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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도(生死島) 3-9
제 4 장 생사도(生死島)로 가는 길
<1>
광동의 풍광은 우아하고 수려함이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구월로 접어든 짙은 추색(秋色)의 하늘 아래 산
정의 단풍은 불타는 듯했고, 그 기슭을 돌아 비단결처럼 흐르는
강물은 더욱 맑고 깊었다.
응창현(鷹昌縣) 밖 수운산(水雲山) 아래를 지나던 육초량은 문
득 그 수려한 풍광에 취해 걸음을 멈추었다. 비자나무 숲이 우거
진 언덕 위에 싸늘한 추강(秋江)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등왕각
(登王閣)이 있었다. 그곳에 올라 난간에 기대어 서자 가을의 정
취가 절로 젖어 왔다.
푸른 하늘가로 기러기 떼가 높이 날고 있었다. 육초량은 문득
처연한 감회가 일었다. 검 한 자루에 의지하여 살아온 지난 팔
년 간의 세월을 돌아보자 그 모두가 쓸쓸히 지는 나뭇잎과도 같
이 덧없이 여겨지는 것이었다.
검에 의한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세월을 거칠게 살아야 하는 걸까? 하고 생각하자, 과연 인
간으로서의 편안함과 가정의 따뜻한 행복을 모두 포기하면서까지
얻을만한 가치가 그것에 있는 것일까, 하는 근본적인 회의마저
일었다.
육초량은 그의 철검을 뽑아들었다. 가을 하늘같이 서늘한 검광
이 번쩍였다. 그 맑은 검신(劍身)에 자신의 거친 얼굴을 비추어
보던 육초량이 손가락을 들어 그것을 퉁겼다. 땅, 하는 깊은 울
림과 함께 손 안 가득 검의 으르렁거림이 전해져 왔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의 길> 하고 가만히 중얼거려 보았다.
그러자 한 줄기 쓸쓸한 감회가 솟구쳤다. 구주(九州) 팔황(八荒)
에 홀로 떠도는 한 조각 편월(片月)과 같은 몸이라는 생각이 그
를 처연하게 했다. 자신의 아득한 심사를 달래듯 육초량은 다시
철검을 퉁겼다. 맑은 검명(劍鳴)이 학의 울음처럼 드높이 치솟아
구름을 뚫었다. 그 소리가 비자림을 건너고 수운산 기슭을 치달
아 멀리멀리 퍼져 가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육초량이 한숨을
쉬었다.
『아, 검의 길이란 얼마나 멀고 험한 것인가. 지난 세월 동안
나는 오직 검의를 얻기 위하여 천하의 낭객(浪客)이 되었으나,
깨달음은 아직도 보잘것없고, 헛된 이름만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
르내릴 뿐이다.』
그가 이끼 앉은 난간에 기대어 뉘엿뉘엿 흐르는 추강에 시선을
던지고 독백했을 때였다.
『그렇지 않다.』
멀리서 바람을 타고 은은히 들려오는 한 소리가 육초량을 깜짝
놀라게 했다. 눈을 들어 바라보자, 비자림의 그늘속에 서서 바라
보고 있는 죽립인 한 명이 있었다. 허리에 검 한 자루를 매달고
있었는데, 흑의 장포 자락을 가벼이 바람에 날리며 그린 듯 서
있는 그 모습이 공허해 보였다.
가슴 앞까지 늘어져 일렁이고 있는 검은 수염으로 보아 죽립인
은 나이가 꽤 든 사람인 것 같았다. 그 초탈하면서 위엄이 서려
있는 풍모를 가만히 살펴보며 내심 감탄하고 있는데, 죽립인이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던져왔다.
『그대가 사자검 육초량이 맞겠지?』
자신을 알고 찾아온 또 한 명의 낯선 사람이라는 것이 육초량
에게 경계심을 불러 일으켰다. 얼마 전 색화랑 적음상에게 어이
없이 당하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육초량이 기대고 있던 난간
에서 떠나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렇소. 바로 본인이외다.』
죽립인의 턱이 보일 듯 말 듯 끄덕여졌다.
『그대의 명성은 이미 천하에 진동하고 있는 터. 헛되이 얻어진
것이 아님을 누구나 다 안다.』
『......』
죽립 속에서 차가운 눈빛이 쏘아져 왔다. 비수처럼 예리하되
경박하지 않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시선이었다. 육초량은 불쑥
나타난 자의 의도를 알 수 없는 그 눈빛을 가만히 받아 보았다.
가슴에 서늘하게 와 닿는 느낌이 좋았다. 마치 한 여름의 더위
속에서 무거운 얼음덩이 하나를 올려놓은 듯했다.
한동안 두 사람의 시선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허공을 격하고
치열하게 얽혔다. 문득 죽립인이 희미하게 웃는다고 보였다.
『그대는 노부가 듣던 것 이상이군. 매우 좋다.』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 그가 다시 턱을 끄덕이며 수염을 쓸었
다. 그런 죽립인을 보며 육초량 또한 내심 탄복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최고다. 이 정도의 인물이 있었을 줄이야...)
눈빛에 실려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활기가 무겁고 장중하기 짝
이 없었다. 어느덧 그를 바라보는 육초량의 눈 깊은 곳에서 서서
히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난간에 기대서서 차가운 강물을
바라보며 수심에 잠겨 있던 때가 언제였느냐는 듯, 그는 다시 살
아난 투지와 의욕을 가슴 벅차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에
대한 흥분과 긴장이 혈관을 타고 난마처럼 치달리는 이런 느낌을
맛본 지도 꽤 오래 되었다고 생각했다.
(한 번 겨루어 보고 싶다.)
육초량은 죽립인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과연
저것이 뽑혀 나오면 어떤 위력과 변화를 보여 줄 것인지에 대한
궁금함이 그의 입술을 말라가게 했다. 그것을 알아챈 듯, 육초량
을 바라보는 죽립인의 눈빛도 점점 강렬해지고 있었다. 그도 육
초량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너의 강한 기에 검이 울고 있다. 이는 실로 삼십 년만의 일.
한 번 받아 보겠느냐?』
『오옷!』
육초량은 팽팽한 긴장을 던져 오는 죽립인의 말에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서며 자신도 모르게 괴이한 고함을 터뜨리고 말았
다. 어깨에 넘쳐나는 그의 긴장이 이제는 터질 듯 팽팽하게 부풀
어 있었다. 더 견딘다는 것은 고통이었다.
비스듬히 오른쪽 어깨를 내 보이며 겨누어 선 육초량이 철검의
자루에 손가락들을 올려놓은 채 큰소리로 외쳤다.
『한 수 부탁드리오!』
죽립인이 옷소매를 가볍게 떨치고 한 발 내딛으며 허리를 약간
숙였다. 그 자세를 본 육초량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저기서 치겠다는 건가?)
그와의 거리는 무려 십여 장이나 떨어져 있었다. 단번에 쳐 나
오기에는 아무래도 먼 거리였다. 서로를 마주보고 예기를 쏘아
내며 우르르 달려들어서 대여섯 보의 거리를 두고 기세를 가다듬
는 것이 순서였다. 그러다가 틈을 보아 한 번 몰아치면 그것으로
승부가 가려지게 되는 것이 고수들의 겨룸이었다. 그런데 삼 척
의 장검으로 십여 장의 거리를 단번에 좁히고 쳐 나오겠다는 의
도를 내비치고 있는 죽립인이었다.
육초량이 의혹의 눈길로 머뭇거릴 때였다.
『간다!』
우렁찬 일성과 함께 죽립인의 검이 그 의혹을 단숨에 가르고
맹렬하게 쪼개 왔다. 한 줄기 칙칙한 묵광(墨光)이 쇠뇌처럼 날
아들었다.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도 없었다. 십여 장의 거
리를 있으나 마나 하게 만들며 섬전처럼 닥쳐 드는 그 검기 앞에
서 육초량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검강(劍 )!』
그것은 기검(氣劍)의 극치인 이기어검(以氣御劍)의 검강이었
다. 설마 그가 일기(一氣)의 검강으로 쳐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육초량이었다. 그가 놀람의 외침을 터뜨리며 난간을
박차고 몸을 던졌다.
씨이이-
그 때서야 한 줄기 싸늘한 휘파람 소리가 귓전을 스쳐 갔다.
뒤에서 우르릉거리는 굉음이 쏟아졌다. 간발의 차이를 두고 육초
량을 스쳐 지나간 검강이 등왕각의 한쪽 지붕에서부터 난간까지
를 일직선으로 잘라 버린 것이었다. 먹줄을 퉁긴 듯 반듯하게 잘
린 등왕각의 한 면이 천둥치는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가고 있었
다.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허공에 떠 있는 육초량의 눈에
언뜻 공포가 떠올랐다.
야합! 하는 낮고 힘찬 기합 소리와 함께 죽립인이 다시 검을
떨쳐 내고 있었다. 또 한 줄기의 묵빛 검강이 소리 없이 뻗어왔
다. 다급해진 육초량은 허공 중에서 분수의 보를 밟아 좌우로 여
덟 번이나 몸을 비틀고 이동해서야 가까스로 그 일격을 피할 수
있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훌륭하다!』
외친 죽립인이 다시 세 번째 검을 뿌렸다. 이번에도 맥없이 물
러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육초량의 투지를 폭발시켰다.
『좋아!』
이를 악물고 철검을 뽑은 그가 허공을 격하고 온 힘을 다해 후
려쳤다. 번쩍 하고 그의 허리에서 눈부신 백광(白光) 한 줄기가
뻗어 나갔다. 번갯불이 작열하듯 가공할 기세로 찰라간에 공간을
가르는 그것 또한 섬전(閃電)의 검강이었다.
쏴아아-!
십 장의 거리를 격하고 서로 부딪친 두 줄기의 검고 흰 검광이
사방으로 맹렬한 검기의 폭풍을 흩뿌리며 진저리를 쳤다.
『허어!』
육초량이 검강으로 마주쳐 오리라는 것을 예상치 못했던 듯,
죽립인의 입에서 놀람과 경탄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차합!』
사납게 외친 육초량이 다시 전신의 기를 모아 두 번째의 검격
을 무겁게 쳐냈다. 멀리서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를 내며 또 한
줄기의 백색 뇌전이 허공을 갈랐다.
『핫하하하!』
통쾌한 웃음을 터뜨린 죽립인의 일검도 육초량을 향해 소리 없
이 뻗어 나왔다. 뒤늦게 쳐온 일섬(一閃)의 묵광이 오히려 육초
량의 검강보다 먼저 와 닿는 듯했다. 그것이 육초량의 이마를 간
발의 차이로 스쳐 지나갔다.
『우욱!』
육초량은 머리를 짓눌러 오는 무거운 통증에 신음을 흘리며 물
러서야 했다. 그와 동시에 죽립인의 입에서도 으헛! 하는 놀람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의 죽립이 어느새 양단되어 떨어지고 있
었다.
『......』
『......』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선혈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육초량은
그 무서운 상대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죽립을 잃은 노인도 침
중한 눈으로 육초량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정히 머리를 빗어 올
려 상투를 틀었고, 검은 수염을 가슴 앞까지 늘어뜨리고 있는 홍
안의 노인이었다. 정기가 번쩍이는 그의 눈빛이 놀람으로 흔들리
고 있었다.
『검신 공야승...』
한참 만에야 육초량의 입에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비로
소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본 것이다.
공야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노부로 하여금 진심으로 탄복케 한 최초의 사람이다.
훌륭했다.』
육초량은 묵묵히 자신이 방금 세상을 놀라게 했던 초인과 검을
겨루었다는 사실을 음미해 보고 있었다. 두려움이 아닌 묘한 설
레임과 흥분이 그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노부도 너의 나이 무렵에는 그만한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 훌
륭하다.』
공야승이 거듭해서 훌륭하다는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육
초량은 커다란 흥분과 감격으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겨우 두
손을 모아 포권해 보이는 그를 바라보던 공야승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천천히 품속에서 금빛 봉서(封書) 한 장을 꺼내 드는 그
의 눈에 갈등의 빛이 어려 있었다.
『휴... 득이 될지 해가 될지는 하늘에 물어봐야 할 일. 자, 받
아라.』
그의 손을 떠난 봉서가 스스로 살아서 날아오는 새인 듯 천천
히 허공을 날아 가슴 앞으로 다가왔다. 육초량이 그것을 받아 들
자 그윽한 눈길로 다시 한 번 그를 찬찬히 살펴 본 공야승이 돌
아섰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거든 그 즉시 그곳을 떠나라.』
알 수 없는 한 마디를 던진 공야승이 구름이 흐르듯 부드럽게
움직여 사라져 갔다. 그가 있던 텅 빈 공간을 보며 육초량은 고
개를 갸웃거렸다. 마지막으로 남긴 그의 수수께끼 같은 말이 무
엇을 뜻하는 건지 궁금하기만 했다.
(무언가 암시를 해주려 한 것 같은데... 그 의미가 뭘까...?)
한동안 골똘히 생각하던 육초량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봉
서를 뜯어보았다. 그 속에서 나온 것은 한 통의 초청장이었다.
* * * *
생사도(生死島)의 초청장.
거의 동시에 중원 무림의 거파(巨派) 명숙(名宿)들에게 빠짐없
이 전달된 그것은 일시에 중원 전역을 경악과 흥분의 회오리 속
으로 몰아 넣었다. 그것은 여태까지 들어보지 못한 생사도라는
이름이나, 그곳에서 갖는다는 개파대회(開派大會) 때문이 아니었
다. 가장 큰 놀람으로 중원을 들썩이게 한 것은 생사도주의 약속
한 마디였다.
그것은, 천제무황경(天帝武皇經)과 혼원경(混元經), 그리고 감
리보록(坎離寶錄)이라는 세 권의 기서(奇書)를 개파대전에 참석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
말에 경악했다.
다섯 부의 비급으로 이루어진 천제무황경은 이미 강호에 흘러
들어 한바탕 혈풍을 일으킨 바가 있었다. 그 원본이 생사도에 소
장되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 외에 혼원경과 감리보록 또
한 그곳에 있다는 것에는 넋이 다 빠져 달아날 지경이었다. 무제
(武帝)의 천서(天書)로 불리며 오래 전부터 전설로 그 이름만 전
해져 오고 있던 그 세 권의 비급이 공개된다는 것은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 못지 않게 놀라운 또 한 가지의 사실은 초청장에 서명된
이름이었다. 생사도주라고 스스로를 밝히고 있는 자가 남천일존
(南天一尊) 사공영호(詞空靈昊)였던 것이다. 그는 전세대의 무림
에 대정지기(大正之氣)의 신화를 남기고 사라졌던 초인이었다.
그가 북천일마, 중원일신 등과 함께 강호에서 모습을 감춘 지가
벌써 삼십 년 전이다. 그런데 이제 홀연히 생사도주라는 생경한
이름으로 다시 나타났다는 것은 역시 충격이었다.
믿기 힘든 이 사실들로 인하여 온 무림이 들끓고 있을 때, 우
객(雨客) 초유성(楚流星) 또한 예외 없이 생사도의 초청장을 받
아들고 있었다.
『드디어 나타났다!』
초유성의 온몸이 격정으로 떨렸다. 그렇게 애타게 찾아도 신룡
처럼 보이지 않던 생사도가 문득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의 수련(水蓮)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는 생사도의 초청장을 움켜쥐고 그렇게 부르짖었다. 그런 초
유성의 격정을 지켜보던 옥청향이 소리쳤다.
『저도 가겠어요!』
초유성 못지 않게 그녀의 음성도 들떠 있었다.
『육가가도 반드시 그곳에 오실 거예요. 내가 가지 않을 수 없
어요.』
초유성은 그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수련
을 찾듯, 그녀도 육초량을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걱
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초유성이 그녀의 섬섬옥수를 가만히
쥐고 근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의외의 험경을 겪게 될지도 모르오.』
『상관없어요.』
청향이 단호하게 말하며 도리질했다.
『그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저는 가겠어요.』
그녀의 열정으로 달아오른 눈을 들여다보던 초유성이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의 마음도 그와 같은데 내 어찌 소저의 청을 뿌리칠 수 있
겠소. 함께 갑시다.』
다음날 아침 초유성과 옥청향은 마애봉(磨崖峰) 기슭의 작은
암자를 떠났다. 그들이 다정하게 송림을 지나 사라지자, 우울한
모습을 드러내는 자가 있었다.
『너희들만 따라다니면 결국 그 놈을 다시 만나게 될 터. 지옥
까지라도 쫓아간다.』
낮게 중얼거리며 송림 밖을 바라보는 깡마른 사나이는 마비도
(魔飛刀) 독고월(獨孤月)이었다. 일년전 마애암에서 색화랑 적음
상을 다시 놓치고 만 그는 끈질기게 청향의 주위를 떠나지 않으
며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있는 이상 언젠가는 적음상
이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2>
남해에 있는 외진 항구인 율목진은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어촌
이었다. 사십여 호에 불과한 가구의 수입원은 오직 바다였다. 바
다에서 나고 바다에서 자라며 바다에서 죽어 가는 사나이들은 용
감하고 순박했으며, 그들의 아내와 딸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유쾌
하고 아름다웠다.
이곳을 찾아오는 외지인들이라고는 배를 타고 절강이나 산동으
로 가려는 나그네들이거나, 안남(雁南)이나 대월(大越) 등지로
오가려는 상인들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들이 찾아오는 것도 봄이
나 가을 한 때였을 뿐, 대체로 조용하고 변화가 없었다. 그런 율
목진에 조그만 어촌과는 어울리지 않게 주루가 세 군데 있었다.
모두가 나그네나 상인들을 바라보고 한 철 장사를 하기 위해 세
워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뜸한 여름과 겨울에는 아예 문을 닫
아걸고 있기 일수였다.
그러나 금년 초겨울에는 그렇지 않았다. 벌써 사흘 전부터 율
목진은 갑자기 밀려든 인파들로 인하여 몸살을 앓고 있었던 것이
다. 그들은 하나같이 병장기를 지니고 형형한 안광을 빛내는 건
장한 사나이들이었다. 중원 각지에서 몰려든 그 낯선 이방인들로
조그만 어촌은 터져 나갈 듯했다. 객잔업을 겸하고 있는 세 개의
주루와 한 개의 다루는 언제나 발 디딜 틈 없이 붐볐고, 심지어
민가의 여분이 있는 방이나 헛간마저도 낯선 사내들로 모두 가득
찼다.
중과 도사, 속인이 한데 뒤섞였고, 걸인이 있는가 하면 고관대
작의 자재인 듯한 귀공자도 있었다. 남녀노소가 한데 뒤엉켜 어
리둥절하고 불편하기도 했지만, 때아닌 돈바람이 불어오기도 한
것이어서 율목진의 주민들은 신이 나 있었다. 그들은 지난 며칠
사이에 바다에서 일 년은 벌어야 할 수입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
다. 그것은 이 가난한 어촌에 뜻밖에 밀려온 행운이기도 했다.
그러나 늘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닌 게 세상사는 일인 모양이었
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쑥불쑥 벌어지는 살벌한 싸움에 순박
한 주민들은 공포에 떨기도 했다. 하루 밤을 자고 나면 어김없이
사오 명의 외지인들이 서로 싸우다가 죽어 있곤 했던 것이다. 그
럼에도 주민들은 누구 하나 그들의 소란에 항의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허어, 절강의 신창(神槍) 이유명 대협이다.』
『그 곁의 호한은 하남 금검문의 표두검(豹頭劍) 고경신이 아닌
가?』
『아니, 저 자는 절강의 좀도둑이라는 등가이 아니야?』
『흐흐, 저런 시러배들까지 꾀어들다니... 생사도주 사공대협께
서 알면 기가 막힐 노릇이겠군.』
율목진의 어귀로 새로운 인물들이 들어설 때마다 이미 당도해
있던 자들은 때로 감탄을 터뜨렸고, 때로 비웃음을 흘리며 그들
을 구경하느라고 법석을 이루었다.
『어제는 호남 삼살이라나 뭐라나 하는 것들이 하늘 높은 줄 모
르고 설쳐대다가 산동의 금화공자 두소운의 일장에 맞아 죽었지
않은가.』
『삼살이 즉살이 된 거지 뭐. 하여튼 별 어중이떠중이들이 죄다
모여들었다니까.』
『흐흐... 왔으면 자네나 나처럼 이 일생일대의 사건을 구경이
나 하다 가야지. 행여 주제를 모르고 까불다간 어느손에 맞아 죽
었는지 모르게 죽고 마는 거야.』
연일 밀려들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당금 무림을 휘젓는 절정
고수들도 있었고, 하오문의 건달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생사
도주의 초청을 받고 온 자들이거나, 아니면 이 진귀한 광경을 구
경하기 위해 온 자들이었다. 개중에는 주제를 모르고 생사도의
삼보(三寶)를 탐내 어떻게 하면 슬그머니 섞여 그곳에 가 볼 수
있을까 하고 눈치를 보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로 인해 소란스러운 한낮의 율목진 어귀로 느릿느릿 걸어
들어오고 있는 죽립인 한 명이 있었다. 겨울을 바라보는 싸늘한
바람에 그의 허름한 옷자락이 바래 있었다. 먼 길을 걸어온 듯,
그의 죽립이며 어깨 위에는 뽀얗게 먼지가 앉아 있었다. 한 자루
의 철검을 허리에 매달고 짚신을 신은 그의 보잘것없는 모습에
사람들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내가 너무 일찍 왔나?)
육초량은 죽립 속에서 눈살을 찌푸렸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율목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에 당황한 것이다. 그는 얼굴을 가
리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 많은 사람들 속에는 자신을 알아
보는 자가 있을 것이고, 혹시라도 사국천이나 마백조와 부딪치게
된다면 성가신 일이 벌어질 게 뻔할 것 같아 더욱 죽립을 깊이
눌러 썼다.
그가 막 율목진에 들어섰을 때 사람들이 일제히 와, 소리를 지
르며 몰려갔다. 육초량은 얼떨결에 그 인파에 묻혀 섞이고 말았
다. 발돋움하여 바라보자 멀리 한 무리의 비천맹 고수들에게 에
워싸여 있는 사국천이 보였다. 그가 당당히 율목진에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오연히 치켜든 턱과 냉오(冷傲)한 눈빛이 그를 돋
보이게 했다. 금의 장포 자락을 펄럭이며 한 걸음 한 걸음을 무
겁게 내딛고 있는 그의 풍모는 과연 대가의 그것이었다. 그가 입
가에 가벼운 비웃음을 매단채 자신을 바라보며 탄성을 발하고 있
는 군웅들을 한 차례 쓸어 보았다.
『흥!』
가벼운 코웃음이 그의 도도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사국천이 다가오자 몰려들었던 군웅들이 바닷물이 갈라지듯 좌
우로 분분히 흩어졌다. 그들 사이를 지나는 사국천이 하늘가에
눈길을 둔 채 다시는 시선 한 번 돌리지 않았다.
(굉장하군.)
육초량은 더욱 죽립을 눌러 쓰며 씁쓸히 웃었다. 중원 무림에
서 그의 명성과 위용은 과연 당당했던 것이다. 돌아서려던 육초
량은 다시 군웅들의 탄성에 시선을 돌려야 했다. 거기 또 한 무
리의 사람들이 율목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마백조와 귀문의 무
리들이었다.
흑의 장한들에게 둘러싸여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는 그의 시체
처럼 창백한 얼굴이 군웅들을 질리게 했다. 가끔씩 새파란 귀화
가 번쩍이는 그의 시선이 쓸어올 때마다 그것을 받은 군웅들은
서로를 밀며 우르르 물러섰다. 그의 등장은 장터처럼 소란스럽던
율목진에 갑작스런 적막과 귀기를 불러왔다. 싸늘한 바람이 불어
가듯 귀문의 무리들이 냉랭한 한기를 남긴 채 율목진 깊숙이 사
라져 갔다.
(과연 구경해 볼만한 일이다.)
육초량은 내심 실소를 흘리며 돌아섰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긴장감이 내내 그의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었다.
* * * *
『배가 온다!』
아침 일찍부터 부두에 나가 있던 누군가의 입에서 터져 나온
외침은 순식간에 율목진 전체로 퍼져 나갔다.
배가 온다.
그 한 마디에 사람들은 하던 일들을 팽개치고 일제히 부두를
향해 달려갔다. 멀리 두 개의 돛을 단 거대한 범선 열 척이 푸른
파도를 헤치며 미끄러지듯 다가오고 있었다. 생사도의 배였다.
점점 다가오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율목진
이 한 순간 무거운 정적으로 뒤덮였다. 생과 사, 그리고 명예와
치욕, 환희와 절망이라는 서로 상반된 의미들을 감추고 있는 신
비의 배가 오고 있는 것이다. 저 배가 사람들을 싣고 다시 돌아
갈 그곳, 생사도가 과연 밝음과 어두움 중에서 어느 쪽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절반의
기대와, 절반의 두려움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범선이 점점 가까워지자 갑판에 늘어서 있는 백여 명의 장한들
이 보였다. 검은 피풍((披風)을 두르고 흑색 영웅건을 쓰고 있었
는데, 허리에는 한 자루씩 두터운 칼을 차고 있었다. 하나 같이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눈매와 꾹 다문 입술, 곧은 허리가 자못 웅
장해 보이는 자들이었다. 군웅들은 우선 생사도에서 온 그들과의
첫 대면에서 기가 질렸다.
비좁은 율목진의 포구는 쌍돛을 단 열 척의 범선을 수용할 수
가 없었다. 아홉 척의 배들이 포구 밖에서 머무는 동안 그 중 한
척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닻을 내렸다.
『본도의 초청장을 가지고 계신 영웅들께서는 각자 다섯 명 이
내의 동행자들과 함께 승선하시기 바라오!』
배가 닿고, 흑의 장한들이 민첩하게 움직여 닻줄을 걸고 발판
을 내리는 등의 일을 일사천리로 해치우고 나자 선뜻 뱃머리에
나서서 외친 자는 호목(虎目)에 고슴도치 수염을 한 사십대 후반
의 사내였다. 팔 척에 달하는 거구에 천신(天神)을 방불케 하는
위맹한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율목진 전체를 압도해 버렸다.
『아, 저 사람은 장추왕이 아닌가!』
『설마 철장패천 장추왕이라니...!』
철장패천(鐵掌覇天) 장추왕(張樞王)은 산서 영제 출신이었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강호에 뛰어든 이래 그 천력(天力)과 호기로
써 중원무림을 뒤흔들어 놓았던 자였다. 벽력대신(霹靂大神)이라
고 불릴 정도로 그 용맹이 뛰어났던 그는 장강 남북을 종횡하며
불세의 무명을 날리다 십여 년 전 홀연히 강호에서 모습을 감추
어 버렸다.
한때 무림의 지대한 관심사였던 그의 실종 사건도 어느덧 세인
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오늘 그가 생사도의 인물로 변신하여 열 척의 선단을 이끌
고 율목진에 나타난 것이다.
군웅들은 장추왕의 지시대로 생사도의 초청장을 내보인 후 차
례차례 배에 오르기 시작했다. 인원을 다 채운 배가 포구 밖으로
나가자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한 척이 다가와 정박했다.
그렇게 교대로 드나들며 군웅들을 실어 나르는 시간이 제법 걸렸
다.
마백조가 귀문의 다섯 고수들과 함께 네 번째 배에 승선했고,
사국천도 그의 수하 다섯을 거느리고 다섯 번째 배에 올랐다. 육
초량은 여전히 죽립을 깊숙이 눌러쓴 채 그들이 배에 오르는 것
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배에 오를 때마다 생사도의 초청장을 받지 못한 군웅들
은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탄식을 뱉어내며 발을 굴렀다. 육초량
이 마지막 배에 올랐을 때는 어느덧 해가 기울어 가고 있었다.
한 배에 서른 명씩, 도합 삼백 여 명의 인사들을 태우는 데 한나
절이 걸린 것이다. 그리고도 아직 배에 오르지 못한 군웅들이 그
만큼이나 남았다. 그들은 내일 도착하기로 한 열 척의 범선에 나
누어 타고 뒤를 따라야 할 것이었다.
활짝 돛을 편 범선들이 율목진을 뒤로하고 미끄러지듯 망망대
해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뱃전에 서서 비릿한 해풍에 온몸을 적시며 육초량은 지긋이 입
술을 깨물었다. 이틀 뱃길이라는 그 생사도에 과연 어떤 일이 기
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집회가 좋은 뜻을 가지
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상관없
는 일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초청장을 보내 왔으니 받았고,
받았으니 갈 뿐, 그 외의 일들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닥치면
닥치는 대로 헤쳐 나가면 될 것이라고 애써 태평한 마음을 가져
보는 육초량이었다.
열 척의 범선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거대한 파도를 헤치며 나
아가는 광경은 실로 장관이었다.
(좋은 구경을 하는 것이다. 안목을 넓힐 둘도 없는 기회가 되
겠지.)
육초량은 스스로의 긴장을 달래듯 그렇게 중얼거리며 수평선
너머로 가라앉고 있는 저녁 어스름을 바라보았다.
생사도의 선단이 떠나고 난 뒤에 한가롭게 발아래 깔려오는 땅
거미를 밟으며 율목진으로 들어서는 남녀가 있었다. 허름한 옷에
낡은 철립을 깊이 눌러 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사나이와 남빛
의 헐렁한 장포로 몸을 가리고 얼굴에 짙은 망사를 두르고 있는
여인이었다.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는 사나이의 어깨 너머로 저물녁의 쓸쓸
함과 같은 우수가 엿보였다. 허리에 은은한 홍광이 일렁이는 고
검(古劍) 한 자루를 매달고 있는 그는 우객 초유성이었다.
『소저, 오늘의 배는 이미 떠났다고 하오.』
『아, 하오면 육가가께서는 혹시 그 배에 타고 계셨던 게 아닐
까요?』
『한 바퀴 돌아보았지만 이곳에서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
니 아마 그럴 것이요. 너무 상심하지 마오. 내일 도착한다는 배
를 타면 며칠 후에 생사도에서 그를 만나볼 수 있게 될 것이요.』
탄식하는 옥청향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는 초유성의 얼굴
가득 들뜬 흥분이 떠올라 있었다.
『초대가께서도 그곳에서 꼭 그녀를 만나게 되리라고 믿어요.』
어둠에 잠겨 들고 있는 먼바다를 바라보는 초유성의 눈이 반짝
였다. 마음 속의 그녀를 찾아 강호를 주유하기 팔 년. 이제 며칠
후면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그녀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생
각이 그의 마음을 초조하게 했다. 초유성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
다.
(며칠만 기다려 주오. 그대가 지옥에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꼭 되찾아 오겠오.)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있는 그의 곁에서 옥청향도 두 손을 꼭
쥔 채 이제는 어둠 속에 가라앉아 버린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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