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1342~1398)은 1366년 1월과 12월에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게 되자 부모묘소가 있는 영주 이산면 신암리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하게되며 이때 인근에 있던 이들이 모여들자 경서를 강론하였다.
문천서당(오른쪽), 봉화정씨 시조 사당인 모현사(왼쪽)
훗날 선생은 조선개국에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1398년 이방원에 의해
참화를 당하였으며, 무려 467년이 지난 1865년(고종 2)에야 신원되었다.
1926년 후학들이 선생의 덕을 기리고자 이곳에 문천서당을 세웠으며,
2008년 봉화정씨 후손들은 시조(정도전의 고조부)의 제단을 설치하였다.
문천서당(文川書堂)
시묘살이하며 강론할 때 이 소식을 들은 정몽주가 맹자 한질을 보내주었다.
선생은 맹자를 정독하고 연구하여 훗날 고려말 정치개혁을 확고히하고
다시 이성계와 함께 조선개국을 설계하고 국가이념을 정립하였으며,
통치제재를 정비한 실천적 지식인이요 전략가가 되었다.
봉화정씨 사당인 모현재
정도전은 봉화정씨로 영주가 고향이고 목은 아색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서울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경복궁을 창건하였다.
경복궁의 이름은 물론 정전인 근정전, 경복궁의 남문인 광화문, 숭례문, 홍인문 등
서울의 모든 궁궐과 문의 이름을 짖고 수도의 행정분할도 손수 결정했다,
사당 출입문
그외에도 손수 진도(陣道)를 만들어 중앙의 관리는 물론 각 지방의 군사들에게
군사연습을 시키기도 하였는데 이는 결국 왕자들을 힘없는 바지저고리로 만드는
위협으로 비처져, 1398년 8월 26일 이방원의 칼날에 희생하게 되는 빌미가 되었다.
정도전이 죽으면서 남긴 시
30년 세월 온갖 고난 겪으면서
쉬지않고 이룩한 공업
송현방 정자에서 한잔 술 나누는 새
다 허사가 되었구나.
사당인 모현사(慕賢祠)
봉화정씨의 시조는 정공미(鄭公美)로 고려후기 봉화현의 호장(戶長)을 지냈다.
정공미의 증손자 정운경(鄭云敬)은 고려 충숙왕 때 검교밀직제학,
보문각제학, 상호군을 역임하였다.
정운경의 아들이 정도전이며, 즉 시조 정공미는 정도전의 고조부이다.
봉화정씨 추원제단비(奉化鄭氏 追遠祭壇碑)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고려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추대하여 봉화현충의군에 봉해졌으며,
이 후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개국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봉화백(奉化伯)에 봉해졌다.
그러나 1398년 이방원이 무인정사를 일으켜 피살되었다.
봉화정씨 제단 원경
봉화정씨 제단 전경
봉화정씨는 봉화현에서 대대로 호장을 세습해온 호족세력으로
봉화지방 토속 성씨인데. 다만 봉화를 관향으로 정한것은
정운경과 정도전 부자의 숭덕(崇德)과 위업(威業)에서 비롯된것이라고 한다.
봉화정씨 시조 제단
중앙 석비(시조) : 고려정의대부 호부령 증 추밀원사 봉화정공 휘 공미(公美)
배 대군부인 제단
좌측 석비 : 고려통의대부 비서랑동정 증 밀직부사 상호군 봉화정공 휘 영걸(英桀)
배 현부인 화원석씨 제단
우측석비 : 고려군기감정 증 봉익대부 검교밀직제학 보문각제학 상호군 봉화정공 휘 균(均)
배 국대부인 순흥안씨 제단
봉화정씨 제단설치 공적비
인근마을의 만취당(晩翠堂) 안내석
만취당 정문
영주 만취당(晩翠堂)은 이산면 신암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로
김개국(金蓋國, 1548~1603)이 1587년(선조 20)에 세운정자이다.
만취당 건물
김개국의 본관은 연안, 자는 공제(公濟), 호는 만취당이다.
벼슬은 예조좌랑, 충청도와,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워 예빈시주부가 되고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만취당과 사당
이 정자는 건물 서쪽에 있는 소나무 수백 그루가 사시사철 푸른 것을 보고
이를 본보기로 삼아 자신의 호와 이 건물의 이름을 만취당이라 하였다고 한다.
영주지역의 연안김씨를 대표하는 건물로 건축연대와 중수기록까지 확실하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51호이다.
만취당 사당
우금촌 두암고택(友琴村 斗巖古宅)
이 건물의 정침은 두암 김우익(金友益, 1571~1639)이
1590(선조 23)년 19세에 분가하면서 건립하였다고 한다.
좌측의 독립된 사랑채인 함집당은 손자 김종호의 호를 딴 집으로
후대에 지어졌으며, 김우익은 해미현감과 한성부윤을 역임하였다.
김우익고택의 정침(안채)이며 이웃하여 안쪽으로는
김우익의 손자 김종호를 양자 보내면서 지었다는 만간암 건물이 있다.
사랑채인 함집당 건물
첫댓글 정도전은 분명히 조선 개국 공신이었지만 이방원에게 참형을 당하여 무려 460여 년이 지나서 비로소
그 명예가 회복되었습니다. .
결국 올곧은 선비는 역사가 알아주는군요. 영주가 고향인것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최근 정도전에 대한 서적과 연속극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귀감이 되었습니다.
더운 여름날 멀리까지 가서 뜻 깊은 현장 잘 담아오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도전은 중신들 위주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했고
이방원은 왕권을 잡아 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다스리고자 한것이
근본적인 차이이고 결국 죽임까지 당하였다고 보겠지요.
그로인해 정도전은 조선시대 내내 죄인읙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채
후손들도 벼슬길에 나가지 못한 비운을 맞은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