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름한 삼겹살 집 앞에서 희연이 말했다.
이는 ‘소주에는 삼겹살’ 이라는 희연의 주장을, 그가 흔쾌히 받아들인 결과였다.
“ 이모, 여기 삼겹살 주세요. 소주 먼저 한 병 주시고요.”
희연은 소주가 오자, 냉큼 집어 들고는 닉에게 따라주며 영어로 물었다.
“ 주량이 얼마나 되세요?”
“ 오! 희연, 영어로 대화가 되나?”
“ 네, 그러니까 지금부터 한국말 안하기에요. 자리가 좁아서 얘기가 다 들리거든요.”
“ 오케이, 희연은 주량이 어때? 나는 소주 한 병 정도마시면 되는데?”
“ 좋아요, 저도 그 정도 마시면 될 것 같으니까, 우리 새치기 하지 말고 사이좋게 한 병씩 마셔요.”
“ 새치기?”
“ 네, 큰 형제들 끼리 오면 자기가 먹고 싶은 양을 미리 말하고,
그만큼만 먹는 게 우리 규칙 이예요. 중간에 바꾸기 없어요. 오늘은 한 병 씩 알았죠?“
“
그럼 더 마실 수도 있단 얘기야?”
“ 그럼요. 서너 병은 까딱없어요. 하지만 형제 이외의 사람과는 한 병 이상 금물.”
“ 규칙이 많군.”
“ 그럼요. 수시로 만드는 걸 다 모아 놓으면 책 한 권은 나올 걸요?
별별 이상한 규칙이 다 있어요. 그래도 우린 미래 자산이라고 생각하죠.”
“ 영어는?”
“ 신부님께서 미국분이세요. 외국으로 나가실 일이 있으면, 표를 꼭 한 장씩 더 부탁하셔서,
누구라도 데리고 다니셨죠. 죽어라고 공부해도, 언어라는 것이 따라가기 힘들잖아요.
‘집안에서는 영어로만 말하기’라는 규칙이 있죠.
다녀온 사람은 자신이 배운 걸 다시 정리해서 가르칠 의무가 있고요.
다들 돈 안들이고 대학을 졸업했죠.
저도, 한국에서 제일이라고 하는 곳을 사년 장학금으로 다녔어요. 전공도 영문과고요.“
“ 힘들었겠군.”
“ 당연하죠, 언니 오빠들도 시험 때가 되면, 코피는 기본이고 퍽퍽 쓰러져가죠.
그걸 보면 막내까지 미친 듯이 공부하게 되는 거예요.“
“ 스물 아홉 중에 희연은 몇 번째? ”
“ 제가 딱 십 오번 이예요. 저는 ‘세상의 중심’ 이라고 그러고 형제들은 ‘깍두기’라고 부르죠.”
“ 깍두기?”
“ 와! 모르는 말도 있으시네요. 깍두기란 애들 끼리 편 갈라서 놀 때,
있으나마나하기 때문에 우리 편도,너희편도 되는, 음, 일종의 교집합이죠.”
닉은 희연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 왜 나에 대해서 묻지 않는 거지?”
“ 물었잖아요. 독신인지. 직업이 뭔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 그럼 내가, 유부남에 마피아에, 음 외국인이었다면 이렇게 같이 못 있었을까?”
“ 당연하죠. 규칙 위반이 두 개나 있는데요. 제가 화장실 가는 척하고,
희랑오빠한테 전화하면 오 분 내로 날아와서 상황 정리 들어가는 거죠.”
“ 그럼 일차심사는 통과 했다는 건데, 다른 질문은?”
“ 종교는요?”
“ 카톨릭이라면 무난하겠지. 영국은 로마 카톨릭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 아! 들어 본 것 같아요. 시녀와 결혼하기 위해 종교를 바꾼 왕이 있었죠. 누구였죠?”
“ 헨리 8세. 시녀는 앤 불린.”
“ 아저씨가 왕이었다면, 헨리8세 처럼 사랑을 위해, 국가의 종교도 바꿀 수 있었겠어요?”
“ 이것도 시험?”
“ 음, 그렇다면요?”
희연은, 소주잔을 들고 생각에 잠긴 닉을 처음으로 자세히 바라보았다.
옅은 갈색이라고 생각했던, 웨이브 진 단정한 머리는, 짙은 금발이었고
짙은 갈색의, 눈썹과 긴 속눈썹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라면 누구나 부러워 할 것 같은, 끝이 약간 휜 긴 속 눈썹에 살짝 가려진,
황금 빛 눈동자는, 정말 특이하고도 아름다워 보였다.
반듯한 콧날은 그를 귀족적으로 보이게 했고.
아랫입술에 살짝 팬 보조개는, 그의 길고 도톰한 입술에 섹시한 느낌을 더해 주었다.
피부도, 보통 외국인 들은 퍼석해 보이는 데 반해, 그는 그야말로 윤기가 흘러 보였다.
그러고 보니 닉 사이먼은 굉장한 미남이었다. 영화 배우였나?
키도 185이상은 되어 보이고 체구도 꽤 나가 보인다.
희연은 갑자기 궁금증이 일어, 길게 고민하는 그의 사색을 중지시켰다.
“ 아저씨. 개종하라고 안 할 테니 그만 고민 하세요. 보기보다, 소심하시네요.”
“ 소심? 너무한데, 그런 말은 한 번도 안 들어 봤는데.”
“ 왜 절 따라 오셨어요?”
“ 첫 눈에 반해서.”
“ 우~~~~. ”
“ 왜? 안 믿어져?”
“ 저, 그런 말 제법 많이 들었거든요. 진실성이 없어요. 작업용 멘트라고나 할까요.”
“ 좋아 그럼 희연이 내말을 표현해 봐.
누군가를 만나고 일어서려다. 희연이 들어오는 걸 봤지.
갑자기 온 몸에 감각이 확 일어서더군. 내 안의 다른 누군가가 ‘저 여자 가까이로 가’
라고 속삭여서. 다시 자리를 잡고 기회를 기다린 거야.“
“아~. 그래서 지켜봤더니, 뻔 한 상황을 연출하다 봉투가 건너가고,
질질 우는 여자에게 접근 하신 거군요?”
“ 그럼 희연이 표현해 봐. 내가 느낀 감정이 뭔지.”
“ 예전에도 그런 감정을 느껴 보셨어요?”
“ 아니.”
“ 그럼 반해보신 적은요.”
“ 역시 노.”
“ 사랑은요?”
“ 글쎄.”
“ 왜 글쎄 예요?”
“ 희연을 만난 순간 예전에 느낀 감정들이 너무 가볍게 느껴져서.”
“ 와~~~~~~~~~~~~~~~. 완전 선수야. 아 느끼해 자 한잔 하세요.”
“ 희연은 누구에게 반해 본 적 있어?”
“ 아뇨, 사랑도 반하는 것도 안하려고 항상 조심하고 있어요.”
“ 왜?”
“ 이것도 우리 형제들의 병인데요. 희선 언니의 말에 의하면,
우린 애정 결핍이 심해서 사랑을 하면 상대를 굉장히 힘들게 한데요.
‘일명 상대의 숨소리 하나까지도 내 것’이라는 상태가 돼서 상대를 지치게 한다는 거죠.
사랑을 했는데 상대가 나의 사랑으로 인해 지친다면,
으~~. 생각만 해도 소름 끼쳐요.“
“ 조절이 안 되는 건가?”
“ 게이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요.
항상, 저 사람에게 어제 밤에 뭐했냐고 물어도 될까? 싫어할까?
회사 일을 물어도 될까? 동료에 대해 물어도 될까? 이렇게 고민 하면서요?“
“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자연스럽게는?”
“ 희선 언니는요, 우리가 고장 난 게 그거래요. ‘자연스러움’요
정상적인 사랑을 받고 순차적으로 자라면, 이성을 사랑할 때는,
한정된 양이 남아 있어서 아무리 심하게 해도 적정량을 넘지 않는데,
우리는 연인에게서, 그 동안 모자랐던 모든 사랑을 다 받아내려 한다는 거죠. 무섭죠?“
“ 무섭다는 표현이 맞는 건가?”
“ 그럼요, 만약 우리 둘이 사귄다고 가정하고요,
아저씨는 척 보기에도 한가한 사람은 아니신 것 같은데요.
이렇게 다른 나라로 출장도 길게 다니고, 며칠 밤을 새워서 일을 할 때도 있잖아요.
그런데 매일 같이 놀아 달라고 하고 수시로 전화 하고 하면 좋겠어요?“
“ 글쎄, 답은 보류하고, 그럼 애정결핍인 사람들은 다 사랑을 하면 안 된다는 건가?”
“ 희선 언니 가라사대,
‘똑같은 강도로 서로 사랑 할 수 있는 사람,
아니면 더 많은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행운이,
당신에게로 오길 기도하고 노력하라’ 죠.“
“ 노력하라는 의미는?“
“ 함부로 자신의 감정을 결정 하지 말고, 섣부른 사랑에 빠지지 말고,
상대가 사랑할 준비를 갖춘 사람인가를 확인해라, 인데 신이 아닌 바에야 힘든 일이죠.“
“ 그 역시 ‘희선 언니 가라사대’ 인가?”
“ 호호, 네.”
“ 형제들의 애정 카운슬러인 모양이군. 희선 언니는.”
“ 정신과 닥터예요. 부자가 되고 싶다고 치대를 목표로 의대에 들어갔는데,
일 학년 때, 언니표현으로 하자면, ‘미친 사랑의 열병’을 앓고 정신과로 돌아섰죠.
언니가, 상대의 ‘무섭다’는 말로 실연을 당한 후,
한 일 년은 꼭 공포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니까요.
그래서 애정에 관한한 언니의 조언은 형제들 사이에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죠.“
“ 그래도 내가 희연의 사랑을 받고 싶다면?”
“ 정말요?”
“ 정말.”
“ 생각 잘하세요. 제가 한 가지 더 말해 드릴게요.”
“ 그 역시 희선 언니 가라사대?”
“ 호호, 네. 우리는요, 사랑을 받지 못해서, 사랑하는 법도 배우지 못했대요.
그래서 자꾸 달라고 조르기만하고 ‘참고, 온유하며, 시기 않으며, 교만 않으며’가
부족 하다는 거죠, 혹시 나중에 후회하실까봐 말씀드리는 거예요.“
“ 희연은 프러포즈라는 남성에게 다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주나?”
“ 물론, 아뇨.”
“ 그런데 나는?”
“ 모르겠어요. 아마 희선 언니는 알지도 모르죠.”
첫댓글 글이 참 단정한 느낌이에요 다음편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가슴이 설레이는 평을 감사히 받습니다.^^
만남의 중요성을 느껴지네요. 신부님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아이들의 미래가 선택되어지는 것이 참, 인상깊었습니다. 계속해서 좋은 글 많이 그려주세요. 오늘도! 파이팅!!!
파이팅! 감사합니다.^^
고아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자랐군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