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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여유를 찾아 좋은 글 산책을 하며
마음을 성찰하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정중동의 시간 여행은
위대한 글을 남긴 고인의 발자국을 현자의 글향으로 느낍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을 남겼고
몽테뉴는 수상록을, 파스칼은 팡세를, 노자는 도덕경을 남겼습니다.
고전의 향기로 느끼는 인생의 고찰은
삶과 죽음에 대한 현자의 깊은 고뇌가 깃들었습니다.
성경의 시편과 잠언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소통하는 믿음의 삶을 성경으로 남겼습니다.
세계사와 철학사, 그리고 문학사에 관심을 가지면
그들의 생을 어떻게 살았는지 궁구(窮究)할 수 있습니다.
삶의 환경과 상황은 달랐어도
명상록과 수상록과 도덕경 등 고전의 향기를 남겼습니다.
기록의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도
소중한 인생을 글로 남긴 위인은 참으로 위인의 절대 조건을 가졌습니다.
성리학이 발달한 조선 시대에도 성리학을 집대성한 율곡을 동방의 주자라고 불렀으며
동방 오현으로 정여창과 김굉필과 조광조와 이언적과 이황을 성리학의 대가로 유학에서 추앙합니다.
임진왜란 때 유성룡은 징비록을 남겼고
충무공 이순신은 난중일기를 남겼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영웅호걸들의 이야기는
위인전이 되어 후대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종교의 창시자로 신화적 존재로 숭배받고
또 어떤 사람은 위인전기의 주인공으로 존경받습니다.
그러가 하면 역사에 그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숱한 사람들은
평범한 우리들의 선조입니다.
비록 무명인으로 살았지만 그 삶의 흔적은
자신과 가족에게는 천하보다 귀한 생명의 고귀한 삶이었을 것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삶의 이야기는
곧 나의 삶이요, 우리들의 생입니다.
누구나 숨 쉬며 삽니다.
누구나 밥 먹고 삽니다.
누구나 하늘을 보며 삽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하는 이 없고 사람 위에 사람없는 세상에서
누구나 자유와 평등의 행복권을 추구하며 삽니다.
믿음과 사랑, 그리고 행복은 숨 쉬며, 밥 먹고, 하늘을 보며 사는 사람들의 보편적 가치요,
소통하고 공유하는 나눔과 섬김의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과 믿음, 그리고 행복 가득한 삶의 이야기는
좋은 생각의 글로 아름답고 따뜻한 명상과 수상록이 되었습니다.
사랑은 희뭇한 향기이자
우리의 인생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인생의 따뜻한 햇볕입니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이웃간의 흐뭇하고
아름다운 정을 나누고 삽니다.
그 고운 정 속에 아름다운 사랑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인생을 희망과 용기와 기대를 가지고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정의, 아름다움과 흐뭇함이 있기 때문에
괴로운 인생도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하여
따뜻한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내가 삶의 주체가 되어 누구를 사랑하는 동시에
내가 사랑의 객체가 되어 누구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사랑할 사람도 없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도 없을 때
나의 존재와 생활은 무의미와 무가치로 전락하고 맙니다.
사랑이 없는 인생은 풀 한 포기 없는 사막과 같고
샘물이 말라버린 샘터와 같습니다.
생에 빛을 주고 향기를 주고 기쁨을 주고
가치와 희망을 주는 것이 곧 사랑입니다.
사랑은 우리 생활의 등뼈요, 기둥입니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려면 애정의 향기를 항상 발산해야 합니다.
나는 너를 믿고 너는 나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 믿기 때문에 같이 잘 살 수 있고
같이 일할 수 있고 같이 친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 협동 화목 대화 희생 봉사 등
인간의 아름다운 덕이 모두 다 믿음과 신의의 토대 위에서 비로소 가능합니다.
신의와 믿음의 질서가 무너질 때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맙니다.
사랑과 믿음, 그리고 행복은
하나의 가치임과 동시에 삶의 기초입니다.
사랑과 믿음, 창조의 토대 위에 행복의 탑을 쌓고
즐거운 생활의 요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우리일 때 인생은 아름다워 집니다.
이렇게 좋은 생각에서 발췌한 글은
믿음과 사랑, 그리고 행복에 대한 좋은 생각의 바이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은 인생의 따뜻한 햇볕이요, 생활의 등뼈와 기둥이며
생의 빛과 향기와 기쁨과 희망의 가치를 생명의 샘으로 흐르게 하여
애정의 향기가 넘치는 믿음과 사랑의 창조적 행복의 탑을 생활의 요람으로 만드는
아름다운 인생을 담은 참 좋은 글입니다.
참으로 얼마나 좋습니까?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좋은 생각이 깃든 아름다운 글은
때로는 마음의 감동이 되고 때로는 마음의 힐링이 되고 때로는 마음의 양식, 그 자체일 것입니다.
악풀보다는 선풀이 낫고
부정적인 말보다는 긍정적인 말이 더 좋습니다.
마음의 악을 쏟아내는 욕지거리보다
마음의 덕을 세우는 은혜로운 말이 더 유익합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좋은 글은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 사진과 금상첨화의 조화를 감동으로 자아냅니다.
어쩌면 좋은 생각이 깃든 아름다운 글을 생명의 샘으로 쏟아내는 것이
각박하고 험란한 우리 시대의 마지막 희망이요, 소망일 것일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 깃든 아름다운 말과 글로 인생을 경작하는 것은
위인의 발자취는 아닐지라도 선량한 백성의 척도일 것입니다.
좋은 씨앗이 좋은 나무가 되고 좋은 열매를 맺듯
좋은 생각 아름다운 글과 말을 많이 뿌려 심은대로 거두는 아름다운 인생의 경영은
꽃의 향기요, 보석의 빛일 것입니다.
어쩌면 믿음과 사랑과 행복으로 삶을 경작하는
최고의 인생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세상의 감동을 주는 좋은 글향, 그 믿음에 생명의 실상이 없고
그 사랑에 생명의 열매가 없고 그 행복에 생명의 향기가 없다면
좋은 생각 아름다운 글과 말의 경작은 영생의 그림자도 밟지 못하는 총체적 난맥의 난망일 것입니다.
돌을 보석이 되라고 한다고 해서
금이 되고 옥이 되고 금강석이 되지 않습니다.
꽃이 아름답고 열매가 탐스럽지만
시들은 꽃은 냄새가 고약하고 죽은 나무는 더 이상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좋은 생각, 아름다운 마음, 긍정적인 마인드로
연금술사의 꿈을 현자의 돌로 성취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영혼의 등불을 밝힐 수 없습니다.
연금술사의 꿈은 현자의 돌을 찾는 지고지순한 정성과 충정일지라도
꿈이 현실이 되는 시크릿의 그 비밀이 영생의 구원을 얻는 진리의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과 몽테뉴의 수상록과 파스칼의 팡세와 노자의 도덕경이 서로 다르듯
인생의 연금술사는 현자의 돌을 찾아도 하늘 보좌를 향한 영생의 구원을 얻는 시온의 대로가 아닙니다.
인생의 가는 그 길은
삶의 씨앗을 뿌리는 대로 얻는 그 열매가 제각기 다릅니다.
길은 달라도 도달하는 목적이 같다는 다원주의는
진리의 복음을 대적하는 인본주의 종교의 편벽이요, 편협이며 협작입니다.
삶의 씨앗은 그 심은 대로 거두는 열매가 다르듯
각자가 선택한 길이 다르면 그 결과도 다릅니다.
예수님은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도적의 길이 황금마차를 탄 왕의 길이 될 수 없고
강도의 길이 백마탄 승리자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과 사랑, 그리고 행복은
누구에게나 소통과 공유의 미덕을 가진 아름다운 삶의 주제입니다.
누구나 그 나름대로 사랑의 옷을 입고 믿음의 전진으로
행복의 꽃을 향하여 인생의 경주를 합니다.
그러나 저마다 입은 사랑의 옷이 다르고 믿음의 방향이 다르며
그 행복의 목적이 다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인생의 경주를 하는 삶의 한바탕은
우왕좌왕하며 방향을 잃어 버리고 표류하는 고해의 항해와 같습니다.
항적을 잃어 버린 운항은
해저의 암초와 풍랑에 휘말려 유라굴로의 광풍이 대작하여 구원의 여망이 없어집니다.
구원의 여망이 없는 인생의 험로에서
벼랑 끝 낭떠러지의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생각이 깃든 아름다운 말과 글은 무엇인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 희망인가?
몽테뉴의 수상록에는 그 해답이 있는가?
파스칼의 팡세에는 구원의 길이 있는가?
노자의 도덕경은 진리를 말하는가?
아름다운 시와 수필과 소설로 절대절명의 위기를 극복할 창조적 발상을 할 수 있는가?
성경의 욥기와 잠언과 시편은 생명의 길을 보이는가?
마지막 순간......
무슨 생각을 하며 무엇을 향하여 죽음에 이르렀는가 돌아볼 때
죽음의 강을 건너 영생에 이를 사닥다리가 없다면 그 인생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의 삶을 허망하게 살았습니다.
그 토록 애청하였던 드라마는 천국의 길을 가르쳐 주지 않고
보수와 진보의 대립과 갈등의 정치적 행보가 무용지물입니다.
좋은 생각이 깃든 아름다운 말과 글로 경작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행복의 공든 탑도 소용이 없습니다.
인생의 연금술사가 되어
현자의 돌을 찾았던 투지와 집념의 비전과 열정도 헛수요, 패착입니다.
구원의 여망이 없는 인생의 험로
그 벼랑 끝 낭떠러지에서 절망을 딛고 새가 되어 하늘을 날 수 있는가?
믿음의 날개를 펴고 벼랑 끝 낭뜨러지에서
독수리처럼 날 수 있다면 구원의 여망이 될 것입니다.
평생의 낚시 취미로 월척을 잡은 그 감동은 어디로 갔는가?
사진의 취미로 출사의 여행을 하며 걸작을 만들어 가던 그 손맛은 어디로 갔는가?
가장 아름다운 골프장의 환상적인 라운딩은 생의 마지막을 웃음 짓게 할 수 있는가?
근면하고 성실한 삶의 댓가로 얻은 각종 수상과 올림픽의 금메달은 벼랑 끝 낭떠러지에서도 빛날 것인가?
즐거운 인생을 수 놓았던 아름다운 노래와 춤은 또 어떤가?
오색 찬란한 프리즘의 광채로 후회 없는 삶을 채웠던 인생의 길, 그 마지막 순간
내 인생의 주인을 기쁨으로 만날 수 없다면.... 죽음, 그 이후의 심판을 맞을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산헤드린 공회에서
구약의 말씀으로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복음으로 증거하였던 스데반은
그 복음을 듣고 대제사장과 장로와 유대인은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며 분노하였지만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은 천사와 같았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탄성하였습니다.
성령의 충만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스데반은 천사의 얼굴을 가졌으며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돌을 던져 죽이는 사형을 당하면서도
스데반은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사랑과 용서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으로 초대 교회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표적과 기사를 민간에 많이 행하였으며
성령의 충만으로 지혜의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죽음 앞에서 당당하였던 또 한 사람은
이방에 빛을 비추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였던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난의 복음을 부활 신앙으로 증거하였고
하나님의 복음으로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충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짊어진 바울의 인생은
오직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각처에 생명의 향기를 전하는 그 충만한 기쁨으로 넘쳤습니다.
실로 바울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는 성령의 음성을 깨닫고
죽음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순교의 기쁨으로 충만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절망으로 느끼는 그 마지막 순간의 죽음을
죽어 영생하는 믿음의 확신으로 의의 면류관을 소망하였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행20:23-24)
과연 바울은 오직 복음으로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고 하였습니다.(딤후4:6-8)
좋은 생각이 깃든 아름다운 글과 말이 아니라
오직 생명의 복음과 은혜의 복음으로 경작된 인생은 죽음 앞에 초연하며
영생의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넘칩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새긴 그리스도의 복음 편지가 되어 성령의 기쁨으로 그 복음을 증거하며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여 생명의 향기를 넘치게 하면
영생의 기쁨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복음으로 새롭게 경작된 인생을 믿음으로 고백하였습니다.(갈2:20)
우리는 모두 내일 죽는다고 생각하고
오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충만하여 그 복음을 성령으로 증거하면
죽음의 절망은 생명의 샘이 솟는 영생의 기쁨으로 넘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