐이었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이는데. 국왕 전하의 손님을 가로챌 수 있는 녀석은 흔치
않아."
"저는 전하의 손님을 가로챈 적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이곳에 계시
니까요."
솔로쳐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카알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부지
불식간에 말이 흘러나왔다.
"저, 전하?"
카알은 기절초풍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예? 어이쿠! 말씀 조심하십시오. 진노한 전하께서 제 목을 쳐버리시
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솔로쳐는 그만 어리둥절해버렸다. 그러나 잠시 후 솔로쳐는 펄쩍 뛰
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쟁반을 든 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미소짓고
있는 궁내부원을 바라보았다.
궁내부원은 웃으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궁정마법사님. 나는 닐시언 바이서스라고 합니다. 모자
란 머리를 나약한 몸에 얹은 채 감히 바이서스의 왕홀을 차지하고 있
는 자입니다. 지금은 왕홀 대신 쟁반을 차지하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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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란 투리스모 엔딩곡을 듣고 있습니다. 레이싱 게임의 엔딩곡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감상적. 아아, 따스한 봄의 밤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어도 이곳 남도는 무시무시한 꽃샘 추위. 으윽.
좋은 밤 되세요.번 호 : 18088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3-26 00:29
제 목 : [F/W] 시간의 장인.....13
Future Walker
8. 시간의 장인…………13.
"이 무슨 해괴망측한 장난이시냐고 고함 질러야겠지만, 재미있군요."
솔로쳐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길시언 바이서스의
아우이자 현 바이서스 국왕 닐시언 바이서스는 왕홀 대신이라고 말하
던 그 쟁반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의자에 앉았다.
"예절 차리지 않아도 돼서 더욱 좋긴 합니다만, 이유는 뭡니까?"
솔로쳐의 질문에 닐시언 국왕은 쓴웃음을 지었다.
"암살자 때문이지요."
"예?"
"이 시대의 풍문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바이서스는 자
이펀과 전쟁 중입니다. 사실 어제만 해도 이 아름다운 궁성에 초청받
지 않은 밤손님이 찾아들었습니다. 그 자는 저기 있는 제 누이 데밀레
노스를 암살하려 했지요."
"맙소사, 저런!"
"예. 참으로 무서운 일……"
"정원사가 아니고 공주님이셨군요?"
"……예."
닐시언 국왕과 카알은 머쓱한 얼굴이 되어 솔로쳐를 바라보았다. 솔
로쳐는 데미 공주를 돌아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가 감개무량한 얼
굴로 말했다.
"이건 위대한 왕가의 독특한 전통인 것인지. 왕가의 여성분들은 항상
이러셨습니까?"
닐시언 국왕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헐스루인 공주님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분 또한 공주처럼 행세하시는 일에 서툴렀다고 들었습니다."
"어디 서투른 정도겠소. 아예 신경도 쓰지 않으셨지요. 참으로 대범
하신 분이셨지요. 그 분이 임펠리버 홍수건 때 보여주신 일들에 대해
서는 들으셨소? 세류델헨 전하께서 기록을 절대 남기지 않을 것을 명
하셨는데 그 이야기가 전해졌을지 모르겠군요."
닐시언은 그만 웃어버렸다.
"왕명으로도 언로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에 대한 증거가 될 것입니
다. 헐스루인 공주께서 페티코트 차림으로 수재민들을 구하러 뛰어다
니신 일 말씀이지요? 당시 궁정마법사의 활약상 또한 잘 들어 알고 있
습니다."
솔로쳐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저 유명한 임펠리버 홍수, 즉 바이서스
임펠의 6할 이상이 침수되었던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
기 시작했다. 그 당시 핸드레이크의 부재중 궁정마법사 대행 정도로
취급되던 솔로쳐는 이 전무후무한 자연재해에서 자신의 솜씨를 마음껏
뽐내었다. 솔로쳐는 바이서스 임펠을 완전 침수의 위기에서 구해내었
을 뿐 아니라 추후로 다시는 홍수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임펠리버의 모
양 자체를 뜯어고쳐버림으로써 사람들을 경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무엇보다 유명한 것은 '페티코트 차림으로 수재민들을 구
출한' 공주님에 대한 일화였다. 닐시언 국왕은, 사실 헐스루인 공주는
바쁘게 뛰어다니느라 치맛자락을 약간 걷어올린 것에 불과하지만 공주
의 속치마를 본 시민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그 때문에 그런 소문
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는 크게 웃었다. 그 동안 카알은 300년에
걸친 가족사의 확인의 현장에서 겸허하게 소외된 위치를 감수해야 했
다. 하지만 노마법사의 이야기가 끝을 모르고 전개되자 카알은 점잖게
입을 열었다.
"저, 솔로쳐 님. 아까 부활의 규칙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만……"
솔로쳐는 눈을 껌뻑거리며 카알을 보다가 자신의 이마를 딱 쳤다.
"아아, 규칙! 그렇지. 그것에 대해 말하러 이곳까지 온 것이었지. 용
서하십시오, 전하."
"아닙니다. 죽음마저도 뛰어넘어 왕가를 위해 달려와주신 궁정마법사
의 충정에 오로지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 궁정마법사께서 발견하신
그 규칙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매우 간단한 겁니다."
솔로쳐는 그렇게 말을 시작했으나 그 말과는 상당히 다른 표정을 지
었다. 잠시 카알과 닐시언 국왕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솔로쳐는
힘들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죽었다 살아난 궁정마법사가 설명하기에는 조금 복잡합니
다……"
"그런가요……"
솔로쳐는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난처해했다. 카알은 솔로쳐가
머릿속으로 명확한 해답을 준비해두고 있을 것을 의심치 않았다. 다만
이 노마법사는 그것을 타인에게 들려줄 준비는 별로 하지 않았던 것이
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어야할지 몰라 주춤거리던 솔로쳐는 자리에
서 일어났다.
"잠시 따라오시겠습니까?"
물론 닐시언 국왕이나 카알 모두 단순히 괴벽을 부리기 위해 '아니
오.'라고 말하는 취미는 없었으므로 노마법사를 따라 의자에서 일어났
다. 솔로쳐는 휘적휘적 걸어가서는 데미 공주에게 다가섰다.
데미 공주는 꽃들에 그림자가 지자 누가 다가섰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는 고개를 돌려 솔로쳐를 바라보았다. 솔로쳐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실례, 공주님이시라고요?"
"예."
"동시에 정원사이시기도 하고요."
"예."
"이 꽃은 무엇입니까?"
솔로쳐는 지팡이의 끝을 살짝 들어 낮은 키의 꽃을 가리켰다. 카알은
솔로쳐가 가리키는 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데미 공주가 요근래 계속
근심스러워하고 있는 팬지꽃이었다. 하지만 국왕과 자신을 이끌고온
솔로쳐가 갑자기 공주와 노닥거리는 이유는 짐작할 수 없었다. 데미
공주는 걱정하는 얼굴로 말했다.
"팬지에요. 개화가 되면 쉽게 알아보실 텐데."
"수심이 깃든 얼굴입니다만?"
"아아, 잘 피어나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어요."
"아아, 그런가요. 그런데 제가 해결책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
다."
데미 공주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떻게요? 화훼에도 관심이 있으신가요?"
"아니오. 걱정거리를 대처하는 보편적인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예?"
솔로쳐는 빙긋 웃으며 몸의 중심을 조금 뒤로 옮겼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를 걱정거리가 있을 때 가장 좋은 해결책은 그
것을 없애버리는 거지요. 이렇게."
솔로쳐는 그렇게 말하며 발을 내려 팬지꽃을 꽉 내리밟았다. 솔로쳐
가 무슨 행동을 하는 건지 알아보기는 했지만 설마 정말로 그렇게 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데미 공주는 솔로쳐가 팬지꽃을 다 뭉개
어버릴 때까지 입만 조금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하며 멀건히 바라보기
만 했다. 솔로쳐는 꼼꼼하게 팬지를 밟아서는 그 피지 못한 봉오리와
줄기들이 으깨어지고 녹색 진물과 초록빛 조각들만 남을 때까지 비벼
대었다.
"무, 무슨 짓이오!"
분명히 늦었다고밖에 할 수 없는 시점에서 닐시언 국왕이 거친 음색
으로 외쳤다. 카알은 이를 악문 채 행동으로 들어갔다. 그는 솔로쳐의
등을 밀어버렸다. 노마법사가 행여나 넘어져 허리라도 어떻게 될 것인
가 걱정하는 태도는 전혀 아니었다. 카알은 솔로쳐를 내동댕이치듯이
밀어내었다. 두 남자 모두 이 꽃들이 데미 공주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지는 잘 알고 있었다.
데미 공주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얼굴은 소리높이
비명을 지르는 자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팬지
꽃에게로 다가갔다. 데미 공주는 박살난 꽃대궁을 힘들게 어루만지다
가 고개를 들어 솔로쳐를 바라보았다. 미리 각오하고 있었지만 솔로쳐
는 데미 공주의 눈에 담긴 비탄과 억울함에 헛바람을 들이켰다.
"왜…… 왜……?"
데미 공주는 말을 제대로 맺지도 못하고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녀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아롱지다가 마침내 아래로 떨어졌다. 데미
공주는 눈물을 철철 흘리며 부서진 잎사귀와 줄기들을 어루만졌다.
"왜……?"
솔로쳐는 입을 꽉 다물었고 팔짱까지 끼었다. 닐시언 국왕과 카알은
험악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솔로쳐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고함을 내지
르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들은 동시에 외쳤고 그래서 그들 자신도
자신의 목소리를 구별할 수 없어서 잠깐 멈춰야 했다. 그 순간, 솔로
쳐는 나직하게 말했다.
"데미 공주님은 정말 정원사요."
"뭐야!"
닐시언 국왕은 거의 막말로 외쳐대었다. 그가 궁정마법사의 멱살을
잡아 패대기치기라도 할 듯한 태세로 앞으로 걸어갔을 때였다. 카알이
황급히 국왕의 어깨를 붙잡았다. 닐시언 국왕은 고개를 홱 돌렸고 카
알은 재빨리 국왕의 어깨를 놓았다.
"무례를 용서하소서, 전하."
"당신도 저 꽃들이 데미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는 잘 알잖소!"
"예. 알고 있습니다…… 정정하겠습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
다."
닐시언 국왕은 카알의 횡설수설을 들으며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
다. 그러나 카알은 입술을 조금 적신 다음 힘들게 말했다.
"하지만 이제서야 공주 전하께서 얼마나 저 꽃을 사랑하시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요!"
카알은 손을 조금 내밀며 말했다.
"보소서, 전하."
닐시언 국왕은 카알의 손을 따라 땅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숨을
멈추었다.
팬지꽃이 다시 자라나고 있었다.
아니, 자라난다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모여들고 있었다. 부서지고
찢긴 조각들이 한데 모이며 팬지들은 제 모습을 갖춰갔다. 데미 공주
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닐
시언 국왕이 의미없는 신음을 흘리는 가운데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팬
지는 미풍에 그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꽃을 만지던 데미 공주는 고개를 들
어 솔로쳐를 바라보았다.
"마법사님께서 하신 일인가요?"
솔로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공주님께서 하셨습니다."
"제가요?"
솔로쳐는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공주님이 진짜 정원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조금이라도 있었
다면 이런 과한 실험은 하지 못했겠지요. 하지만 저는 조금 전 전하의
설명으로 확신을 가졌습니다. 공주님은 제가 모시던 헐스루인 공주님
을 많이 닮으셨습니다."
데미 공주는 혼란으로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진짜 정원사…… 무슨 말씀이신지……"
솔로쳐는 데미 공주의 얼굴에서 헐스루인 공주가 아닌 또다른 여인의
얼굴을 보았다. 어린 키티 데시. 어머니를 부활시킨 것은 바로 너였다
고 솔로쳐가 말해주었을 때 케이트는 꼭 저런 표정을 지었었다.
"꽃들을 정말 사랑하고, 피어보지도 못한 꽃들의 죽음에 눈물 흘리
고, 마침내 그들을 부활시킬 정도로 사랑하는 정원사 말입니다."
솔로쳐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키티 데시는 벌써 오래 전에 어머니
를 부활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케이트는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니,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알고 있었을지 몰라
도 겉으로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믿는 멍청한 어른들 때
문이다. 그들은 케이트의 어머니가 하늘에 있다고 말했고, 어린 키티
데시는 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딤라이트의 도움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 케이트는 당장 그 어머니를 부활시켰
다. 솔로쳐는 쓴웃음을 지었다. 레이디를 보호하는 것이 기사의 숙명
이라지만, 엄숙한 딤라이트가 어린 레이디 키티 데시를 도운 사실에
는 쓴웃음 이외에 다른 표정을 짓기 힘든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래. 이것이 규칙이야.
"잠시라도 공주님께 심려를 끼쳐드린 것에 대해 사과드리겠나이다.
닐시언 전하께서는 지금 궁정마법사를 참수한 첫번째 바이서스 국왕이
되시고 싶은 표정이군요. 하하하. 용서하십시오, 전하."
닐시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게 도대체…… 당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요? 당신 마법이 아닙니
까?"
"아닙니다."
"그럼……" "그럼 이것이 요즘들어 일어나는 사건들의 규칙입니까?"
닐시언 국왕의 말은 카알에 의해 완성되었다. 국왕은 카알에게 고개
를 끄덕여보이고는 다시 솔로쳐를 바라보았다. 솔로쳐는 씩 웃었다.
"그렇습니다. 전하. 바로 이것이 규칙입니다."
카알은 물어뜯기라도 할 듯한 태도로 - 표정은 그렇지 않았지만 급하
게 달려드는 태도는 꼭 그러했다. - 질문했다.
"이해가 안됩니다. 우리들이 죽은 이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들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을 부활시켰단 말입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설명되
지 않는 점이 너무 많습니다. 설령, 그래요. 대왕님은 어떻습니까? 루
트에리노 대왕 말씀입니다. 그분은 바이서스 국민 전체의 사랑과 존
경을 받습니다. 그런데 왜 그 분은 부활하시지 않는 겁니까?"
닐시언 국왕은 깜짝 놀란 표정이 되더니 곧 솔로쳐가 대왕을 죽이기
라도 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솔로쳐를 바라보았다. 솔로쳐는 고개를 가
로저었다.
"아니오. 잘못 이해하셨소, 카알."
"예?"
"사랑이 아닙니다…… 물론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것과는
다릅니다. 나를 볼까요. 나는 대마법사의 제자입니다. 사람들이 그들
의 애정으로 부활할 상대를 고른다면 나보다는 내 사부님이 부활될 가
능성이 높지요. 하지만 부활한 것은 납니다."
"그럼?"
솔로쳐는 씁쓸한 얼굴이 되었다.
"내가 부활한 이유는 나 자신 때문입니다. 실제로 근래 일어나고 있
는 많은 부활은 대개 그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예?"
================================================================
친구가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습니다. 얼마 전의 일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엄청 오래되었습니다. 올해 초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
지도 그 글을 읽지 않았습니다. 나는 나쁜 놈입니다… 퍼버벅!
큰맘먹고 신춘문예작품집을 샀습니다. 오로지 20 페이지 남짓한 친구
의 단편을 보려고 530여 페이지나 되는 책을 샀습니다. 망할…
베고 잘까 생각 중입니다. 친구한테 들키면 맞아죽겠지만.번 호 : 18089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3-26 00:30
제 목 : [F/W] 시간의 장인.....14
Future Walker
8. 시간의 장인…………14.
다시 의자에 앉은 솔로쳐는 차분한 태도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 설명
은 그렇게 조리있는 설명은 아니었다. 솔로쳐는 실험가나 학자의 성향
은 넘치도록 가지고 있을진 몰라도 저술가나 연설가의 성격은 별로 가
지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주관심사는 인간을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마나를 다루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솔로쳐는 자신이 웅변의 대
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가 먼저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담담하
게 사실만을 말했기에 닐시언 국왕과 데미 공주, 그리고 카알은 솔로
쳐의 설명을 듣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부활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본질은 같소. 조금 전 말
했던 키티 데시의 어머니나 공주님의 꽃 같은 경우와, 나나 천공의 기
사들, 그리고 데스나이트들의 경우가 있소. 그 두 가지는 타자에 의한
부활이냐 자신에 의한 부활이냐로 나뉘어질 수 있소. 그러나 그 본질
은 간절한 바램이라는 점에서 같소."
카알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글쎄요…… 솔로쳐 님의 경우는 켄턴 시민들의 간절한 바램으로 부
활하신 것일 수도……"
"아니오!"
솔로쳐는 단호하게 말했다. 워낙 격한 감정의 분출에 테이블은 잠시
고요해졌다. 솔로쳐는 사나운 표정으로 테이블을 노려보다가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아니오, 카알. 그렇지 않소. 이제는 잘 알게 되었소. 그것은 나 자
신에 의한 부활이었소. 켄턴 시민들은 유피넬의 저울에 걸린 데스나이
트의 추로서 내가 부활했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소.
내 부활에는 전능한 신의 섭리 같은 것은 개입되지 않았소. 다만 한
인간, 그것도 자괴심에 빠져있었던 한 인간의 나약한 의지가 있을 뿐
이오."
테이블은 좀 더 깊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카알은 힘들게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부끄러운 일이오……"
"예?"
솔로쳐는 자신의 얼굴을 조금 쓰다듬었다.
"내 후학들은 말할 것도 없고 켄턴 시민들이나, 이곳 바이서스 임펠
의 시민들이나 모두들 나를 대마법사로 기억하고 있었소. 하지만 한
사람은 그렇지 못했지. 그건 바로 나요. 대마법사의 제자, 차석 궁정
마법사, 핸드레이크라는 저명한 책에 따라다니는 부록…… 나 스스로
가 나에게 붙인 이름들이오. 다른 사람들에게 비하받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가 먼저 자신을 비하하며 사는 삶, 이해할 수 있겠소?"
"이해됩니다."
카알은 정말 이해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한다. 비
웃음을 당하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가 먼저 자신을 비웃어버리는 사람
은 의외로 많다.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은 어느 한 시점에서 그런 행
동을 취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부활했던 거요. 나 스스로가 나를 안타깝게 여긴 거지.
자기연민이라고 불러도 좋고 자기집착이라고 불러도 좋소. 데스나이트
의 예는 퍽이나 확실한 예일 거요. 그들을 안타깝게 여길 자들이 그들
자신 이외에 그 누가 있겠소? 그들이 스스로를 안타깝게 여긴 것인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분노한 것인지는 카알 당신이 판단해보구려. 어쨌
든 여기에는 안타깝게 죽어간 자들이 스스로에게 가지는 연민과 죽음
에 대해 가지는 분노, 뭐 그런 것들이 관련되어있소. 자이펀어에 이런
것을 나타내는 짧은 말이 있는데……"
카알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Hjan이지요."
솔로쳐는 고개를 끄덕였다.
"Hjan? 그래요. 그것인 것 같소. 어쨌든 천공의 기사들, 먼 나라까지
원정해서 젊고 활기찬 나이에 죽어야 했던 그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받
아들이지 못하고 부활했소. 이것은 자신에 의한 부활이오. 키티 데시
의 어머니나 데미 공주의 팬지꽃 같은 경우는 아까도 말했듯이 타자에
의한 부활이고. 두 번이나 부활한 킨 크라이의 경우도 있지. 아까 말
했던 그레이 휠드런의 그리폰 킨 크라이는 먼저 그레이와 함께 부활
했고, 그의 죽음에 대해 절절하게 안타까워한 그레이에 의해 다시 한
번 부활했소."
"그럼 대왕이나 여덟별이 부활하지 않았다고 단언하신 것은……?"
"대왕의 유명한 말씀이 해답이 될 거요. 죽음은 약속된 휴식이라는."
"아아……"
300년 후의 세대들은 다만 피상적인 느낌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지만
실제로 그의 모습을 보고 그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던 솔로쳐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 분은 없으셨소. 스스로 일어서서, 스스로 걸어가지요. 오만하
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의존적이고 비겁한 자들의 눈에 보이
는 모습일 뿐이었소. 그분은 끝까지 자신으로 살았고 자신으로 죽었
소. 남겨진 안타까움이 설마 조금은 있을지 몰라도, 대왕께서는 그것
에 슬퍼하고 연연해하시지는 않을 거요. 따라서 이 시대의 어떤 알 수
없는 이유가 죽은 자들의 안타까움을 자극한다 하더라도 그 분만은 그
런 자극에서 자유로우실 거요. 내가 자신있게 대왕을 거론한 것은 그
런 확신 때문이오."
카알은 잠시 깊은 생각에 빠진 표정을 지으며 퍼걸러의 지붕을 장식
하고 있는 덩굴들을 바라보았다. 데밀레노스 공주는 몸을 조금 앞으로
내밀며 솔로쳐에게 말했다.
"제가 정리해봐도 될까요."
"듣겠습니다."
"작금의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이 부활이라는 사태들은, 어떤 죽은 자
들에 대해 그 스스로가, 혹은 그를 기억하는 다른 사람이 가지는 안타
까움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인가요. 그 스스로이든 아니면 다른 사람이
든 그에 대한 안타까움이 깊으면 그 자는 부활한다는 것인가요."
"그렇소."
"하지만, 그런 안타까움은 어느 시대의 누구에게나 있었을 텐데요."
"공주님. 그래서 나는 규칙이라고 했지 원인이라고 하지 않았던 겁니
다."
"시간 정지……"
카알이 갑자기 말했다. 솔로쳐와 데밀레노스 공주의 대화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닐시언 국왕은 카알을 바라보며 반문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카알?"
"시간이 정지했기 때문이군요. 그렇잖습니까, 솔로쳐?"
솔로쳐는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렸지만 그것은 긍정의 뜻을 나타낸다기
보다는 그저 카알의 생각하는 방식에 대한 동조였다. 솔로쳐는 확실성
이 없는 어투로 말했다.
"그것이 가장 두드러지며, 근사하게 맞아떨어질 것 같은 원인이기는
하오. 시간이 정지하기 전에는 그 어떤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도 과거
를 붙잡아매어둘 수는 없었을 거요. 그리고 그 때문에 그리움과 안타
까움은 더욱 깊어질 수 있었겠지. 하지만 이 시대에서 시간은 정지했
고, 그래서 현재는 스스로를 사랑하여 자신을 붙들어매었고, 과거를
향한 그리움은 그들을 불러들였소. 미래…… 미래를 그리워하고 안타
까워하는 사람은 없을 거요. 그러니 미래는 오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시간은 정지되었소."
닐시언 국왕과 데미 공주는 동시에 눈을 찌푸렸다. 솔로쳐는 빙긋 웃
으며 말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모르겠군요."
"어떤 것이 원인이고 어떤 것이 결과인지는 판단하는 것은, 때론 가
장 간단해보이는 일에서도 뜻밖에 지난한 법이지요. 더군다나 요즘과
같은 이 복잡한 사태에서는 더욱 그러할 게고."
솔로쳐는 말을 마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궁성의 돌벽을 타
고 기어오르는 담쟁이덩굴을 바라보았다.
"여러분들의 현재는 정지했소."
카알은 깊은 오한을 느꼈다.
"언제나 여러분들을 이끌어주던 희망 대신, 그리움이 여러분들을 이
끌고 있소. 희망은 미래를 끌어오는 힘이지만 그리움은 과거를 끌어오
는 힘이오. 나는 다른 현재에서는 부활할 수 없었을 거요. 나 자신의
안타까움이 아무리 깊었다 한들 그 안타까움만으로 현재를 따라잡을
수 없었을 거요. 하지만 여러분들의 정지된 현재는 따라잡을 수 있었
고, 그래서 나는 이 현재에 몸을 실었소. 그래서 나는 이 현재에서 부
활한 거요. 거꾸로, 이 현재에 살고 있는 이들은 그들의 안타까움만으
로 과거를 끌어올 수도 있게 되었고. 이해하시겠소?"
카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로쳐는 천천히 걸음을 떼어 퍼걸러 밖으
로 나섰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도 이해하실 테고?"
"예."
"원인을 찾아내시오. 이 현재가 정지해버린 원인을. 이 현재가 영원
히 게으른 자신의 낮잠 속에서 과거의 꿈에 취해있게 만드는 이유를.
그래서 이 현재로 하여금 잠에서 깨어나 다시 달려가게 만드시오. 더
많은 과거의 것들이 이 현재를 따라잡기 전에, 미래가 더욱 멀어지기
전에."
"솔로쳐, 당신께서 도와주시면……"
"안돼."
솔로쳐는 단호하게 말했다. 카알은 입을 깨물었다.
"미학적인 이유에서도, 실제적인 이유에서도 그것은 불가능한 말이
오. 나는 이 현재에 속한 이가 아니오. 여러분들의 문제는 여러분들이
풀어야 합당하지 않겠소?"
"그렇군요."
"실제적인 이유에서, 나는 그 원인이라는 것을 찾아내기도 어려울 거
요. 그것은 이 현재에 속한 것이며 이 현재를 다른 현재들과 구분짓는
독특한 것이니. 게다가 나는 켄턴에서 할 일이 많소."
"데스나이트의 일 말씀이군요."
"그리고, 깨어진 우정의 뒷감당도 있지."
퍼걸러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되묻지도 않
았다. 솔로쳐의 말에는 되묻는 것을 거절하는 어조가 담겨있었다. 솔
로쳐는 이제 대화는 마쳤다는 태도로 한숨을 내쉬고는 궁성을 바라보
았다.
"이제, 미련은 없소. 다시 한번 빛의 탑을 보았고, 궁성을 봤으니."
에델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 딴에는 조심스럽게 일어나는 동작
이었지만 그녀의 커다란 체구의 움직임은 도저히 감출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모닥불 가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설명을 요구하는 그들의 시선에 에델린은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운차이를 찾아내었다.
"운차이 씨."
"뭐요."
"Hjan이 뭐죠?"
사람들의 시선이 이제는 운차이에게로 옮아갔다. 하지만 운차이는 아
무런 반응 없이 들고 있던 쇠꼬챙이로 모닥불을 쑤셔대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조바심을 초단위로 증폭시키고 있는 가운데 운차이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걸 왜 묻는 건지?"
에델린은 모닥불 가로 다가섰고 이루릴은 그녀에게 찻잔을 - 그녀 전
용의 1파인트짜리 찻잔을 건네었다. 에델린은 손바닥으로 찻잔을 감싸
그 온기를 느끼며 말했다.
"도스펠께서 말씀하시기를 솔로쳐께서 바이서스 임펠에 찾아오셨다는
군요."
"소, 솔로쳐? 무지개의 솔로쳐가 바이서스 임펠에? 우우우와!"
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만큼 적극적인 경탄을 표시한 사
람은 없었지만 모두들 당혹한 표정이 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게 도
대체 어느 시대의 이야기야. 에델린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리고 솔로쳐께서는, 요즘들어 일어나고 있는 이 부활들에는 그
Hjan이라는 것이 관련되어 있다는군요."
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씁쓸
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별 거 아니지. 이를 테면, 네리아가 이루릴과 함께 시내를 걷
다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이루릴에게 돌아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
다면, 네리아에게는 그 Hjan이 생기는 거요. 용모에 대한 Hjan이라고
해야겠지."
"그거 비유지?"
"사실에 입각한."
"죽일 거야!"
"내가 어처구니없게도 네리아의 손에 개죽음을 당했다면, 또한 나에
겐 Hjan이 생기지. 그 억울함은 다들 잘 짐작할 수 있을 거요. 그리
고……"
네리아는 옆에 놓아두었던 트라이던트를 끌어와서는 그 물미 쪽으로
운차이를 후려쳤지만 운차이는 들고 있던 쇠꼬챙이를 살짝 휘둘러 네
리아의 공격을 튕겨내었다. 네리아는 잠시 자신의 손목을 부여잡은 채
죽어가는 신음소리를 내어야 했고, 그 동안에도 운차이의 말은 흐르는
물처럼 유려하게 흘렀다.
"파하스, 당신을 볼까."
파하스는 고개만 조금 들어 운차이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
다. 그의 입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사이들랜드로의 도피는 도피였을 뿐이지. 내 마음의 고향은
호롱불 깜빡거리는 펍이었고 내 마음의 양식은 화려한 살롱의 은밀한
그림자 속에서 레이디와의 짧고 긴박감 있는 키스였으니. 나는 자연
속으로 사라져 사이들랜드의 바람이 될 인물은 아니었어. 난 부캐넌
이 아니지."
"부캐넌……?"
"난 녀석이 부러워. 그는 검객답게 싸웠고 검객답게 죽었으니. 승패
가 만일 달랐더라면, 나는 부캐넌에게 목숨을 애걸했을지도 모르지.
놈에게는 남겨진 Hjan이 없을 테지. 놈은 부활하지 않을 거야."
밤바람이 윙윙거렸다. 하지만 익숙한 모험가들이 많은 일행들은 바람
을 타지 않는 위치를 골라 자리를 잡았기에 모닥불은 고요하게 타올랐
다. 모닥불이 던지는 약한 빛이 검은 나무들에 부딪혀 나무를 발그레
하게 물들였고 사람들의 그림자는 졸리는 것처럼 흔들거렸다. 이루릴
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그 Hjan이라는 것은 안타까움인가요?"
운차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오. 그것은 사람들이 보통 운명적, 혹은 숙명
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하는 커다란 재난에서 생겨나는 것이오.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아침을 못먹은 정도로는 Hjan이 생겨나지 않소.
당신 같은 엘프와, 그리고 제레인트나 에델린 같은 성직자들은 죽었다
깨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게요. 당신은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고 제
레인트나 에델린에게는 모든 것이 신의 섭리이니."
제레인트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모든 것은 신의 섭리입니다."
"알았어, 알았어. 따지지 않겠어. 하지만 똑같은 말을 저 꼬마에게
해봐."
운차이는 턱으로 돌맨을 가리켰다. 돌맨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당장
이라도 눈물이나 비명 양쪽의 하나를, 혹은 양쪽을 동시에 토해놓을
것 같은 표정으로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제레인트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운차이가 정말 가리키고 싶었던 것은 돌맨의 오른쪽에 앉아서
비슷한 자세로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는 그란이었다. 그란 하슬러에게
그것이 신의 섭리였다고 말해보라. 할슈타일 후작에 의해 그의 아내가
죽고, 그의 아들이 죽었던 일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잊으라고 말해
보라. 아마도 상대방은 스프 애호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평생 스프
보다 단단한 것은 삼키기 어려워질 테니.)
운차이는 결론지었다.
"그것은 안타까움과 미련과 그리움과 애달픔과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아우르는 말이며, 그런 복잡한 말들이 대개 그렇듯이 이해하기 어렵지
만 여러 방면에 걸쳐 사용될 수 있는 말이오."
에델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대충 이해하겠군요."
그리고 에델린은 솔로쳐가 카알에게 들려주었고, 그리고 다시 카알이
도스펠에게 말했고, 도스펠이 꿈을 통해 그녀에게 말해주었던 내용들
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사람들은 에델린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아프나이델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럼, 챠넬과 우타크에 의해 속아서 죽은 거인에게는 그 Hjan이 남
았고, 승자인 루트에리노 대왕이나 여덟 별 같은 경우에는 남겨진
Hjan이 없다는 말씀이군요. 그래서 거인은 부활했고 대왕은 부활하지
않는 것이군요."
파하스는 나무 우듬지 너머 반짝이는 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나. 때론 우주가 사람을 위해 움직이기도 한다네."
"하지만, 그럼, 이번에 이 우주가 멈춰버린 것은 누구를 위해서죠?"
아프나이델은 질문했고 모든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같은 대답을 떠올
렸다. 그것을 입밖으로 꺼내어 말한 사람은 이루릴이었다.
"신스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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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니? = 미 쳤니? 쳉한테 맞으려고? 음… 재미있는 발상입니다.
좋은 밤 되세요.
번 호 : 18414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4-02 03:22
제 목 : [F/W] 시간의 장인.....15
Future Walker
8. 시간의 장인…………15.
짙은 표력토의 들판 곳곳에 이끼는 끈질기게 자라나 있었다.
해변 가까운 곳의 높은 절벽 아래에 가문비나무 군락이 외로이 펼쳐
져 있었다. 하지만 사납게 부는 바람 때문에 높은 언덕들은 가까스로
자라난 관목 덤물로 치부만 가린 모습으로 헐벗어 있었다. 그런 언덕
들이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반대편 해변쪽에서는 눈이 시리도록 흰 빙하가 고고하게 하늘을 이고
있었다. 구름 가득한 하늘 아래 빙하는 희고 거대하고 아름다웠다. 먼
수평선으로부터 다가오는 육중한 파도는 빙하에 부딪혀 흰 물보라가
되어 부서졌다. 하지만 긴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 승리자는 언제나 그
러했듯이 파도가 될 것이다. 협곡을 가득 메우고 흐르는 거대한 빙하
는 마침내 빙산이 되고 자잘한 얼음 알갱이가 된 다음 바다 속으로 사
라져갈 것이다.
신스라이프는 탄느완의 부두를 바라보았다.
털가죽으로 온몸을 감싼 사내들은 마치 공처럼 보였다. 사내들은 뒤
뚱거리며 수레를 끌고 짐을 나르고 있었다. 이 한랭하고 척박한 땅에
서도 사람들은 팔고 사는 일을 멈출 수 없는 듯했다. 길고 곧은 침엽
수들과 물개 가죽, 둔해보이는 커다란 물고기들이 수레에 실려 부두를
오가고 있었다.
빙산이 떠다니는 바다에서 사람들은 작살로 물고기를 잡았다. 신스라
이프는 멀리 떨어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빙산 가장자리로 카약
을 탄 사람들이 물살을 헤치고 있었다. 신스라이프는 싱긋 웃었다. 카
약에 탄 사람은 마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상반신은 사람의 모
습을 하고 있지만 하반신은 조그만 카약 속에 완전히 우겨넣었기에 상
반신은 사람, 하반신은 배 모양을 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것이 보통의
배와 카약이 다른 점이다. 카약은 모든 부분이 밀폐되어있고 오로지
사람이 하반신을 집어넣는 부분에만 잠입구가 나있다. 게다가 카약의
탑승자는 카약에 탄 후 잠입구 주변의 덮개를 끌어올린 다음 자신의
가슴 주위에 묶음으로써 카약과 완전한 한 몸이 된다. 그래서 신스라
이프는 카약은 탑승물이라기보다는 옷이나 신발 같은 착용물이라고 생
각했다.
부두로 통하는 길이었기에 거리는 사람으로 붐볐다. 물론 다른 거리
에 비하면 그렇다는 의미이며, 실제로 이 정도의 인원이 바이서스 임
펠 같은 거리에 있었다면 사람들은 고요하기 짝이 없는 거리라고 말했
을 것이다. 하지만 이 추운 북부에서 사람들은 마음을 단단히 먹은 다
음에야 집밖 외출을 감행한다. 따라서 신스라이프는 주위로 많은 사람
들이 지나가고 있다는 착각을 느꼈다. 게다가 그 사람들이 전부 신스
라이프를 두세번씩 쳐다보았기에 신스라이프의 느낌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탄느완 사람들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었다. 신스라이프는 일
단 작은 여자로 보인다. 그런데 그 여자는 이 사나운 추위와 매운 바
람에도 불구하고 셔츠 한 벌과 바지 하나만을 걸친 차림으로 서있었
다. 벌써 몇 번이나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옷을 건네주겠
다거나 집으로 들어와 몸을 녹이라거나 심지어 술을 한잔 마시는 것이
어떠냐는 식으로 제안해왔다. (고지식하고 완고한 탄느완 남자들이 여
자에게 이런 제안을 건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신스라이프는 그 모
든 제안을 정중히 사양했다.
여섯번째인가 일곱번째의 사나이가 신스라이프로부터 거절의 말을 듣
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봐요, 아가씨. 보는 내가 다 추울 지경이란 말이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원 참. 아가씨는 이사의 처녀라도 되는 거요? 가만히 서있어도 코가
떨어져나갈 것 같구먼."
신스라이프는 빙긋 웃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내는 여전
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신스라이프는 작게 한숨을
내쉰 다음 다시 부두를 바라보았다.
부두 저편, 거대한 배들이 묶여있는 곳에서 쥬블킨은 뱃사람 하나와
격렬한 의논 중이었다. 뱃사람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이거 보쇼. 이 계절에 북해로 가겠다는 선장은 아무도 없을 거요.
다른 배를 찾아보시겠다고? 좋을대로. 하지만 이 말을 해주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속였다고 생각할 테니 말해주겠는데, 지금 탄느완의 부두
에서 당신들이 구할 수 있는 배는 내 배 뿐이오."
쥬블킨은 그런 식으로 넘어가지는 않겠다는 태도로 말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렇게 배가 많은데?"
"이 배들은 모두 화물을 싣고 남쪽으로 내려갈 배요. 의심스러우면
확인해보슈."
"당신 배는?"
"나는 이곳으로 화물을 싣고 왔고, 그래서 빈 배로 돌아갈 참이지."
"그럼 난 당신을 졸라봐야겠군요."
"하지만 난 북해로 안갈 거란 말이오. 그러니 포기하시란 말이지."
"내가 제시하려는 금액을 안다면 그렇게 말하지는 못할 텐데."
선장은 피식 웃더니 두툼한 가슴 위에 굵은 팔을 얹어 팔짱을 끼었
다. 다음 순간 선장이 꺼낸 말은 쥬블킨을 기막히게 만들었다.
"한 10만 정도 되오?"
"뭐라고요?"
"그 정도 금액이라면 재고해드리지. 그 이하라면 이만 작별인사를 하
고 떠나주시오."
쥬블킨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그 때 그의 옆에 서있던 발레드
가 말을 이어받았다.
"배와 선원, 그리고 당신을 사겠다면?"
"뭐요?"
"당신 배를 빌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사겠다는 말이오. 어떻소?"
선장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발레드를 바라보았다.
"부자이신가 본데…… 배는 팔지 않소. 이건 돈 문제가 아니란 말이
오. 목숨이 걸린 문제란 말이오. 이 시기의 북해가 어떤지 아시오?"
"1만."
"현금으로?"
"헤게모니아 국가 채권. 수수료 공제 없소."
"좋소."
쥬블킨은 사기당한 기분을 느끼며 발레드와 선장을 번갈아 쳐다보았
다. 하지만 발레드는 싱긋 웃으며 외투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발레
드는 두툼한 봉투를 꺼내어 선장에게 건네었다.
"출항은 언제까지 가능하겠소?"
선장은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조사하며 말했다.
"여정을 말씀해주셔야지요."
"가장 길게 잡으시오."
"흐음. 짐을 더 실어야겠군요. 하지만 모레까지는 준비가 끝날 겁니
다."
"발레드요."
"그냥 선장이라고 부르십쇼, 발레드 선주님."
"알겠소. 확인이 끝났으면 그건 돌려주셔야지?"
"착수금이 필요합니다만."
발레드는 수수료 지불을 위해 따로 준비해둔 금화 주머니를 내밀었고
선장은 입맛을 다시며 봉투를 도로 내밀었다. 봉투와 주머니를 교환한
발레드와 선장은 악수를 나누었다. 선장은 배를 향해 걸어갔고 발레드
는 멀리서 기다리고 있는 신스라이프를 향해 걸어갔다. 쥬블킨은 발레
드를 따라가며 설명을 요구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왜 선장이 갑자기 배를 팔겠다고 한 거죠?"
"돈 문제가 아니라고 하잖았습니까."
"그렇지요."
"그러니 돈만 충분하면 하겠다는 뜻이잖습니까."
"예?"
"그 친구가 정말 돈에 관심이 없었다면, 돈이라는 말은 꺼내지도 않
았을 겁니다."
쥬블킨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발레드
는 더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옷깃을 세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야 한 구석을 차지하고 고고하게 반짝이고 있는 빙하를 보며 발레드
는 으스스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초원과 도시에서만 살아온 그에게는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저렇게 큰 얼음이라니. 발레드는 빙하를 단순히
얼음으로 부르는 것에서 신성모독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먼 곳에서 쥬블킨과 발레드를 보던 신스라이프는 미소를 지었다. 선
장이 발레드가 건넨 봉투를 받아드는 모습을 본 것이다. 배는 마련되
었군.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은 바로 그 순간 찾아왔다.
신스라이프는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지나가는 누군가가 그를 보았더
라도 별 이상한 것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스라이프는 몸
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비명도 내지르지 못한 채 신스라이프는
육신의 안팎이 뒤집히는 느낌 속에서 전율했다. 뒤집혀진 눈동자는 눈
꺼풀 속에서 명멸하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폭음
과 바람소리 같은 것이 그의 귀를 유린했다.
신스라이프는 분노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잠자코 있어!'
말도 아니고 의미도 아닌 무엇인가가 그의 내면으로부터 솟구쳤다.
그리고 그것은 신스라이프의 것이 아니었다. 신스라이프는 이를 악물
었다.
'반항하지마. 너는 그럴 수 없어!'
느낌은 더욱 거세게 폭풍쳤다. 신스라이프는 거세게 펄떡이는 자신의
맥박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신스라이프는 안간힘을 다해 말했다.
'네가 어떻게 살 권리를 주장하나, 파!'
느낌은 일순 주춤했다. 기절할 듯한 고통 속에서도 신스라이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너는 세상에 태어날 수 없는 존재였다. 네 부모는 외동딸을 가지게
되어 있었어. 아홉 명의 목숨을 받아 태어날 수 없는 네가 이 땅에 나
타났다. 알았나!'
느낌은 극도로 혼란스럽게 움직였다. 신스라이프의 입장에서는 미칠
지경이었다. 고통과 쾌락과 피곤함과 활기가 번갈아 그의 몸을 자극해
왔으니까. 신스라이프는 고함을 내지르기 않기 위해 가슴을 끌어안았
다.
'그래. 넌 아홉 명의 목숨으로 태어난 것이다. 뭐? 아홉번째의 희생
자가 있기 훨씬 전에 네가 태어났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냐? 시간
에 대해 잘못 알고 있군. 죽기 훨씬 전부터 죽음 후를 볼 수 있는 네
언니를 생각해보지 그래?'
마구 범람하던 느낌의 파도가 갑자기 멎었다. 신스라이프는 휘청거리
다가 아예 땅에 앉았다. 하지만 치열한 내적 싸움에서는 한치도 물러
나지 않았다.
'네 언니는 시간의 긴 흐름 속에서 아무 때나 볼 수 있다. 다른 사람
들이 현재만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리. 그리고 넌 긴 시간의 흐름 속에
서 아무 때나 태어날 수 있었다. 왜 23년 전에 태어난 건지 아나? 나
를 위해서지. 알겠나? 너는 아홉번째의 희생자가 발생할 때 태어난 것
이다. 그리고, 네가 태어난 시점은 23년 전이다.'
느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스라이프가 편
해진 것은 아니다. 거대한 바위에 깔려있는 사람이 바위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편해질 수는 없는 것처럼.
'너는 내 딸이며 내 의복이며 나다. 그렇게 만들어졌다. 나는 아홉의
목숨으로 너에게 영생을 주었다. 그리고 퓨쳐워커의 동생으로 태어나
시간을 정지시킬 능력을 계승하게끔 했다. 너에겐 아무 것도 없다. 말
해봐. 아버지가 죽었을 때 정말 슬펐나? 어머니가 죽었을 때 정말 슬
펐나? 언니를 사랑하나? 네게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있나? 너에게 집
착이라는 것이 있나!'
느낌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스라이프는 거북한 느낌 속에서
어떤 이름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쳉? 쳉을 생각하나?'
실수였다. 조금 전의 고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격렬한 통증이 신
스라이프를 엄습했다. 신스라이프는 혀를 깨물었다. 입술을 타고 흐르
는 피는 차가운 공기와 만나 빠르게 식었고 신스라이프는 그 감각 속
에서 간신히 기절하지 않았다.
'얌전히 있어. 쳉은 잊어! 넌 어차피 태어날 수 없는 존재였다. 너는
나를 위해 태어난 거야!'
하지만 소용없었다. 신스라이프는 산 채로 몸이 태워지는 느낌을 받
으며 신음을 토했다. 그의 입에서 그의 의지가 아닌 목소리들이 흘러
나왔다.
"나는…… 파……"
"닥쳐라. 나는 신스라이프다."
"파 L. 그라시엘…… 내 이름…… 나…… 나는……"
"아냐! 너는 존재할 수 없다. 너는 없다, 너는 없다!"
신스라이프는 '너는 없다.'라는 말을 주문처럼 반복했다. 그 말의 의
미를 다짐하는 것은 아니다. 신스라이프는 단순히 파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계속 말했다.
"너는 없다, 너는 없다, 너는 없다!"
"왜 그러십니까, 신스라이프?"
신스라이프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고개를 힘없이 들어올렸다. 두 사
내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쥬블킨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
다.
"어디가 불편하신지요? 이런 차가운 땅에 앉아계시다니, 일어나십시
오."
그러나 쥬블킨은 신스라이프가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손을 내
밀지는 않았다. 발레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신스라이프를 특별히
경멸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은 무의식 중에 신스라이프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신스라이프
는 힘들게 말했다.
"소…… 손을 좀 주게."
쥬블킨은 당황한 표정으로 신스라이프를 보다가 급히 손을 내밀었다.
발레드도 달려들어 그를 부축했다. 신스라이프는 쥬블킨과 발레드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숙소로…… 가세."
두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잠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발레드가 말했다.
"내가 업고 가겠습니다."
신스라이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쥬블킨은 신스라이프가 발레드
의 등에 업히는 것을 도와주었다. 두 사람이 걸음을 떼기 시작했을
때,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쥬블킨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허어, 확실히 북부구먼. 이 계절에 눈이라니. 서두릅시다."
"예."
발레드는 발걸음을 재게 놀리려 지만 곧 포기했다. 신스라이프의
몸은 가벼웠지만 두툼한 털옷 때문에 그를 안정되게 업는 것이 힘들었
다. 신스라이프를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서 발레드는 차분하고 안정된
동작으로 걸으려 애써야 했다.
발레드의 등 위에서, 신스라이프는 사지를 늘어뜨린 자세로 아무렇게
나 얹혀있었다. 허공에 둥둥 떠가는 기분이 신스라이프를 사로잡았다.
떨어져내리던 눈송이가 신스라이프의 코끝을 스쳤다. 신스라이프는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기울어진 세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역시 비스듬히 떨어지고 있는 눈송이들이 보였다. 발레드의 등에 쓸리
는 왼쪽 볼이 점점 뜨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떨어져내리는 눈송이들에
부딪히는 오른쪽 볼은 아프도록 차가웠다.
'열이 오르고 있어……'
신스라이프는 한심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그의 안에서 파는 아직도
살아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완벽한 계
획의 마지막에서, 이런 사소한 장애가 그를 괴롭히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신스라이프는 더욱 분노했다.
그는 '콜리의 프리스트' 라는 재단사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낄 줄 아는
옷을 주문한 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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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부서지는 것 같습니다. 으으윽. 엘리엇의 말에 동의하고 싶습니
다. 4월은 잔인한 달인가 봅니다. 시작부터 너무 힘들다, 흑흑.
만우절을 빙자하여 진심을 나타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F/W 재
미없어요.' 라고들 하셨지요. (이것이 틀림없이 진심일 거라는 추측이
타자를 원인 모를 안도감에 젖게 하는군…)번 호 : 18415
게시자 : 이영도 (jin46)
등록일 : 1999-04-02 03:22
제 목 : [F/W] 시간의 장인.....16
Future Walker
8. 시간의 장인…………16.
멈춰선 김에, 궤헤른은 고개를 돌려 할슈타일 후작과 미가 대화를 나
누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곧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머리가 어떻
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북해로 갔어야 했어요."
"늦었다."
"미는 몰랐으니까요."
"너의 약점이군."
"걷는 연습을 하는 새는 없어요."
"노력은 할 것이다."
"피상적인 주장."
"내 경우엔, 아니지."
"어째서."
"퓨쳐 워커가 아니므로."
"그런가요."
미의 옆을 걷고 있던 아달탄은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으로 낑낑거리
며 그의 주인을 바라보았지만 그러한 행동으로 아무런 소득도 건지지
못했다. 궤헤른은 진저리를 치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멈춰선 일행
의 앞쪽에서는 쳉이 기어다니고 있었다. 궤헤른은 해괴하기 짝이 없는
기분을 다시 느꼈다. 등 뒤엔 알 수 없는 말을 나누는 남녀, 눈 앞엔
말을 내버려두고 기어다니는 사내. 다행히도 눈 앞을 기어다니는 쳉에
게는 궤헤른도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쳉은 기어다니기를 멈추고는 일어나서 캐쉬 헌터의 고삐를 쥐었다.
그리고는 말 위에 올라 잠시 앞쪽의 큐리담 호수를 바라보았다. 니크
는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그래, 쳉. 뭔가를 발견했나?"
쳉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말했다.
"고스빌로 갔군."
"고스빌?"
"그래. 미!"
쳉은 고개를 돌려 미를 불렀다. 미의 고개가 천천히 떠올랐다. 쳉은
다정하게 말했다.
"북해로 갔을 거라고 믿는 거지?"
"응."
"산을 넘는 것을 포기하고, 고스빌…… 탄느완이군. 배야. 하지만 이
계절에 북해로 가려는 선장은 별로 없을 테니 조금 지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쳉은 말의 끝에서 조금 기다려주었고, 궤헤른은 그 빈틈이 일행들을
향한 배려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쳉에게 질문했다.
"신스라이프 일행은 탄느완에서 배를 이용, 북해로 가려고 한다는 말
이오, 쳉?"
"그렇게 생각합니다."
"흐음…… 배를 타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겠습니까?"
"말했다시피, 이 계절에 북해를 항해하고픈 뱃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
다. 북해는 이 즈음이 해빙기입니다. 수월하게 배를 몰고 다니기엔 부
빙들이나 빙산의 위험이 아직 많을 겁니다. 항로가 아직 녹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고. 따라서 배를 구하긴 쉽지 않을 겁니다. 탄느완에서 발
이 묶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무엘은 피식 웃었다. 사나운 웃음이었다.
"모르는 것이 없군, 호위무사."
"고맙군."
그리고 사무엘과 쳉은 서로를 잠시 쏘아보았다. 사무엘이 도전적으로
턱을 쑥 내밀고 있는데 반해 쳉은 고개를 조금 숙인 채 그 깊은 눈매
로 사무엘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양자 모두 그 대결을 더
이상 심화시키지는 않았다. 궤헤른은 한숨을 내쉬고 싶은 마음을 달래
며 고개를 돌렸다.
"후작님."
"불렀나, 궤헤른."
할슈타일 후작은 이제 거의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는 예
전의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고 예전의 차가움으로 그것들을 해석했
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 말수는 더욱 줄어들어있었다. 궤헤른은 대화
가 참 뻑뻑하다고 느끼며 말했다.
"들으셨다시피, 탄느완에서 신스라이프 일행을 붙잡을 수 있을 듯합
니다."
"다행이군."
"이젠 설명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저는 불안합니다. 신스라이프가 이
모든 사건들의 원인이라면, 그를 죽이면 부활이 취소되는 것 아닌지
요. 그렇다면 후작님에게는 아무 일이 없을 수가……"
궤헤른은 말꼬리를 흐렸다. 가이버와 니크, 그리고 사무엘은 어두운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평온한 어투로 말했다.
"그래. 그를 죽이면 나 역시 죽을 거라고 생각한다."
"후작님!"
"나는 이미 죽었다. 궤헤른. 이건 끔찍한 모욕에 다름없다. 나는 죽
음의 권한을 누리겠다."
"살아야 합니다. 무슨 경우든지,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야 하는 겁니
다!"
궤헤른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웃음 뿐
이었다.
"언제까지?"
"예?"
"언제까지 살아야 하는가."
궤헤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깔깔해진 입천장을 혀로 핥으며 궤헤른은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조용히 말했다.
"죽을 때까지 아닌가."
말을 마친 후작은 말을 몰아갔다. 후작은 궤헤른과 니크의 사이를 지
나쳐 쳉의 옆을 지나갔다. 그리고는 일행의 앞쪽을 천천히 달려갔다.
니크와 가이버가 먼저 그 뒤를 따랐고, 그리고 궤헤른과 사무엘이 우
거지상을 한 채 말을 재촉했다. 쳉은 잠시 기다린 다음 미와 함께 달
렸다.
우거진 숲과 산비탈 때문에 일행은 속력을 높일 수 없었다. 그래서
일행은 느긋한 속도로 달려갔다. 그 완만한 속도는 일행들로 하여금
각자의 어두운 심정 속으로 침잠하게 만들었다.
후미에서 달리고 있던 쳉은 아무 말 없이 미를 바라보았다. 미는 아
달탄을 힐끗힐끗 바라보는 동작 이외엔 오로지 앞만 본 채 달리고 있
었다. 아달탄은 미의 시선이 돌아올 때마다 기쁜 표정으로 날뛰었다.
쳉이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을 때, 그의 귓가로 미의 목소리
가 들려왔다.
"걷는 연습을 하는 새는 없는 거야. 그렇잖아?"
쳉은 잠시 침묵한 다음 역시 나직히 말했다.
"그래. 어떤 새가 날개를 다치게 될 것까지 염두에 두겠어."
두 사람 모두 사이들랜드의 들판에서 자라온 헤게모니아 평원인들이
었다. 느린 속도로 달리는 말 위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은 두 사람에게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미는 안타깝고 무서워.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 너무 속상해."
"네게는 잘못이 없어."
"아니. 미는 북해로 갔어야 했어. 그래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
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북해로 가지 않았어."
"자의가 아니었을 텐데."
"그렇더라도…… 마찬가지야. 미가 고집을 부렸으면 벌써 오래 전에
미는 북해에 도달했을 수도 있을 거야. 퓨쳐 워킹을 할 수 없어서, 그
래서 그만 판단을 잘못 했어. 되는대로 내버려둔 거야."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어. 잊어버려."
"잊을 수가 없어. 미가 진작 북해로 갔더라면, 그럼 이 모든 바보 같
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후작님의 말이 맞아. 날개를 다친 새
는 걷기 위해서, 새로운 자신에 대해 익숙해지기 위해서 노력은 했을
거야. 하지만 미는 퓨쳐 워킹을 할 수 없게 된 자신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았어. 결국, 보통 사람들과 똑같아졌다는 것이잖아? 그런
데도 미는 커다란 재난이나 당한 것처럼, 스스로 판단하거나 생각해보
려 하지 않았어. 어쩔 줄 모르고 되는대로 내버려둔 거야."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해."
"감정 결핍."
"응?"
쳉은 고개를 들었고, 미가 미소짓고 있는 것을 보았다. 미는 생긋 웃
으며 말했다.
"쳉. 북해에 뭐가 있는지는 전혀 궁금하지도 않지? 거기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혹은 왜 거기 가야 하는가는 전혀 생각하지 않지?
미한테만 관심 있지?"
쳉은 대답하려다가, 지금껏 자신이 했던 대답들을 전부 되짚어보고
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랑 결혼하지, 바보."
쳉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미는 차분한 태도로 설명했다.
"내버려두면 죽을 때까지도 관심없어할 테니 미가 말해줄게."
"듣지."
"북해엔 시간축이 있어."
"무슨 말이지?"
"시간 그 자체, 아니 그 정수라고 할까. 시간축이 나은 거 같아. 어
쨌든 북해에는 그런 것이 있어. 디도스 같은 곳에서 파는 그거, 쳇바
퀴 돌리는 다람쥐를 생각해봐."
"전에 선물했더니 놓아줬었지."
"그래. 그 쳇바퀴. 그건 어떻게 해서 돌지?"
"다람쥐가 돌리니까."
"아니…… 물론 그래. 하지만 그것이 도는 이유는 뭐지? 그것의 한
점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잖아? 만일 그것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돌 수 있을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어떤 것이 돌려면 거기엔 고정된 축이 있
어야 된다는 말이군."
"그래. 북해에 있는 것에 미가 시간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그것
때문이야. 축. 중심점."
"아아."
"사람들은 세상에 퍼져서 시간들을 만들어내고 있어. 사람이 시간의
장인이거든. 사람들은 끊임없이 시간을 과거로 보내고 새로운 시간들
을 만들어내. 하지만 그 축은 북해에 있지. 그래서 미는 미래를 볼 수
있어."
"궁금한 것이 있어."
"뭔데?"
쳉은 차마 묻지 못하던 것을 물을 때도 담담했다.
"네가 본 미래에서, 나는 너와 결혼하나?"
"쳉은 미래를 알려고 하는구나. 댓가가 커."
"그래?"
"하지만…… 미 반칙 좀 할래. 미는 과거가 고정되어 있으니 미래를
본다고 했지?"
"응."
"쳉은 미를 사랑해. 쑥스러운 표정 짓지마. 이상한 얼굴이 된다? 흐
음. 어쨌든 그것이 고정된 과거야. 그럼 미래는 어떻게 될까."
"그런 거야?"
"응."
"그럼 누구나 퓨쳐워커가 될 수 있겠군."
"아니. 절대로 그렇지 않아."
"왜? 과거를 보고는 앞으로 이러이러하게 될 것이라고 추측하는 건
누구나 가능하잖아."
"미를 웃기지마, 쳉. 어린애도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잖아.
아달탄도 그건 알걸. 말을 타고 달리면서도 자신이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말의 발
목이 부러질 수도 있고, 강물이 범람할 수도 있고, 도적을 만날 수도
있고,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땅이 갈라질 수도 있고, 목적지가 드
래곤의 공격으로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고……"
쳉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사람이 시간의 장인이야…… 쳉."
"응."
"사람은 시간을 만들어내."
"응."
"그리고 시간은 사람을 떠나가."
"응."
"쳉은 미랑 결혼해야 돼."
"응."
"쳉은 미랑 결혼해서 평생 밥 짓고 빨래 하고 애 돌보며 돈 벌어오고
미만을 섬기고 미만을 생각하며 미만을 그리며 미가 히스테리를 부리
면 달래주고 미가 심심하면 재롱 떨어주고 미가 졸리면 자장가 불러줘
야 해."
"응."
"미가 졌어."
쳉은 싱긋 웃으며 캐쉬 헌터의 진로를 조금 수정했다. 그리고는 팔을
옆으로 뻗었다. 미는 쳉의 손을 보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달리
는 말 사이로 뻗어간 쳉과 미의 손은 허공에서 맞닿았다. 미의 다섯
손가락이 쳉의 다섯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고, 두 사람은 한손으로
말을 달리고 다른손은 서로 깍지낀 채 숲의 머리를 파고드는 은초록빛
햇살 속을 달려갔다.
미는 얼굴에 쓰다듬고 지나가는 바람에 말을 실어보내었다.
"아이를 가지자."
쳉은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미 역시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처럼 조용조용하게 말을 계속했다.
"우리를 향해 칭얼거리고, 우리를 배우고,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떠날 아이를 만들어서, 쳉. 그 아이를 사랑해주자. 바보처럼 사랑해주
자. 그러기 위해 태어났다고 믿는 것처럼, 헌신적으로 사랑해주자."
미의 매끄러운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불어닥치는 바람
은 미의 눈물을 빠르게 식혔고 미는 목덜미로 파고드는 차가운 눈물에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미는 마지막까지 말했다.
"우리가 시간을 만드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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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챕터 끝내었습니다. 악몽 같군요. 기약없는 잠수…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