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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도(生死島) 3-12
<2>
『나는 더 이상 너의 하수인 노릇을 하지 않겠다!』
공야승의 어조는 사공영호를 노려보는 그의 눈빛만큼이나 단호
했다. 사공영호가 그런 공야승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노
성을 터뜨렸다.
『너는 설마 네 입으로 한 약속을 스스로 깨뜨리겠단 말이냐?
스스로 신의를 저버린 소인배가 되려는 거냐?』
공야승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신의란 무인으로서 제일 먼저 지
켜야 할 덕목이었다. 그것을 저버린다는 것은 스스로가 쌓아 온
명예를 버린다는 것이나 같았다. 공야승 같이 자부심이 강한 무
인일수록 그것은 죽음보다 견디기 어려운 치욕이기도 했다.
침묵을 지키는 공야승을 바라보며 사공영호가 다시 은근한 말
로 달랬다.
『공야형, 나는 그대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는 것을 잘 알고 있소. 내가 그대를 서운하게 대접한 적이 없는
데, 그대가 나를 배신한다면 그건 스스로를 욕되게 하는 거요.』
공야승이 길게 탄식하고 어두운 얼굴로 사공영호를 바라보았
다.
『나는 과거 그대에게 목숨의 빚을 진 일을 잊지 않고 있소.』
그러나 공야승의 눈에는 여전히 승복하지 않겠다는 반의(叛意)
가 가득했다. 그것을 본 사공영호가 다시 간곡한 어조로 입을 열
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소. 공야형, 당신이 약속한 십 년의 기한이
몇 달 밖에 남지 않았는데 지금 그것을 깨뜨린다면 그 동안의 세
월이 너무 아깝지 않겠소?』
십 년 전, 공야승은 운남(雲南)에서 천하제일 독문(毒門)을 꿈
꾸던 오독문(五毒門)과 부딪친 적이 있었다. 그들이 강호인들을
납치해서 독강시(毒疆屍)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단신으로
오독문의 담을 허물고 걸어 들어간 것이다.
사흘 밤낮에 걸친 혈전으로 오독문은 초토화가 되었다. 그리고
공야승은 드디어 독인(毒人)의 경지에 들어 있는 궁주 혈천독조
(血天毒祖) 염리파(鹽璃巴)와 마주설 수 있게 되었다. 그가 거느
리고 온 다섯 명의 오독신로(五毒神老)를 베고 염리파와 꼬박 하
루에 걸친 대 격전을 치렀다. 공야승은 가까스로 염리파의 독강
(毒 )을 부수고 그의 목을 쳐버릴 수 있었으나, 그 또한 지독한
독장(毒掌)에 가슴이 눌리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담을 부수고 걸어 들어간지 나흘 뒤, 공야승은 불길 속에서 재
가 되어 가는 오독문을 등뒤로 하고 적이산(狄荑山)의 독림(毒
林)을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는 고강한 내력으로 가슴에 남아
있는 염리파의 칠운독장(七雲毒掌)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러나
끝내 그것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남반강(南盤江)을 건너 가까스로 귀주(貴州) 땅을 밟았을 때
공야승은 기어이 가슴의 독기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한 줌의
독수로 녹아갈 위험에 처했다. 그 때 귀주에 은밀히 나와 있던
생사도의 인물들에 의해 발견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아직 그
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야승은 그들의 영약으로 가까스
로 석 달 간 더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공영호가 그 소식을 듣고 밤을 낮삼아 달려왔다. 우강(右江)
을 타고 내려오던 수하들과 장족(壯族)의 땅에서 만난 그는 세
차례에 걸쳐 공야승에게 자신의 피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일
년 뒤에 공야승은 생사도에서 가까스로 살아날 수 있었다.
사공영호의 희생과 헌신 때문에 되찾은 목숨이었다. 공야승은
그에게 절하고 구명지은에 보답하기 위하여 앞으로 십 년 간 그
의 수하가 되어 견마지로를 다하겠다고 맹세했다. 서로 엎드려
절하고 나서 나이를 따져보자, 공야승이 사공영호보다 두 살이
많았다. 사공영호는 공야승을 형이라 불렀고, 공야승은 그를 도
주로 깎듯이 공경했다. 그렇게 십 년을 한결같이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공야승은 자신의 명예보다도 사공영호의 악랄한 수단 앞에서
수백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주, 많은 말들은 나를 더 괴롭게 할 뿐이요. 그대가 마음을
돌리지 않는 한 내가 이제 그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이요!』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지, 공야승이
받아랏! 하고 소리치며 일검을 뽑아 쳤다. 짜자작 하는 소리와
함께 수십 줄기의 묵광이 부채 살처럼 퍼져 사공영호의 전신으로
뻗어갔다. 헛, 하고 숨을 들이킨 사공영호가 이제까지의 여유롭
던 태도를 버리고 신중하게 일장 일장을 쳐내기 시작했다.
그 엄중한 장력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걸어 들어가는
공야승의 손에서 묵검이 곧 부서지고 말 듯 떨렸다.
『차핫!』
기력을 쥐어짜 외친 공야승이 검과 일체가 되어 한 줄기 묵빛
섬광으로 사공영호에게 부딪쳐 갔다.
잠깐 동안의 운기조식으로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육초량은
경이와 경탄이 가득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대의
두 초인들이 사력을 다해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일생에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굉장한 광경이었다.
검신 공야승이 뿌려대는 검기는 일검 일검이 태산처럼 무겁고
엄중했다. 적수공권으로 그것에 맞서고 있는 사공영호의 손속 또
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의 권각은 바람처럼 가볍고 빠르며,
창 끝처럼 예리했다.
공야승의 그물처럼 덮어 오는 검기 속에서 사공영호는 마치 허
깨비인 듯 가볍고 경괘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운신의 절묘함
과, 권각장지(拳脚掌指)를 번갈아 섞어 쳐내고 있는 손속의 신랄
함이 육초량의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야합!』
『핫!』
용의 으르렁거림처럼 낮고 힘찬 기합성이 끊임없이 울려 나왔
다. 순식간에 일백 여 초의 공방을 주고받은 그들 두 초인의 머
리 위에서 무럭무럭 흰 김이 피어올랐다. 불과 일각 여의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그들은 전력을 다하여 번개같이 오가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없이 넘나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앗!』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사공영호의 일장이 폭풍처럼 쳐 나왔다.
공야승의 검강이 그것과 충돌하자 수백, 수천 갈래로 쪼개진 기
파(氣波)의 여력이 소나기처럼 팔방을 가득 뒤덮고 쏟아졌다. 그
속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공야승의 모습이 보였다. 점차 그는 사
공영호의 막강한 내력과 손속에 밀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기회를
잡은 듯, 그림자처럼 바싹 따라붙은 사공영호의 일수 일수가 공
야승의 검기 속을 헤집으며 찍고 때리고 눌러왔다.
이를 악문 공야승이 두 발에 부쩍 힘을 주어 버티며 더욱 신중
하게 일검 일검을 쳐내기 시작했다. 소용돌이치는 권장의 강기
속에서 뇌전처럼 작열하고 있는 검강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한
번 기울기 시작한 열세를 만회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죽기를 각
오한 공야승의 처절함이었지만, 어느덧 몸이 의지를 따라주지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육초량은 더 이상 지켜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
도 지하 동굴 곳곳에서는 군웅들이 살육 당하고 있을 것이었다.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더 많은 생명들이 덧없이 죽어가는 것이다.
운기행공을 마친 육초량이 벌떡 일어섰다. 이 모든 음모의 원흉
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그를 쳐야만 사도(死島)를 생도(生島)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생각이 그를 서두르게 했다.
『공야 선배, 가세하겠소!』
『좋다!』
우렁차게 대답한 공야승이 옆을 비웠다. 육초량의 무시무시한
검격이 씨이이- 하는 휘파람 소리를 내며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뇌전처럼 작열해 가는 백색 검강의 강렬함이 사공영호를 크게 놀
라게 했다.
『으헛!』
비명을 터뜨린 그가 풍차처럼 한 바퀴를 돌아 물러서며 간발의
차이로 그 일검을 피했다.
카카캉-!
육초량의 검강이 석벽 속에 한 자 깊이의 예리한 검흔(劍痕)을
내며 훑고 지나갔다. 돌가루들이 쭉 패인 흔적을 따라 우수수 흘
러내렸다. 사공영호의 눈에 초조해하는 기색이 어렸다. 공야승과
육초량의 합격을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한 그가 맹렬하게 내력을
끌어 올렸다.
『끼야아-!』
괴수가 울부짖듯 엄청난 외침을 터뜨린 사공영호가 두 손을 엇
갈렸다 활짝 펼치며 필생의 힘을 다한 일장을 때렸다.
『파천주지통기(破天柱地通氣)!』
공야승이 놀란 외침을 터뜨렸다.
콰콰콰콰-!
엄청난 폭풍기가 육초량과 공야승을 향하여 해일처럼 밀려들었
다. 그 흉맹함을 느낀 육초량이 신형을 뽑아 뒹굴 듯 뒤로 뛰어
물러섰다. 갑자기 벌어진 육초량과 사공영호 사이의 공간으로 공
야승이 선뜻 뛰어들었다. 부서지도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공야 선배!』
크게 놀란 육초량이 부르짖은 순간, 공야승이 사력을 다해 쳐
낸 일검이 사공영호의 통기공(通氣功)을 뚫고 파고들었다.
콰아앙-!
화포가 터지는 듯한 폭음이 귀를 멍멍하게 했다. 그리고 돌덩
이처럼 퉁겨져 날아가는 공야승의 모습이 보였다. 산산이 부서져
버린 그의 가슴에서 선연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와 허공을 물들였
다. 그 사이로 사공영호의 왼팔이 어깨 죽지에서부터 깨끗하게
절단되어 떨어졌다.
『우욱!』
신음을 흘려낸 그가 오른 손으로 허전해진 왼쪽 어깨를 누르며
몸을 날려 동굴의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선배!』
공야승의 처참하게 부서진 몸이 거칠게 석벽에 부딪쳤다가 주
르륵 미끄러지고 있었다. 육초량이 그걸 보며 몸을 날렸다. 그가
설마 사공영호와 동귀어진을 생각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육초량이었다. 그의 비통한 부르짖음이 석실 안에 가득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 * * *
『크하하, 죽여라. 모두 죽여라!』
십여 년 전 무림에서 벽력대신(霹靂大神)으로 이름을 날렸던
철장패천(鐵掌覇天) 장추왕(張樞王)이 광기에 사로잡혀 외치고
있었다. 그가 연신 손에 든 호각을 날카롭게 불었다. 그 소리에
흥분한 듯, 십여 구의 활강시들이 광마(狂馬)처럼 날뛰며 군웅들
을 살해하고 있었다. 흥건한 피로 젖어 있는 석실 바닥에는 이미
사십여 구의 처참한 주검들이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찢긴
채 여기저기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끼야아-!』
그 석실의 지옥도 한쪽에서 발악하는 듯한 괴성이 터져나왔다.
또 하나의 강시 같은 몰골을 하고 있는 귀문의 마백조였다. 그의
철조(鐵爪)가 활강시 하나를 잡아 그 목을 꺾고 있었다. 우두둑
거리는 기음과 함께 활강시의 목이 삭정이 부러지듯 꺾여 돌아갔
다. 그러나 여전히 살아 있는 갈고리 같은 손은 사정없이 마백조
의 금강불괴를 깨뜨리며 어깨 깊숙이 박혀들고 있었다.
『끄으으-』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리는 마백조의 옆구리를 다시
꿰뚫어온 골조(骨爪)가 그의 갈비뼈를 단단히 움켜쥔 듯, 부드득
거리며 그것이 뽑히는 소리가 났다. 겅중거리며 다가온 또 하나
의 활강시가 공포와 고통으로 일그러진 마백조의 얼굴 복판에 다
섯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퍽 하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마백조의
머리가 산산이 터져 흩어졌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무너져 버린 마백조를 짓밟은 활강시들
이 회색 빛 눈을 두리번거리며 다시 군웅들에게로 겅중겅중 뛰어
달려들었다.
『아악-!』
그 지옥도 속에서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이 처절함을 더하며 울
려 퍼졌다.
『옥소저!』
초유성이 비명처럼 외치며 달려왔다. 활강시 하나가 새파랗게
질린 청향의 어깨를 잡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갈(喝)!』
분노의 고함을 터뜨린 초유성의 몸에서 한 줄기 차가운 빛이
뻗어 나갔다.
『끼아악!』
마른 장작이 쪼개지듯, 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단번에 목에
서 가슴까지 비스듬히 잘려진 마물이 괴이한 비명을 남기고 무너
졌다. 역겨운 냄새가 확 번졌다.
『초대가, 나는 정말... 무서워요...』
새파랗게 질린 청향이 초유성의 품속으로 뛰어들어 경련을 일
으켰다. 초유성의 얼굴에 절망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마백조의
처참한 죽음을 본 탓이었다.
세 개의 석실을 지나오는 동안 마백조와 자신이 연수하여 부수
어 버린 활강시들이 무려 이십여 구나 되었다. 그러나 석실 안에
는 아직도 여섯 구의 마물들이 남아 날뛰고 있었다. 그것들을 피
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기에 바쁜 군웅들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었다. 초유성은 이제 옥청향을 보호하는 한편, 자기 혼
자서 저 마물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맥없이 서서 육신이 갈가리 찢기는 처참한 죽음
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좋아, 가는 데까지 가 보는 거다!』
부드득 이를 간 그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옥청향을 밀어내고
돌아섰다.
카캉-!
그의 유수검이 다시 한 구의 활강시를 동강냈다. 군웅들은 이
제 겨우 세 명이 남아 가까스로 한 구의 활강시를 붙들어 놓고
있었다. 어깨 너머로 거친 숨을 헐떡이는 초유성의 눈에 나머지
네 구의 마물들이 겅중겅중 뛰며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절망적
이었다.
(이대로는 일 각을 견디기 힘들다.)
그의 눈에 암담한 죽음의 그림자가 뒤덮였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는 몸이었다. 기력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절망감이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검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겨워
진 이 상태가 마지막이라고 생각되었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온몸을 떨고 있는 옥청향을 돌아
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육신이 저 끔찍한 마물들에게 처참하게
찢길 것을 생각하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으하하하... 이곳에서도 못된 마물들이 장난질을 치고 있었구
나!』
석실을 뒤흔드는 굉렬한 외침이 들려왔다. 번쩍 정신을 차린
초유성이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활강시들이 쏟아져 들어왔
던 시커먼 동굴 속에서 두 사람이 뛰어 나오고 있었다. 봉두난발
한 몰골의 괴인과 잿빛 승포 자락이 어지럽게 찢겨 너덜거리는
젊은 중이었다.
초유성이 놀라고 있는 사이에 그들은 각기 흩어지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뛰어 나갔다. 거대한 체구의 괴노인은 섬전 같은 기세
로 활강시들을 덮쳐갔고, 젊은 중은 곧장 철장패천(鐵掌覇天) 장
추왕(張樞王)에게 달려들었다.
『아, 단목 할아버지! 대방 스님!』
그들을 본 옥청향이 반가운 외침을 터뜨렸다.
콰아앙-!
단목굉의 자전신강이 그대로 정면의 활강시 하나를 산산조각
내 버렸다.
『크하하, 이 마물들. 노부가 네놈들을 과자처럼 부수어 주마!』
그가 두 손을 휘두를 때마다 그의 막강한 자전신강이 사방으로
뇌전처럼 방전되어 터져 나갔다. 그 앞에서 다시 한 구의 활강시
가 그의 말처럼 마른 과자처럼 부서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초
유성은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대방의 몸에서 펼쳐지는 소림의 칠십 이종 절학은 장추왕을 눈
코 뜰 새 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비쾌한 신법으로 파고들며 쳐내
는 월강선매도(月降禪梅刀)에 장추왕이 전력을 다 해 뻗어낸 파
옥장(破玉掌)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비스듬히 한 걸음을 내
디뎌 옆으로 파고든 대방의 일지가 장추왕의 협복을 꿰뚫어 버렸
다. 탄지신통(彈指神通)이었다.
가죽이 뚫리고 혈육이 흩어지는 소리가 터져 나오고, 뜨거운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아미타불!』
이미 살계를 크게 열기로 작정한 대방이었다. 그의 손속에는
추호의 사정도 없었다.
『크으으-!』
장추왕이 처절한 신음을 흘리며 몸을 날려 동굴 속으로 도주해
갔다.
『업(業)을 지고 피해갈 곳은 아무 곳도 없소!』
우렁차게 외친 대방이 창룡출해(蒼龍出海)의 경공 신법으로 땅
을 박차고 쏜살같이 그 뒤를 쫓아 동굴 안으로 뛰어들었다.
『크하하하, 통쾌하다, 통쾌해!』
일 장으로 또 한 구의 활강시를 으깨 놓은 단목굉이 미친 듯한
웃음을 터뜨리다가 힐끔 옥청향을 돌아보았다.
『헤, 고것, 볼수록 더 예쁘단 말이야. 히히 귀여운 것아. 놀아
주고 싶다만 보다시피 이 할애비가 바빠서 안 되겠으니 서운해하
지 말아라, 히히...』
볼을 잡아 늘여 우스꽝스런 얼굴로 히히 웃던 그가 눈을 부라
리며 정색을 했다.
『노부는 저 어린 돌중 놈을 끝까지 따라다니며 성가시게 할 작
정이다. 공지 그 땡초에게 당한 수모를 제자 놈에게 갚아줄 생각
이거든.』
옥청향이 그런 단목굉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체 이 노인이
미친 건지, 제 정신인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새끼 중놈아. 노부를 따돌릴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포기해라!』
대방이 사라진 곳을 향해 호통을 친 단목굉이 선뜻 몸을 날리
며 초유성에게 시선을 던졌다.
『기생 오래비같이 생긴 놈아,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라. 죽
든지 살든지 네놈 맘이다!』
『......』
질풍 같이 몰아쳤다가 꺼지듯 사라져 버린 그들 두 사람이 초
유성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뒤죽박죽으로 얽혀
버린 그 상황을 초유성은 언뜻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공할 위력
을 보여 주었던 노괴와 젊은 중에 대한 깊은 인상을 가슴속에 담
고 있는데 옥청향의 날카로운 부르짖음이 귓전을 두드려 왔다.
『악, 초대가!』
번쩍 정신을 차린 초유성은 비로소 등뒤에 와 닿고 있는 싸늘
한 한기를 느끼고 크게 놀라 껑충 뛰었다. 옆구리에 가해지는 불
같은 통증이 그를 신음하게 했다.
끼기기-
역겨운 기음을 흘리며 다가서는 활강시의 손아귀에 한 움큼의
살점이 쥐어져 있었다. 초유성은 자신의 방심을 뼈저리게 뉘우쳤
다. 단목굉과 대방의 놀라운 무위에 잠시 얼이 빠져 있었던 것이
다. 죽든지 살든지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하라고 소리쳤던 단목
굉의 말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그는 대방의 뒤를 쫓아가기에 바
빠 미처 두 구의 활강시를 처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그것들
이 사기(邪氣)를 섬뜩하게 뿌리며 다가들고 있었다.
이를 악문 초유성의 일검이 벼락처럼 뿌려졌다. 뼈를 가르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허리가 양단된 활강시의 상체가 기우뚱하고
앞으로 떨어지며 초유성의 허리를 꽉 붙잡아 버렸다. 갑자기 상
체를 죄어오는 그 엄청난 힘에 기겁한 초유성이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족쇄에 채워진 듯 두 팔을 둘러 단단히 조여 온 활강시는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움직임을 잃은 그것이었지만 한 번 조여
버린 팔이 그대로 굳어 버린 듯 펴지지 않았던 것이다.
초유성은 자신과 한 몸인 듯 붙어 버린 그 끔찍한 마물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눈이 두려움과 당황으로 부
릅떠졌다. 또 한 구의 활강시가 괴이한 비명을 지르며 겅중겅중
뛰어 청향에게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망설이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공포에 질린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있는 청향의 얼굴
이 크게 다가왔다.
『이익!』
초유성이 두 발로 땅을 박차고 눈앞의 석벽을 향해 맹렬하게
몸을 던져 부딪쳐 갔다.
꽝-!
석벽이 뒤흔들리며 돌가루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 충격으로
몸에 붙어 있던 활강시의 상체가 산산이 부서져 떨어졌다. 그리
고 남은 여파가 초유성의 몸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는 울컥울
컥 선혈을 토해내며 아뜩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흐릿
해진 시야 속에 막 청향의 어깨를 잡아가고 있는 활강시의 모습
이 보였다. 너무 늦어버렸다는 생각이 그를 절망하게 했다. 뒤흔
들려 버린 내부의 기혈 때문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두어 번 더
숨을 가라앉혀야 비로소 기혈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하
지만 그 때는 이미 청향의 고운 몸이 저 마물의 무정한 손에 갈
가리 찢겨 있을 것이다.
그가 더 바라보지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아 버렸을 때였다.
『마물, 감히 그녀에게 손을 대다니!』
벼락처럼 뛰어든 그림자 하나가 노하여 외치며 청향의 어깨에
가벼운 일장을 날려 그녀를 밀어냈다. 그가 적음상이라는 것을
알아본 초유성이 아,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이 때처럼 그의 존
재가 고맙게 여겨진 적이 없었다.
『적음상! 언제까지 쥐새끼처럼 도망만 다닐 거냐!』
동굴 안쪽에서 흉악한 소리와 함께 다시 한 사람이 뛰어 들었
다. 그의 눈에는 오직 적음상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주변의 상황
이 어떤 건지 살펴 볼 생각도 없이 그가 무작정 손을 뿌렸다.
피우웃-!
다섯 줄기의 눈부신 백광이 벼락처럼 적음상의 몸에 쏘아졌다.
그의 그림자가 되어 버린 마비도 독고월이었다. 적음상의 눈에
갈등이 번쩍였다. 독고월의 백옥비를 피하면 활강시의 손에 청향
이 떨어질 것이었고, 청향을 구하자면 독고월의 백옥비를 피할
수가 없었다.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활강시의 팔이 청향의 옷깃
을 거머쥐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인간다운 사랑을 느껴본 옥청향이었다. 마음 속에 가라앉
힐 수 없는 열망으로 남아 자신을 불태우던 그녀였던 것이다. 그
런 그녀의 끔찍한 죽음을 본다는 것은 색화랑다운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그를 번쩍 움직이게 했다.
『아하하하-!』
처절한 웃음소리와 함께 적음상이 그대로 청향을 덮쳐갔다. 그
가 어깨로 청향을 밀어내며 동시에 극쾌무변(極快無變)한 일검을
쳐냈다. 한 줄기 번갯불이 곧장 뻗어 나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카카캉-!
눈앞에서 요란한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역겨운 악취를 풍기는
흑혈이 분수처럼 쏟아졌고,
『끼아악-!』
정수리부터 두 쪽으로 쪼개진 활강시가 엄청난 괴성을 터뜨리
며 좌우로 나뉘어 무너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퍽, 퍽 하는 섬뜩
한 소리가 적음상의 온몸에 작열하였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박
혀든 다섯 자루의 백옥비들이 흔적도 없이 그의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때마다 충격으로 떨며 밀리던 그의 몸이 청향의 품
에 안기듯 쓰러졌다.
『적형!』
초유성이 비통하게 외치며 몸을 날려왔다. 빠르게 풀려가고 있
는 그의 눈동자가 멍하니 옥청향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리고 눈을 감지 못한 채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 것이었다. 동굴
입구에서 독고월이 멍한 얼굴로 그런 적음상의 최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내와 어린 딸의 원혼을 마비 속에 간직한 채 오직 색화랑 적
음상의 뒤를 쫓아 지난 팔 년 동안 천하를 주유해 온 그였다. 그
뼈에 사무친 원한이 이처럼 덧없이 끝났다는 것이 실감되지 않았
다.
(이런 것인가?)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 가득 허무한 기색이 떠올랐다. 마음 한
곳이 갑자기 무너져 내리는 듯한 허탈감이 독고월을 흔들었다.
그가 쓰러질 듯 비틀거리다가 석벽을 짚고 겨우 버티어 섰다.
지난 팔 년은 적음상에 대한 원한과 불타는 복수심으로 살아온
날들이었다. 그것이 독고월에게는 생명이었고, 기운이었다. 그리
고 드디어 꿈속에서도 이를 갈며 그리던 복수를 했다. 그런데 갑
자기 밀려든 마음의 공허가 그의 존재를 뿌리에서부터 흔들어 놓
는 것이었다.
이제는 삶의 의미를 한 순간에 잃어버렸다는 박탈감이 독고월
을 견딜 수 없게 했다. 그는 자신의 가슴속에서 텅 비어가는 허
무를 보았다. 그것이 미칠 듯한 허전함으로 그의 머리 속을 어지
럽혔다.
『우와아악-!』
멍하게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지더니 엄청난
절규가 터져 나왔다. 독고월이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몸부림
쳤다. 그의 눈이 이미 생명을 잃은 적음상의 그것을 닮아가듯 허
옇게 풀리고 있었다.
피를 토하듯 부르짖은 그가 갑자기 몸을 돌려 동굴 속의 어둠
을 바라보고 미친 듯 달려갔다. 그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웃음
소리만 흐느끼듯 들려오다가 점점 멀어지며 사라졌다.
『아아... 당신의 운명은 너무도 불쌍하군요.』
적음상의 주검을 내려놓으며 청향이 쓸쓸히 독백했다. 주화입
마로 인해 본의 아니게 색마가 되어 모두의 경멸과 질시를 받으
며 음지만을 딛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의 편집증적인 집념이
끔찍하고 무섭기만 했는데, 그런 적음상이 지금은 자신을 구해
주고 대신 죽은 것이다. 옥청향은 적음상의 주검 앞에서 미움과
연민의 복잡한 감정으로 그를 보며 울었다.
『청향, 그대는 청향이 아닌가?』
갑작스럽게 들려온 고함 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고개
를 돌린 그녀의 눈 속에 거칠고 황량한 사나이의 모습이 가득 차
왔다. 육초량이었다.
『아, 육가가!』
청향이 부르짖듯 외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육초량이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바라보며 주춤주춤 다가오고
있었다.
『그대는 정말 청향이로군. 그대가 어찌 이런 곳에...?』
처절한 사투를 벌이며 이곳까지 왔다는 것을 그의 지친 어깨와
몸에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육가가!』
날 듯이 달려간 청향이 그의 땀과 피에 젖은 가슴속으로 파고
들었다.
『어찌 이 지옥 같은 곳에 그대가...』
왁,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옥청향의 가냘픈 어깨를 감싸안고
육초량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에 석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처참한 주검들이 보였다. 마백조도 있었고 적음상도 있었다. 물
어보지 않아도 이곳에서 벌어졌을 참극을 알 수 있었다. 그 속
에 청향이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이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대도 역시 이곳에 와 있었군.』
그런 육초량과 청향을 바라보며 초유성이 우울한 음성으로 말
했다. 비로소 그의 존재를 발견한 듯, 육초량이 아, 하고 탄성을
발했다.
『초형, 형께서도 살아 있었구려!』
초유성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모두 다 죽었지. 마백조도, 적음상도... 하지만 나는 아직 죽
을 수가 없었다네.』
육초량이 품속에서 그칠 줄 모르고 울음을 터뜨리는 청향의 어
깨를 부드럽게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유성은 아직 그가 찾고
있는 여인, 수련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도 이곳 어딘가에 있을 것이오. 함께 찾아보도록 합시
다.』
안타까움으로 말하는 육초량의 얼굴을 보던 초유성이 희미하게
웃었다.
<3>
『그런 일이 그대에게 있었을 줄이야...』
종알종알, 울음 반, 투정 반으로 그동안 자신의 지나온 날들을
털어놓는 청향이었다. 그녀의 끝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육초량은
몇 번이나 놀랐는지 몰랐다. 그녀가 적음상의 손에 잡혔었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긴장으로 온몸을 떨기도 했다. 육초량이 두 눈
가득 뜨거운 고마움을 담은 시선으로 초유성을 바라보았다.
『초형, 무어라고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소제는 초형
에게 너무나 큰 빚을 졌소이다.』
『쓸데없는 소리.』
짐짓 얼굴을 굳히고 바라본 초유성이 쓸쓸한 미소를 띄었다.
『그녀를 무사히 자네에게 돌려주었으니 나의 소임은 다한 걸
세. 다시는 그녀가 자네를 찾아 강호를 주유하는 고생을 하지 않
도록 하게.』
그들이 서로 뜨거운 눈빛을 교환하고 있을 때였다. 하나의 작
고 섬세한 그림자가 비쾌하게 석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 당신은 육공자가 아닌가요? 당신을 찾아다녔는데 이곳에
서 만나는군요!』
여인의 교성이 카랑카랑하게 석실 안에 울려 퍼졌다. 그녀를
확인한 육초량이 크게 놀라 어깨를 굳혔다.
『그대는... 냉소저!』
그의 입에서 다시 한 번 놀람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육가가, 무사하셨군요!』
외치며 그에게로 뛰어들던 냉여옥이 비로소 청향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흥, 내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군.』
그녀가 차갑게 냉소하고 싸늘한 눈으로 육초량과 청향을 노려
보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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