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라(고전1:10-18)
갈등
1. 아침에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들고 창문을 열었습니다. 햇빛이 들어오는 줄 알았더니, 유리창에 아주 얇은 금이 가 있었던 겁니다. 처음엔 몰랐습니다. 유리는 여전히 투명하고, 빛도 들어옵니다. 집도 멀쩡해 보였어요. 어느 날 그 얇은 금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밤엔 그 틈으로 차가운 기운이 들어옵니다. 시간이 지나서 그 유리는 어느 순간“툭”하고 깨지고 말았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예배하고 찬양하고 봉사하고 모입니다. 어느새 보이지 않는 곳에 아주 얇은 금이 갑니다. 누가 큰 죄를 짓고 큰 사건이 터진 것도 아닙니다. 그냥 작은 말-표정-비교하는 말이 쌓여갑니다. 갈등이 있던 어느 교회에서 이런 말이 오갔습니다.
요즘은 예배가 예전 같지 않아.”“누구 설교가 더 은혜롭더라.”“그 사람들만 늘 앞에 서네.”“우리 쪽은 늘 손해 보는 것 같아.”“저쪽은 너무 세상적이야.”“아니야, 저쪽은 너무 딱딱해.”어느 순간부터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서로를‘다르게’보기 시작합니다. 한 교회-한 예배실에서 한 찬양을 부르는데요. 마음은 점점,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교회 안의 분위기는 이런 식으로 바뀝니다. 처음에는“그 성도가 좀 서운하게 말했나?”수준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보이지 않는 편 가르기가 생깁니다. 여기는“우리 쪽”저기는“저쪽.”그 편 가르기는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눈빛으로 압니다.
2. 교회에서 인사를 할 때 손은 잡지만 마음은 멀어져 있습니다. 회의할 때도 논의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서로의 의도를 의심하며 말합니다. 어떤 성도는“나는 교회 안에서 다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있을래.” 다른 성도는“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내가 불편한 사람이 되었지?”다른 이는“이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누가 중심이냐는 거예요.”교회에서 이런 말이 오가면, 이상한 일이 시작됩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님 이름보다 사람 이름이 더 자주 들리기 시작합니다. “바울 목사님이 최고야.”“아볼로 목사님이 더 은혜로워.”
“게바 같은 사람이 필요해.”“우리는 진짜 그리스도파야.”이 말이 낯설지 않지요. 고린도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열심과 사역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교회에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십자가 아래로 모이지 않고, 몇 사람 이름 아래로 모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소식을 듣고 가슴이 무너졌어요. 그는 오늘 편지의 첫 본론에서 다른 문제보다 먼저,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10절,“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3. 고린도교회는 왜 이렇게 갈라졌을까요?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임이었고, 함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했는데요. 그들은 서로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언제부터 편이 생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탄식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13절) 너희가 편을 나눈 것이 단지 사람 문제냐? 아니면 너희가 그리스도를 나눈 것 아니냐? 바울은 교회의 중심은 누구이고, 내 믿음의 중심은 무엇인지, 우리 공동체는 무엇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는지 등을 이야기했습니다.
갈등 심화
4. 고린도 교회 안의 분열은 처음엔 의견 차이인 것 같았습니다. 그냥 스타일 차이였고, 취향 차이였고, 성격 차이였습니다. 그 차이가 어느 날부터‘정체성’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누가 뭘 말해도 그 말의 내용보다“누가 말했느냐”가 먼저 작동되었습니다. 복음이 아니라, 사람의 이름이 판단 기준이 됩니다. 섬김이 섬김이 아니라‘증명’이 됩니다. 교회 봉사도 달라집니다.“내가 이만큼 했어.”“내가 더 수고했어.”“우리는 늘 헌신해.”“저쪽은 편하잖아.”그러면 섬김이 은혜가 아니라 자기 의가 되고, 헌신이 사랑이 아니라 서운함의 빚이 됩니다. 교회는 서로를 살리기보다 서로를 평가하고 비교하는 장으로 변합니다.
사역이 커지고, 역할이 생기고, 그룹이 형성되면 어느 순간부터 교회는 이런 경쟁을 합니다.“누가 더 사람을 많이 모으느냐?”“누가 더 인정받느냐?”“누가 더 목소리가 크냐?”“누가 더 주도권을 쥐느냐?”그때부터 교회는 한 몸이 아니라 여러 몸처럼 움직입니다. 점점 그 상태가 익숙해집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사람 이름 아래 모였습니다.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편지했습니다.“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11절) 고린도 교회는 사분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바울에게. 아볼로에게. 게바에게. 그리스도에게. 이 상황에서 그들은“내가 옳다.”“우리 편이 더 낫다.”“너희는 부족하다.”
5.“내가 진짜다.”고 주장합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 이름이 정체성이 되면, 그 순간 교회는 십자가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 순간 교회는 자기 자랑의 공동체가 됩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만 있는 것이 아니라“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말은 문자 대로만 들으면 참 경건해 보입니다. 가장 정답 같고 옳아 보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다른 파와 함께“분열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 말은“나는 그리스도 편이야.”는 것입니다. 너희는 덜 순수해, 덜 영적이야. 너희는 진짜가 아니야.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도 분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물었습니다.“너희는 지금 무엇을 중심에 두고 있느냐?”“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13절) 바울은 너희가 편을 나눈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나누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교회가 분열된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찢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바울이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그는 성도들의 마음을 십자가 앞으로 끌고 갔습니다.“너희가 누구 편을 들든, 누가 너희를 위해 피 흘렸느냐?”십자가는 지도자들의 경쟁을 멈추게 하는 자리입니다.
6. 그리스도 우리 주님 앞에서는 자랑이나 우월함-파벌이 설 수 없습니다.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 세례는‘누구 편’이냐는 표가 아닙니다. 세례는‘누구에게 속했는가’의 표입니다. 사람들이 세례조차 사람 이름을 붙여 자랑하고 사람 이름을 붙여 서열을 만들려 한다면 그 교회는 십자가보다 사람을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리더십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의 핵심이 무엇이라고 말하며 해법을 제시했나요?
실마리
7.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가장 먼저 한 말은, 책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분열되는 교회를 하나 되게 하고 싶어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했습니다. 그는“내 말 들어라.”“내가 맞다.”“너희가 틀렸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바울은 먼저 교회에서 리더십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이름 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돌려놓았습니다. 교회가 분열될 때 성도들의 눈에는 사람만 보입니다. 누구 말이 맞냐, 누가 중심이냐, 누가 더 영향력이 있냐, 누가 더 옳은가? 바울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아니다, 너희는 예수님의 교회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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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말이란 무조건 의견을 맞추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생각을 똑같이 만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언제나 다양성이 있습니다. 성격도 다르고, 은사도 다르고, 기도 스타일도-찬양 스타일도 다릅니다. 문제는 그 다양함이‘편’이 되어버릴 때입니다. 바울이 말한 같은 말은“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사람이다.”“우리는 사람에게 속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했다.”“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뿐이다.”이런 고백이 있을 때 다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도‘감정 통일’이 아니라‘중심 회복’입니다
8. 이 말은“다 좋아해라, 다 친하게 지내라”가 아닙니다. 중심을 하나로 모으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 되려면 한 중심으로 모여야 합니다. 그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십자가의 복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사람들 이름으로 흩어져 있던 마음을 예수님의 이름 아래로 모으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아직 모든 것을 다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방향을 돌려놓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 이름이 커질수록, 교회는 쉽게 분열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다시 커지면, 교회는 하나 될 가능성이 생깁니다. 바울의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너희는 다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돌아와야 한다.
너희는 주님의 이름 안에서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책망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을 향해 길을 열어주었어요. 그는“너희가 너무 예민하거나, 리더십이 약하거나, 성격이 안 맞아서가 아니다.”바울이 본 그들의 실제 문제는 십자가가 중심에서 밀려난 것입니다. 사람의 이름이 커질수록 십자가는 작아집니다. 내 자존심이 커질수록 십자가는 멀어집니다. 내가 옳다는 마음이 커질수록 십자가의 은혜는 약해집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그는“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했습니다.(17절)
9. 그는 내가 중심이 아니다. 내 이름이 중심이 아니다. 내 사역이 중심이 아니다. 교회의 중심은 복음-예수 그리스도다. 교회가 하나 되려면‘사람 이야기’가 아니라‘복음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고요. 바울은 또“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17절)고 했습니다. 바울은 내 말로 사람을 감탄시키지 않겠다. 내 말로 사람을 붙들지 않겠다. 내 말이 능력이 되게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원한 것은 교회가 바울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붙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8절,“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교회를 다시 하나 되게 하는 힘은 어떤 이의 카리스마(능력)가 아닙니다. 말의 기술이 아닙니다.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만도 아닙니다.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제거합니다. 우리의 교만을 꺾습니다. 우리의 자랑을 내려놓게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가 같습니다. 누구도 잘났다고 말할 수 없고. 누구도 더 의롭다고 말할 수 없고. 누구도 남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나누지 않고 하나로 묶는 능력입니다.
복음 제시
10. 사도 바울은 복음의 중심이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했습니다.(13절) 교회의 주인은 어떤 지도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임이십니다. 구원의 근거는 지도자가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은 바울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속한 존재가 아니라“그리스도께 속한 자”입니다 (13, 15-16절) 세례도 사람 이름이 아닌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주어진 것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으로 서게 됩니다. 십자가의 도는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십자가가 구원과 생명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중심이며, 그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하고 하나 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기대
11. 교회가 분열되는 원인은 사람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가 중심에서 밀려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 이름을 내려놓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 붙들어야 합니다. 십자가가 중심이 될 때, 교회는 분열을 멈추고 하나 됨을 회복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자랑을 내려놓고, 판단을 멈추고,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이며, 한마음-한뜻으로 다시 합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교회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교회에 보내주셔서 세상 앞에 복음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하십니다. 18세기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던 존 웨슬리(감리교)와 조지 윗필드는 신학적 차이로(예정론) 크게 갈렸습니다.
(영국 성공회 출신-감리교 알미니안/칼빈주의자) 그들은 서로를 원수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논쟁보다 더 큰 복음,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의견은 달라도 십자가 앞에서는 한 형제였고, 그 복음이 공동체를 무너지지 않게 했습니다. 웨슬리는 윗필드를 기념하는 글에서, 어떤 차이도 관계를 깨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말하며‘agree to disagree(서로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논쟁하지 않고 그만하자')’라는 표현을 남겼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한다는 것은 내가 옳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도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살아가도록 이 시간 함께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