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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세계를 가르친 현대불교의 스승 10인
1. 암베드까르(1891~1956)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폐지하고 1858년부터 인도를 직접 지배했다. 이를 위해 1858년 인도통치법과 1861년 인도입법위원회법(Indian Councils Act, 1861)을 제정하고 이후 영국의 정책에 따라 수차례 개정했다. 한편으로 1835년의 매콜리(Thomas Babington Macaulay)에 의한 교육안, 1854년 우드교육특송문(Wood’s Educ-ation Despatch) 등에 의거하여 인도의 교육제도를 수립하였고 커즌 총독은 1902년에 인도대학위원회를 구성하고 1904년에 포괄적인 교육 정책을 발표했다.
이러한 식민지 체제를 구축하면서 1892년의 인도입법위원회법에서부터 인도인을 입법위원회에 임명하기 시작했으며, 1909년에는 중앙입법위원을 60명으로 확대하고 27명의 위원을 선거를 통해 선출하도록 했다. 리폰 총독에 의해 1882년에 지방자치제가 도입되었으며 1892년부터 지방의 입법위원도 중앙과 비슷한 비율로 선거로 선출했다. 영국의 직접 지배하에서 교육받은 인도인들이 증가하고 이들이 선거를 통해 입법위원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인도의 민족주의 의식도 싹이 트기 시작했다. 1885년에 인도 민족주의 운동의 구심점이 된 인도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 이하 국민회의)와 1906년 전인도무슬림연맹(All India Muslim League)이 창설되었다.
암베드까르(B. R. Ambedka)는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던 시기에 태어났다(1891년 4월 14일). 암베드까르가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한 1907년 무렵에는, 1905년의 벵골분할령을 기점으로 민족주의 운동의 방법론에 대한 대립으로 국민회의 내에 온건파와 과격파가 분리되었고, 그가 엘핀스톤대학(Elphinstone College)을 다니고 있던 시절(1908~1912)에는 인도인의 정치 참여 권리에 대한 요구로 중앙과 지방의 입법위원회에 선거제가 도입되었다. 암베드까르가 엘핀스톤대학을 졸업하고 미국과 영국에서 유학하고 인도로 돌아온 시기에는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가 민족주의 운동의 전면에 나서면서 엘리트 민족주의가 대중 민족주의 운동으로 전환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암베드까르는 다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인도로 돌아와 불가촉천민의 물 마실 권리를 위해 전개한 마하드 운동(Mahad Satya-graha, 1927)을 시작으로 불가촉천민의 권리를 위해 정치 일선에서 활동했다. 인도 통치법 개정을 위한 런던 원탁회의(1930~1932)에서 암베드까르는 불가촉천민의 분리선거 문제로 간디와 대립했다. 그 이후 불가촉천민 문제에 대해 국민회의와 간디의 견해를 비판했으며, 1945년에는 《간디와 국민회의가 불가촉천민에게 한 일(What Congress and Gandhi Have Done to the Untouchables)》이라는 책을 발행했다.
인도의 독립이 가시화되던 1946년, 암베드까르는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헌법기초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인도 헌법의 기초를 세웠다. 1947년에 인도가 독립하면서 초대 법무부 장관이 되었으며, 힌두민법 개정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헌법에 불가촉천민 제도의 폐지와 평등 원칙을 명시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법에 의해 공식적으로 카스트 제도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힌두민법 개정안이 의회에서 부결되자 그는 법무부 장관직을 사임했다. 1954년에 제3차 세계불교도대회에 참석했으며 1955년에는 인도불교도협회(Bhartiya Bauddha Mahasabha)를 창립하고 1956년 10월 14일에 불교로 개종했다.
암베드까르는 같은 해 11월 26일에 카트만두에서 개최된 제4차 불교도대회에서 자신이 불교로 개종한 이유를 담은 연설을 했으며, 이 연설 내용은 〈붓다 혹은 카를 마르크스(Buddha or Karl Marx)〉라는 제목의 글로 발표되었다. 그리고 보름도 채 지나지 않은 1956년 12월 6일 델리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사망했다.
암베드까르가 살았던 시대는 영국의 식민지 지배가 본격화되고, 대의제가 도입되면서 인도인들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힌두와 무슬림이 대립하여 결국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했고, 독립 후에도 힌두와 무슬림의 갈등이 지속되는 한편, 법적으로 폐지된 카스트 차별이 여전히 존재하는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 암베드까르의 삶은 어떠했는지, 그의 불교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불가촉천민의 미래를 위해 불교로 개종하는 것을 선택한 이유, 그리고 그가 현대 인도에 남긴 영향 등을 이 글에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2. 암베드까르와 불교의 인연
인도 교육부에서 발표한 2019~2020년 통계자료에 의하면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은 해당 연령 인구의 27.1%이다. 암베드까르가 엘핀스톤대학에 입학한 1908년 무렵에 대학에 진학한 학생 비율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극소수였을 것이다. 그런데 불가촉천민인 암베드까르가 어떻게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을까?
당시 불가촉천민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살았는지, 얼마나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었는지는 암베드까르의 저서 《불가촉천민, 인도 빈민가의 아이들(Untouchables or The Children of India’s Ghetto)》에 잘 나타나 있다. 힌두들은 촌락 안에 살고 있으며, 불가촉천민은 그 촌락 바깥 영역에 살면서 경제적으로 카스트 힌두에 의존하는 삶을 살았다. 경제적으로도 열악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으로 돈을 벌어도 그 돈으로 원하는 식료품을 마음대로 살 수도 없었다.
불가촉천민의 삶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영국이 인도에 진출한 시기부터이다.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인도에 진출했고, 그들의 지배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용병인 세포이(sepoy)를 고용했다. 동인도회사는 하급 군인인 세포이를 고용할 때 카스트에 대한 자격 요건을 부과하지 않았다. 그래서 암베드까르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동인도회사의 세포이로 근무했으며, 암베드까르의 아버지(Ramji Maloji Sakpal)는 하급 군인들 가운데서는 직급이 높은 장교(subadar)였다. 일설에 따르면 암베드까르는 경제적으로 별 어려움 없이 자라면서 자신이 불가촉천민임을 크게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영국이 공교육 제도를 도입하면서 공식적으로는 카스트 제한 없이 인도인들이 교육기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불가촉천민이 학교에 입학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입학해서도 다른 카스트의 학생들과 함께 학교생활을 하지는 못했다.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한 암베드까르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학교에 입학시켰다. 주지하다시피 ‘불가촉’이란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므로, 카스트 힌두 학생들은 불가촉천민과 같은 교실에서 수업하는 것에 반대했다. 이 때문에 암베드까르는 집에서 마대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복도에 깔고 앉아 수업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불가촉천민 학생은 우물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상층 카스트의 힌두가 자비로운 마음으로 물을 길어 암베드까르에게 접촉하지 않으면서 손에 쏟아 주어야만 마실 수 있었고, 화장실도 사용할 수 없었다. 이러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암베드까르는 학교를 계속 다녔고 마침내 불가촉천민으로서는 처음으로 엘핀스톤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지금도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의 삶과 학교생활은 그리 순탄치 않다. 인도 일간지 〈더힌두(The Hindu)〉의 2022년 8월 16일 자 기사에 따르면 라자스탄의 한 사립학교에서 9세의 달리뜨 남학생이 상층 카스트 교사의 물항아리에서 물을 마셨다는 이유로 교사에게 폭행당하여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2022년 11월 21일 자 〈더 와이어(The Wire)〉에는 까르나따까(Karnataka)에서 결혼식에 참석했던 신부의 친척 달리뜨 여성이 한 공동체의 식수 저수지에서 물을 마셨는데, 현지의 한 남성이 마을 사람들을 몰고 와서 그 여성을 질책했고, 여성이 떠난 후 저수지의 물을 퍼내어 방류하고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고무뜨라(gomutra: 소의 오줌)를 발라 정화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보도되었다. 지금도 불가촉천민들이 이러한 취급을 당하고 있는데 1900년대 초에 학교를 다닌 암베드까르가 얼마나 고난을 겪으면서 학교생활을 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암베드까르가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했을 때 그가 속한 공동체에서는 이를 축하는 모임을 개최하고 싶어 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하여 암베드까르가 직접 기록한 내용이 있다. 그 글은 자신의 저서인 《붓다와 그의 가르침(The Buddha and His Dhamma)》의 서문으로 쓴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가 사망한 후 서문이 빠진 상태에서 유작으로 출판되었다.
이후 암베드까르가 1956년 4월 6일에 써놓은 서문이 발견됨으로써 일부 전자책(eBOOK)에는 삽입되어 있기도 하며, 그가 다녔던 미국의 컬럼비아대학교에서는 암베드까르의 웹 페이지를 만들어 놓았는데 거기에 그의 서문이 실려 있다. 다음은 서문의 일부 내용이다.
우리 공동체 사람들은 나를 축하하기 위해 대중 모임을 개최하고 싶어 했다. 다른 공동체의 교육 상태에 비하면 그리 축하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행사를 개최하려는 사람들은 우리 공동체에서 내가 처음으로 그 단계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내 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행사를 하는 것은 아이에게 헛된 자만심을 심어 줄 것이라고 딱 잘라 거절하면서 ‘내 아이는 그저 시험에 합격했을 뿐이지 그 이상으로 한 일이 없다’고 말했다. 축하 행사를 개최하고 싶어 했던 사람들은 크게 실망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버지와 사적인 친분이 있는 껠루스까르(Dada Keluskar)를 찾아가 행사를 개최할 수 있도록 나서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공감한 껠루스까르가 아버지를 만나 약간의 실랑이 끝에 아버지가 양보함으로써 축하 행사가 개최되었다. 껠루스까르가 행사의 진행을 맡았다. 문필가인 껠루스까르는 연설을 마치면서 자신의 저서인 《붓다의 생애(Life of the Buddha)》라는 책을 나에게 선물했다. 나는 그 책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고, 그것에 큰 감동을 받았으며 깊이 매료되었다.
껠루스까르와 그가 선물한 책은 암베드까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껠루스까르는 암베드까르가 해외에서 유학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주선해 주었고, 그가 선물한 책은 암베드까르가 불교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암베드까르에 따르면 그는 아버지가 서사시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를 읽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 두 서사시는 브라만과 끄샤뜨리야가 서술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은 불가촉천민을 차별하는 카스트이기 때문이었다. 암베드까르의 아버지는 그 서사시 안에서 낮은 계층이지만 높은 지위에 오른 인물들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불가촉천민의 열등감을 극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암베드까르는 그러한 대답에 만족할 수 없었다. 요컨대 아버지는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에서 불가촉천민의 열등감을 극복하려 했지만, 암베드까르는 그러한 것들에서 자신이 품은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다가 《붓다의 생애》를 읽고 거기서 길을 찾은 것이다. 《붓다의 생애》를 선물로 받은 것으로 암베드까르와 불교의 인연은 시작되었지만, 그가 불교로 개종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불교와 맺은 인연을 내면에 간직한 채, 인도에서 가장 낮은 불가촉천민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투쟁에 매진했다.
3. 불가촉천민 해방 운동과 개종
암베드까르는 인도인으로 인도의 땅에서 사는 동안 인간다운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 시대에 불가촉천민들은 이러한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유학하는 동안 암베드까르는 물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을 때 친구들이 부정(不淨)을 언급하며 피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자신의 카스트에 대해 아무도 꺼려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경험한 암베드까르는 자신의 조국 인도에서도 이처럼 사람다운 삶을 살고 싶었고, 자신뿐 아니라 인도의 모든 불가촉천민도 그러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 결심을 한 암베드까르가 가장 먼저 한 투쟁은 무엇이었을까. 1927년의 마하드 운동 즉 물 마실 권리를 위한 투쟁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물로 배를 채웠다’는 표현이 등장하곤 한다. 그러나 인도의 불가촉천민은 물을 마음대로 마실 수 없기 때문에 물로 배를 채울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항상 ‘목마른’ 사람들이었다.
암베드까르가 살던 봄베이(지금의 뭄바이) 입법의회에서는 1923년에 불가촉천민들에게 급수시설, 우물, 학교, 병원 등 공공시설 이용을 허락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마하드의 차우다르(Chaudar) 저수지는 법적으로 불가촉천민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카스트 힌두들은 불가촉천민들이 이 저수지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이에 암베드까르는 대중을 모아 저수지로 행진하여 단체로 저수지의 물을 마셨고, 이에 맞서 카스트 힌두들은 불가촉천민이 물을 마셔 부정(不淨)해진 저수지의 정화 의례를 거행했다. 이러한 충돌이 발생하자 시 당국에서는 개방 결정을 철회했다. 이후 10년 동안의 법정투쟁을 한 후에야 차우다르 저수지의 물을 불가촉천민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암베드까르가 이끈 차우다르 저수지의 ‘물 마실 권리 투쟁’은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천명하고 획득한 최초의 운동이었다.
암베드까르가 그다음으로 추진한 것은 사원 출입권 투쟁이었다. 자신이 어떤 종교의 신도라면 그 종교 시설에서 축복을 받거나 기도를 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라 할 수 있다. 불가촉천민은 힌두교도임에도 불구하고 부정해진다는 이유로 사원에 출입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이에 항거하여 암베드까르는 1930년 3월에 나시끄(Nasik) 투쟁을 시작했다. 이 투쟁으로 일부 힌두교 사원에서는 불가촉천민의 출입을 허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힌두 사원들이 상황에 따라 개방과 철회를 반복함으로써 불가촉천민의 사원 출입권은 지속되지 않았다.
이러한 투쟁 과정에서 정치적 발언권 획득의 필요성을 절감한 암베드까르는 이후 불가촉천민 분리선거권 획득을 위해 힘을 쏟았다. 영국 정부는 인도 통치법을 개정하기 위해 런던에서 3차에 걸친 원탁회의(Round Table Conference, 1930~1932)를 개최했다. 불가촉천민 대표로 지명된 암베드까르는 제1차와 제2차 원탁회의에서 불가촉천민의 분리선거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영국 식민지 정부에서는 1909년부터 선거제를 도입하면서 무슬림 분리선거권을 인정했고, 1919년에는 시크교도 역시 분리선거권을 갖게 되었다. ‘소수 집단 보호’ 측면에서는 불가촉천민 역시 종교적 소수 집단과 마찬가지로 분리선거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암베드까르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간디는 불가촉천민의 분리선거권을 인정하는 것은 불가촉천민을 힌두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저지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단식’을 선언했다. 간디의 목숨을 담보로 불가촉천민의 분리선거권을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불가촉천민에게 위험을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한 불가촉천민 측은 1932년 9월 25일에 분리선거권 철회에 동의하는 뿌나 협정(Poona Pact)을 체결했다.
이후 불가촉천민을 위한 운동을 지속하던 암베드까르는 1935년 10월 13일 나시끄에서의 연설에서 “불행하게도 나는 힌두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것을 예방한다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천민으로서 무시당하는 굴욕적인 상황에서 살기를 거부하는 것은 내 능력 안에 있습니다. 나는 그대들 앞에서 엄숙히 말하건대, 나는 힌두교도로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연설에서 암베드까르는 처음으로 개종 의지를 드러냈으나 바로 개종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불가촉천민의 정치적 권리, 사회적 인식 변화를 위한 활동을 하면서 여러 종교에 관해 탐구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암베드까르는 대학교수, 입법의회 의원, 제헌의회 의원, 법무부 장관 등을 역임하면서도 여전히 불가촉천민이었고 그로 인한 차별을 겪어야 했다. 일화에 따르면 그가 법무부 장관이었을 때 그의 부하 직원들과 비서는 그와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결재 서류를 직접 건네지 않고 책상 위에 던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암베드까르는 여전히 힌두였고, 힌두 안에서 개혁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암베드까르가 《붓다의 생애》를 선물 받았을 때는 1907년이었고 개종 의지를 드러낸 때가 1935년이었는데, 그가 개종한 것은 1956년이다. 개종 의사를 밝힌 지 20년, 불교를 접한 지 50년 만에 불교로 개종한 것이다. 그 세월 동안 여러 종교 단체에서 자신들의 종교로 개종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물론 카스트를 배척하고 평등을 주창한 종교인 시크교 역시 암베드까르에게 그들의 종교로 개종하기를 권유했다. 그러나 암베드까르는 불교를 선택했다. 암베드까르는 ‘왜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자신이 35년 동안 모든 종교를 검토한 후에 ‘최고의 가르침은 붓다의 가르침이고, 과학적 지식을 가진 현대인이 종교를 가져야 한다면 그에 합당한 것은 불교’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답했다. 암베드까르 자신이 밝힌 바와 같이 불교가 합리적인 종교라는 것도 그가 불교로 개종한 이유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암베드까르가 가장 큰 관심을 둔 것은 ‘평등’이었다. 암베드까르가 불가촉천민을 위한 활동에서 주요 기치로 삼았던 것은 ‘교육하고 궐기하고 조직하라’는 것이었다. 불가촉천민들이 교육받음으로써 자신들이 받는 차별의 부당함을 인식하게 될 것이며, 부당함에 대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궐기로 표출하고, 그러한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조직을 만들어 단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암베드까르가 ‘평등, 자유, 박애’를 강조한 것에 대하여 그가 서구 사상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비판하는 학자도 적지 않다. 그러나 암베드까르는 그러한 사상들은 서구의 사상이기 이전에 이미 불교정신에 포함되어 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암베드까르가 불교로 개종한 이유는 붓다의 평등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암베드까르가 선택한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 해탈의 종교가 아닌 평등을 실천하는 실천적 불교라 할 수 있다. 암베드까르가 1956년 10월 14일에 불교로 개종하면서 22개 항목의 서약을 만들었고 이를 개종식에서 낭독했다.
이후 암베드까르의 뒤를 이어 불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은 22가지의 ‘계’를 지키겠다고 서약한다. 22계 가운데 제1~8계는 기존의 힌두교와 관련된 것을 따르지 않는다는 서약이며, 제9~10계는 평등에 관한 서약이고, 제11~18계는 기존에 있던 불교의 오계를 포함하여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하겠다는 서약이다. 그리고 제19계는 힌두교는 불평등에 기초한 종교이므로 이를 버리고 불교를 선택한다는 서약이며, 제20계와 제22계는 붓다의 가르침을 확고히 따르겠다는 서약이고, 제21계는 ‘나는 불교를 택함으로써 다시 태어났다고 믿는다’라는 서약이다.
암베드까르의 22계를 살펴보면 붓다의 가르침에 따른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수행하여 해탈에 이른다는 언급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암베드까르가 선택한 불교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기준으로 분리된 대승(Mahayana), 테라와다(Theravada 또는 Hinayana) 갈래와는 다른 불교라는 의미로 신불교(Navayana) 혹은 암베드까르파 불교(Ambedkarite Buddhism)라고 칭한다.
4. 현대 인도에 미친 영향
암베드까르가 인도불교에 미친 영향은 인도불교의 부흥이라 할 수 있다. 인도에서 불교가 탄생했지만, 아시아 여러 나라와 비교했을 때 인도불교는 매우 쇠락한 상태였다. 암베드까르가 1956년에 개종할 당시 약 50만 명의 불가촉천민이 함께 개종했다. 그리고 해마다 10월 14일이 되면 나그뿌르Nagpur의 딕샤부미에서 개종기념식(Dhammachakra Pravartan Din)이 열리며 이때 많은 불가촉천민이 불교로 개종한다. 2011년 현재, 인도의 불교도는 전체 인구의 0.7%인 8,442,971명이다. 현재 수준으로 인도의 불교도 수가 증가한 것은 다음 표(불교도 인구 및 증가율)와 같은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졌다.
이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암베드까르가 1956년에 불교로 개종한 이후 첫 인도 센서스인 1961년에 불교도 증가율은 약 1,700%에 이으며, 이후 불교도의 수는 점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암베드까르는 불교도뿐 아니라 인도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남겼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도 헌법 제정에 미친 영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암베드까르가 인도 헌법 제정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컸기 때문에 ‘인도 헌법의 설계자’로 불리고 있다. 헌법 제정 과정에서 암베드까르가 한 역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평등’ 정신을 헌법에 명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도 헌법 제15조는 ‘국가는 종교, 인종, 카스트, 성별, 출생지 혹은 그 밖의 것들에 근거하여 국민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인도인들이 암베드까르가 헌법에 명시한 평등 정신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인도에서 차별 문제가 등장할 때마다 암베드까르의 모습을 담은 현수막과 포스터를 제작하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2019년 총선에서 재집권한 인도인민당(Bharatiya Janata Party)은 그해 12월에 개정시민권법(Citizenship Amendment Act, 이하 CAA)을 제정했다. 그런데 시민권 부여에 종교를 개입시켜, 티베트에서 이주한 불교도, 미얀마에서 이주한 이슬람교도, 스리랑카에서 온 타밀족 등은 시민권 취득에서 제외했다. 이 때문에 헌법에 명시된 평등 정신에 위배되는 시민권법 제정에 반대하는 시위가 이어졌고 해를 넘기면서 인도 전역에서 CAA 반대 시위가 계속되었다. 이 시기 시위 현장이나 고가도로 교각 등에 붙어 있는 포스터에 가장 많이 등장한 인물이 암베드까르였다. 그 정도로 현대 인도인들에게 ‘평등’ 정신을 일깨워준 인물이 암베드까르인 것이다.
암베드까르는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나 가장 낮은 취급을 당하며 살았으나, 붓다의 가르침을 접하고 불교에서 희망을 찾았다. 그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까지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 불가촉천민들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 했다. 또한 암베드까르가 강조한 평등 정신은 불교도뿐만 아니라 모든 인도인에게도 영향을 미침으로써 평등을 외치는 곳에 지금도 암베드까르는 함께 하고 있다. ■
박금표 indiahistory@hanmail.net
숙명여대에서 〈불교와 인도 고대 국가 성립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세기 인도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고, 현재는 인도 여성에 대한 다양한 시각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다시 읽는 인도사 108장면》 《간디와 맞선 사람들》이 있고, 〈인도 신여성의 근대적 정체성: 간디와 사리(Sari)〉 〈근대 불교의 사회주의 비판: 암베드카르의 인도 사회주의 비판을 중심으로〉 등의 논문이 있다. 현재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비전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