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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아르케
1. 탈레스(c. 624/623 – c. 548/545 BC)는 철학의 아버지로 불러집니다. 그가 물이 모든 것의 아르케(ἀρχή)라고 한 것이 철학적 사고의 시작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아르케는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어떤 변화에도 지니는 실체(substratum)로나, 변화를 일으키는 최초의 원인(cause)으로 풀이됩니다. 탈레스는 물이 그런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이 경우 물을 아르케라고 한 것은 꼭 물질적인 면으로 제한할 것은 아닙니다. 현대 화학이 보이는 물의 원소 구성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현대 물리학에서 물질의 기본 입자를 찾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2. 탈레스를 이어 아르케는 물이냐, 혹은 물 만이냐 하는 여운으로 이어집니다. 이 여운은 아르케가 물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 자체로 보다, 아르케로 사람들의 생각이 모아지는 반향을 보입니다. 즉 아르케가 도입됨으로 인간의 사고가 진작되게 됩니다. 아르케가 무엇이든, 아르케를 중심으로 생각이 이어지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의 생각이 아르케로 모아지면서, 철학이라는 사고 체계가 형성되게 됩니다. 보이는 현상이 아닌 현상의 아르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르케가 단지 생각만이면, 다분히 공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물이라는 구체적인 것과 결부될 때 구체적인 뜻을 또한 띠게 됩니다.
3. 이렇게 보면 탈레스의 업적은 아르케를 도입하여 물이라는 것으로 구체화함으로 사람들로 아르케를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아르케를 다른 것으로 말하더라도, 아르케에 대한 사람들의 사고가 형성되게 됩니다. 즉 아르케를 향한 사고가 탈레스로부터 형성되게 됩니다. 인간의 사고를 모아 가는 점에서, 아르케는 근원적인 것을 추구하는 인간 사고의 특징을 보게 합니다. 현상의 아르케에 관심을 보이는 점에서 탈레스를 이어 그리스 철학은 현상에 머물지 않고 초월적이나 형이상학적으로 나아갑니다. 즉 초월적으로 혹은 형이상학적으로 추구하는 사고는 탈레스의 근원적으로 추구하는 사고를 이어갑니다. 그래서 그는 철학의 아버지로 불러집니다.
4. 현상의 근원을 의식하는 철학은 현상에만 고착된 과학과 다릅니다. 과학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보이든 보이지 않든 현상입니다. 소립자, 바이러스, 빅뱅은 물이나 빛과 같이 현상적으로 다루어집니다. 과학은 현상의 변화를 설명하는 체계입니다. 현상의 변화를 야기하는 힘의 도입이 결정적입니다. 우주의 생성도 세상에 일어나는 지진과 같이 현상의 설명으로 과학에 등장합니다. 즉 과학에는 근원이라는 뜻이 없어집니다. 과학에서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를 말하더라도, 그것은 탈레스가 말한 아르케는 아닙니다. 이렇게 철학에서 과학으로 변천해 가는 과정이 분명히 의식되어야 합니다. 뉴턴이 만유인력이라는 힘의 개념을 도입함으로 과학이라는 설명 체계가 형성되게 됩니다.
5. 아르케는 성경에서도 쓰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그의 복음서를 아르케를 도입하며 시작합니다: “태초(ἀρχή)에 말씀(λόγος)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1).” 여기 “태초”로 번역된 “아르케”는 탈레스의 “아르케”와 전혀 다르게 쓰입니다. 문장 상으로 아르케는 시간적으로 표현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아르케는 창조 전으로 설정됩니다. 시간은 창조로부터 말해지니, 창조 전은 시간으로 말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아르케는 물과 같은 창조된 것으로 말해지지 않습니다.
6. 요한복음은 사물의 아르케가 아닌 말씀(로고스)의 아르케를 보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하면, 말씀의 아르케는 창조 전으로 다루어지게 됩니다. 세상 사물의 근원으로 아르케는 창조된 세상에서 다루어지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아르케는 창조 전으로 다루어집니다. 이렇게 요한은 말씀의 아르케가 창조된 세상에 설정될 수 없음을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아르케를 창조 이전으로 다루면서, 요한복음은 구약에서 다룰 수 없는 새로운 영역을 열어갑니다. 구약은 어떻든 하나님께서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을 확언하면서, 창조된 세상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서사합니다.
7. 요한은 창조를 사건으로 보아 창조 전과 창조 후를 나누지 않습니다. 그보다 창조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니, 창조 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명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요한은 말씀에 의해 창조된 세상이 아닌 창조를 이루는 창조 전 말씀에 눈을 고정합니다.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 전 아르케를 부각합니다. 그러면서 창조 전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합니다(요한복음 1:4). 이렇게 말씀을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으로 다룸으로, 말씀의 아르케를 생명의 아르케로 부각하면서 사물의 아르케와 구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요한은 존재의 아르케와 구별된 생명의 아르케로부터 예수님의 이야기를 서사합니다.
8. 요한은 아르케를 창조 이전으로 이끌어감으로, 창조된 존재에 대비해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을 조명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창조 전 말씀을 다루지 창조된 존재를 다루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육신(incarnation)으로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배경입니다. 즉 요한은 예수님을 창조된 존재로 서술하지 않고, 성육신된 생명으로 서사합니다. 탈레스의 아르케로 예수님을 이야기하면, 예수님은 세상에 존재하는 역사적 인물로 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요한은 탈레스가 설정한 사물의 아르케와 다른 말씀의 아르케를 도입합니다. 요한복음은 창조된 사물의 아르케와 다른 창조 전 말씀의 아르케를 도입하여 성육신된 예수님을 서사합니다.
9. 말씀의 아르케는 존재론적 흐름을 따라 선재(preexistence)로 표현되어 왔습니다. 선재는 창조 이전의 존재로 표현되지만, 그 뜻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 표현은 신화적 유추에 불과합니다. 창조로 말해지는 존재를 창조 이전까지 유추해가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사실의 의미를 창조 전까지 외삽하는(extrapolate)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은 모두 사실이라고 할 때 이런 외삽을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사실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외삽입니다. 사실은 창조된 세상 안에서만 말해져야 합니다. 존재하는 사물에 대해 적절한 범주를 적용하여 속성이나 현상을 서술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10.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에 설정할 수 없다고 보아 말씀의 아르케를 도입하여 예수님을 서사합니다. 탈레스가 설정한 사물의 아르케로 예수님을 서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 철학으로 전개되는 언어 체계로 예수님을 서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물의 아르케와 말씀의 아르케가 구별되는 만큼, 그로 전개되는 언어 체계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즉 그리스 철학과 성경의 언어 체계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리스 철학의 언어와 성경의 언어는 아르케 상으로 구별됩니다. 출발점이 다른 언어로 구별됩니다. 이 구별됨은 같은 출발점에서 파생하는 다양성과 다릅니다. 즉 예수님은 종교적 속성의 다양성으로 다루어질 수 없습니다.
11. 신약의 공관복음서나 바울의 서간문은 구약을 이어 전개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창조 전을 다룸으로 창조로 전개되는 구약을 이어가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성경의 모든 내용은 처음 나오는 창조의 이야기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서사하는 신약은 요한복음이 제시한 창조 전으로부터 읽어져야 합니다. 창조로 시작하는 구약은 예수님을 포함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창조 전으로 시작된 예수님의 서사는 창조된 구약의 서사를 포함합니다. 창세기 1:1에 나오는 “태초”와 요한복음 1:1에 나오는 “태초”가 다르게 쓰진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전자는 창조의 태초를 말하지만, 후자는 말씀의 태초를 말합니다.
12. 완강하게 흐르는 구약이나 만연하게 파급되는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성경을 읽으면 창조된 영역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세상을 근거로 전개되는 삶은 창조된 내용만 수용합니다. 지성적으로 성경을 읽으려 할 때 부딪치는 한계입니다. 지성은 사람의 속성입니다. 따라서 지성으로는 창조의 한계를 넘어갈 수 없습니다. 지성으로 아르케를 말하면 탈레스가 말한 것 같이 됩니다. 즉 창조 전 아르케는 지성적으로 다루어질 수 없습니다. 지성적으로 창조 전의 전재를 말하는 것은 아무런 내용을 주지 못합니다. 존재는 창조된 세상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존재의 말은 존재로부터 파생된 사람의 말입니다.
13. 요한은 창조 전 하나님과 함께한 생명을 “ζωή”로 표현함으로 창조된 존재의 목숨을 표현하는 “ψυχή”와 구별합니다. 이 두 말을 구별하는 것은 요한복음을 읽는데 결정적입니다. 요한복음의 주제는 생명(ζωή)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다르게 전개됩니다. 공관복음은 구약에서부터 써온 말을 그대로 사용함으로 일상적으로 접하는 말로 읽어질 수 있습니다. 즉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읽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새로운 생명의 말을 도입함으로 일상적으로 접하는 말로 읽어질 수 없습니다. 존재의 언어가 아닌 생명의 언어로 서사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언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형성되지 않으면 요한복음은 읽어질 수 없습니다.
14. 요한복음은 성육신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창조되지 않고 성육신되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은 세상에 성육신된 예수님을 서사합니다. 성육신된 예수님은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으로 서술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육신된 예수님의 서사는 세상에 접하는 존재의 대상을 서술하는 언어가 아닙니다. 즉 요한복음은 존재 언어가 아닌 생명 언어를 보입니다. 존재 언어는 주어가 목적어를 서술하는 형태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주어와 목적어에 등장하는 것은 세상에 처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적용되는 서술형은 세상에 있는 것을 분류하는 범주입니다. 따라서 서술은 기본적으로 세상에 있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15. 성육신된 예수님은 존재된 대상으로 서술될 수 없습니다. 즉 세상 사람 누구도 성육신된 예수님을 대상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이 예수님을 어떤 형태로든 표현하려면, 세상의 대상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관복음을 읽는 이들은 쓰인 언어 때문에 예수님을 세상의 대상으로 읽으려 합니다. 우선 역사적 예수님으로 읽으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야기 가운데 역사적 사실일 수 없는 것을 지적합니다. 탄생과 부활은 사실적일 수 없다고 하고, 예수님의 고침은 믿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만 읽으려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탄생, 부활, 그리고 고침의 서사는 존재론적 언어에 담아질 수 없음을 뜻합니다.
16.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1인칭 표현을 도입합니다. 창조된 사람은 대상으로 서술되지만, 성육신된 예수님은 대상으로 서술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성육신의 예수님에 대해 어떻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성육신을 도입함으로 예수님을 존재론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합니다. 오직 예수님이 스스로 설파하시는 내용을 담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6:48),” “나는 선한 목자다(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참이요 생명이다(14:6),” 그리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15:5)”와 같은 1인칭 표현으로 이어갑니다. (이들 표현에서 “나는 이다(ἐγώ εἰμι(에고 에이미))”가 주어와 동사로 나오고 보어가 나옵니다. 그런데 보어 없이 “나는 이다(ἐγώ εἰμι)”만 표현되기도 합니다(8:28,58, 13:19; 18:5,6,8). 구약에서부터 내려오는 이 표현은 존재의 뜻이 아닙니다. 즉 성경에서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나는 이다”로 표현되지 “나는 있다”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17. 요한이 말씀의 아르케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을 부각한 것은 결국 예수님으로 새 언약을 전개하기 위함입니다. 존재하는 사람은 존재하는 하나님과 관계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옛 언약에 등장하는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를 온전히 보이지 못합니다. 창조된 사람과 창조주 하나님은 함께로 표현될 수 없습니다. 창조된 사람은 기껏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지켜야 할 바로 받아들입니다. 구약은 율법의 삶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보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어떻든 세상에서 조건적으로 보여야 할 내용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지키는 이들은 세상에서 온전한 삶을 보일지라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보이지 못합니다.
18. 요한복음은 창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을 언급하면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은 육신을 입어 세상에 오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함께는 성육신된 생명으로 세상에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은 성육신된 생명으로 주어집니다. 창조 전에 이미 하나님과 함께한 생명은 창조된 세상의 조건에 속박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은 세상에 파급됩니다. 즉 성육신의 예수님을 서사하는 것이 새 언약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으로 새 언약은 서사됩니다. 존재의 속성으로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음을 보입니다.
19. 요한복음은 사물, 곧 존재의 아르케가 아닌 말씀, 곧 생명의 아르케를 말합니다. 말씀의 아르케를 생명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말씀의 근원을 들려줍니다. 달리 말하면 말씀의 근원은 생명입니다. 물론 이 경우 생명은 존재의 목숨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근원을 생명으로 부각함으로, 말씀이 대상을 지적하거나 대상으로 파생된 것이 아님을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으로 세상에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보이는 바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의 율법처럼 사람이 이행해야 할 내용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은 세상에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의 드러남으로 예수님을 서사합니다.
20. 예수님을 성육신으로 다룸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생명에 접한 가지로 부각됩니다. 즉 예수님을 따름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훌륭한 종교적 지도자로 보며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 지도자로 예수님은 사람의 종교성을 진작할 뿐입니다. 그러나 성육신의 예수님은 새로운 생명으로 세상에 온 분이십니다. 예수님으로 새로운 생명의 삶이 세상에 보입니다. 따라서 성육신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에서 목숨으로 살면서 목숨의 속성인 종교성을 진작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보다 성육신에 접한 가지의 자람으로 세상에 선교가 일어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은 창조 전에 뿌리내린 생명나무로 예수님과, 그 생명나무에 자란 가지로 그리스도인을 부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