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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사대강령(四大綱領) 사대 강령은 곧 정각 정행(正覺正行) · 지은 보은(知恩報恩) · 불법 활용(佛法活用) · 무아 봉공(無我奉公)이니, 정각 정행은 일원의 진리 곧 불조 정전(正傳)의 심인을 오득(悟得)하여 그 진리를 체받아서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작용할 때에 불편 불의(不偏不倚)하고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원만행을 하자는 것이며, |
[복습]
대종사님께서 정전을 펴시면서 먼저 <<제1 총서편>>을 내주셨습니다. 총체적 서설이지요. <제1장 개교의 동기>는 ‘원불교라는 종교가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에 관한 것이고, ‘나는 원불교라는 종교를 통해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제2장 교법의 총설>은 기존의 불법을 가져다쓰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겠다는 내용입니다. 총서편은 대종사님의 목표와 방향이고, 구상입니다. 집을 짓는다 치면 어떤 집을 짓는지에 대한 구상을 한 것이지요.
그러면 구체적인 도면, 설계도가 필요하겠죠? 그게 <<제2 교의편>>입니다. 교의편은 총 7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1장 일원상>은 일원상의 진리, 신앙, 수행, 서원문, 법어, 게송에 대한 설명입니다. 일원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하신 겁니다. 사실, 일원상에 대해서 짧게 설명하자면 ‘언어도단의 입정처’라 한 마디로 말씀하셔도 됩니다. ‘우주만유의 본원’이라 말씀하셔도 되고요. 그렇지만 대종사님께서 어떻게 해서든 알려주시기 위해 반복해서 자세히 설명해주신 것입니다.
<제2장 사은>, <제3장 사요>는 일원상의 외적 위력입니다. <제4장 삼학>, <제5장 팔조>는 일원상의 내적 속성입니다. <제6장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는 사은사요와 삼학팔조의 관계입니다.
[사대강령]
오늘은 제2 교의편 <제7장 사대강령>을 공부하고, 그중 ‘자력양성’에 대해 자세히 보겠습니다.
제7 장 사 대 강 령 (四大綱領) The Four Great Principles - 정전 52쪽 - |
* 원기 26년(1941년) 만들어짐. 거북이처럼 생긴 교리도의 거북이 네발에 해당한다. * 교리의 네 가지 줄거리요, 교단의 네 가지 큰 목표이다. (교리의 4대 이념. 교리에 근간한 교단의 목표.) * 일원상을 중심으로 한 원불교의 근본정신 즉 원불교 사상의 강령이다. * 원불교의 최고 이상(理想) · 목적(목표)이다. * 원불교 대외적 간판공개장이다. * 교리를 실천하는 대의와 이를 실현시키는 방향로를 밝힘 * 전체 교리와 교단의 지향점을 4가지로 집약하여 놓은 강령. * 신앙 수행의 결과로 종합적인 실천방법을 강령화 함. * 원불교적 인간상 확립의 4대 지표 * 원불교가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는 4대 강령이 실천되는 사회. * 원불교가 추구하는 이상적 인간상 = 4대강령을 실천하는 인간상 * 회상의 목표 = 개교의 동기, 교의상 교단의 목표 = 사대강령 |
일본 사람이 불법연구회 총부에 찾아와서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네 불법연구회가 불교를 표방하면서 하고 있는 게 무엇인가?” 대종사님께서 그때 즉답한 것이 바로 사대강령입니다. 외부 사람에게 ‘사은사요 삼학팔조’라 말하면, 무슨 말인지 어떻게 알겠어요? 외부인들도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표현하신 것이 사대강령입니다. 삼학팔조를 모아놓은 것이 ‘정각정행’입니다. 사은사요를 모아 놓은 것이 ‘지은보은’입니다. ‘불법활용’과 ‘무아봉공’은 교단의 목표입니다. 사대강령으로 말하면, 교도가 아닌 사람들도 무슨 뜻인지 대충은 알지요.
* 불교의 4법인(法印) |
연기사상(緣起思想)의 입장에서 현상의 유위계(有爲界)와 본체 무위계(無爲界)의 실상을 나타내는 원시불교의 대표적인 교의(敎義). 제행무상(諸行無常) · 제법무아(諸法無我) · 일체개고(一切皆苦)· 열반적정(涅槃寂靜) |
불교에서 이념적인 내용으로 ‘사법인’이 있습니다. 제행무상’은 시간은 무상하다는 것입니다. ‘제법무아’는 공간이 무아라는 것입니다. ‘일체개고’는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나’라는 아집 때문에 고통스럽고, 내 밖의 모든 대상에 집착하는 바람에 고통스럽습니다. 이러한 고통을 넘어서는 것이 ‘열반적정’입니다.
이렇게 불교에서 4법인이 있듯이, 원불교에는 사대강령이 있습니다.
[사대강령의 체/용]
사대 강령은 곧 - 정전 52쪽 - 정각 정행(正覺正行)·지은 보은(知恩報恩)· 불법 활용(佛法活用)·무아 봉공(無我奉公)이니, |
사대강령은 모두 ‘체(體)’와 ‘용(用)’으로 구성됩니다. 정각정행에서 정각이 체이고 정행은 용입니다. 지은보은에서 지은이 체이고 보은은 용입니다. 불법활용에서 불법이 체이고 활용은 용입니다. 무아봉공에서 무아가 체이고 봉공은 용입니다.
체(정각, 지은, 불법, 무아)가 핵심입니다. 그걸 활용하는 것이 용(정행, 보은, 활용, 봉공)입니다.
체 |
용 |
정각 |
정행 |
지은 |
보은 |
불법 |
활용 |
무아 |
봉공 |
[사대강령의 내용]
정각정행에서, ‘정각’은 일원상 자리를 정각한다는 것입니다. ‘정행’은 일원상 자리를 그대로 행한다는 뜻입니다. 정각정행은 원불교 수행문 전체를 모아놓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학팔조를 모아서 표현하니 ‘공부의 요도’라 표현할 수도 있고, 외부인이 쉽게 이해하기에는 ‘정각정행’이라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은보은에서, ‘지은’은 일원상의 은혜를 알자는 것입니다. ‘보은’은 일원상에 그대로 은혜를 갚아나가자는 것입니다. ‘은(恩)’이 곧 일원상이거든요.
불법활용에서, ‘불법(佛法)’이 곧 일원상입니다. 불법활용은 일원상의 진리를 가르치고 활용하자는 것이지요. 불법활용은 처음에는 ‘불교보급’이었는데, 정전을 편찬하면서 ‘불법활용’으로 바뀌었습니다.
무아봉공은 일원상 그대로 봉공하자는 뜻입니다. 원불교는 공도주의거든요.
무아봉공은 처음엔 ‘진충보국’이었습니다. 일본의 억압을 피하기 위해 ‘진충보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거지요. ‘진충보국’이라는 용어가 있었음을 알고 원불교가 일제에 아첨했다는 이유로 원불교를 떠난 청년도 있더라고요. 그러나 여기서 ‘충’은 나라에 대한 충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고 보셔야겠습니다. ‘충성 충(忠)’은 ‘마음 심(心)’에 ‘가운데 중(中)’이잖요. 마음의 중심을 잡은 것이 곧 충이라하겠지요. 어쨌거나 해방 후 정전을 편찬하면서는 ‘무아봉공’으로 바뀌게 됩니다.
1 |
정각 정행 |
○을 정각하고 ○을 정행하라 |
수행문 실천 |
교리의 강령 |
2 |
지은 보은 |
○의 은혜를 알아서 ○에 갚아라 |
신앙문 실천 | |
3 |
불법 활용 |
○의 진리를 가르쳐 널리 보급하고 활용하라 |
교단적 실천 |
교단의 목표 |
4 |
무아 봉공 |
○ 그대로 봉공하라 |
대사회적 실천 |
정각정행과 지은보은은 교리의 강령을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정각정행은 수행문이고, 지은보은은 신앙문입니다. 정각정행으로 나의 수행을 잘하여 대타관계에서는 지은보은으로 신앙을 잘하자는 것이지요.
불법활용과 무아봉공은 교단의 목표를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원불교는 공도주의요, 대세계주의입니다. 원불교는 원불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불교의 존재 목적은 일체생령을 낙원세계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원불교 교도들은 좀스럽게 살지 않아요. 전체가 나이거든요. 저 멀리 떨어진 이슬람 어느 나라에서 테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도하는 사람이 원불교인입니다. 원불교인은 늘 일원상을 품고 살거든요.
1 |
정각 정행 |
원만구족하고 지공무한 인격 |
진리의 세계 실현 |
대진리관 |
동원도리 |
수신의 요체 |
2 |
지은 보은 |
보은 합덕 (報恩合德) |
정의(情誼)의 세계 실현 |
대윤리관 |
동기연계 |
제가·처세의 요체 사회정화 · 세계평화 |
3 |
불법 활용 |
생불·활불 (生佛·活佛) |
불국(佛國) 세계 실현 |
대국가관 대세계관 |
동척사업 | |
| ||||||
4 |
무아 봉공 |
공도(公道)의 주인 |
대세계주의 실현 |
[정신정각정행]
정산종사 법어 경륜편 5장 원기 33년 4월, 원불교 교헌(敎憲)을 제정 반포하시니, 총강 제1조에 [원불교는 우주의 원리요 제불의 심인인 즉 일원의 대도에 근본하여 정신 정각 정행을 종지로 한다] 하시고, 제2조에 [본교는 인생의 요도 사은 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학 팔조로써 전세계를 불은화하고 일체 대중을 선법화하여 제생의세하기로 목적한다] 하시고, 제3조에 [본교는 법신불 일원상을 본존으로 한다. 일원은 사은의 본원이요, 법보화(法報化) 삼위의 대상이며, 서가모니불과 소태산 대종사의 정전 심인 이심을 신봉하여 진리로써 신봉한다] 하시니라. |
원불교 교헌 총강 제1조에 원불교는 ‘정신정각정행’을 종지로 한다 하셨습니다. ‘정각정행’ 앞에 ‘정신(正信)’이 있지요. 정각정행을 하려면 먼저 신(信)이 있어야 합니다. 바른 믿음이 있어야 바른 깨달음이 옵니다.
여러분께서 ‘정각정행’이라는 말을 보실 때는 그 앞에 ‘정신(正信)’이 생략되었다고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정각정행 본문]
정각 정행은 - 정전 53쪽 - 일원의 진리 곧 불조 정전(正傳)의 심인을 오득(悟得)하여 그 진리를 체받아서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작용할 때에 불편 불의(不偏不倚)하고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원만행을 하자는 것이며, |
[정각정행 본문 ①정각]
정각 정행은 - 정전 53쪽 - 일원의 진리 곧 불조 정전(正傳)의 심인을 오득(悟得)하여 |
* 오득(悟得) : 때달아 체득함. 의심이 풀리고 완전히 알게 됨. * 정전(正傳) : 올바로 전함. 정전심인(正傳心印) 제불제성들께서 그 심법을 전하실 때에 이심전심으로 전해 주심을 말함. |
‘불조 정전의 심인’은 ‘제불조사께서 바르게 전하는 마음 자리’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제불조사는 서가모니 부처님 외 역대 성자분들이나 조사님들을 의미합니다. 이 자리에서 만나면 종교화합이 가능하합니다. 종교화합이 되면 평화세상이 가능합니다. 이 자리에 만나지 않으니까 종교간 전쟁이 일어나지요. 예수님이나 무함마드님께서 서로 싸우라 하셨겠습니까? 그런 말씀 하신 적 없으세요. 제불조사의 마음 자리를 알면, 어찌 싸울 수 있겠습니까? 제불조사님들이 말씀하신 진리가 어찌 서로 다르겠습니까? 진리는 같되, 표현만 다를 뿐이지요. 일원상이라 하고, 부처님이라 하고, 하느님이라 하고, 알라라 하고, ‘도’라 하는 등 용어만 다른 거예요. 손가락을 볼 게 아니라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봐야지요. 용어가 다른 건 신경 쓸 게거 없어요. 용어 이면을 봐야지요.
정각정행에서는 ‘일원의 진리’를 ‘곧 불조 정전의 심인’이라 표현하지만, <일원상의 진리>에서 “일원은 우주만유의 본원이요, 제불제성의 심인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이라 하셨으니, ‘우주만유의 본원을 오득하여’라거나 ‘일체중생의 본성을 오득하여’라 하여도 맞습니다.
‘심인(心印)’은 제불조사의 마음을 도장에 비유한 것입니다. 중생은 기분에 따라 마음이 왔다갔다 합니다. 제가 어릴 때 보니 동네 개들이 친하게 지내다가도 먹을 게 생기면 갑자기 마구 짖으며 서로 싸우더라고요. 좋았던 마음이 화난 마음으로 바뀌는 거지요. 중생의 마음이 그와 같습니다. 에고(ego)의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하면서도 감정에 휘둘리고 살지요. 그러니 중생의 마음에는 ‘도장 인(印) 자’를 붙여줄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제불조사는 정각을 해서 일상상 자리, 참 마음 자리를 깨쳐서 그 자리를 쓰기 때문에, 제불조사의 마음에 ‘도장 인(印) 자’를 붙여서 ‘심인’이라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도장이라 해서 마음이 하나의 형태로 나온다는 뜻은 아니에요. ‘본래 체 자리를 여의지 않고 마음을 쓴다’는 뜻입니다. 상황 따라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지만, 체를 놓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를 보십시오. 무엇이 저를 봅니까? 눈이 봅니까?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무엇으로 들으십니까? 귀로 들으십니까? 눈과 귀는 구일 뿐입니다. 눈을 통해 보고, 귀를 통해 듣고 아는 그것, 순간순간 생생하게 아는 것이 있지요. 이를 ‘영지(靈知)’라 부릅니다.
그런데 어디 있습니까? 꿈도 없이 잠잘 때는 어디 있습니까? 대종사님께서 답을 주셨습니다. ‘공적(空寂)한 가운데 나오는 영지靈知)’이고, ‘진공(眞空)한 가운데 묘유(妙有)’라고요. ‘이것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데 묘하기 있다’하여, ‘묘할 묘’를 붙여 ‘진공묘유’입니다. ‘이것이라는 게 없이 신령스럽게 안다’하여 ‘신령 령’자를 붙여 ‘공적영지’입니다.
이걸 참으로 뭐라고 해야 할까요? 할 것이냐. 크다고도 할 수 없고 작다고도 할 수 없고,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자니 곤란하고 저렇게 말하자니 곤란하여 뭐라 말할 수 없다 해서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하였습니다. ‘한 물건’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 물건은 무형무체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그저 반응하는 것이지요.
이 자리를 깨쳐 아셔야 합니다. 저는 제일 바보 멍청이가 자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나라는 것 그 자체’는 무엇인가 제대로 아는 것이 정각정행 중 정각이요, 지은보은 중 지은이고, 불법활용 중 불법이며, 무아봉공 중 무아입니다. ‘참 나’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고, ‘우주의 본원’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어떻게 알겠습니까? 일단 신(信)을 통해 알아가셔야 합니다.
[정각정행 본문 ②정행]
그 진리를 체받아서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작용할 때에 불편 불의(不偏不倚)하고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원만행을 하자는 것이며, |
* 불편불의(不偏不倚)치우칠偏, 의지할倚 : 치우치거나 의지하지 않음. 치우침도 없고 비기지도 아니함. 불편 : 원근친소에 끌리지 않음, 불의: 기대지 않고 자력으로 살아가는 |
“그 진리를 체받아서”라 하셨습니다. 서예를 배우실 때 체본을 잘 받으셔야 해요. 오만 사람이 체본을 내놓는데, 그중에 진짜 대가인 사람한테 체본을 받아야 서예가 늘거든요. 정각정행에서 체받아야 하는 것은 ‘진리’인 것이지요.
‘불편불의’라 하셨습니다. ‘불편’은 원근친소에 끌리지 않는 것입니다. 일전에 어느 외교부 장관이 자기 딸은 외교부 공채로 뽑은 적이 있어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원근친소에 끌려서 한 쪽에 편착한 것이지요. 일원상 자리에는 본래 원근친소가 본래 없습니다. 텅 비어서 훤할 뿐입니다. 공적영지 자리입니다. 이 자리를 체 받으면 원근친소에 끌리지 않습니다. 이 자리를 체받지 못하니까, ‘나’가 있고 ‘너’가 있고, ‘내 편’이 있고 ‘네 편’이 있고, ‘내 가족’ ‘네 가족’이 있어서 서로 싸우게 되는 겁니다. 본래 진리 자리에 그런 거 없거든요.
‘불의’는 의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의지한다는 것은 어딘가에 짝한다는 것을 전제하지요. ‘내 편’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일원상 자리는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자리거든요. 본래 기대지 않는 자리입니다. 본래 마음이라는 자리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거든요. 천상천하에 기댈 것 없이 본래 하나이면서 전체입니다. 이 자리를 깨닫지 못하니까 한 편에 치우치고 어딘가에 의지하는 겁니다.
한 쪽에 치우치지도 않고 한 쪽에 의지하지도 않는 자리가 일원상 자리입니다. 본래 이 마음 자리는 툭 터져서 훤하거든요. 편착할 것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습니다. 원만구족한 자리요, 지공무사한 자리입니다. 여러분이 제 목소리를 듣고 아는 이 자리, 참 마음은 ‘원만구족 그 자체’이고 ‘지공무사 그 자체’거든요.
원만구족’은 텅 비어서 꽉 찼다는 뜻입니다. ‘지공무사’는 지극히 공변되고 ‘사사로울 사(私)’가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제 목소리를 듣고 아는 이것’이라는 게 있다고 치면, 즉, ‘나’라는 식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私)’입니다. 그러나 나라는 게 없이 본래 툭 터져서 훤히 알아요. 지공무사(至公無私)입니다. 이것이라는 게 없어요. 텅 비었기 때문에, 사(私)라는 게 없이 공변됩니다. ‘빌 공(空)’은 ‘공변될 공(公)’이고 ‘완전할 전(全)’입니다.
* 과불급(過不及) : 지나치거나 부족함. 넘치거나 모자람. 자기 책임을 완실히 못하는 과(過)- 말할 때 감정, 웃음, 겸손(바보취급), 공부(정신병) |
“과불급이 없는 원만행을 하자”고 하셨습니다.
‘과(過)’는 지나침이고, ‘불급(不及)’은 모자람입니다. 웃는 건 좋은 일이지만 초상집에서 과하게 웃으면 잘못이겠지요. 겸손은 좋은 일이지만, 겸손이 너무 과하면 바보취급 받아요. 공부하는 건 좋지만, 공부가 과하면 정신병에 걸리잖아요. 지나침이나 모자람 없이 ‘중(中)’이어야 합니다.
* 정각정행 : 정(正) = 중(中) ① 사리간에 올바르게 알아서 올바르게 실행하는 것.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 ② 일원의 진리를 바르게 깨달아서 심신을 바르고 원만하게 사용하는 것. ③ 천조의 대소유무의 이치와 인간의 시비이해의 일을 정확히 알아서 육근작용을 바르게 하는 것. ④ 자신 수행으로써 삼학팔조를 공부하면 정각 정행이 되어 원만한 인격이 된다. |
‘바를 정(正)’은 ‘가운데 중(中)’입니다. 중용에 ‘희로애락미발지중(喜怒哀樂未發之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희로애락이 발하기 전 자리가 중(中)이라는 뜻입니다. ‘정각정행’은 곧 ‘중각중행’인데, 이를 ‘중도행’이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원불교에서 ‘원만행’은 일상적인 용어의 ‘원만’과는 다른 뜻이죠. 원불교의 ‘원만행’은 중도행입니다. 중도행은 ‘시중(時中)’입니다. 상황에 맞는다는 말입니다. 초상집에서는 웃지 않는다는 거죠. 정체는 여여하여 마음 자리에 체를 잡되, 상황에 따라 육근을 써서 뛸 자리에선 뛰고 걸을 자리에선 걷고, 웃을 자리에선 웃고 울 리에선 우는 것이 중도행이요, 원만행입니다.
‘원만행’이 참 어려운 일이지요. 적당히 행하자는 게 아니거든요. 진리를 깨쳐서 불편불의하고 과불급이 없이 행동하자는 것이니까요. 끝없는 사리연구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판단을 할 때 원만행을 할 수 있지요.
현실적으로 보자면, 원만행을 한다 해도 한쪽에서 누군가는 서운할 사람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제도를 바꾸려할 때,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지요. 그러면 그쪽에다가는 적절한 보상을 하여 불만을 상쇄해야겠죠. 어느 한쪽 입장에서만 정책을 해서는 안 되니까요.
ex) 머리가 둘인 뱀=맛있는 쥐세끼를 혼자만 먹자 다른 머리가 화가 나서 독을 먹고 둘 다 죽음. |
머리가 둘인 뱀이 있었는데, 뱀 하나가 쥐를 잡아다가 혼자 먹었어요. 그러자 다른 머리의 뱀이 ‘너 죽고 나죽자’며 독을 먹어서 둘 다 죽었다고 합니다. 정산종사님께서 이 예화를 가볍게 듣지 말라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요리하다가 손에 상처가 났다고 칩시다. 그저 “상처났네” 보고 말건가요? “아이쿠” 나도 모르게 손을 감싸쥐게 됩니다. ‘상처났는데, 잡을까 말까’ 고민하지 않잖아요. 바로 잡아요. 부처님 마음이 이렇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았을 때 “도와줄까 말까” 고민하지 않습니다. 직접 하지 못하면, 기도라도 하는 겁니다.
본인이 텅 비어서 나 아님이 없기 때문에 전체를 위해 살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 자리’입니다. 모두가 똑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각각 다르지만 전체가 하나인 자리가 ‘일원 자리’입니다. 불보살들은 이 자리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예요. 한 기운 한 이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상대의 기쁨이 내 기쁨이고 상대의 아픔이 내 아픔이겠지요.
[정각정행에 관한 문답]
질문 1) 정각(正覺)과 대각(大覺)은 같은가, 다른가? 같은 의미로 쓰일 수도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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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산님 비유로는 ‘정각’은 ‘촛불 같은 광명’이고, ‘대각’은 ‘태양 같은 광명’입니다. 정각은 어느 부분을 일시적으로 깨달은 것이지만, 대각은 전체를 깨친 것이지요. 그러니 대종사님 같은 분에게 ‘정각하셨다’고 표현하지 않잖아요. ‘대각’하셨다고 표현하지요.
질문 2) 원만행(圓滿行)과 중도행(中道行)은 같은가, 다른가? 일반적으로 원만행이라 하면 두루두루 서운하고 부족한 점이 없는 처사를 말하고, 중도행이라 하면 도에 알맞은 행으로서 시중(時中)을 뜻하는 경우가 많으나 여기서는 불편불의하고 과불급이 없는 원만행이라고 할 때에는 중도행과 원만행을 같이 말한 것 같다. 즉 원만한 중도행을 말한 것이다. |
질문 3) 불조정전의 심인이 어떤 것이기에 그 진리를 오득하고 체 받아서 육근을 작용할 때에 불편불의하고 과불급이 없는 원만행을 하라 하셨는가? ①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진리와 각자의 본성 ② 불편불의하고 과불급이 없는 진리 ③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은 진리. |
질문 4) 정각과 견성은 같은가, 다른가? 일반적으로 정각은 사리를 바르게 안것이요, 견성은 성리를 안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여기서 말한 정각은 무란(無亂) 무치(無痴) 무비(無非)하고 원만평등한 불조의 심인을 정확히 아는 것에 본의가 있는 바 즉 견성과 같이 쓰신 것 같다. 정견(正見)과는 다른 개념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유사한 말 : 정각, 견성, 돈오(頓悟), 대각, 대원정각, 정견, 오도(悟道) |
정각은 견성과 거의 비슷한 말이지만, 정각이 견성보다 약간 더 큰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정각은 성리뿐만 아니라 사리까지 아는 것이라는 의미에서요.
질문 5) 정각정행의 가장 빠른 길은? 이 마음 밖을 떠나 가히 부처를 이루지 못할 것이요, 이 성품 밖을 떠나 한 법도 얻을것이 없는 것이니 먼저 ① 심인 즉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심성원래를 정확히 알아서 ② 육극 즉 심신작용을 오직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사용하는 것이요 ③ 경계를 대할 때마다 항상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 될 것이다. |
‘정각정행의 가장 빠른 길’은 삼학공부입니다.
질문 6) 원만한 인격을 갖추려면? 한 물건도 버리는 바가 없고 일분일각도 사사(私邪)에 흐르는 바가 없어야 할 것이다. |
원만한 인격을 갖추려면, 삼학공부를 잘하시면 됩니다.
질문 7) 원만한 인격이란? 마음이 원만하고, 말이 원만하고, 행실이 원만하며, 도학과 과학을 겸수(兼修)한 인격. |
원만한 인격이란 곧 삼대력을 갖춘 것을 의미합니다.
* 삼학의 대의 (부처님의 대인격) ① 편벽된 수행을 --> 원만한 수행으로 = 이사병행(理事竝行) ② 편벽된 인격을 --> 원만한 인격으로 = 복혜겸전(福慧兼全) ③ 편벽된 생활을 --> 원만한 생 활 로 = 영육쌍전(靈肉雙全) |
* 삼학 병진의 마장 ① 욕속심(欲速心) ② 원만한 스승을 만나지 못함 ③ 어느 한편이 근본이요 중요하다는 생각 ④ 방심(放心) 삼학 편수의 결과 = 기형도인이 되고 만다. |
[정각/정행]
아래는 ‘정각’과 ‘정행’을 표로 정리한 것입니다. 정각 앞에 ‘정신’이 있다는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
정신(正信)+정 각 |
정 행 | |
일원의 진리 곧 불조 정전(正傳)의 심인을 오득(悟得)하여 |
그 진리를 체받아서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작용할 때에 불편 불의(不偏不倚)하고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원만행을 하자는 것 | |
바르게 알아서 |
바른 실행을 하자 | |
견성 대체로 아는 것 같으나 전부 바쳐지지 않는 것은 견성하지 못한 것이다. |
성불 = 원만행(항마) 사은에 늘 보은하는 공부로 일체불에 불공하는 산 불공법이다. | |
무란(無亂)·무치(無痴)·무비(無非)하고 원만평등한 자성을 알아야 불일(佛日)이 증휘(增輝)되고 |
무란 · 무치 · 무비의 지공무사한 행이 되며 법륜(法輪)이 상전(常轉)된다. | |
일원상 법어의 큰 원상 ○ |
육근을 사용할 때 쓰는 작은 원상 ○ | |
온전 · 생각 |
취사 | |
바르게 깨달아야 바른 행이 나오며 |
바른 행이 나오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인격을 이룬다. | |
일원의 진리를 알아서 |
원만하게 행하는 것 | |
지공 무사한 자리를 알아서 |
지공무사하게 쓰는 것 | |
생멸 없는 자리를 알아서 |
생사에 해탈하는 것 | |
일체 만상이 없는 자리를 알아서 |
경계에 끌리지 않는 것 | |
불생불멸을 깨쳐 인과보응을 깨쳐 |
생사해탈 생사자유의 생활 고락에 끌리지 않는 생활 | |
일원 즉 사은(一圓卽四恩) |
보은 즉 불공(報恩卽佛供) | |
처처불상(處處佛像) |
사사불공(事事佛供) | |
그 일 그 일에 영단 신단(身丹) : 육근의 뭉치 기단(氣丹) : 기운의 뭉치 심단(心丹):단전·서원·원심(怨心) |
그 일 그 일에 정각 사물 학문 진리에 문리(文理) |
그 일 그 일에 정행 솔성요론 16조 실행 사은사요 실천 비행(非行) : 30계문. 다생악습관 제거 |
억만번 정정(定靜) 멈춤 가라앉힘 닦음 |
억만번 탁마(琢磨) 견문(見聞)-경전·법문 사색(思索)-선정·성리 수증(修證)-보림 함축 |
억만번 취선사악(取善捨惡) 불의(非行인 30계문, 다생의 악습관력) - 죽기로 끊고 정의(솔성요론16조, 사은사요) - 죽기로 실천 |
백천만 무량번 1. 닦고(때묻은 마음을) 2. 가라 앉히고(들뜬 마음을) 3. 때우고(새나가는 마음을) 4. 모은다(흩어진 마음을) |
백천만 무량번 1. 묻고(서로 의견교환) 2. 배우고(가르치고) 3. 생각하고(많이 궁글리고) 4. 수증한다(돈오점오頓悟漸悟) |
백천만 무량번 1. 참고 견디고 2. 끊고 고치고 3. 하나하나 실천하고(돈수점수頓修漸修) 4. 계속해서 노력한다(정성) |
1. 오욕(五慾)에 부동하고 2. 생사를 해탈하고 3. 동정에 일여(一如)한 경지 |
1. 허령(虛靈)이 솟고 2. 지각(知覺)이 열리고 3. 신명(神明)이 통한 경지 |
1. 중심(中心)을 잡고 2. 중도(中道)를 알아서 3. 중화(中和)를 이룬 경지 |
1조, 마음에 안정을 얻어서 모든 경계를 대할 때마다 심지에 요란함이 없는 해탈을 얻자는 것. 2조, 마음을 밝혀서 모든 경계를 대할 때마다 심지에 어리석음이 없는 광명을 얻자는 것. |
3조, 매사에 중도를 잡아서 모든 경계를 대할 때마다 심지에 그름이 없는 정행(正行)을 하자는 것. | |
혜(慧) 혜불이복(慧不離福) : 복을 떠난 혜는 지혜가 아니고 큰 복은 짖지 않으면 대각(大覺)을 못하며 |
복(福) 복불이혜(福不離慧) : 혜를 떠난 복은 참 복이 아니다. 대각을 못하면 대복(大福)을 못 짓는다. | |
사실적 도덕의 훈련, 공부의 요도, 대공심(大空心) 삼학 팔조는 만생령 부활의 원리요 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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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타이핑 자료가 있어서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