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呑虛(탄허)스님의 말씀-1 *
요임금이 허유에게 정권을 양여할 때 말하기를
"선생님의 도덕이 日月이라면 나의 도덕은 횃불이요,
선생님의 도덕이 때맞추어 내리는 비라면
나의 도덕은 가뭄에 물대는 것에 불가합니다.
선생님이 정치한다면 천하가 잘 다스려질 텐데
내가 오히려 이 천하를 맡아가지고 있으니 스스로
보기에 부끄럽습니다.
請(청)컨데 천하의 정권을 양여합니다"하니까
허유가 답하는 말씀이
"자네가 천하를 다스리매 천하가 이미 잘 다스려졌는데
내가 오히려 자네를 대신한다면
내가 장차 명예를 위해서 이겠는가.
명예란 것은 實相(실상)에서 일어나는
客(객; 虛妄(허망)한 것)이니
내가 장차 객을 위하겠는가.
뱁새가 깊은 수풀에 깃들일 때에
나무 한 가지만 있으면 만족하고
산쥐가 河水(하수)의 물을 마시는데
그 배 하나 채우면 그만이다.
돌아가 쉴지어다.
군이여,나는 천하를 일삼는 사람이 아니니
푸줏간 주인이 푸줏간을 잘못 다스린다해서
祝文(축문)을 읽는 관리가
축문을 읽다말고 젯상을 넘어서
푸줏간 주인의 일을 대신해줄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한 후 허유는
穎川水(영천수)에 가서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고
귀를 씻었습니다.
때마침 허유의 친구인 소부가
소에게 물을 먹이려고 영천수에 왔다가
허유의 귀씻는 것을 보고 이유를 물었습니다.
허유의 말이 요임금으로부터
천하를 맡아달라는 더러운 소리를 들어
귀를 씻는다고 하니,
소부도 소에게 이 더러운 물을 먹일 수 없다고
소를 끌고 岐山(기산)너머로 가버렸습니다'[史記(사기)].
"嗜欲(기욕)이 深者(심자)는 天機賤(천기천)"
[莊子(장자)]이란 말과 같이
嗜欲(기욕)이 많은 사람은 天理(천리)와는 먼 것이고
嗜欲(기욕)이 적은 사람은 道(도)에 가까운 것입니다.
孔子(공자)의 말씀에
"소년시절엔 血氣(혈기)가 未定(미정)하므로
色(색; 여자)을 경계해야 하고,
長成(장성)해서는 혈기가 强壯(강장)하므로
싸움을 경계해야 하며
늘그막엔 혈기가 이미 쇠했기 때문에
貪心(탐심)을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貪心(탐심)은 嗜欲(기욕)을 말하는 것입니다.
古人(고인)의 詩(시)에
"人情(인정)을 閱盡頭全白(열진두전백)이요
世味嘗來齒已寒(세미상래치이한)" 이라는 것이 있는데,
온갖 人情(인정)을 다 지내고 보니 머리는 허옇게 되었고,
세상만사를 다 겪고보니 이가 시리게 되었다는 뜻이지요.
嗜欲(기욕)과 樂欲(낙욕)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嗜欲(기욕)은 감정에서 일어나지만
樂欲(낙욕)은 理智(이지)에 속하므로
嗜欲(기욕)이 없다해서 樂欲性(낙욕성)까지 없다면
一切聖人(일체성인)들이 꾸짖는 것입니다.
樂欲性(낙욕성)은 發願(발원)이나 立志(입지)를 의미합니다.
세상욕심이 희박한 이는 좋은 사람들이지만
樂欲性(낙욕성)이 없는 사람은 천치바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양자를 구별해야 합니다.
皇極經世書(황극경세서)에
五種 事業(오종 사업)의 種別(종별)을 들어
'寧爲鷄口(영위계구)이언정
無爲牛後(무위우후)'
(작아도 닭의 입이 되는 것이 낫지,
커다란 소궁둥이가 되지 말라는 뜻) 라는 말이 있듯이
東洋思想(동양사상)의 견지에서 볼 때
종교는 종교를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主體性(주체성)인,
다시 말하면 우주와 인생의 핵심인
그 밑바탕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종교의 本旨(본지)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기타의 천당이니 지옥이니 하는 문제는
'유치원 학생을 지도하는 것'과 같은 방법입니다.
우주의 주체가 무엇인지 세상사람들은 모릅니다.
우주의 주체는 우주가 아닙니다.
우주의 주체는 우주 아닌 자입니다.
즉 우리의 정신입니다.
우리의 정신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時空(시공)이 끊어진 자리이지요.
왜 시공이 끊어졌느냐?
과거의 생각은 이미 滅(멸)했고
미래의 생각은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의 생각은 머무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공이 끊어진 이 정신(마음)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지요.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간밤 꿈에 一點(일점)도 안되는
공간 위에 누워있는 肉身(육신)이
10분도 안 되는 시간 속에서 수만 리를 거닐면서
70~80년을 살았습니다.
꿈속에서 보는 우주가 현실과 다른 것이겠습니까?
여전히 산은 높고 물은 깊습니다.
불은 뜨겁고 물은 찹니다.
따라서 현실에서 보는 우주가 眞(진)이라면
꿈속에서 보는 우주도 眞(진)일 것이고
꿈속에서 보는 우주가 헛것이라면,
현실에서 보는 우주도 헛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꿈속에서 보는 우주만을 眞(진)으로 여기기 때문에
1백 년도 못 사는 몸으로 한없는 妄想(망상)을 좇아
내일 공동묘지에 갈지라도
오늘 富貴功名(부귀공명)을 한다면
집착하고 매달리는 것이 凡夫(범부)가 아닙니까.
꿈에 관련된 古事(고사)를 비유하여 말씀드려 보지요.
1천 5백년전 漢(한) 帝(훤제) 때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
국내에서 해몽을 제일 잘 하는 자를 불러
시험을 본 일이 있었습니다.
황제가 꿈을 날조하여 말하기를
"내가 간밤 꿈에 궁전 처마끝의 기왓장이
鸞鳥(난조=鳳凰(봉황)의 별명)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는데 무슨 꿈인가"고 했습니다.
해몽자의 답변이
"큰일났습니다, 폐하. 궁전에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문밖에서 아뢰는 말이
"폐하, 궁중에서 싸우다 한 놈이 죽었습니다"고 했습니다.
황제가 하도 기특하여
"얘야, 나는 네가 하도 해몽을 잘한다고 하기에
시험삼아 꿈을 하나 날조해 말했는데
어찌 그렇게 잘 맞히느냐"고 물었습니다.
해몽자가 대답하기를
'夢是神遊(몽시신유)라고 했습니다.
즉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꿈이기 때문에
폐하가 한 생각을 일으켰을 때 그것이 벌써 하나의
꿈이 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한 생각이 일어남으로써 꿈이 있고
꿈이 있으므로 우주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聖人(성인)은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面目(면목)을
각파했기 때문에 꿈도 우주도 없는
別天地(별천지= 時空(시공)이 끊어진 세계)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를 기독교에서는 '聖父(성부)',
儒敎(유교)에서는 '中(중)',
불교에서는 '佛(불)'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聖人(성인)은 우리의 현실을
간밤 꿈으로 覺破(각파)한 것입니다.
佛(불)이란 覺(각)이란 말인데,
覺(각)이란 것은 현실우주가 간밤 꿈으로 보아
환상으로 있는 것이요,
實有(실유)가 아니라은 것을 철저하게 보아버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聖人(성인)은
우주라는 苦海(고해)를 완전히 건넌 것입니다.
중생은 苦海(고해)를 건너지 못했기 때문에
此岸(차안)이라 하는 동시에 中流(중류)에서 허덕이고 있고,
聖人(성인)은 완전히 건넜기 때문에 彼岸(피안)이라고 합니다.
苦海(고해)의 씨앗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한 생각입니다.
우리의 한 생각을 타파하는 것은 苦海(고해)의 씨앗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한 생각의 씨앗을 타파하는 방법은
道(도)를 보지 않고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凡夫(범부)는 일초 일분도 생각이 머물지 않기 때문에
중생이라 하는 것이요,
哲人(철인)은 道(도)자리를 보아
원래 생각이 나는 것이 없기 때문에
聖者(성자) 또는 覺者(각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파리가 곳곳에 가서 붙지만
불꽃 위에는 붙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중생의 망상이 어디든지 다 가서 붙지만
道(도)자리에는 붙지 못하는 것입니다.
道(도)자리를 보면 苦(고)의 씨앗은
송두리째 빠지고 마는 것이지요.
그래서 道(도)를 닦는 것입니다.
우리가 철학을 연구하느니, 종교를 믿느니 하는 것은
철학이나 종교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어떻게 이 苦海(고해)를 벗어나느냐 하는
主觀的(주관적)인 견지에서 연구하고 믿어보는 것입니다.
철학과 종교를 떠나서 이 고해를 벗어날 수 있다면
철학과 종교는 하나의 갈포
(옛날 제사지낼 때 쓰는 위패인데
짚으로 개모양을 만들어 쓰고 내버리고 마는 것)가
되고 말 것입니다.
서양철학을 대표하는 독일의 칸트도 철학적으로
思索[사색; 여러 갈래로 찾는 것]
침묵[三昧(삼매)과 같은 物我兩忘(물아양망)의 경지]
冥想[명상; 三昧(삼매) 속에서 홀연히 알아지는 것]을 거쳐
우주 萬有(만유)의 認識主體(인식주체)를
純粹理性(순수이성)이라고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칸트철학의 결론은 認識境界(인식경계)와
認識主體(인식주체)의 절대적인 相反性(상반성)이
一體(일체)위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양학의 입장에서 볼 때
칸트의 최종적인 결론은 미흡한 것입니다.
우주만유의 모체인 순수이성을 파악할 때에
우주만유가 순수이성化되어야 하는데
칸트는 그런 결론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동양학적인 견지에서는 우주만유의 모체를 파악할 때에
그 모체에서 일어난 우주만유의 모체화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一本萬殊(일본만수) 萬殊一本(만수일본)'
(한 근본이 만가지 다른 것이 되고,
만가지 다른 것이 한 근본이다)이라 하며,
'物物(물물)이 名具一太極(명구일태극)
統體一太極(통체일태극)'
(우주만물 하나하나가 각각
太極(태극; 우주의 핵심체)의 진리를 갖추었고
우주전체를 통합해보면
太極(태극)의 진리일 따름인 것이다) 이라고 했습니다.
동양화의 三敎聖人(삼교성인)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거나
자기의 인품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만 사람 사람의 마음 속에 본래 갖추어 있는
우주의 핵심체인 '太極(태극)의 眞理(時空이 끊어진 자리)를
소개해 주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천당 지옥의 유치원 학설'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천당에 가느니, 지옥에 가느니 하는 문제는
因果法則(인과법칙)의 사실이지만
三敎 聖人(삼교 성인)이 인류에게 가르친 교리는
이에 국한된 것이 아니지요.
오직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를 깨달아
이 세계가 그대로 極樂化(극락화)되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聖人(성인)의 가르침이
어떤 종교를 믿으라는 것이겠습니까?
오직 자기가 자기 주체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는다면 자기의 주체를 부정하여
뿌리가 없는 나무와 같은 것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은 물질을 第一義(제일의)로 삼고,
정신을 第二義(제이의)로 삼는 데서
삶의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정신을 第一義(제일의)로 삼고,
물질을 第二義(제이의)로 삼아
정신과 물질을 조화시키는 데서
좀 더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물질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권력자나 갑부는 고통이 없어야 하겠는데
그들 역시 불만을 갖게 되는 것은
정신적인 양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현미경이 아니면 微菌(미균)을 볼 수 없고
망원경이 아니면 원거리를 볼 수 없듯,
인간의 罪惡相(죄악상)은
聖人(성인)의 經典(경전)을 통하지 않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聖人(성인)의 경전을 보아 자기의 주체성을 믿고
거기에 따라서 생활해야 할 것입니다.
苦海 衆生(고해 중생)을 건지기 위해
上中下(상중하)의 그물을 쳐 놓은 것이
불교의 교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上根大智衆生(상근대지중생)을 건지기 위해서는
고래를 잡는 것과 같은 그물,
中根機(중근기)를 건지기 위해서는
대구나 명태를 접는 것과 같은 그물,
下根機(하근기)를 위해서는
멸치나 새우를 잡는 것같은 그물을 쳐서
한 중생도 남음없이 다 濟度(제도)하려는 것이
佛陀(불타)의 願力(원력)입니다.
上根(상근)은 문자를 의지하지 않고
바로 參禪(참선)을 통해 道(도)에 들어가고,
中根(중근)은 교리적으로 문자에 의지하여
一心 三觀(일심 삼관), 三觀 一心(삼관 일심)의 도리인
觀法(관법)으로 道(도)에 들어가며,
下根(하근)은 참선에도 교리에도 해당되지 못하므로
'관세음보살' '석가모니불'등의 名號(명호)를 외거나
기독교의 주기도문과 같은 呪力(주력)으로
道(도)에 들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전문가처럼 入山修道(입산수도)를 해야만
道(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根機(근기)에 따라
上中下(상중하) 어느 門戶(문호)든지 알맞게 택하여
隨時隨處(수시수처)에서 공부를 하다보면
밤새도록 가는 길에 해돋을 때가 오는 것이지요.
비록 道(도)에 들어가는 문이
上中下(상중하)의 차별이 있다하더라도
들어가고 보면 한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古人(고인)의 말씀에
'發心(발심)은 有先後(유선후)어니와
悟道(오도)는 無先後(무선후)'라
즉, 發心(발심)은 선후가 있을 지라도
道(도)를 깨닫는 데에는 앞뒤가 없다 했습니다.(계속)
♧편집 : 시나브로 핀 연꽃/詩人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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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