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伊藤博文) 처단 소식은 거사 다음 날인 1909년 10월 27일자 국내 신문에 짧은 기사로 알려졌다. 인천에서 일본어로 발행되던 '조선신문'은 10월 27일 첫 보도에서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일대 비보, 이등공 암살되다'라는 제목을 달고 그의 죽음을 '훙거(薨去)'로 표현했다. 훙거는 제후나 왕의 죽음을 일컫는 용어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던 '대동공보' 28일자 머리기사는 '일인 이등(伊藤)이가 한인의 총을 맞아'였다.
처음 3일 동안은 안중근의 이름이 혼란스러웠다. '운치안'(대한매일신보 한글판, 10.28. 황성신문, 10.29.), '운지안(芸知安)'(신보, 국한문판 10.28.), 운치얀(ウンチヤン, 일어 조선신문, 10.30.) 등으로 나오다가, 30일부터 안응칠(安應七)로 통일되었다. 외신이 서양식으로 이름을 성(姓) 앞에 써서 생긴 혼동이었다. '응칠'은 안중근의 아명으로, 저격 당시(저격 직전 러시아 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하얼빈역)는 물론 망명 기간 내내 이 이름만 사용했다.
▲ 인천에서 일본어로 발행되던 '조선신문'〈작은 사진 아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던 '대동공보'〈작은 사진 위〉(이 신문 주필 이강 선생의 당시 모습〉
친일지 '대한일보'는 이등박문 피살 소식을 전하는 긴급 호외를 내면서 '대한매일신보 총무 양기탁과 사원들이 신문사 2층에 태극기를 걸어 놓고 축하연을 벌이며 만세를 불렀다'고 보도했다. 일본의 호치(報知)신문과 아사히(朝日)신문도 같은 내용을 전재했다(재팬 메일, 10.30.). 대한매일신보는 즉각 "이는 모함하는 말이며 사실이 아니다"고 부인했지만(신보, 10.28.), 당시 이 신문 사원들의 항일정신이 친일파들에게 어떻게 비쳤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등의 피살 소식에 고종이 기쁜 마음으로 웃었다는 풍설도 돌았다. 일인 경시(警視)는 소문의 진위를 밝혀내겠다며 대궐 나인들을 불러 고종이 웃은 곡절을 말하라고 엄혹하게 심문했다. 시종들 가운데는 6차례 이상 불려가서 조사받은 사람도 있었다(신보, 11.28.). 조선 황실의 권위를 얼마나 얕잡아 보았기에 태황제의 웃음까지 문제삼아 이처럼 무례한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을까.
▲ 저격 직전 러시아 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하얼빈역.
경시청과 헌병대는 각 경찰서에 '특별경계령'을 내리고 거리에서 비밀리에 말하는 것을 금하고 각지에 정탐을 파견할 만큼 국내 파장을 우려했다. 통감부의 철저한 언론 검열에도 불구하고 대한매일신보는 '용산에서 노동자가 이등 처단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에 일본 헌병에게 붙들렸다더라(10.31.)'고 보도해 술렁이는 민심을 전했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은 '지방 여러 곳의 의병활동도 치열하여 여러 의병장이 체포되거나 피살되는 사건이 있었다'고 기록, 안중근의 거사가 국내 항일운동에 자극제가 되었음을 전했다.
친일지 '대한신문' '국민신문'은 동경에 조문단을 파견하는 수선을 떨었지만, 민족지는 정중한 태도로 "안응칠 씨"로 존칭을 썼고, 미국의 '공립신보'와 블라디보스토크의 '대동공보'는 "안중근 의사"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