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싱글맘 수진(34)씨와 혜진(33)씨.베이비박스가 있는 교회 앞. 안미선 |
[일다는 여성노동자글쓰기모임과 공동 기획으로, 기록되지 않았던 여성노동자들의 일과 삶을 이야기하는 기사를 연재합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편집자 주]
수진(34)과 혜진(33)을 만났다. 둘은 공통점이 많았다. 또래인 네댓 살 아이를 둔 점이 그랬고, 나이가 엇비슷했고, 무엇보다 미혼모로서 일하며 겪은 경험들이 그랬다. 싱글맘으로서 일을 하려 했을 때 맞닥뜨린 문제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점을 바라는지 그들은 솔직히 들려주었다.
수진의 이야기: 편의점 사장에게 울며 매달렸는데…
임신 5개월이 되었을 때 수진은 처음 임신 사실을 알았다. 돈이 없어 병원에 갈 수 없었다. 처음에 죽을까 싶었다. ‘아이를 지울 수 없었고 혼자 살 수도 없었고 낳는다 해도 키울 자신은 더더군다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낳을 결심을 했을 때,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불러오는 배를 복대로 감싸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밤낮으로 대타까지 뛰어주며 열심히 일했어요. 겨우 아기 낳을 때 쓸 병원비 정도 마련했을 즈음 같이 일하던 아주머니가 제 배를 만져보고 임신을 알아차리고 사장님께 말씀 드린 거예요. 울며불며 사정을 얘기하고 매달렸지만 그날 바로 퇴사 처리되었어요. 일한 알바비도 다음 달 겨우 받았고요.”
억울하지 않았냐고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 당시는 그게 억울한 건지도 몰랐어요. 미혼모에 대한 편견이 저도 되게 컸으니까요. 사장한테 어떻게든 일하게 해달라고 울면서 빌었는데 그날 바로 잘려버렸거든요. 그 다음부터는 취업의 문을 두드릴 의지가 안 생겼어요. 그런 의지가 완전히 꺾였고…”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차별은 우리 나라에서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은 혼인 여부에 관계없이 임신한 여성이면 누구나 임신과 출산, 육아에 여성노동자로서 권리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임신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해고당했다.
입양되기 하루 전, 돈 주고 다시 찾아온 아기
처음으로 간 병원에서 수진은 “소리 한 번 지르지 않고 조용히 울면서” 아이를 낳았다. 방법이 없어 보여 입양을 결정했다. 초유라도 먹이고 싶어 아이를 데리고 월세 방에서 열흘을 보냈다. 남은 돈이 다 떨어지자 입양기관에 아이를 맡기고 돌아섰다. 아이는 바로 입양이 결정이 되었다. 죽고 싶었다.
“애기를 기관에 보내고 열흘 동안 죽 한 숟가락도 떠넘기기 힘들었어요. 물 한 모금도 넘기기 힘들더라고요.”
아이가 입양되기 하루 전, 수진은 기관에 전화해 아이를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다. 돌봐준 것에 대해 돈을 지불해야 아이를 찾아올 수 있다 해서, 지인에게 사정해 돈을 빌렸다. 20만 원을 주고 아이를 찾아올 수 있었다.
동사무소에 찾아갔다. 도와달라고 했지만 동사무소에서는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알지 못했다. 아기와 찜질방에서 지내기도 했다. 동네 언니가 시청에 건의를 해줘서 시청에서 조사를 나왔다. 긴급 주거 지원과 위기 지원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전세임대주택에 들어가 적어도 십 년은 쫓겨나지 않을 집이 생긴 것이다.
“이제 아이랑 먹고 살려고 부업을 했어요. 집에 일감 가져와 납땜을 하고. 납땜하고 이 원, 삼 원 치는 거, 손에 익지 않은 거 종일 해서 몇 백 원 만들고 천 원 만드느라 힘겨웠어요. 도저히 돈이 안 되더라구요. 나중에 파지를 주우러 다녔어요. 폐지 일 킬로그램에 백 원이 넘어요. 택배 박스를 차곡차곡 모아 갖다 주면 돈 천 원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애기 낳고 얼마 있다 파지를 계속 주웠어요. 많은 벌이는 아니더라도 차라리 파지 줍는 게 낫다 싶어서 한동안 주웠어요. 별 짓 다해봤네. 나도.”
아이는 계속 아팠다. 수진은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다. 그 후 수입은 안 되지만 초기 한부모에게 조력자 역할을 하는 한부모 지원 상담 일도 하였다. 그러면서 다른 싱글맘들이 겪는 어려움을 가까이서 살펴보게 되었다.
미혼모라서 ‘나는 안 되는구나’ 포기하게 되죠
“미혼모들이 일자리를 잡을 때 힘든 건 시간 땜에 힘들어요. 통근 시간에 근무 시간 다 계산하면 어린이집에 8시간 이상 맡겨야 하는데 어린이집에도 부수적인 비용이 들어가고 일하는 시간이 제한되지요. 애들이 면역력이 약해 자주 아프니까 애 아플 때 빠지거나 조퇴하는 거 감안해 직장을 구해야 하니, 식당이나 허드렛일 같은 거, 청소 같은 거 알아보구요. 정규직은 아예 안 돼요.”
그래서 주변의 미혼모들은 미용 일이나 서비스직,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의 가게를 바라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아이를 옆에 두고 일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재택근무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한다. 학생들의 숙제를 정리해주는 일 같은 아르바이트를 한시적으로 하는 미혼모들도 주변에 있다고 했다.
“미혼모의 노동권을 보장 받으려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바뀌어야 해요.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일하는 데 지장이 있고 일하기 힘들어지는 때가 많아요. 우리의 노동권을 보장받으려면 같이 일하는 노동자들한테도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 것도 우리가 많이 목소리를 내서 얘기해야 할 것 같고 사회적 인식 개선이 되어야 노동권도 보장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 일하러 갈 때 처지를 배려해 일을 할 조건을 만들어달라는 거지요. 지금은요, 미혼모들도 자기 상황에 맞는 일자리를 못 찾고 자기를 안 받아줘도 ‘나니까 안 되는구나’ 하고 아이 때문에 포기하는 부분이 있어요. 일은 남보다 더 열심히 할 수 있는데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죠.”
일하기 위해 필요했던 건 집, 기본 수입, 아이를 안전하게 돌보는 것, 그리고 ‘미혼모라서 자르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닌 일터, 그런 것이 상식이 되는 사회였다.
혜진의 이야기: 혼자 아이 키운다고 밝히고 났더니
혜진은 아이를 낳고 동네에 있는 생산직 공장에서 일했다. 선풍기를 만드는 곳이었다. 주5일 근무를 고려한 건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월급은 75만 원 정도였다. 2, 3교대로 일하는 공장이 많은데 교대 근무는 불가능하니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긴 동안 정시 출퇴근이 되는 곳을 찾아 일한 것이었다.
“보통 9시에 출근해서 8시에 퇴근하거든요. 선풍기 만드는 데서 기본으로 여덟 시간을 서서 일했어요. 그렇게 서서 일해도 하루 일당이 4만원밖에 안 되었어요. 점심도 싸 갖고 가야 하고 간식도 저희 돈으로 해결해야 했는데. 애 있어서 회식 자리는 못 끼죠. 그럼 ‘누구는 애 안 키우나? 지 혼자 키우나?’ 하고 안 좋은 시선으로 봐요. 처음에는 말 안 했어요. 굳이 먼저 ‘저 미혼모예요’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러다 일하다 친해져서 미혼모라는 사실을 밝혔거든요. 밝히고 나니 저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더라구요. 처음엔 안 그랬는데 제가 미혼모라는 걸 밝히고 나니 뭘 실수하면 ‘너 그러면 자른다, 자른다’ 이러는 거예요. 자꾸 그러니까 속상하더라고요.
그전에는 밤늦게 전화 오고 이런 게 없었어요. 그런데 아이를 혼자 키운다 하니 밤이든 새벽이든 아는 분들이나 사장님이 전화를 해대는 거예요. ‘새벽에 술 한 잔 하자’, ‘야, 너 늦게 들어가도 괜찮잖아.’ ‘뭐 어때, 애 맡겨놓고 나와서 한 잔 하자. 남편이 있냐, 뭐가 있냐’ 이런 식으로. 특히 남자들 같은 경우는 예전엔 그러지 않았는데 혼자 산다는 거 알고 나서는 집적대거나 만만하게 보는 경향이 있더라구요. 남편 없는 거 뻔히 알면서 일할 때 저한테 농담할 때도 ‘남편 안아주듯이 그렇게 (선풍기를) 안아서 일을 해야지’ 이런 식으로 깔보고 한 단계 낮춰서 보죠.”
혼자 키운다고 말하는 순간 차별을 받게 된다는 것을 혜진은 깨달았다. 일터에서 성희롱으로, 일상적인 협박으로, 보이지 않는 무시로 고통은 가중되었다. 결국 그녀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원래 그만두려고 했던 게 아니었어요. 우리 아이가 천식이 있고 기관지가 약해서 감기가 자주 걸리거든요. 아이가 열감기로 앓아 그날 일을 못 나가겠다고 하니 ‘야, 맡기면 되지, 왜 안 나와! 그만둬!’ 말하더라구요.”
화가 났다. 똑같은 입장에서 다른 엄마들이 아이가 아프다고 쉬었을 때는 회사에서 별 말을 안 했는데 자신에게 다르게 대한 것이었다. “단지 내가 아이를 혼자 키운다고 말했을 때부터 나를 대하는 태도가 변해온 거니까” ‘그만두라’는 말뿐 아니라 자신을 그동안 한 단계 낮춰 대한 일터에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더 일하고 싶지 않았다. 미혼모인 자신에게 “대놓고 그만두라는 소리는 못하고, 애 아프다 하니 빌미 삼아 그만두라” 라고 말한다는 것을 느꼈다.
시급도 제대로 주지 않던 회사였다. “최저임금 주세요! 제가 일한 대가를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노동부에 신고할 거예요!” 마지막으로 요구했다. 밀린 임금을 받고 혜진은 그렇게 일터를 그만두게 되었다.
어떤 차별보다 ‘취업할 때’ 느낀 차별이 가장 커
“혼자 산다고 하면 그때부터 보는 시선도 안 좋고 본의 아니게 부딪히죠. 대놓고는 아니지만 그런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많이 힘들죠. 어쨌든 아이랑 먹고 살아야 하니까 벌기 위해 버티긴 버티는데 그런 게 가장 힘들어요. 확실히 느낀 게 뭐든 당당해야 하는 것 같아요. 내가 당당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우습게 봐서 좀 성격이 드세질 필요가 있더라구요. 너무 드세도 문제겠지만…. 보통 아이가 아파 그만두는 경우도 많아요. 아이가 감기 심했는데 제가 일하다 못 봐줘서 이주일 만에 폐렴으로 입원해서 일을 그만둔 적도 있고 이번에도 아이가 아프니까….”
자신이 일해서 아이가 폐렴에 걸렸다고 말할 때 혜진의 눈이 붉어지며 눈물이 고였다.
아이는 이제 다섯 살, 혜진은 또 어떤 일을 구해야 할까? 한국여성정책연구원(2009년)은 미혼모가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가장 크게 느낀 때가 ‘취업할 때’(32.9%)라고 했다. 차별은 이웃 관계에서도(17.4%) 가족 관계에서도(11.2%) 있었지만 일터에서 가장 많은 차별을 느낀다는 것이다.
“아이를 혼자 키워야 하니 어린이집 시간에 맞추어 시간제 일자리를 구하게 돼요. 주말에 일 못하고. 돌봐주는 곳도 없고. 또 아이가 아프면 어린이집에 못 가잖아요. 수족구는 일주일씩 앓는데 전염병이라고 어린이집에 못 가게 되잖아요. 그런 것까지 고려해서 일자리를 잡으려면… 저 같은 경우 그렇게 일을 했는데 한 달에 75만 원 이상 넘지 못했어요. 아이는 자주 아프고 일할 시간은 정해져 있고. 그렇게 맞춰 일하다 보면 최저임금을 못 받아요. 아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모든 걸 아이에게 맞춰야 하니까 그게 힘들죠.”
일자리가 없었다. 지속적인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집에서 부업을 했다. 부품을 가져와 20일 동안 하루에 일곱 시간을 앉아서 전선을 꼬고 납땜을 했다.
싱글맘에게세상이 허락하는 일자리는 많지 않다. |
“쌔가 빠지게 했는데 10만원 나오더라고요. 먹고 살아야 하는데, 일자리가 없는데. 10만 원 받고 내가 진짜 이러고 살아야 하나? 싶었어요. 내가 종일 앉아서 고개 숙여 애하고 못 놀아주고 설거지는 못하고 집은 엉망인데 그렇게 한 달 해서 십만 원을 번다니…”
‘애기 엄마, 하룻밤 재워줄 수 있어?’
혜진과 수진은 수급을 받고 있다.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 수급을 받는다는 것은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어려운 이들이 생존할 수 있는 보루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상처를 주는 ‘딱지’이고,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기도 하다. 수진이 말했다.
“아이를 낳고 수급자를 신청한 미혼모가 있었어요. 사회복지사 두세 명이 조사를 나왔어요. 그리고 동네 이웃들을 붙잡고 ‘저 집에 혹시 애기 아빠 같은 사람 드나들지 않느냐? 저 집에 누가 들락거리냐?’ 다 물어보더래요. 의심부터 하고 조사하는 거지요. 그러면 그 친구가 동네에서 살 수 있겠어요? 얼굴 들고 못 살죠. 기준이 엄격해지다 보니까 미혼모인 걸 주변에 숨기고 싶어도 숨겨지지 않는 거예요. 중간중간 조사 나와서 이웃 주민들 다 들쑤시고 다니면 어떻게 숨길 수가 있겠어요. 저도 수급자이지만, 미혼모에 수급자다 하면 바닥으로 보죠.”
혜진이 일터에서 경험한 일을 수진은 이제 동네에서도 겪고 있다. 미혼모라는 것이 밝혀지고 나면 지역 동네의 태도도 적대적으로 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제가 미혼모인 걸 동네에서 알고 나니 동네 아저씨들이 저를 보면 이제 그래요. ‘애기 엄마, 하룻밤 재워줄 수 있어?’ ‘오늘 가면 저녁 먹여주나?’ 되게 기분 나쁘죠. 동네 아줌마가 넌지시 와서 나한테 노래방 도우미나 그런 일 해보라고 소개시켜 준다고 까지 해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요즘 세상 좋아져서 복지 혜택 좋아져서 혼자 애 키우기 쉽지?’
근데 솔직히 우리는 돈도 벌고 살림도 하고 육아도 해야 하잖아요. 하나부터 열까지 경제적으로 해결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우리 같은 사람이 일반 사람들하고 싸우면 싸움의 끝이 뭔지 아세요? 저 그런 얘기 몇 번 들었어요. ‘야! 니가 지금 내가 낸 세금으로 먹고 살고 있어!’ 그 말을 들으면 왜 할 말이 없어지는지… 그 순간에 화도 안 나고 뭔가 쾅 맞은 거 같고 땅에 기어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들어요.”
수진은 싫다. 이런 심정이, 이런 상황이, 이런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국가가 보육 문제만 해결해준다면…
“애 걱정만 안 되면 일할 수 있어요. 보육 문제가 너무 이게… 애 돌보는 걱정만 안 하게 해주면 백 프로 나가서 다 일하겠죠. 나라에서 나오는 수급비가 얼마나 된다고…. 정말 더럽고 치사하지만, 아이를 보면서 제대로 된 일을 구하기가 어렵잖아요.”
손주돌보미 사업(손주를 돌보는 친할머니나 외할머니에게 월 일정액의 지원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국가가 책임져야 할 보육을 혈연 관계의 노년여성에게 떠맡긴다는 비판을 받았다)이 서초구에서 시행된 적이 있다. 그것을 보고 수진은 자신들에게도 그런 혜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단,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그런 제도도 할아버지, 할머니, 가족 중심이 아니라 우리한테도 현실적인 것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동네에 친한 지인을 지정해 우리 아이를 돌볼 수 있게 하고 그런 지인에게도 나라에서 수당을 지원해 줄 수 있다면, 그럼 몇 시간 애를 더 봐줄 수 있기만 해도 일하기가 더 나을 거 같아요.”
수진의 살림. 수급비가 20일날 들어온다. 공과금과 아이 보험료, 통신비가 나가고 월세가 나간다. 쌀과 반찬과 아이의 옷을 사고, 밀린 겨울 난방비까지 달마다 내고 나면 돈이 금세 바닥이다.
혜진은 지금 제대로 된 수입이 없다. 자활 프로그램을 1년 했지만 아이가 아플 때 혼자 돌보느라 일을 계속 할 수 없었다.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자활교육 있잖아요. 자활 갔어요. 일을 했어요. 그런데 아이가 아파서 돌볼 동안 잠시 일을 그만두게 되어, 나중에 다시 일할 수 있냐고 전화해 물어보면 이렇게 말하죠. ‘교육이 끝났고 어머니가 취업을 이미 한 거고 그만두신 거기 때문에 힘들어요.’ 그러면 끝난 거예요. 혼자 벌어 먹고 살아야 하는데 아이가 아프면 수입이 없잖아요. 임시적으로라도 한 달이나 두 달 일을 못하게 되면 도움을 주면 좋은데 아예 그런 지원은 없어요. 일자리를 잡았는데 아이 때문에 잠시 쉬게 되면 그것에 대한 도움이나 배려가 정책적으로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후 동사무소에서 전화가 왔다. 수급이 끊어질 수 있으니 수급자 자격을 유지하려면 무조건 소득 신고를 하라는 것이었다. 혜진은 이제 소득이 없는데도 소득이 있다고 신고를 했다. 그래서 수급비는 거의 받지 못하고 자격만 유지하게 된 셈이다. 그랬던 건, 아이의 의료 혜택과 교육 혜택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아이가 차별에 익숙해질까 벌써부터 두렵다
혜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 일곱 평 원룸에 살고 있는데, 어떤 때는 애가 감기가 걸려 아픈데 수중에 단돈 천 원이 없어서 병원에 못 간 적이 있어요. 애 기침하고 콧물이 흐르는데, 병원비를 빌려 갈 때도 있어요. 그럼 사람들이 그러죠. ‘일을 해라.’ 모르는 사람들은 ‘일이 왜 없냐고, 찾아보면 널린 게 일자린데 왜 일을 못하냐’고 되묻죠. 제 입장에서는 안 그렇거든요. 아이를 돌보고 한정된 시간에 한정된 조건으로 일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아요.”
아이가 슈퍼마켓 앞에서 말했단다. ‘엄마, 저거 사줘.’ 혜진은 ‘돈이 없어, 돈이 어디 있니? 엄마랑 너하고 있는데 맨날 뭐 사달라 그러면 피곤해서 못 산다.’ 라고 말했다. 다음에 아이는 아무 말 안 했다. 가게 앞에 서서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엄마가 고개를 끄덕이면 허락한 거니까 들어가려고, 엄마가 끄덕하지 않으면 저건 허락을 안 하는 거니까 안 들어가려고. 그때 이런 말을 옆에서 들었다. “혼자 키우는 애 엄마가 얼마나 그랬으면 애가 눈치를 보고 있냐, 엄마가 저러니까 애까지 그러지.” 라는 말을.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게 너무 어렵다는 걸 그럴 때 정말 느껴요. 살 만한 곳이 못 되는구나. 나야 한 귀로 듣고 흘리면 그만이라 해도 아이들은 순수하고 상처받고 마음에 담아두잖아요.”
두려운 것은 아이가 차별을 받는 데 익숙해지는 것이다. 어린이집에 가서 맞고 코피가 나도 울지 못하는 아이가, 아이들에게 부당하게 맞아도 나서서 때리기를 망설이는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고 또다른 사회 속에 나갔을 때 ‘맞을 만하니 맞았지’ 하는 차별에 어쩌면 익숙해질까 봐 벌써 두려운 것이다. 가족이란 것이 아빠와 엄마, 자식, 이른바 정상가족을 빼고 나머지 삶은 잘못되었다고 단정하는 세상이 두려운 것이다.
한부모가족지원법에는 이런 규정이 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한부모 가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예방하고, 사회구성원이 한부모 가족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도록 교육 및 홍보 등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다” (2013년 3월 22일자 추가 규정)
‘우리가 목소리를 높인다면 사회는 바뀔 거야’
수진은 현재 미혼모가족협회의 회원으로서, <휴먼 라이브러리>(사람도서관, 책 대신 이야깃거리를 가진 사람을 빌리는 개념의 프로젝트)에 참가하면서 학생들과 만나며 책임감을 느낀다.
“대학교에 가서 학생들을 만나 ‘사람책’으로서 제 경험을 들려줘요. 사회복지학과 학생들이 많은데 그 앞에서 말할 때 힘이 실려요. 저 학생이 커서 동사무소, 시청, 구청 같은 곳에서 일할 텐데 저분들의 인식이 개선되어도 우리 아이들이 살 세상이 바뀌겠지, 저 학생들의 인식을 바꾸면 사회도 함께 바꾸어지겠지, 하고 생각하고 하는 거예요.”
수진은 무엇보다 이 모든 상황이 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생존할 권리도, 일할 권리도, 차별 받지 않을 권리도.
프랑스의 경우, 혼외 출산이 전체 출산율의 절반으로 늘어나자 2006년에 결혼 여부에 따라 출산을 구별하던 규정을 폐지했다. 자녀를 양육하고 있다면 모든 가구가 출산 휴가와 육아 휴직, 가족 수당, 자녀양육수당, 보육서비스 혜택을 평등하게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영국은 미혼모들에게 주택, 건강, 돌봄, 부모교육, 고용 훈련 서비스를 제공한다.
수진은 미혼모로서 자신들이 목소리를 높인다면, 사회가 바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옆집 부부가 부럽지 않냐고요? 전혀!
혜진이 말했다.
“이웃 사람이 저한테 자주 그래요. ‘넌 네 아들한테 미안한 생각이 안 들어? 너의 이기심으로 아이한테 아빠를 뺏은 거 아니냐? 솔직히 옆집 부부 보면 안 부럽냐?’ 전 부럽지 않아요. 왜 부러워야 하는 일인지 모르겠어요. 내가 부모 없이 자라든 아빠가 없든 엄마가 없든 한국에서 태어나든 외국에서 태어나든 다 내 삶인 거예요. 그거를 왜 불행하다고 생각해요? 전 애가 아파서 제가 일을 못하고 쉴 때 경제적 여건만 갖추어지면 좋겠어요.
우리 (미혼) 엄마들은 공구를 하나씩 다 가지고 있어요. 못질도 혼자 다하고 가구도 장난감도 고쳐요. 경제적인 것이 허락 안 돼 불편한 것뿐이지 부러운 게 하나도 없거든요. 그렇게 부러워할 만큼 잘 사는 사람도 없고. 전 모든 사람이 미혼모를 나쁘게 생각한다고 생각 안 해요. 열 명 중에 세 명은 저를 지지해준다고 생각해요. 그걸 위안으로 사는 거지요. 함께 바꿔나갈 게 있을 거예요.”
보육 문제를 지역 사회와 정부가 함께 공공화의 방안으로 나누고, 임금노동이 정규직화되고 삶의 시간을 점령하지 않는 것으로 재편되고, 다양한 가족이 사회 속에서 공존할 때 미혼모들도 일할 수 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한 미혼모들에게 지금 세상이 허락하는 일자리는 많지 않다. 미혼모 노동자가 곁에서 일할 때, 일하고 싶어할 때, 인간으로 생존하고 싶어할 때, 우리는 노동자로서, 시민으로서 연대하고, 함께 일하고, 양육의 권리를 외치며 서로 곁에 있는 세 사람 중의 하나가 될 수도 있다.
www.ildaro.com
안미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