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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혁명(참나 찾는 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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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나누는 생각+정보 스크랩 윤회는 없다
삼신마고 추천 0 조회 38 11.11.24 00:1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출처 : 정신세계원  글쓴이 : 해공>

 

21세기 정신세계의 대혁명

윤회는 없다
천국과 지옥도 없다
사후세계도 없다
그 모든 것은
인간의식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60억 인류 가운데서 그 누구 하나라도 자신의 삶에 뒤집어 씌워있는 온갖 굴레를 벗어 던지고 그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를 누리며 행복한 인생 살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자유는커녕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재산과 권력과 명예가 쌓이면 쌓일수록 깊은 수렁에 빠져들어 자유로운 삶이나 행복한 삶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져가고 있다. 정신은 황폐해지고, 육체는 병들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환경이 호시탐탐 나를 노리고 있는 적들처럼 보인다. 현대인들은 이처럼 사방이 꽉 막혀있는 질식할 것 같은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항상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희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러한 삶 속에 갇혀있는 것이다.

몇 해전 이웃나라인 일본에서 커다란 사회 문제로 부각된 사건이 있었는데 일본의 우수한 대기업 간부들이 어느 날 갑자기 증발되어 추적해보니, 시골의 온천장에서 신발 정리하는 날품팔이 일을 하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사회의 엘리트로써 부족함이 없는 지위를 가지고 있는 그들이 왜 그러한 선택을 하였는가 물어 보았더니, 날마다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가족들로부터 받는 압박감에 도저히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되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잠적했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현실을 도피해서 시골이나 산으로 들어갔다 할지라도 정말 자기 인생에 있어서 자유를 찾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자리, 이 현실에서 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몸이 어디에 가 있건 상관없이 자유를 얻기 힘들 것이다. 먼저 마음으로 결정하게 되면 몸이 그 마음의 결정에 따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기 때문에, 몸이 세상속에 있든지 산속에 있든지 상관없이 마음을 먼저 해결해야 된다는 것이다. 마음이 자유를 얻지 못하면 몸이 어디에 가든지 역시 자유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현실속에서 닥쳐오는 모든 고통과 번뇌를 떨쳐내고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한다. 몸이 도망간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디에 있건, 무슨 일을 하건 속박을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대자유인이 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이제까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해왔다. 그것을 우리는 보편적으로 “道”라고 부른다. 인생에 있어 구속된 우리의 삶을 해결하고 대자유를 누릴 수 있는 참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바른 길을 알려줄 스승과의 만남은 너무도 중요한 문제이다. 역사 이래로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대자유 찾기를 갈망하였으나 완전한 깨달음을 체득하고 대자유인이 되기는 너무 힘이 들었다. 그 이유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정확한 방법을 제시해 주는 참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신이 너무도 어렵게 체득한 깨달음의 경지를 다른 사람들도 도달할 수 있도록 쉽고 간단한 방법으로 이끌어 주었다. 길을 모르고 갈 때는 헤매게 되어 있지만 일단 목적지에 도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끌어줄 때 자신이 범했던 시행착오를 범하지 않고 직코스를 바로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종교계와 정신세계에서는 도맥이 끊기고 깨달은 사람의 부재로 말미암아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옛 성현들의 껍데기에 불과한 교리와 수행법에 매여서 기술적이고 개념적인 방법만 추구하고 있다. 방편에 속으면 테크닉만 개발될 뿐, 평생을 닦는다해도 깨달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구도자에게 있어서 먼저 깨달은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스승의 정확한 안내없이 무조건적인 믿음, 기도, 주문, 참선, 화두, 명상, 요가, 단전호흡 등으로 막연하게 수행해서는 깨달음을 체득하기 힘들다.

참 스승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이 비워져 있어야 한다. 문제는 현대인들이 너무나 에고가 강하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자기 나름대로 정립해 놓은 교리적 진리 체계가 고정관념화 되어 너무도 강하게 마음속에 박혀 있어서 그것이 또 다른 에고를 형성하고 있다. 참으로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사람에게는 진리란 너무나 단순하고 쉬운 것이다. 인간의 복잡한 머리 때문에 오히려 깨달음이 방해를 받는다. 본래성품을 깨닫는데 알아듣기도 힘든 그 많은 용어들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오로지 “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는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나’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체득하여 일체 시비분별이 끊어진 중도(中道)에 머물 때, 더 이상 ‘나’라는 착각에 빠지지 않는 상태 즉 ‘무아’를 깨닫는 것이다.

미얀마에서 수행을 마치고 돌아와 깨달은 진리를 정리해서 “완전한 깨달음”을 펴낸 후 1년 동안 제자들에게 명상을 지도하면서 진리에 대한 이론 정립이 선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일주일에 4-5시간씩 강론을 하였는데 진리에 대해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깊이있는 것까지 총망라하다보니 어느 때는 망원경으로 또 어느 때는 현미경으로 살펴보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강의록과 먼저 쓴 글에서 핵심만 뽑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 바로 ‘윤회는 없다’이다.
전체인 숲과 부분인 나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안목이 갖추어져야만 진리를 바르게 볼 수 있다. 이 단계가 되면 이제는 실수행을 통해서 자아에 대한 집착이 끊어져야 하고 모든 것에 대해 시비하고 분별하는 마음이 사라져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안과 밖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일체 매이는 바 없는 여여한 상태에서 “무아-본래 나라는 것은 없다.”를 체득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현대의 구도자들은 너무도 안타까운 상태에 처해있다.
현대 문명의 복잡성과 에고를 충족시켜주는 세상적 재미가 도처에 깔려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느라 참 진리에 눈 돌릴 여유가 없다. 설사 세상의 물질과 권력 그리고 명예의 허망함을 알고 구도의 세계에 뛰어든다해도 상황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참 진리찾기가 드넓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보다 더 힘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수 천년을 내려온 전통있는 기존 종교나, 새 시대 새 기운을 받고 나왔다는 신흥종교이거나 에고를 더욱더 강화시켜주는 점에서는 매 한가지일 뿐이다.

이미 왜곡될대로 왜곡되어버린 혼돈의 시대에 어떻게 밝은 눈과 열린 귀를 찾을 수 있을까.
오직 인연이 있을 뿐이다.

 

왜 깨달아야 하는가

진리란 무엇일까요?
진리에 대한 올바른 정립이 되어있지 않고서는 우리가 수행을 한다, 명상을 한다 또는 세상 말로 도(道)를 닦는다고 오랜 세월동안 많은 노력을 할지라도 그것이 전부 헛수고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지금 스님들을 비롯하여 이 땅의 구도자들이 올바른 진리 정립이 안된 상태에서 몸과 마음을 닦기 때문에 너무나 큰 고생에도 불구하고 참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이처럼 진리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정확하게 정립이 되어야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기 때문에 올바른 진리 정립에 대하여 먼저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왜 깨달아야 하는가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가 ‘왜 깨달아야 하는가’ 하는 근본 문제부터 한번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이 문제는 너무나 중요하지만 이렇게 물어봤을 때 한마디로 대답하기란 아주 막연합니다.
왜 깨달아야 합니까? 구도자들이 세상의 많은 유혹을 다 뿌리치고 참으로 고생스럽고 힘들뿐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깨달음을 향한 구도의 길을 왜 갑니까? 거기에는 반드시 목적과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삶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모델을 보여주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가를 한 이유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항상 겪는 근본적인 문제인 생로병사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부처님은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말하셨습니다.

왜 인생이 고통의 바다입니까?
인생 즉 삶이라고 하는 것은 생멸하기 때문입니다. 생했다가 반드시 멸하는 인생에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생겨나서 변함없이 유지되면 좋을 텐데 이 우주 현상계에 존재하는 동물, 식물 하다못해 돌멩이 하나까지도 생겨난 놈은 반드시 사라지더란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런 고통을 끊임없이 받고 있는지 그 원인을 분석해야 됩니다. 왜 끊임없이 고통을 받느냐 하면, 생겼다가 사라져 버리는 무상하고 덧없는 삶에 집착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타났다 사라져 버리는 인생에 집착하더라는 것입니다. 왜 인생에 집착하게 될까요. 그것이 바로 ‘나’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고통의 뿌리는 바로 ‘나’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몸과 마음을 ‘나’라고 착각해서 집착을 하니까 고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도, 자유도, 생명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반박할 수 있습니다. “아닌데요, 나는 인생을 살면서 행복한 적도 있었고, 자유로운 적도 있었고, 지금도 살아 있으니까 생명이 있는데요.”
그러나 우리가 이야기하는 진리적 행복, 진리적 자유, 진리적 생명이라는 것은 어떤 상태인가 하면 영원한 상태를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을 살면서 느끼는 행복과 자유와 생명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다는 이것이 바로 인간을 슬프게 하고 고통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아닌데 이것을 나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라고 착각하게 되니까,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 즉 사람, 물질, 명예, 권력 같은 것에 집착하고 그것들이 내 마음대로 되어주지 않으면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의 차이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이놈을 ‘나’라고 착각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놈을 통해서 순간적인 행복이나 자유나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참나는 이것 이전의 절대성인 본래성품이기 때문에, 한낱 먼지와 같이 잠깐동안 존재하다가 사라져 버리는 이놈에게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본래성품 뿐입니다.

 

 

구도자란 무엇인가

본래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았는데 더 닦을 필요가 있습니까?
깨달음은 결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결코 개체적 자아가 부처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전세계 인구를 60억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60억을 진리 입장에서 보면 부처와 중생이 따로 있을 수 없지만, 상대세계에 펼쳐진 현상적 측면으로 봤을 때, 크게 네 부류로 구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내 본다면 피라밋 모양의 도표로 그릴 수 있는데 가장 저변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층이 세속인입니다. 세속인은 말 그대로 물질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두번째 부류가 종교인, 여기에는 기성 종교인뿐 아니라, 이른바 단전호흡, 기수련, 신통술 같은 종교성을 띄고있지 않더라도 그와 유사한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까지 포함됩니다. 세속인과 종교인은 물질과 정신이라는 차이만 다를 뿐, 둘 다 자기 자신 즉 에고의 행복을 추구하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세속인은 물질이나 육체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고 종교인은 영적인, 정신적인 에고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정신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하는 것이 물질적인 것보다 약간 고차원적으로 보이지만 이 역시 모두 에고적인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에고란 ‘개체적 자아’로 물질이 되었건, 정신이 되었건, 세속인이든, 종교인이든,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행복 또는 나로 인해서 맺어진 가족이나 자기가 속해있는 어떤 동아리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오늘날의 모든 종교가 기복으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나 정신세계를 쫓는 것도 물질적인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정신적, 영적 차원일 뿐 똑같은 것입니다. 그 차이를 알게되면 이 단계를 뛰어넘게 되는데 이 상태가 구도자입니다.

그러면 구도자란 무엇일까요.
구도자(求道者)란 순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나는 구도자다.” 라고 말들을 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구도자는 매우 드뭅니다. 물질적, 정신적, 영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종교를 신앙하고 있다고, 정신세계에 조금 심취해 있다고 자칭 구도자라고 하지만 진정한 구도자는 어떤 에고적인 자아의 완성을 추구하거나, 도모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점쟁이들도 도인(道人), 도사(道士)라는 말을 씁니다. 도인이나 도사라는 말은 도 그 자체가 되어 도를 가르치는 사람이란 뜻이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에게만 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직업이 출가한 스님이나 성직자들이 구도자입니까?” 하고 물어 보실 겁니다. 이런 외형적인 신분이나 직업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겉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내면의 세계가 순수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사람이 구도자입니다. 순수 진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순수 진리란 ‘무아(현상적 무아=본질적 진아)’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아’ 즉 에고가 없는 차원이 순수 진리 차원인데, 그 쪽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구도자라는 뜻입 니다. 60억 인구 가운데 99 % 이상이 세속인과 종교인 범주에 들어가고 실질적인 순수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는 1%도 안 된다고 봐야합니다. 순수 진리를 추구하다가 진리 그 자체가 된 깨달은 사람이 제일 마지막 정점인 붓다인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한 붓다 즉 깨달은 사람은 비율로 말할 수조차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계나 기타 여러 단체들에서 보면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심지어 어느 곳에서는 일주일이면 누구나 깨닫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왜 발에 차이는 돌멩이처럼 굴러다니고 있느냐 하면, 깨달음에 대한 올바른 정의가 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그 말 자체가 주는 의미를 잘 생각해 봅시다.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일까요.
깨달음이란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근본 무명에 의해서 착각하고 있던 것을 바로 잡아서 본래성품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무아’ 즉, 본래성품을 깨닫는 순간에 현상적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지금 불교에서 얘기하고 있는 깨달음이 무엇이냐 하면 돈오점수입니다. 먼저 깨닫고 나서 습기를 점차 닦아서 성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건 없습니다. 구도자가 수행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깨닫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이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야기인데 한국 불교의 내노라하는 고승들이 전부 착각을 해서 돈오점수를 주장했습니다. 자기는 견성은 했는데 아직 성불을 못했다 그럽니다. 그래서 계속 닦아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견성과 성불을 다른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견성(見性)’ 즉 본래성품을 깨달으면 그것이 곧 성불(成佛)인 것입니다.

본래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았는데 더 닦을 필요가 있습니까?
모를 때 닦는 것입니다. 완전한 깨달음인 ‘무아’를 체득하고 나면 그때는 두 번 다시 착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견성 즉 성불인 것입니다. 그러면 깨닫기는 했는데 아직 성불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그것은 완전한 깨달음이 아닌 불가에서 이야기하는 알음알이라는 것입니다. 본래성품을 머리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결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굳이 ‘체득한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머리로가 아니고 가슴으로 체득하는 것입니다. 이 가슴이라는 뜻은 존재의 중심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존재라는 것은 개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본래성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개체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에고적 입장에서 그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하니까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이 ‘나’라고 말할 때 이 ‘나’는 본래성품인 ‘참나’를 의미하는 것인데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개체적 ‘나’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동문서답이 되고 마이동풍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까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왜 손가락을 쳐다보느냐.”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똑같은 언어라도 자기 자신이 갇혀있는 틀 만큼밖에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착각하는 결정적 요인은 성불(成佛)이라는 잘못된 표현에 있습니다. ‘부처를 이루었다’ 또는 ‘부처가 되었다’라는 뜻이므로 그 말에 메일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깨달음은 결코 개체적 자아가 부처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계속 설명해 나갈 것입니다.

 

 

개체 의식의 틀

태어난 이후부터 이 개체를 ‘나’라고 인식하는 것을 개체 의식 또는 에고라고 부릅니다.
에고로써 그 의식이 확장될 수 있는 최고의 상태가 “나는 우주다” 라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바로 ‘무아(無我)’입니다.
지금 불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견성은 ‘공(空)’을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우주의식입니다.

 
에고 즉 개체 의식의 틀이라는 것이 얼마나 천차만별인지, 이걸 알면 재미있는 사실들을 알게됩니다. 태어난 이후부터 이 개체를 ‘나’라고 인식하는 것을 개체 의식 또는 에고라고 부릅니다. ‘나’라고 인식한 의식이 점점 진화하고 성장하면서 그 틀이 커지게 되는데 ‘나’ 다음에 형성되는 것이 ‘가족’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처음 상태는 자기밖에 모르니까 ‘개인주의’, 그 다음은 ‘가족주의’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에고의 단위가 이렇게 커지는 것입니다. 가족 단위에서 조금만 더 확장되면 ‘지역’이란 틀이 됩니다. 이 것을 ‘지역주의’라 하고 여기서 조금 더 커지면 ‘국가’ 단위로 의식이 커져서 ‘국가주의’ 또는 ‘민족주의’가 됩니다. 정신적 측면에서 틀이 형성되면 ‘종교주의’ ‘사상주의’가 되고, 여기서 더 확장되면 종교나 사상을 초월한 ‘인류주의’, 더 커지면 인간만이 아닌 모든 생명체를 존중하는 ‘생명주의’가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가장 큰 틀인 우주 전체를 하나로 인식하는 ‘우주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에고로써 그 의식이 확장될 수 있는 최고의 상태가 “나는 우주다” 라는 것입니다. 구도자들 중에 깨달음을 착각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여기 걸려있습니다. 이 한 점에 불과한 개체로서의 ‘나’를 의식이 뻥튀기 되어 가지고 현상계 안에서 가장 큰 덩어리인 우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에고의 극대화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이기주의에 빠져있는 그런 사람들이 볼 때 그릇이 큰 것입니다. 노는 스케일이 다른 것입니다. 이 몸뚱이 하나를 자기라고 하는 사람이 접시 물에서 논다면, 우주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태평양에서 놀고 있는 것입니다. 의식이 어디서 노느냐에 따라 같은 인간이라도 그릇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가장 큰 의식의 테두리인 이 우주의식이 깨달음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아까 얘기했듯이 에고의 극대화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까지 갔는데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깨달음이란 말일까요.

깨달음이란 바로 ‘무아(無我)’입니다.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노력해서 없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 없다.”는 것입니다.
“자아라는 것은 본래 없다.” 어떤 자아 말입니까? 상대적 존재로서의 개체인 ‘나’라는 것은 본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도표에서 보듯이 에고의 가장 기본 단위인 개체로서의 ‘나’, 이 놈이 계속 확장해서 우주 의식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 중심에는 내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에고가 여전히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우주가 되었다는 말보다 더 큰 착각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깨달았다는 생각만큼이나 위대한 착각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요만한 것으로 생각하다가 이만한 것으로 착각할 뿐 진정한 깨달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인도나 중국,그리고 한국에서 역사적인 사건들이 참 많았습니다.

한 예로 인도의 신비주의자 람티어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우주의식을 체험하고 보니까 자기가 우주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몸뚱이가 거추장스러워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게송을 하나 읊고 갠지스강으로 걸어 들어가 죽었습니다.

“나는 우주가 되었다.
이제 나는 이 몸이 짐스럽고 불필요함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되돌려 보낸다.
이제 어떤 경계선도 필요하지 않다.
나는 무한한 브라흐만이 되었다.“

이것이 인도에서 아주 유명한 사건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될지, 이 사람이 진짜 깨달았는지 어쩐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은 의식은 깨달은 의식을 알아보기 때문에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속은 것입니다. 뻥튀기 된 개체의식에게 속아서 죽은 것입니다.

또 중국에 영윤 선사라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우주의식을 체험하고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우주 덩어리 전체가 바로 ‘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안에 들어있는 사람이든, 개미 새끼든, 돌멩이든, 물이든, 불이든 모두 다 ‘나’라는 것입니다. 의식이 모든 것을 다 싸잡아 버렸습니다. 영윤 선사가 산길을 지나가는데 마침 산불이 나서 불이 마구 몰려왔습니다. 다른 스님들은 다 도망가는데 영윤 선사는 “불과 나는 하나다.” 하면서 불 속으로 그냥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잘못 깨달으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갠지스강에 빠져죽은 사람이나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간 사람이나 용감하기는 합니다. 그야말로 죽음을 초월했잖습니까. 식을 체험했기 때문에 목숨도 아깝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숨이 아깝지 않는 사람은 다 깨달은 사람이란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것으로 판단한다고 하면 안중근 의사라든지 윤봉길 의사같이 민족을 위해 자기 한 몸 희생한 사람들, 민주화 운동할 때 목숨 던진 대학생들도 깨달았다는 말이 됩니다. 진리를 잘못 알게되면 의식만 뻥튀기 되어 가지고, 개체와 극대화된 의식이 조화를 못 이루는 것입니다.

지금 불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견성은 ‘공(空)’을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우주의식입니다. 이것을 머리로 체험했는데 몸이 안 따라주니까, 이 몸과 마음을 계속 열심히 닦아 나갈려고 하는 것입니다. 본래성품과 몸과 마음을 하나되게 만들려고 열심히 닦는 것입니다. 자기가 머리로 아는 본래성품과 현재의 몸과 마음을 하나로 일치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 점수(漸修)라고 그럽니다. 점차적으로 닦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대단히 큰 착각입니다. 이 착각에 빠져있는 한 백년이 아니라 천년, 만년을 닦아도 절대로 깨달음은 없습니다.

오늘날 모든 구도자들이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깨달음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 몸과 마음을 닦아서 진리인 본래성품과 하나로 만들려고 하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이건 절대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 불가능할까요? 그러면 이제부터 진리가 어떻게 되어 있기에 이 우주 현상계의 가장 큰 덩어리인 우주의식을 체험했는데도 깨달음이 아닌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순수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는 ‘절대(絶對)’입니다.
‘절대’는 인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상대 세계를 샅샅이 파고 들어가 이해함으로써 절대를 깨달아야 합니다.

 
구도자들이 추구하고 있는 순수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구도자가 순수 진리를 추구한다고 하는데, 과연 순수 진리가 무엇인지나 알고 구도의 길을 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립되어 있으면,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될 텐데 문제는 무엇이 진리인지도 모르고 그냥 진리, 진리 하면서 사람들이 무턱대고 쫓아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써있다, 불경에 이렇게 써있다, 그래서 이게 진리다, 내가 신앙하고 있는 종교의 교주가 말했으니까 진리다, 이런 식으로 진리가 이야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이론적으로 분명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잘못 빠져 가지고 헤매고, 정신을 못 차리고 놀림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엉터리로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도 엉터리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맹인이 맹인을 붙잡고 길을 인도하는 그런 지경에 세상이 빠져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깨닫기 위해서 구도자가 되었는데 뭘 깨달을 것인지, 뭘 깨달아야 생노병사를 해결하고 우리 마음속에 가득한 고통을 훌훌 털고 대자유인이 될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무엇일까요.
진리는 ‘절대(絶對)’입니다.
노자가 도덕경 1장 1절에서 “도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이미 항상한 도가 아니다.”라고 전제를 하고 나서 그 다음에 도는 이런 것이다, 도는 저런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말을 하자니 그렇고 안 하자니 그렇고 노자도 꽤 고민했었나 봅니다. 그래서 첫머리에 도라고 하는 것이 언어 이전의 것이라는 것을 미리 깔아놓고서 풀어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무엇인지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절대’라는 개념을 들고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절대성’의 중요함을 여러분들이 정말 가슴으로 느껴야합니다. 이것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고 머리로 따지고 있는 한 절대로 여러분들은 깨달음에 접근조차 할 수 없습니다. ‘절대’라고 하는 이 용어 한마디가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절대’란 무엇일까요?
‘절대’를 보통 ‘상대’의 반대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는 ‘상대’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절대’의 ‘대’는 대상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 대상은 ‘상대’를 말합니다. 따라서 ‘절대’는 ‘상대’ 그 자체가 끊어져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말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인식을 하려면 상대적으로 존재할 때만 가능한 것이란 말입니다.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대적 인식이 끊어져 버리니까 상대적 인식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절대’는 상대적 개체의식으로는 인식이 되지 않습니다. 이제 이 절대성이 품고 있는 깊은 의미를 하나씩 짚어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절대’는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인식의 기본은 인식하는 ‘나’와 인식되는 대상으로서의 ‘너’가 상대적으로 존재할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절대는 나누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인식할 수가 없고 따라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는 하나, 둘 하는 숫자 개념으로서의 하나가 아니고, 그냥 전체로서의 ‘하나’를 의미합니다.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인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자기를 볼 수 없습니다. 눈이 눈을 볼 수 없고 귀가 귀를 들을 수 없습니다. 홀로 오직 하나인 것은 인식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또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현상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존재한다면 인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식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현상적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이 현상계 입장에서 봤을 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상대적 현상으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실재가 되는 것입니다. 실재란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참으로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라니 이게 무슨 말일까요. 이 말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존재라는 뜻을 자세히 연구해야 됩니다. 존재란 무엇을 말할까요.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나타난 것을 존재라고 그럽니다. 드러났기 때문에 존재성을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타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잠깐동안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그 존재가 어떻게 실재냐는 것입니다. 사라지면 없어지는 건데, 없어지는 것이 어떻게 실재가 됩니까. 그런 것들은 순간적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반드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시간상으로 일년이든, 백년이든, 천년이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은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드러나 있는 그 순간만 존재하다가, 사라져 버리면 없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실재가 아닌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라지지 않으려면 현상적으로 존재하지 않아야 됩니다. 존재하지 않으려면 나타나지 않아야 합니다. 진리는 이렇게 엄청나게 아이러니한 것입니다. 그러면 실재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영원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영원해야만 실재인 것입니다.

진리인 본래성품의 성질은 절대적인 것이고, 절대적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인 것이며, 하나이므로 상대적 인식이 불가능하고, 인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상계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이 참 존재라는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은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전부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절대인 진리로서의 본래성품은 쉽게 이야기해서 상대적 현상계에 태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죽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영원’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좀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금 용어를 매우 혼동해서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원’이라고 하는 것을 ‘끝이 없다’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종교, 특히 기독교에서는 태어나서 살다가 예수 잘 믿으면 죽어서 천국 가서 영원히 살고, 예수 안 믿으면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받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또 불교에서는 사람이 태어나서 살다가 육신은 죽고 영혼은 살아 있을 때 행한 행위, 즉 선업과 악업에 의해서 다시 윤회한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보면 영혼이 시작은 했는데 끝이 없이 간다는 것입니다. 한 술 더 떠서 육신을 가지고 영생한다는 곳도 있습니다. 이런 것의 뿌리는 도교입니다. 선도라고도 말 합니다. 여기서의 주장은 사람이 태어나서 몸과 마음을 잘 닦으면 육신을 가지고 신선이 되어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용해서 ‘뭐 힘들게 기 수련을 해서 영생을 하느냐, 나만 믿으면 그대로 영생한다’고 하는 종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말하는 영원은 시작은 했는데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대단히 잘못된 말입니다.

시작한 것은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인간을 비롯한 어떤 생명체, 어떤 물질적 현상도 태어난 놈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걸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 유명한 진시황이 영생하려고 불사초를 구하기 위해 신하들을 보냈지만 천하를 호령하던 진시황도 결국은 죽었단 말입니다. 죽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태어난 모든 것은 반드시 죽는 것입니다. 우주조차도 시작이 있었으니 끝장나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상대적 우주 현상계의 존재 법칙입니다. 시작과 끝은 쌍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멸 법칙’인 것입니다. ‘생’하면 반드시 ‘멸’한다는 것입니다. 시작은 있는데 끝이 없는 것도 없고, 시작하지 않았는데 끝나는 것도 없습니다.

이 두 가지는 쌍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시작과 끝이 동시에 없는 것입니다. 시작이 없을 때에 끝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원’이라는 것은 현상세계에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으면 영생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어떻게 영생을 한다는 것입니까? 태어난 놈이 몸은 죽지만 영혼이 영생한다는 것인데, 영혼은 태어났는데 왜 안 죽습니까? 몸이 태어나서 죽으면 영혼도 태어나서 죽는 것입니다. 무지하기 때문에 상대적 세계의 기본 원리도 모르고 하는 말 입니다. 영생한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영생은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 영생인 것입니다. 영원한 것은 생하고 멸하는 것이 동시에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처음 한 말이 “나는 생사를 해탈했다.” 그랬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아주 쉽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풀어서 말하자면 ‘나는 죽지 않는다’가 아니고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는다.” 라는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분명히 태어나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깨달았기에 “나는 생사를 해탈했다.‘라고 했을까요. 깨닫기 전까지 나라고 착각했던 이 영혼과 육체가 생사를 해탈한 것이 아니고, 참나 즉 절대인 본래성품이 태어나거나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대 진리로서의 참나는 태어나거나 죽는 일이 없는 영원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절대’는 영원한 것입니다. 시작과 끝이 없기 때문에, 상대적 개체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한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상대 세계인 현상계 입장에서 봤을 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절대 진리의 측면에서는 오직 이것만이 존재하는 것이기에, 이것을 ‘실재’라고 합니다. ‘실재(實在)’란 실제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절대 진리를 일원상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원은 하나이면서 또 시작과 끝이 없습니다. 어디서 시작하고 끝나는 것이 원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작과 끝이 없지만 원자체는 있습니다. 끝없이 돌고 도니까 시작과 끝이 없이 계속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허공성이므로 그 안에서 만물이 생멸을 끝없이 반복합니다. 생했다가 멸하는 것은 물질이지 허공이 아닙니다. ‘있으되 분별되어지지 않고 시작과 끝이 없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 ‘본래성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조직신학의 대가인 폴 틸리히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은 인간 희망의 종교적 상징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으로서의 신은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폴 틸리히가 찾아냈던 절대 진리는 그 자체로서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모든 존재 즉 모든 생명 현상을 일으키는 주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이것을 잘못 인격화시켜 가지고 ‘절대자 하나님’이라고 불렀지만 절대는 어떤 개체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절대로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인류에게 전해 내려오는 모든 종교와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의 모습은 인간의식이 인간의 형상을 따라서 만들어낸 상상의 창조물에 불과합니다. ‘절대’란 이 모든 생명, 우주 현상계에 가득 차 있는 이 모든 생명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그 근본 바탕인 것 입니다.

‘절대’에서 이 모든 생명 즉 이 우주 현상계가 나왔는데 그 ‘절대’의 성품을 가지고서는 그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기 때문에, 인식이 안되기 때문에, 그 절대 진리가 자기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상대성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여기에 모든 핵심이 다 들어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이 ‘절대’와 ‘상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인들, 구도자들이 이 ‘절대’와 ‘상대’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못해서 ‘절대’를 ‘상대’로 이야기하고 ‘상대’를 ‘절대’로 잘못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두 마디 안에 진리의 근본도 들어있고 그 진리가 투영시킨 이 우주 현상계의 모든 삼라만상이 들어있습니다. ‘절대’와 ‘상대’라는 이 말 자체는 말로써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뜻을 갖고 있습니다. 절대는 상대적 인식으로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현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상대 세계를 샅샅이 파고 들어가 이해함으로써 절대를 깨달아야 합니다.

 

상대성이란 무엇인가 - 上

이제 우리가 이 절대성인 본래성품을 깨닫기 위해서 이 절대 진리가 자기 모습을 드러낸 우주 현상계, 즉 상대 세계의 원리를 터득해야 합니다. 이것을 제대로 터득하기만 하면 인식할 수 없는 절대인 본래성품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아니, 절대가 그냥 자기 모습을 드러내면 될것을 왜 복잡하게 변해서 상대성으로 모습을 드러낼까?'.

 

앞에서 설명했지만 절대는 하나이므로 현상적으로는 인식이 되지 않고 인식체계를 넘어선 의식 이전이기 때문에 인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찌되었건 이 상대성을 붙잡고 씨름을 해야합니다. 그래서 이 상대라고 하는 것이 여러분들의 가슴속에서  완전히 다 녹아버리면 그때 절대가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비분별로 인식될 수 없는 절대가 자기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반드시 인식이 가능한 상대성을 띠게 됩니다. 이것이 이 우주 현상계의 비밀입니다.  절대가 자기 모습을 드러낼 때는 반드시 상대성인 모습으로 드러내는데 그것이 바로 색과 공이고, 그 중에 색이라는 물질세계는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보고 이렇게 살고 있는 우주 현상계입니다. 그러면 상대 세계 즉 상대성은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상대성은 인식이 되어져야 합니다. 


인식이 안되면 그건 상대성이 아닙니다. 반드시 인식이 되어져야 합니다. ‘공'이라는 개념도 ‘색'의 반대개념이기에 상대적 인식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인식이 되기 위해서는 둘 이상이어야 합니다. 하나인 절대의 상태에서는 관찰자와 대상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인식이 안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식이 되기 위해서는 나누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 이상이라는 이것이 골치 아픈 것입니다. 하나가 인식되기 위해서 둘로 나누어진 후에  둘이 그대로 가면 좋을 텐데 나누어진 이 놈이 또 나누어지고 또 나누어지고 계속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단순히 둘이 아니고 이 둘이 계속 갈라지다 보니까 우주 만상이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 현상계가 이렇게 복잡한 것입니다.


둘째, 상대성은 존재해야 됩니다.


절대는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상대적 개념인 현상적 개체로는 존재할 수 없지만, 상대는 인식되어야 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존재 상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재 상태이기 위해서는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다시말해서 ‘생'해야 됩니다. 시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했으면 반드시 ‘멸'해야 됩니다. 시작했으면 반드시 끝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사실 한 단어입니다. 둘 중에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없습니다. 쌍으로 존재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시작'이라는 말은 ‘끝'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며, ‘끝'도 ‘시작'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현상은 ‘쌍생쌍멸'한다는 것입니다. 왜 쌍생쌍멸할까요. 상대적 존재는 그 존재 방식이 대상을 필요로하기 때문입니다. 이치적으로 말해서 상대적 개념으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상대적 존재는 반드시 생멸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존재라고 하는 놈은 생했다가 멸해 버리기 때문에 실재가 아니고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참 존재는 사라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으로 보이는 이 모든 존재는 반드시 생했다가 멸하여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이것은 허상인 것입니다.


영원한 존재가 아니고 순간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생과 멸 사이에 잠깐동안만 나타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조건 지어졌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조건이 바로 이것입니다. 생멸의 그 찰라 사이에 들어있는 순간적인 존재라는 뜻입니다. 생해서 멸하도록 조건 지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우주 현상계에서 하나의 생명적 형태로 존재하는, 그것이 인간이든지, 개나 돼지든지, 나무든지, 돌멩이든지, 어떤 형태의 것이든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생멸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만 조건 지어져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왜 이 존재가 허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느냐 하는 이 문제, 이 수수께끼를 풀어봐야 겠습니다.


절대가 자기 모습을 드러낸 상태가 상대 우주 현상계인데, 왜 그 안에 각각의 존재들은 실재가 아닌 허상으로써 나투었다가 사라질 수밖에 없느냐는 것입니다. 앞에서 본래성품이 그 모습을 드러낼 경우 인식되어져야 하기 때문에 둘 이상으로 나뉜다고 했는데 이렇게 절대인 본래성품에서 상대적 존재인 개체로 생(生) 할 때,  생(生) 하는 법칙이 ‘연기성'으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B 라고 하는 놈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A 라고 하는 어떤 매개체가 있어야 합니다. A는 B를 생 해 놓고 멸하고, B는 C를 생 해 놓고 멸하고, C는 D를 생 해 놓고 멸하고, 이렇게 생멸이 이어서 유지되는 이것이 바로  ‘연기'인 것입니다. 이어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사람으로 이야기하면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낳고, 아버지가 아들을 낳고, 이렇게 계속 이어서 도는 것입니다.


나무로 비유하면 나무가 씨앗을 내고 씨앗이 나무가 되고 그 나무가 자라서 또 씨앗을 만들고 이렇게 계속 돌고 도는 것입니다. 그런데 석가모니부처님의 ‘무아 연기'가 ‘무아'따로 ‘연기'따로가 아니고, ‘무아'가 곧 ‘연기'이고 ‘연기'가 곧 ‘무아'인 것입니다. '연기설'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법칙이 있습니다.


첫째, 타에 의해서만 생겨납니다.


연기되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비롯한 그 어떤 생명체도 자기 스스로 태어나지 못합니다.


둘째, 홀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혼자 있으면 인식이 됩니까? 인식이 안됩니다. 이 상대 세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존재해야만 인식이 가능하기 때문에 홀로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즉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홀로 존재할 수도 없는 이것이 연기 법칙입니다. 타에 의해서 생기고 타와 더불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너'가 없으면 ‘나'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을 어떻게 주체로서의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체가 무엇입니까? 스스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하며 영원히 변하지 않아야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타에 의해서 생해서 타와 더불어 존재하다가 결국 멸해야만 하는 상태라면 그건 주체가 아닌 것입니다. 계속 변화되며 결국 사라져버리는 허상은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연기법을 딱 깨닫고 보면 ‘무아'가 저절로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연기되어서 생멸하고 있는 이 우주 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아가 없다” 이것이 바로 ‘무아'입니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아는 없습니다. 연기되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닫고 나서 던진 첫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음으로 저것이 없다.”


앞의 말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고, 뒤의 것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것이 석가모니부처님의 핵심사상인 ‘무아 연기설'입니다. 2500년 전 당시 인도 사회의 중심은 브라만 사상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기본 체계가 윤회 사상입니다. 그런데 깨닫고 보니까 ‘무아'더란 말입니다. 돌긴 도는데 연기 법칙에 의해 돌 뿐이지, 그 안에 주체가 없더란 것입니다. 자성이 공하다는 말은 모든 생명적 현상 안에는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 주체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주체가 있으면 죽지를 말아야지, 왜 죽습니까? 주체로서의 ‘나'는 없다, 이 ‘무아 연기설'은 그 당시 인도의 모든 사상을 뒤집어 엎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교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힌두교의 거센 파도에 쓸려 버렸습니다. 그래서 힌두불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지금 불교에서 ‘무아'와 ‘윤회'를 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무아'를 얘기하면서 한편으로는 ‘윤회'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무아'와 ‘윤회'가 공존할 수 있습니까? 내가 없는데 도대체 누가 윤회를 한다는 것입니까? 윤회한다는 말은 윤회하는 주체가 있다는 것인데, 이 주체를 영혼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존재계의 법칙은 쌍생쌍멸이므로 영혼과 육체가 상대적 법칙에 의해서 쌍으로 나왔다가 죽을 때 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런 기본 법칙도 모르기 때문에 무지한 소리를 계속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풍토에서는 깨달음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나름대로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어받겠다고 무던히도 애쓰는 스님들도 많지만 교리 자체가 이렇게 왜곡되어있는 상황 속에서 평생을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한국 불교 1500년 역사속에 드러난 인물 중에는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인정해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참으로 애통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무아'면 ‘무업'이고 ‘무업'이면 ‘무윤회'입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입니까? ‘참나'는 누구일까요. 현상적으로는 ‘무아'이고 절대 진리 측면에서는 ‘본래성품'입니다. 그리고 ‘본래성품'이 발현한 ‘순수의식'은 너와 나라고 하는 것이 나누어지지 않은 전체가 하나인 주체로서의 ‘나'인 것입니다. 그러면 현상계에서 ‘나'라고 하는 이 ‘나'는 무슨 나입니까? 주체로서의 ‘나'가 아니고 상대적 세계의 상대적 개념에 의한 ‘너'의 반대말로써 ‘나'인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적 존재로 태어나서 상대적 개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이 부분을 좀 더 깊이 있게 알아봐야 하겠습니다.

 

상대성이란 무엇인가 - 下

상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상대적 존재이고, 상대적 존재들은 상대적 개념을 가지고 있고, 상대적 개념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상대적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의식이 그렇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쓰는 개념 자체가 모두 상대적인 쌍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벗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쓰고 있는 상대적 개념 중에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상대적 개념인 나와 너, 그 다음에 음과 양, 선과 악,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아무튼 대단히 많을 것입니다.

 

 

 <상대적 개념>     

나 

사랑

미움

기쁨

슬픔

양(+)

음(-)

유정

무정

관심

무관심

유식

무식

상생

상극

원인

결과

만남

이별

밝음

어둠

과거

미래

시간

공간

동양

서양

원시

문명

부모

자식

남편

아내

천재

바보

선배

후배

하늘

영혼

육체

크다

작다

부처

중생

많다

적다

보리

번뇌

길다

짧다

천국

지옥

높다

낮다

천사

악마

깊다

얕다

행복

불행

깨끗함

더러움

진실

거짓

가벼움

무거움

평화

전쟁

천천히

빠르게

 

나와 너
먼저 우리가 가장 많이 쓰고 있는 ‘나’와 ‘너’라는 개념을 한 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상대 세계에서의 ‘나’는 ‘너’의 반대되는 의미로서의 ‘나’인 것입니다. ‘나’라는 말이 없다면 ‘너’라는 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두 개는 한 쌍입니다.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하나도 같이 사라져 버리는 상대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기준이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상대성으로만 이것이 적용된다는 뜻입니다. 만약 이것이 절대 즉 주체로서의 나라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주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아야 됩니다. 즉 어떤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이게 ‘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말할 때만 ‘나’가 됩니다. “내가 너한테 돈 꿔 줬잖아.” 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내가 언제 너한테 돈 꿨어?” 금방 ‘나’가 ‘너’로 돼버립니다. 절대적 주체로서 ‘나’라면 이렇게 바뀔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말하는 사람이 바뀌니까 금방 ‘나’에서 ‘너’로 변해 버립니다. 여기서 뭘 알 수 있느냐 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철썩같이 나라고 믿고 있던 놈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이면서 주관적 개념으로서만 존재하는 ‘나’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있지도 않은 것입니다. 절대 기준에 의해서 이것이 ‘나’라면 다른 사람이 나를 부를 때도 ‘나’라고 지칭을 해야됩니다. ‘너’는 항상 ‘너’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하는 상대에 따라서 그게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나’가 ‘너’되고 ‘너’가 ‘나’되고 이렇게 수시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 세계에서는 고정적인 ‘나’는 없다, 고정적인 ‘너’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변함없는 ‘나’로 생각했던 이 놈의 정체인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개념으로서만 ‘나’인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인 본래성품은 어떻습니까. 이것은 오로지 하나이기 때문에 나니 너니 하는 것이 없습니다. 상대 세계는 존재를 해야하니까 나와 너라는 개념이 있어야 합니다. 인식해야 되니까 말입니다. 따라서 이 개념은 절대 진리인 본래성품이 그 모습을 수 십억의 모습으로 나투었을 때, 따라붙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상대세계에 존재할 때만 있는 것입니다. 현상계에서 사라지고 나면 그런 시비분별이 붙을 자리가 없습니다.

 

음(陰)과 양(陽)
다음은 음양 개념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상대적 세계에는 상대적 존재로서만 나타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상대적 존재로 튀어나오다 보니까 개념조차도 상대적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우주 현상계 안에 들어있는, 생명현상을 띄고 있는 모든 존재들은 전부 음양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남자와 여자, 동물은 수컷과 암컷, 식물도 수술과 암술, 하다못해 무성생식을 하는 단세포도 그 안에는 음양이 같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외관상 ‘양’으로 보이는 남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양’으로만 되어 있습니까?
여자는 ‘음’이니까 ‘음’으로만 구성되어 있을까요? 그렇게 되면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존재라는 그 자체가 이미 ‘음양’의 조화로써 상대성을 갖추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크게 볼 때는 남,녀가 음,양으로 되어있지만 그 각각의 안에는 또 음양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상대성이 갖고 있는 심오한 세계입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인체를 이야기할 때 음양 오행설로 설명합니다. 인체 안에 음과 양의 조화 기운으로 이 한 몸이 유지되고, 남자와 여자라고 하는 음양의 조화로 인해 종족의 생명체가 유지되며, 더 크게 보면 천지의 음양 조화에 의해 이 우주가 잘 굴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현상계 내의 아주 미세한 먼지에서 부터 거대한 우주까지 어느 하나 빠짐없이 이 ‘음양’의 조화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문제는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그 존재 방식도 ‘음양의 법칙’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육체인 ‘음’과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인 ‘양’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영혼이라는 말은 정신이나 마음으로 바꾸어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동양에서 말하는 정신과 서양에서 말하는 정신(spirit)은 의미가 다릅니다. 동양 철학의 ‘정신(精神)’에서의 ‘정(精)’은 육체를 말하는 것이고 ‘신(神)’은 영혼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물질인 ‘정’과 영혼인 ‘신’이 조화를 부려서 발생하는 것을 ‘기(氣)’라고 합니다. “정(精)-기(氣)-신(神)”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서양적 관점에서 ‘정신’을 ‘spirit' 즉 영적인 것으로 이야기하는데, 동양적 사고에서는 이미 이것이 `영`과 `육`의 복합체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은 몸을 구성하고 있는 `음`적인 에너지고, `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양`적인 에너지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개가 합해져서 조화가 이루어져 에너지 파동이 일어나는 것을 `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음`이 없어지면 `양`이라고 하는 것도 없어집니다. `양`은 `음`의 반대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사라지면 나머지도 사라져 버리는 상대적 개념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 사람들, 종교인들이 다 착각하고 있는 것 입니다. 마치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 있는 것으로 보고, 음과 양이 따로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념상 나누어져 있는 것이지 따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음양 원리 하나만 제대로 터득해도 기독교의 천국과 지옥, 불교의 윤회같은 문제들은 전부 해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음과 양이 함께 생했다가 함께 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쌍생 쌍멸’이라는 것입니다. 전기를 비유로 들어보겠습니다. +와 -가 결합된 그 상태에서만 불이 들어오게 됩니다. +와 -가 떨어지는 그 순간에 +도 -도 동시에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와 -가 결합될 때에만 전기적 생명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게 떨어지면 현상도 사라지고 +도 -도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하면 몸과 마음이라는 것이 태어날 때 쌍생한다는 뜻입니다. 음양 법칙에 의해 동시에 함께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조화롭게 지내다가 멸하는 순간 몸과 마음의 존재성은 동시에 둘 다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쌍으로 태어났다, 쌍으로 유지되고, 쌍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쌍생 쌍멸’이라는 것입니다. 이 ‘쌍생 쌍멸’은 존재계의 피할 수 없는 법칙이며 진리입니다. 이 쌍은 뗄래야 뗄 수가 없습니다. 한 쪽이 사라지면 나머지 한 쪽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무지의 깃발아래 모인 종교계에는 기상천외한 코메디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 중세시대의 카톨릭 신부들이 모여서 ‘하나의 촛불 위에 얼마나 많은 천사가 왕림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토론했다는 이야기는 압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중세시대뿐 아니라 지금의 세상에서까지 더 진지하게 논의되는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영혼이 임신 몇 개월 째에 태아에게 들어 오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들은 영과 육을 쌍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독립적 주체로 보기 때문에 그런 우스운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몸이 생하면 마음도 생하는 것입니다. 육체가 사라지면 영혼도 사라지고 +가 사라지면 -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육체는 죽지만 영혼은 죽지 않고 심판 받아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게 되고, 불교에서는 몸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자기가 살았을 때 지은 업에 의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은 다음에 부귀한 사람으로 태어나고 나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짐승으로 윤회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들 그렇게 믿고 있지 않습니까. 종교가 사람들을 다 세뇌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런 엉터리 생각이 왜 나올까요. 절대는 그만 두고라도 우주 현상계의 상대적 법칙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쌍으로 태어나서 쌍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원리인데 왜 이것을 모를까요. 왜 윤회를 믿을까요? 에고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자기가 사라진다니까 얼마나 끔찍하겠습니까. 육신이 죽는 것도 감당을 못하는데 영혼까지 사라진다니까 혼비백산해 가지고 영혼불멸설을 믿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습니까. 법칙이 ‘쌍생 쌍멸’이기 때문에 함께 생하고 함께 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2500년 전에 위빠사나를 통해서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깨닫고 보니까 ‘무아 연기’인 것을 알았습니다. ‘쌍생 쌍멸’ 이기 때문에 “본래 나라는 것은 없다, 모든 생명적 현상 속에는 그 자성이 공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미(美)와 추(醜)
다음은 미추, 즉 아름답다와 추하다의 개념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뭘 보고 아름답다 추하다고 합니까.
사람을 놓고 이야기할 때, “저 여자는 아름다워.” 또는 “저 여자는 못 생겼어.” 하는데 기준을 어디다 두고 하는 것입니까. 그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마다 다 다른 데 말입니다. 내가 볼 때는 아주 못 생겼는데 다른 사람은 죽자 사자 쫓아다니는 일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마른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뚱뚱한 사람을 좋아하고, 또 어떤 사람은 키가 큰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아담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여기까지는 아름다움이고 여기까지는 추함이라는 기준이 있다면 다를 수 있을까요? 그 기준이라는 것이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시비, 옳고 그르다고 하는 것도 기준이 정확하게 있으면 사람들이 왜 싸웁니까? 절대적 기준이 없으니까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하며 매일 싸우지 않습니까? 서로 잘났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선(善)과 악(惡)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헷갈리고 괴롭힘을 당하는 개념입니다. 모든 종교에서 착하게 살자, 선을 행하라, 악하게 살면 벌을 받는다, 이런 말들을 하며 선을 강조했는데 한 번 잘 생각해 봅시다.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이 있습니까? 기준이 있어야 착하게 살든지 악하게 살든지 할 것 아닙니까? 해공도 깨닫기 전에 많이 생각을 해봤습니다. 착하게 살고 싶었으니까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게 기준이 없는 것입니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선’이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악’인지 기준을 찾지 못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개념 자체가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딱 선을 그어놓고 여기까지는 ‘선’, 여기까지는 ‘악’ 이렇게 된다면 이건 절대적 기준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준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개념은 상대적 개념이고 상대적 개념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기준도 절대 기준이 아닌 상대적 기준으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황마다, 사람마다, 국가마다 다 다른 것입니다. 법이라는 것이 왜 필요합니까? 절대 기준이 있다면 나라마다 법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기준이 없으니까 각자 자기들의 관습과 문화와 가치관 그리고 시대상황 등에 따라 다 다른 것입니다. 한국은 한국 상황에 맞게 법을 만들고, 미국은 미국 상황에 맞게 법을 만들고,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자기들 상황에 맞게 법을 만드는 것입니다. 아랍 국가에서는 남자 한 명이 여자 네 명을 거느릴 수 있습니다. 거기서는 그것이 법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랍 남자가 한국에 와서 그렇게 하려고 하면 큰일납니다. 기준이 달라서 그런 것입니다. 여기서는 이것이 당연한 것인데 저기서는 맞아 죽을 일이고, 여기서는 큰일날 일인데 저기서는 환영받을 일인 것입니다. 기준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상대적 개념에 의한 선악 기준을 마치 절대 기준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저 사람은 참 착한 사람이야”라고 말하는데 뭘 가지고 착하다는 것입니까? 자기 기준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고, 쌍으로 존재하는 개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가 악을 없애고 “선한 세상을 만들자.” “유토피아를 건설하자.” “불국토를 건설하자.” 이와 같은 순진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이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악이 없어져 버리면 선은 어떻게 됩니까? 이것도 어디 지탱할 데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악의 반대말이기 때문에, 악이 없어지면 선도 같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 다 사라져 버리면 이 상대성인 우주 현상계가 존립할 수 있겠습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이 우주 현상계가 있는 한은 좋든지 싫든지 선과 악이 쌍으로 함께 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여러분들이 존재하는 한은 영혼과 육체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육체가 싫다고 내팽개치고 영혼이 혼자 있을 수 없고, 영혼이 귀찮다고 떼어 팽개치고 몸만 혼자 있을 수도 없는 것처럼 이 현상계가 있는 한 선과 악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선과 악이라는 개념, 나와 너라는 개념, 음양이라는 개념, 미추, 시비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쌍으로 존재하는 개념은 절대로 없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지니까 우주 현상계 자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음양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너와 내가 있고, 선과 악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상대성인 우주 현상계의 원리에 의해서 튀어나온 것이기 때문에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는 이것이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이 진리라면 악도 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리인 악을 쳐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없어집니까? 악도 진리이기 때문에 안 없어지는 것입니다. 상대적 우주 현상계 안에서는 이 자체가 진리입니다. 악도 진리라서 안 없어진다고 하니까 여러분 마음에 큰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이것이 이 우주 현상계 안에서는 함께 공존하는 진리이지만 이것들은 참이 아니고 개념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본래성품 차원에서 봤을 때는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허깨비라는 말입니다. 본래는 있지 않은데 개념으로만 있는 것입니다. 허상체인 상대적 우주 현상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개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대적 개념인 허상에 사람들이 매여 가지고 이게 옳으니 저게 옳으니, 이걸 없애야 되느니, 저것은 어쩌니 저쩌니 하면서 시비 분별하고 끌려 다니기 때문에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봐야 될까요. 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진리로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절대 진리인 본래성품이 그대로 드러났다 사라졌다 하는 모습이 이 상대적 우주 현상계이기 때문입니다.

 

절대성과 상대성
우주 현상계 안에 존재하는 선과 악,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아름다움과 추함 등의 모든 상대적 개념들은 진리인 본래성품 그 자체이기 때문에, 시비 분별 짓고 있는 그것이 바로 어리석음이고 무지인 것입니다.
본래성품 측면에서 전체가 하나로 드러난 우주 현상계를 있는 그대로의 진리로 보지 못하고, 이 몸뚱이 안에 들어있는 티끌과 같은 개체 의식으로 이것 저것 시비 분별하면서 상대적 개념 안에 푹 빠져서 그것의 놀림감이 되어 끌려 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아 연기’, 이 상대적 우주 현상계 안에는 그 어떤 존재도 스스로 그리고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 각각의 성품 안에는 ‘나’라고 이야기할만한 주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허상체이고 ‘무아 연기’적 존재이기 때문에 반드시 생했다 멸합니다. 왜 허상일까요. 변하고 사라지고 없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허상체들은 연기적 방법에 의해 존재하고 유지되고 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걸 만들어놓고 저것이 이걸 만들어 놓고 다른 것을 존재시키면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상대적 존재는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오직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시작도 끝도 없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서 이것과 저것 모두인 오직 하나로서 존재하는 절대인 본래성품입니다. 이것만이 참나인 것입니다. 본래성품에서 나투어진 이 존재 하나는 허상체로서의 모습이고, 그 허상체가 튀어나올 때 어쩔 수 없이 뒤집어 씌워진 상대적 인식에 의해서 마치 나누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실제로 나누어진 것이 아닙니다. 개체 의식으로 착각했을 때 나누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이고, 인식될 수 없으며, 현상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그것이 실재이고, 그것이 드러날 때는 의식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 몸 하나만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만 ‘나’이고 다른 것은 ‘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분리 의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 분리 의식은 이 개체를 ‘나’라고 인정하는 개체 의식에서 나오는 것인데 실제로 이 개체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 개념에서만 나오는 것이지 실재인 본래성품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진리는 본래 쌍으로 이루어진 하나입니다.

 

절대와 상대는 하나 - 上

현재 연재하고 있는 해공 선생의 <윤회는 없다>가 <대자유인이 되는 길>(다나)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앞장에서 절대와 상대에 대하여 기본적인 설명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절대와 상대를 정확히 인식 시켜주기 위해서 본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절대의 성품은 이러이러한 것이고 상대의 성품은 저러저러한 것이라고 나누어 설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전체를 꿰뚫고 있지 않는 한 그 틀에 갇혀버리게 됩니다. 지금 불교계를 비롯한 많은 구도자들이 말로는 절대와 상대가 하나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나누어진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래서 절대의 성품을 마치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의 성품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동안 나눠놓고 설명했던 절대와 상대의 성품이 실제로는 어떤 것이며, 어떻게 하나되는 것인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절대와 상대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동양철학에서는 ‘무극(無極)'과 ‘태극(太極)'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근원자리인 ‘무극', 무극에서 ‘태극', 그리고 이 태극에서 갈라져 나온 ‘음양'인데, 이것이 마치 순차적으로 나오는 것처럼 표현되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에 들어있단 말입니다. 설명을 하려면 이해시켜야 하니까 ‘무극에서 태극이 나왔고, 태극에서 음양이 나왔다' 이렇게 말하지만 그대로 하나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극'의 상태는 일체의 시비분별이 끊어진 절대성으로 보고, ‘태극'은 이 절대의 성품 안에 음과 양이 공존하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 상대성이 세상에 표출되어 ‘음양'으로 나누어져서 존재하고 있는 상태를 현상계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절대에서 상대가 나왔고 상대법칙에서 음양 즉 이 현상계의 만물이 나왔다고 도식적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이것은 순서적인 것이 아니고 인식의 차이를 나타내주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제 절대와 상대와 현상계가 그대로 하나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도표를 변형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무극'이라는 하나의 세계 안에 ‘색'과 ‘공'이라는 두 가지 다른 성격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시비분별이 끊어져서 그대로 하나였던 ‘무극'이 그 존재성을, 자기자신을 인식하기 위해서 그 자체가 두 가지의 성품인 상대성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크게 ‘색'과 ‘공'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색'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상태이고 ‘공'이라고 하는 것은 텅 빈 상태로서 서로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하나의 방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면 이 방에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상태일 때 우리는 이것을 ‘공'의 상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텅 비어있던 방에 가구와 사람같은 물질적인 존재들이 나투어진 상태를 ‘색'의 상태라고 할 때, 방이라고 하는 본래성품은 물질이 들어 차 있든지 텅 비어있든지, 새로 생기거나 사라지거나 하는 그런 성품이 아닙니다.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물질이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나 물건이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이지, ‘방'이라고 하는 그 성품은 물질이 있을 때도 ‘방'이고 물질이 없을 때도 그냥 ‘방'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있음과 없음이 그대로 다 들어있는 것이 절대인 것입니다. 색과 공이 그대로 다 들어있는 것이 절대라는 것입니다. 색의 상태로 있어도 절대 안에 있는 거고, ‘공'의 상태로 있어도 절대 안에 있는 거란 말입니다. 절대가 변하는 것이 아니고 절대가 품고있는 상대성 개념이 변하는 것입니다. 공의 상태에서 색의 상태로, 무의 상태에서 유의 상태로 그 상대적 개념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들이 이 절대의 성품을 ‘공'의 성품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텅 빈 것, 아무 것도 없는 것, 일체가 끊어진 것, 태어나기 이전 소식 등으로 표현하니까 색이 드러나기 이전의 텅 빈 ‘공'의 세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의 성품인 절대성을 반쪽만 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색이나 공이나, 있거나 없거나 그 어떤 것도 절대의 성품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절대의 성품을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 이 절대 상태를 ‘허공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 말에서 오는 뉘앙스 때문에 그냥 텅 비어있는 상태를 생각하기 쉽지만 이미 설명한 것같이 물질이라는 것은 허공을 의지해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허공이 물질이 나타났다고 해서 없어졌습니까? 또 물질이 사라졌다고 해서 없던 허공이 생겨났습니까?


생했다 멸했다 하는 것은 허공이 아니고, 그 허공 안에 들어있는 물질세계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이 있다고 해서 허공이 사라지고, 물질이 없어졌다고 해서 허공이 나타났다고 보면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허공을 색의 반대인 ‘공', 물질이 없는 상태로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무지입니다.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안되어 있을 때 이것을 자꾸 착각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너무도 간단하지만 하나의 절대성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상대적 개념인 ‘색'과 ‘공'으로 나누어지고 ‘공'은 더 이상 나누어질 것이 없지만 ‘색'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자체가 상대성인 ‘음양'으로 또 갈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깜빡하면 한 단계를 뛰어넘어서 그냥 절대와 상대의 관계를 색과 공의 관계로 착각하는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절대'는 공의 상태가 아니고 ‘공'과 더불어 ‘색'이 함께 들어있는 전체가 그대로 하나로써의 상태인 것입니다. 이 절대인 본래성품과 상대적 개념인 공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는 진아의 상태를 설명할 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즉 그대가 태어나기 이전 상태”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제자인 라메쉬 발세카는 진아의 상태를 “빅뱅이 일어나기 0.01초 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언뜻보면 두사람의 말이 같은 것 같이 보입니다. 아니 오히려 제자인 발세카의 말이 스케일이 더 큰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사람의 표현에는 미묘하지만 대단히 의미심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발세카는 진아를 물질이 없는 상태 즉 공의 상태로 인식한 것이고 마하라지의 뜻은 세상은 그대로 있지만 나라는 개체적 인식이 없는 상태 즉 무아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깨달은 사람은 무아 즉 진아를 정확하게 궤뚫고 있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은 무아를 체득하지 못했으므로 알음알이에 의해서 공의 상태를 절대인 진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손으로 비유해 보겠습니다.


손 = 손바닥  +  손등


손바닥을 ‘색'이라 하고 손등을 ‘공'이라 할 때, 우리가 손바닥을 보면 손등은  감춰집니다. 반대쪽을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적 개념을 가지고 있는 상대적 존재들은 상대적 인식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양극의 한 쪽만을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모든 착각은 여기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손바닥인 ‘색'을 인식하는 순간 손등 즉 ‘공'은 감춰져 버리니까 모르는 것입니다. 또 ‘공'을 인식할 때 즉 텅 빈 상태를 인식할 때, 모든 ‘색' 즉 물질세계는 감춰지기 때문에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양면 중에 이 쪽을 보나 저 쪽을 보나 항상 한 쪽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절대성품이 나투어 낸 상대성, 그 양쪽을 보지 못하고 늘 한쪽만 보고있다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과 개념과 인식 작용은 전체를 보지 못하고 항상 한쪽에 치우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라는 것입니다. 손바닥만을 인식하면 손등을 놓치지만 손 자체를 인식하게되면 손이라는 말속에는 손바닥과 더불어 손등도 함께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손' 자체가 ‘절대'라는 것입니다. ‘절대'는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손' 전체가 ‘손'인데 이것이 세상에 드러날 때에는 반드시 상대개념이 따라붙기 때문에 손바닥과 손등으로 나눠져서 불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는 손바닥이니 손등이니 따질 것도 없이 그냥 손이지만, 현상세계는 상대세계이기 때문에 항상 하나가 둘로 쪼개지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손바닥과 손등으로 인식을 할지라도 이 두개가 그대로 포함된 것이 손이라는 것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손바닥을 보든 손등을 보든 그 이면에는 또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손바닥만 인식하고 있을 때, 즉 손바닥에만 매여있을 때에는 손등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마치 손바닥만 인식하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현상세계만 눈에 보이기때문입니다. 그런데 깨달은 사람의 인식은 손 자체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손 그 자체를 인식하는 사람은 손바닥도 알고 손등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색도 알고 공도 안다는 것입니다. 색과 공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 진리인 본래성품 안에서 상대적으로 쌍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그 두 가지의 상대적 성품이 절대의 진리 안에 들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색도 진리고 공도 진리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이 진리이면 악도 진리라는 것입니다. 이 선과 악이 절대진리인 본래성품 안에 함께 쌍으로 들어있는 똑같은 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차별 없이 시비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 볼 때 그게 바로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좋고, 이건 나쁘고, 이건 없애야 하고, 이것은 잘해야 하고 이러한 자기 기준에 의한 시비분별이 끊임없이 일어날 때, 그 자체에 매여서 본래 있지도 않은 개념의 노예가 됨으로써 끊임없이 고통받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은 ‘절대'는 ‘상대'이전의 어떤 상태가 아니고 상대가 그대로 함께 녹아져 있는 그 자체의 모습이 바로 ‘절대'라는 것입니다.


단지 인식 될 때만 절대가 상대성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색'과 ‘공'이라고 하는 것 중에 ‘색'이 하나의 ‘색'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드러나는 ‘색'이 또 자주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상대개념인 나와 너, 선과 악, 미추, 시비 이런 것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가장 큰 상대성은 ‘색'과 ‘공'이라고 하는 개념인데, 이 ‘색'은 바로 물질세계를 이야기하고 ‘공'은 그 물질이 드러났다가 사라진, 감추어진, 텅 빈 상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이 ‘색'의 상태에서 다시 ‘음양'의 법칙인 상대개념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색'이니 ‘공'이니 하는 것은 개념일 뿐이고 오로지 ‘절대' 만이 실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안에서 수십억만개가 쪼개졌어도 그 모든 것들은 본래 하나인 절대에서 나투어진 절대의 변화 모습이기 때문에 본래성품만 알고 있으면 헷갈릴 것이 없습니다. 절대와 상대는 그대로 하나이니까요.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는 한쪽에 치우친 차별심, 분별심이 끊어지게 되면 있는 그대로가 절대이고 진리라는 것입니다.

 

 

절대와 상대는 하나 - 下

오늘날 많은 구도자들이 자기 몸과 마음을 열심히 닦으려고 합니다. 착각하거나 혼동하지 마십시오. 본래성품, 참나는 언제나 깨끗하고, 언제나 자유롭고, 언제나 행복하여 더할 나위 없이 평화스러운 진리 그 자체입니다.

 

바다와 파도


바다에 바람이라는 조건이 불면 잔잔한 하나의 상태였던 바다에 수 십억만 개의 파도와 거품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때 만약 파도에게 개체 의식이 있다면 하나의 파도가 일어날 때 자기는 태어났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굽이쳐 살다가 사라질 때 자기가 죽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인간들이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바다의 입장에서 본다면 끊임없이 파도가 일어났다 사라지지만 본래 하나인 바다가 잠깐 모습만 변화되었을 뿐 자기는 그냥 바다인 것입니다. 파도가 바다에서 떨어져서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파도에게 의식이 있다면 일어난 그 놈은 자기가 독립적인 존재인 것처럼 착각을 할 것입니다. 마치 사람들이 자기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착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본래성품인 바다는 파도가 일어나기 전에도 바다였고, 파도가 일어난 지금도 바다고, 파도가 사라진 후에도 그냥 바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파도가 생했다 멸했다 하는 그것이 본래성품 차원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단지 조금 변화된 모습일 뿐인 것입니다. 바다 입장에서는 태어난 놈도 죽은 놈도 없는 것입니다. 모습만 바꾼 것이지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파도에다 초점을 맞추면 파도가 생했다가 멸한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식이 이 개체에 묶이게 되면 그 의식이 개체 의식이 되어서 이것만 나라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내가 태어나고 내가 죽는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나는 따로 태어난 적이 없는 것처럼 죽는 것도 아닙니다. 본래의 내 안에서 모든 것이 드러났다가 사라지는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불생 불멸'인 것입니다.


참나는 영원한 존재인 본래성품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이 안에서 수십억의 허상들이 떴다 사라질 뿐, 바다에서 파도가 일어났다 사라질 뿐, 바다는 그냥 바다라는 것입니다. 파도가 일어난 상태를 ‘색'이라 하고 파도가 사라진 잔잔한 상태를 ‘공'이라 한다면 바다 그 자체가 절대인 본래성품인 것입니다. 인식의 틀이 어느 상태에 있느냐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바다의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개체 의식을 가지고 살다가 깨닫는 순간 "아, 나는 본래 바다였구나. 나는 파도가 아니라 본래 바다였구나."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 본래성품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안에서 수 십억이 떴다 사라졌다 하면서 존재하여도 전체는 그냥 하나인 것입니다.


육체와 세포


그러면 이제 사람의 육체를 가지고 다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하나의 몸은 수십조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세포들이 모여서 형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세포들이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자기만 ‘나'고 옆에 있는 세포들은 다 ‘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 세포 하나 당 평균 수명이 3-4개월이니까 “나는 3개월 전에 태어났어. 지금 내 의지대로 열심히 살다가 이제 며칠 지나면 나는 죽어.”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 세포 하나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자기가 태어나서 존재하다가 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세포들이 이 몸 속에 수십조나 되고 그 세포들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얼마나 많이 교체되면서 이 몸 하나 유지하는지 한번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들은 이 전체, 수십조의 조화로 이루어진 이 전체를 ‘나'라고 하지 세포 하나를 ‘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제 의식을 좀 넓혀서 우주를 하나의 몸으로 봅시다. 우주에는 수많은 은하가 있습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태양계가 속해 있는 은하계에는 2000억개의 별들이 있으니까 태양계는 티끌 만하게 보입니다. 그 태양계에서 지구는 7개의 행성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니 지구 안에 붙어있는 ‘나'라는 이 존재는 크기로 따진다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우주와 인간의 관계를 생각해 봤을 때, 이 우주 안에 들어있는 존재로서의 ‘나'는 이 몸 속에 들어있는 수십조의 세포들 중의 하나인 세포와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주의 시간대로 보았을 때, 인간이 존재하는 100년이라고 하는 이 시간대가 과연 이 몸 속의 세포가 생존하는 3개월보다 더 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주의 시간대에 비하면 100년은 찰라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루살이를 보면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주적인 입장에서는 인간들이 하루살이인 것입니다. 이 광활한 우주 안에 들어있는 세포로서의 인간은, 마치 이 몸 속의 세포가 3-4개월을 주기로 계속 새로운 세포로 교체되면서 이 몸을 유지시키는 것과 같이 우주라는 유기체 속의 하나의 부분으로 계속 교체되어 가는 것입니다. 연기적 방법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의식이 개체 의식이기 때문에 전체를 그냥 하나로서 ‘나'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이 몸 하나만 ‘나'라는 것입니다. 마치 파도 하나가 개체 의식을 가지고 바다가 잔잔했을 때 나는 없었다가, 바람이 불어서 파도가 일어날 때 내가 태어났다고, 또 파도가 스러질 때 내가 죽는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세상의 60억의 인간들이 전부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본래성품인 오직 하나의 상태, 파도를 보지 말고 바다의 상태, 이 개체 를 보지 말고 우주 전체를 하나의 몸으로 인식하고 있을 때, 이 모든 것은 그냥 돌고 도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개체 의식이 아니고 순수 의식으로 본래성품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나투어진 이것은 내가 아니고 참 나인 본래성품에서 변화된 하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압니다. 본래성품이 수 십억만 개로 쪼개졌다 할지라도 그 근본은 하나이고, 이것들이 무수하게 떴다 사라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현상일 뿐이므로, 그런 티끌과 같은 현상을 나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체 의식, 즉 에고라고 하는 놈이 왜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


처음부터 바다 의식, 즉 전체적 본래성품인 순수 의식으로 그냥 있으면 헷갈리거나 착각할 것도 없을텐데, 왜 개체 의식이 생기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왜 이것을 나라고 생각하고 나머지를 너라고 생각해서 시비 분별하고 집착해서 고통받고 사느냐 이것입니다.


그것은 절대가 자기 모습을 드러낼 때 상대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우주 현상계에 상대적 존재로 태어나는 그 순간에 상대적 개념을 뒤집어쓰고 나오기 때문에 이것은 ‘나'이고 저것은 ‘너'라는 분리 개념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현상계의 진리입니다. 그러니 누구나 다 착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투영된 생명체는 튀어나오는 그 순간 상대적 존재로 상대적 개념을 가지고 나오기 때문에 개체의식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개체 의식이 마치 막이 씌어진 것처럼, 틀에 뒤집어 씐 것처럼, 갇혀 있다가 이 틀이 벗겨지게 될 때 전체가 그대로 하나로서의 ‘나'라는 순수 의식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 본래성품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닫고 보면 부처고 중생이고 분별이 없는 것입니다. 무아의 의식으로 절대 진리인 본래성품의 측면에서 보니까 모두가 부처인 것입니다. 모두가 본래성품 그 자체인 것입니다. 단지 다양하게 펼쳐진 현상세계에서의 배역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니 본래성품에서 투영된 상대적 현상계는 시비 분별심 없이 순수의식으로 봤을 때, 있는 그대로가 진리이고 흘러가는 그대로가 순리인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절대와 상대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꿈꾸는 나와 꿈속의 나


여러분들이 날마다 잠을 자면 꿈을 꿉니다. 그 꿈속에는 ‘나'라는 개체적 존재도 있고, 내 주변의 인물들도 들어있고, 그 꿈속에는 이 세상도 들어있습니다. 꿈이 진행될 동안에는 그 속에 들어있는 그 개체는 의심할 바 없는 ‘나'입니다. 꿈속에서 여러분들은 평상시와 똑같은 희로애락의 감정과 느낌을 가지고 생활합니다. 꿈속에 들어있는 그 개체를 ‘나'라고 믿고 살다가 꿈을 깨는 순간에, 꿈속에 들어있던 나와 주변의 인물들이 모두 허상이었다는 것을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꿈꾼 자이지 꿈속에 들어있던 자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압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의식이 꾸고 있는 이 우주 현상계라는 꿈속에는 수십억의 등장 인물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나'라고 착각한 놈이 반드시 하나 들어있습니다. 그 나머지는 다 ‘너'라고 다시 착각합니다. 그러나 꿈을 깨는 그 순간에 ‘나'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그 허상인 개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꿈을 꾼 의식만이 꿈 깬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꿈꾸는 의식이지 꿈속에 들어있는 개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꿈속에 들어있는 동안에는 허상인 개체를 ‘나'라고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한 우리들이 음식을 먹을 때, 소고기를 먹으면 고기가 몸 속에 들어가서 사람의 몸이 됩니다. 이처럼 돌고 도는 것, 이것이 우주 현상계를 존재하게 하고 유지시키는 유기체적인 모습입니다.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옮기는 것뿐입니다. 우주 현상계에서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명을 취해야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살생이라는 것은 인간의 분별심, 에고에서 비롯된 하나의 잘못된 개념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어찌 동물만 생명이고 식물은 생명이 아니란 말입니까? 이제 그런 유치한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 그 영화의 화면을 받쳐주는 것은 스크린 입니다. 스크린이 없다면 화면은 허공 속에서 흩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스크린이 받쳐줄 때 필름 위로 내쏘는 빛에 의해서 화면이 스크린 위에 펼쳐집니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화면에는 아주 다양한 형태의 장면들이 펼쳐집니다. 어떤 때는 불이 나서 산이 전부 다 탈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전쟁이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 모든 장면들은 다 사라지고 화면을 받쳐주던 스크린만 남게 됩니다. 그 어떤 끔찍한 장면이 스크린에 투영되었다 할지라도 스크린을 물들이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본래성품은 스크린과 같습니다. 본래성품 안에서 수천억의 존재와 사건들이 뒤엉켜서 펼쳐지지만 그것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순간에 모두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본래성품은 우주 현상계가 생기기 전이나 생긴 후나 사라지고 난 뒤에도 늘 변함없이 항상 그 모습 그대로인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그 장면에 매이고 집착함으로써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살아왔던 모든 인생, 모든 사건, 모든 인연은 이미 다 흘러갔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만이 지나가 버린 것을 마음속에 붙잡고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드러나지 않은 것이므로 그것 역시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지금, 여기'만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의 의식이 항상 ‘지금, 여기'에 머물러 있고, ‘지금, 여기'를 생생하게 알아차리게 될 때 깨달음은 저절로 오게 됩니다. 어떠한 일이 벌어졌어도 본래성품은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더럽혀졌다고 착각할 뿐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의 유희요, 축제일뿐입니다.


중도(中道)


‘중도(中道)'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옳다 그르다, 선이다 악이다, 어쩌고 저쩌고 하는 상대적 개념에 의한 시비 분별심이 끊어져 버린것이 ‘중도'인 것입니다. 시비 분별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것이 절대적 진리에서 투영된 상대적 개념으로써 쌍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다 진리라는 것입니다. 진리 아닌 것이 어떻게 나올 수 있습니까? 지금 펼쳐지고 있는 것이 자기의 인식의 틀로 볼 때는 옳지 않은 것 같아도 그것이 진리인 것입니다. 진리가 아니라고 시비 분별하고 있는 그 마음이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인식이 본래성품 차원에서 머무는 순수 의식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상대적 현상계의 틀 속에서 개체 의식으로 영향받고, 세뇌 당하고, 맹신으로 가득한 알음알이로 채워져 있는 그런 인식으로는 진리를 아무리 깨달으려고 해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이 절대와 상대의 그림을 합치면 현상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보이게 됩니까? 상대 현상계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바탕은 절대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상대성이지만 그 바탕에는 이미 절대성이 들어 있습니다.


절대는 개체적으로 인식이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개체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고 해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참 존재라는 것입니다. 드러난 놈은 눈에 보이니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생멸하기 때문에 그것이 실재가 아니고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들이 여러분들 머리 속에 확고하게 자리가 잡혀야 됩니다. 그래서 ‘주체로서의 나'는 현상계에 드러난 먼지티끌과 같은 몸과 마음이 아니고, 참나는 절대 진리인 본래성품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 게 아닙니다. 몸과 마음을 무엇하려고 닦습니까. 몸과 마음은 허상입니다. 내가 아닙니다. 참된 수행은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본래성품에서 투영된 순수 의식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있는 그대로를 보게되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생각이든, 말이든, 행위든, 감정이든, 감각이든-과 우주 현상계 안의 모든 존재, 모든 사건, 모든 현상들이 전부 생멸한다는 것을 알게되고, 생멸하니 무상한 존재이며, 무상함을 알게되면 저절로 ‘무아'가 가슴을 뚫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구도자들이 자기 몸과 마음을 열심히 닦으려고 합니다. 먼지가 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에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나 참나인 본래성품은 순수, 청정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더럽힐 수 없는 것입니다. 더럽혀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래 면목입니다. 착각하거나 혼동하지 마십시오. 본래성품, 참나는 언제나 깨끗하고, 언제나 자유롭고, 언제나 행복하여 더할 나위 없이 평화스러운 진리 그 자체입니다. 그 좁은 몸뚱이 틀 안에서 시비분별 일으키며 번뇌 망상하지 말고 참나인 본래성품을 깨달아야 합니다.

 

 

윤회와 우주론 - 上

인간이 정신세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대략 지금으로부터 5천년전쯤으로 추정됩니다. 한 골치 아픈 인간이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과연 어떻게 될까” 하고 사후세계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의문이 그 이전부터 조금씩 막연하게 의식에 잡히기 시작했는데 정확하게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후 인간들의 영적인 진화가 이루어지고 지능이 자꾸 발달해 나가면서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 때 정립된 것이 바로 영혼과 육체라고 하는 개념입니다.

 

 육체는 흙에서 왔으니까 죽으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데 영혼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육체는 하나의 그릇이고, 집이며, 옷일 뿐, 영혼이 바로 주인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영혼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어떤 곳, 즉 영계 또는 하늘나라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는 그 어떤 곳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옷처럼 입었다가 벗는 것으로 말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들어와서 살다가 육체가 파괴되고 나면 영혼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사는 동안에 저지른 행위에 의해서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천국, 악한 일을 한 사람은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한 것이 초창기 사후세계에 대한 하나의 정립된 결론이었습니다. 그 옛날에는 윤회라는 사상이 없었습니다. 이것까지 생각할 만큼 지능이 높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천국과 지옥설은 직선사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번 태어나서 살다가 죽어서 천국이나 지옥으로 계속 일직선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 천국이나 지옥에 가게되면 그때는 영원히 가게 되니까 한번 태어나서 살 때 잘 살아야 된다, 똑바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절대와 상대의 인식체계가 정립이 안 돼 있었기 때문에 그냥 막연하게 영혼이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적용을 시켰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선악개념에 의한 천국과 지옥설이 모든 원시 종교의 하나의 틀이었고, 이것이 진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졌었는데 인간의 지능이 더 발달하면서 이 인식이 바뀐 것입니다. 이전 보다 조금 더 뛰어난 어떤 사람이 "아니다. 단 한번 만으로 영원히 천국과 지옥으로 가면 그건 너무 냉혹한 것 아니냐. 기회를 줘야 공평한 게 아니냐. 돌고 도는 거다.“. 그렇게 해서 직선사관 다음에 순환사관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고 했는데, 어떻게 한 번에 의해 결정돼서 영원히 지옥이나 천국으로 갈 수 있느냐. 그렇지 않다. 돌고 도는 것이다. 자연을 보라.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후에 또 다시 봄이 오지 않느냐. 돌고 도는 거다."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순환사관에 의해서 윤회론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도에서부터 시작된 사상입니다. 그래서 바야흐로 직선사관은 아주 원시적인 사상이기 때문에 한물가고 이제 전 세계는 인도에서 모태가 된 순환사관 즉 ‘윤회론'이 지금 먹혀 들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윤회설에 있어서의 중심사상은 영혼 불멸설입니다.


이 영혼 불멸설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직선사관에 의해서 영원히 천국과 지옥으로 간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순환사관에 의해서 계속 돌고 돈다, 즉  윤회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윤회 합니까? 육체는 사라지고 영혼이 돌고 돈다는 것입니다. 또 인간으로만 돌고 돈다면 별로 겁을 안 먹으니까 육도 윤회를 만들어 가지고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등의 여섯 가지 세상을 자신이 한 행위에 따라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불교의 윤회설은 육도 윤회설입니다. 그런데 이 육도 윤회설이란 것을 부처님이 말씀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럼 누가 만든 걸까요. 보통 팔만사천대장경이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후대에 다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언제 직접 말했습니까? 인간들이 다 만들어 놓고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불경을 읽어보면 전부다 첫마디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여시아문(如是我聞)' 즉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라고 써 있습니다. 아난존자가 제 1차 불교 결집대회때 자기가 늘 부처님 모시고 다니면서 들었던 내용을 그대로 암기해 가지고 얘기해 준 것입니다. 이것이 불경의 시작입니다. 아난존자가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하고 언급한 후에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시아문'이라는 말이 없으면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000년 후에 쓴 것도 맨 앞에는 ‘여시아문' 이렇게  써놓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권위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마태복음, 요한복음 이렇게 앞에 사람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썼냐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직계제자입니다. 그래서 후대 100년 후에 썼는데도 이름은 직계제자 이름을 붙여놓은 것입니다. 그래야 귄위가 있을 거고 신빙성 있어 보이니 믿음이 더 갈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옛날에는 ‘마태복음'하고 붙여놓으면 마태가 썼다고 다들 믿었는데, 요즘은 워낙 과학이 발달해 ‘고문서학'이라는 분야에서 그 책의 진짜 연대기를 다 밝혀내고 있습니다. 그 당시 쓴 문체라든지 언어 구성 등, 쉽게 얘기해서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이 언어를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에 쓴 거다'라고 아무리 주장해 봐야 조사해보면 다 밝혀집니다. 500년 전엔 지금 같은 용어를 안 썼습니다. 이런 용어 자체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때는 어법이 전혀 달랐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그러하오십나이까?" 이렇게 썼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밝혀내는 것이 문서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앞에다가 ‘여시아문'이라고 써 놓아도 안 됩니다. 불경이나 성경을 이 같은 문서학으로 밝혀보면 그 연대가 전부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 중에 기록상 가장 원본에 가깝다고 하는 것은 아함경 딱 하나 있습니다. 초기 불교에는  팔리어를 썼는데 이 언어는 글은 없고 말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부 외웠습니다. 이 아함경만 구어체고, 나머지 책들은 전부 문어체로 되어 있습니다. 벌써 구성부터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팔만대장경이 다 부처님 말씀이니 어쩌니 해도 전부 몇 백년이나, 천년이후에 불교학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특히 중국, 한국, 일본에서 신봉하고 있는 대승경전 같은 경전들은 종교경전이 다 그렇듯이 각 종파마다 부처님 말씀을 뼈대로 하여 자기들 식으로 경전을 해석해서 체계를 만든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어쨌든 육도 윤회라고 하는 체계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인데도, 현재 불교인들이 꼼짝없이 이 육도 윤회를 부처님이 하신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윤회라는 말을 개체의 윤회로 쓴 적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가 무아 연기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무아 연기라는 뜻이 뭡니까. 이 우주 안에 들어있는 모든 개체는 자기 혼자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타에 의해 발생되었으니까요. 그리고 홀로 존재할 수 도 없습니다. 상대세계는 인식하는 자와 인식되는 대상이 있어야만 합니다. 즉 상대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B라는 것이 있을 때만 A도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 현상계의 법칙에 의해 B가 사라지면 A도 사라지게 됩니다. 홀로 있을 수도 없고, 스스로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개체는 ‘현상적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 안에는 주체로서의 ‘나'는 없다.' 이것이 ‘무아'입니다. 왜 ‘무아'일까요? 연기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윤회라는 말이 있다면 전체적으로 생명이 돌고 돌면서 다른 생명체를 계속 발생시키니까 이것을 연기적 윤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불교에서 얘기하는 윤회는 하나의 개체가 살다가 죽어서 갔다가 다시 오고 갔다가 다시 올 때, 개도 됐다가 사람도 됐다가 구더기도 됐다가 개구리도 됐다가 이런다는 것입니다. 이치적으로 따져봐도 인간만 60억인데 개체 개체가 모두 영혼이 왔다갔다한다면 말이 됩니까? 주체라는 것은 스스로 존재하면서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을 말하는데, 타에 의해서만 생겨나고 홀로 존재할 수도 없는 이것을 어떻게 주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간단한 인식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주체는 오직 하나고 이것이 전체를 잡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속에 수십조의 세포가 그 하나하나로는 큰 의미가 없지만 그 하나하나가 결집이 안 되면 이 몸 자체가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전체와 개체의 관계에서 본다면 윤회라는 말은 전체가 이렇게 맞물려 돌아가는 연기라는 방식에 의한 윤회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개체가 들락날락 거리면서 이렇게 된다는 것은 인간만 해도 주체가 수십억개고, 미물 짐승들까지 전부 윤회의 대상으로 봤을 때 그 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데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모든 존재는 무아 연기적 존재이기 때문에 허상체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대적 세계의 모든 존재는 생멸하는 것이고, 거기다가 쌍생쌍멸 합니다. 왜 쌍생쌍멸할까요?


우주 현상계의 모든 상대적 존재의 존재 방식이 상대적 개념, 즉 쌍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안에 들어있는 생명현상을 가진 모든 존재들은 전부 음양으로 나타납니다. 아주 미세한 먼지부터 거대한 우주까지 어느 하나 빠짐없이 모두 음양의 조화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쌍생쌍멸이란 상대성 존재법칙에 의해서 하나의 개체를 형성하는 음과 양 즉 육신과 영혼이 생할 때 동시에 시작되고 ‘기'가 돌아가는 동안에 함께 존재하다가 음양이 더 이상 조화를 부리지 못하고 멸할 때 동시에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상대적 우주 현상계 안에 있는 상대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 법칙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전기 불에서 + 와 -가 떨어지는 그 순간에 +도 사라지고 -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는 사라지는데 + 혼자 어디 가서 있다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체는 죽지만 영혼은 천국이나 지옥에 가서 살든지 그렇지 않으면 영계에 갔다가 자기가 지은 업에 의해서 다시 다른 몸을 받아 윤회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 즉 육체와 영혼이 함께 나왔다가 함께 사라졌는데 누가 윤회를 한다는 것입니까? 진리를 모르고 현상계의 존재법칙을 모르기 때문에, 에고적 발상에 의해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체적 윤회는 없습니다. 그러니 현재의 불교는 그냥 다 쓰러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체적 자아가 없으니까, 천국과 지옥도 없습니다. 기독교도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 몸뚱이 가지고 잘 닦으면 신선 되어서 영생한다고 도교, 선도, 단전호흡 등 기수련하는 단체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있을 수 있습니까? 거기도 끝난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뭔가 한 가지씩 이런 이상야릇한 것을 내걸고 있는 모든 종교, 모든 단체는 다 끝난 것입니다. 21세기에는 인류의식이 좀 더 합리적으로 진화해서 지금까지의 원시적 사상은 모두 막을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다음에 더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해 달라고 부처님한테 가서 기도하고, 천국 가겠다고 교회 가서 성금 내고 있는 이런 사람들 다 뭐하고 있는 것입니까? 코메디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과 죽음, 그리고 이 삶과 죽음을 담고 있는 이 우주의 문제를 풀어야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이 우주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를 풀지 않으면 결코 이 인생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죽음도 알 수가 없습니다.

 

 

윤회와 우주론 - 下

이 우주 현상계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의식이 만들어 냈습니다. 의식이 만들어 놓고 의식이 의식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의식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의식의 원맨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우주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 약 2500년전쯤이고 정확하게 인식하게된 것은 불과 몇 백년도 안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이런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냥 하늘과 땅이라는 개념만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우주를 평면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땅은 네모났고 땅 주변으로 바다가 둘러치고 있는데 바다에는 끝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천동설이 맞는 줄 알았습니다. 지구는 네모나기 때문에 고정되어 있고,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것이 천동설인데, 이것을 지동설로 바꾸어 놓은 것이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입니다. 지동설이라는 것은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인데, 그 말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입니다. 네모나게 생겼다면 어떻게 돌겠습니까. 지구가 둥글어야 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태양이 움직이지만 그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돌고있다는 것입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구가 돌고 있는데, 우리 눈에는 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구를 도는 걸로 보이는 이것이 현상과 실제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또 네모난 지구를 바다가 둘러싸고 있으니 바다도 끝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수평선을 보면 끝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배를 몰고 멀리 나가지 못했습니다. 바다 끝 벼랑으로 떨어질까봐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깨뜨린 사람이 콜럼버스입니다.


 콜럼버스는 탐험가니까 ‘끝이 있다는데 끝까지 가보자' 하며 목숨을 걸고 항해를 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전진해 나갔더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 왔습니다. 사실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는 학문적으로 지구가 둥글다는 학설을 제시했지만 콜럼버스는 직접 실천해서 증명시켜 주었는데 이게 불과 몇 백년전이라는 것입니다.


 과학이라고 하는 것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우주라고 하는 개념도 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철학이 과학을 대신했습니다. 그리스 철학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등 이런 사람들이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과학자인 셈입니다. 그때는 실제로 증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머리로 상상했습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보면 머리로 이상세계를 상상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실질적 과학이 발달하면서 철학과 과학이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시점이 불과 5,6백년전입니다. 근대과학의 아버지는 뉴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뉴턴이 발견한 그 유명한 만유인력, 우스개 소리로 사과나무 밑에서 낮잠 자다가 사과가 떨어져서 이마를 때리는 바람에 그때 번쩍하고 "왜 모든 것은 전부 위에서 아래로만 떨어질까?" 하는 의문이 생겨서 이것을 연구한 결과 ‘중력', 즉 땅이 모든 것을 끌어당긴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만유인력' 즉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것을 적용시켜 보니까 100% 다 맞았습니다. 그래서 뉴턴의 만유인력이 절대 불변의 진리라고 인정을 받고 한동안 잘 우려먹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절대불변의 진리였던 뉴턴의 ‘만유인력설'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해서 박살나버린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쉽게 이야기해서 ‘만유인력설'은 지구 안에서만 적용되는 상대적인 법칙일 뿐이지, 무중력 상태의 우주공간에서는 맞지 않는 절대법칙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인류 정신사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며 엄청난 인식의 도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깨져 버린 것입니다. 철학이고 과학이고 19세기까지 전 세계 인류가 철썩같이 믿었던 진리가 깨져버린 것입니다. 단 하나의 시각차이, 관점의 차이에 의해서 말입니다. 이게 바로 틀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구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시각을 지구 안에서 본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 법칙은 그대로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깥에서 보니까 이 법칙이 우물안 개구리처럼 지구에서만 통용되는 것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상대성 이론'은 엄청나게 위대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우주의 개념이 실질적으로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세기까지의 과학은 우주의 과학이 아니라 지구 안에서만 통용되는 지구과학인 셈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또 연구해보니까, 광속 즉 빛의 속도조차도 상대성으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쏘는 빛이든, 반대편에서 쏘는 빛이든, 또 자동차가 달리면서 쏘는 라이트 빛이든, 정지 상태에서  쏘는 빛이든, 어떤 위치나 상태와는 상관없이 빛의 속도는 항상 일정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빛의 속도하고 똑같은 속도로 갈 수 있는 로켓에 내가 타고 있다면 그 빛이 가는 것 같이 보일까요? 안 가는 것 같이 보일까요? 안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는 서 있고 옆에서 빛이 지나가면 그 속도는 어마어마하게 빠르게 느껴지게 됩니다.


느끼는 것이 다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빛의 속도는 변함이 없지만 관측자의 상황에 따라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대불변의 진리라 믿었던 ‘만유인력'이 깨져버리고  ‘상대성이론'이 다시 진리가 되었는데 이 ‘상대성이론'마저 깨져 버린 것입니다. 양자론에 의해서 말입니다. 지금 현재 통일장 이론이 등장했는데 이 ‘통일장'은 사실 절대성인 것입니다. 아직 이 통일장이론은 물리학자들이 완성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상대성이론'이라는 것은 우주차원이지만 현상계 법칙인데 반해서 ‘양자론'에 들어가 보면 각기 다른 것처럼 보이는 모든 물리적 존재들이 구분이 안 되고 그냥 다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상대성이론도 현상계의 법칙일 뿐인 것입니다. 더 깊이 근원적인 측면으로 들어가 보니까 그것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상대성이론'에 있어서의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이 뭐냐하면 그 이전까지는 물질과 물질이 충돌을 해서 사건이 발생한다고 봤습니다.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그렇기 때문인데 아인슈타인이 이걸 뒤집어 버린 것입니다.


 사건과 사건이 부딪혀서 일어나는 것이 ‘물질'이라는 것입니다. 즉 사건이 근본이고 물질은 드러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옛날 텔레비전은 켜면 처음에 브라운관에 점이 나타나다가 화면이 나타났습니다. 이 점이라는 현상은 수없이 많은 빛의 파장이 충돌한 사건과 사건의 결합으로써 나타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에는 빛의 파장들의 충돌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한 점이나 화면이라는 현상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해서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이 현상이라는 것이 근본적 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과학이 지금 엄청나게 발전하기는 했습니다. 이 모든 물질의 근원을 밝히고 있잖습니까? 그런데 한계가 뭐냐하면 현상계의 입장에서만 밝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드러나 있는 것만 밝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상대성의 한쪽인 드러난 상태 즉 색일 뿐입니다. 그러면 드러나지 않은 상태를 밝힐 수 있습니까? 과학적으로는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는 것입니다. 뭐가 보여야 밝힐 것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 드러난 현상에만 매여서 절대성인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통일성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깨달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깨달음만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920년대에 ‘허블'이라는 천체학자가 ‘고성능 천체 망원경'을 발명하면서 우주를 관찰해 보니까, 지구가 소속되어있는 우주가 계속 팽창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팽창하고 있는지 알았느냐면, 예를 들어 일년전에 관찰했던 A 라는 별과 B라는 별 사이의 거리가 처음에는 1만 Km이었는데 일년후에 보니까 1만 2천Km로 늘어나 있더라는 것입니다. 팽창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이것을 근거로 계산해서 우주의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구가 속해있는 우주는 지금으로부터 약 150억년전에 한 점에서 빅뱅으로 탄생하여 앞으로 50억년 더 지나면 최대 팽창점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요? 수축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상대적 생멸 법칙에 의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진리적으로도 딱 맞는 것입니다. 우주의 한 사이클은 생, 장, 염, 장으로 가고 있습니다. 봄에 태어나서 여름에 성장하고 가을에 거둬들여서 겨울에 근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한 점에서 생해서 팽창하다가 극점에 도달하면 수축해서 우주의 겨울이 되면 다시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멸입니다. 크게는 두 단계 생, 멸이고 이것을 쪼개면 네 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인간도 유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이렇게 네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50억년후면 이제 우주는 수축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허블의 천체과학이 어디까지 밝혀내고 있느냐하면, 우주는 150억년 됐는데 지구가 생성된 것은 우주가 생성하고서 100억년이 지난 후인 지금으로부터 50억년전이라는 것입니다. 즉 지구는 우주가 생기고 100억년이 지나도록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구가 없었는데 인간이 있었겠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인간들이 말하고 있는 윤회, 천국, 지옥 이런 것들이 그 이전에는 적용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얘기가 나오느냐 하면 인간 중심주의 때문에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건 둘째치고 지구가 50억년전에 생겼는데 그럼 지구가 생기면서 바로 인간이 생겼습니까? 현생인류라 일컫는 호모 사피언스가 생긴 것은 불과 5,6 만년전입니다. 그 훨씬 이전, 생명체가 있기 이전의 지구는 뭐였을까요. 먼지 덩어리였습니다. 그 먼지 덩어리에 조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과학에서는 원자운동이라고 말하고, 인도철학에서는 지수화풍의 조건이라고 말하는데, 우주의 그러한 여러 가지 조건들이 생기면서 우주 조화기운에 의해 생명이 잉태 될 수 있는 조건의 별로 변화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태양계에서 지구 외의 다른 별들에는 아직 생명이 없다고 합니다. 그건 아직 생명이 활동 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되었다는 것이고, 지구는 생명체가 생할 수 있는 조건이 된 것입니다. 처음엔 조건이 안 되었던 지구도 그 조건이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 거기서 가장 최소단위의 세포가 생겨난 것입니다. 처음부터 인간 같은 이런 복잡한 것이 툭 튀어나올 수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단세포가 나온 것입니다. 이건 지금 존재하는 동물도 아니고, 식물도 아니고, 뭐도 아닌 상태입니다. 지구 자체가 먼지덩어리였으니까 광물이었지만 그 광물에서 뭔가 생명체가 생긴 것입니다. 조건에 의해 이놈이 자꾸 진화 발전해 가지고 식물도 되고 동물도 되는데, 식물이 됐던 동물이 됐던 이것의 최초 발생지는 바다였습니다. 오늘날의 인간이 된 영장류도 전부다 인간이 된 것이 아니고, 진화과정에 따라서 인간으로 되기도 했고 원숭이나 고릴라 등 여러 종류로 조건에 따라 갈라진 것입니다.


 최초의 단세포 단위에서 크게 식물과 동물로 나누어 졌지만 식물과 동물의 최초의 생명단위는 같은 것입니다. 또 이것은 어디서 시작했습니까? 먼지 덩어리 광물인 지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광물, 식물, 동물은 본래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수없이 많은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진화되고, 돌고 돌아서 오늘날의 인간이라는 고등동물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간들이 고등동물은 고등동물인데, 진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터무니없이 모자라는 고등동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흘러온 이 전체성을 모르고, 인간 중심주의로 모든 것을 맞추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에고입니다.


마치 뉴턴이 만유인력을 지구 중심으로 봐 버리니까 다 맞아 들어갔던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인간들이 우주의 역사나 이런 것들도 다 인간중심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 모든 걸 다 창조하고 마지막 날에 인간을 창조하면서 ‘우리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자'하고서 인간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이제 이 세상을 다스리거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렇게 쓴 것입니까? 인간이 인간 중심적으로 써 놓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걸 가지고서 “봐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느냐.” 이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사람들이 거기에 다 놀아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에고가 이런 것입니다. 우주의 역사로 볼 때 인간이 생긴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하는 것입니다. 한편 종말론자들은 인류의 종말이 마치 지구의 종말인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이 땅에서 공룡이 종말을 고했어도 지구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은 것처럼 설사 이 땅에서 인간이 전멸한다 할지라도 지구는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며 더 나아가서 지구 전체가 먼지가루로 날아가 버린다해도 우주는 흠집하나 나지 않은채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대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이러한 과학적 인식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백년전입니다. 과학이 실질적으로 나타나기 이전에는 모든 종교에 맹신했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2000년동안 전세계를 휩쓸었던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과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처녀가 예수를 낳았다고 하면 당연히 낳은 거지 그것을 어떻게 따질 근거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과학이 발전해서 보니까 그건 씨도 안 먹히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기독교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다 무너졌는데 한국에서만 아직도 떵떵거리고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다 무너졌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사상보다 한 수 위가 불교사상이라고 합니다. 불교사상은 현재 서양에서 더 매력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불교도 진리가 거의 다 왜곡되어 엉터리가 돼 버렸습니다. 무슨 개체적 영혼이 돌고 돕니까? 돌고 도는 것은 전체적 연기법칙인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여기 바다가 있습니다. 거기에 바람이라는 조건이 생기면 파도가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이 하나의 파도는 나누어질 수 없는 전체의 바다가 바람이라는 조건에 의해서 변화된 모습입니다. 이 파도 하나가 개체성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이 바다를 우주라고 보고 이 파도를 하나의 인간으로 본다면 하나의 인간에게 개체성이 있습니까?


 하나의 우주에서 지수화풍의 조건에 의해서 변화된 모습으로 생명체가 막 튀어 나왔습니다. 수도 없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파도는 바다 그 자체가 변화된 모습인데 바다를 벗어나 있습니까? 아닙니다. 잔잔하게 있을 때의 바다와, 파도치고 있을 때의 바다는, 잔잔하냐 파도 치냐 그 차이, 즉 변화의 차이만 있을 뿐 그 근본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우주에 생명체가 하나도 없었을 때 즉 잔잔한 바다와 같은 그때하고 이렇게 막 나투어진 모습하고 근본에 있어서 다릅니까? 모양을 이렇게 만들든 저렇게 만들든, 그놈이 그놈입니다.


그러면 윤회라는 건 뭡니까? 이 하나의 파도, 즉 잠깐 일어났다 사라지는 이 파도가 잠깐 일어났던 사이에 지나가던 배를 때려가지고 배가 부서졌습니다. 그러니까 “너 파도 이놈. 너 어떻게 배를 때려가지고 망가뜨리냐 이놈. 너는 잠깐 태어났을 때 나쁜 짓 했으니까 네가 지은 업에 의해서 다음에는 똥물로 태어나거라.” 이런 말인데 이 얼마나 한심한 착상입니까?


 여기다 개체성을 부여해 버리는 것입니다. 아니 파도가 배를 때리고 싶어서 때렸습니까? 또 대만에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지진 난 땅보고 “너 이놈 네가 감히 말이야, 지진을 일으켜 가지고 무고한 사람을 수백 명씩 죽여? 너는 그 벌로 지옥에 가서 고생을 해라.” 이럴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 없을까요? 땅에게 개체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개체성은 없지만 이게 사건을 저질렀습니다. 태풍이 불어가지고 한 마을을 싹 쓸어버렸습니다. “태풍, 너 잘 걸렸다. 너 이놈 지옥 가거라.” 그런다고 태풍이 지옥 갑니까? 분명히 태풍이 한 마을 사람을 다 죽였으니까 지옥을 가야 할 것 아닙니까? 인간은 가는데 태풍은 왜 안갑니까? 윤회라는 이런 엉터리 발상을 하고 있는 이유는 인간을 개체적 존재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세포를 개체화시키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음인데 이런 건 없습니다.


 우리 몸속의 세포는 무엇이 변해서 된 것입니까? 우리가 매일 섭취하는 음식이 영양분으로 변해서 세포가 되고 에너지가 됩니다. 그 음식은 다른 생명체입니다. 불교에서고 어디서고 ‘살생하지 말라'고 합니다. 살생을 안 하면 음식을 먹지 말라는 말이 되는데 식물도 생명, 동물도 생명입니다. 하다못해 물 한잔에도 엄청난 생명이 바글거리고 있습니다. 눈에 안보여서 그렇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살생하지 말라' 그러면 다른 생명체는 일체 먹지 말아야 되니까 어떡하라는 것입니까?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생하지 말라는 스님들 중에 굶어죽은 스님은 하나도 없습니다. 살생하지 말라고 떠드는 사람들 모두 잘먹고 잘살고 있습니다. 살생의 대상을 무엇으로 보냐하면 동물로 보는 것입니다. 생명의 개념을 동물로 국한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동물은 안 먹고 식물만 먹는데 식물은 왜 생명이 아닙니까? 생명체는 반드시 살아있는 다른 생명체를 취함으로써 생명이 유지됩니다. 이것이 생명의 조건인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우리가 쇠고기를 먹었다면 소가 이 몸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몸의 세포가 됐습니다. 그러면  소가 뭐로 변했습니까? 인간으로 변했습니다. 쇠고기를 먹었더니 그것이 영양분으로 변해서 세포를 형성시켰으니까 소가 뭐가 됐습니까? 인간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윤회입니다. 소가 사람이 되고 사람이 구더기가 되면서 돌고 도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땅속에 파묻히고 벌레들이 그 죽은 육체를 다 파먹습니다. 인간이 먹고 싼 똥을 거름주면 밭에 채소가 자랍니다. 그 채소를 다시 우리가 먹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조건, 돌고 도는 공생인 것입니다. 윤회가 있다면 이게 바로 윤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안에는 개체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인 것입니다. 무슨 영혼이 왔다갔다한다는 것입니까. 개체성은 죽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육체도 영혼도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돌고 도는데는 반드시 한 법칙이 적용되는데, 이것이 과학에서 얘기하는 에너지 질량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소는 사라졌어도, 죽어서 이것이 인간의 몸으로 가든, 땅속의 벌레가 먹든 다 흩어져서 또 다른 생명체로 변했습니다. 그러니 전체적으로 봤을 때 한 마리 소는 사라졌지만 질량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학과 진리체계에 있어서 같은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 안에서 돌고 돌뿐입니다. 이놈이 인간의 모습을 하든 개, 돼지의 모습을 하든 버러지의 모습을 하든, 무슨 모습을 하든 그건 상관이 없습니다. 모두 이 안에서 돌고 도는데 이 몸속에 간세포든, 창자세포든, 항문세포든 무슨 상관입니까? 다 ‘나'이지 않습니까? 우주 안에서 에너지 질량불변의 법칙으로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는 것입니다. 누가 죽어도 죽은 게 아닙니다. 그럼 죽은 게 아니고 뭐란 말입니까?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죽었다고 합니까? 죽은 게 아니고 변화한 건데 말입니다. 왜 이런 인식이 생기는 걸까요? 이 개체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나' 즉 주체적 실존인물로 착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나'라고 하는 것은 죽지 않습니다. 다만 변화할 뿐입니다.


 진리는 변함이 없지만 현상계는 변합니다. 저기 앞산을 산책하다 보면 묘지 위에서 꽃도 피고 풀도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게 다 시체양분  빨아먹고서 잘 크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 변하는 것입니다. 현상계는 모두 변합니다. 변하되 죽는 것은 없습니다.


 이제 앞으로 250억년 후가 되면 이 우주가 사라진다고 과학자들이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지금으로부터 50억년만 지나도 지구가 없어집니다. 우주가 사라지기 이전에 지구가 먼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지구가 사라지는데 그 안에 들어있는 인간은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 인간들은 지금 다른 별나라로 가겠다고 준비하고 있답니다. 다른 별에 가서 살려고 말입니다.


 지구가 어떻게 없어지냐 하면 태양이 팽창을 해서 태양주변에 있는 행성들이 전부 태양으로 빨려 들어가 흡수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구에 의해 태어났고 지구와 더불어 살고 있는 지구의 세포인 인간도 같이 사라지게 됩니다. 전체와 부분은 하나입니다. 전체를 통째로 인식하는 것과 개체 하나에 매달려 인식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전체를 하나로 보는 사람은 하나하나의 개체를 ‘나'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무수히 교체되고 계속 바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인간 하나가 죽어서 사라지는 게 슬플까요. 슬플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개체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슬픈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죽은 것처럼 보이니까 슬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죽은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 태어난 자가 있습니까? 태어난 자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체 덩어리가 계속 모양을 바꿔가며 변화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저것으로, 저것이 이것으로 계속 이렇게 말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하는 과정에서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사건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의식이 소설을 쓰는 것입니다.


 이 우주 현상계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의식이 만들어 냈습니다. 의식이 만들어 놓고 의식이 의식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의식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의식의 원맨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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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1.11.24 00:14

    첫댓글 많이 길어 죄송합니다.~
    도중 인공눈물도 넣고 인내심을 가지시어...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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