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다리(籠橋)
一橋特鎭九山東(일교특진구산동)-하나의 큰 다리가 구산의 동쪽을 누르니
虎踞龍盤氣勢同(호거용반기세동)-호랑이가 버티고 용이 서린 것 같도다.
幾千年過聲各重卄八間(기천년과성각중입팔간)-천년을 지나 떨쳐진 명성 스물여덟 칸에
連造化通(연조화통)-이어진 조화를 통달하였는데,
流波長咽英雄恨(류파장인영웅한)-흐르는 물결이 긴 만큼 영웅의 한을 먹음었으니,
行路皆歎壯士功(행로개탄장사공)-다니는 길마다 장사들의 공을 탄식하여도
欲慰將軍無處弔(욕위장군무처조)-장군의 한을 달래려하나 조문 할 곳이 없으니,
江天漠匚夕陽紅(강천막방석양홍)-석양에 곱게 물든 하늘과 강물만 막막하구나 !
임석동(林錫東)
다리 관절을 튼튼하게 보호해 주소서 ! 농다리(籠橋) 밟고 빈다
이수광(李晬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정월 대보름날 밤에 다리를 밟으면서
다리 병을 앓지 않게 비는 것과 같이 필자도 지진이 와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튼튼한 “농다리(籠橋)”위를 걸으면서
“다리 관절을 튼튼하게 보호해 주소서 !”라고 빌었다.
충북 진천(鎭川)에 있는 1천년된 농다리(籠橋)를 한번 보고 싶어서 이번에 갔었다.
사진에서 본바와 같이 상당히 특별한 돌다리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시멘트나 철근이 없었기 때문에 민간 백성들의 다리는 대개
나무나 흙 돌로서 만들었다고 한다.
나무나 흙다리는 세월 속에 훼손되어서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돌다리는 남아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경복궁의 영제교(永濟橋), 창경궁의 옥천교(玉川橋), 창덕궁의 금천교(錦川橋) 등으로 왕궁의 격에 맞게 조각이나 디자인이 멋을 부리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민간의 돌다리로는 서울의 수표교(水標橋), 충남 옥천의 청석교(靑石橋), 영산(靈山)의 만년교(萬年橋), 벌교의 홍교(虹橋), 그리고 진천(鎭川)의 농다리(籠橋)다.
필자가 답사한 돌다리 중에서 진천의 농다리(籠橋)가 규모도 제일 크고 축조방식도
특이하고 역사도 천년 이상으로 오래 되었다.
이 글을 통하여 장충단 공원에 있는 수표교(水標橋)를 청계천 제자리로 옮길 것을 촉구한다.
눈여겨 볼 것은 “농다리(籠橋)” 라는 “롱(籠)” 글자가
*롱(籠)-새장 롱
*롱(籠)-장농 롱
*롱(籠)-종대래끼 롱(대바구니, 짚으로만든 바구니)
등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충청도의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지명”에서는
“농(籠) 궤짝을 쌓아 올리듯”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만든 다리이기 때문에
한자 지명으로 “장농 롱(籠)”자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 “농다리(籠橋)”를 보면 차곡차곡 쌓은 것이 아니라 마치 제주도의
돌담처럼 약간은 엉성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도 마치 내진설계(耐震設計) 건축물처럼 돌 하나하나가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잘 맞물려있고 위의 상판은 대단히 큰 석판(石板)이 덮여있어 홍수가 질 때에
흔들리는 느낌을 주면서도 아직 한 번도 떠내려간 적이 없다고 한다.
한 향토사학자는 농다리(籠橋)가 지네다리로 잘못 알려졌는데 이는 단지 돌을 쌓은
형태를 지칭한 것으로 진천군 초평호(草坪湖)의 신수문(新水門)이 마치 룡(龍)이
승천하는 형상이고 또 진천읍 상계리에서 신라 김유신 장군이 태어난 곳이고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에 농다리(籠橋) “용다리(龍橋)”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보면 궤짝을 쌓은 것보다 지네가 물을 건너는 형상에 가깝다.
지네를 한의학에서는 오공(蜈蚣)이라 하는데 “지네다리(蜈蚣橋)”라해도 좋을 것 같다.
“농다리(籠橋)”가 만들어진 유래에 대하여는
진천군(鎭川郡) 역사를 기록한 읍지(邑誌)인 “상산지(常山誌)”와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賸覽)”에서는
농다리(籠橋)의 축조 내용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籠矯在郡南一里洗錦川加里川合流之屈峙前橋也距今九百餘年前
卽麗朝初葉時代屈峙林氏先祖傳稱林將軍者刱設而以紫石配
陰陽而建築上應二十八宿爲二十八間水門每間各架一石延袤
一弓許其搆造頗虛踈盛潦漲溢時橋上之流幾至數丈怒濤驚浪春撞其間
曾無一石移轉然歲月旣久四間埋沒現餘二十四間顧其架設則不過亂
石之疊積而橫在險灘能支千年之久世稱神異宜矣.”
풀이
농다리(籠矯)는 진천읍에서 남쪽 방향 십리지점에 위치한 세금천과 가리천이 합류하는 곳,
굴티(屈峙) 앞에 있는 다리이다. 지금부터 900여 년 전 고려 초엽 시대에
굴티(屈峙) 임씨(林氏)의 선조(先祖)인 임장군(林將軍)이 음양(陰陽)을 배합하여
자석(紫石 자주빛 돌)으로 축조(築造)하였는데 상응(上應) 28숙(宿)에 따라 수문(水門) 28간(間)으로 축조(築造)하고 각 칸마다 1개의 돌로 이어 하나의 활(弓)이 뻗쳐 있는 것 같다. 그 구조가 자못 허술해서 장마 물이 넘칠 때면 다리 위로 흘러 거의 몇 길에 이르렀고,
노(怒)한 파도와 노(怒)한 물결이 그 사이에서 소리를 내었다.
일찍이 하나의 돌도 달아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4칸이 매몰되어 현재는 24칸이 있다. 그 설치 한 것을 돌아본즉 흩어져 있는 돌을 포개어 쌓은 것에 불과한데 험한 여울에 가로질러 있으면서 능히 천년(千年)의 오랜 시간을 지탱하였으니 세상에서 신기하다고 일컫는 것이 당연하다.】
▲1981년 8월 5일 경향신문의 농다리(籠橋) 기사
단국대학교 정영호(鄭永鎬)교수는 신라 진평왕(眞平王) 51년에 김유신 장군 35세때
부친인 진천군 태수 김서현(金舒玄) 장군의 부장(副將)으로 5만여 대군을 지취하여
도당산성(都堂山城)에서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향해 진격했다는 기록이 있고
증평(曾坪)으로 가는 북벌(北伐)의 군사요로였을 뿐 아니라 마침 8월 우기(雨期)였기
때문에 불어난 물을 건너기 위해 농다리를 놓았을 것이라고 고증한다.
일설에의하면 대몽항쟁(對蒙抗爭)의 공신인 임연(林衍)장군이 고려 천지를 주름잡았을 때 이 다리를 놓았을 것이라고도 한다,
▲1992년 12월 12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신라 말 또는 고려초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충북 진천의 농교(籠橋)는
원시와 현대적 다리의 중간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잠수교(潛水橋)의 기능을 하고 있다 고 하였다
농다리에는 전설도 전한다.
임(林) 장군이 몹시 추운 겨울 어느 날 세금천을 건너려는 한 아낙을 발견했다.
그 아낙은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친정으로 가는 길이었다.
겨울에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임(林) 장군은 여인의 딱한 모습과 지극한 효심에 탄복해 말을 타고 돌을 날라
다리를 만들었다.
이때 말이 너무 힘에 겨워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농다리(籠橋)를 답사하면서 다시 한 번
석굴암 다보탑 석가탑등 그리고 영산포의 고인돌 수많은 돌들에 역사를 기록한 문화재,
추사 김정희가 각고의 노력 끝에 해석한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등
우리나라의 돌의 문화유적은 한민족이 유구한 역사속의 주인공임을 말해준다.
끝으로 김량경(金良鏡)의 돌의 시로서 농다리(籠橋)의 답사를 맺는다.
돌의 견고함은 뺏을 수 없네(石不可奪堅)
二儀初判後(이의초판후)-음양(陰陽)이 처음 나누어진 뒤로
物種萬紛然(물종만분연)-만물의 종류 한없이 많아라
有石中含質(유석중함질)-돌은 속에 바탕을 지녀
無人外奪堅(무인외탈견)-외부로 그 굳음을 뺏을 수 있는 사람 없다
勢堪從擊破(세감종격파)-힘으로 쳐서 부술 수는 있어도
性莫失生全(성막실생전)-타고난 본성은 살아 있는 전부를 잃지 않느니
素受形質地(소수형질지)-모양과 바탕은 본래 부여받은 것
難移守自天(난이수자천)-스스로의 본성을 지키는 지라. 남이 옮기기 어려워라
鐵慚融作器(철참융작기)-쇠는 녹아 그릇이 됨이 부끄럽고
銅恥鑄成錢(동치주성전)-구리는 쇠 물 부어져 돈이 됨이 수치라
比若賢良士(비약현량사)-견주면 어진 선비는 돌과 같으니
操心固莫遷(조심고막천)-그 마음 굳음을 굳게 지키니 누구도 진실로 옮기지 못하리
김량경(金良鏡)
공직자들이여 !
농다리(籠橋)처럼
돌처럼 변함없고 진실한 모습을 보여라 !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