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 5. 21 평북 의주~1991. 10. 19 서울.
소설가.
주로 여성의 애정윤리를 다룬 대중소설을 썼고 만년에는 역사소설을 썼다. 본명은 서죽(瑞竹). 1922년 일본대학 문과를 중퇴하고 귀국하여 〈매일신문〉 기자로 근무했다. 8·15해방 후 〈중앙신문〉 문화부장을 지낸 뒤, 일정한 직업 없이 소설창작에만 전념했다. 1951년 국제 펜 클럽 한국본부위원장, 1965년 관광정책심의위원, 1970~71년 국제 라이온스 협회 한국지구 총재 등을 역임했다. 평소 '소설은 읽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50여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원고지를 메운 철저한 장인정신의 소유자였다. 고희(古稀)를 넘긴 이후에도 왕성하게 글을 쓰다가 80세로 죽었다.
1935년 시 〈도회인에게〉·〈어린 것을 잃고〉와 소설 〈여자〉·〈소나무와 단풍나무〉를 발표한 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졸곡제 卒哭祭〉가 입선되고, 이듬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성황당 城隍堂〉이 당선되어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졸곡제〉는 죽은 아내와 과거에 나누었던 애정을 회고하는 내용이고,
〈성황당〉은 깊은 산 속에서 숯을 구워 생계를 꾸려나가는 순이를 통해 원시 자연의 건강함을 보여준 작품이다. 이후 발표한 작품은 성격에 따라 3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현실에 대한 지식인의 고민과 사상적 갈등을 그린 〈저기압〉(비판, 1938. 5)·〈이 분위기〉(조광, 1939. 1)·〈삼대〉(인문평론, 1940. 2) 등이 있다. 둘째,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주제로 한 〈강태공〉(조선문학, 1939. 3)·〈귀불귀 歸不歸〉(동아일보, 1939. 3. 1~17)·〈고고 孤高〉(문장, 1940. 3) 등이 있다. 셋째, 화려한 명성을 얻게 된 대중소설로,
〈자유부인〉(서울신문, 1954. 1. 1~8. 6)·〈애정무한〉(1957)·〈여성전선〉(1974) 등이 있다. 대표작 〈자유부인〉은 단순한 연애소설이 아니라, 8·15해방 이후의 퇴폐풍조를 날카롭게 그린 세태풍속소설로 당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황산덕(黃山德)과 '자유부인논쟁'을 불러일으켜 사회문제로까지 비약되었다. 그의 나이 50세 이후에 쓴 역사소설로 〈명기열전〉(1977)·〈민비〉(1980) 등이 있고, 〈한국경제신문〉에 1981년 6월 2일부터 1989년 7월 23일까지 8년여 동안 잇따라 발표한 〈손자병법〉·〈초한지 楚漢誌〉·〈김삿갓 풍류기행〉 등이 있다. 소설집으로 〈청춘의 윤리〉(1944)·〈성황당〉(1945)·〈고원 故苑〉(1946) 등 80여 권이 있고, 수필집으로 〈비석(飛石)과 금강산의 대화〉(1963)·〈노변정담 爐邊情談〉(1971), 평론집으로 〈소설작법 小說作法〉(1946)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