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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도(生死島) 3-10
율목진을 떠난 배는 꼬박 이틀 밤과 낮을 항해하여 망망대해
속에 떠 있는 화산도에 도착했다. 그곳은 온통 검은 현무암으로
뒤덮인 삭막하고 볼품 없는 섬이었다.
섬 중앙에는 삿갓 모양의 산이 솟아 있었는데, 산기슭이 제법
수목에 뒤덮여 있어서 그나마 생기를 띄고 있었다. 산 아래에서
중턱까지를 푸르게 물들이며 띠처럼 둘러 있는 수목 위로는 천여
척의 높이로 우뚝 솟아 있는 검은 바위 덩어리였다. 산 위에서
검은 유황 연기가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있어서, 이 섬이 살아서
활동하고 있는 화산도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검은 빛 일색인 섬을 돌아가며 띠처럼 둘러 있는 짙은 초록의
열대림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묘한 부조화와 반감을 느끼게 했
다. 황폐함과 풍요로움을 함께 가지고 있는 섬이었고, 죽어버린
바위 덩이들과 살아 있는 화산이 공존하고 있는 섬이었던 것이
다. 앞에서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고 돌아서서 등뒤로 지는
석양을 볼 수 있는 섬. 그 상반되는 심상(心象)들이야말로 이 섬
이 생사도라는 이름을 갖게 된 까닭인지도 몰랐다.
다음날 아침 마지막 배가 들어왔다는 소식과 함께 작은 화산도
는 팽팽한 긴장과 흥분 속에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육백 여 명의
강호인들이 몰려들어 온 것이다. 그들은 중원 무림의 실제적인
힘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영향력이 있는 자들이었고, 고수들이었
다. 그들이 다시 돌아갈 때까지 강호는 한동안 텅 빈 공백 상태
에 빠져 있을 것이었다.
개개인이 한 지방의 웅주, 패자로 군림하고 있는 육백 여의 무
리들은 정(正)과 사(邪), 마(魔)가 두루 섞인 채 한 무리를 이루
고 있었다. 이처럼 막강한 자들이 이처럼 거대한 집단으로 모여
들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모두 모래알 같은 자들이다.)
육초량은 꾸역꾸역 대회 장소로 몰려가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
며 냉소하였다. 뭉쳐진다면 유사이래 최대의 힘을 발휘할 수 있
는 집단이겠으나, 그들은 결코 뭉쳐질 수 없는 자들이었다. 자기
만의 오만과 독선과 편견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는 자들인 것이
다. 그것이 고수라는 자들의 자부심이자 가장 큰 약점이기도 했
다. 게다가 그들 모두는 생사도의 삼보(三寶)에 현혹되어 저마다
마음 속에 커다란 탐욕을 감춘 채 몰려들어 온 자들이었다. 서로
가 서로에게 경쟁자요 적일 뿐, 동지가 될 수 없었다.
삼 열, 혹은 사 열로 늘어선 채 반 바퀴쯤 섬을 돌아가자 검은
현무함의 절벽 아래에 지옥의 어둠으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시커
먼 입을 벌리고 있는 동혈이 보였다. 그 속으로 인도되어 들어가
고 있는 군웅들의 얼굴에 하나 같이 불안과 긴장, 그리고 감출
수 없는 기대와 흥분이 어렸다.
동굴은 점점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걸음의 수로 헤아려 보
았을 때, 벌써 거의 일백 장 가까이나 내려가고 있다는 것이 육
초량을 불안하게 했다. 그들은 동굴을 따라 바다 밑 깊은 곳까지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온몸에 땀이 날 정도로 훈훈하게 올라오
는 열기 속에 매캐한 유황 냄새가 맡아졌다.
십여 장을 더 내려가자 거대한 철문이 군웅들의 앞을 가로막았
다. 여기가 동굴의 끝인가 하여 술렁거리는데, 벽속에서 쇠가 서
로 갈리는 듯한 소음이 스며 나왔다. 그리고 철문이 무거운 소리
를 내며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강렬한 빛이 갑자기 쏟아져 나왔다. 끝없이 길고 긴 통로에 늘
어서 있던 군웅들은 모두 눈을 찡그려야 했다. 잠시 후에 누군가
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이럴 수가...!』
『이런 장관이 있었다니!』
선두에 서 있던 자들이 내뱉는 탄성에 뒤에 있던 자들이 더 견
디지 못하고 그들을 밀며 쏟아져 들어갔다.
<3>
그곳은 거대하고 환상적인 지하 광장이었다. 일시에 천 명의
사람들을 수용하고도 남을 만큼 거대한 광장이 바다 밑 일백 여
장 아래의 땅 속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놀라운 일인데, 그 기이하
고 현란한 내부의 모습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오색 영롱한 종유석들이 보석 발을 늘어뜨린 것처럼 촘촘히 돋
아나 있었고, 광장의 이곳 저곳에 솟아 있는 수정의 석주들은 횃
불의 이글거리는 불빛을 반사시키며 동굴 전체를 은은한 자광(紫
光)과 백광(白光)의 너울로 뒤덮어 놓고 있었다. 그 빛들이 부딪
치는 종유석 주위에는 무지개 빛과도 같은 칠채보광(七彩寶光)이
반짝였다. 그 현란한 아름다움이 수백 군웅들을 일시에 환상 속
으로 몰아 넣었다.
동굴의 안쪽에는 일 장 높이의 대(臺)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
위에 산호로 장식한 몇 개의 태사의가 위엄 있게 놓여져 있었다.
군웅들이 처음 보는 아름다운 동굴 속의 광경에 넋이 빠져 있을
때, 두터운 징을 치는 웅장한 소리가 들려왔다.
쿠아앙-!
동굴 전체를 뒤흔드는 그 거대한 징소리에 정신을 차린 군웅들
이 다시 긴장된 얼굴로 숨을 죽였다.
(대단하군.)
광장의 한쪽 구석에서 팔짱을 끼고 차가운 눈빛으로 그 모든
정경들을 세심히 살피고 있던 육초량은 혀를 찼다.
대의 뒤쪽으로는 여덟 개의 석문이 있었다. 그 중 가운데의 석
문이 활짝 열리고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손에 보검을 든 대한들
이 열을 지어 나와 대 아래 도열하기 시작했다. 우측으로 늘어선
일백 여 명의 대한들은 모두가 금빛 전포를 두르고 영웅건을 쓴
자들이었다. 그들의 정기가 충만한 눈빛이 불빛 아래 이글거리고
있었다. 한눈에도 모두가 내가의 고수들임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주는 모습들이었다.
좌측에 늘어선 또 다른 일백 여 명의 대한들은 청동의 역사를
연상케 하는 우람한 체구를 지닌 호한들이었다. 벌거벗은 상체에
바위처럼 박혀 있는 근육들이 구리 빛으로 번쩍였다. 그들은 외
문의 무공을 경지에 이르도록 연마한 자들이 분명했다.
그 두 무리의 장한들이 도열하여 서자 은은한 주악 소리와 함
께 다시 사람들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붉고 푸른 구름 덩
이인 듯 영롱하게 어우러진 홍의의 소녀들과 청의의 소녀들이었
다. 각기 보홀(寶笏)을 한 손에 들고 한 손으로는 살짝 치맛자락
을 잡고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 그녀들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군
웅들 중 혈기가 왕성한 젊은 자들은 참지 못하고 탄성을 터뜨렸
다.
청의와 홍의 소녀들이 대 위에 좌우로 벌려 서서 공손히 허리
를 굽히자, 다시 한 차례의 웅장한 징 소리가 광장 안을 웅웅 울
려댔다. 군웅들이 모두 긴장한 시선으로 대 위를 바라보았다. 드
디어 생사도주 사공영호가 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비범한 신태를 뽐내기라도 하듯, 선인(仙人) 같은 우아함
으로 백염을 쓸며 대 위에 올라 태사의에 앉았다. 그의 곁에 태
산을 누르는 듯한 위엄으로 서 있는 장중한 기도의 노인이 검신
공야승임을 알아본 군웅들은 다시 한 번 경악하였다. 석년의 남
천일존 사공영호와 중원일신 공야승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는 것
은 실로 뜻밖의 일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모습으로 보아 검신 공
야승이 남천일존을 보좌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라는 게 더욱 놀라
웠다.
군웅들의 술렁임을 한 차례 훑어 본 사공영호가 점잖게 수염을
쓰다듬고 나서 의자에서 일어섰다.
『노부가 중원을 떠난 지 삼십 년. 실로 오래간만에 이처럼 강
호 제현들을 다시 만나게 되니 감개가 무량하오이다.』
그가 군웅들을 향해 포권한 손을 절레절레 흔들어 인사를 했
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나서서 마주 인사하는 자가 없었다. 수
백의 군웅들이 운집하여 있는 지하 광장에는 숨막힐 듯한 침묵만
이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한 번 그런 군웅들을 찬찬히 돌아본 사공영호가 가볍게
웃고 나서 웅후한 진력이 실린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노부는 여기 공야형의 도움으로 용기를 얻어 본도에서 새로이
문파를 열고 강호의 대의를 위해 다시 나서기로 했소이다.』
왕년의 남천일존에 대한 존경심과 경외감이 군웅들 모두의 가
슴을 점차 무겁게 눌러왔다.
『돌아보건대, 강호는 수 백년을 두고 서로간의 뿌리깊은 갈등
과, 문파 간의 난마처럼 얽힌 이해관계로 인하여 하루도 편할 날
이 없었소.』
『......』
『그 와중에서 강자는 살아남고 약자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무림의 생리로 자리잡아갔고, 드디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약육강식의 피비린내 나는 혈전장으로 화하여 무림이 황폐해져가
기 시작했소이다.』
사공영호의 말에 점점 열기가 더해갔다. 군웅들은 모두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대로 방치해 두었다가는 무림의 존속까지 위태롭다고 판단
한 노부는 어쩔 수 없이 안일하고 행복한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소이다.』
(흥, 냄새가 나는 늙은이다.)
마치 대의를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려 한다는 듯 말하고
있는 사공영호의 웅변에 육초량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처음
그가 대 위에 올라섰을 때부터 육초량은 그 자신의 야수적인 본
능이 사공영호에 대하여 묘한 적개심과 경계를 불러내고 있는 것
을 느꼈다. 사공영호가 절대로 좋은 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강했
던 것이다.
육초량은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사공영호의 근엄한 얼굴을 주
시했다. 한 순간의 착각이었을까? 마침 군웅들을 쓸어 보던 사공
영호의 시선이 육초량의 눈과 마주쳤다. 그 순간 육초량은 그 눈
빛에서 형용할 수 없는 음험함과 불길한 어둠의 빛을 보았다. 사
공영호가 그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던 것이다.
(헉!)
육초량은 순간적으로 등줄기를 훑어 내리는 싸늘한 공포를 느
끼고 헛바람을 들이켜야 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사공영호의 시선은 곧 다른 군웅들을 인자하게 쓸어 보고 있었
다. 육초량은 내심 무서운 늙은이라고 중얼거렸다.
『노부는 단지 무림을 떠나 은거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절
감했소이다. 해서 무림을 하나의 구심점으로 모이게 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냄으로써 무림 동도 모두가
그것에 따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소이다. 그것만이 어지러운 분
란과 무질서를 막고 무림의 정기를 오래도록 보존하는 길인 것이
외다.』
생사도주 사공영호의 입에서 새로운 무림의 질서라는 말이 나
오자 지하 광장의 이곳 저곳에서 작은 소요가 일기 시작했다. 그
말의 진의는 결국 무림 일통이라는 것이었으며, 강력한 힘을 가
진 자에 의한 군림과 지배를 뜻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사공도주. 그 말씀은 결국 도주께서 군림의 뜻을 가지고 있다
는 것이오이까?』
누군가가 군웅들의 소요에 찬물을 끼얹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강렬한 시선으로 천천히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본 사공영호가 무겁
게 입을 열었다.
『그것은 무림 전체의 평화를 위한 유일한 길. 꼭 본인이 아니
라도 좋소. 누구든지 위대한 힘과 정열을 가지고 있는 대 영웅이
있다면 노부는 기꺼이 그를 도와 대업을 이루게 할 것이요.』
광장 안이 다시 무거운 침묵으로 잠겨 들어갔다. 누구 하나 숨
을 크게 쉬는 자도 없었다. 한동안 군웅들의 침묵을 지켜보던 사
공영호가 크게 외쳤다.
『본 생사도는 위대한 이상으로 오늘 강호에 처음 모습을 드러
냈소. 평화를 얻기 위하여 희생은 불가피한 것. 이후 본도의 뜻
에 따르는 자는 영원한 벗이 될 것이나 그렇지 못한 자는 영원한
적이 될 것이요!』
『아!』
『사공대협이 어찌 그런 말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곳곳에서 경악의 외침들이 터져 나왔다.
『무림의 평화를 염려하는 노부의 고충을 헤아려 주오!』
사공영호의 말에 군웅들이 걷잡을 수 없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가 무림의 지존으로 군림하겠다는 말을 감히 선포할 줄이야 누
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공영호가 아무리 전대의 초인이
자 신화적인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
다.
군림제일좌(君臨第一座)의 영예는 어느 개인이 그의 힘으로 탈
취하는 것이 아니라 무림 전체가 부여해 주는 명예일 뿐이다. 그
명예를 얻은 자는 무림인 모두의 존경과 흠모를 받을 수 있으나,
그 이름으로 결코 무림을 지배할 수는 없었다. 무림의 생리가 그
것을 용납하지 않는 까닭이었다. 이것은 한 번도 깨진 적이 없는
철칙이고 법칙이었으며 묵약(默約)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누구보
다 잘 알고 있을 남천일존 사공영호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 군
웅들 모두는 믿어지지 않았다.
광장에 운집해 있는 군웅들 속에서 거센 반발의 기운이 일어나
기 시작한 것을 본 사공영호가 두 팔을 흔들며 웅장한 일성을 터
뜨렸다.
『조용히! 노부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이다!』
충만한 진기를 실은 그의 외침이 지하광장 전체를 뇌성(雷聲)
으로 진동시켰다. 엄청난 내력이었다. 군웅들은 모두 기혈이 은
은히 진탕되는 것을 느끼고 경악했다. 사공영호의 번갯불 같은
시선이 그런 군웅들을 한 차례 훑고 지나갔다.
『노부가 재출강호(再出江湖)의 첫발을 내딛은 것을 기념할 겸,
이곳에 와 주신 여러 영웅들에게 약속한 예물을 드리겠소.』
말을 마친 그가 손뼉을 쳤다. 그러자 동혈 속에서 각기 금합
(金盒)을 든 세 명의 여인이 은은한 주악에 맞추어 입장했다. 군
웅들의 시선이 모두 그 세 개의 금합에 가 멎었다. 소요가 가라
앉고, 그 시선에 점차 탐욕의 열기가 더해 가는 것을 바라본 사
공영호의 눈 속에 한 줄기 득의의 빛이 스쳐갔다.
사공영호가 세 개의 금합을 차례로 열었다. 첫 번째 금합에서
꺼내든 것은 바로 다섯 부로 된 천제무황경(天帝武皇經)이었다.
『아!』
『휴... 설마 했더니 저것이 과연 사공 도주의 손에 있었구나!』
사공영호가 높이 들어 보인 비급을 바라본 군웅들은 저마다 탄
성을 터뜨렸다. 다음으로 그가 꺼내 보인 것이 감리보록(坎離寶
錄)인 데에는 할 말이 없었다. 모두는 놀람으로 벌어진 입을 다
물지 못한 채 세 번째 금합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공영
호가 그 시선들을 즐기듯 천천히 세 번째 금합 안에 들어 있던
것을 꺼냈다. 혼원경(混元經)이었다.
세 권의 비급을 들고 서서 군웅들을 둘러보던 사공영호가 천천
히 입을 열었다.
『이 세 권의 비급은 그 하나 하나가 가히 절세적인 기보라 아
니할 수 없소이다.』
『......』
탐욕의 빛으로 번들거리는 눈들이 일제히 사공영호의 손에 멎
어 있었다.
『노부는 약속한 대로 이것들을 이곳에 오신 무림 제현께 드려
모두가 그것을 익힐 수 있도록 할 생각이외다.』
『......』
『우선 여러분 중에서 세 분만 나오셔서 이 비급들의 진위를 확
인해 보시기 바라오.』
한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육백의 군웅들 속에서 세 명의 인물
이 나섰다. 그들 중 먼저 나섰던 학창의의 청수한 은염 노인이
사공영호에게 포권의 예를 취하고 입을 열었다.
『후배는 화산의 장문직을 맡고 있는 운휘성이라고 합니다. 감
히 감리보록을 받아 보고자 나왔습니다.』
그가 화산파의 장문인 신산검(神散劍) 운휘성이라고 스스로를
밝히자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강호에서 그 얼굴을 보
기 힘든 사람이었던 것이다.
『화산 장문인이셨구려. 좋소, 좋아.』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사공영호가 선뜻 감리보록을 운
휘성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드는 운휘성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다음으로 나선 자는 흑발 흑염의 중후한 인상의 노인으로서,
하북에서 구곡선생(九曲先生)이라는 이름으로 그 명성이 진동하
고 있는 은형기였다. 천제무황경을 요구하는 그에게 사공영호는
자격이 있다며 선뜻 그것을 건네 주었다.
마지막으로 나서서 혼원경을 받아든 자는 마도(魔道)의 거물로
중원 무림에 혁혁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흑백도(黑白刀) 주육아
였다.
그들이야말로 당금 무림을 주름잡는 절정의 고수들 중 삼 인이
라고 할 수 있었다. 군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 삼 인의 몸에
꽂혀들었다. 그들은 경직된 안색으로 신중하게 비급을 검토하고
있었다.
『휴, 진본이 틀림없소이다.』
가장 먼저 긴 탄성을 발하며 비급을 덮고 머리를 든 자는 하북
의 구곡선생이었다.
『비록 한 번도 이것을 본 적은 없으나 이 안에 담겨 있는 심오
하고 깊은 무경(武境)은 이것이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
기에 충분하오.』
그 말이 끝나자 흑백도 주육아가 비급을 덮고 한숨을 내쉬었다.
『구곡선생의 말이 맞소이다. 혼원경 또한 진본이라는 것을 보
증하겠소.』
그들 두 명의 거물이 비급을 보증하자 군웅들이 탄성을 발했
다. 그들의 시선이 아직도 비급을 손에 든 채 그것에서 눈을 떼
지 못하고 있는 화산의 장문인에게 향했다. 감리보록을 살펴보고
있는 운휘성의 안색이 수시로 변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더니 급기야 전신을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군웅들의
눈에 의혹이 떠오를 때, 탁 하고 비급을 덮은 운휘성이 멍한 시
선으로 사공영호를 바라보았다.
『휴..., 설마 했지만, 백여 년 전에 분실되었던 본문의 진산지
보가 정녕 이곳에 있었을 줄이야...』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던 운휘성이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사공대협, 이 감리보록은 원래 본파의 조사께서 사문을 이대
이신 칠원(七元) 사조님께 전하시며 함께 내려 주신 본문의 진산
지보입니다.』
『......』
『그러던 것이 제 육대 녹양(綠陽) 사조 때에 의문의 실종을 당
하신 사조님과 함께 사라졌소이다.』
운휘성의 눈빛이 점점 강렬한 신광을 띄고 이글거렸다. 그가
격앙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그 후 일백 년. 본문에서는 이 보록을 찾는 것이 장문인 된
자의 최대의 공안으로 대대로 이어져 왔소. 소생이 감히 사공 도
주의 초청에 응한 것도 실은 사공 도주께서 가지고 있다고 공포
한 이 보록 때문이었소이다.』
가만히 운휘성의 말을 듣고 있던 사공영호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운장문, 그것이 어쨌다는 것이요? 보록은 오래 전부터
임자없이 강호를 떠돌다 노부의 손에 들어왔으니... 과거에야 누
구의 것이었는지 몰라도 지금은 노부의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
소? 그리고 노부는 이제 그것을 생사도에 온 강호 제현 모두에게
공개하기로 한 이상 그것은 마땅히 이 시간 이후로 이곳에 운집
해 있는 모든 사람의 것인 셈이요.』
『안 되오!』
사공영호의 말에 운휘성이 강하게 거부했다.
『이것이 본문의 진산지보임을 확인한 이상 본문의 제자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결코 공개할 수 없소. 소생은 그럼 이만 실례하겠
소.』
단호히 말하고 감리보록을 소중히 갈무리한 운휘성이 성큼 돌
아섰다. 그 순간 생사도주 사공영호의 눈에 한 줄기 회심의 빛이
스쳐간 것을 눈여겨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공영호가 운휘성
의 등에 대고 다시 느긋하게 말했다.
『노부가 이미 말했거니와, 그것은 벌써 노부의 소유였고, 이제
는 이곳에 오신 강호 제현 모두의 공통된 소유물이올시다.』
『......』
『운 장문인이 자신의 욕심만으로 그것이 화산의 물건이라고 하
나, 이 자리에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사람이 누가 있다는 말이
요?』
느긋한 눈길로 군웅들을 돌아본 사공영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구든지 나서서 감리보록 뿐만 아니라 다른 두 권의 기서도
자기 가문의 물건이었다고 주장하기만 하면 응당 그의 것이 되어
야겠구려?』
『이, 이...!』
운휘성의 얼굴이 분노로 하얗게 질렸다. 그가 한 손으로 검자
루를 잡으며 사납게 외쳤다.
『대협께서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마오!』
『흥!』
코웃음 친 사공영호도 냉랭하게 응수했다.
『오늘은 본도가 출범하는 경사스러운 날이니 내가 참도록 하겠
소. 따라서 노부는 이제부터 그 보록의 주인이 누가 되든 상관치
않겠으니 마음대로 가져가시구려.』
사공영호의 말은 운휘성이 감리보록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을
막지 않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의 말속에는 또 누가 나
서서 보록을 빼앗아 가면 그 자가 그것의 주인이 되어도 좋다는
암시가 들어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천제무황경과 혼원경을
들고 있던 구곡선생과 흑백도 주육아의 눈에도 짙은 탐욕이 어렸
다.
『감사하오.』
냉랭히 말한 운휘성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러나
그가 채 다섯 걸음도 걷기 전에 한 소리 호통이 발목을 붙들어
왔다.
『보록은 놓고 가라!』
싸늘한 일갈과 함께 비조처럼 날아드는 잿빛 그림자가 있었다.
『흥!』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냉소한 운휘성이 쾌속한 솜씨로 검을 뽑
아 쳐 올렸다.
『으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피냄새가 확 퍼졌다. 깨끗한 솜씨였다. 운
휘성의 일검에 가슴이 길게 쪼개진 회의인이 풀썩 고꾸라졌다.
그것이 긴장을 억누르며 바라보고 있던 군웅들의 탐욕에 불을 붙
인 결과가 되었다.
『운휘성, 그대는 너무 뻔뻔하구나! 우리 모두의 몫을 혼자서
차지하려 하다니, 용납할 수 없다!』
사납게 외치며 일장을 쓸어온 자는 산동의 비룡장(飛龍掌) 당
유걸이었다. 그의 강맹한 장세가 노도처럼 덮쳐들었으나 운휘성
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당유걸! 네놈 따위는 화산검을 시험해 볼 자격이 없다!』
싸늘히 일갈한 운휘성이 그대로 검을 날려 장력을 쪼갰다. 중
원 검학의 비조(鼻祖)로 추앙받는 화산의 검학은 천 년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당유걸이 비록 산동 무림의 절정 고수였
지만 운휘성의 음유(陰柔)하면서 날렵한 비서검법(飛絮劍法)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날아
든 운휘성의 일검이 그대로 장세를 가르며 당유걸의 정면을 쪼개
놓았다.
『아아악-!』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고 넘어가는 당유걸의 머리가 두 쪽으로
쩍 벌어지며 뜨거운 뇌수를 뿌렸다. 그 참혹함이 가까스로 억누
르고 있던 군웅들의 분노를 일시에 폭발시켜 버리고 말았다.
『잔인한 놈!』
『날뛰지 마라!』
『이곳이 화산인줄 아느냐!』
갖가지 호통성과 함께 근처에 있던 십여 명의 군웅들이 성난
황소 떼처럼 운휘성에게로 덮쳐들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감리
보록만은 꼭 지키겠다는 듯 운휘성이 굳은 얼굴로 검을 고쳐 잡
았다.
파앗-!
다시 일검이 앞선 자를 노리고 무지개 같은 검화를 뿌리며 날
았다.
『차핫!』
그 자가 우렁차게 외치며 전력을 다해 장력을 때려 검화를 흩
치며 뛰어들었다. 그러자 되돌아 쳐 내리는 운휘성의 운풍회심
(雲風回心) 일초가 그 자를 비켜가며 곁에 있던 두 명의 목을 가
차없이 긋고 빠져나갔다. 선연한 피보라와 함께 다시 처참한 비
명이 터져 나왔다.
그들을 차 버린 운휘성의 몸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살기로 가득
차 있는 검기를 어지럽게 뿌려댔다. 팔방을 향하여 가볍게 긋고,
때로는 송곳처럼 파고들며 젖히고 꺾여 휘도는 화산검의 정수가
아낌없이 쏟아져 나왔다. 운휘성의 손에 들린 삼 척의 장검이 연
출해 내는 그 놀라운 검법이 한 순간에 군웅들 모두를 압도해 버
렸다.
잡초를 베어 가는 굽은 낫처럼, 운휘성의 보검은 거침없이 그
것이 미치는 공간 내의 모든 것들을 찍고 베어 넘겼다. 절묘함과
화려함이 극치를 이루고 있는 검격이었다. 비명과 선혈들이 순식
간에 지하 광장을 아비규환의 혼란 속으로 몰아갔다. 아차 하는
사이에 벌어진 걷잡을 수 없는 사태였다.
<4>
『이런, 실기(失機)했다!』
깜짝 놀란 육초량이 외쳤을 때는 이미 운휘성의 검에 십여 명
의 고수들이 죽어간 뒤였다. 광장의 뒤쪽에서 사태의 추이를 관
망하고 있던 대다수의 군웅들도 일제히 앞을 향하여 몸을 날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야단났다!)
육초량은 그것을 보며 이 많은 사람들이 생사도주의 흉계에 말
려들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한
육백 고수들의 자제심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워
져 있었다.
군웅들의 이목이 화산의 신산검 운휘성에게 쏠려 있는 찰라의
순간을 틈타 비조처럼 몸을 날려 가는 두 인물이 있었다. 구곡선
생과 흑백도 주육아였다. 서로 눈짓을 교환하고 각기 반대 방향
을 향해 몸을 날린 그들의 속셈은 뻔했다. 군웅들을 따돌리고 각
자 비급을 독차지하려는 것이다. 군웅들이 그 사실을 눈치챘을
때 이미 그들 두 사람은 번개같은 경공신법으로 사공영호가 앉아
있던 대(臺)를 뛰어넘어 뒤편에 나 있는 여덟 개의 동굴 중 두
곳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아니, 저 쥐새끼 같은 것들이!』
『쫓아라!』
아우성과 함께 일단의 군웅들이 두 패로 갈라져 각기 구곡선생
과 주육아의 뒤를 추격해 갔다. 구곡선생이 사라진 동혈 속으로
제일 먼저 뛰어들고 있는 자는 귀문의 마백조였다.
이 잠시의 혼란이 운휘성에게도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그가
앞을 가로막은 자들에게 신랄한 일검을 뿌린 후 신형을 뽑아 한
개의 동혈을 바라보고 쏘아지듯 몸을 던졌다. 이번에는 비천맹의
사국천이 제일 먼저 운휘성을 뒤쫓아 몸을 날려 갔다.
각기 세 갈래로 나뉘어져 세 방향으로 흩어진 군웅들을 보며
육초량은 어느 쪽을 따라가 보아야 할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
다. 대 위에는 이미 사공영호의 모습도, 공야승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의 혼란을 틈타 증발해 버린 듯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다. 아직도 남아 있는 미소녀들과, 이백 명의 장한들만
이 석상처럼 묵묵히 서서 광장 안의 소란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
었다.
잠시 망설이던 육초량은 사국천의 뒤를 쫓아 보기로 마음을 정
하고 운휘성이 사라져 간 동혈 속으로 뛰어들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음습한 습기와 더운 열기가 훅훅 끼쳐
왔다. 앞서서 달려가고 있는 자들과, 뒤를 따르고 있는 자들의
살벌한 기운만이 느껴질 뿐인 암흑 속을 육초량 또한 무작정 질
주해 가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달리자 동굴이 점점 희미하게 밝아져 오기 시작
했다. 모퉁이 하나를 꺾어지자 은은한 고함 소리와 병장기 부딪
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앞쪽에서는 한바탕 치열한 싸움이 벌어
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다시 세 번 숨을 바꾸어 쉬고 나서야 육초량은 구절양장처럼
어지럽게 굽어진 동굴을 벗어날 수 있었다. 동굴의 끝은 또 다른
광장이었다. 처음의 광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좁은 공간이었으나
그래도 사방 일백 여 자는 될 만한 넓이였다. 그 뒤편에는 다시
몇 개의 작은 동혈들이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는 게 보였다.
벽에 유등이 밝혀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사공영호는 이미 이러한
일들을 예상하고 철저하게 준비를 해둔 듯 싶었다. 그 희미한 불
빛 속에서 아수라장의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검광이 사납게 난무하고, 권장이 굉음을 내며 뒤섞였다. 피아
를 구분하지 않는 어지러운 혼전이었다. 그 중앙에서 미친 듯 좌
충우돌하고 있는 운휘성은 이미 붉은 피로 물들어 혈인으로 화해
있었다. 이를 악물고 휘두른 그의 일검에 다시 한 명의 고수가
허리를 꺾고 넘어졌다.
『흐흐흐, 운장문, 그쯤 했으면 되었소. 이제는 그만 쉬시오.』
음침한 인상의 노인이 불쑥 나서며 단창을 어지럽게 휘둘렀다.
힘이 다한 듯, 창! 하는 쇳소리와 함께 운휘성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두 동강으로 부러졌다. 힘껏 뻗어온 노인의 단창이 비틀거
리는 운휘성의 가슴을 깊이 찌르고 박혀 들었다.
『으으... 왕적언, 네놈 따위가...』
고통스런 신음을 발하며 눈을 까뒤집는 운휘성의 품속에서 서
슴없이 감리보록을 꺼내 든 노인은 섬서의 신창(神槍)으로 불리
는 왕적언이었다. 그는 평소 화산과 가까운 곳에 살면서 빈번하
게 왕래하던 자였다. 그런 그의 손에 죽는다는 것이 억울하고 분
한지, 운휘성은 부릅뜬 눈을 감지 못하고 있었다. 매화나무 아래
함께 앉아 차를 마시며 세상일들을 이야기하고 무학을 논하던 친
구인 줄 알았는데, 실은 저승사자로 찾아온 자였던 것이다.
씨이이-!
보록을 들고 기뻐하는 왕적언의 목덜미로 흉맹한 일도가 떨어
져 내렸다. 왕적언이 몸을 빙글 돌리는가 싶었는데 그의 단창이
기습자의 가슴을 그대로 꿰뚫어 버렸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
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뒤로 넘어가는 호목의 장한을 밀어내며
다시 십여 명의 고수들이 이제는 왕적언을 노리고 쇄도해 들었
다.
『흐흐흐... 오너라. 나 왕적언이 왜 신창이라고 불리는지 보여
주마!』
외친 왕적언이 등뒤에서 다시 한 자루의 단창을 꺼내 들었다.
쌍창을 휘두르는 그의 솜씨는 가히 신품(神品)이라고 할 만했다.
왼손의 창이 정면에서 찍어오는 낭아봉을 비껴낼 때, 오른 손의
단창은 완만한 호선을 그리며 등뒤의 상대를 찍어갔다. 상대가
겨우 그것을 막아낸 순간, 이번에는 왼손의 창이 목을 찔러오고,
오른 손의 창은 급격히 꺾이며 낭아봉을 든 자의 복부를 찔러가
고 있었다. 두 손의 번개같은 뒤바뀜 속에 숨겨져 있는 변화가
실로 무섭기 짝이 없었다.
『크억!』
『윽!』
단번에 목과 복부를 꿰뚫린 두 사람이 썩은 짚단처럼 무너졌
다. 끼얍! 하는 괴이한 기합 소리가 그 틈을 메꾸어 왔다. 번쩍
뛰어들며 내리쳐오는 일도(一刀)의 흉맹함이 으스스한데, 좌우에
서 파고드는 날카로운 장력과 검기 또한 사납기 그지없었다. 삼
면을 에워싸고 합공해 오는 자들의 기세가 결코 만만치 않다고
느낀 왕적언이 당황할 때였다.
『내놔라!』
싸늘하게 외치며 그들의 머리를 뛰어 넘어 솔개가 병아리를 채
듯 잡아오는 금빛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이 신법이 어찌나 빠르
고 사나운지, 군웅들이 앗, 하며 놀랐을 때는 이미 두 번의 주먹
질과 다섯 번의 발길질로 왕적언에게서 고수들을 떼어놓은 그가
한 손을 뻗어 망설임 없이 단창을 잡아가는 것이었다.
(사국천!)
막 지하 광장에 들어서서 그 광경을 본 육초량이 걸음을 멈추
고 숨을 들이켰다.
『어딜!』
왕적언이 미처 상대를 알아볼 새도 없이 경황 중에 단창을 비
틀며 힘껏 찔렀다.
『어리석은 놈!』
싸늘하게 비웃은 사국천의 오른손이 벼락처럼 왕적언의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단창을 잡아간 그의 한 수는 상대를 현혹시키기
위한 허초였던 것이다. 퍽! 하는 끔찍한 소리가 터져 나오고, 신
창으로 이름 높던 왕적언의 머리통이 산산이 부서져 떨어졌다.
그가 아직도 채 식지 않은 몸으로 눈을 부릅뜨고 있는 운휘성 곁
에 다정하게 눕기도 전에 감리보록을 낚아채는 사국천의 재빠른
손이었다.
『크하하하,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 놈이라면 얼마든지 오너
라!』
감리보록을 손에 들고 미친 듯이 웃어대는 금의인이 사국천임
을 알아본 자들이 모두 멈칫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이었
을 뿐, 이미 탐욕과 피 맛에 흠뻑 젖은 군웅들은 광기로 번들거
리는 눈을 빛내며 서서히 그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국천
의 주위로 팔패 중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던 우소명, 유일기, 이
자청과 다른 두 명의 비천맹 소속 고수들이 모여들었다.
작은 지하 광장을 가득 메우고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는 군웅들
은 무려 백여 명이나 되었다. 어느새 그들로 인해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차 버린 광장의 한쪽 구석에서 사국천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가 아무리 당대의 절정 고수라고 해도 수하 다섯 명과
함께 그들 모두를 상대하기란 불가능했다.
『막아라!』
외친 사국천이 즉시 몸을 날려 광장 뒤편의 한 동혈 속으로 뛰
어들어갔다.
『사국천, 어디로 가려느냐!』
『흐흐... 사맹주. 뜻대로는 안 될 것이요!』
사국천의 위용 앞에서 주춤거리던 군웅들이었으나, 그가 꼬리
를 보이고 달아나자 잃었던 용기를 되찾은 듯했다. 궁웅들이 저
마다 외치며 물밀 듯이 쇄도해 들었다. 다섯 명의 비천맹 문도들
이 그들을 막아섰지만 그야말로 당랑거철(螳螂拒轍)에 불과했다.
우소명 등의 눈에 비장한 기운이 어렸다.
피이잉-!
사국천이 사라진 동혈 입구를 가로막고 서서 재빠르게 날린 우
소명의 검이 정면에서 달려들던 고수 한 명을 베어 넘겼다. 역겨
운 피비린내가 확 퍼진 순간,
『이 놈!』
한 자루의 철편이 불쑥 튀어나와 검을 회수해 들이는 그의 목
을 감아왔다. 그 억센 철편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우소명의 목이
처참하게 찢겨 떨어졌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다섯째!』
우소명의 덧없는 죽음을 바라본 유일기가 피를 토하듯 외치며
뛰어들었다. 그의 검은 이미 살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한 흉맹함
으로 가득했다. 그 끔찍한 살기 앞에서 군웅들이 주춤거렸다. 유
일기의 뒤를 따라 이자청과 다른 두 명의 비천맹 고수들이 이야
아! 하는 고함을 지르며 군웅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일백 명의
군웅들 속에 파묻혀 버린 그들 삼 인의 처절한 몸부림이 혈풍을
몰아왔다.
『크으-!』
옆구리를 쑤시고 빠져나가는 창백한 검봉을 바라보며 유일기가
눈을 부릅떴다. 곧 그의 얼굴이 참담한 고통으로 일그러져 갔다.
『악, 사형!』
이자청의 가냘픈 몸이 선혈을 뒤집어 쓴 채 달려들어 그를 부
축했다.
『사매... 틀렸다... 너만이라도 무사히...』
초점을 잃은 유일기의 시선이 창백한 이자청의 얼굴에 머물다
가 툭, 떨어졌다.
『아악, 안 돼요, 사형!』
절규하는 그녀의 처절한 부르짖음이 지하 광장에 메아리를 만
들며 울려 퍼졌다.
성난 군웅들의 도검은 네 명의 비천맹도들을 난도질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처 이자청 마저도 죽여야 한다는 듯
일제히 그녀의 섬세한 교구를 향해 무자비하게 검을 휘둘러왔다.
이자청은 이미 지쳐 있었다. 게다가 이제는 자기 혼자 뿐이라
는 절망감이 그녀를 무력하게 가라앉혔다. 그녀는 더 이상 싸울
의욕마저 잃은 듯 망연자실하여 눈앞에 밀려들고 있는 군웅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목을 향해 무거운 파풍도 한 자루
가 바람을 가르고 떨어져 내렸다.
이자청이 질끈 눈을 감아 버렸을 때, 뒤에서부터 군웅들의 머
리를 뛰어 넘으며 쏜살처럼 달려드는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그
가 이자청의 곁에 내려서며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쉬익, 하는
날카로운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 다섯 줄기의 비수 같은 지풍이
부채 살처럼 퍼져 군웅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따당-!
그의 지풍 한 줄기에 적중 당한 파풍도가 요란한 쇳소리와 함
께 동강나 떨어졌다.
『으헉!』
『헛!』
이자청을 쳐오던 군웅들이 기겁하여 분분히 몸을 틀었다. 그
순간 그가 이자청의 허리를 낚아채 그대로 사국천이 사라진 동혈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져 갔다. 육초량이었다.
『미쳤어. 다들 제 정신이 아니야...』
육초량의 억센 팔에 안겨 동굴의 어둠 속 깊숙이 달려들어가며
이자청이 중얼거렸다.
『그렇소. 그들은 이미 이성을 잃은 채 탐욕이 가져다 준 광기
에 사로잡히고 말았소.』
『아?』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음성이었다. 이자청은 고개를 들었으나
눈앞에 펼쳐 든 손가락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 속이었다. 육초
량의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나중에 물어도 늦지 않소. 지금은 우선 이 지옥 같은 곳을 벗
어나는 것이 급하오.』
육초량은 지긋이 입술을 악물었다. 그 자신도 과연 무사히 이
곳을 벗어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던 것이다.
일각쯤 이리저리 꺾여지는 동굴의 어둠을 헤쳐 나왔을까. 어둠
속에서 육초량은 앞이 막혀 있음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막다른 곳?)
그는 의아하여 걸음을 멈추었다. 동굴의 끝은 칠흑의 암흑 속
에서 분명히 막혀 있었다. 육초량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국천이 뛰어든 곳으로 들어와 그의 뒤를 따라왔고, 이곳까지
오는 동안 다른 갈림길은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동굴
은 막혀 있고, 사국천도 보이지 않았다.
『저를 좀 내려 주세요.』
『아?』
육초량은 비로소 자신이 아직까지 이자청을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그녀를 내려놓았다.
『이제 생각났어요. 당신은 육초량, 육 공자시군요.』
어둠 속에서 머리를 쓸어 넘기던 이자청이 처량하게 웃어 보였
다. 육초량은 그녀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삼년
전, 처음 그가 강호에 발을 디뎠을 때 화소음의 황국원에서 사국
천과 부딪쳐 곤란을 겪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이자청이 암중에
서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곳에서 사국천의 손에 덧없이 죽
고 말았을 것이었다. 그녀의 마음이 겉보기와는 달리 여리고 정
이 많은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육초량은 그 일을 생각하고
뛰어들어 무작정 이자청을 구해준 것이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육초량이 난감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
었다.
『큰일났소. 앞이 막혀 있는데 사국천도 보이지 않소.』
머지않아 뒤쫓고 있는 군웅들이 밀려들 것이었다. 이처럼 막다
른 길에 몰려서는 살아날 수가 없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
하던 이자청이 동굴의 끝에 다가가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막힌 게 아닐 거예요.』
『하면, 기관....?』
그녀의 행동에서 비로소 무엇인가를 깨달은 육초량도 안력을
돋구어 석벽의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찾았어요. 이리 와 보세요.』
석벽의 아래 부분을 더듬거리던 이자청이 기쁨으로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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