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에서 블루스 거인이 되기까지, 스티비 레이 본의 음악 인생
THE MUSICAL LIFE OF STEVIE RAY VAUGHAN, WHO ROSE FROM OBSCURITY TO BECOME A BLUES TITAN.
By Bill Milkowski
번역&편집 권지영
그는 아마 당대 최고의 위대한 블루스 기타리스트였을 것이다. 1990년 8월 27일-그의 36번째 생일을 딱 36일 남겨두고- 라이브 공연을 마친 후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고인이 된 스티비 레이 본은 폭발적인 벤딩과 온몸이 떨리는 듯한 비브라토, 엄청난 soul을 가지고 연주를 했다. 그의 자그마한 유산-리더로서 낸 다섯 장의 앨범과 다수의 강력한 세션 작업-들은 그의 형 지미 리 본(Jimmie Lee Vaughan)과 함께 오랜 기간의 협동으로 만들어낸 (그의 사후에 발매된) 1990년 앨범 Family Style에서 끝이 났다. 락앤롤과 부드러운 R&B, 펑크와 가슴 여미는 블루스가 균형 있게 믹스된 이 앨범은 SRV로 하여금 6,70년대 Vaughan 형제가 듣곤 했던 음악의 트리뷰트이자 사우스 달라스(South Dallas, SRV의 고향) 시절로 돌아가게 해주었다.
스티비 레이 본(Stevie Ray Vaughan)은 1954년 10월 3일에 Big Jim 과 Martha Vaughan 사이에서 태어났다. 3살 반 먼저 태어난 형 Jimmie 는 SRV에게 일찌기부터 그의 레코드 콜렉션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의 레코드 콜렉션은 각각 특색이 있는 Jimmy Reed, Freddie King, Albert King, B.B. King, Kenny Burrell, Albert Collins, Charlie Christian, Django Reinhardt 같은 기타 스타일리스트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스티비는 1963년, 8살의 나이로 처음 기타를 들었다. "난 드럼을 치고 싶었는데, 내겐 드럼이 없었죠." 1984년 인터뷰에서 그는 회상했다. "그담엔 색스폰을 연주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내가 낼 수 있는 소리라곤 끽끽대는 것밖엔 없었어요."
"내 형은 기타를 연주했어요. 그래서 난 나도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죠. 형은 집에다 기타를 두고는 나에게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요. 당장에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거란 것을 알아차렸죠."
스티비의 첫 일렉 기타는-Jimmie 가 준 선물- 할로우 바디 깁슨 메신저(Gibson Messenger) 모델이었다. 거기서부터 그는 1952년 펜더 브로드캐스터(Fender Broadcaster)까지 나아가게 되었다.-이 역시 그의 형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그때에, SRV 는 처음으로 앨범을 구입하게 되는데, 바로 Lonnie Mack 의 연주곡 히트 앨범인 "Wham"이었다. 이 것과 몇몇의 Albert King 앨범들은 Stevie Ray가 그 자신만의 기타 스타일을 형성하게 해준 주된 원료가 된다.
1968년에 그는 54년 Black Les Paul TV 모델을 구입하고 첫 밴드인 R&B 류의 음악을 하는 블랙버드(Blackbird)에 가입했다. 이 밴드는 당시 스티비가 좋아했던 '행크 발라드 & 미드나이터스(Hank Ballard & the Midnighters)'와 '자니 지 & 지-멘(Johnny G & the G-Men)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블랙버드에 가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52년 솝바 픽업이 달린 레스폴 골드 탑을 구입했고 더 챈톤스(The Chantones)라 불리는 밴드에서 학교 친구인 토미 섀넌(Tommy Shannon)과 함께 연주를 시작했다. 그는 또한 틈틈히 형 지미의 밴드인 텍사스 스톰(Texas Storm)에서 베이스를 연주하기도 했다.
이듬해 스티비는 -아마도 Jimi Hendrix 의 엄청난 영향덕택에- 그의 첫 스트라토캐스터인 63년산 메이플 넥 모델을 구했다. 그는 이 스트랫을 그가 고등학교 시절에 가입한 Cast of Thousands 의 멤버일 때 사용했다. 16살 Stevie 의 희귀한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앨범 A New Hi 는 1971년 발매된 달라스 지역 밴드의 컴필레이션 앨범으로 Cast of Thousands 의 트랙을 담고 있다.
1969년 후반에 지미는 오스틴으로 이사를 하는데, 이곳은 일년전 자니 윈터가 그의 Progressive Blues Experiment 앨범을 녹음한 Vulcan Gas Company 나이트 클럽 주위를 중심으로 괄목할 만한 블루스 씬의 발전이 있는 곳이었다. 오랜 스티비의 친구인 마이크 켄드리드(Mike Kendrid)는 회상하길,
"그 당시 달라스에선, 히트 곡을 연주하든지 아니면 아예 연주를 포기하든지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달라스로부터 블루스를 사랑하는 자들-나,지미,스티비,폴 레이-의 일종의 대량 이주가 발생했었죠. 우린 모두 결국엔 오스틴으로 오게 되었어요. 왜냐면 음악적 분위기가 훨씬 더 블루스와 그 원류에 개방적이었기 때문이었죠."
지미는 미래의 유명한 썬더버드(Thunderbirds)의 베이시스트 키쓰 퍼거슨(Keith Ferguson)도 포함된 기세좋은 트리오로 구성된 Storm 밴드에서 그 "블루스와 원류"를 연주했고 곧 오스틴 지역에서 그의 기타 연주와 블루스,R&B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스티비는 학교를 그만두고 197년 봄에 오스틴으로의 이주에 합류했다. 얼마 후에 그는 Johnny Winter의 리듬 파트를 주로 맡던 Crackerjack 밴드-드러머 Uncle John Turner와 베이시스트 Tommy Shannon-에 참여했다. 그해 여름에 그는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Albert King의 라이브 연주를 처음으로 보게 된다.
"난 그날 밤 다른 곳에서 공연이 있었어요." 스티비는 기억했다. "재빨리 셋업을 한후에 난 마이크에 대고 이렇게 말했죠. '신사 숙녀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쩔지 모르겠지만, 난 지금 Albert King을 보러 갈겁니다. 여러분들도 바보가 아니라면 그러길 바랍니다.' 그리고는 짐싸갖고 자리를 떴죠."
"내가 Albert의 공연장에 도착했을 땐, 그곳엔 고작 75명정도의 사람들만이 남아있었어요. 난 무대 바로 옆의 테이블에 서선 공연 내내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죠. 어느정도 쇼가 진행된 후에 그는 마이크 스탠드를 들더니 내가 서있던 곳까지 다가와서는, 마이크를 놓고 바로 거기에 서서는 나에게 남은 시간 내내 노래하고 연주했어요. 그는 날 전혀 몰랐었죠. 난 그저 삐쩍마른 98 파운드짜리 땀에 흠뻑 젖은 어린 아이였어요. 난 '좋았어!' 뭐 이런 식으로 소릴 질렀어야 했었을 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가 연주를 마쳤을 때, 그는 내게 걸어와서는 그의 기타를 내게 건네주곤 악수를 했어요. 난 너무 좋아 기절할 것 같았죠. 절대 그 일을 잊지 못할 거예요."
3년 반 후에, Antone's 의 무대위에서 어린 Stevie Vaughan (당시 알려진 대로) 그 위대한 사람과 함께 잼을 하는 스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처음에 내게로 걸어와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며 '자네를 기억해-우린 3년 반쯤 전에 만났지.'라고 말했어요. 놀라운 일이었죠, 하지만 그는 절대 사람들을 잊지 않아요. 그리고 그 날 밤에 그는 나를 무대위로 불렀어요. 나는 내가 그와 한 곡정도 같이 하게될거라 생각했죠. 하지만 나는 그날 밤 내내 그와 함께 연주를 하게되었죠."
작가 Brad Buchholz 는 Dallas 아침 뉴스에서 Antone's 에서의 그 마술같은 밤을 회상했다. "그날밤 허리춤 낮은 나팔 바지 차림에 눈을 내리뜬 그 깡마른 소년은 늙은 알버트 킹에게 한방먹였다. 어떤 점에서 Mr. King 은 어린 스티비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고, '이 작은 꼬마가 내 기타를 겁주고 있구만.'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이 무대 커튼 뒤로 그의 기타를 숨겼다."
1973년 봄에 어린 스티비는 Crackerjack 밴드를 나와 Nightcrawlers 라는 유명한 지역 R&B 밴드에 가입했다. 그때까지, 블루스와 R&B는 Willie Nelson 과 Waylon Jennings 의 무법자 컨트리 락을 대신하여 오스틴의 주류 음악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당시 가장 잘 나가는 나이트 클럽중의 하나는 One Knite 였다. 이곳은 갑갑한 바였는데 클럽 T-셔츠가 선전하듯이 "당신의 모든 꿈이 실현되는 술집"이었다. Knite 에서는 평일밤에도 최고의 그 지역 밴드들의 공연이 있었는데 Jimmie Vaughan 과 Texas Storm(매주 월요일), 어린 Stevie Vaughan이 함께하는 Mark Benno 와 Nightcrawlers(매주 수요일) 등이 바로 그들이다. 오랜 SRV 의 팬 Margaret Moser-Malone 은 그녀가 쓴 당시의 오스틴 연대기 평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Nightcrawlers 는 그 밴드 이름이 소리나는 것과 똑같았어요.-혼성의 퉁명스런 음악가 멤버들은 하프와 보컬에 Drew Pennington, 베이스에 Keith Ferguson, 드럼에 Doyle Bramhall, 기타에 스티비 그리고 이에 어울리는 다른 사람들이 밴드에 합류하거나 빠져나가곤 했지요. 그때가 내가 19이나 20살쯤 되었을 때였어요. 스티비 역시 19살쯤 되었을 때였죠. 젊었고 블루스에 푹 빠지기에 아주 좋은 시기였어요. 나는 그저 One Knite 에서의 밤을 위해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그리고 나는 특히 Nightcrawlers 의 스티비 본을 보기 위해 살았었어요. 그 작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그의 퍼포먼스에 나는 완전히 자극받았죠..."
1973에 Stevie 는 그의 63년 메이플 넥 스트랫을 59년 로즈우드 핑거보드 모델-이후 그의 활동 내내 그의 '넘버 원'으로 남게 되는-로 교환했다. (불길한 사고로, 그가 아끼는 59년산의 넥은 1990년 7월 9일, 뉴저지의 Garden State Arts Center에서 거대한 무대 장치가 SRV 의 여러 기타 위로 떨어져 두 조각으로 쪼개져버리고 만다.)
어린 스티비는 1974년 말에 Nightcrawlers를 떠났다. 그리고 Denny Freeman 과 나란히 밴드 Cobras 의 세컨 기타리스트가 된다. "밴드와 함께한 스티비의 첫 공연은 1975년 새해 바로 전날이었죠." Cobra 의 보컬리스트이자 리더인 Paul Ray 는 회상한다. "나는 그와 Jimmie를 달라스 시절에 그들이 아주 어렸을 적부터 알고 있었어요. Stevie 가 14살에 Jimmie 의 밴드에서 베이스를 쳤던 걸 본 것이 기억나는군요. 그리고나서 스티비가 상경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깡마른 어린 기타 플레이어에 대해 이야기해대기 시작했죠. 난 그를 내 밴드에 데려올 수 있어서 기뻤어요. 그가 2년동안이나 남아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죠. 뭐라고 말하겠어요? 그는 대단했었죠."
SRV 가 Cobras 와 함께 하는 동안, 밴드는 지역적으로 45판을 발매했다. 한 면에는 "Texas Clover"란 곡이 Denny Freeman을 리드 기타로 하여 있었고, 다른 쪽에는 "Other Days"라는 곡이 Stevie 의 번개같은 스트랫 작업으로 꾸며져 있었다. 환상적인 두 기타 마차로 인해 Cobras 밴드는 오스틴에서 팬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어내었다. Stevie Ray 가 노래를 시작한 것은 이 밴드에 있었을 때다.
"나는 After Hours 라 불리는 Congress Avenue의 작은 클럽에 청중들 사이에 앉아있었죠." 오스틴 기타리스트 Van Wilks 는 회상한다. "난 Cobras 의 스티비를 한번 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Stevie 가 Freddie King 의 'Goin' Down'이란 곡을 부르기 시작했죠. 전 깜짝놀라 의자에서 구를뻔 했어요. 모든 사람이 그가 위대한 기타 플레이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가 노래 부르는 것을 본적은 없었거든요. 나중에 그는 그의 목소리를 놀랄만한 악기로서 발전시켰죠. 비록 그가 그것에 대해 여전히 부끄러워하긴 했지만 말이죠. Hendrix 도 자신의 목소리를 그다지 맘에 들어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하지만 난 항상 그는 끝내주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죠. Stevie 도 마찬가지예요. 내 말은, 그에겐 단지 기타로 어떤 음을 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무언가가 있었단 거예요."
두가지 중대한 사건이 동시에 오스틴을 강타했다. Jimmie Vaughan 이 Fabulous Thunderbirds를 결성했고, Clifford Antone 이 6번가 거리에 또 하나의 블루스의 안식처(클럽)를 개장한 것이다. 그는 클럽 주인으로서 최근에 회상하길, "나는 수입 의류상을 하고 있었는데 뒤쪽에 오래된 큰 방에는 늦은 밤까지의 잼 세션을 위해 앰프,드럼,PA 등이 설치되어 있었어요. 난 베이스를 치고 지미와 스티비는 기타를, Doyle Bramhall 은 드럼을 쳤죠.-그저 한 무더기의 친구들이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아침 4시,5시까지 블루스 잼을 하곤 했어요. 시에서 새벽 두시 음주 법안을 통과시켰을 때 [이전 까지는 법에 의해 바는 자정까지만 열도록 되어있었다.] 우린 그냥 건물을 찾아 이 도시에서 한번도 보지 못한 최고의 클럽을 열었던 거죠.
1977년 여름에 스티비는 Cobras를 떠나 Triple Threat Revue 란 밴드를 결성했다. 여기엔 Mike Kendrid ("Cold Shot"의 작곡가)가 피아노를, W.C. Clark 가 보컬과 베이스를, Dallas 드러머 Freddie Pharaoh 와 열정의 Fort Worth 보컬리스트 Lou Ann Barton(이 자는 스티비의 새 밴드에 가입하기 위해 T-Birds를 떠났다)이 있었다. 스티비의 Jimi Hendrix 커버에 Lou Ann의 사랑 발라드와 Janis Joplin 커버, 그리고 W.C. 의 Freddie King 커버로 밴드는 말 그대로 Triple Threat(삼중 위협) 였다. 하지만 결국 충돌이 일어났다. Austin American Statesman 의 블루스 명수 Michael Point 가 말했듯이, "Lou Ann 은 정말로 자신을 기타 파트에서 뒷받침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거지 자신과 함께 나오는 기타 영웅을 원한게 아니었지요. 그리고 스티비 역시 백업 보컬리스트를 원했지, 스타를 원한게 아니었습니다. 그 긴장이 종종 무대위에서도 보였죠."
이러한 갈등은 스티비로 하여금 Lou Ann을 초기 Double Trouble (그가 좋아하는 Otis Rush 의 곡 이름을 딴) 밴드의 라인업으로 포함시키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이 밴드는 그가 1979년 5월에 결성한 것이다. Cleve Hattersley, 1978년에 뉴욕으로 이주한 오스틴의 뮤지션은 1980년에 Double Trouble 의 첫 에디션을 맨하탄의 Lone Star에 예약한 것을 회상한다. "우리는 100달러에 그들을 출연 예약했었죠. 그들은 오스틴에서부터 쭈욱 차를 타고 올라와서는 아는 친구들 집에 난입했어요. 공연은 좋았어요. 하지만 나중에 Lou Ann 이 약간 통제 불능이 되어버렸어요. 그녀는 정말 취해서는 맥주 잔을 집어던지고 웨이트리스에서 소릴 질러 댔어요. 스티비는 당연히 화가났죠. 그게 밴드가 함께한 마지막 공연이었어요."
1981년에 스티비는 Double Trouble을 Crackerjack 밴드 친구였던 Tommy Shannon의 베이스, Chris Layton을 드럼으로 하는 파워 트리오 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이 시기가 그가 자신을 스티비 레이라 부르기 시작한 때이다. 다시 혁신된 그룹은 스티비 레이에 확실한 강조를 두고 Albert King 스타일의 블루스 파워와 Hendrix적인 무대퍼포먼스로 힛트를 치며 고향 Austin 의 Rome Inn, Antone's 와 The Continental Club 등의 블루스 공동체에 귀환했다. SRV는 아마도 그의 기타 파워에 있어서 최고치에 다달아 있었고 Eric Johnson 과 함께 "오스틴 기타 신"이라는 타이틀 권에 대한 비공식적인 선의의 경쟁에 붙들려 있었다.
오스틴에 거주하는 영웅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명성있는 R&B 프로듀서 Jerry Wexler 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그는 1982년에 텍사스로 날아와 스티비 레이의 집 잔디밭에서 그를 붙들었다. 이 자의 재능에 상당한 감명을 받아 Wexler 는 그의 입김을 발휘해 더블트러블 밴드를 1982 년 스위스에서 열리는 몬터레이 재즈 페스티발에 출연시키게 하여 대성공을 거둔다. 스티비 레이의 쏘는듯한 릭(licks)들은 유럽의 청중들에게 잘 먹혀들었다. 이 텍사스 사람의 격정적인 기타실력에 특히 감명받은 사람은 David Bowie 였다.더블트러블의 공연 후, 보위는 스티비 레이와 만나 자신의 다음 앨범에 그를 출연시키려 했다. 보위는 결국 1983년 세계 투어 공연과 Let's Dance 앨범에서 스티비를 출연하도록 고용할 수 있었다. SRV 는 펑키한 바탕에 Nile Rodgers 가 만들어 낸 그루브와 Albert King 스타일의 릭을 섞어 곡을 연주했다. 하지만 그는 투어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명백하게도, 한가지 계약 조항이 더블트러블이 보위의 공연의 오프닝을 열긴 하지만 스티비 레이는 기자들에게 자신의 연주에 관해 데이빗 보위 공연의 범주에서만 말할 수 있지 자신의 밴드로서는 불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또한 두 그룹 사이에 재정적인 논쟁이 있었다는 루머도 존재한다. SRV 는 투어에서 빠져나와 더블트러블과 함께 바에서 연주를 계속하기 위해 오스틴으로 돌아왔다.
"그건 정말 진정한 텍사스적인 행동이었습니다." Austin American Statesman 밴드의 Michael Point 가 말했다. "기본적으로, 스티비 레이는 '좆까시오 미스터 보위, 우리는 우리 총을 쓸랍니다.' 그리고 그런 개성적인 태도가 텍사스주 사람들에게 많은 점수를 얻게 했어요. 사람들은 그가 영국인 락 스타의 들러리가 되지 않고 자신의 음악을 위해 홀로선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 했지요."
얼마지나지 않아 다시 한번 스티비 레이 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82년 몬터레이 페스티발 이후 그의 팬이 된 잭슨 브라운(Jackson Browne)은 그에게 자신의 Down Town 스튜디오를 더블 트러블 밴드가 레코드 사와 계약을 맺을 수 있게 데모 테잎을 만들 수 있도록 사용하게 해주었다. 더블 트러블의 이런 데모 작업은 결국 전설적인 스카우터이자 프로듀서인 존 해몬드(John Hammond)경에게 전해졌다. 그는 찰리 크리스찬(Charlie Christian), 밥 딜란(Bob Dylan),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브루스 스프링스턴(Bruce Springsteen) 등을 발굴해 냈었다. 스티비 레이의 옛 공식에 대한 신선한 재해석에 흥분된 해몬드는 그 데모를 구입하고 영향력을 발휘해 Epic 레코드와 더블 트러블간의 계약을 보장해주었다.
스티비 레이가 계약을 맺은 후 해몬드와 함께 한 인터뷰에서 이 프로듀서는 자신이 발견에 대해 정열적으로 말했다. "내가 직접 처음 본 텍사스 출신 기타 플레이어는 티 본 워커(T-Bone Walker)였지요, 그때가 1936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스티비 레이는 그 위대한 전통 속에 있습니다. 그는 그런 어떤 직접적인 품질을 지니고 있어요. 게다가 훌륭한 쇼맨쉽역시 구비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T-Bone Walker 가 그랬던 것 처럼요."
스티비 레이의 첫 앨범, 텍사스 플러드(Texas Flood) 앨범의 음악은 열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SRV의 원곡 "Pride and Joy" 와 "I'm Crying"에서의 거칠게 쪼개진 리듬 기타 파트 구조는 두터운 톤의 텍사스 셔플을 SRV 의 트레이드마크로 확립시켰다. 그의 솔로는 강렬함과 관중들로부터의 본능적인 반응에 불을 지피는 자유분방함으로 장식되었다. 그리고 또한 화려함까지 있었다. 실크 스카프와 표범가죽 코트, 판초, 인디안 전통 의상 모자에 카우보이 부츠, 머리 뒤로 기타를 치거나 이빨로 기타를 연주하는 그런 그의 취미는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스티비 레이 본이었다...
스티비 레이가 미디어가 꾸며낸 엉터리가 아니었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명한 일이었다. 그가 철저하게 클래식 블루스 마스터들의 업적에 기초하고 있었을 뿐아니라-그의 솔로는 모든 세대의 블루스 플레이어들의 영향을 받았다-그의 연주는 'real deal'을 의미할 수 있는 어떤 정신과 정직성에 고취되어 있었다. 그는 거친 텍사스 나이트클럽에서 기술을 연마했고 그것은 그의 연주 전체에서 볼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진실했고 동시에 끝내야 할 때를 절대 잊지 않는 단호함을 보였다. 1988년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엔 무슨 일을 하든지 이미 볼장 다 본 것같이 보여요. 일렉트릭 블루스가 미국 음악 형식으로 발전하고 있을 때에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면 정말 끝내줬을 텐데. T-Bone과 Muddy, Hubert Sumlin, Jimmy Rogers, Lightnin' Hopkins, Buddy Guy, Albert King, B.B. King 그리고 Freddie King 또 수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분명 이런 종류의 음악을 만드는 것이 어떤 자유로운, 자유로운 느낌이었을 겁니다. 그들은 선구자로서 존경받아 마땅하죠.-이 사람들이 바로 정말 인정받아야 마땅할 사람들입니다."
Texas Flood 는 빌보드 차트에 38위까지 올라갔고 1983년 500,000장 이상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 스티비 레이는 락부문 최우수 연주(번개같은 텍사스 부기 곡 "Rude Mood"), 최우수 전통 블루스(깊은 블루스 곡 "Texas Flood")로 그래미에 노미네이션되었다.
1984년 Couldn't Stand the Weather 앨범이 타이틀 곡을 위한 스티비의 첫 비디오와 함께 발매되었다. 자연스럽게 이 텍사스 정력만빵(?)의 비디오 클립은 MTV에서 방송을 탔다. 이러한 더 폭 넓어진 홍보를 통해 앨범은 플래티넘을 기록할 수 있게 되었고 스티비 레이의 위치를 군림하는 텍사스 기타 왕으로서 더 굳혀주었다. "Cold Shot"이나 "Honey Bee"같은 약간 엇박의 텍사스 셔플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해 가면서 동시에, 그는 어린 팬으로서 지미 헨드릭스의 그림자를 뒤쫓았다. 만일 그 연관성이 Guitar Slim의 "The Things That I Used to Do" (지미의 "Red House"에 대한 일종의 화답 곡) 곡의 SRV 버전에서 명확하지 못했다면, 스티비 레이의 거의 충실하다 싶은 "Voodoo Chile(Slight Return)"에서는 확연히 드러났으며 이는 콘서트에서의 주종목이 되었다.
오르간 연주자 Reese Wynans 는 1985년에 더블 트러블에 가입하여 Soul to Soul 앨범에서 계획된 더욱 더 크고 풍성한 음악을 밴드에게 안겨주었다. 스티비는 계속하여 "Say What!" (지미 헨드릭스의 "Rainy Day Dream Away"에 대한 화답 곡)이나 헨드릭스가 Electric Ladyland에서 커버한 얼 킹(Earl King)의 "Come On"같은 곡으로 지미의 그림자를 뒤쫒았다. 스티비 레이는 계속해서 "Lookin' out the Window"와 "Look at Little Sister"에서 텍사스 셔플을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Albert King 에 빠져들었다. 특히 이런 경향은 "Ain't Gone 'n' Give Up on Love"같은 슬로우 블루스 곡과 가스펠 분위기의 "Life without You"이세 찾을 수 있다. 이 앨범(Soul to Soul)은 골드를 기록했다. 이 앨범은 또한, 최소한 지미의 죽음 이후의 세대들의 눈으로는 SRV를 지미 헨드릭스의 진정한 후계자로서 인정받게 하는데 공헌했다.
어떤 면에서 그는 진정한 후계자였다. "헨드릭스는 항상 그의 생각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스틴 기타리스트 밴 윌크스(Van Wilks)는 말했다. "그는 분명히 그의 마음과 손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언젠가 우리가 헨드릭스에 관해 이야기했던 때를-결국에는 항상 우리의 대화의 종착점이 되는- 기억합니다. 그 때 나는 내 지갑에서 지미의 묘지 사진을 꺼냈죠. 그 사진은 내가 시애틀에서 공연을 할 때 찍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지미가 워싱턴 렌튼가에 묻혔다는 사실을 알곤 경의를 표하기 위해 거길 방문했었죠. 어쨌든, 내가 스티비 레이에게 이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 그의 눈은 휘둥그레 커졌습니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스티비는 그저 서서는 손에 그 사진을 들고선 오랫동안 그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죠."
표면적으로는 스티비 레이 본의 삶은 사람들이 흔히 듣게 되는 장및빛 성공 이야기같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다른 문제가 존재했다. 그 기타 영웅은 점점 겁을 먹고 있었다. 약물 남용은 심각할 정도로 그의 의식을 흐릿하게 했고 그의 연주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투어 여행과 밤새도록 진을 빼놓는 2장짜리 Live Alive 앨범 세션 믹싱 작업은 스티비를 주저앉게 만들었다. 그는 스케줄 때문에 수 일간 깨어있어야 했고 코카인을 함으로써 작업을 해나갈 수 있었다. 결국엔, 1986년 10월 초에 런던 공연 때에 그는 무대 위에서 쓰러지고 만다. 본능적으로 그는 달라스 집의 엄마에게 전화로 구조 요청을 했다. "도와주세요. 여기 유럽 어디쯤인데 내 몰골이 진짜 말이 아니예요."
그는 며칠 후 미국으로 돌아왔다. 10월 17일에 그는 Marietta Georgia 에 있는 약물 치료 센터에 들어가서 11월내내 머물러 있는다. 그곳에서 나오자마자 그는 달라스로 돌아와 마약과 알콜, 그리고 오스틴에서 그를 시달리게 만들었던 늦은 밤까지의 일들로부터 탈출하려고 노력했다.
공개적으로 그의 알콜중독이 알려진 후에, 스티비 레이는 결의에 차 '익명의 알콜 중독자 12단계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리고 1988년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더 큰 신념과 투명함을 지니고 원기 재충전하여 컴백을 했다. 그의 이런 양지로의 발걸음은 1989년의 In Step 앨범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이때까지 그가 가장 공들이고 집중한 프로젝트였다. 앨범은 골드를 기록하고 Best Contemporary Blues Recording 으로 그래미상을 받게 된다.
스티비 레이는 멤피스에서 Family Style을 녹음하면서 그의 옛 본거지로 돌아오기 위해 잠깐의 휴식을 취했다. 8회 Austin Music Award 에 참석하기 위해, 그 이벤트는 "SRV 시상식"으로 불릴 수도 있었을 정도였는데, 그는 Musician of the Decade로 선택되었고 Record of the Decade(Texas Flood), Record of the Year(In Step), Single of the Year("Crossfire") 그리고 Musician of the Year 로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수수한 복장으로 차려입은 그는 Palmer Auditorium 에 가득찬 관중들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전 그저 살아있다는 것에 신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늘 제가 여기 있게 해주신, 제가 살아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저를 사랑해 주셨던 모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