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끈미끈한 김밥~” 침 꼴깍
한반도의 최남단 한려 해상국립공원 중심부에 자리한 항구도시 충무는 단연코 한국의 나폴리라 할 만하다. 1995년에 충무시와 통영군의 통합으로 지금은 통영(統營)이 되었지만 도처에 유·무인도가 수없이 널려 있는 한려수도의 시발점이면서 세계 제일의 청정해역을 거느리고 있다.
1604년 한산도 수군통제영을 통영으로 옮겨오면서 13공방(工房)을 설치한 까닭에 나주반, 해주반에 이어 통영반이 유명했고 통영갓에다 매물도의 돌미역은 진상품으로 이름 높았다. 13공방 중 통영반은 나전공방에서 그리고 통영갓은 입자공방(笠子工房)에서 그 전통의 맥이 형성되었다.
충무김밥이 폭발적 인기를 얻고 통영의 명물로 등장한 것은 20년 전인 ‘국풍(國風) 81’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각종 매스컴에서는 지명에다 익살스레 할머니의 몸짓까지 보태 넣어 ‘충무 뚱보할매김밥’이라 명명해 떠들기도 했고, 애칭으로 ‘충무 할매김밥’ 혹은 지명만을 따서 ‘충무김밥’으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추켜세움으로써 유명세를 탔다. ‘충무 뚱보할매김밥집’은 충무 문화마당 앞에 있다.
당사자인 어두이(魚斗伊) 할머니는 당시 60세였다. 여의도 현장의 김밥 파동을 지켜봤다는 통영의 한 시민은 ‘김밥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군침을 흘리며 길게 줄을 설 정도였다’고 당시를 돌이켜보기도 했다. 어두이 할매의 ‘김밥 인생’은 광복이 되고 일본에서 고향인 통영으로 돌아와서부터 출발했으니 어언 반세기가 넘은 셈인데 필자가 찾아갔을 때는 이미 3년 전에 고인이 되고 없었다. 대신 며느님이 그 맥을 잇고 있었으나 예전같지 않음을 토로한다.
충무김밥의 특징은 김밥 속에 반찬을 넣지 않고 참기름을 바르지 않은 생김을 쓴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또 쌀은 인근 고성쌀을 쓰고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펴 밥을 짓기 때문에 밥맛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루에 쌀 두 가마는 족히 소화해 냈다니 할매김밥 시절이 어떠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꼬챙이에다 주꾸미 대신 오징어회 몇 점과 넓적넓적하게 썬 무깍두기가 반찬의 전부다. 지금도 무깍두기의 아삭아삭 씹히는 맛은 그대로고 꼬챙이 대신 이쑤시개를 사용한다.
충무김밥의 유래를 따져보면 이렇다. 예전에 육로 교통편이 없는 시절에는 부산과 여수간을 갑성호·금성호·원양호 등 여객선이 다녔는데, 위치상 중간 지점이 통영이었다. 그래서 출발점이 부산이건 여수건 통영항에 닿으면 점심 끼니때가 되기 때문에 뱃고동을 울리며 배가 들어오면 전마선을 탄 김밥장수들이 잽싸게 배에 올라 ‘김밥이요 김밥’ 하며 김밥을 판 데서 출발했다. 1950~60년대에 걸친 이른바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다.
그래서 뱃고동 소리에 어우러지는 ‘김밥이요 김밥’ 우스갯소리를 하면 중늙은이들은 금방 향수에 젖곤 한다. 따끈따끈한 김밥과 무깍두기, 오징어회, 여기에 반주 한 잔이면 훌륭한 한끼의 점심이 된다. 더러는 밤참이 되기도 하고 야유회나 등산을 가고, 해금강 관광선을 타거나 낚시를 나갈 때도 김밥은 어디나 널려 있으므로 통영 사람은 밥 준비가 따로 없을 정도다. 1인분 8개에 3000원이니 부담도 그만큼 줄어드는 셈이다.
필자는 마침 경남문인협회의 초청특강 참석차 매물도와 한산도를 돌아볼 기회가 있어 통영에 갔다가 그들과 헤어진 밤늦은 시간에 김밥을 들 수 있는 기쁨을 맛보았다. 게다가 청마 유치환 시인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곤 했다는 중앙동 큰길 뒤의 우체국 앞을 서성거리다 책처럼 펼쳐진 돌 위에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느니라’고 적힌 ‘행복’이란 시구(詩句)를 읽을 수 있어 즐거웠다.
사랑에는 소유와 이기심의 칼날도 없다는 청마의 시를 읽었으며, 또 청마문학관에도 갈 수 있었다. 이 사랑의 순정성을 충무의 밤바다가 일깨워 주었다. ‘뚱보할매’는 가도 김밥은 남고, 시인은 가도 시는 남고, 이것이 충무 바다의 넉넉한 인심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