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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도(生死島) 3-8
우장(右掌)으로 맹렬하게 전면의 삼십 대 장한을 쓸어가며 좌
수의 손가락을 소매 속에 감추고 소리 없이 퉁겨냈다. 한 줄기
송곳 같은 지력이 흔적을 감추고 뻗어 나가 귀문 고수의 등줄기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기척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
다.
『크아악-!』
처절한 단말마와 함께 펄쩍 뛰어오른 그 자가 경악의 눈을 부
릅떴다. 사국천의 지력에 관통 당해 버린 등줄기에서 한 줄기 선
혈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일면 군웅들을 향해 권장을 휘두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공
할 지력을 퉁겨 내 암중에서 귀문의 고수들을 하나 하나 척살해
가고 있는 사국천이었다. 그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처참하게
짓뭉개진 군웅들의 시신과 함께 귀문 고수들의 주검이 뒤섞여 있
었다.
『크하하하-!』
살육의 걷잡을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힌 듯한 사국천의 광소
(狂笑)가 어두운 밤하늘 위로 치솟아 퍼져 나갔다.
그의 광기가 극에 달해 있을 무렵이었다.
『어린 놈, 눈꼴시어 못 봐주겠구나!』
처참한 살육의 현장이 굽어보이는 한 거암(巨岩) 위에서 사자
후(獅子吼) 같은 호통이 터져 나왔다. 대파산의 무한절봉(無限絶
峰)들을 쩌르릉 울리는 엄청난 대갈(大喝)이었다.
『어윽!』
비교적 내력이 약한 자들은 그 일성에 실린 웅후한 진력을 견
디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또 어떤 놈이냐, 용기가 있으면 나서라!』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들고 사국천도 그의 충만한 진력을 실
어 사납게 소리쳤다. 그의 외침 또한 대파산협을 쩌르릉 떨어 울
리는 굉장한 소리였다.
『놈!』
거암 위에 한 괴인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우뚝 섰다. 달빛을
등지고 또 하나의 바위인 듯 솟아난 괴인의 어두운 모습이 보였
다. 불어가는 바람에 봉두난발한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흩날리고,
헐렁한 도포 자락이 휘날려 몸에 감겼다. 그 모습이 역한 피비린
내와 주검들로 뒤덮인 난전장의 지옥도와 어울려 귀기스럽기 짝
이 없었다.
『기다려라, 간다!』
괴인이 가볍게 바위를 차고 몸을 던졌다. 마치 한 마리의 거대
한 야조처럼 그의 신형이 괴괴한 달빛을 받으며 이십 여장의 허
공을 훌훌 날아 군웅들의 머리 위로 덮쳐들었다.
『이야아-!』
그의 입에서 굉렬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직 땅에 내려
서기도 전에 그의 해일과 같은 장력이 사국천을 삼켜왔다. 장력
권 안에 있던 자들 칠팔 명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기도 전에 그
여력을 이기지 못하고 세차게 내던져졌다. 놀란 사국천이 온 힘
을 다해 그의 청살강기를 마주쳐 나갔다.
꽈광-!
허공을 격하고 둔한 폭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쿵쿵거리며 연
신 물러서는 사국천의 눈이 비로소 본래의 차가운 제 눈빛을 되
찾은 채 가득 흔들리고 있었다.
『끼야아-!』
온통 얼굴을 뒤덮은 거친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괴인이 달을 보
고 포효하는 짐승처럼 날카로운 외침을 터뜨렸다. 그가 두 팔을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들었다. 마치 하늘을 떠받치는 듯한 천주부
동(天柱不動)의 자세였다.
그의 으스스한 외침이 여운을 끌며 사라져갈 즈음, 괴인의 몸
에 번개가 방전(放電)되는 듯한 기이한 열류가 흘렀다. 짜자작,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오고, 그의 전신에서 방출되는 극
강한 기의 실체가 새파란 빛을 방사(放射)시키며 요동치는 것이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보였다. 그것은 마치 먹구름 속에서 일시
에 수십 가닥의 번개가 요동치고 있는 것과 같은 광경이었다.
『헉, 자전신강(紫電神 )!』
그것을 본 사국천이 온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더니 크게 외쳤
다. 자전신강은 극강함이 천하제일로 꼽히는 극양지기(極陽之氣)
였다. 일기(一氣)가 뇌전(雷電)의 위력과 같다는 그것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사국천은 문득 한 인물을 떠올리고 놀란 가슴을
쓸며 정신 없이 물러섰다.
『크하하하, 노부가 오래간만에 통쾌하게 살계(殺戒)를 열어 보
리라!』
미친 듯 웃음을 터뜨린 괴인이 두 팔을 풍차처럼 휘두르며 허
공을 격하고 사국천을 향해 뇌전을 뿌려댔다.
짜자자작-!
사방이 온통 몸부림치는 뇌전들로 가득 채워진 듯 요란한 소리
와 함께 번쩍였다. 창백하게 질린 사국천이 온 힘을 다해 다시
한 번 청살강기를 뻗어 그것에 부딪쳐 갔다. 두 줄기의 눈부신
청광이 소리도 없이 어둠을 가르고 쭉 뻗어나가는 모습은 환상적
이기까지 했다.
쾅, 쾅, 쾅!
세 번의 요란한 폭음이 터졌다. 한 번의 폭음이 터질 때마다
괴인은 한 차례씩 어깨를 떨었고, 사국천은 쿵쿵거리며 한 걸음
씩을 물러서고 있었다. 그의 발자국이 마른 땅 깊이 파고들어 세
개의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가슴 앞 옷자락이 잿더미가 되어 부
서져 떨어졌다. 세 걸음을 밀려나고 겨우 멈추어 선 사국천이 울
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냈다.
『허어...?』
봉두난발한 괴인의 입에서 의외라는 듯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놈, 노부의 일장을 받아내다니 과연 큰소리 칠만 했구나!』
『다, 당신은... 북천일마... 단목 선배...?』
사국천이 다시 한 모금의 선혈을 울컥 토해내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물러서며 눈을 부릅떴다. 그 소리를 들은 군웅들이 사색
이 된 얼굴로 정신 없이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한 세대 전, 일존(一尊), 일마(一魔), 일신(一神)의 신화를 남
겼던 초인들 중, 일신이었던 검신(劍神) 공야승(孔爺乘)의 등장
이 무림에 파란을 일으켰는데, 이제 일마(一魔)로 꼽히던 북천일
마(北天一魔) 단목굉(檀木宏)마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노괴, 때맞추어 나타났구려!』
멀리서 그를 알아본 육초량이 반가운 외침을 터뜨렸다.
(노괴?)
그 소리를 들은 군웅들은 모두 크게 놀라 눈을 부릅떴다. 사국
천과 마백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저 놈이 드디어 미
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군웅들이 그 다음의 결과가 어떻게 될
지 두렵고 궁금한 눈으로 일제히 단목굉을 바라보았다.
『으하하하, 어린 놈, 아직도 살아 있다니 대견하구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크게 웃는 단목굉의 반응이
군웅들을 다시 한 번 경악시켰다. 그들이 모두 정신이 혼란해져
서 어리둥절할 때 성큼성큼 다가간 단목굉이 우악스런 손길로 육
초량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댔다.
『네놈이 저 강시를 베던 일검은 정말 대단했다.』
마백조의 얼굴이 구겨졌다. 강시라니..... 하지만 그는 성질을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북천일마 단목굉, 그 종잡을 수 없는
광인의 입에서 나온 말인 것이다. 육초량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
올랐다.
『하하, 노괴의 그 일장만이야 하겠소?』
『물론, 물론!』
당연하다는 듯 표정마저 엄숙하게 하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단목굉이었다. 육초량이 쓰게 웃었다.
『그래도 네놈의 일검은 무서웠다. 검신이라고 으쓱대는 그 늙
은 놈보다 못할 게 없었지.』
말을 멈추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단목굉이 크게 소리질렀
다.
『공야승 그 늙은 놈은 옛날부터 너무 잘난 척을 했어! 쥐뿔도
없는 놈이... 흥, 방귀나 뀌라지!』
『하하...』
육초량은 그저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이 노괴는 검신 공야승
과 감정이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같이 하하 웃던
단목굉이 돌연 눈을 부릅떴다.
『어떠냐 이 놈아. 노부의 건곤일선공이 쓸만했지?』
『그럭저럭... 뭐 특별한 건 없지만 그런 대로 괜찮은 편이더군
요.』
육초량의 시큰둥한 말에 단목굉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
다.
『이 쥐방울만한 놈이!』
곧 때릴 듯 주먹을 치켜들었다가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듯 고
개를 갸우뚱거리던 그가 혀를 차며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관두자, 관둬. 네놈같은 악바리를 상대해 봤자 꿈자리만 사납
지. 헌데, 이 중놈은 지금 뭘 하고 있는 게냐?』
화풀이를 하려는 듯 그가 육초량을 밀치고 그대로 대방의 옆구
리를 걷어차 가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육초량이 당황하여 북천
일마의 허리를 잡으며 소리쳤다.
『안 돼요!』
『히히, 이 어린 중놈은 정말 능구렁이 같단 말이야.』
괴이한 웃음과 함께 슬쩍 몸을 틀어 육초량의 손을 뿌리친 단
목굉이 여전히 발길질을 해대며 낄낄 웃었다.
『이놈아, 능청 그만 떨고 냉큼 일어나지 못해! 저 어리석은 놈
은 속였어도 노부의 눈마저 속이지는 못한다!』
퍽-!
그의 무지막지한 발길질이 기어이 대방의 옆구리를 찼다.
『어이쿠, 노사백(老師伯). 소질을 아예 죽이실 참입니까?』
비명을 터뜨린 대방이 떼구르르 굴러가다가 벌떡 일어섰다. 육
초량은 어이가 없었다.
(저 중놈은 정말 어떻게 된 건가? 벌써 깨어 있었으면서도 모
르는척하고 있었다니...)
분한 생각마저 들었다. 자기를 지켜주기 위하여 사국천의 흉흉
한 일장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내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능청을 떨고 있었던 것이다. 괘씸하기만 했다. 자신을 쏘아보
는 그런 육초량의 눈길을 의식한 것인지, 툭툭 옷에 묻은 흙을
털어 내며 대방이 씩 웃었다.
『축하합니다 육사형. 드디어 공지 사부님의 운심관(雲心關)을
깨뜨리셨군요.』
『......』
『무치 사형을 만나 보셨나요? 그는 잘 지내고 있나요?』
어이없어하는 육초량을 바라보며 대방은 넉살좋게도 태연히 자
기 말만을 늘어놓고 있었다. 육초량은 공지와의 인연을 생각하고
스스럼없이 자신을 사형으로 불러 주는 그 미화상(美和尙)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가 쓴 입맛만 다시고 있을 때 단목굉이
눈을 부라리며 대방에게 거칠게 소리쳤다.
『새끼 중놈아, 능청은 그만 떨고 이리 내놔!』
솥뚜껑 만한 손을 내밀고 있는 그를 바라보던 대방이 하하 웃
었다.
『소질과 육사형이 목숨을 걸고 빼앗은 것을 노사백께서는 너무
쉽게 달라시는군요.』
『요놈의 민대머리가?』
단목굉이 곧 때릴 듯 눈을 부라리며 한 걸음 다가서자 대방이
휘휘 손을 저어 그를 멈추게 했다.
『사백께서 달라시는데 소질이 어련히 드릴까봐 그러십니까? 또
때리시면 소질은 죽습니다요.』
대방이 얼굴마저 찌푸린 채 엄살을 잔뜩 떨며 품속에서 한 권
의 비급을 꺼내 선뜻 단목굉의 손에 올려놓았다.
(빌어먹을. 물건이 저 마두의 손에 들어갔으니 다 틀렸다.)
그들의 안하무인격인 행동을 바라보며 소태 씹은 얼굴을 하고
있던 사국천과 마백조는 동시에 그런 생각을 했다. 그 때까지도
돌아가지 않고 멀찍이 물러서서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군웅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굴에 낙담한 기색들이 역력했다.
비급을 받아든 단목굉이 그 자리에서 서슴없이 그것을 펼쳐 훑
어보기 시작했다.
『......』
숨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
『와하하하-』
단목굉의 광소가 서서히 새벽 여명에 젖어오기 시작하는 대파
산의 절봉을 타고 멀리 울려 퍼졌다.
『노부에게는 한 마리의 구운 오리보다도 못한 물건이로다. 이
까짓 것을 가지고 그 야단들이었단 말이냐? 에잉, 쯧쯧...』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찬 그가 비급을 육초량에게 집어던졌다.
『옛다 이놈아, 네놈이나 가져라.』
비급을 받아 든 육초량의 눈에 의아함이 번쩍였다. 그것은 냉
여옥이 지니고있던 바로 그 탄지십팔해(彈指十八解)였던 것이다.
그것이 어째서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
다. 잠시 생각하던 육초량이 비급을 들고 군웅들을 향해 돌아서
서 그것을 높이 들어 보였다.
『이것은 탄지십팔해요. 나의 품속에 있다고 뜬소문으로 전해지
던 바로 그것이외다.』
『......』
『이로써 그 소문이 거짓임은 스스로 드러난 터. 그대들 모두가
이것에 현혹되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공평한 기회를 주겠소.』
긴장된 눈으로 바라보는 군웅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육초
량이 비급을 펼쳐 들고 그 내용을 낭랑하게 읽어주기 시작했다.
한 순간 경악으로 눈을 부릅뜨고 소요하던 군웅들이었으나, 그들
모두는 곧 육초량이 읽어 주고 있는 난해한 구결들을 한 자라도
더 기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국천
과 마백조도 마찬가지였다.
『얼마만큼 얻느냐는 각자의 능력에 달렸소!』
읽기를 마친 육초량이 비급을 던져 올리고 철검을 잡아갔다.
파파팟-!
그의 허리에서 번개처럼 쳐 나온 한 줄기의 검광이 부채 살처
럼 퍼져 가며 허공 가득 현란한 검화를 뿌렸다. 그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엄밀한 출운산격(出雲散擊)의 일검이었다.
절세의 기보로 일컬어지는 비급 한 권이 군웅들의 눈앞에서 천
조각, 만 조각으로 잘게 베어져 바람을 타고 눈송이처럼 흩날려
갔다.
『와하하하, 과연 네놈다운 짓이다!』
단목굉의 통쾌한 대소가 허탈해 있는 군웅들의 머리 속을 웅웅
울리며 터져 나왔다.
<4>
(이상한 놈이다.)
고개를 숙인 채 육초량은 이마를 찌푸렸다. 혼잡한 주루 안이
었다. 굳이 동행하겠다는 단목굉을 떠밀다시피 대방에게 맡겨 버
리고 홀로 대파산을 내려온 그는 강남의 풍물을 따라 남하하고
있는 중이었다.
오(吳)의 땅은 어디를가나 기름지고 풍성했다. 서강(西江)으로
흘러드는 물줄기인 열목하(烈目河)를 따라 한가롭게 걸어 내려온
육초량이 귀주성을 벗어나 광서의 유주에 이르렀을 때는 그 여름
도 다 지나가고 가을로 접어들어 있었다.
유주성 밖 전단산(傳丹山)에 물들기 시작한 단풍을 바라보고
입성(入城)한것은 석양 무렵이었다. 그는 다홍루(多紅樓)라는 제
법 큰 주루에 들어 삶은 쇠고기 한 접시와 술 한 근을 시켜 간단
한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데 아까부터 주루의 한
구석에서 쏘아져 오고 있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
다. 그것은 쉬 만나볼 수 없는 고수의 기운이었다.
신경이 쓰였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그는 단지 훔쳐본다는 것만
으로 트집을 잡아 싸움을 할 만큼 심심하지도, 무뢰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시비를 걸어오는 자라면 용서하지 않겠지만 먼저 시
비를 걸어 분란을 일으킨 적도 없었다. 그가 나를 건드리지 않으
면 나 또한 그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 육초량의 마음이었다.
(내 갈 길을 가면 그 뿐이다.)
육초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 듯한 태
연한 걸음으로 주루를 벗어나자, 한 구석에서 머리를 숙인 채 술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사나이도 슬며시 일어났다.
유주성 밖의 마읍(馬邑)을 지나 현적령(現謫嶺) 아래에 이르자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현적령은 남송 때부터 무주(武州)
로 귀양을 가던 죄인들이 반드시 넘어야만 했던 험한 고갯길이었
다.
대호(大虎)가 자주 출몰했고, 고개에는 또한 흉악한 산적들이
진을 치고 있다가 나그네의 목숨을 빼앗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
래서 남송의 유주 관부에 있던 호송관들은 현적령 어귀의 송림
속에서 사사로이 호송하던 죄인을 죽여 버리고 영을 넘지 않는
일이 빈번하였다. 십 리에 걸쳐 울창하게 솟아 있는 그 송림이
불귀림(不歸林)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였다.
남송 이후 그 악명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어서 지금도 사람
들은 어두워지면 불귀림 근처에조차 얼씬하지 않았다.
육초량은 그 불귀림 속에 나 있는 한 줄기 소로를 따라 터벅터
벅 걷고 있었다. 무심히 걷고 있는 듯했지만 그의 신경은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뒤를 미행해 오고 있는 자의 기척을 살피고 있었
다. 대체 언제까지 귀찮게 따라오기만 할 셈인지 궁금해하며 불
귀림 깊숙이 들어섰을 때였다.
『수행자, 잠깐 보자!』
드디어 음침한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붙들어 왔다. 육초량은
천천히 돌아섰다. 칠흑의 어둠 속에서 하얀 눈빛만을 무섭게 번
쩍이며 쏘아보는 사나이였다. 만만한 자가 아니라는 것이 그이
시선 속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대가 사자검 육초량이겠지?』
자신을 알고 찾아온 자였다.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눈앞의 사내를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대를 알지 못하는데?』
의아하여 반문하자 어둠 속에서 사나이가 하얗게 웃어 보였다.
『그럴 테지. 하지만 나는 네놈을 잘 알고 있다.』
『...?』
『네놈을 벤다!』
차갑게 외친 사나이가 세 걸음을 빠르게 다가서며 거리를 좁혔
다.
(이 자가?)
육초량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요하게 뒤를 밟아올 때
부터 좋은 뜻을 가진 자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애써 무시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낯선 자가 알 수 없는
살기를 쏘아내며 다가서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싸우
려면 왜 싸워야 하는지 이유는 알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 육초
량이 한 걸음 물러섰다.
『이유를 들어 보자.』
혹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원한을 맺은 자일 수도 있었다. 그
것을 궁금해하는데 사나이가 사납게 외쳤다.
『이것이 이유다!』
오른 발을 크게 내딛으며 다가선다 싶었는데 그의 허리에서 무
시무시한 검광이 쏟아져 나왔다. 위잉, 하는 바람 소리가 다가왔
을 때는 이미 사나이의 검봉이 가슴을 쪼개 오고 있었다.
『으헛!』
육초량은 크게 놀랐다. 이토록 무서운 쾌검(快劍)이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비연참을 무색케
할 만큼 사내의 검격은 날렵하고 눈부셨다.
(당했다!)
내심 통한의 외침을 터뜨리며 전력을 다해 뒤로 몸을 뺏다. 가
슴을 훑어 가는 싸늘한 백광(白光)과 함께 차가운 검기가 뼛속까
지 파고드는 듯했다. 경악하여 다시 한 번 맹렬히 물러서는 육초
량의 가슴에서 한 줄기 선혈이 뿌려지고 있었다.
분하다는 생각이 머리카락을 올올히 곤두서게 하였으나 검을
뽑아 마주칠 촌각의 여유도 없었다. 유령처럼 쫓아온 사나이의
검인(劍刃)이 흰 빛을 뿌리며 한 순간에 여덟 번을 찌르고 베어
온 것이다. 단지 손목만을 움직이고 있는 듯 지극히 가벼워 보였
으나, 그 검봉의 날카로움과 빠름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장 여를 밀려난 육초량의 눈에 참을 수 없
는 노기가 어렸다. 부드득 이를 간 그가 맹렬하게 돌며 끓는 기
름 위에 떨어뜨린 물방울인 듯 종잡을 수 없이 흩어지기 시작했
다. 분수(分水)의 보(步)였다. 한 번 움직이자 어지러움이 극에
다다라 있는 그 움직임이 진가를 발휘했다. 그의 그림자가 재빠
르게 찔러 오고 있는 검광 사이사이를 유령처럼 빠져나갔다.
슈우우-
찰라의 순간에 아슬아슬하게 어깨를 긋고 지나간 검광이 한 그
루의 소나무를 베어 넘겼다.
(흐윽-!)
육초량은 왼쪽 어깨의 살점이 저며지는 섬뜩한 고통에 이를 악
물었다. 검광이 소나무를 훑어 나오는 찰라의 순간을 잡은 육초
량이 다시 맹렬하게 물러서며 검자루를 잡았다. 그 사이 코앞에
이마를 붙이듯 쫓아 들어온 사내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미간에 와
닿아 있었다. 몸서리가 쳐졌다.
『차합!』
이를 악문 육초량이 왼쪽 어깨를 틀어 비스듬히 비켜서며 검을
뽑아 힘껏 후려쳤다. 풍벽지검(風壁之劍)이었다.
카카카캉-!
여섯 개의 날카로운 격돌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석화(石火)
처럼 튀어 나가는 새파란 불똥들로 눈앞이 밝아졌다. 팔목이 은
은히 저려왔다. 깜짝 놀란 육초량은 다시 두 걸음을 뛰듯이 물러
서고 나서야 바른 자세를 잡고 사내를 노려볼 수 있었다. 이마
위로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 나왔다.
그의 정면에서 검을 늘어뜨리고 서 있는 사나이의 눈에 감출
수 없는 경탄지색이 떠올라 있었다.
『과연, 대단하다. 소문 이상이다.』
숨결 하나 흩어지지 않은 채 그가 음침하게 말했다. 육초량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제야 그대가 누구인지 알겠군.』
분을 참지 못하고 이를 간 육초량이 이 사이로 으르렁거리듯
낮게 말했다.
『이와 같은 쾌검이라면 중원 천하에 색화랑 적음상 외에는 있
을 수 없지.』
사나이가 낮게 웃었다.
『흐흐, 알았어도 소용없다. 네놈은 곧 죽을 테니까.』
육초량은 내심 후회했다. 그의 정체를 진작에 알았더라면 쾌검
을 염두에 두고 충분하게 준비를 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지금
과 같은 낭패는 당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다시 한 번
부드득 이를 간 육초량이 오른 발을 조금씩 앞으로 밀어내며 사
납게 말했다.
『나 또한 오늘 너를 베고 말겠다!』
『그녀 때문인가?』
적음상의 물음에 육초량은 생각할 여지도 없이 부르짖었다.
『그렇다!』
적음상의 눈빛도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내가 네놈을 죽이려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
적음상의 말에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
게 여겼다.
눈앞의 사내가 적음상인 것을 알자 육초량은 그에게 짓밟혔다
는 화소음을 떠올렸고, 그러자 걷잡을 수 없이 살기가 치솟아 올
랐다. 그러나 그녀 때문이냐고 물은 적음상의 말은 옥청향을 의
미한 것이었다. 그는 청향이 육초량을 찾아가야만 한다고 말했을
때부터 숨가쁜 적의를 품어 오고 있었다. 게다가 육초량이 그녀
의 정혼자라는 것을 들었을 때는 살기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었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육초량은 적음상의 물음이 화소음을
두고 한 것이라고 여기고 서슴없이 그렇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
것이 적음상의 살기를 더욱 북돋았다.
『그녀의 마음 속에는 온통 네놈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용서할
수 없다!』
부르짖은 적음상의 발도 조금씩 앞으로 좁혀오고 있었다. 육초
량은 여전히 그가 화소음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 또한 네놈의 더러운 손이 그녀를 욕보였다는 것을 안 이상
네놈을 죽여 그녀의 복수를 해줄 생각이다!』
『흐흐... 어디 그렇다면...』
음침하게 중얼거리던 적음상이 와락 어깨를 내민 듯했다. 그
순간, 번쩍 하고 다시 한 줄기의 가공할 쾌검이 찰라간에 공간을
접으며 쳐 나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단히 대비하고 있던 육초
량이었다. 그가 숨을 멈추고 오른 발 끝에 체중을 실어 비끼며
분광일수(分光一手)의 쾌검을 마주 뿌렸다.
손목을 떨친 순간에 섬전처럼 마주쳐 나가는 그의 일자낙홍(一
字落紅) 또한 적음상의 쾌검에 결코 뒤지지 않을 극쾌(極快)의
섬전검(閃電劍)이었다.
캉-!
두 사람의 검이 서로 얽히며 불똥을 퉁겼다.
『이얍!』
날카롭게 외친 적음상의 몸이 좌우로 나뉘어 흔들리며 질풍세
(疾風勢)로 들이닥쳤다. 수십 개의 검봉이 독사의 혀처럼 날름대
며 어지럽게 파고들었다.
『좋아!』
외친 육초량도 맹렬하게 검을 쳐냈다. 이제는 조금도 밀리지
않겠다는 듯, 왼 발로 굳건히 몸을 받쳐 뿌리를 내리고 오른 발
을 직선으로 내뻗어 정면을 쪼개 가는 검격이 굳세기 그지없었
다. 그의 단순하고 강맹한 일격이 마치 장작을 패는 도끼처럼 적
음상의 신산보(身散步)를 갈랐다.
씨이이-
이쪽의 검격 따위는 아예 무시한다는 듯, 겁없는 과감함으로
정수리를 단선으로 쪼개 오는 검기의 엄청난 압력이 적음상을 질
리게 했다.
카캉-!
간발의 차이로 육초량의 무시무시한 내려치기 일격을 받아낸
적음상이 낮은 신음을 흘리며 놀란 토끼처럼 뛰어 물러섰다. 여
태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검력이었던 것이다.
(이 놈이!)
놀란 눈을 부릅뜨는데, 육초량이 발끝을 비틀며 땅을 차고 뛰
어드는 것이 보였다.
『간다!』
그의 사나운 고함 소리가 머리 속을 어지럽게 했다. 뒤이어 쳐
나오는 일기만변(一氣萬變)의 현란한 검격이 적음상의 넋을 빼앗
았다. 흡, 하고 급히 숨을 들이키는 적음상의 얼굴에 놀람이 물
결처럼 번졌다. 육초량의 손목을 타고 휘둘려지는 검에 실린 무
지막지한 힘도 힘이려니와, 눈앞에서 바람에 날리는 솜털인 듯
가볍게 흩어져 들어오는 검봉의 헤아릴 수 없는 변화 또한 그로
서는 여태까지 받아보지 못한 난검이었다.
아차 하는 사이에 왼쪽 어깨에서부터 우측 협복까지 비스듬히
베어내며 파고드는 싸늘한 검인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크으으...』
뼈시린 신음을 흘리며 퉁겨지듯 물러서는 적음상의 상체가 순
식간에 선혈로 물들었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경악으로 부릅뜬 그의 눈 가득 육초량의 흉포한 얼굴이 부딪칠
듯 와락 다가들었다. 적음상이 이를 악물고 허리를 뒤로 굽히며
맹렬하게 손목을 떨쳐냈다. 다시 격렬한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적음상은 부러질 듯 휘는 자신의 검을 타고 상체 전부로 느껴지
는 육초량의 검력에 가슴이 떨려왔다. 그 탄력을 다리로 옮겨 간
신히 몸을 빼낸 적음상이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
『다음에 보자!』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어둠 속으로 쏜살같이 질주해 가는
적음상이었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가듯 그의 신형이 맹렬하게
치달려 눈 깜짝할 사이에 송림 속 깊이 스며들어 버렸다. 그가
사라진 어둠을 향해 여전히 철검을 겨누고 서서 육초량은 어깨를
들썩이며 거친 숨을 내뿜고 있었다.
한동안 숨결을 가다듬던 그가 비로소 검을 거두었다.
『놈, 다음에 만났을 때는 반드시 베고 만다!』
천천히 긴장을 풀며 근육을 이완시키던 그의 눈에 고소(苦笑)
가 떠올랐다. 철검이 적음상과의 일전으로 이가 십여 군데나 빠
져 마치 거친 톱날처럼 흉하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검 한 자루를 또 버렸군.』
긴장을 풀자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상처의 통증이 갑자기 밀려
들었다. 가슴과 어깨의 검상은 비록 중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것도 아니었다. 옷자락을 찢어 상처를 싸매며 육초량이
씁쓸하게 웃었다.
『방심했다.』
자신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가 진지한 안색이 되어
정정했다.
『그의 검은 빠르고 강했다.』
육초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빠름만으로 본다면 그의 검은 역시
최고라고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의 눈이 한동안
무엇을 쫓듯 허공에 머물렀다.
『그 빠름을 내 것으로 할 수는 없을까? 극쾌(極快)에 극변(極
變)의 검을 하나로 한다면...』
불귀림 속에 솟아난 또 하나의 나무가 된 듯 밤새도록 그는 그
렇게 서서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 것이었다.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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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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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
즐독 감사합니다
진행이 시원시원합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 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감사 합니다!
극쾌 극변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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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음적 적음상이 더욱 발전한 육초량과 대등하게 싸울 실력이었어요?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깁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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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았습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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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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