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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과 성곽까지 보존된 서셴고성은 중국 4대 고성 중 하나로 손꼽힌다. |
3세기 초 후한(後漢) 말기 때 이야기다. 효웅(梟雄) 조조는 위왕(魏王)에까지 올랐으나 두통이 갈수록 심해졌다. 좋다는 약을 모두 먹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신하 중 한 명이 민간에서 활약하던 명의를 추천했다. 바로 중국 외과의 비조(鼻祖)로 불리는 ‘화타(華陀)’였다. 조조는 즉시 화타를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화타는 조조를 진찰한 뒤 “왕의 머릿속에 바람이 이는 풍질(風疾)이 있어 머리가 아픈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완쾌를 위해 마비산(麻沸散)을 뿌려 왕이 잠드시면 머리를 쪼개 바람기를 걷어내겠다”고 진언했다.
조조는 화타가 자신을 해하려 한다고 의심했다. 수술을 바로 하는 대신 화타를 어의로 임명해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화타는 자신의 의술을 한 사람 아닌 만백성을 위해 사용하고 싶었다. 그래서 부인이 위독해 고향에 돌아가 돌봐야 한다며 거짓을 고했다. 조조는 화타의 청을 받아들였고, 화타는 조정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나 조조는 화타의 말을 믿질 않았다. 군사를 화타의 고향으로 보내 확인케 했다. 거짓말은 곧 탄로가 났고 화타는 조정으로 압송됐다.
옥에 갇힌 화타는 머지않아 처형될 것이라 여겼다. 이에 몸에 지니고 있던 의서를 옥리(獄吏)에게 건넸다. “내가 죽어도 이 책은 세상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며 후세에게 전해 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옥리는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의서를 모두 불태웠다. 며칠 뒤 화타는 고된 옥살이를 견뎌 내지 못하고 절명했다. 조조는 병세가 더욱 깊어지는 데다 아들까지 요절하자, 뒤늦게야 화타를 죽인 것을 후회했다.
사실 화타가 조조에게 사용하려 했던 마비산은 인도산 대마로 만든 마취제였다. 화타는 이 마비산으로 환자를 전신 혹은 부분 마취한 뒤 다양한 수술을 시행했다. 시술 속도가 워낙 빨라서 환자가 마취에서 깨어나면 아무런 통증을 못 느낄 정도였다. 위장을 절제한 환자를 4~5일 만에 완치시킨 일화도 전해진다. 화타는 외과뿐만 아니라 내과, 산부인과, 소아과, 침구술 등 의료 전반에 도통했다. 또한 양생술(養生術)의 일종인 오금희(五禽戱)로 건강을 다져서, 60세가 넘어서도 혈색이 돌고 40대 중년보다 젊어 보였다.
보저우시 지도. |
조조와 화타의 고향
보저우에 있는 화타기념관 내의 화타상. |
송나라 때 술을 빚은 우물(宋井). 청대 강물의 범람으로 지하 4m 아래 파묻혔던 것을 1996년에 발견했다. |
조조가 죽은 뒤 그의 무덤은 종적이 묘연했다. 한데 2009년 말 그 모습을 드러냈다. 허난(河南)성 문물국 조사팀이 안양(安陽)현 시가오쉐(西高穴)촌의 동한시대 무덤군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견했다. 위무왕(魏武王)이 사용한 창, 위무왕이 사용한 돌베개 등의 명문(銘文)이 출토됐다. 중국 국가문물국은 이듬해 1월 ▲무덤 형태가 동한 것이고 ▲무덤 규모가 황제가 사용했을 만큼 크며 ▲〈삼국지 위서 무제기〉 등 고대사서 기록과 일치하는 등을 근거로 제시하며 조조의 묘인 고릉(高陵)이라고 발표했다.
특히 발견된 유골과 치아 등을 DNA 검사한 결과 조조의 무덤이 확실하다고 결론 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고고·역사학자 23명이 “무덤이 조작됐을 가능성이 크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학자들은 ▲명문의 글씨가 현대의 것과 유사하고 ▲조조는 생전에 ‘위왕(魏王)’ 사후에 ‘무왕(武王)’이라 불렸을 뿐 위무왕이라 불리지 않았으며 ▲발굴된 석상에서 전기톱의 자국이 나타나는 등 발굴과정이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적지 않은 언론매체가 동조하면서 현재까지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보저우에는 조조와 관련한 술이 있다. 안후이 최고의 명주로 손꼽히는 구징공주(古井貢酒)가 그 주인공이다. 이 술과 관련된 고사는 6세기에 쓰인 농업기술서 《제민요술(齊民要術)》에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조조는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獻帝)에게 고향에서 빚은 ‘구온춘주(九醞春酒)’를 바쳤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자랑했다. “이 술을 만들 때는 누룩 20근을 물 5섬에 씁니다. 섣달 2일에 누룩을 담그고 정월에 해동하지요. 좋은 쌀을 골라 쓰며 누룩찌꺼기를 잘 걸러냅니다. 3일에 한 번씩 술밥을 넣고 9번이 되어야 그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기에 술맛이 달고 마시기 편하지요.”
구온춘주를 마신 헌제는 술맛에 감탄했고 어주(御酒)로 사용토록 명했다. 이는 중국에서 술 제조법을 소개한 가장 오래된 역사 기록이다. 그 뒤 구온춘주는 오래된 우물(古井) 물로 주조한다고 하여 ‘구징주’로 이름이 바뀌었다. 명·청대에 잇달아 황실에 진상하는 술로 지정되면서 ‘공(貢)’ 자가 더해져 구징공주가 됐다. 오늘날 구징공주를 생산하는 구징공주주식회사의 역사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515년 설립된 공흥조방(公興槽坊)이 그 시초다.
조조의 재조명과 더불어 성가를 높여
구징술문화박물관 내에 있는 청대의 양조장 유적지. 윗부분은 명대의 양조장 유적이다. |
공흥조방은 오래된 우물 옆에서 작은 양조장을 세워 술을 빚기 시작했다. 명 황실의 진상주로 지정되면서 수요가 많아졌다. 그에 따라 규모를 확장하고 생산량을 늘렸다. 명대 말기 누룩을 발효시키던 구덩이는 지금도 남아 있어, 당시 공흥조방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공흥조방은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뒤 국영화됐고, 1959년 이름을 구징술공장(酒廠)으로 바꿨다. 1996년에 상장하면서 주식회사 형태로 전환했다. 현재는 10여 개의 자회사와 8000여 명의 임직원을 거느린 구징그룹으로 발돋움했다.
구징공주는 1952년 이래 5차례 개최된 전국 술품평회(評酒會)에서 4차례나 국가명주상을 받았다. 1988년 파리 국제식품박람회에서도 금상을 탔다. 이 같은 눈부신 성과는 손꼽힐 만큼 독특한 맛과 향에서 비롯됐다. 구징공주는 농향형(濃香型) 바이주(白酒)의 여러 양조기술 중 혼증속사(混蒸續渣)에 의해 제조된다. 먼저 여러 원료를 혼합한 뒤 큰 시루에 찌면서 술을 밭아 낸다. 시루 안에 남은 지게미는 꺼내 식힌 뒤 누룩에 섞어 구덩이에 넣어 발효한다.
이런 1차 발효를 끝낸 원료를 다른 구덩이에 옮겨 누룩을 더한 뒤 다시 발효한다. 그러면 원료는 죽처럼 되는데, 이것으로 술을 밭아 내는 방식이 혼증속사다. 과학적 분석에 의하면 구징공주에는 무려 80여 종의 맛과 향을 내는 물질이 함유되어 있다. 여기서 15~30종은 다른 농향형 바이주보다 훨씬 많은 것이고, 그 함량도 2~3배나 풍부하다. 특히 적정량의 고급 지방산 에스테르를 지니고 있어 술맛이 순하고 향기가 부드럽다. 맛과 향이 입안을 감싸고 여운이 도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술 중의 모란’
구징공주는 중국 주당들 사이에서 ‘술 중의 모란(酒中牡丹)’이라 불린다. 술 향기가 모란처럼 풍성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이런 명성에 걸맞게 2014년 구징공주의 총 판매액은 46억5085만 위안(약 8371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전년대비 1.5% 증가한 수치다. 비록 영업이익은 5억9704만 위안(약 1074억원)으로 전년보다 4% 감소했지만,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반부패운동으로 다른 바이주업체들이 크게 고전을 한 것에 비하면 준수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구징공주가 어려운 시장상황에도 불구하고 선방한 데는 중국인들이 술을 마실 때마다 조조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20세기 말부터 중국에서는 조조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과거와 달리 조조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과 드라마, 영화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오늘날 중국인들은 조조를 단순히 권력욕에 물든 효웅이 아니라 탁월한 리더십의 21세기형 지도자로, 걸출한 문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조조는 말년에 병이 깊어져 오래 살지 못함을 예감하며 고향의 술로 마음을 달랬다. 당시 지었던 〈단가행(短歌行)〉에는 그런 조조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흐르는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면서도 사내대장부로서 끝끝내 뜻을 세우려는 포부가 엿보인다. 중국인들이 구징공주를 마시고 〈단가행〉을 읊을 때마다 조조를 새롭게 인식하는 데는 지금의 급변하는 중국 사회상을 반영한다.
술이 있으니 노래 부르세(對酒當歌),
인생이 얼마나 되겠는가(人生幾何).
견주니 아침이슬과 같지만(譬如朝露),
지난날은 고통스러움이 많았네(去日苦多).
그걸 생각하니 탄식 않을 수 없고(慨當以慷).
괴로움을 잊기 어렵네(幽思難忘).
어찌 근심을 풀 수 있나(何以解憂),
오직 두강주만 있을 뿐일세(惟有杜康).
(중략)
산은 높기를 마다 않고(山不厭高),
물은 깊기를 싫다 하질 않네(水不厭深).
주공처럼 밥을 뱉어내면(인재를 얻으면)(周公吐哺),
천하의 인심은 돌아오리라(天下歸心).
‘儒商’의 고장
허국석방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사방으로 오갈 수 있는 걸작품이다. |
보저우가 안후이 북부를 대표하는 도시라면, 남부에는 후이저우(徽州)가 있다. 후이저우는 중국 10대 상방(商幇) 중 최고로 손꼽히는 ‘후이상(徽商)’의 고향이다. 후이상은 흥미롭게 ‘유학자 상인(儒商)’이라고도 불린다. 그 연유를 알려면 먼저 안후이 전체를 이해해야 한다. 안후이는 중국 동부에 있지만 바다를 끼고 있질 않다. 대신 중국에서 가장 긴 양쯔강(長江)과 화이허가 전 지역을 굽이굽이 돌아 흐른다. 여기에 중국 5대 담수호 중 하나인 차오후(巢湖)도 품고 있다.
이처럼 안후이는 강과 호수가 많아 땅이 비옥하다. 예부터 중국인들을 먹여살린 주요 경작지 중 하나였다. 물은 안후이의 생활영역과 문화풍습을 갈라놓는 데 일조했다. 첫째는 화이허 유역을 끼고 있는 안후이 북부의 화이허문화다. 이 문화권은 고대부터 허베이(河北)평원을 오고 가면서 허난과 호흡을 같이해 왔다. 허난과 산둥(山東)의 영향을 받아 주민들의 성격은 호방하고 솔직하다. 말은 느리나 또렷하게 구사한다. 거래 시 신의를 중시하고 화끈하지만, 계약 관념은 약해서 분쟁을 쉽게 일으킨다.
둘째가 안후이 중부의 루저우(廬州)문화다. 루저우는 오늘날 안후이성의 성도인 허페이(合肥)의 옛 이름이다. 서주(西周)시대에 루저우국이라는 봉건 제후국이 세워질 만큼 오랜 세월 안후이의 정치 중심지였다. 주민들은 차오후를 끼고 있어 먹는 걱정 없이 살아왔다. 이런 영향 때문에 자부심이 강했고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교사상이 유행했다. 셋째는 안후이 서남부, 양쯔강 아래의 완장(皖江)문화다. 이 지방 주민들은 철학과 사상에 깊이 몰두해, 주자학을 다른 어느 곳보다 신봉했다. 문예에도 조예가 깊어 명·청대 유명한 예술인들을 다수 배출했다.
넷째가 후이상의 본거지인 안후이 동남부의 후이저우문화다. 이 지방은 완장문화처럼 주희(朱熹)를 최고의 사표(師表)로 삼았다. 주민들은 집안마다 《주자가훈(朱子家訓)》을 두어 인생의 교과서로 읽고 또 읽었다. 실제 후이저우는 주희와 인연이 깊다. 주희는 푸젠(福建)성 요시(尤溪)에서 태어났지만, 선조는 대대로 후이저우의 호족이었다. 아버지가 관직에서 물러나 요시에 은거했을 뿐이다. 평생 동안 주희는 스스로 ‘후이저우 사람’이라 부르면서 여러 차례 후이저우를 찾았다. 후이저우 주민들도 주희를 고향 사람으로 여겨 그의 말과 글을 가슴 깊이 새기면서 살았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후이상
후이상의 집 대청에는 공자를 모시는 제단이 모셔져 있다. |
안후이 주민들은 중국 각지로 나가 상업에 종사했다. 명대 말기부터 양쯔강과 그 지류에 접한 대부분 도시의 상권을 안후이 상인들이 장악할 정도로 강력했다. 그 대표적인 도시가 장쑤(江蘇)성 양저우(揚州)와 전장(鎭江)이었다. 이 중 양저우는 대운하를 기반으로 당대에는 중국의 남북을 이어 주는 교역의 요충지였다. 하지만 송·원대에는 항저우(杭州)와 쑤저우(蘇州)에 상업기반을 내주면서 침체에 빠졌다. 이를 명대 후이저우의 염상(鹽商)이 들어가 중국 최대의 소금 집산지 및 교역시장으로 탈바꿈시켰다.
본래 후이저우 상인들이 다뤘던 품목은 고향의 특산품인 문방사우(文房四友)와 목재, 차(茶) 등이었다. 후이저우에는 벼루와 먹으로 쓸 수 있는 좋은 돌이 많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황산(黃山)에는 질 좋은 나무가 많아 붓과 종이, 가구를 만들기 쉬웠다. 후이상은 솜씨 좋은 장인들이 만든 특산품을 팔다가 점차 종류를 늘렸다. 명대에 이르러 양쯔강 연안의 목재소, 차가게, 정미소 등과 전당포를 후이상이 손아귀에 넣었다. 특히 해안가의 대형 염전을 독차지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후이상이 양쯔강 일대를 집중 공략했던 것은 수로가 발달해 물자를 운반하기 편리했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집안이나 고향 출신들을 불러들이기 쉬웠다. 객지에 나가 성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후이상은 부족한 자본과 인맥을 동족이나 동향으로 메워 나갔다. 이렇게 세력을 키워 ‘후이상이 없으면 도시가 완성되질 않는다(無徽不成鎭)’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입지를 굳혔다. 이런 성장배경 때문인지 후이상은 족보(族譜) 편찬에 열성적이었다. 족보에 성공한 조상의 이야기를 담아 정체성과 자긍심을 키웠고, 동족 간의 상호신뢰를 견고히 했다.
한데 후이상은 다른 지역의 상인들과 달리 어느 정도 돈을 벌고 성공하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한 우물만 파서 해당 업종의 최고가 되려 했지, 투자를 늘려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려 하질 않았다. 심지어 다른 업종에 눈을 돌리는 일은 상도(商道)에 어긋나는 행위라 생각할 정도였다. 대부분이 타지에서 성공한 사업기반을 정리해 귀향했고, 극소수만이 객지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후이상은 장사할 때는 악착같이 절약하고 검소하게 살았지만, 고향에 돌아가서는 경쟁적으로 으리으리한 저택을 지었다. 그 유산이 잘 보존된 곳이 서셴(歙縣)고성이다.
‘강남 제일의 건축박물관’
서셴고성은 황산의 동북부, 첸탕강(錢塘江)의 지류인 신안강(新安江) 상류에 있는 도시다. 진대에 처음 현이 설치됐는데, 당대까진 흡주(歙州)라 불렸다. 후이저우부가 들어서면서 주변 여섯 개 현을 다스리는 후이저우문화권의 중심지가 됐다. 강을 끼고 있지만 깊이는 얕았다. 후이저우인들은 수심을 깊게 해 수운을 활성화시키고자 위량바(漁梁壩)라는 수리시설을 건설했다. 당대 처음 만들어졌는데, 명대 초기에 높이 4m, 길이 138m의 규모로 중건했다. 이 위량바는 주민들이 수로를 통해 양쯔강 연안 도시로 나가 장사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고성 안으로 들어서면 멋들어진 석패방이 방문객을 반긴다. 후이저우 곳곳에는 다양한 석패방이 세워져 있는데, 서셴고성의 허국(許國)석방이 으뜸이다. 허국은 16세기 예부상서와 대학사까지 오른 관료였다. 말년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세운 석패방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사방으로 오갈 수 있는 걸작품이다. 서셴고성의 정수는 대로보다 좁다란 골목길에 있다. 특히 길이 300m의 더우산(頭山)거리에는 외지에 나갔다가 되돌아온 후이상이 세운 저택들이 몰려 있다. 집집마다 개성 있고 멋들어진 건축양식을 담고 있어 ‘강남 제일의 건축박물관’이라 불린다.
후이상이 집을 짓고 꾸미는 데 집착한 것은 《주자가훈》에 따른 가르침 때문이었다. 후이저우는 다른 문화권과 달리 ‘만산에 둘러싸여 산다(居萬山之中)’고 할 정도로 산이 많아 경작할 토지가 적었다. 산속 돌과 나무를 이용해 벌이는 사업이 주업일 정도로, 후이저우 주민들은 딱히 생계를 유지할 수단이 없었다. 다행히 하천 덕분에 다른 지방으로 갈 수 있어 장사를 했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좋은 환경을 마련해 자녀들의 학업 정진에 심혈을 기울였다. 관계에 몸을 담아야 돈을 벌 수 있는 현실이 자녀교육에 힘쓴 원인이었다.
실제 중국에서 후이상은 정경유착을 일삼는 관상(官商)으로 유명했다. 후이상은 기존 상권을 장악했던 상방에 도전하는 후발주자이자 이방인이었기에 든든한 보호막이 필요했다. 이를 관료들과의 ‘관시(關係)’를 통해 해결했다. 관료와 친분을 쌓아 시장정보를 얻고 자금지원을 받았다. 누구보다 빨리 정보를 빼내어 특정상품을 대량으로 사 두었다가 막대한 시세차익을 내어 팔아넘겼다. 이런 매점매석은 관의 도움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는 모험이었다. 후이저우 출신 관상의 대표적인 인물이 중국 최고의 상인으로 추앙받는 호설암(胡雪岩)이다.
중국 최고의 상인 호설암
호설암은 1823년 후이저우의 지시(績溪)현 후리(湖里)촌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너무 가난해 서당을 다니질 못해 아버지로부터 글자를 읽고 쓰는 법만 겨우 배웠다. 12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저장(浙江)성 항저우로 가서 친척이 운영하는 전장(錢莊)의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전장은 개인이 운영하는 금융기관이었다. 호설암은 3년간 밥짓기, 청소, 빨래 등 갖은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며 신임을 얻어 사환으로 승격했다. 타고난 성실성과 악착같은 노력으로 전장의 모든 돈을 관리하는 책임자까지 올랐다.
어느 날 호설암은 돈이 없어 쩔쩔매던 유학자 왕유령(王有齡)을 만났다. 마침 왕은 과거를 치르기 위해 마련했던 노잣돈을 구휼소에 몽땅 기부하는 바람에 낭패를 당하고 있었다. 호설암은 왕의 인품과 실력이 출중한 것을 보고 담보 없이 500냥을 선뜻 빌려줬다. 이는 주인의 허락 없이 횡령한 셈이어서 곧 전장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천우신조(天佑神助)의 기회가 호설암에게 다가왔다. 왕이 저장성의 군량미를 관리하는 책임자가 되어 금의환향했던 것이다. 왕유령은 빌렸던 돈을 두둑한 사례금을 더해서 갚았다.
호설암은 이를 기반으로 전장을 열었고, 왕의 관직이 높아 가면서 사업은 번창했다. 왕은 군량미 운반과 병기 군납을 호에게 모두 맡겼다. 호는 차가게, 포목점, 약국 등 다양한 점포를 열어 저장성 최고의 부자가 됐다. 수년 뒤 새 기회가 찾아왔다.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 저장성 순무(巡撫)로 임명된 좌종당(左宗棠)을 1862년에 만난 것이다. 호는 좌의 군대를 위해 필요한 물자를 아낌없이 지원했다. 태평천국의 난이 끝난 뒤에도 20여년간 좌의 후원자로 열성을 다했다.
좌종당은 이런 호에게 감동해 호의 사업을 적극 도왔다. 이 덕분에 호는 조선소를 설립해 양무운동 이후 군함 제조를 장악했고, 외국과의 국제무역을 독점했다. 좌의 추천으로 고급관리까지 됐다. 청대에서 유일하게 모자 상단에 붉은 산호를 다는 홍정(紅頂)상인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에게 넘어간 생사(生絲)시장을 빼앗기 위해 전 재산을 쏟아붓는 승부수를 던졌다가 실패했다. 유럽 상인들은 담합해 호의 생사를 외면했고, 정치적인 견제까지 받아 파산했다. 게다가 좌도 실각해 재기하질 못했다. 결국 남은 재산을 일가친척에게 나눠주고 1885년 쓸쓸히 영면했다.
서셴고성의 최고명주 금황산
옛 후이저우아문에서 공연되는 〈삼계비〉. 과거 후이저우 여인네들에게는 극단적인 정절이 강요됐다. |
그렇게 호설암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일화는 후이상의 철학을 담고 있다. 호설암은 ‘호경여당(胡慶餘堂)’이라는 약국을 운영했는데, 최고의 약재를 구해 합리적인 가격으로 팔았다. 태평천국의 난과 재난재해 시에는 쌀과 약을 빈민들에게 무료로 나눠줬다. 그 양이 호가 수년간 벌어들인 수익 전체에 달할 만큼 엄청났다. 그는 이런 선행에 대해 “큰 장사를 하려면 천하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상인의 운명은 국운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호설암은 이익을 탐닉한 상인이었지만, 원칙을 지켰고 의협심이 강했다. 비록 관상이 되었으나 부패한 관리와는 거리를 뒀다. 호가 후원했던 왕유령, 좌종당 등은 능력 있고 강직한 관료였다. 유능한 인재를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졌기에 호는 관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이런 ‘투자’는 직원을 뽑고 교육시키는 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정으로 사람을 감동시켰고 의로써 사람에게 믿음을 심어 줬다. 뽑은 직원에게는 후한 임금을 줬고 투자에 참여시켜 이익을 배분했다. 그렇기에 루쉰(魯迅)은 호를 ‘봉건사회의 마지막 위대한 상인’이라고 칭송했다. 오늘날 중국인들도 ‘상성(商聖)’이라 부르며 존경한다.
호설암처럼 후이상 대부분은 주희의 가르침을 잊질 않았다. 타지에 나갔던 후이상이 성공해 귀향한 것도 부모를 봉양하고 관리가 되기 위해서였다. 척박한 자연환경 때문에 장사를 했지만, 후이저우인 가슴 깊이에는 상인을 천시하는 선비의식이 있었다. 벼슬에 올라 입신양명하는 일은 후이저우인의 영원한 로망이었다. 이 때문에 후이상 가운데는 20~30대에 사업에 성공해, 불혹에 과거를 보는 이가 적지 않았다. 자신은 급제하지 못해도 자녀는 관료가 되도록 힘썼다.
이 덕분인지 후이저우 출신 거인(擧人·향시 급제자)과 진사는 명대 1100명과 444명, 청대 1536명과 517명이었다. 이는 안후이 전체의 81%에 달한다. 서셴은 명·청대 623명의 진사를 배출해 전국 1위를 차지했다. 후이저우에서 과거를 포기한 유생이 상인이 되거나 상인이 유생이 되어 과거에 도전하는 일은 아주 흔했다. 후이상은 장사에서 성공해야 윤택한 경제조건 아래 과거에 도전할 수 있었기에 더욱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이렇듯 후이저우에선 유학자와 상인이 만수산 드렁칡 같았기에, 다른 지방 상인들은 후이상을 유상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주자학 맹신이 빚은 비극
서셴고성의 골목길에서는 돌이나 나무로 세워진 열녀문을 쉽게 볼 수 있다. |
그러나 후이저우인의 주자학 신봉은 여러 문제점을 낳았다. 예법(禮法)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극단적인 일탈행위가 횡행했다. 2013년부터 날마다 서셴고성 내 옛 후이저우아문(衙門)에서 공연하는 연극 〈삼계비(三戒碑)〉의 일화가 대표적이다. 명대 말기 한 마을에서 어느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부정(不貞)을 저질렀다는 유언비어를 듣게 된다. 이에 며느리를 관아에 고발해 고문 받게 하고 자살을 강요한다. 며느리는 자결하지만, 얼마 뒤 며느리를 사모한 이웃남자가 벌인 음모였음이 밝혀진다.
후이저우에서는 과부가 되면 자살하는 일이 여성으로서 본분을 다하는 행위였다. 심지어 약혼한 처녀에게까지 암묵적인 자결을 강요했다. 지방관청에서는 이들 가문에 열녀문을 내려 이런 풍토를 조장했다. 또한 후이상은 사업의 전통과 노하우가 후대에 전수되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장사는 과거급제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고, 대를 이어 장사하길 꺼렸다. 이 때문인지 20세기 이후 후이저우에서는 후스(胡適), 후진타오(胡錦濤) 등 위대한 사상가와 정치가는 배출됐어도, 크게 성공한 사업가는 단 한 명도 나오질 않고 있다.
지난 10월 25일 필자가 서셴고성에서 후이상의 흥망사를 살펴보면서 마신 술은 금황산(金黃山)이었다. 한 술집을 찾아 주인장에게 현지산 최고 명주를 달랬더니, 천하제일명산 황산을 테마로 한 술을 내놓았다. 회사에 연락해 알아보니, 분명 위량바 옆에 있는 양조장에서 제조한 바이주(白酒)였다. 술회사인 황산주업은 1951년 서셴고성의 모든 양조장을 통합해 설립한 황산술공장(酒廠)이 전신이었다. 2010년 주식회사 체제로 바꾸면서 이름은 바꿨지만, 여전히 지방정부에서 운영하고 있다.
당대 안후이 남부 최고의 술로 꼽혔던 사시(沙溪)촌 동빈춘주(洞賓春酒)를 기원으로 한 술답게 맛이 깨끗하고 부드러웠다. 고량주 특유의 향이 적어 우리 주당에게도 어울릴 듯싶었다. 술맛이 쓰촨(四川) 농향형(濃香型) 명주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황산주업의 품주사(品酒師)들이 모두 쓰촨 출신이었다. 지난해 안후이의 국내총생산(GDP)은 2조848억 위안(약 381조9145억원)으로 서부에 있는 쓰촨(2조8536억 위안)보다 적었다. 만약 후이상의 사업수완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면, 오늘날처럼 안후이가 ‘동부의 가난뱅이 성’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며 금황산을 들이켰다.
첫댓글 잘 배우고 갑니다
환관 얘기가 고공정주, 황산산주로 끝을 맺는군요.
술은 역시 좋은 술을 마셔야 맛도 기분도 좋아지고 숙취도 거의 없지요.
또공부합니다.
조조의 할아버지 조등(曹騰)은 후한 황실을 쥐락펴락했던
십상시(十常侍) 중 한 명이었다. 조등은 환관이라 자식을 낳을 수 없었기에 양자로
조숭(曹嵩)을 받아들였다.
환관의 손자’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조정의 권문세가들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이 때문에 평생 동안 조조는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다. 잘 감상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