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작인 ‘그대의 찬손’ 포스터(1974, 왼쪽).
이두용 감독의 ‘피막’(1980).
-저는 유지인씨가 오히려 그런 작품을 더 많이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영화는 한국의 장르영화, 특히 공포영화가 쇠퇴하던 시기에 나온 희귀작이거든요. 이 무렵 몇몇 영화에서 유지인씨 이미지는 TV에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찍은 ‘바람불어 좋은 날’이나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같은 영화를 두고도 유지인이 왜 저런 역할을 하는지 이해 못 하겠다는 사람이 많았어요. 당시만 해도 여배우는 화장품 광고만 해야 되고 먹는 광고는 절대 하면 안 된다는 식의 금기가 많았거든요. 그럴 때마다 저는 뭔가 깨고 싶었어요. 남들이 뭐라 하든 말든. 여러 장르를 다 하면서 나 나름의 뭔가를 구축하고 싶다는 욕심이었죠. 영화학도로서의 자존심이랄까, 그런 것도 있었고요.”
-1978년에 이르자 이른바 ‘트로이카 체제’가 완전히 굳어집니다. 정윤희씨나 장미희씨가 최대 경쟁자였던 셈인데 그분들과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제가 학교에 돌아가 있는 동안 그 친구들이 데뷔했고 ‘서울야곡’ 이후에 삼각구도가 만들어졌다고 떠들기 시작했죠. 그 질문을 자주 받는 편인데 별로 의식하며 지낸 것 같지는 않아요. ‘혼자 잘난 척하느라고 안 낀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저는 그냥 맡겨지는 숙제를 충실히 한다고만 생각했거든요. 트로이카니 하는 말은 언론에서 만들어낸 거지 우리가 한 건 아니잖아요. 아버지 말씀대로 욕심을 갖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후였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고요.
윤희랑 미희는 약간씩 경쟁도 하고 그랬던 모양인데, 제가 가운데 끼면 그런 일이 없었어요. 사실 윤희는 윤희 나름대로 예쁘고 미희는 미희 나름대로 멋있잖아요. 셋이 이미지가 완전히 다르다 보니 누구 역할을 누가 뺏는다거나 그런 일도 드물었고요. 싸울 일이 별로 없었죠. 대신 ‘우리나라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고 서로 물으며 신경전을 벌이기는 했죠.” (웃음)
-욕심이 없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1979년부터 작품을 굉장히 많이 했거든요. 이유가 뭐였을까요.
“몇 번 영화를 그만두려고 했어요. 상업적인 소모품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레몬처럼 꽉 짜서 즙 내면 그것으로 끝나는. 항상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더 열심히 했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정말 제대로 뭔가 한번 보여주고 끝내야겠다는. 상 타고 돈 버는 그런 거 말고 정말 내 마음에 흡족한 영화를 찍고 싶다는 욕심이었죠. 내 딴에는 열심히 했는 데도 주위의 반응이 좋지 않으니 계속 오기가 났죠. 그러다가 결국은 못 그만두고 발동이 걸려 이어진 거예요.”
정진우 감독과의 ‘악연’
-1979년 정진우 감독의 두 작품 ‘가시를 삼킨 장미’와 ‘심봤다’에서 모두 주연했습니다. 앞에서도 잠시 말했지만 ‘심봤다’에서 유지인씨는 기존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굉장히 순박한 여인, 남편이 삼을 캤는 데도 그걸 버리고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고 사정하는 부인 역할이었죠. 미혼의 여배우가 두 아이의 엄마를 연기한다는 게 부담스럽지 않았을까요.
“연약하지만 또 굉장히 강인한 캐릭터였죠. 엄마이기 때문에 남자보다 강한. 요즘 배우들은 제 나이의 역할을 많이 하지만 저는 그렇지 못했어요. 그 무렵에는 여배우들이 나이보다 늙은 역할을 주로 했거든요. 저만 해도 머리 올린 애엄마 역할을 더 많이 했고요. 지금도 저를 보고 ‘그때 그 유지인이 왜 이렇게 젊으냐’고 묻는 분들이 있어요. 마흔 살 무렵에 벌써 ‘이제 한 오십 되셨죠?’ 소리를 들었으니까요. 70년대 여배우라고 하면 굉장히 오래 전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웃음)
빨리 제 고정된 이미지를 깨고 싶었어요. 재미있는 건 지금도 사람들이 청순가련형 하면 유지인을 떠올린다는 거죠. 최근 출연한 드라마 ‘회전목마’의 조소혜 작가만 해도 ‘이건 유지인씨가 해야 된다’고 그랬대요. 그분은 내가 실제로는 시트콤을 해도 좋을 만큼 털털한 편이라는 걸 잘 아는 데도요. 나는 이제 우는 게 지겨운데. 어떤 때는 진한 사투리를 쓰는 강한 역할을 하다가도 또 다음 순간에는 여지없이 청순가련형 여주인공으로 돌아가곤 했죠.”
-결과적으로 ‘심봤다’에서의 연기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습니다. 정진우 감독 덕택이었을까요.
“워낙 여러 사람이 고생하며 찍으니까 죽기 살기로 했죠. 저 혼자 이룰 수는 없는 일이죠. 정진우 감독님도 참 대단했어요. 촬영장에서 어찌나 소리를 많이 지르는지. 어느 때는 밥도 안 먹고 촬영을 계속해요. 원래 계약할 때 ‘밥은 제 시간에 먹어야 한다’고 단서를 달았거든요. (웃음) 여배우가 밥을 챙겨먹어야 다른 스태프들도 밥을 먹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정 감독님은 한번 작품에 미치면 생쌀 먹어가며 계속 카메라를 돌리는 분이에요. 밥 먹고 하자고 대들었다가 싸운 적도 있어요.
그래서 사이가 나빠지기도 했죠. 나중에 우연히라도 자리를 함께하게 되면 내가 피할 정도로. 그렇지만 그분이 미워서는 아니었어요. 워낙 작품에 대한 애정이 강해서 그런 거였으니까요. 왜 그런 말도 있잖아요, ‘보이지 않는 사랑도 있다’고.”
(계속)
1970년대 영화계를 돌아볼 때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어떤 여배우도 호스티스 멜로라는 장르를 피해갈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종잇장처럼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와 개연성 없는 줄거리 구성, 사회적 메시지를 철저히 차단한 채 여배우의 육체를 전시하는 데 급급했던 호스티스 멜로물은 한국 영화계가 당대의 여성현실을 왜곡해 흥행을 만드는 최후의 보루였던 셈이었다.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이들 작품에서 남성은 주로 여성을 노리개로 삼는 유부남이거나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호스티스 누이를 질책하는 가학적이면서도 무능한 오빠 등의 인간형이었다. 성을 소비하는 혹은 여성의 희생에 의해 부양되는 이들 남성은, 마치 유신으로 인한 사회적 억압을 여성의 몸을 통해 대리 만족을 얻거나 시대가 낳은 죄책감을 성적으로 방종한 여주인공에게 투사하는 것으로 보였다.
결국 호스티스 멜로물은 순결 이데올로기에 물든 사회, 여성에 대한 가학으로만 자신이 남성임을 확인하는 남성들의 나르시시즘, 거기에 반공, 청춘, 에로물 외에는 거의 모든 소재가 검열의 제약을 받던 한국의 1970년대가 빚어낸 부끄러운 시대적 합작품이었다. 호스티스 멜로물이 관객을 불러모으며 시대의 상처를 위무할 때, 밖에서는 김대중이 납치당하고 정인숙이 죽고 전태일이 분신했으며, 서울대생이던 김상진은 배를 가르고 민주주의를 외쳤다. 그게 1970년대였다.
-유지인씨도 이 무렵 노세한 감독의 ‘26×365=0’이라는 작품에서 호스티스 역을 맡았습니다.
“스물여섯에 자살한 여대생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였죠. 그 영화에는 그래도 사회상이 담겨 있어요. 여주인공만 해도 자신의 즐거움이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희생한 거잖아요. 실화라는 점 때문에 무언가 고발하는 마음으로 찍은 영화였어요. 물론 흥행을 위한 설정이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지만 사회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부분, 숨기고 싶었던 치부를 드러내는 이야기니까요.”
역할이 배우와 맞지 않으면
-그 부분이 이 영화가 다른 호스티스 멜로와 다른 점이라고 봅니다. 유지인씨가 나왔고 주인공이 여대생이었다는 점. 많은 평론가들이 이 부분을 지적하는데요, 당시 사회가 여배우들에게 굉장히 가학적이었고 심지어 호스티스 멜로라는 장르였는데 유지인씨에게는 그런 가학성을 띠지 못했다는 말이죠.
“이후에 비슷한 시나리오가 여러 개 왔는데, 다 거절했어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해요. 어떤 때는 누가 봐도 뻔히 호랑이 굴인데 뛰어들고, 또 어떤 때는 괜찮아 보이는 곳도 거절한다는 거였죠. 베드신도 대부분 대역이 했어요.
신성일, 윤정희 선생님과 ‘태백산맥’을 찍던 대학 1학년 때였어요. 수유리에서 밤새도록 군중 신을 찍는데 저는 한 신도 안 찍어주는 거예요. 어린 마음에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어서 새벽에 몰래 도망갔어요. 막상 촬영에 들어갔을 때는 제일 막내가 없어 난리가 났죠. 그 엑스트라들을 다시 동원하려면 돈이 얼마겠어요.
그렇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어요. 한마디로 나는 ‘잘난 사람’이었던 거죠. 그 시간에 공부를 했으면 얼마를 더 했을 텐데 아까운 내 시간을 그냥 버리나 싶었죠. 또 그 무렵에 제가 TBC에서 드라마를 찍고 있었거든요. 집에서 편하게 자고는 다음날 아침에 드라마 촬영장인 부여로 가는데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영화진흥공사 버스가 쫓아와서 나를 찾아요. 결국 영화연출부랑 드라마 제작진이랑 협상을 해서 한동안 저녁까지는 드라마를, 새벽에는 영화를 찍기로 했죠. 지금 생각하면 참 여러 사람에게 못할 짓 한 거예요. 새파랗게 젊은 배우가 그러면 되겠어요?
그때부터 ‘나는 영화를 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되뇌며 살았어요. 약속시간만 해도 저는 1분이라도 늦으면 안 되는 성미인데 다른 배우들은 늦어야만 스타라고 생각했거든요. 그게 그렇게 싫었어요. 그러니 다른 배우들하고 약속을 하면 오히려 그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아요. 30분쯤 늦게 나타나면 ‘왔니?’ 한마디 하고 가버리니까요.”
-시간도 시간이지만 일종의 자존심이 아니었나 싶은데요.
“그런 면도 있겠죠. 사실 영화계가 별세계는 아니잖아요. 내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봐야 남들보다 얼굴이 좀 많이 알려졌다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제가 그렇게 편하게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일이 없으면 없는 대로, 조그만 일이라도 주어지면 또 그것대로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한창때도 친구들하고 시내버스 타고 다니며 길거리에서 두더지잡기 오락을 하고 놀았으니까요.” (웃음)
(계속)
-다시 영화로 돌아와 이야기를 계속하죠. ‘가시를 삼킨 장미’는 이전 작품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자의식 있는 여대생을 그린,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멜로를 풀어간 영화였죠. 유지인씨가 새한테 ‘왜 우리는 수컷을 통해서만 존재가치를 인정받아야 돼?’하고 묻는 장면도 있고요. 그런데 이상한 건 이 영화에서의 유지인씨보다 ‘심봤다’에서의 유지인씨가 더 자연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느낌이라는 것입니다. 한 감독과 같은 해에 작업을 했는데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걸까요.
“배우가 어떤 역을 하면서 그 역을 이해하지 못하고 연기하면서 불편하면 보는 사람은 더 불편한 법이거든요. ‘가시를 삼킨 장미’가 바로 그랬어요. 못 하겠다 싶은 순간도 있었고요. 보수적 성향인 나와는 동떨어진 역할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보는 사람 입장에선 그렇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을 겁니다.
사람들은 저에게서 자유분방함을 읽고 싶어하지만 제 자신은 그렇지 않거든요. 저는 지극히 조선시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에요. 영화 속 인물을 연기하면서 사고방식이 깨어지고 그를 통해 깨달은 것도 많지만 여전히 다른 여배우들에 비해 유교적인 성향에 가까웠어요. 그런 성향과 외모가 잘 맞지 않으니까 괴리가 생기는 거죠. 아쉬운 부분이 많았어요.”
1980년대 들어 유지인이 출연한 영화 가운데 흥미를 끄는 작품으로는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을 들 수 있다. 당대를 대표하는 영화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이 작품에서 유지인은 이전의 청순가련이나 호스티스 멜로의 수동적인 여인상과는 또 다른 이미지를 보여준다. 빨간 비닐 옷을 입고 피아노를 치며 안성기를 항해 ‘너 진짜 웃기는구나. 내가 잠 한번 같이 잔 게 그렇게 우쭐하냐, 이 병신아!’ 같은 대사를 날리는 그녀는 분명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캐릭터였고, 다른 트로이카 여배우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그녀만의 이미지였다. 능수능란하게 남자를 조종하는 영화 속 ‘명희’는 어쩌면 1980년대의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여성상을 거칠게나마 예단할 수 있는 단초였을지도 모른다.
-‘바람불어 좋은 날’은 어떻게 출연하게 된 건가요.
“제가 이장호 감독님을 비롯한 유명 감독들과는 작품을 많이 안 했어요. 그것도 일종의 고집인데, 만약 그런 분들 영화를 쫓아다녔다면 더 큰 흥행배우가 됐겠죠. 쉽게 말해 스스로 너무 잘났다고 생각한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그렇게 할 것 없이 즐길 수 있을 만큼만 하자는 식이었어요. 아웃사이더 성향이죠. 그러고 있는데 하루는 이장호 감독님이 ‘바람불어 좋은 날’을 하자고 그러더라고요. 일종의 특별출연 개념이었죠. ‘아, 나도 이제 연기의 틀을 바꿔야 할 시기가 됐나보다’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뭔가 소리지르며 표현하고 싶은 부분도 있었고. 그렇게 해서 출연하게 됐어요.
애착이 많이 가는 영화예요. 의상도 특별히 제작해 가며 촬영했거든요. 그때는 의상협찬 같은 게 없었잖아요. 출연료가 대부분 옷값으로 들어갔죠. 촬영 내내 묘한 자부심이 있었죠. 이 작품이 영화사적으로나 유지인 개인에게나 한 획을 긋는 계기가 되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어요.
어떤 사람들은 거의 엑스트라나 다름없는 역할 아니냐고도 했지만 저에게는 달랐어요. 예전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악역에 가까운 역이었으니까요. ‘요건 몰랐지’ 하는 즐거움이 있었죠. 그런 거라도 없으면 이전과는 다른 시도를 하기가 참 힘들어요. 그랬다면 참 지리멸렬하게 살았을 거예요.”
-저도 이 작품은 유지인씨 연기에서 꼭 언급할 만한 작품이라고 봐요. 이런 영화를 좀더 많이 했다면 좋았겠다 싶고요. 배우의 고정 이미지를 깨는 것도 감독의 역량이죠. 이장호 감독은 그런 힘이 있는 감독이거든요. 그런가 하면 이 작품에서 안성기씨와 처음 함께 작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안성기씨는 정말 열심히 사는 배우죠. 그렇게 열심히 하는 배우는 처음 봤어요. 수줍음도 많고요. 언젠가 공옥진 선생님이 절대 표 사지 말고 그냥 오라고 하셔서 공연에 간 적이 있는데, 막상 극장 앞에 가서는 서로 눈치만 보고 뒤로 숨는 거예요. ‘나 배우 안성기인데 공 선생님이 그냥 들어오라고 하셨다’는 말을 못 하는 거죠. 남들처럼 어디 가서 배우입네 나서는 일을 딱 질색하는 사람이에요. 국민배우답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