渤海考自序(발해고자서)
유득공(柳得恭:1748~1807)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혜풍(惠風) · 혜보(惠甫), 호는 영재(泠齋) · 영암(泠菴) · 가상루(歌商樓) · 고운당(古芸堂) · 고운거사(古芸居士) · 은휘당(恩暉堂).
조선 정조 때의 북학파(北學派) 학자이자, 박제가 · 이덕무 · 서이수(徐理修)와 함께 규장각 ‘4검서(檢書)’의 한 사람이다.
한시에도 뛰어나 박제가(朴齊家) · 이덕무(李德懋) · 이서구(李書九)와 더불어 한시사가(漢詩四家) 또는 후사가(後四家)로 꼽힌다.
20여년 간의 관직 생활을 거쳐 말년에 정 3품까지 올랐다.
북학파의 한 사람으로 박지원 · 박제가 · 이덕무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발해고』가 있으며, 발해의 역사를 중요성을 강조하며 ‘남북국시대론’의 효시가 되었다. 이외에도 시문을 모은 『영재집』과 한국의 역대 시문을 엮은 『동시맹(東詩萌)』이 있으며 한국의 세시풍속을 최초로 기록한『경동잡지(京都雜志)』가 있다.
그 외에도 『일십회고도시』 · 『사군지(四郡志)』 ·『난양록』 등이 있다.
(原文)
*원문에는 고구려(高句麗)를 고구려(高句驪)로 표기.
高麗不修渤海史 고려불수발해사 知高麗之不振也 지고려지부진야 昔者高氏居于北 석자고씨거우북 曰高句驪 왈고구려 扶餘氏居于西南 부여씨거우서남 曰百濟 왈백제 朴昔金氏居于東南 박석김씨거우동남 曰新羅 왈신라 是爲三國 시위삼국 宜其有三國史 의기유삼국사 而高麗修之 이고려수지 是矣 시의 及扶餘氏亡高氏亡 급부여씨망고씨망 金氏有其南 김씨유기남 大氏有其北 대시유기북 曰渤海 왈발해 是謂南北國 시위남북국 宜其有南北國史 의기유남북국사 而高麗不修之 이고려불수지 非矣 비의 夫大氏者何人也 부대씨자하인야 乃高句驪之人也 내고구려지인야 其所有之地何地也 기소유지지하지야 乃高句驪之地也 내고구려지지야 而斥其東斥其西斥其北而大之耳 이척기동척기서척기북이대지이 及夫金氏亡大氏亡 급부김씨망대씨망 王氏統而有之 왕씨통이유지 曰高麗 왈고려 其南有金氏之地則全 기남유김씨지지즉전 而其北有大氏之地則不全 이기북유대씨지지즉부전 或入於女眞 혹입어여진 或入於契丹 혹입어거란 當是時爲高麗計者 당시시위고려계자 宜急修渤海史 의급수발해사 執而責諸女眞曰 집이책제여진왈 何不歸我渤海之地 하불귀아발해지지 渤海之地 발해지지 內高句驪之地也 내고구려지지야 使一將軍往收之 사일장군왕수지 土門以北可有也 토문이북가유야 集而責諸契丹曰 집이책제거란왈 何不歸我渤海之地 하불귀아발해지지 渤海之地 발해지지 乃高句驪之地也 내고구려지지야 使一將軍往修之 사일장군왕수지 鴨綠以西可有也 압록이서가유야 竟不修渤海史 경불수발해사 使土門以北鴨綠以西 사토문이북압록이서 不知爲誰氏之地 부지위수씨지지 欲責女眞而無其辭 욕책여진이무기사 欲責契丹而無其辭 욕책거란이무기사 高麗遂爲弱國者 고려수위약국자 未得渤海之地故也 미득발해지지고야 可勝歎哉 가승탄재 或曰 혹왈 渤海爲遼所滅 발해위요소멸 高麗何從而修其史乎 고려하종이수기사호 此有不然者 차유불연자 渤海憲象中國 발해헌상중국 必立史官 필립사관 其忽汗城之破也 기홀한성지파야 世子以下奔高麗者 세자이하분고려자 十餘萬人 십여만인 無其官則必有其書矣 무기관즉필유기서의 無其官無其書 무기관무기서 而問於世子 이문어세자 則其世可知也 즉기세가지야 問於隱繼宗 문어은계종 則其禮可知也 즉기례가지야 問於十餘萬人 문어십여만인 則無不可知也 즉무불가지야 張建章唐人也 장건당인야 尙著渤海國記 상저발해국기 以高麗之人 이고려지인 而獨不可修渤海之史乎 이독불가수발해지사호 鳴呼文獻散亡 명호문헌산망 幾百年之後 기백년지후 雖欲修之 수욕수지 不可得矣 불가득의 余以內閣屬官 여이내각속관 頗讀祕書 파독비서 撰次渤海事 찬차발해사 爲君臣地理職官儀章物産國語國書屬國九考 위군신지리직관의장물산국어국서속국구고 不曰世家傳志 불왈세가전지 而曰考者 이왈고자 未成史也 미성사야 亦不敢以史自居云 역불감이사자거운 甲辰閏三月二十五日 갑진윤삼월이십오일.
(通解)
유득공의 서문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거주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거주하여 백제라 하였으며, 박·석·김씨가 동남쪽에 거주하여 신라라 하였다. 이것이 삼국으로 마땅히 삼국사(三國史)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국사(南北國史)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 된 일이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이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한 뒤에 왕씨가 이를 통합하여 고려라 하였는데, 그 남쪽으로 김씨의 땅을 온전히 소유하게 되었지만, 그 북쪽으로는 대씨의 땅을 모두 소유하지 못하여, 그 나머지가 여진족에 들어가기도 하고 거란족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 때에 고려를 위하여 계7책을 세우는 사람이 급히 발해사를 써서, 이를 가지고 “왜 우리 발해 땅을 돌려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바로 고구려 땅이다”고 여진족을 꾸짖은 뒤에 장군 한 명을 보내서 그 땅을 거두어 오게 하였다면, 토문강 북쪽의 땅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이를 가지고 “왜 우리 발해 땅을 돌려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바로 고구려 땅이다”고 거란족을 꾸짖은 뒤에 장군 한 명을 보내서 그 땅을 거두어 오게 하였다면, 압록강 서쪽의 땅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발해사를 쓰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 여진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고려가 마침내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 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크게 한탄할 일이다.
누가 “발해는 요나라에 멸망되었으니, 고려가 무슨 수로 그 역사를 쓰겠는가?”고 말하지 모르나, 그렇지는 않다. 발해는 중국제도를 본받았으니 반드시 사관(史官)을 두었을 것이다. 또 발해 수도인 홀한성(忽汗城)이 격파되어 고려로 도망해 온 사람들이 세자 이하 10여 만 명이나 되니, 사관이 없으면 반드시 역사서라도 있었을 것이고, 사관이 없고 역사서가 없다고 하더라도 세자에게 물어 보았다면 역대 발해왕의 사적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 은계종에게 물어 보았다면 발해의 예법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10여 만 명에게 물어 보았다면 모르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장건장은 당나라 사람이었으면서도 오히려 『발해국기』를 지었는데, 고려 사람이 어찌 홀로 발해 역사를 지을 수 없었단 말인가?
* 장건장(張建章:806~866)의 묘지명이 1956년 북경에서 발견되어 그의 일생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지게 되었다. 832년에 발해 사신이 유주(幽州:현재의 북경)를 방문하자, 그는 833년에 사신으로 발해에 가게 되었다. 834년 9월에 발해 수도에 도착하였고, 835년 8월에 유주에 돌아왔는데, 그 뒤에 『발해기(渤海記)』 3권을 지었다.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신당서』 ·『발해전』에 많은 내용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국 역사에 관련된 책들을 수집하여, 일본이나 중국은 자국에 불리한 역사책은 없앴다. 아니면 비밀 문서고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 문헌이 흩어진지 수백 년이 지난 뒤에 역사서를 지으려 해도 자료를 얻을 수 없구나! 내가 내각의 관료로 있으면서도 궁중 도서를 많이 읽었으므로, 발해 역사를 편찬하여 군, 신, 지리, 직관, 의장, 물산, 국어, 국서, 속국의 9고(考)를 만들었다. 이를 세가(世家), 전(傳 ), 지(志)로 삼지 않고 고(考)라 부른 것은 , 아직 역사서로 완성하지 못하여 정식 역사서로 감히 자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갑진년(1784) 윤3월 25일
『발해고』, 역자 송기호, 홍익출판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