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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달에 약10첩을 10만원에 지어먹고 또2월 달에10첩을 지어먹었다. 그래도 조금 낫 다가 또 자꾸 아파서 3월을 겨우 넘기고 말경에 10첩을 15만원 주고 먹는 중 너무나 통증이 심해서 참기 어려 운 지경에 생각 이 나서 죽기까지 참고만 있을 수 없다. 급할 때갈 수 있는 지정병원이 필요하다고 생각나서 그동안 비뇨기과에 한번도 가보지 안아 가까운 구포 에 가서 정확한 진단을 받아볼 의사를 소개해 달 라고해서 갔다. 다음날 찾아갔다.
4월 6일 그런 데 생각 외로 김 현우 비뇨기과의사를 4월 6일 찾아가서 만나는데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셨다
나의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불구자가 된 것이 결핵 때문 이라 고한다. 골수염도 신장도 난생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결핵이라니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한번도 그런 말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마침종환이도 직장 다니다 쉬는 덕 분에 같이 다닐 수 있어 좋았다. 종환 이는 정말 천사처럼 나의 게 부담 없이 엄마처럼 진정으로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잘해주었다. 같이 듣는 순간 둘다 놀라 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핵은 폐 결 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든지 안가는
곳 없이 뇌 속등 어 뒤든지 가는 곳 마다 이름 이 다르다고 한다. 나 역시 그러하다 척추에
붙어 다 망가지게 하고다음 신 장 다음은 혈관으로 들어 간 다 고한다. 84년도에 이미 결핵진단을 받았지만 아무병원의사도 말해주지
안아서 모르고 김 진균 병원에 한달 다니다 배 철 방사선과 가서 촬영 해 오라하여서 그대로 하니까 약 처방을 내여 집에서 먹 으 면된다하였다. 그래서 며칠 먹으니 위장 이 아프고 해서 왜 나에게 결핵약을 주는지 먹지 않고 버렸다 위 애 상신하여 한약 알약을 주어서 먹어 보니 그것도 신통 찬아 버리고 다른 병원 이 나 약국도 거절하다가 구세주처럼 나타난 수정
동에서 아버님 병으로 소개 받은 무면허 한의사가 나도 진맥을 해보고 역시 가망 이 없다. 하여 그냥 가려는 것을 어머님이 애원하여 그길로 약을 먹으니 차도가 생겨 한약을 2년간 걸쳐 20제를 먹었다 그만큼 먹으라한다. 그 후 1년간 성전에도 종점까지 걸어서 잘 다니다. 또 다시 병은 짙어져 감을 늦 겨 순 간 순간 약을 자꾸 먹어야 견딜 수가 있었다.
그런 세월 속에 흘러간 날들이 5년이란 세월을 절망과 고통 속에 언제나 병마와 싸우며 눈물과 한숨 속에 누워서 어머님의 편치 못한 병든 몸을 안고투병하면서 맛 길 곳이 없어 겨우 해주시는 밥을 먹으려니 정말 미안한 마음뿐이다. 내가 얼른 나아 서 밥이라도 도와 해먹을 터인데 행여나 나을까, 하는 생각 에,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몸은 자구 더 심 해 지 고 잇 음을 나는 알 수 있다. 나보다 아버님이 더 고 통 당하시며 병마와 가난에 찌들 은 그 모습을 보면서 어머님도 온 식 구가 앞 푸니 누구를 먼저 도울지 모를 지경에 항상 내가 먼저 비상약을 먹어야 한 다
4월 7일 금요일
일찍 죽지 않고 39세 동안 긴 세월을 살아오며 그 얼마나 부모님께 마음에 큰 병을 지워 영육 간에 짐이 되었는지 모른 다 나 자신 나 자신도 조금은 알 수 있다.그러나 부모어머님의 그 심정 어찌 다 해아 릴 수 있으리 병든 노부모님께 종환이도 보는데 무슨 주책이냐 정말 후 회 슬어 워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병원에서 치료를 할여니 또 x-래 이 촬영을 해 오라하여서 역시 배 철 방사선과에서 한 시간 걸려 찍었다 배 선생님은 언제나 친절하며 비용도 적게 받았다 식도 사진은 2번째 거절당했다. 어렵다고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이 없다. 도와드리지 못할망정 자꾸만 괴로움만 드리니 나
자신이 원망스럽다. 그러 나 하나님을 믿으니 항상 소 망 을 가지고 때가 이루 어 지기만을 기다리며 나자신은아무것도 충성한 것이 없어도 하나님 의 영광이 이 땅에 임하 심 만 믿고 완전 한 새사람이 되기만을 기다리며 살아 온 날들 나뿐만 아니라
더욱 아버님 돌아 가시기전에 그 고통스러운 육신을 완전함을 살아서 그분을 만나 이 세상에 원한을 다 풀 수 있 게를 간절히 기도하며 살아 온 날들 완전함을 맛 보 지 못 하고 죽기 에는 너무나 억울하다는 생각뿐이다. 사후의 부활은 정말 가보지 않고는 믿고 싶지 안타내 사랑하는 부모 형제를 두고 해어저가기는 정말 싫 타. 소망을 가지고 살려니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러나 지난날의죄와. 전생의죄 갑을 수만 있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라고 항상 기도 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 에 임할 때 동참하게 해달라고 나는 아니 우리부모님과 같이 온 가족이 무사히 함께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할는지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업 다 라는 주님의 말씀과 같이 나는 믿고 싶다. 일기를 자주 쓰지 않고 한번에 쓰다보니 말이 엉뚱 한데로 흐르고 두서가 없이 쓴 것 갔다.
89년 4월 6일 연이어 김 현우 비뇨기과 의사 말을 들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을 또 당 하는 것 같았다. 눈물이 나는 것을 억지로 참고 집에 와서 40분 동안 통곡을 하였다.
참을 여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지나온 세월이 너무나 원통하고 억울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 할 수 없었다.
척추가 그리된 것은 또 몰랐다 하여도, 1970년 후반 골수염인가 주마 담인가 하는 그 지긋 한 고통 생각 조 차 하기 싫 타 생살이 곪아 터지는 그 고통 어찌 말로 글로 다 표현 하며 설명 할 수 있을까 내짧은 글로는 도저히 표현 할 방법이 없다. 손톱 밑 에 가시와 생손가락 알아본 사람이면 조금은 짐작 할 수 있을 가 아니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누워서 일어나 화장실 가기도 겨우 하니까! 그러나 옆에서 지켜보는
어머니의 그 마음은 그 얼마나 피를 말리는 고통 이었을까 ! 그러나 곪으면 수술 째로만
다니며 외 전문의 진단은 받아보지 안 아 나 다리를 다쳐 도 외 병원 에 가지 안 앗나 또 신장이아니 처음 앤 간장이 손상 데어 아 푸 다고 간장약을 먹은 지 5-6년 자기진단으로 그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정말 나 자신은 오직불구이기 때문에 언 만
하면 참자 모든 것에 참고절제하며 남의이목을 의식하며 이것만 생각 참는 것이 효도인 듯 피곤해서 쓰러 질 때 까지 집안일에 열심 했다. 그러면서 지나고 보니 간장이 아니라 신장 소변에 피가 쏟아지니 놀라지 안 을 수 없어 허겁지겁 병원을 찾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신장은 다 파괴 되어 가고 있었다. 왜 큰 병원에 가서 전문의 진단을 받지 못했나 수많은 지난
세월을 돌아 볼 때 우리부모가 너무도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다 어찌 이지경이 되도록 나를 큰 병원에 되려다. 진단을 받아보지 못했을까? 내가설영 싫 타 해도 그러면 안 된다. 어머니가 나말하기 전에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수십 번을 생각하다 말할까 하지말까 다짐하고다짐하다 입밖에 말나오기가 내 부모였지만 너무 나 힘이 들어 별 으 고 별러서 겨우 한마디 하면 항상 경재 적 으 로 어렵다는 생각을 앞세우니 큰 병원에 가지도 못하는 마음 너무나 안 타 까 움 뿐이
었다. 언니도 생각하면 정말 야속 하다. 큰 병원 진단을 부모께 일러 줄 수 없을까 ! 하기는 부모도 혼자일 뿐 자신이 자신과의 싸움일 뿐이다
인간은 언제나 홀로 일뿐이다.
믿음이 없고 진정 혼자였으면 어찌 이 시간까지 살아있을까?
믿음의 신앙이 있었기에 소망을 가지고 죽음의 고통을 이기고 부모형제의 동정과 사랑 속에
살아온 세월 그렇게 살아오는 중에 이런 충격을 받으니 복받쳐오는 서러움을 달랠 수가 없어 한없이 울었다. 왜 우느냐고 지
나온 세월이 너무나 원통하고 억울해서 분통이 터져서 왜 그리 미련하게 방치 하 엿 나 나는 안 된다 해도부모는 그래서 안 된 다고 할 수 없었든가.왜 이지경이 되도록 그냥 두 엇 는 가 나 죽는 것이 원통 한 것이 아니고 지나온 긴 세월 속에 한약을 얼마 나먹고 여기저기 효과 없이 얼마나 다녀 든 가 이모든 것이 제때 큰 병원 가서 진단 받지 않고 약을 함부로 쓴 때문이다 제 되 로 알고 약을 썼으면 이 지경 은 되지 않았을 것을 10세안에는 부모의 책임이라는데 어떤 부모는 자식을 대학 까지
업고 다니며 졸업을 식혔다는 뉴스도 있는데 왜나는 이렇게 무정한 부모를 만났을까. 원통한 마음에 부정적으로만 생각하고 이성을 잃고 부모께 하소연하였다.
어머니도 한없이 울고 아버님도 점심식사도 안하시고 병원에 가셨다병든 부모 깨 내가 너무
하여 구나 어떠한 경우에도 이성을 잃으면 안 되는 데 잘못 하였구나 미안한마음이 들었다.
39년이란 긴 세월 나 때문에 골병든 나의 어머니 그리고 아버님 우리형제들 나는 일평생을
살아오면서 부모 형제 주위 모든 사람에게 신세만지고사니 나는 닦은 공이 없으니 어이 다 갚을 수가 있을지 하나님께 부탁해본다.
모든 것을 주관 하옵소서 아 맨 처음이자 마지막인 원망이다 . 앞으로는 다시 원망하지 안 으 리라. 다짐해본다.
4월 8일 토요일
나는 모든 신체조건이 맞지 안 아 액 스 레 이 사진찌기도 치료도 어렵다 한 다 옷 가게를 가도 사 입을 수없고 모든 것이 합당치 못한 나의신세 한없이 원망 슬어 운 내 심정 무어라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 가 주어진 운명이라 생각하고 살아야지 x-선결과 아직도 희망은 있다 치료해 보자 한다. 주사와 투약이 빠르지만 위장 때문에 약을 먹을 수없으니 어찌할 고 정말 안타 까 운 일이다. 오늘이 이 일째 종환 이와 병원에 갔다.
보험의 혜택을 많이 본다. 혼자라도 남겨두기를 잘하였다고, 생각 한다 그러나 병원비 차비 합쳐 삼천 원 이상 들어가니 걱정이다, 아버님도 남포동 문 효 중 비뇨기과 다니시고 식구수대로 우리 집은 전생과 현생에 무슨 죄과를 많이 짖고 살 앗 길래 이렇게 병마와 고통 속에 살아 야 하는 가 이해 할 수 업 시 돌아가는 우리 집 도시계획으로 집까지다 날라 갈 지경이니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 태산 같다. 아들 둘이 장가 들일 돈도 방 구할 돈도 없으니 누구 가 이 사정을 알아줄까. 남들은 알 수 없는 일이다.
4월9일 일요일
1988년 1월에 만난 서 경옥 송계선 전도사님 서 경옥 전도사님이라 부를 수 업 는 나의 언니로 아니 가장 인간적으로 헌신적인 사랑에 감동 하여 내가마음으로부터 가장 존경하며 어찌 사람으로서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전도사님이다 나에게는 둘도 업는 한 형제처럼 아껴주고 진정 사랑으로 성례 식 마치면 업어다 차를 태워 주며 집에까지 대려다준다.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성민이 그만큼 사랑으로 말로 만 사랑을 부르짖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을 보지 못하다가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은 보지 못 하다가 서 경옥 전도 사 님 은 나에게 동정과 사랑과 관심으로 도와주시고 돌봐 주셔 다. 우리 집에 오시면 빨래도 청소도해주시고 오실 때 마다 과일도 사오시며 정말 눈물이 나도록 고마워 그 은공은 보답 할 길이 업다 4월5월 걸쳐 새
장방 하우스 등 그 더러운 곳을 자기 눈 병 이 종환 에게 올라 다고 미안해하며 다 치우고 청소 도배까지 다해 주 엇다. 그러다 자기 몸에 피부병 까지 올랐다 고생 이 많았다. 매일 오다 시피 와서 집안일도와 두고 하다가 자기눈병 피부병 까지 겹쳐 우리 집에 온다고 보고하여 그만 멀리 군산으로 6월 달에 전 근을 식혀버렸다.
정말 해어 지 기 싫었다. 그러나 마음 만 은 항상 곁에 있는 것 같다, 전화도 편지도 자주한 다 합당치 못한 줄 알면서 어찌할 수 없었다. 나의 영원한 벗이 되어주기를 부탁하였다
괴로 울 때 언제나 편지로 하소연 한다 부모형제에게도 할 수 업 는 나의심정 다 털어 놓을 수 는 업지만 그래도 하소연 할
수 있는 분이므로 조 하다. 오늘도 나의마음의 하소연을 다하였다.
그때마다 나에게 언제나 나의 위로가 되어 주었다.
5일편지잘 받았다고 정말 하지 말고 입원하고 희망을 가지고 영원 희 만날 때까지 같이 살자고 전화로또편지로 열심히 위로해 주었다. 나에게는 그 누구도 친구 되어 주는 이가 업는데 오직 그대뿐 나의 하소연 다 들어 주는 나의 영원한 벗이 정말 고마운 마음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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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형님의 그 고통스러움~어느정도는 짐작 되었지만 그렇게 까지 고통스러울줄은 몰랐습니다..~~
비록 지금 많이 어려우시지만 주위의 모든 분들이 형님에게 다가가고 있는것은 그 어려움 이겨내신 그 의지롭고 강인한 모습에 끌려서겠지요~~형님 부디 건강하시고 꼭~행복 하셔야 합니다..
ㅎㅎ 솔바람아 여기 일기는 내가아니고 하늘나라에 가있는 전에 최덕순여사일세 그사람이 나를 만나기전 이야기인데 내용이 눈물나게 가슴아푸게 하데 그래서 나를 만나려고 그아픔을 참고살아왔나싶으기도 하여 내가 컴에 입력을 했다가 우리 카페에 공개를 하니 이해를 하여주시게
아~그랬군요~내용에 조금 다른내용 있었지만 그 아픔이 절절하여 최여사님의 생각은
미처못하고 형님의 아픔갗이 느껴졌습니다~지~~송~
명심보감의 이야기가 아니고 천사 최덕순씨 일기가 아닐까요. 벌써 15.6년전에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몸에 병마로 고생하면서도 부모님생각 동료들생각하시면서 어려움을 이기고 계시네요 부끄럽지만 건강한 사람들도 불평이 많은데 힘차게 살아오신 천사님 존경합니다.
육선생님은 바로 알고계시네요~~~ 전에 아내가 부모를 못만난것도 아니고 건강하신 양친부모를 만나서 재산도있고장인장모님께서 교회 장로일을 보시고 했다는데 최여사가 어릴때 이렇게 어렵게 고통과 괴로움을 참고 살아온이야기랍니다 .. 죽고없는 아내이야기를 불태워버리면 그만이지만 유품으로 남겨놓아 올렸습니다
이 일기를 읽으니 뭐라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토마토님 고맙습니다 행복하시고 대박 터트리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