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순환사회를 위한 교육
윤영소(전 산마을고교장)
지역이 정치경제, 문화예술, 교육, 생태환경 등의 여러 면에서 대도시에 종속되지 않고, 적정 수준의 자립과 독자성이 확보되어야 도시와 농업농촌이 건강한 균형관계, 상호보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지역이 그런 자립과 독자성을 갖추기가 어렵다. 모든 정치권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있고, 총통화량의 80%가 수도권에 몰려있다. 교육이라고 해서 별 다를 바 없는 상황이다. 지역자치가 실시되고 있지만, 중앙정부에 종속적이거나 의존적이다. 경제적 자립은 꿈도 꾸지 못하는 실정이다. 기초자치단체로 내려오면 그 양상은 더욱 심각하다. 인구 겨우 2만을 유지하는 군들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순환사회를 상정한다면, 그것은 기존의 정치경제 관념과는 다른 모형이 그려져야 할 것이다. 생태적으로 건강하고, 소박하면서도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고, 공동체로서의 상부상조가 유지되는 그런 방향이 되어야 할 것이고, 교육은 마땅히 그런 순환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지역의 공교육 현실과 개선
현재 공교육 체제는 근대의 모형(공장형, 감옥형)에서 별 진전이 없는데다, 국가중심/교사중심/입시중심이라는 불치병 수준의 문제를 안고 있다. 지역사회를 위한 교육내용도 전무하다시피 하고, 그나마 길러진 인재는 다 대도시에 흡수되고 있다. 학교의 지역화는 요원한 실정이다. 민간단체의 역할도 그다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며, 교사중심의 운동단체 또한 국가중심의 시스템에 대항하는 차원이지, 지역을 중심에 두고 교육개혁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공교육 위주의 지역교육협의회 등을 가동하는 곳들이 있지만, 역시 성과가 드물고, 대부분 명문대 진학을 지원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대안학교에 거는 기대
90년대 중반 이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대안교육의 확대는 공교육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여러 고무적인 시도와 결과를 보이고 있다. 입시 위주 탈피, 개인의 자유와 행복, 자연친화적이고 공동체적 생활 등에서는 인정을 받고 있으나, 지역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학교와 교육의 지역화에 모델이 될 만한 학교는 거의 없다. 대안교육을 표방하지는 않았으나 기독교/유기농업/공동체의 가치를 바탕으로 교육활동을 하고 그 졸업생들이 지역에서 긍정적 역할을 해내고 있는 홍성의 풀무학교가 오히려 지역사회의 입장에서는 더 대안적인 학교로 평가받고 있다. 강화의 산마을고등학교, 제천의 간디학교 등이 지역사회에 협력하여 학교의 지역화를 시도하고 있으나, 풀무처럼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비록 농업농촌이 아닌 대도시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다양한 상상력과 창조성이 발휘되고 있는 성미산학교도 주목의 대상이다. 학교를 중심으로 마을극장, 협동조합, 사회적기업, 마을카페 등 대도시 속에서도 좋은 동네를 상상하고 기획하고 실천하는 시도들이 일정한 성과를 보이고 있고, 그런 성과를 바탕으로 더 많은 시도와 기획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하고 연구할 만한 곳이다.
□지역사회를 배움터로 만들기
공교육의 지역사회를 위한 노력은 더디고, 대안교육진영에서는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노력은 하고 있으나 규모와 영향력의 면에서는 아직은 미흡한 수준이다. 공교육 개선, 대안교육의 활성화와 동시에 시도할 만한 전략은 지역사회 자체가 학교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학교 중심, 그것도 산업화 이후 대규모 공장형태와 다를 바 없는 모형에 집착하지 않고, 지역사회의 다양한 작업장(일터)이 곧 학교가 되고 교실이 되는 전략이다. 이는 젊은이들의 일자리로 곧 연결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모형을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대안학교에 대체로 천연염색, 도자기, 유기농업, 목공, 건축, 음악, 미술 등의 전인적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는데, 지역사회에 있는 그런 작업장을 하나의 학교(배움터)로 묶어내는 방식이다.
한 인간으로서의 성장과 성숙, 지역사회에 필요한 일꾼 양성 등이 기존의 학교체제 내에서만 길러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존의 학교에서는 오히려 그런 역할을 포기하고 있다. 뉴욕의 매트스쿨, 서울의 하자센터 등이 사례가 될 만하다. 일본의 스즈카에 있는 ‘아즈 온 커뮤니티( As one community)’ 역시 정규학교는 아니지만, 자체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 연찬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농장과 건축회사 등에서 젊은이들이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야마기시즘 공동체에서 생활했던 이들이 지역 사회 내에서의 커뮤니티 건설을 목표로 10년 가까이 실천을 하고 있다. 강화의 산마을학교 등이 교류하고 있는 곳으로, 제도권 교육체제를 벗어난 ‘커뮤니티 배움터와 일터’로 충분히 검토할 만한 사례가 아닌가 한다.
독일 슈트트가르트 교외에 유겐트팜(청소년농장)이라는 곳이 있다. 강아지, 고양이, 염소, 말 등 크고 작은 동물부터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는 텃밭, 카페테리아, 목공놀이터 등 꽤 넓은 공간에 다양한 놀이와 배움 공간이 있다. 2007년 방문했을 때 인상적이었던 것은 안내를 해 준 독일 친구가 어렸을 때 놀면서 못과 망치를 이용해 만들었던 나무 조형물이 그대로 있고, 그 조형물을 그대로 연결시켜 이제는 자신의 아들이 건축 놀이를 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곳은 청소년들의 놀이, 배움의 공간이자 지역민들의 일터였다. 독일을 비롯 서구는 이미 근대교육체제의 산물인 공장형 학교의 유연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오전에 일과 수업이 끝나기에 급식을 하지 않고, 청소년들이 지역사회에 나가서 점심도 먹고, 여러 활동을 하면서 지역사회의 활기가 유지된다.
일본 나고야의 왓빠노까이(우리말로 ‘철부지 모임’)라는 장애인공동체가 있다. 그룹홈을 하고 있다. 정상인 1명과 장애인 3명이 함께 살고, 빵공장, 도시락회사 등에서 모든 이들이 같이 일한다. 중증장애인도 할 수 있는 만큼 일을 한다. 일을 못해도 격리하지 않고 현장에서 같이 지낸다. 그리고 모든 수익은 똑같이 분배한다. 산마을 학생들과 함께 방문해서, 정기적인 교류를 시도했지만, 여건이 되질 않았다. 사회복지분야에 이만큰 훌륭한 배움터가 있을까 싶다.
파주에 참 재밌는 회사가 있다. 비록 첨단 IT 분야의 회사이지만, 서울에 있지 않고서도 큰 수익을 내고 있으며, 일터 자체가 너무 재밌고 창조적 상상력과 열정이 넘친다. 사원을 채용할 때 학력을 묻지 않고 긴 글의 에세이를 치른다. 인생의 철학과 가치를 묻는다. 수익이 괜찮으니 임금 수준도 높다. 이런 좋은 일터가 지역에 있다면, 젊은이들이 당연히 몰릴 것 아닌가. 최근 신입사원 1명을 채용할 때 지원자가 2,400명이 몰렸다고 한다.
위에 열거한 사례와 유사한 커뮤니티와 일터, 단체 등이 지역에 있다. 물론 기반이 잡히기 전인 경우가 많겠지만, 이미 우리 지역에 산재해 있는 교육적 자원을 체계화 시키고 일정한 생산성을 확보한다면, 지역이 살고 새로운 교육의 장이 되지 않을까 싶다. 기존의 학교와 교육기관들이 지역에 눈을 돌리고, 지역의 고민을 함께 풀어가는 공간이 되도록 유도해야겠지만 동시에 새로운 교육적 상상력을 펼치는 것이 더 건강하고 결과도 더 낫지 않을까 생각된다.
□더 과감한 상상과 더 정확한 질문하기
지역사회를 위해, 그것도 개발과 자본 유치가 아닌, 생태적으로 건강한 순환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지금 현재의 제도권 교육과 대안적 교육운동이 어떤 역할을 수 있을까, 또 그런 긍정적 사례들이 주변에 있는 것일까 물으면 긍정적 답이 쉽게 나오질 않는다.
지역의 공간 범위도 쉽지 않은 문제로 보인다. 큰 나라와 다르게 우리는 면적은 작지만 물길 산길 따라 지역 범위가 설정된다. 그러면서 급속하게 진행된 근대화 산업화로 인해 작은 마을 단위 공동체는 해체 되었다. 정치경제, 문화예술, 교육 등의 독자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 지자체가 없다. 중앙과 대도시에 종속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역의 자립성, 독자성을 확보하면서도 고립되지 않는 노력은 또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도 고민이다. 어떤 방향의 연대와 협력이 필요한 것일까? 지자체 중에서 개발경제를 넘어선 지역의 전망을 제시한 곳이 얼마나 될까? 순환사회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생태적으로 건강한 지역을 위한 발전을 수용하는 행정기관과 지역민들은 얼마나 될까? 혹시 이 운동은 또 몇 사람들의 이상적 슬로건으로 그치고 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압축적 근대화에 비교적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도 근대민족국가수립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탈근대를 모색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공교육 정상화를 이룩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국가중심의 교육을 탈피하려는 운동을 하고 있다. 민주주의도 위험에 처해있다. 정확하게 말해 우리는 민주정부 10년의 경험만 있을 뿐이다. 불평등구조는 쉽게 개선되고 있지 않다. 교육문제도 결국은 여기서 비롯된다. 서구의 경우 대졸자와 고졸자의 임금격차가 1.2배 이내이다. 우리도 그런 수준에 진입하고 사회적 차별까지 없어진다면, 교육문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완화되고 학교의 유연화 작업도 의미 있는 진척을 할 것이다. 일본의 경우, 국가 단위의 개혁은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일본은 지역에 다양한 생협과 커뮤니티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일본 총선은 겨우 40% 수준의 투표율을 보인다. 혹시 우리도 그 전 단계에 진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국가단위의 삶에서 벗어나, 마을단위의 삶이 바람직하지만, 국가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지역순환사회를 위한 교육을 공교육이나 대안교육에 기대하는 것보다는 지역사회자체를 배움터로 기획하는 작업이 상당히 매력적일 것이다. 특히 제도권 교육은 더 많은 개혁이 요구되는 부분이기에 대안적 농업농촌을 위한 유형무형의 지원을 바라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대안교육기관도 크게 다르지 않은 형편이다. 공교육의 안티테제로서의 위상은 확보하고 있으나, 지역 속에 밀착된 수준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교육현장을 외면할 이유는 없기에, 지역을 위한 교육기관으로서의 거듭나기는 지속적으로 주문하고 요구할 일이나, 거기에 전적으로 매달릴 이유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더 과감한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근대의 교육시스템에서 벗어나는 노력이 지역에서 진행되면 좋겠다. ‘학교제도’는 인류문명의 발달과정을 볼 때 가장 뒤떨어진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교육에 대한 기획을 국가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그 기획의 주체가 지역이 되는 쪽으로 방향 선회해야 다양한 시도가 가능하다. 농업농촌을 바탕으로 하는 작업장이 곧 학교가 되는 것이고, 일터가 된다. 젊은이들이 바라는 다양한 문화예술 공간도 배움터가 될 수 있고, 외국의 대안적 커뮤니티와의 연대와 협력도 젊은이들을 유인한 방책이 된다. 자격증을 국가가 발행하고 그 소지자들만이 교육을 전담하는 체제는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100년 조금 넘었을 뿐이고, 그 유효기간도 끝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