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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설교 내용 요약
공관복음 강론 (22) 마태복음 7장 (2) 새 문명 선언
7장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인 모습을 산상수훈의 결론으로 말씀하고 있다. 성령께서 임하셔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면 새로운 인류 집단으로서 너희들은 이런 삶을 살게 된다 하고 결론처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열매 맺는 삶, 진리의 삶, 실천하는 삶 세 가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1. 열매 맺는 삶(새 문명) : 좋은 나무와 아름다운 열매
마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7: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7: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예수님은 좋은 나무와 아름다운 열매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데 이것은 옛 문명과는 다른 새 문명의 삶에 대한 실제적인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계속 회개를 말씀하시고 의인은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전부 못된 나무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오신 이유는 못된 나무를 좋은 나무로 바꾸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인간은 전부 못된 나무인데 그 중에 순종하는 자들을 좋은 나무로 바꾸시는 것이 구원인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온갖 오해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열매를 무엇을 상징하는 것으로 비유하시는가 하는 문제가 있고, 어떤 나무냐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무화가 나무는 무화가 열매를 맺게 되어 있고 포도 나무는 포도를 맺게 돼 있으니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하면 열매가 중요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오해를 하게 되는데 열매가 중요한 게 아니고 나무가 중요한 것이다. 어떤 나무냐에 따라서 어떤 열매가 맺히는지가 결정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핵심은 열매가 아니고 나무인 것이다.
따라서 믿느냐 안 믿느냐, 착하냐 착하지 않으냐 이런 부분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존재로 변화되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식의 표현을 하면 우물 밖으로 나오면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이고 우물 속에 있으면 못된 나무인 것이다.
첫 번째 단락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못된 나무가 좋은 나무로 바뀌어야 된다는 말씀이다.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느냐, 착하게 사느냐 아니냐, 열심히 믿느냐 안 믿느냐 이런 것이 아니고 존재가 바뀌어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핵심이다. 존재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갸륵한 짓을 해도 그것이 나쁜 열매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 좋은 나무-아름다운 열매 / 못된 나무-나쁜 열매
(1) 못된 나무의 사례
오로지 자기의 생존과 번영을 추구 – 타인와 신은 모두 이용의 대상
(갈 6:13) 할례 받은 그들 자신은 정작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도 못하면서 그대들을 할례 받게 하려는 것은 그대들의 인간의 본성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자랑거리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 사람들이 왜 그대들을 할례 받게 하려고 저렇게 애를 쓰는지 아느냐? 저들은 그대들을 위해서 그대들이 안타까워서 그렇게 하는 것인데 그들 마음속에 있는 본질은 자기 자랑거리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라고 그 사람들의 모티브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기만 소중한 자들은 뭘 해도 자기를 위해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류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 대한 정의이다. 인간은 여기서 절대 못 빠져나간다. 그러다가 우리가 우물 밖으로 나오면서 눈이 열리고, 저 사람이 왜 저러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보이니까 그 사람을 향한 정죄가 안 나가고 측은하게 보이는 것이다. 예수님도 못된 나무를 정죄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너무 잘 아시는 것이다.
그래서 단적인 예가 예수님이 병자들을 치료를 하셨고 표적까지 보여주셨는데도 안 받아들이니까 소동과 고모라의 형편이 너희보다 나을 것이다, 너희는 더 비참해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나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회개를 하지 않고 돌아 서지 않았기 때문에, 즉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문제 삼으시는 것은 돌아서지 않는 것을 문제 삼으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흩어져 내팽개쳐서 흩어져 떠도는 자들이라고 하면서 그 안타까워하신 것이다.
(2) 좋은 나무란?
새 창조에 의해 태어난 새 인류
시각이 바뀐 새로운 피조물 / 성령의 열매가 맺힌 새로운 피조물
우물 속의 삶은 양면성이 있는 것이다. 공포가 있는가 하면 희망이 있다. 그래서 공포가 너무 싫어서 데마도 왔는데 승리에 대한 환상이 주는 달콤함을 못 잊고 못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인 공포와 탐욕은 주인공이 된 삶에서 결국 나와야 해결될 수 있다. 현실에서 하나가 되어 가는 클레로스 공동체의 일원이 될 때에 공포와 탐욕에서 실제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 좋은 아름다운 열매가 맺힌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우물 밖으로 꺼내져서 하나님의 나라로 이동하는 것이다. 좋은 나무란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새 창조에 의해서 태어난 새 인류가 좋은 나무인 것이다. 그래서 시각이 바뀐 새로운 피조물, 성령의 열매가 맺힌 새로운 피조물, 현실에서 하나가 되어 가는 자들이 좋은 나무이다.
(3) 아름다운 열매(카르포스)란?
선한 행위? 그 행위의 결과물?(현실 놀이) / 도덕적 삶? 전도?(종교 놀이)
클레로스의 성장과 확산 - 안팎에서의 의로운 삶과 그 결과물
우물 밖으로 꺼내지지 않은 자들은 각자 자기가 주인공이니까 내가 주인공인 현실놀이에서 어떤 열매를 이야기하시는 것인가?, 내가 주인공인 종교를 위해서 어떤 열매를 말씀하시는 것인가? 이렇게 사고가 진행이 된다. 그러나 아름다운 열매란 클레로스의 내적 성장과 외적 확산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현재와 미래의 형제 자매들이 점점 더 하나가 되어 가는 것 그리고 밖에 나가서는 평화의 빛을 비추는 그것이 아름다운 열매인 것이다.
(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런 효력이 없고 오직 아가페(사랑)를 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피스티스(신실함)가 있을 뿐입니다
성서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이 흘러나오고 서로 사랑하는 삶이 삶을 살게 만드는 피스티스가 있을 뿐이라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스티스가 오면서 좋은 나무로 바뀌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로 새 창조가 되지 않으면 답이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지 행위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갈 6:1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런 효력이 없고 오직 새로운 창조가 있을 뿐입니다
새로운 창조로 인해서 못된 나무가 좋은 나무로 바뀌는 것만이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엡 2:15) 법령으로 정해진 계명들의 율법을 소멸시키심으로 자기 안에서 이 둘을 한 새 사람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루시고
(엡 4:21-24) 진리는 예수 안에 있는 만큼 그대들이 그를 듣고 또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은 것은 구습을 따르는, 즉 미혹하는 거짓된 가르침의 탐욕을 좇아 파멸해가는 옛 사람을 벗고 그대들의 생각의 영이 새로워짐으로써 하나님을 따라 참된 의와 경건으로 창조된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골 3:7-10) 그대들도 예전에는 그러한 품성들을 가지고 살았으나 이제는 이 모든 것, 즉 분노와 격분과 악독과 비방과 그대들의 입에서 나오는 욕설들을 치워버리고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대들은 옛 사람을 그 행위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므로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습을 따라 참된 지식에 이르도록 새로워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호크마 주석> 여기서 열매란 그 사람의 가르침과 그것의 영향과 및 그의 행위를 의미한다. 혹설에 이것은 행위만을 가리킨다고 하나 이 해석은 합당치 않다. 그 이유는 좋은 행위도 악한 사상을 선전하기 위하여 이용적으로 나타나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호크마 주석은 그 사람의 언행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러나 언행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슨 말을 하건 무슨 행동을 하건 희생과 헌신을 하고 봉사하다가 목숨까지 잃든 무엇을 하든, 못 된 나무는 그게 다 나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인 인간, 이타적인 이기적인 인간, 공동체적인 이기적인 인간 등, 이기적인 인간이 세 가지 타입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못된 나무의 세 가지 모습이다. 지금 예수님은 나무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지 열매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아니다.
(마 9:36-38)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내팽개쳐지고 흩어져 떠돎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각자 도생의 삶을 사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다. 각자도생하게 된 인간들이 온갖 못된 짓을 하고 온갖 착한 짓을 하고 그것이 다 불쌍한 것이다. 그것은 자기를 위한 몸부림이고 답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행위를 문제 삼으시는 것이 아니고, 존재의 새 창조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요 4: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카르포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 16:15) 형제들이여 그대들에게 권합니다 그대들이 알고 있듯이 스데바나의 가정은 아가야에서 맺은 첫 열매(아파르케, 처음, 상징적으로 첫 열매)이며 성별된 무리를 섬기기로 스스로 작정한 가정입니다
2. 진리의 삶(새 문명의 진리)-못된 나무의 두 가지 사례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프로페테스/ 나비/ 대언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나무가 먼저 바뀌어야 된다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못된 나무인 너희가 나를 주여 주여 부르면 뭐 하냐?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면 뭐하냐, 너희를 위해서 한 건데? 나중에 상급 받으려고, 나한테 칭찬 받으려고 한 거 아니냐? 그럼 내가 너희를 칭찬할 수 있겠느냐? 나를 이용해 먹는 자들 아니냐? 너희는 너희의 그 시커먼 속을 내가 뻔히 보고 있는데 너희를 잘했다고 할 수 있냐?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즉 못된 나무가 좋은 나무로 변하는 성령의 새 창조가 없으면 너희가 뭘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 여기서 그 날과 천국이 가리키는 것은?
(1) 성령 강림과 클레로스? - 최종적 심판이라는 뉘앙스가 무시됨
(2) 종말과 새 하늘과 새 땅? - 이 땅에서의 새 언약의 성취가 빠지게 됨
천국의 중의적 의미는 이 땅에 세워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영원한 완성의 두 가지가 서로 관통되어서 연결되는 그런 의미로 우리가 봐야 한다.
* 21절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란?
즉 좋은 나무로 바뀌는 것을 위해서 간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아름다운 열매는 저절로 맺힌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인데 반해,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면 과도기적인 존재가 되어서 ‘나’ 라는 나무가 어느 날은 좋은 나무이고, 어느 날은 못된 나무이고 해서 양쪽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고백을 하는 것이고 내가 다 이루었다는 것이 아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것이다. 내가 완전히 좋은 나무로 되지 않아서 나는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면서 계속 푯대를 향해서 달려간다는 것이다. 즉 나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이 클레로노모스들의 정체성이다. 그리고 완전히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은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완전히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런 황당한 존재로 만들어 주셔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 앞에 과제는 성장이다. 싸르크스가 발동하는 경우들을 점점 줄여나가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과도기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회개하고 간구하면서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롬 10:6) 신실하심(피스티스)으로부터 비롯된 의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네 마음속으로 누가 하늘에까지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내려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고
7 “또는 누가 땅속 깊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이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모셔 올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8 그렇다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말씀이 너에게 가까우니 네 입속에 있으며 네 마음속에 있다”고 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전파하는 신뢰(피스티스)의 말씀을 가리키며
9 그 의미는 그대가 만약 그대의 입으로 주 예수이심을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셨음을 그대의 마음속으로 신뢰하면 그대는 구원된다는 것입니다
10 마음으로 신뢰하게 만들어지면(피스튜오의 수동태) 의에 이르게 되고 입으로 인정하게 만들어지면(호몰로게오의 수동태) 구원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믿어서 입으로 시인하라는 말이 아니고 10절이 수동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성령에 의해서 마음으로 신뢰하게 만들어지고, 입으로 시인하게 만들어지면, 그 때 내 마음으로 믿는 것과 내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좋은 나무가 믿고 좋은 나무가 시인하는 것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의에 이르게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되지만, 그렇게 만들어지는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그것은 못된 나무가 입으로 시인하고 못된 나무가 믿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못된 나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은 소용없다는 것이고 그것이 다 불법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10절에 수동태로 해 놓은 것은 좋은 나무로 성령에 의해서 새 창조가 일어났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씀인 것이다.
* 23절의 불법을 행하는 자란?
불법을 행하는 자는 결국 동기의 문제다. 무엇을 하든, 무엇을 믿든 다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못 된 나무이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자들 – 동기의 문제(못된 나무)
(갈 6:13) 할례 받은 그들 자신은 정작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도 못하면서 그대들을 할례 받게 하려는 것은 그대들의 인간의 본성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자랑거리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믿음도 행위도 본질이 아니다 오직 새 창조가 본질이며 믿음(신뢰함/피스티스)과 행위(신실한 충성/피스티스)는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다
3. 실천하는 삶(새 문명의 삶 : 산상수훈의 최종 결론)-좋은 나무의 아름다운 열매
마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란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나의 이 말을 듣고 회개하고 간구해서 좋은 나무가 되어서 좋은 나무 답게 사는 자는” 그 집을 반석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좋은 나무가 되기 위하여 회개하고 간구하라는 말씀을 하는 것이다.
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7: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나무의 문제인가, 열매의 문제인가?
존재의 문제인가, 행위의 문제인가?
존재의 이동이 먼저다 : 우물 속의 행위와 열매 / 우물 밖의 행위와 열매
* “나의 이 말”, 즉 산상수훈의 핵심은?
산상수훈에 성서의 모든 진리가 다 압축돼서 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의 증언도 이 산상수훈이 성취되었다는 것에 대한 증언인 것이다.
5장은 팔복, 빛과 소금, 율법을 완전히 하러 오신 예수님, 원수를 사랑하는 수준까지 온전해져야 된다는 말씀을 하시고,
6장에서는 구제 기도 금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인간이 빠져 있는 수렁에 대한 말씀과, 재물 염려로부터의 해방,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살게 되면 다른 것은 다 공급해 주신다는 말씀을 하시고,
7장 전반부에서는 눈에서 들보가 빠져야 된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려라, 네가 원하는 거 말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라 찾아라 두드리라고 하시고, 그리고 오늘 본문 7장 후반부에서 열매 맺는 삶, 진리의 삶, 실천하는 삶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먼저 나무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못된 나무는 무슨 짓을 해도 나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동은 똑같은데 동기가 계속 달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나?
나를 위해서 하느냐 현재와 미래의 형제들을 위해서 하느냐에서 갈라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유일한 방법은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은 형제 자매를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회개와 간구가 계속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내 안에 다른 동기가 있었다는 것이 자꾸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계속 나오는 말은 우주의 주인공은 결국 나였구나라는 것이다.
실제로 우주의 주인공 자리가 파괴되는 것은 현재와 미래의 우리가 주인공일 때이다. 그 때 내가 차지하고 있던 그 자리를 실제로, 현실적으로 발로 차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현실인 것이다. '나'라는 정체성에 대해서 흥미가 사라지고 '우리'라는 정체성이 나의 정체성이라는 게 현실적으로 인지가 되면, 그것이 현실적으로 느껴지면 내가 우주의 주인공이라는 그 주인공 놀이가 우스워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장성한 자의 포지션으로 옮겨 가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재촉해서 될 일이 아니다. 장성한 자가 본을 보이게 되면 그 사람이 성령의 역사를 간절히 원하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가 본을 보이는 것이 그 사람에게 자극이 되는 것이다. 그 사람한테는 그것이 하나님의 동역자의 역할인 것이다.
* 산상수훈은.
성령의 역사로 새롭게 창조되면서, 세상이라는 우물로부터 아들의 나라로 엑사이레오되어, 새 문명 속에서 새 관계, 즉 한 몸을 이루어가면서, 안팎에서 이중 윤리를 실천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될 새 인류에 대한 메시아의 복음 선포이다.
이 일은 성령께서 오시면 실현될 일이고 예수님은 그것을 미리 선포하시는 것이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조혜자 권사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