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을 내려오며 우리는 지난번 하산지점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코스는 처음으로 선택한 곳이라 우리의 희망대로 길이 연결되지 않았다. 그래도 산이란 내려오면 길은 연결되는 법이려니 생각하며 걸었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하산 후에 맛보는 파전을 안주한 막걸리 한사발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하산지점이 틀려지는 조바심이 생기자 산친구는 휴식 장소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였다.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상대는 지난 산행때 갔었던 시장통의 식당 여주인이다.
다시 산길을 내려오는데 상대방에게서 전화가 왔다. 통화내용은 간단했다. 서로가 원하는걸 알기 때문이다.
"우리 산에 왔는데 한 시간 후에 갈테니 가오리찜 하나 준비해주세요."
버스에서 내려 식당으로 가는 길은 시장을 지난다. 상설시장이지만 오늘이 5일장을 겸한 듯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가 지나는 골목엔 규모가 작은 식당들이 있었고, 그곳에서는 6-70대의 노인들이 여기저기서 술을 마셨다.
순대, 부침이, 돼지고기...살풍경 나는 모습들에서 술을 마신다기 보다는 세월을 마시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의 작은 식당에도 주인이 일찍 도착하여 주문했던 음식 준비에 바빴다. 인사를 마치기가 바쁘게 소주잔을 나누었다.
이식당에 내가 온 것은 이번이 세번 째다. 모두가 등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며 들렸던 것이다. 산친구를 믿고 주인과는 약간의 농담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주인의 말에 의하면 고향은 전라도인데 가족으로는 고등학교를 다니는 딸 하나를 두었다고 들었다.
식당은 이미 다섯시가 넘었으나 술손님들로선 아직은 이른 시각이다. 그래서 주인도 여유가 있어 우리와 함께 테이블에 앉았다.
다음 주에 딸아이가 수능시험을 친단다. 벌써 그렇게가 아니고 50대 초반인 주인으로서는 다소간 늦은 편이다.
소줏잔이 두어잔 오가고, 자리나 분위기가 그런듯 주인은 자신이 살아 온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럴땐 숙연한 분위기가 된다.
그녀는 결혼 생각이 없었다가 늦은 나이인 34세에 중매 결혼을 하였는데, 남편은 처음부터 집안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하였다. 다른 여인과의 아픈 과거 때문인지 집에다 돈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결혼을 할 당시에 가져간 돈 3,000만 원으로 생활을 꾸려 나갔단다.
그들 사이에 지금의 딸이 생겨났고, 결혼 2년이 조금 지난 싯점에 남편은 큰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게 되었단다.
그래서 여인은 생활비와 치료비를 벌기위해 겨우 걸음마를 하는 아이를 데리고 작은 노래방을 하였는데, 영업시간에 아이가 아장아장 노래방을 걸어 다녔고 다행이 손님들도 아이가 귀엽다며 불편해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낮이면 병원의 중환자실을 찾고, 밤에는 아이를 데리고 장사를 해야하는 고달픈 생활이었다.
아이가 조금 자라자 이번에는 아이를 어린이집(그때도 있었는지?)에다 맡기고 식당일을 다니며 아이를 키워오다 남편과는 이별을 하였다고 지난 과거를 이야기 하였다. 그 이후가 궁금하였으나 남의 아픔을 들추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주인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별로 힘들었던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평소의 그녀의 얼굴 표정도 매우 밝았다. 어디 저 얼굴에서 그런 고생을 하였을까 하는 마음이 들정도이다. 산친구는 그녀의 별명이 피부미인이라고도 하였다.
피부미인?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갑자기 권정생님의 소설 '몽실언니'와 '빌뱅이 언덕'이 생각났다.
해방과 6.25로 이어지는 시간들 속에서 찢어질대로 가난했던 시절들은 거지짓을 해서라도 세끼 입막음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었다.
비도 제대로 피하지 못하는 주거공간, 많은 가족들, 일자리도 없이 헐벗고 배고픔을 안고 헤매돌았다. 게다가 결핵마져 유행하여 이곳 저곳에서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현실...
몽실언니에 대한 이야기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몽실네는 해방 후 외국에서 들어 온 거지 가족인데 어머니는 날품팔이 남편을 버리고 재혼을 했다.
재혼한 김씨는 마루에서 몽실을 밀어뜨려 몽실은 다리 병신이 되었고, 사실을 안 고모는 몽실을 친아버지 정씨에게 데려다 주었다.
정씨는 머슴살이를 하다 북촌댁에게 새장가를 들었다. 6.25가 발발하고 정씨는 군대로 끌려가고, 북촌댁은 딸을 낳고 굶어 죽는다.
전쟁이 끝나고 군대에 간 아버지는 포로로 잡혔다가 절름발이가 되어 돌아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 라고 몽실이는 다짐하며 깡통을 처고 장터거리로 나가 구걸을 했다.
댓골로 시집간 친어머니는 아기를 사산한 후 심장병으로 죽었다. 몽실이는 배가 다른 동생들과 씨가 다른 동생들을 다 데리고 함께 살았다.
몽실이는 구걸질을 열심히 했으나 아버지는 병이 깊어졌고, 동생들은 흩어졌다. 결국 아버지는 병원 문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다 죽었다.
몽실은 흩어진 동생들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삼십년 후 몽실이는 곱추인 구두수선쟁이와 결혼을 해서 남매를 낳았다. 그러면서 여전히 배다른 동생을 돌보는 삶을 살았다.
식당 주인의 지난 살아 온 이야기나 몽실언니, 빌뱅이 언덕 사람들의 뼈저리게 아픈 과거는 아닐지라도, 지금은 국민소득 3만불이니 뭐니 하는 시대에서도 정말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
지금은 예전처럼 단순히 밥을 먹지 못해 굶어 죽는 것이 아니라, 돈이 없어 남들처럼 살아가지 못하여 비교하며 비관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지난번 탈북자 모자처럼 양식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정치인들은 믿을 것이 못된다. 지난 역사에도 수없이 거짓에 속아왔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다. 입으로는 못가진 하위계층을 위한 정치를 한다면서도 실제로는 안정된 사람들이 더 잘살아가는 세상으로 바뀌어 간다. 영세 자영업자, 비정규직들은 일자리를 잃고, 고학력자, 고임금자, 공무원 등은 더 풍요롭고 우대받는 세상이 되었다. 모든 것은 표로 연결되어 그들에게 희망이 주어지며 공생관계가 된다.
그래서 세상은 아직도 우리가 갔었던 식당의 여주인의 과거가 살아있고, 몽실언니와 빌뱅이 언덕의 사람들이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이다.
우리들이 모르는 곳에는 절대적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있다. 특히 어린 아이를 가진 편부모들이 더욱 그렇다. 어느 지자체에선 아이를 낳으면 매달 얼마를 준다고 광고하였다.
그러나 그 얄팍한 금전을 탐하여 평생고생을 자처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진정 출산율을 높이고자 한다면 그들 자녀의 양육을 10살 정도까지는 국가가 부담해야 할 것이다. 자식은 사랑의 결과물이지만 어쩌다 환경의 지배를 받고 말았다.
가난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고 하였지만, 그렇다면 처음부터 말꼬리를 꺼내지 말았으면 좋겠다. 부디 불쌍한 사람들을 울리지 말기 바란다.
술이 거나해졌음에도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러한 아픈 과거를 가지고도 내색하지 아니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여인의 모습이다. 어디에서 저런 긍정의 힘이 나올까?
밖이 어두워질 무렵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값 계산은 산친구가 이미 하였고, 나는 지폐 두장을 내밀었다. 수능날 붙일 엿값이라고 말하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