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유의 주요한 원천 중 하나인 소쉬르, 그 소쉬르라는 우물에서 길어져 나온 수많은 사유의 단초들, 그리고 그 단초들이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를 통해 끊임없이 재사유되는 양태들에 초점을 맞춰보자. 그리고 그 지점에서 또다시 스코프를 좁혀 은유와 환유가 떠도는 거리, 기표와 기의가 서로의 위치를 바꾸어가며 뛰어다니는 바로 그 곳을 살펴보자. 자, 우리는 바로 이 곳에서 현대 사유의 가장 첨예한 문제가 변주되는 양상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자리에서 그 모든 변주의 양태들을 살펴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텍스트로 펼쳐놓아야 한다. 나는 지금 말하거나, 혹은 아예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어째서? 말을 하고자하는 욕망은 어느 곳에서 생기는가? 말을 해야만 하는, 혹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은 어디인가? 그곳은 앎과 무지가 교차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생겨난다. 그렇기에 나는 조금 더 기다려서 모든 것이 앎으로 변해버리는, 그렇기에 말하고자 하는 욕망이 사라져버리는 지점에 도달하기 전에 말해야만 한다).
은유란 무엇인가? 아니, 다른 방식으로 물음을 제기해 보자. 은유는 어떻게 기의와 짝을 맺고 있는가? 은유는 기의적이다. 은유는 전혀 다른 사물을 일치시킨다. 마음과 호수. 언뜻 보기에 전혀 다른 사물을 은유는 묶어놓는다. 그것은 마음과 호수의 속성(기의)을 추출해내서 일치시키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환유라는 것은? 환유는 근본적으로 기표적이다. 은유가 두 사물의 유사성에 기초하여 일치시키는 방식이라면, 환유는 인접성에 근거하여 일치시킨다. 우리가 '한 잔 합시다'라고 할 때 술잔과 술을 일치시키는 것은(우리는 술을 마시지 술 잔을 마시는 것이 아니다) 술 잔과 술이 가까이 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역시 '머리 자르러 가'라고 할 때 우리가 머리카락과 머리를 일치시키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은유와 환유가 언어학의 영역을 넘어 새롭게 비상하게 되는 곳에 자크 라캉이 자리하고 있다. 무의식과 언어, 그 사이를 오가며 끊임없이 사유했던 라캉, 그에게 다가가보자.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명제는 무엇을 뜻하는가. 라캉은, 프로이트가 꿈에 관해 이야기를 했을 때, 무의식이라는 것은 긴 막대기가 남성의 성기를 의미한다는 식의 단선적 해석에 비판적이었다고 한다(역시 라캉에 따르면 그것은 무의식을 신화화 시키는 것, 교조화 시키는 것이고, 통석적, 무속적 꿈 해석과 프로이트를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폭력적인 행위이다). 무의식은 오히려 꿈의 작업이고, 꿈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 대상의 의미가 아니라, 전체적인 맥락이다. 어떤 하나의 대상이라고 할 지라도 전체적 꿈에서 맥락에 따라 달라지며, 또 같은 꿈이라고 할지라도 그 꿈을 꾼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이야기가 잠깐 헛나갔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의식은 꿈 자체가 아니고, 꿈 속에 숨겨져 있는 성적인 냄새를 풍기는 원초적인 욕망도 아니라는 점이다(계속 언급하지만, 라캉에 따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무의식은 무엇인가? 앞에서 이미 대답했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기 위해 질문했는데, 무의식은 바로 꿈의 작업이다. 꿈의 작업, 그것은 무엇인가? 어떤 원초적인 욕망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왜 가정이냐면, 욕망이라는 개념 때문에 그렇다. 라캉에게 있어서 욕망이라는 개념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원초적 욕망'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그렇기에 '있다고 가정해 보자'같은 말을 쓴 것이다). 이것은 무의식인가? 프로이트주의자라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욕망)은 의식 속에 감추어진, 하지만 끊임없이, 꿈의 형태로, 신경증의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캉주의자라면 '아니다'라고 할 것이다. 무의식은 그런 원초적 욕망 같은 것이 아니다. 무의식은 오히려 작업이다. 그런 욕망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어머니와 잠자리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무의식이 아니라, 그러한 욕망이 꿈에게서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가가 무의식이다. 어째서 꿈은 '압축'과 '치환'이라는 방식을 통해 욕망을 표현하는가? 바로 여기에 무의식의 비밀이 있다.
그래서 라캉은 말한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지금까지 이 말이 갖는 함축에 대해서 간략하게 서술하였는데, 이 내용과 은유, 환유가 무슨 관계인가? 전 문단 마지막에 압축과 치환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라.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라캉이 말했을 때, 그것은 분명 은유와 환유를 염두해 둔 것이다. 통상적 이해를 바탕으로, 긴 막대기가 남성의 성기를 의미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분명 성기가 막대기로 대체된 것이다(이러한 해석 자체가 불필요하지는 않다. 문제는 전체 맥락을 완전히 무시한 채로 이러한 상징물과 실재 사물의 대체 관계로'만' 꿈을 파악하려는 사고방식이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치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라캉은 이것을 '환유'라고 부른다. 우리는 은유를 전혀 다른 대상을 비슷하게 취급하는 것으로(기의에 입각해여) 파악한다. 그리고 환유를 비슷한 대상을 그 기표의 비슷함에 의해 동일화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막대기와 성기는 그 기능에 있어서, 즉 기의에 있어서 전혀 유사하지 않다. 성기가 막대기로 치환된 것은 그 두 사물의 기표(즉, 겉모습)의 인접성에서 기인한다. 은유는 압축이다. 서로 다른 세 대상, 꽃, 여인의 얼굴, 식물에 관한 논문이 식물이라는 하나의 대상으로 압축되는 것은 세 대상의 기표가 아닌 기의에 의해서이다. 곧 무의식의 작업은 은유와 환유로 이루어져 있고, 문제는 어째서 언어의 구조가 무의식의 구조가 되었느냐는 점이다. 라캉은 이를 두고 '언어는 무의식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우리 인간이 무의식을 가지게 된 것은 언어 체계라는 질서를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이 언어라는 질서는 모든 질서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윤리, 국가의 법률이 시작되는, 그것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언어이다. 언어를 획득함으로해서 우리 인간은 질서를 획득하는 주체가 되었다. 라캉은 이러한 것들을 포함해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부른다). 욕망을 즉각적으로 실행시키는, 즉 어머니와의 즉각적인 합일을 추구하는 정신병적 주체(질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언어를 거부하는, 상징계에 포섭되기를 거부하는 주체. 그것은 모든 윤리적, 법적 질서를 받아들일 수 없는 주체이다)에서 언어의 질서를 받아들여 상징계 속으로 들어가고(상징계라는 용어도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은유화 환유에 관한 글이므로 라캉의 이론을 깊이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나는 지금 은유와 환유에 관한 부분의 서술에 관련된 부분만 라캉을 설명하기 위해, 즉 라캉 이론의 서술에 대한 부분을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것은 라캉에 접근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함축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어머니를 직접적으로 요구하지 않고 은유적으로 요구하는 신경증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은 정신병적 주체가 아니면 신경증적 주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라캉은 은유를 증상의 매커니즘으로, 환유를 욕망의 매커니즘으로 정의한다. 상징계는 언어의 질서를 받아들인 인간의 세계이다(주체는 분열된 주체이다. 왜냐하면 언어가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을 분열된 주체가 아닌 통일적인 주체, 자신의 행위를 판단하고,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알고, 안정되어 있고, 통합된 주체라고 착각하는데, 라캉은 이것을 상상계라고 말한다). 인간은 이러한 언어적 상징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언어적 질서 속에서 실현시킬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인간은 언어의 질서를 받아들임으로써 어머니의 완전한 사랑이라는 욕구의 충족을 포기해버리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질서를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결국 우리는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욕구를 포기해버린 대신, 은유적인 방식으로 어머니를 지칭함으로써, 즉 은유적으로 다른 대상(라캉은 이것을 대상a라고 부른다)을 욕망함으로써 그 욕망을 채우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언어의 질서 속에서 욕망은 환유로 변한다. 끊임없이 대상이 된 기표와 비슷한 기표로 욕망은 이동한다. 욕망은 대상a에 고정되지 못하고 미끌어진다. 욕망은 만족되지 못한다. 증상은 어떤가? 증상은 신체에 새겨지는 상흔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고정된다. 욕망에서 기표는 기의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증상에서 기표는 기의에 새겨진다.
사유에서 기의와 기표가 차지하는 지점은 어떤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생각할 때, 그 대상에서 어떻게 다른 대상으로 생각이 이동하는가? 담화에서 은유와 환유가 어떤 방식으로 기능하는지에 따라서, 우리의 사유가 어떻게 진행하는지를, 즉 사유의 경로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 '내가 아웃백에 가서 식사를 했는데, 스테이크를 한 입에 넣으려다가 실수로 땅에 떨어뜨렸어'라고 말했을 경우, '대체 어째서 그런 황당무계한 생각을 하게되었지?' 같은 대답을 들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기의적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내가 예전에 아웃백에서 일했는데 사장이 너무 까탈스러워서 어쩌구저쩌구...'라는 대답을 들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기표를 중심으로, 즉 환유적으로 사유했다는 것을 뜻한다. 왜 이러한 문제가 중요한가? 이것은 우리가 사유를 진행시키는, 즉 사유가 흘러가는 길의 중요한 두 방식이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 하나의 관념을 가진다.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할 것인가. 사유는 거기서 멈추는가? 아니다. 사유는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사유는 자신의 길을 선택함에 잇어 바로 기의와 기표라는 두 가지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대화가 기의에 의거한, 혹은 기표에 의거한 대화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해 진행한다. 이 두 방식은 서로 배제하지 않는다. 기의적 방식으로 대화하던 중에도 갑작스럽게 환유적으로 넘어가 대화가 진행될 수도 있다. 이 두 방식이 아니라면, 대화는 지속될 수 없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거나, 혹은 전혀 새로운 주제를 들고 나와야 한다. 수다에서 주로 사용되는 매커니즘은 환유라고 볼 수 있다. 환유는 빠르게 대화를 진행할 수 있다. 환유적 방식은 머리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기표를 파악하는 것은 기의를 파악하는 것보다 시간이 덜 든다.
우리 시대는 환유적 사고가 예전보다 훨씬 더 발달했다고 볼 수 있다. 흔히들 모더니즘을 은유로 포스트모더니즘을 환유로 파악하기도 하지만, 가장 일상적인 예로 코미디 프로의 예를 드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것이다. 지금의 코미디 프로는 예전보다 훨씬 더 환유적이다. 이를테면, 웃찾사인지 개그콘서트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르던 중간에 멈추고 다른 사람이 노래 가사를 받아서 개그를 진행시키는 방식 같은 것들이 있다. 즉 그것은 하나의 기표를 이어받아, 즉 환유하여 개그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고, 노래는 그 출발을 제공해주는 단어의 제공처인 것이다. 굳이 이 프로만이 아니더라도 기표를 이어받는 환유적인 방식으로 코미디를 하는 방식은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정치적 영역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것은 기표가 어떻게 자신을 기의로 위장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명품을 살 때 우리가 사는 것은 그 제품의 사용이라는 기의가 아니라 그 제품의 기표, 상징을 사고, 제품의 이름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 기표가 기의로 위장이 될 때가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학교 내에 흩뿌려진 수많은 음식점 선전물들 가운데,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것이 있다. 일명 '김태히 냉면'이라는 것인데, 그 선전물을 본 사람들 중 상당수가 '먹어보고 싶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김태히'는 그 인접 기표인 김태희의 기표만을 빌어온 것이다. 김태히라는 기표,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서 어떤 기의를 삽입한다. 김태희라는 연예인의 이미지를 기표에 부착한다. 그것은 기표를 기의로 착각하는 것이고, 이것은 대중을 속이는 어떤 환상이다. 광고에서, 이미지 시대의 대통령 선거에서 기표는 기의를 대체하여 솟아오른다. 중요한 것은 이제 기의가 아니라, 기의를 포함하는 기표가 되는 것이다(내가 간혹 약간 비판적인 어투로 '기표적이다'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은 환유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표적인 것을 기의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