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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日本文化의 宗敎性과 宣敎方向에 關한 硏究
조재국
강남대 신학과 종교학 부교수
Ⅰ 서 론
한국교회는 금세기 세계 어디에서도 그 예를 찾아 보기 힘든 급속한 성장을 이룩하였고,그 선교적 역량을 통하여 세계 복음화라는 거대한 과제에 도전하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지난 70년대의 경제의 고도성장, 해외여행 자유화, 중국과 구소련의 개방에 힘입어 각 교단이 앞 다투어 선교사들을 파견하였고 지역에 따라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해외교회가 현지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한국인교회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원주인 혹은 선주민을 대상으로 한 선교는 시작단계에 머물러 있고 이제 겨우 방향설정을 모색하는 단계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해외선교의 현장에서 체험한 선교과제를 바탕으로 하여 중, 장기적인 선교전략을 수립해야할 사명을 요청받고 있다. 과거 서구의 기독교가 발달된 문물과 문명을 가지고 강력한 선교를 시도하였던 선교지에서 한국교회가 성공적이고 효과적인 선교사역을 성취하기 위하여는 특별한 사명감과 선교전략이 필요하다. 더구나 이들 선교지들은 대부분 서구선교사들이 선교에 실패하거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지역이다. 그러므로 서구 선교사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립된 서구의 선교신학에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오히려 한국 선교사들의 독특한 경험을 중심으로 새로운 선교전략이 수립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일본과 같이 경제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지역에 대한 선교는 제3세계 선교와는 다른 전략으로 접근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즉 선교의 대상이 될 일본에서 경제적인 향상이나 물질문명의 발달은 더 이상 사람들의 궁극적인 관심이 아니며, 오히려 그들이 심령적으로 갈급해 있는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선교가 필요할 것이다. 가령 일본문화 속에 잠재해 있는 종교적인 요청에 응답하여 복음적인 해답을 제공하는 선교전략이 요청된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일본의 사회문제를 분석하면서 한결같이 종교와 도덕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종교의 부활을 기대한다. 종교의 부활이란 종교를 사회의 현상이나 심리의 영역으로 환원하지 아니하고 초역사적인 종교의 심연을 신앙의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일본의 불행은 종교가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자각적 무신론자들의 시선에 둘러싸여 있다. 현대인들은 이러한 무신론적 문명의 시대 한가운데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일본의 구원은 일본인의 종교의식을 회복시켜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고, 신앙의 능력과 가치를 통하여 일본의 문화를 변혁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1906년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가 설립되어 일본선교를 시작한 이래로 수난의 역사 속에서도 그 선교적 사명을 계속해 온 한국의 일본선교에 요청되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먼저 일본선교의 기초가 될 현대 일본문화와 종교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여 일본문화의 숨겨진 틀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세속화된 현대 일본종교의 모습과 더불어 대중문화의 정신적 기반을 살펴봄으로서 일본의 종교적 토양이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이해해 보고자 한다. 다음으로 일본선교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하여 일본 기독교 수용의 특징과 선교의 필요성을 살펴보고 미래의 선교방향을 전망해 보고자 한다.
Ⅱ 일본문화의 이해
1. 일본문화 연구의 발자취
과거 한국의 선교 초기에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문명국들로부터 내한한 선교사들에 의하여 새로운 문명이 유입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서구문명에 대한 관심에서 교회를 찾기도 했다. 사실, 한국교회의 성장을 경제, 사회적인 측면에서 분석하면 고도경제성장과 교회의 성공주의 신앙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오늘의 일본 사회는 이미 후기산업사회를 넘어 IT산업으로 대별되는 정보화시대의 한 가운데 있기 때문에 경제, 사회적인 측면에서 한국인 선교사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일본사회의 종교문화와 일본인들의 정신생활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기독교의 역할은 더욱 증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의 일본문화의 성격을 정확히 이해하는 일은 선교전략을 수립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문화란 인간집단의 생활양식에 관련된 것으로 무의식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형체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는 “일본의 문화적 전통은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면 필시 인류문화의 발전을 위하여 무엇인가 기여하게 될 것이며 또한 기여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가치 있는 문화적 전통 위에 세계인류의 향상을 위해 공헌할 수 있는 문화를 창조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일본문화에 대한 연구서는 1900년 미국에서 출판된 후에 곧 8개국어로 번역되면서 계속해서 일본정신문화에 관한 연구의 고전으로 인정받아 온 니토베 이나죠(新渡戶稻造)의 [무사도]를 비롯하여 많은 서적들이 일본연구자들에 의하여 쓰여졌다. 니토베의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를 가지고 외국인의 입장에서 연구하여 큰 반향을 일으킨 책이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1946년)이다. 저자는 일본문화의 궁극적 기초가 되고 있는 상하관계(hierarchy)를 분석한다. 상하관계는 일본의 가족제도를 기초로 하여 형성되었다고 말하면서 그것은 일본인의 행동 및 사고방식을 궁극적으로 규정하는 자가 각 사람에게 적당한 위치(proper status)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점을 논증하고 있다. 상하관계의 질서 가운데 ‘명인(名人)의 명인다운 위치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행동이나 사고에 대하여 ‘은혜(恩)’나 ‘의리(義理)’, ‘덕(德)’, ‘오명(汚名)’등 일본인 특유의 표현법을 근거로 하여 분석하였다. 저자는 일본문화의 특질을 ‘염치의 문화(恥の文化)’라는 용어로 파악하고 있다. 도덕의 기준을 내면적 죄의 자각에 두고 자신을 다스려 가는 서구의 문화를 ‘죄의 문화’라 함에 대하여 일본은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타인의 비판을 기준으로 하는 ‘염치의 문화’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문화의 형태는 일본사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익명의 저서나 주장, 그리고 방송 출연자들이 익명을 선호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인 도이 다케오(土居健郞)는 [아마에의 구조(甘えの構造)](1971년)라는 책에서 일본어의 톡특한 표현인 ‘아마에’(甘え;어리광,응석부리기)라는 단어가 일본인의 사고의 특성을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 도이는 일본인의 대인관계에서 방어기제(防禦機制)의 하나인 분리(分離)의 역할에 주목했다. 그는 ‘아마에’의 심리적 원형을 모자관계로 보는데 아이가 모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존요구와 같은 것이 일본인의 심리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만나면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분리의 고통을 회피하려 하는 것’이 도이의 ‘아마에’에 대한 정의이자 일본문화를 해석하는 키워드이다. 또한 ‘아마에’는 일본인의 집단지향성을 형성하는 심리이기도 하다. 일본인이 자신이 어느 집단에 속해 있는가를 언제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아마에’적 특성의 하나이다.
또한 문화인류학자인 나카네 치에(中根千江)는 [수직적 사회의 인간관계](1967년)을 써서 일본사회의 특징이 ‘수직적 사회’라는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녀는 사회구성요소를 ‘자격’과 ‘장(場)’으로 파악하였다. 일본문화 속에서 자격은 선천적으로 귀속되어 있는 가문이나 성격, 후천적으로 획득한 학력, 직업 등을 포함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장’은 일정한 지역이나 소속기관 등의 소속집단을 가리킨다. 일본사회는 ‘자격’보다는 ‘장’을 우선하는 특징이 있다. 이를테면 소속하고 있는 회사의 직무나 직종 보다는 회사 그 자체에 귀속되어 있는 것을 중시한다. 대기업 같은 곳은 상이한 자격을 지닌 사람들이 포함되어 전체 구성원을 이루기 때문에 성원 사이에 수직적 상하관계 즉, 상사와 부하, 오야분(親分)과 고분(子分), 선배와 후배 등이 발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카네는 의례적 서열관계가 중시되는 사회를 일본사회의 특성으로 파악하려 했던 것이다.
한국인이 쓴 일본문화론에 관한 책은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1982년)이 있다. 저자는 일본인들이 물건을 만들 때 편이성과 디자인 등을 염두에 두고 실용적이면서도 작고 모양 좋게 물건을 만들어 내는 사례를 들고 있다. 일본인들의 문화적 지향성은 사물을 축소하며 자신들의 손으로 쉽게 관리할 수 있는 영영 안으로 사물이나 우주관을 축소하여 넣는 데서 만족감과 안정을 얻으려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외에도 일본문화에 관한 다수의 저서들이 다양한 시각에서 일본을 이해하고 있다. 한국에서 발간된 일본론에 관한 서적은 경험적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서술한 것, 학문적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서술한 것, 관계사적인 입장에서 픽션으로 서술한 것 등이 모두 일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일본의 문화인류학자인 아오키 다모츠(靑木保)는 외국인들이 저술한 일본론에 대하여 전쟁직후의 혼란의 시기를 보는 ‘일본문화의 부정적 특수성의 인식’에서부터 한국전쟁과 함께 일본의 경제부흥이 탄력을 얻는 시기를 보는 ‘역사적 상대성의 인식’으로 전환되며 더 나아가서 일본의 고도경제성장의 시기를 보는 ‘긍정적 특수성의 인식’에서 일본의 독보적 경제성장의 시기를 보는 ‘특수성에서 보편성으로’ 인식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파악한다.
2. 일본인과 문화적 특징
문화연구에서는 문화의 하부구조라고 불리우는 보여지는 문화의 틀과 더불어 문화의 상부구조라고 불리우는 보이지 않는 문화의 숨겨진 그림에 대한 이해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일본문화에서 숨겨진 그림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대중문화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일본의 대중문화를 형성하는 동인(動因)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인의 대중적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다. 이것은 물론 역사적인 산물이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오랜 역사 속에서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한 지혜와 보다 나은 삶을 성취하기 위한 생활문화와 규범을 창조해 왔다. 그들이 향유하고 있는 문화의 형식 속에는 그들의 사고와 행동을 규정하는 숨겨진 그림이 있다. 일본문화 속에 도도히 흘러가며 일본인들의 삶의 모양을 결정하는 숨겨진 원리는 무엇인가. 평론가 가또 슈이치(加藤周一)에 의하면 그 원리는 첫째로 경쟁적 집단주의이고, 둘째로 현세주의이며, 셋째로 현재중심주의라는 것이다.
일본문화에 숨겨진 가장 큰 특성은 집단주의이다. 일본의 규범문화의 틀을 형성한 ‘헌법17조’(604년)를 만든 쇼토쿠(聖德)태자는 제1조에서 ‘단결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반항하지 않기를 근본 도덕으로 하라’고 규정했다. 이후 일본은 ‘이에(家)’와 ‘무라(村)’라는 말로 표현되는 집단주의 문화를 형성했다. ‘이에’는 가족주의라고 할 수 있으나 한국에서 처럼 혈연을 중심으로 한 가족주의라기 보다는 직업을 중심으로 한 가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들은 전통적으로 아들이 없거나 아들이 가업(家業)의 계승을 거부할 경우에 양자를 입양하여 ‘이에(家)’를 이어간다.
‘무라(村)’는 ‘무라하치부(村八分: 동네에서 왕따를 당하여 쫒겨남)’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과 같이 매우 배타적인 일체성을 추구하는 집단주의문화의 상징어이다. ‘무라’집단의 특징은 단결, 소수자배제, 상하관계, 경쟁 등이다. 일본은 근대화를 통하여 서양의 평등사상을 받아들였고 ‘무라’사회도 일정한 부분에서 수평을 강조하지만 개인의 ‘자유’는 배제하고 있다. 따라서 인권, 소수의견, 개인의 자유 등이 의미하는 가치는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 아시아 여러 민족에게서 나타나는 집단과는 달리 일본의 집단은 신분적 집단이 아니라 목표지향형의 집단(goal-oriented group)이다.
그래서 일본의 집단은 매우 활동적이며 때로는 공격적이기까지 하다. 더구나 집단은 내부의 경쟁을 촉진시키고, 효율성을 극대화시키는 교묘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것 가운데 하나는 개인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언가 잘못이 있으면 집단전체의 책임으로 이해한다. 한국국민이 요구하는 전쟁책임에 대하여 매우 애매한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메이지(明治)이후 일본의 지배층은 국민이라는 집단의 상징인 천황을 절대화함으로서 결국 집단을 절대화하고 말았다. 그래서 집단은 일본문화의 제1원리로서 최고의 가치로 인정되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일본문화의 숨겨진 그림에는 일본인의 현세주의적 세계관(此岸性)이 있다. 종교학자들은 불교가 일본에 들어와서 일본인의 현세주의적 세계관과 영합하여 현세의 이익과 현실적 효용성을 추구하는 종교로 세속화되었다고 평가한다. 불교사원은 도쿠가와(德川)시대에 ‘제종사원법도(諸宗寺院法度)’의 제정으로 인하여 행정제도에 편입되어 경제적, 사회적 지위는 보장받았으나 종교적 신앙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함으로서 그 고유의 피안성(彼岸性)을 잃어버리고 세속화 되었다. 불교는 막부(幕府)정권의 서민지배의 도구로 전락함으로서 종교, 신앙적 모티브를 잃어버리고 세속적 현세주의로 빠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문화자체가 세속화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일본의 현대화과정에서 나타난 실용적 기술주의, 향락주의, 미적 장식(装飾)주의의 배경이 되었다. 그러므로 일본은 초월적 가치에 속박되지 않는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토피아사상이 나타나기 힘들다. 이것이 일본에서 유토피아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일본문화의 숨은 그림의 하나는 일본인의 현재중심주의적 사고이다. 일본문화의 현세주의는 공간적 개념이 우세하여 현재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현재중심주의를 낳았다. 이러한 사고는 일본인의 전통적 서민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의 ‘에마끼모노(絵巻物: 두루마리형식의 그림이야기)’는 펼쳐보는 곳만 보이므로 언제나 부분일 뿐이지 전체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에마끼모노의 이야기는 언제나 현재적 공간인 그림으로 표현되므로 현재중심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에게 상황은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일본문화 속에서는 갑자기 나타난 현재의 상황에 대하여 재빨리 반응하는 심리적 기술이 발달된다. 그리고 개인적 행동양식으로서는 편의주의나 대세순응주의가 나타난다. 전체의 질서보다는 부분의 감각적 세련미가 강조된다. 철학적 사고의 과정도 부분으로부터 출발하여 각기 전체에 도달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일본문화의 숨은 그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집단의 질서를 유지하는 메카니즘을 이해하여야 한다. 일본의 집단내부의 질서를 유지하는 장치로서 상하관계와 수평관계가 있다고 했는데, 이에 따른 규칙체계의 특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극단적 형식주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극단적 주관주의 혹은 주관적 ‘기분’존중주의이다. 일본인의 형식주의는 모든 서류에는 도장을 찍어야 안심이 되는 습관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런 형식이나 규칙은 지키는 쪽에서 보면 그것을 지키고 있는 한, 다른 생각할 필요 없이 집단 안에서 잘 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또한 주관주의는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당사자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범죄의 경우에도 그 동기가 매우 중요하다. ‘기분’ 이나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이상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 보는 데서도 나타난다. 도쿠가와(徳川)시대에 ‘의리’는 외재적 규범인데 반해 ‘인정(人情)’은 자유로운 사적감정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의리와 인정이 가치(價値)에서 서로 상충될 때는 ‘의리’의 강제력이 우월했다.
Ⅲ 일본의 종교와 대중문화
1. 일본종교의 세속화
문화연구에 있어서 그 사회 및 심리적 성격과 더불어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사항이 굼화의 종교적 성격이다. 모든 문화는 종교적 성격을 그 본질적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인데, 일본의 문화에는 더욱 종교적 성격이 강하며 심지어 대중문화에서도 그 종교적 본질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실상 종교자체는 일본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그 본래적 의미를 크게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평가도 있는데, 일본인의 종교에 대한 이해는 매우 독특하다. 전체인구(1억 2천명) 보다 종교인구(2억명)가 훨씬 많은 것으로 보아 한 사람이 두 개 이상의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학자들은 일본의 종교가 권위의 실추와 붕괴라는 문제에 봉착해있다고 혹평하면서 일본의 전통종교가 공동화(空洞化) 혹은 비종교화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의 최대종교인 불교는 ‘장식(葬式)불교’라는 냉소적 평가를 받으면서 많은 절들은 관광사원 혹은 장례사원화 되었다. 또한 일본신도는 군국주의시대의 국가신도(國家神道)로서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여전히 종교인가 아니면 전통의례인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것은 결국 신도의 종교적 권위를 떨어드리고, 신도의 자율성에 큰 타격을 주어 신도의 비종교화라는 문제로 나타났다.
일본의 종교학자 야마오리 데츠오(山折哲雄)씨는 이러한 일본종교의 붕괴가 근대일본지식인의 무신론화에 원인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일본의 무신론적 지식인들은 일본의 종교에 대하여 현세이익신앙, 즉 가족안전, 신체건강, 상업번성을 구하는 신앙을 미신적 신앙이라고 비판하면서 대중의 신앙을 종교적 문제로 심각하게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족안전’을 기원하는 마음은 가정파괴라는 위기적 상황에서 발하는 절규이고, ‘신체건강’은 노령, 병마, 죽음에 두려워 떠는 민중이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하여 행하는 기도의 언어라는 사실을 무시해 왔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 종교의 퇴세(頹勢) 혹은 세속화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불교의 공동화, 신도의 비종교화, 지식인의 무신론화라는 말로 표현되는 일본종교의 현주소는 곧 오늘의 비종교적, 비신앙적 대중문화를 가능하게 한 하나의 원인이다.
일본종교의 퇴세는 근대일본의 종교정책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하나는 메이지(明治)초기의 신불분리(神佛分離) 정책과 제2차세계대전 후의 정교분리(政敎分離) 정책에서 유래한다. 전자는 신불신앙에서 신도의 신과 불교의 부처의 혼합적 관계를 끊자는 것이고, 후자는 정치와 종교의 애매한 관계를 명확히 구별하자는 것이다. 본래 일본종교는 신과 부처를 동시에 믿는 신불(神佛)종교였다. 그런데 메이지정부는 왕정복고를 계기로 천황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신도에 의한 제정일치를 추구하면서 신불분리령을 내려 불교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소위 폐불훼석(廢佛毁釋)운동은 전국적으로 전개되어 절과 불상 등을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종교학자들은 이러한 종교정책이 고유의 종교신앙적 기반을 파괴하여 결국 일본인의 내면에 큰 정신적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고 평가한다. 대타격을 받은 불교는 후에 재건되는 과정에서 호국불교화의 길을 걸어 결국 불교의 공동화(空洞化)가 진행되었다.
또한 정교분리정책은 메이지헌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영향에 의하여 나타난 것이다. 당시 이또 히로부미(伊藤博文)은 불교나 신도가 종교의 힘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여 서구의 기독교에 대응할 수 있는 ‘국가의 기축(機軸)’으로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신도를 창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을 국가의 기축으로 세우기 위하여 기기신화(記紀神話: 古事記와 日本書紀의 신화)의 고대신화의 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아마데라스오미가미(天照大神)을 근대국가의 시조로 확대 해석하여 새로이 황실제사를 형성시켰다. 여기에 정교분리의 원칙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자 메이지정부가 고육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신도에서 제사의례를 분리하는 응급조치였다. 신도를 민간신도와 국가신도로 나누어 명계(冥界)신앙, 장의(葬儀), 민중교화 등은 종교적 기능으로 민간신도에서 행하게 하고, 제사의례는 비종교적 기능이라고 항변하면서 국가의 관리하에 있는 국가신도에 속하게 한 것이다. 신도의 일신교화를 촉진하는 불명확한 정교분리정책은 결국 신도의 비종교화라는 결과를 낳아 일본종교의 황폐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일본 근대지식인의 무신론화를 촉진시킨 주요한 요인은 서구문명에 대한 수용태도에 있다. 우치무라 간죠(內村鑑三)은 일본의 ‘대곤난(大困難)’은 일본인이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기독교문명을 받아 들인데 있다고 했다. 소위 화혼양재(和魂洋才)의 수용방법은 근대 일본 지식인들의 무신론적인 마음을 양성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일본의 종교가서구문명의 도입에 대하여 아무런 긴장이나 대항도 없이 순응의 태도를 보인 것은 세속화의 증거이며 이미 ‘정신원리’로서의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말한다. 메이지시대에 만들어진 신도의 종교성과 비종교성의 기능구분은 좁게는 신도에 대한 극도의 불신감, 그리고 넓게는 종교일반에 대한 의혹감을 일본인들에게 심어주었다. 종교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공적인 정치와 사적인 종교를 구별하는데 열중한 나머지 사적인 종교신앙의 중요성에 대한 관심을 크게 희석시키고 말았다. 말하자면 인간관의 세속화가 갈 데까지 가버린 것이다.
2. 대중문화의 정신성
일본의 종교가 극단적인 세속화로 인하여 대중들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고 있을 때, 일본의 대중문화와 소수집단들은 부드러운 얼굴로 일본의 서민대중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종교, 신앙적인 요청에 응답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일본문화 연구가들은 일본사회의 비종교적 풍토 속에서 서민대중들은 그들의 종교적 욕구를 대중문화를 통하여 충족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일본의 대중가요인 연가(戀歌)는 일반적으로 일본인들의 정신적 고뇌와 종교적 희구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 문화형식으로 이해된다. 일본의 대중가요를 분석한 작사가 아쿠 유(阿久悠)에 의하면 일상생활에 매어 있는 서민들은 저항이나 반역, 투쟁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우울한 생을 보내게 되는데 그런 때에 상상 속에서나마 자신의 모습을 그런 일탈자로서 그려보며 체념의 뜻이 깊게 드리운 신세타령을 술과 함께 노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고베대지진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위하여 노래를 지었는데 당시에 현실과 관계없이 무조건 ‘힘내세요’라고 써서야 했다고 후회한다. 그래서 그는 노래 속에만 존재하는 인간과 세상을 주제로 선택하여 작사할 때 서민의 그러한 희구를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보는 현대 일본인의 정념(情念) 혹은 정신성은 ‘원한(怨)’와 ‘자학(自虐)’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랑’이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대중가요는 이러한 현대의 시대적 기아감(飢餓感)에 명중하여야 히트곡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쿠는 그런 면에서 일본의 한국인 대중가수 고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신들린 가수였다고 하면서 그녀의 탄생, 그녀의 존재, 그녀의 군림은 종교적이었다고 평가한다. 어떠한 일상적인 감성의 노래도 그녀가 부르면 종교적 예언과 같이 들려왔는데 그녀가 부른 노래의 주제는 언제나 사랑이었다.
일본대중의 정신성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자료는 우후준순 처럼 나타나는 신흥종교, 즉 컬트종교이다. 오래 동안 신흥종교에 의한 피해소송을 다룬 변호사 기토 마사키(紀藤正樹)는 컬트종교에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오늘날 과학문명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합리적 사고가 세상을 석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학력의 고저를 물문하고 경제력의 여부를 물문하고 사람들은 종교를 믿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면 고리대금에 관련된 소송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당되고 증권피해는 부자들에게 해당되는 등 종류에 따라 계급성이 있는데, 컬트종교에 의한 피해는 계급성이 전혀 없다고 한다. 그는 “왜 그런 불합리한 종교에 매력을 느껴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는지 영원한 수수께기”라고 하면서 이것은 현대인들에게 종교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일본의 저변층 서민들의 종교적 욕구를 알 수 있는 사회집단의 하나는 소위 야쿠쟈라고 불리우는 폭력단이다. 야쿠자는 18세기 후반부터 일본사회 저변층 사람들의 동료의식을 발전시켜 유사(類似)가족조직을 형성하면서 일본인의 상하관계에 의한 수직적 사회의 아마에적 집단의식을 구현하는 장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외국인으로서 야쿠자의 집단의식을 연구한 야곱 라즈에 의하면 야쿠자의 행동양식을 살펴보면 일본문화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오야분이라고 불리우는 야쿠자의 대장이 “나는 젊은 야쿠자들에게 법을 어기는 것은 괜찮으나 다른 사람에게 나쁜 짓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고 한 말에서 그들의 행동문화가 매우 일본적임을 적시한다. 즉 야쿠자들도 자신들의 정체성과 이미지에 대하여 크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개인간이나 집단 속에서의 자기존재에 대한 의미를 발견하려고 하고 그것은 전달하려고 ‘연출’하고 과시하는데 여념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행위인 동시에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도 한데, 이는 일본사회의 아웃사이더들로서 정체성의 위기를 극명하게 경험한 소외자들이 야쿠자가 됨으로서 한 집단의 훌륭한 일원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야쿠자집단에 소속함으로서 정체성을 부여받는 것이다.
야쿠자집단은 일본의 다른 사회집단과 매우 흡사한 사회문화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야쿠자는 일반사회와 다름없는 야쿠자세계의 정당성을 부여 받고 이다. 하나는 특정한 집단에 소속하고 있는 것 자체로부터 정당성을 부여받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사고와 행동을 함으로서 통상적인 일반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인식으로부터 오는 정당성을 부여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쿠자집단을 통하여 보여지는 일본문화의 성격은 수직적 사회에서 ‘장’을 중시하는 일본인들의 소속감과 더불어 오야분에 대한 절대적 복종과 고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아마에의 실현을 통한 안심감이라는 정감적 차원을 중시하는데 있으며 이것은 대중가요나 컬트종교가 추구하는 이상과 상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Ⅳ 일본의 기독교와 선교방향
1. 기독교수용의 특징
일본에 기독교가 소개된 것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통치시대인 1549년이다. 가고시마출신의 일본인 안지로가 1548년 5월 고아에서 포루투칼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다음해 8월 선교사 프란시스코 자비에르가 안지로의 안내를 받으며 가고시마에 상륙하여 야마구치, 교토 등에서 기독교 전도를 시작하였다. 당시 오다는 불교계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고 서양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기리시단(기독교)의 전도를 지원하였기 때문에 교토에 기독교사원(南蛮寺)이 건립되었고 얼마 안 가서 200개의 교회가 설립되고 많은 무사들을 포함하여 신도는 10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초기의 일본 기독교 선교가 괄목할만한 성공을 거두게 된 요인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겠으나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초기 선교사들이 일본인의 자질과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일본의 생활양식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탁발승의 모습으로 정좌를 하였고 일본적 예의를 체득하고 있었다. 둘째로 선교사들이 무사계급을 비롯하여 당시의 위정자들을 적극적으로 방문하고 안경, 악기 등의 진품을 증정하고 그들의 허가와 지지를 얻어 전도하고자 했다. 셋째로 포르투칼 상인들에게 일본방문을 권유하여 일본 다이묘들이 무역을 위하여 선교사들을 우대하게 만들었다. 넷째로 일본인들의 지식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지식인 신부들을 파견하고 일본어역서를 출판하였다. 다섯째로 질병의 치료를 비롯하여 서민들의 고통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자선활동에 주력하였다. 여섯째로 일본인 청년들을 해외로 보내서 외국어를 습득하고 서구문화를 이해하도록 하여 미래의 지도자를 육성하였다. 이러한 초기선교의 성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후 오랜 동안의 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그 신앙의 명맥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일본은 1858년에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비롯하여 서구 여러나라들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였고, 다음해부터 선교사들이 도래하기 시작하였다. 미국북장로교회의 J.C. 헤본을 비롯하여 성공회의 J.리긴즈와 C.M.윌리엄즈가 일본에 들어왔는데 아직 기리시단금제령 아래 있었기 때문에 영사관 목사 혹은 통역 등의 명목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 개신교는 오랜 동안의 금제령이 해제된 1873년부터 본격적인 일본전도를 시작하였는데, 비록 수적 성장에는 한계를 나타내었지만 일본사회에 기독교문화의 뿌리를 내리는데 성공하였다. 스즈기(鈴木範久)는 “일본의 기독교가 토착종교인 불교와 신도에 밀려 가정이나 마을의 종교가 되지 못하고 개인적 윤리에 멈추었지만 일본사회에 정직과 근면의 정신을 정착시켰다”고 평가하였다. 개신교도 초기 기독교 전도와 같이 상층계급과 진취적 직업인들에게 전도하여 성공을 거두어 촌장 등 지도자들이 기독교에 입신하였다. 이는 신사와 불교사원으로부터 지역사회의 인심이 이반된 대문이기도 하겠지만 일본인들은 ‘새로운 불교와 같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기독교가 성서주의 신앙을 강조한 나머지 수행의 요소가 결여되어 현대인들의 종교적 요구를 채워주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일본 개신교 신도들의 입신경위를 살펴보면 크리스천 가정에서 자라서 자연히 크리스천이 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오늘날에는 3대, 4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음으로는 교회학교 혹은 교회소속의 유아원이나 유치원에서 신앙교육을 받은 후에 성인이 되어서 다시 교회에 나오는 경우와 미션계 학교에서 기독교를 접하여 크리스천이 되는 경우가 있고, 때로는 기독교서적을 읽고 감명을 받아서 교회를 찾는 경우 등이 있다. 조사에 의하면 일본인의 약 3분의 1에 가까운 사람들이 한 번은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것도 누군가의 결혼식에 참가한 것이 아니고 병이나 사업실패, 가정의 문제 등 인생의 문제 때문에 가게 된 것이라고 한다.
2. 일본선교의 필요성
일본의 기독교는 그 고난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수적인 열세와 문화적 배타성에 의하여 일본인들의 종교적 욕구를 채워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식인 교회라는 당파성으로 인하여 서민대중의 애환과 소망을 그 선교적 과제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일본문화의 비종교적 표상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을 통하여 사회적 영성의 회복과 더불어 영혼구원을 위한 특별한 선교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종교의 세속화와 지식인의 무신론화라는 말로 표현되는 오늘의 일본의 정신적 황폐화는 근대일본의 종교정책과 서구문화의 수용과정에서 국가주의적인 정치사상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문화는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생성되고 상업적 목적에 의해 발전된 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본의 대중문화의 비종교성은 우치무라가 갈파한 것 처럼 서구문화의 본질을 구성하는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고 서구문화의 껍데기만 받아 들인데 기인한다. 더구나 국가신도가 민중의 종교신앙적 요구에 부응하기보다는 불분명한 정교분리의 구호아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만 기여하였기 때문에 민중들의 종교자체에 대한 불신감과 의혹감을 가중시켰다.
문화의 세속화, 인간관의 세속화라는 말로 표현되는 무신론적 문화는 필연적으로 상업주의적 목적에 의해 조작된 문화로 변질되면서 실용주의와 향락주의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기능하게 된다. [세계]라는 잡지와 무수한 철학서를 출판하는 고단샤(講談社)에서 포르노잡지인 [프레이보이]를 간행하고 있는 것은 일본사회에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양질의 예술영화를 만드는 영화사에서 포르노영화도 제작하여 배급하는 일 등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일본의 문화적 풍토이다. 많은 일본의 양식 있는 지식인들이 지적하듯이 일본의 전통적 종교들은 이에 대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문화의 비종교성에도 불구하고 일본문화 가운데는 일본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동력을 제공하는 상위의 문화가 존재하고 있다. 문화의 이중구조는 일본사회의 계층구조에 기인한 것인데, 상위문화와 하위문화의 확연한 구별이 일본인들의 문화에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한편, 일본에 대한 기독교 선교는 궁극적으로 일본의 문화변혁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문화의 성격에 따른 전략적 개념을 정립하여야 한다. 일본종교의 쇄퇴와 일본인의 무신론화는 일본선교의 당위성과 긴급성을 반증하는 것이며, 신앙 없는 종교를 의지하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살아있는 신앙을 전하고 삶에 궁극적 의미를 주는 일은 일본선교의 사명이다. 일본선교의 새로운 비전은 무신론적 일본문화를 복음화시키는 데 있다. 일본사회는 심령을 변화시키고 구원의 확신을 얻게 하고 부활의 신앙과 함께 다시 사는 참 신앙을 갈망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일본의 종교인구가 실제인구의 두 배에 달한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종교에 대한 갈망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 몇 년간 이혼율이 23%에 달하고 있고, 자살율은 2.4%나 된다고 한다. 한해에 2만명이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더구나 한참 가정을 지키고 이끌어나가야 할 40대와 50대가 전체의 4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고아가 되는 아이들이 1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또한 소위 이지메(왕따)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연쇄유아살인이나 보험금 때문에 자식을 살해하는 등의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세계최고의 경제적인 부를 자랑하지만 전체노인의 약 30%가 노인들만 살고 있고, 그 중에 독거노인이 11%에 달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홀로 임종을 당하여 몇 일 혹은 몇 달 후에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지식인들 가운데도 역사를 왜곡하고 구비증강을 주장하여 이웃나라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이웃나라의 신음소리에 대하여 한국교회는 무언가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3. 일본선교의 방향
일본문화의 성격과 일본종교의 현실은 기독교 선교의 긴급성을 더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먼저 일본교회의 특징과 선교적 역할을 검토하면서 앞으로의 선교전략과 방향을 모색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기독교의 신도 수는 1984년 현재 1,166,686명(문화청통계)으로 전체인구의 1%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출석하는 신도 수는 훨씬 적을 것이다. 일본 최대의 개신교파인 일본기독교단은 신도총수 20만 4천명(1990년)에 세례자가 10만 3천명이고 주일평균 예배출석자는 6만 8천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한국의 대형교회와 비교하면 한 교회의 출석자수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 이러한 숫적인 약세에 대하여 일본인 목회자들 보다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더 심각하게 느끼고 있고, 한국인 선교사들은 근년에 복음주의 계통의 개척교회들이 성장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면서 재일한국인만이 아니라 일본인을 위한 선교를 모색하고 있다.
일본교회가 수적으로 약세를 면치 못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크게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초기의 개신교 전도가 지식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서 일본교회가 엘리트 교회로 정착하였다는 점이다. 일본의 역사가 스미야 미키오(隅谷三喜男)의 연구에 의하면 메이지 20년(1887년)경 일본교회는 귀족(士族) 30%, 농민과 평민이 70%로 구성되어 있었고 초기의 농촌교회를 이끈 사람들은 도시근교의 상층농민이었다고 한다. 메이지(明治)기 이래 일본기독교는 무사계급에 의하여 수용되어 지식인 교회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서민들이 출석하기 어려웠다고 볼 수 있다. 초기 일본어 번역이 어려운 한문을 혼용한 문어체로 되어있어 서민들이 읽을 수 없었다는 사실은 한국어 번역이 한글로 번역되어 일반대중들에게 읽혀졌다는 것과 대조된다.
둘째로 초기의 일단의 기독교인들이 교파주의와 교회주의를 거부하고 무교회주의를 관철하여 교회론적인 바탕이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미국의 교파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출발한 한국교회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우치무라 간죠(内村鑑三)가 무교회주의를 주장하게 된 것은 서양선교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스스로 성서를 읽고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자는 취지였다. 그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그리스도를 믿는 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무교회주의적 발상은 일본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일체의 형식을 거부하고 명상을 통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일본의 선불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오늘의 일본교회가 성서주의 신앙을 강조하며 성경연구에 공헌하였지만 교회론의 약화로 이어져 예배 및 성찬식 등의 수행적 요소가 결여되고 서민들의 종교적 요청에 응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일본의 기독교가 일부의 지식인 및 도시의 중산계급에만 수용되었고 일본의 전통적 관습및 문화로부터 보면 기독교는 뿌리 없는 풀과 같은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이 일본교회 지도자들에게서 들려오기도 한다. 일본 기독교의 양적 성장을 위한 선교의 방향과 전략은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하여 서민정서에 초점을 맞추어 수립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로 일본서민들의 종교의식에 대응하는 선교의 방향과 전략을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모리오카 하루미(森岡清美)에 의하면 현대사회의 서민들이 종교에 접근하는 조건은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먼저 인간이 고민하고 고통 당하는 상태에 있을 때, 즉 가난, 질병, 분쟁, 죽음 등의 생물학적 존재로서 위험한 상태에 있을 때와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어도 사는 재미가 없을 때이다. 다음으로 교주나 전도자의 인격, 가르침, 의례, 보호 등에 매력을 느낄 때이다. 마지막으로 사회적인 조건으로 정치, 경제상의 전환기에서 사회의 규범이 왜곡되고 기성종교의 권위가 실추될 때이다.
둘째로 일본의 신흥종교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그 포교방법을 원용하는 선교전략이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천리교의 경우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신, 아버지 신(親神)인 천리왕명(天理王命)에 연결된 신자(神子)의식을 갖게 하고 구원받은 활력적 삶을 사는 이상을 갖게 한다. 또한 창가학회(創価学会)나 입정교성회(立正佼成会)에서는 조직이 최하위에 좌담회 혹은 법좌(法座)가 있는데 약 10명으로 된 그룹에서 철저한 방법으로 참가자의 고민과 고통을 해소시켜 주어 말하자면 그룹 다이나믹스에 의한 카운셀링을 행한다. 이것은 현대사회에서 고립되고 관리사회에서 무력화된 사람에게 정말로 구원의 자리이고 은혜의 자리가 된다.
셋째로 지식인 중산교회의 ‘지식’의 종교에서 서민들의 종교적 요구를 수용하는 ‘행위’의 종교로 바꾸는 선교전략이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가도와키 가키지(門脇佳吉)는 “초대교회에서는 박해 속에서 성서를 읽으며 고난의 의미를 몸으로 체험하였는데, 오늘의 신자들은 부유한 생활 속에서 성서를 머리로만 읽고 있다”고 하면서 성서를 몸 전체로 읽을 것을 주장한다. 성서에서 말하는 신앙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행위’이며, 성서의 말씀은 그리스도 자신의 ‘따듯한 몸’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예배에 참가하고, 기도하는 것도 몸 전체로 해야 함을 강조한다. 예배와 성찬식은 일본의 마쯔리(축제)와 같은 것으로 몸 전체로 참가해야 한고, 기도도 호흡을 사용하여 소리내어 몸으로 드려야 한다. 이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활력이 몸 전체로 받는 방법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일본교회의 성장을 위한 제언들은 대부분 한국교회에서 이미 선교의 전략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들이다. 다만 일본의 종교문화에 대한 좀더 깊은 관심과 일본인들의 종교의식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뿐이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일본에서 외국인 선교사가 일본인들의 교회에서 목회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고, 한국인 선교사들도 지난 한 세기 재일 한국인만을 대상으로 전도해 온 게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들어 한국의 복음주의 계통의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일본인 선교를 과감히 시도하고 있고 또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는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선교경험을 통하여 일본의 서민들에 대한 선교전략을 수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비하면 계층분화가 심화되어 계급상승이 어려운 일본사회에서 힘든 삶을 영위하고 있는 서민들의 종교적 요청에 응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한국인 선교사들의 특별한 사명이라고 보여진다.
Ⅴ 결 론
지금까지 일본문화의 성격을 분석하면서 일본인들의 종교적 심성을 살펴보고, 일본 기독교의 특징을 검토하여 일본선교의 전락과 방향을 전망해 보았다. 일본문화의 성격을 일본의 사회구조 및 일본인의 의식구조를 통하여 살펴보는 일은 지금까지 선행연구의 업적으로 인하여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선행연구를 통하여 대체로 일본사회가 그 사회의 기본적 틀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독특한 가치관과 도덕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라시대의 쇼토쿠 태자에 의하여 확립되었다고 하는 일본의 가치관은 상하관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수직적 사회의 틀을 확고히 했다. 그러나 ‘종은 주인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고 의리를 지키지만 주인이 창피를 줄 때는 가차없이 찌른다’는 말 처럼, 계층사회를 유지하는 내적 합의는 공고하다. 그러나 일본사회에 강한 집단의식이 유지되는 것은 그런 상하관계의 메카니즘에 의해서 라기 보다는 소위 ‘장’을 중심으로 연결되는 아마에의 심리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아마에 심리를 보상해 주는 ‘장’의 집단적 목표에 대한 일본인들의 태도는 단연히 목표지향적일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곧 눈에 보이는 현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일본문화의 외적 표현은 언제나 내적 감정에 의하여 지지를 받고 보완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문화의 근본적 성격을 결정짓는 내적 감정은 때때로 종교 신앙의 모습에서 그 실체를 드러낸다. 일본의 종교가 메이지정권의 정책에 의하여 세속화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고 화혼양재(和魂洋才)의 기반으로 하는 정치논리의 속박에 갇혀서 기독교가 일본서민들의 종교적 욕구를 충분히 수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대중문화는 서민들의 고통과 소망을 수용하며 그 힘을 놀라울 정도로 확장시켰다. 때로 심지어는 폭력집단 혹은 컬트집단 마저도 그러한 서민들의 종교적 욕구를 수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종교적 심성은 일본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임에 틀림없다.
초기 일본기독교의 화려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오랜 탄압 후에 새로 시작된 개신교 선교는 그 수적 성장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무엇보다도 현대 일본사회에 정직과 근면의 정신을 정착시키면서 도덕적 기반으로 기능한 것은 앞으로의 기독교 선교에 밝은 전망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한편 근대 일본종교의 세속화와 신앙적 기반이 결여된 문명화로 인하여 무신론적 지식인을 양산하고 종교의 기능을 폐쇄시켰기 때문에 많은 사회문제를 잉태하게 되었다. 오늘의 일본인과 일본사회로부터 제기되는 종교, 신앙적인 질문에 응답하기 위하여 기독교는 새로운 선교전략과 방향을 수립하여야 한다. 그것은 분명 다수의 일본 서민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품을 수 없었던 교회의 체질을 갱신하는 것으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이미 한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의 대중선교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재일한국인을 비롯한 일본의 서민층에 선교사역을 시도하고 있고, 일본교회의 일각에서도 일본서민의 종교적 요청에 응답할 수 있는 교회로 그 모습을 변화시키고 있다. 최근에 복음주의적 교회들이 새로운 전략적 선교를 시도하는 것은 기대할 만 한 일이다.
일본의 오랜 선교역사 속에서도 결코 복음의 씨앗이 닿아보지 못한 척박한 땅, 서민대중의 마음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그 심령이 변화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며, 이는 이미 그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한국인 선교사들의 확신에 의해서만 믿어질 수 있는 실상이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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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Religious Substance and Christian Mission in Japanese Culture
Cho, Jai-kook
Full-time Lecturer
Anyang University
Anyang, Korea
This study analyzes Japanese culture in the light of its religious substance in order to find out the method and direction for christian mission. Korean churches are calling for a new strategy for long term mission for other countries due to their experience abroad. Particularly, the mission to Japan is different from 3rd world countries, because Japan's economic situation is better tan Korea's.
This thesis aims to understand the necessity for a new strategy for Korean christian mission in Japan. For this, we must understand the underlying structure of the Japanese culture and religions and than analyze the process of secularization of Japanese traditional religions and the basic ground of spirituality in Japanese popular culture so that we may understand the religious substance of Japanese cultures. Also the study analyzes the hisitorical characteristics of christian reception, and the necessity of christian missions in order to explore new directions for christian missions in Japan.
Mr. Shuich Kato points out competitive collectivism, secularism and a present- centered attitude as the underlying characteristics of Japanese culture. According to him, Japanese collectivism is not a class-oriented society but a goal-oriented society. The religious elements are strong in Japanese high culture as well as in popular culture. However, during the process of modernization, Japanese traditional religions have been transformed into as secular institutions. Buddhism, which is the biggest religion in Japan, has been mocked as "the funeral religion", and Buddhist temples have been reduced into sightseeing places as well as funeral service places. Shinto shrines are no longer respected by people because of their supports for World War II. In the meantime, arguments about the religious characteristics of Shinto shrines have continued. Mr. Yamaori Tetsuo said that the collapse of religion has resulted in atheistic intellectuals in modern Japanese society. While Japanese religions can not give people religious satisfaction due to secularization, Japanese popular culture and cult groups may appeal to people and respond to their religious demands. This essay daiscuss Yonka(popular music), cult religion and the Yakuza, Japanese gangsters, which may contain the characteristics of their religious needs.
Japanese churches need to respond to the demands of the Japanese people to solve the problems of christian mission work in those situations. The Japanese United Christian Churches which is the biggest denomination, numbers about 68,000 throughout all the congregation of worship service on Sunday, and its number is less than the number of one church in Korea. We can mention several points as causes; In the beginning, christian missions had targeted intellectuals, therefore Japanese churches were formed as elite churches. Early Japanese christians rejected denomination and church-centered idea and took to the non-church movements.
In conclusion, we can suggest three points of direction and strategy; Japanese churches have to plan their strategy to respond to the religious demands of low-class people and for more effective mission, churches must take useful methods from cult religions while analyzing them critically. Today's churches must plan to reduce 'knowledge church' of elite people into 'behavior church' of the mass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