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김상용
너는 정밀(靜謐)의 등촉(燈燭)
신부 없는 동방(洞房)에 잠그리라.
부러워하는 이도 없을 너를
상징해 왜 내 맘을 빚었던지
헛고대의 밤이 가면
설운 새 아침
가만히 네 불꽃은 꺼진다.
===[한국 대표 명시1, 빛샘]===
김상용(金尙鎔, 1902년 9월 28일 ~ 1951년 6월 22일)은 미 군정 시대 초선 강원도 도지사 직책을 잠시 지낸,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시인 겸 소설가이자 번역문학가이다.
아호는 월파(月坡)이다. 하여 성씨와 아호를 합친 이름인 김월파(金月坡)라고도 불리었다.
경기도 연천군 남면 왕림리(현재의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왕림리)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경기도 양주군 남면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춘천공립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3·1 운동과 관련하여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였다. 1921년에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이듬해에 일본으로 유학하여 릿쿄 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1927년 릿쿄 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학사 학위 취득했고, 1928년에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근무했다.
1930년에 연천에서 서울 성북동(당시 일제 강점기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으로 이사를 갔다. 그 해에 《동아일보》에 〈무상〉, 〈그러나 거문고의 줄은 없고나〉 등을 발표하여 등단했고, 이후 1931년 에드거 앨런 포의 〈애너벨 리〉를 비롯하여 찰스 램, 존 키츠 등의 영미 작가들의 번역 작품을 내놓았고, 꾸준히 시를 발표하면서 활동했다. 그 외에도 1938년에 발표한 수필 〈우부우화〉를 비롯하여 많은 수필을 썼다.
김상용의 시에는 동양적이고 관조적인 허무의 정서가 깔려 있으나 낙관적인 방식으로 어둡지 않게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1934년 《문학》에 발표한 〈남으로 창을 내겠소〉와 이 시의 마지막 연 "왜 사냐건 웃지요"가 유명하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교육/학술 부문에 선정되었다. 1943년 《매일신보》에 발표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등 총 3편의 친일 작품이 밝혀져 있다.
1943년에 일제 탄압으로 영문학 강의가 폐지되었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직을 사임했다.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 하에서 강원도 도지사로도 임명되었으나 며칠만에 사임하고 이화여대의 교수, 학무처장이 되었고, 1946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3년 동안 보스턴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연구하고 1949년 미국 보스턴 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문학석사 학위하였다. 1950년에 풍자적인 수필집 《무하선생 방랑기》를 발표하였다. 한국 전쟁 중 부산으로 피난했다가 1951년 6월 22일에 식중독으로 병사했다.
부산에서 병사하고 1년이 지난 후에 망우산에 묻혔다. 1956년 6월 24일에 세워진 묘비에는 "檀紀四二三五年 八月 十七日 京畿道 漣川서 나셔서, 四二八四年 六月 二十二日 釜山서 돌아가셨고, 四二八九年 二月 三十日 이 자리에 옮겨 뫼시다."라고 써 있다.
누이동생이 시조시인 김오남이다.
<위키백과>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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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내 고향에서는 반딧불이를 흔하게 보았습니다.
여러 마리를 잡아서 병에 담아 등잔불 대신으로 사용하여 보았으나
그다지 밝지는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너무 흔해서 개똥벌레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반딧불이가 청전지역에서만 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향을 떠난 후 반딧불이를 본 것은 최전방에서 군복무할 때였습니다.
한밤에 산 중턱에서 간첩이나 무장 공비가 불빛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을 본 보초병이 신고하였고 전방에 갑자기 비상이 걸렸습니다.
M16 기관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불빛을 향해서 조심스럽게 전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딧불이었습니다.
이후 저는 반딧불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어두워야 더욱 밝게 빛나는 반딧불.
환경이 나를 빛나게도 하고 빛을 앗아가게도 한다는 것을 배우고 갑니다.
시를 사랑하고 낭송하시는 여러분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를 일입니다.
=적토마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