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왕후(元敬王后) 태종왕비(太宗王妃)
원경왕후(元敬王后)는 조선(朝鮮) 제3대(第三代) 태종대왕(太宗大王)의 비(妃)로 건국초(建國初)에 많은 공헌을 하신 분이다. 왕후(王后)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聰明)하시고 지략(智略)이 탁월하여, 가히 남성도 비견할 수 없는 부덕(婦德)과 용기를 겸비한 여장부(女丈夫)의 기상을 가진 분이시며, 인자하시기가 보통이 아니었으며 성격이 강직하시고, 한 번 주장하는 일은 끝내 해내고 마는 실천력이 강한 비범(非凡)한 분으로, 능숙한 처세(處世)의 소양(素養)에 대해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왕후께서는 고려말엽(高麗末葉)인 공민왕(恭愍王) 14년(1365) 7월 11일 송경철동(松京鐵同)에서 순충동덕보조찬화공신 대광보국승록대부여흥부원군 수문전대제학 영춘추관사 좌의정(純忠同德輔祚贊化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驪興府院君 修文殿大提學 領春秋館事 左議政) 시호(諡號) 문도공(文度公) 휘(諱) 제(霽)와 삼한국 대부인(三韓國大夫人) 여산송씨(礪山宋氏) 사이에서 4남 3녀 중 둘째 따님으로 탄생하시었다.
왕후의 아버님인 문도공(文度公)께서는 맏아드님인 무구(無咎)는 정사좌명공신 여강군(定社佐命功臣 驪江君)이요, 둘째 아드님인 무질(無疾)은 역시 정사좌명공신 여성군(定社佐命功臣 驪城君)이요, 셋째 아드님은 무훌(無恤)이니 이분 또한 정사공신 여원군(定社功臣 驪原君)이요, 넷째 아드님은 무회(無悔)이니, 여산군(驪山君)으로 봉(封)하였으며, 맏따님은 개국공신 평원군 조박(開國功臣 平原君 趙璞)에게, 셋째 따님은 우의정 노한(右議政 盧閈)에게 각각 출가하는 등 혁혁한 가문임을 당대에, 떨친, 명문거족(名門巨族)의 후예임을 입증한 분이시다.
당시의 세태를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고려조(高麗朝)에서 조선조(朝鮮朝)에 옮겨 온 건국초기 였기 때문에 진실한 인재가 필요한 때였다. 따라서 건국(建國)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태조(李太祖)의 제5자(五子)인 성덕신공(聖德神功) 방원(芳遠, 태종)의 빈(嬪)으로 계실 때부터 내조의 공을 세운 왕후이시기에 태종(太宗)도 극성스럽다고 혀를 찰 정도이면서도 한 편으로는 마음 든든한 동반자임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신의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思想)의 지배하에서도 남자와 동등한 대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종께서는 일찍부터 국가경륜(國家經綸)에 뜻을 두어 경사(經史)에만 몰두할 뿐 가사(家事)에는 등한했으나 왕후께서는 조금도 불만의 빛을 보이지 않으시고 집안살림에 소홀함이 없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주부로서의 할 바를 다하는 동시에 남편의 개국웅지(開國雄志)를 이룰 수 있도록 내조의 공을 다하여 이조개국초(李朝開國初)의 1. 2차의 왕자의 난(亂)이 있을 때나 남편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 탁월한 지혜로 구출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신하들이나 조정(朝廷)에서는 왕후(王后)에 대해 두려움과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왕후는 홍무(洪武) 임신(壬申, 1392년)에 태종(太宗)이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開國)하게 되자 정녕옹주(靖寧翁主)에 봉호(封號)되었고 경진(庚辰, 1400年)년에는 공정왕(恭靖王, 定宗)이 뒤를 이을 아드님이 없어 방원(芳遠)을 세자로 봉하게 되자 정빈(貞嬪)이 된 후 그해 11월 정종(定宗)의 선위(禪位)을 받아 태종이 즉위하면서 정비(正妃)가 되었다.
왕후는 그후 무술(戊戌, 1418年) 8월 태종이 세종(世宗)에게 선위하자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가 되셨는데 경자(庚子, 1420年) 5월 25일 병환이 드시어 그해 7월10일 수강궁(壽康宮) 별전(別殿)에서 승하(昇遐)하시니 춘추(春秋)가 56세이셨다.
왕후는 슬하(膝下)에 4남 4여를 두었으니 세종대왕(世宗大王)은 셋째아들이며, 맏아드님은 양녕대군(讓寧大君), 둘째는 효녕대군(孝寧大君), 넷째가 성녕대군(誠寧大君)이시며. 맏따님은 정순공주(貞順公主), 둘째가 경정공주(慶貞公主), 셋째가 경안공주(慶安公主), 넷째가 정선공주(貞善公主)이시다.
세종대왕은 1420년 9월 14일 모후(母后)인 왕후(王后)에게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란 존호(尊號)를 올리고 동월(同月) 17일 광주(廣州) 대모산(大母山)에 안장(安葬)하신 다음 능호(陵號)를 헌릉(獻陵)이라 명했다.
인현왕후(仁顯王后) 숙종왕비(肅宗王妃)
인현왕후(仁顯王后)는 조선(朝鮮) 제19대왕(第十九代王) 숙종대왕(肅宗大王)의 왕비이시고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유중(維重)의 따님이시며 좌의정(左議政) 진원(鎭遠)의 누이되시는 분이 시다.
인현왕후는 현종(顯宗) 8년(丁未, 1667) 4월 23일 명문에서 태어나 덕(德)이 높고 인자하시고 아량(雅量)이 넓으시어 모든 일을 초연한 마음으로 처사해 나가시는 희세(稀世)의 현비(賢妃)이시었다. 15세에 숙종왕(肅宗王) 후비(后妃)로 들어가시어 종고지성(鍾鼓之聲)과 금슬지락(琴瑟之樂)이 두터웠으며 날이 갈 수록 나라의 기초가 견고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왕비가 입궐(入闕)하신지 6년이 지나도록 왕자를 탄생하지 못하여 나라의 큰 걱정이 되었고 왕비 자신에게도 큰 수심(愁心)이었다. 그리하여 늘 생각하시기를, 기왕 나 자신이 왕자를 탄생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상감께서 늘 염두에 두시는 궁녀 장희빈(張禧嬪)을 다시 데려다가 인연을 맺게 하는 것이 왕비로서 현명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생각하시었다.
하루는 사가(私家)의 여인으로서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큰 아량을 가지시고, 상감을 모신 자리에서 장희빈을 다시 불러드리시라고 진정으로 권하였더니 상감께서도 기꺼이 승낙하시었다. 그러나 상감께서는 "나로서야 이런 말을 어떻게 여러 어른에게 사뢰며 또한 여러 신하에게 이를 수 가 있겠소" 하시니 왕비께서는, "제가 대왕대비(大王大妃)와 왕대비전(王大妃前)에 사뢰어 보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이런 대화가 있은 후 인현왕후(仁顯王后)는 자기 일신을 희생시키더라도 상감을 위한 인정과 의리를 갖고 장희빈을 구해주려고 결심하였다. 그 얼마나 너그러운 아량이시랴. 그리하여 인현왕후는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뵈옵고 여러 번 간청하였더니 두 대비는 인현왕후의 성덕(聖德)에 감동되었다. 숙종(肅宗) 12년(1686) 병인(丙寅) 4월 장희빈의 재입궐이 결정되었다. 숙종대왕의 전교(傳敎)로 장희빈을 불러들인 것은 그해 5월 16일 이었다.
장희빈은 입궐하자 차차 간교한 모략과 흉악한 계교를 꾸미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장희빈은 남인(南人)들과 결탁하고 상감의 총명을 어지럽히면서 일조에 큰 세도를 부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결초보은(結草報恩)해야 될 인현왕후를 폐하기 위하여 가진 흉계(凶計)를 꾸며 마침내 숙종(肅宗) 15년(1689) 기사(己巳) 4월 21일 왕비 생일날 상감은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죄명을 둘러씌워 인현왕비를 폐위(廢位)시키는 전교를 내렸다. 그리하여 정원(政院)에서는 충신간관(忠臣諫官)들이 상감에게 `폐비의 불가(不可)`함을 아뢰고 또 간곡한 상소를 올렸으나 장희빈의 고자질만 경쳥(傾聽)하고 충신들의 간언(諫言)은 듣기는 커녕 도리어 엄벌(嚴罰)에 처하였다.
그 중 박태보(朴泰輔)는 끝까지 항거하다가 참형을 당하였다. 하늘도 무심하여 높으신 인현왕비(仁顯王妃)의 성덕(聖德)은 여지없이 유린되어 폐비(廢妃)를 당하고 피눈물로 친정으로 쫓게나고 말았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장희빈은 그것도 부족하여 사약을 내리어 민비(閔妃)를 아주 죽이려고까지 상감께 졸라댔다. 마침내 장희빈은 아들이 세자로 책봉됨과 동시에 정비(正妃)로 책립되었다.
그 당시 장희빈의 세도가 하도 어마어마하여 "장다리는 한철이요, 미나리는 사철이라."는 민요 까지 돌아 장희빈(張禧嬪)에 대한 세상 인심이 험악하더니 그 후 장희빈의 간계로 폐비됐던 인현왕비는 다시 복위되었으며 인현왕후(仁顯王后)께서는 신사(辛巳, 1701年) 8월 14일 35세를 일기로 승하하시었다. 능은 명능(明陵:高陽)이다.
명성황후(明成皇后) 고종황제비(高宗皇帝妃)
명성황후(明成皇后)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휘(諱) 유중(維重)의 6대손이며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휘(諱) 치록(致祿)의 무남독녀로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陵峴里) 250-1에서 철종(哲宗) 2년(辛亥, 1851) 9월 25일에 출생하였다. 왕후께서는 출생하면서부터 숙덕(淑德)을 겸비하고 천자(天資)가 요조(窈窕)하여 감고당(感古堂) 민규수(閔閨秀)로서 명성(名聲)이 높았다.
1866년 3월 당시 대원군과 조(趙)대비의 간택(揀擇)으로 조선조 26대 고종(高宗) 황제비가 되니 보령이 16세로 고종황제보다 1년이 위였다.
그 때의 국내사정은 대원군이 섭정하였고 쇄국으로 잠자던 나라로서 갑자기 개화의 물결이 조수처럼 몰려오기 시작하여, 주변국가인 청. 일. 노(淸. 日. 露) 및 세계열강의 간접적인 침략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명서황후는 쓰러져가는 5백년 왕조의 전통을 앉아서만 바라볼 수 없어 가냘픈 여성의 몸으로 풍운 속에 뛰어들어 열강을 상대로 이이제이(以夷制夷)정책으로 약소국인 이 나라를 아무도 독점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1894년 조선지배에 관한 청. 일의 각축전은 드디어 청.일 전쟁을 야기시켰으며 그 결과는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 대가로 받은 요동반도를, 조선 측 명성황후의 막강한 외교력의 결과로 영. 불. 노(英. 佛. 露)등 3국의 간섭으로 청국(淸國)에 반환하게 되니, 이에 대해 일본은 극도로 격분, 명성황후를 살려 두고는 천의 수단 만의 지혜를 짜내서도 조선지배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동안 30년을 두고 정한론(征韓論)을 펴온 일본은, 드디어 삼포오루(三浦梧樓)라는 공사를 파견하여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蠻行)을 자행(恣行)하였으니, 1895년 10월 8일(음 8월 20일) 새벽 건청궁곤녕합(乾淸宮坤領閤)에서 깊이 잠든 명성황후를 비참하게 시해(弑害)하였으니 이는 곧 5천년 문화국인 이 나라의 일대 참사인 동시에 천추만대에 씻을 수 없는 민족의 치욕(恥辱)을 맞은 것이다. 춘추는 45세이셨다.
슬프다! 사람의 일생이 천수를 다해도 오히려 부족하여 한탄하였는데 명성황후께서는 하루도 편한 날이 없는 외우내환(外憂內患) 속에서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해 최후의 일각까지 충성을 다 했건만 그 대가는 일제의 중상모략(中傷謀略)으로 인한 민심의 차가운 반응이었으니 실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이 아닐 수 없었다.
일제는 세계의 이목이 두려워 명성황후의 시해를 끝까지 왜곡(歪曲)하여, 황후는 실덕하여 조선의 민란으로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려, 무지한 민심을 어지럽게 하여 왔으나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그 살인자 낭인배(浪人輩)들이 엮은 진상에서, 그들이 죄없는 황후의 시해를 참회(懺悔)함으로써 그 죄상이 백일하에 밝혀졌던 것이다.
인간이란, 흘러가는 세월 속에 중요한 사실들을 망각(忘却)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두기 마련이다. 그러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하는 국운의 굴절에 휘말려 원한의 사실마저 잊어버릴 수 없듯이 명성황후의 참극(慘劇)을 우리 민문은 물론 모든 국민이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난 81년 11월 10일, 각계각층으로 구성된 명성황후 추모사업추진 위원회에서는 순국장소에 순국비를 세웠으며 매년 10월 8일이면 여성단체인 예림회가 주동이 되어 추모행사를 벌이고 있다.
한편 명성황후는 양주 홍릉(洪陵)에 고종황제와 더불어 안장되어 있다.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순종황제비(純宗皇帝妃)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는 순종황제비(純宗皇帝妃)로 여은부원군(驪恩府院君) 충문공(忠文公)민태호(閔台鎬)의 여(女)이며 임신(壬申, 1872) 10월20일 탄강(誕降), 갑진(甲辰, 1904) 9월 28일 승하(昇遐), 춘추33세, 양주 유릉동원(裕陵同原)에 모셨다.
※외손녀(外孫女)로서 왕후(王后)에 오르신 분
정순왕후(定順王后) 단종왕비(端宗王妃)
민소생(閔紹生)의 외손녀(外孫女)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여(女)
장순왕후(章順王后) 예종왕비(睿宗王妃)
민대생(閔大生)의 외손녀(外孫女)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의 여(女)
공혜왕후(恭惠王后) 성종왕비(成宗王妃)
민대생(閔大生)의 외손녀(外孫女)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萬明澮)의 여(女)
철인왕후(哲仁王后)
철종왕비(哲宗王妃) 민무현(閔懋鉉)의 외손녀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의 여(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