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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도(生死島) 3-13
<마지막회>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곳에서 옥소저와 한가롭게 사랑을 나누
고 있는 거죠?』
그녀의 말에 옥청향이 얼굴을 붉히고 육초량의 품에서 빠져나
갔다.
『당신은 초유성...』
초유성에게 눈길을 돌린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를 알고 있소?』
의아해 하는 초유성을 매혹적으로 흘겨본 냉여옥이 미소를 띄
었다.
『천하에 유수검의 명인 초대협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감당할 수 없소이다.』
초유성이 머리를 흔들며 손을 저었다. 그를 바라보는 냉여옥의
눈에 은은한 감탄이 어렸다.
『한 여인을 찾아 천하를 유랑하는 당신의 눈물겨운 사랑 얘기
는 이미 강호의 아름다운 전설이 되어 있답니다.』
초유성에게 따뜻한 시선을 던지던 냉여옥이 이번에는 옥청향을
바라보았다.
『축하해요. 당신은 드디어 육가가를 만났으니 다시는 그를 놓
치거나 빼앗기지 않도록 하세요.』
묘한 의미가 담긴 그녀의 시선을 받은 옥청향이 더욱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였다. 그 눈부신 아름다움에 냉여옥의 얼굴에
도 언뜻 황홀해 하는 빛이 스쳐갔다.
* * * *
『이 일은 전적으로 사공 늙은이, 그 여우같은 노적(老賊)이 꾸
민 것이라고 만은 할 수 없어요.』
『그럼 배후에 또 누가 있다는 말이요?』
냉여옥의 뜻밖의 말에 초유성과 육초량이 이구동성으로 물었
다.
『휴, 그 복잡한 전모를 다 이야기하자면 길어요. 하지만 지금
은 시간이 없으니 그간의 대략적인 것만을 말씀드리죠. 어차피
우리는 이 생사도에서 다 같은 피해자니까...』
긴 탄식을 뱉어 낸 냉여옥이 빠르게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
다.
『먼저 저의 진정한 신분을 말씀드리죠.』
냉여옥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자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던 초유
성과 옥청향은 경악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가 연
강왕부(延康王府)의 공주인 주여옥이자, 황제의 조카딸이며, 도
찰원의 원주이기도 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당금의 황상이신 가정제 폐하께서는 이 몇 년 사이에 일어난
군란(軍亂) 때문에 불안해 하셨죠.』
가정제가 즉위한지 3년 만에 대동(大同)에서 병란이 일어났다.
대동의 황금호(黃金虎)로 불리던 맹장 왕정필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 악인부대가 절강에서부터 달려왔
고, 그 때 육초량은 악인부대의 비장으로서 장성 넘어 청수하(淸
水河)가 흐르는 초원에서 왕정필의 친위군과 격돌한 적이 있었
다.
왕정필의 반란이 가까스로 토벌되었으나, 그 사건이 가정제에
게 준 충격은 커다란 것이었다. 그는 선제(先帝)들이 모두 각지
에서 일어난 민란과 병란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는 것
을 기억했다. 자신의 제위기간에도 그러한 일들이 벌어져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한 가정제는 그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했던 엉뚱한
착상을 하였다.
황제는 중원 전역에 고루 흩어져 있으며, 막강한 힘과 조직력
으로 천외천(天外天)의 별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강호인의 힘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무림을 친위군단화 한다는 것
이었다. 뛰어난 자를 내세워 강호를 손아귀에 쥐게 하고, 그를
적절히 이용한다면 음지에서 싹트는 민란의 조짐을 손쉽게 뿌리
뽑을 수 있겠다는 생각은 기발한 것이었다.
가정제가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냉여옥의 존재가 끼친
영향이 컸다. 황제는 자신의 조카딸인 정무공주 냉여옥이 일찍부
터 무학에 심취하여 황궁 무고를 드나들더니 이제는 천하제일을
다툴 만한 고수로 성장했다는 것을 알고 그녀에게 기대를 한 것
이다.
냉여옥에게 도찰원을 맡겨 실권을 잡게 한 가정제는 그녀가 자
신의 계획을 성사시켜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촌 형
이자 황제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 연강왕(延康王) 주윤문(朱潤文)
은 자신의 왕부를 떠나 흑룡보라는 방파를 세우고 성씨마저 냉가
로 고쳐 철저하게 위장했다. 암암리에 황궁의 지원과 도찰원의
힘을 이용한 그는 손쉽게 하북 무림의 패자였던 신검문을 꺾고
새로운 절대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러나 강호는 넓고, 강호인은 여전히 많았다. 냉여옥은 신검
문의 세력을 빼앗은 것만으로는 황제의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것
을 알았다. 그러던 그녀에게 사공영호가 생사도에서 세력을 키우
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천하 각지에 흩어져 은밀히 활동
하고 있는 도찰원의 거미줄 같은 정보망이 가져다 준 쾌보였다.
냉여옥은 남천일존 사공영호야말로 황제의 뜻대로 강호를 평정
하게 하는 데 최적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즉시 사공
영호에게 접근했고, 비슷한 의도를 가지고 있던 사공영호와 의기
가 투합하는 데에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으으음...』
냉여옥의 말을 들으며 육초량은 깊은 탄식을 뱉어냈다. 그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엄숙하게 말했다.
『강호는 사나이들의 야망과 꿈으로 이루어진 세계요. 그 뿌리
가 천 년을 두고 이어져 왔소. 열혈의 사나이들이 있는 이상 무
림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영원히 한 사람의 절대자에게
장악되지 않을 것이요.』
육초량의 차가운 눈을 대하고 냉여옥이 씁쓸하게 웃었다.
『황궁을 떠나 무림이라는 이 매력적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저도 그와 같은 생각을 갖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그 다음의 일은 어떻게 된 것이요?』
궁금하다는 듯 초유성이 눈을 빛내며 물어왔다. 그를 향해 방
긋 웃어 보인 냉여옥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공영호는 자신의 명성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지자 마음 속
에 엉뚱한 생각을 품게 되었답니다. 게다가 그는 삼십 년 전 활
강시 제조술을 배우기 위해 찾아갔던 남만의 오지에서 우연히 세
권의 절세비급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그것이 그가 강호를 떠나
무려 삼십 여 년 동안이나 생사도에 숨어 있게 된 이유랍니다.
그는 활강시들을 만드는 한편, 그 세 권의 비급을 철저하게 연구
했던 것이에요.』
무림 재패의 야욕을 가지고 은밀히 그 일을 추진 중에 있던 사
공영호에게 냉여옥의 접근은 반갑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황실의
후광까지 덧입을 수 있다는 것은 백만대군을 얻은 것보다 더 큰
기쁨이었다. 게다가 가정제는 그에게 무림 제패의 위업을 이루는
즉시 그를 무림왕에 책봉하겠다는 약속까지 해 주었다. 사공영호
는 겉으로는 크게 감읍하며 그 일을 추진하는 것 같았다.
그 동안 냉여옥은 중원 무림에서 활동하면서 사공영호의 심복
인 진필생이 무림맹을 장악할 수 있도록 암중에서 수단을 부려
주었다. 그리고 진필생을 이용하여 옥풍규를 끌어 들였으며, 또
그 어리석은 자를 이용해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던 철협 강사옥
을 제거할 수 있었다. 또한 생사도에서 보내온 천제무황경의 사
본을 무림에 흘려보내 강호인들의 상쟁을 유도했다. 강호의 원기
가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사공영호와 짜 맞춘 계획이 쉽게 이루어
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 그대가 어찌 그토록 잔인한 짓을...』
이번에는 초유성이 깊은 탄식을 뱉어냈다. 육초량은 다만 노기
띈 눈으로 냉여옥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 모든 일들을 배
후에서 꾸미고 부추긴 자가 냉여옥이라는 사실에 깊은 배신감마
저 느끼고 있는 그였다. 냉여옥이 육초량의 시선을 슬그머니 외
면하며 한숨을 쉬었다.
『휴, 그러나 저는 사공영호 그 늙은 여우를 제대로 보지 못했
어요. 그것이 오늘의 이 참극을 불러온 것이지요. 그 자는 더 큰
야망을 가지고 있는 자였어요. 저와 황실을 이용하여 무림의 지
존으로 군림한 후, 드디어는 그 힘으로 황실에 반감을 품고 있는
자들을 규합하여 오히려 자신이 대 반란을 일으킬 작정이었던 거
죠. 그래서 스스로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명실공히 천하를 지
배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아!』
『으음...』
육초량과 초유성의 얼굴이 동시에 참담하게 변해갔다.
『결국 저와 황실은 그 여우같은 늙은 도적놈에게 이용당하고
있었던 거랍니다.』
냉여옥이 부드득 이를 갈았다.
『그러나 놈도 미처 예견하지 못한 것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철석같이 믿고 있던 검신 공야승이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에
게 검을 겨누었다는 것이지요.』
공야승의 장렬한 최후를 지켜보았던 육초량은 문득 처연한 감
회에 사로잡혔다.
『그 분은 진정한 무림인이었고 사나이였소!』
『그래요. 그만한 인물이 사공영호에게 희생되었다는 것은 참으
로 무림을 위하여 안타까운 일이지요.』
고개를 끄덕인 냉여옥이 잠시 침묵하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또, 북천일마 단목굉의 등장과, 대방이라는 소림의 젊
은 무승의 등장...』
그녀가 말끝을 흐리고 의미심장한 눈으로 육초량을 바라보았
다.
『...그러나 놈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바로 당신이에요.』
『...?』
육초량의 의아한 시선을 대한 그녀가 요염하게 웃었다. 그 화
려한 아름다움에 육초량은 가슴이 진탕되는 것을 느끼고 얼른 시
선을 돌렸다. 그것을 본 냉여옥이 다시 처연한 신색으로 돌아와
한숨을 쉬었다.
『그 자는 육가가의 검경이 설마 검신 공야승을 능가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답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
그것은 냉여옥이 육초량의 존재를 끝까지 사공영호에게 숨긴
것과, 진필생이 또한 육초량의 눈부신 발전을 사공영호에게 그대
?보고하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진필생 그 자는 벌써부터 사공영호를 배신하고 그의 기반을
가로채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자는 생사도에서 육가가
의 손에 의해 사공영호가 죽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지요.』
『허허...』
육초량이 허탈하게 웃었다. 도대체 이 서로 속고 속이는 기막
힌 음모와 흉계들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믿고싶지 않
았다. 검에 의한 정직한 승부만이 강호의 모든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던 그에게는 이와 같은 음모와 귀계들은 혐오스럽기만 했
다.
『진필생은 사공영호의 명을 따르는 척하며, 그가 생사도에서
내보낸 일천의 고수들을 모두 휘하에 거느리고 중원 무림 어딘가
로 잠적해 버렸어요. 그 영악한 자는 수중에 삼대 비급의 필사본
까지 지니고 있을 게 틀림없어요.』
『아!』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모두가 경악의 탄성을 터뜨렸다.
『생사도에서 사공영호와 함께 중원 무림의 기둥인 수백 고수들
이 모두 죽었다는 것이 확인되면 진필생은 그 즉시 야욕을 드러
내 스스로 무림을 장악하기 위해 나설 게 분명해요. 그렇게 되면
중원에는 그 자를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예요.』
『그럴 수가!』
육초량은 기가 막혔다. 군웅들이 이곳에서 살아 나가지 못한다
면 결국 중원 무림은 진필생이라는 자의 손에 고스란히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냉여옥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 모두는 이 생사도에서 무사히
살아 중원으로 돌아가야 해요.』
냉여옥이 초조하게 서둘렀다.
『사공영호는 어쩌면 지금쯤 생사도의 화맥 위에 설치해 놓은
폭약에 불을 당겨 놓았는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 자는 슬쩍 이
화산도를 빠져나갈 생각이지요.』
『그것을 어떻게 알지?』
초유성이 긴장한 얼굴로 다그쳐 물었다.
『그 자와 제가 함께 생각해 낸 계책이니까요. 여의치 않을 경
우 섬의 화산을 폭발시켜서 생사도 자체를 없애 버린다는 것이
최후의 계책이었어요. 그러면 살아 남을 자는 아무도 없겠지요.』
『아!』
육초량과 초유성은 크게 놀랐다. 화맥을 터뜨려 화산을 폭발시
킨다는 계책이야말로 악랄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냉여옥의 머
리 속에서 그런 생각까지 나왔다는 것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
다. 초유성이 살기를 띄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곧 검을 뽑아 쳐
버릴 것 같던 그가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무겁게 물었다.
『그 자는 지금 어디에 있소?』
냉여옥이 의미 깊은 눈으로 초유성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 자는 아마 처음의 그 지하 광장에 있을 거예요. 폭약이 설
치된 곳으로 가자면 반드시 그곳을 지나야 하니까요. 도화선에
불을 당기고 나오려고 해도 마찬가지지요. 그리고...』
『...』
『그 자는 수련이라는 여인을 데리고 있을 거예요. 그녀는 그
자의 부인이지요. 사공영호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
람은 오직 그녀뿐이니... 결코 그녀를 두고 갈 리가 없지 않겠어
요?』
『억!』
냉여옥의 말을 들은 초유성이 경악의 탄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곧 그의 얼굴에는 주체할 수 없는 환희와 초조함이 가득 떠올랐
다. 오직 그녀를 찾아 지난 팔 년 동안 천하를 헤매고 다닌 초유
성이었다. 가까스로 이곳까지 왔는데 그녀가 이미 사공영호에게
이끌려 생사도를 벗어났다면 다시는 찾을 수가 없을 것이라는 생
각이 그를 서두르게 했다.
『나 먼저...』
말끝을 맺지도 못하고 초유성이 벼락처럼 신형을 날려 동굴 속
으로 뛰어들어갔다.
『우리도 어서 갑시다!』
번쩍 청향을 안아든 육초량이 그 뒤를 쫓아 몸을 날렸다.
『같이 가요!』
냉여옥이 그림자처럼 육초량을 따랐다.
<4>
파츠츠츠-
거대한 지하 광장을 가득 메우고 어마어마한 강기의 폭풍이 소
용돌이치고 있었다.
쿠아앙-!
자색 강기의 폭풍이 부딪친 석벽이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놈, 많이 늘었구나. 그러나 아직 멀었다!』
때로는 연기 같은 흐느적임으로, 또 때로는 귀영(鬼影)처럼 가
볍고 빠르게 몸을 움직여 쳐 나가고 물러서는 운신의 현란함이
눈부셨다. 그의 운신은 자색 강기의 엄청난 방전 속에서도 물이
흐르듯 부드럽기만했다. 왼팔이 절단되어 없는 백염의 노인, 사
공영호였다.
『그럼 이것은 어떠냐!』
그를 몰아붙이며 더욱 흉흉한 자전신강을 쳐내고 있는 북천일
마 단목굉의 긴 머리카락들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그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검신 공야승에게 한 팔을 잘리는 중상을 입고 나서도 사공영호
의 무위(武威)는 조금도 감소된 것 같지 않았다. 가볍고 빠르게
움직여 가는 그의 신묘한 보법은 혼원경(混元經) 속의 절정 신법
인 태허환예(太虛幻藝)라는 것이었다.
수도(手刀)로 변한 우수가 기묘한 각도로 자전신강을 찢으며
파고드는 도세(刀勢)는 천제무황경 중의 도법인 마황파진도(魔荒
破陣刀)였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자전신강의 극양지력(極陽之
力)을 깨뜨리고 있는 수강(手 )은 감리보록(坎離寶錄) 속에 있
는 태을강기(太乙 氣)였다. 그는 지난 삼십년 동안 생사도에 있
으면서 그 비급들을 완벽하게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세 권의 절세무경(絶世武經)
상의 절학들은 실로 경악할 만한 것들이었다. 태을강기로 단목굉
의 자전신강을 흩뜨리며 떨어져 내린 수도가 눈 깜짝할 사이에
뒤집어지며 다섯 가닥의 송곳 같은 지풍을 쏘아댔다.
피이잉-!
귀청을 찢을 듯한 파공성과 함께 단목굉의 사혈들을 노리고 파
고드는 그것은 지력의 왕이라고 불리는 탄지십팔해(彈指十八解)
였다.
『어림없는 짓!』
그것에 지지 않으려는 듯 단목굉도 혼신의 힘을 다해 오장(五
掌) 팔지(八指)를 때려댔다. 전대의 무림을 공포로 떨게 했던 그
의 청목마장(靑木魔掌)과 용조팔지(龍爪八指)였다.
콰아앙-!
짜자작-!
엄청난 격돌음이 거대한 지하 광장을 뒤흔들었다. 단목굉의 장
과 지 또한 절묘함에 극강함을 더하고 있는 것이어서 사공영호의
절세기학들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그 강맹함만으로 비교한다
면 오히려 그것들보다 나아 보였다.
풍차처럼 맴돌며 일수유(一須臾) 간에 벼락처럼 삼권오장(三拳
五掌)을 쳐낸 단목굉이 다시 맹렬하게 일곱 번을 걷어차 사공영
호의 추격을 뿌리치고 태을강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빠져나왔다.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은 듯 안색이 창백해진 그가 숨을 헐떡이
며 사공영호를 노려보았다. 내력의 수위에서 그는 검신 공야승과
마찬가지로 사공영호에게 한 수 뒤지고 있었던 것이다.
『크하하- 단목굉. 예전의 노부였다면 네놈의 그 경천동지할 손
속 앞에서 큰 낭패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 사공
영호는 남천일존으로 불리던 시절보다 적어도 두 배는 더 강해졌
다는 것을 알아라!』
사공영호의 광언(狂言)을 들으며 단목굉은 비분강개했다. 소림
의 공지 화상에 의해 석굴 속에 갇혀 삼십 년을 보내는 동안 갈
고 닦은 자신의 절기들이 사공영호의 한 팔을 당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똑같은 삼십 년이었지만, 혼자서 한
수련과, 절세의 무경들을 펼쳐놓고 그것을 연구하며 한 수련과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노력만으로 좁
힐 수 없는 차이였다.
『으헛!』
『에잇, 마물들!』
광장의 한쪽에서는 냉여옥을 보좌하여 따라온 미가불과 대방이
십여 구의 활강시들에게 둘러싸인 채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미가
불의 번천대수인이 벼락처럼 떨어져 활강시 하나의 머리통을 산
산이 으깨어 놓았다. 그러나 두려움이나 고통을 모르는 마물들이
었다. 금강불괴의 강철같은 몸으로 버티며 기계처럼 조여들고 있
는 그것들의 위력 앞에서 미가불은 점점 기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사정은 소림의 젊은 무승 대방도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십여
구의 활강시들을 맞아 무력감을 억지로 눌러 참으며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두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투가 절정에 이르러 있을
때였다.
『수련, 그대가 정녕 이곳에 있소!』
처연한 외침과 함께 초유성이 지하 광장으로 뛰어들었다.
『아!』
광장의 한쪽 구석에서 두려움으로 떨고 있던 창백한 안색의 여
인이 비명에 가까운 탄성을 터뜨렸다. 황금빛 도포를 걸치고, 금
빛 도관을 쓴 선계(仙界)의 신녀(神女)와 같은 여인이었다. 그녀
의 우수에 젖은 창백한 아름다움은 가히 경국(傾國)의 미색이었
다.
『초가가, 당신이...!』
지나친 놀람으로 현기증을 일으킨 듯 비틀거리는 그녀에게로
초유성이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수련, 그대가, 그대가 정녕 나의 수련이란 말이요?』
여인이 절규하는 초유성의 품속에 몸을 던졌다. 까무러칠 듯한
환희로 오열을 터뜨리는 그녀의 몸을 초유성이 으스러지도록 끌
어안았다.
『아, 초가가, 기어이, 기어이 저를 찾아 오셨군요! 저는 오직
이 날만을 기다리며 입술을 악물고 살아왔답니다!』
『오, 수련, 어디, 어디 얼굴을 다시 한 번 봅시다. 나에게 이
런 꿈같은 순간이 다시 올 줄이야...』
격정에 떨고 있는 초유성의 창백한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눈에는 사공영호도, 단목굉도, 미가불과 대방
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그의 여인인 수련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놈! 그녀에게서 손을 떼라!』
사공영호가 무섭게 외치며 단목굉을 버리고 초유성을 향해 몸
을 날렸다. 그러나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단목굉이 아니었다.
『흥, 너 개뼈다귀 같은 놈의 상대는 바로 이 단목 어르신이
다!』
사공영호의 앞을 가로막고 나선 단목굉의 자전신강이 다시 벼
락처럼 내리꽂혔다.
『이, 이 찢어 죽일 노괴!』
할 수 없이 뒤로 물러선 사공영호가 분노로 부들부들 떨며 다시
덮쳐들었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지하 광장 가득 울려 퍼졌다.
『아차, 한 걸음 늦었다!』
그와 동시에 광장으로 뛰어든 육초량이 청향을 내려놓고 막 미
가불의 허리를 꺾고 있는 활강시를 향해 신랄한 일검을 뿌렸다.
한 줄기 백색의 검강이 눈부시게 뻗어 나가 활강시를 쳤다. 뒤에
서부터 목이 잘려버린 활강시의 몸뚱이가 여전히 엄청난 힘으로
미가불의 허리를 수수깡처럼 꺾으며 함께 쓰러졌다.
『사형! 소제를 도와, 헉...!』
육초량을 발견한 대방이 반색을 하다가 급히 몸을 틀었다. 무
류회풍의 바람 같은 보법 사이로 활강시의 골조(骨爪)가 아슬아
슬하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아미타불!』
급히 숨을 들이킨 대방이 양손을 번갈아 가며 불광팔선(佛光八
禪)과 자비천수(慈悲千手)의 절학을 퍼부었다.
『끼아악-!』
단번에 가슴과 복부가 파헤쳐져 버린 활강시의 입에서 기괴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대방 또한 그 마물에게서 되쏘아져
나오는 반탄지력을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물러서야 했다. 그
에게는 더 이상 버틸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중놈, 비켜서라!』
외친 육초량이 대방에게 달려들고 있는 여섯 구의 활강시들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하나!』
콰아앙-!
터질 듯한 분노로 쳐내는 일자낙홍(一字落紅)의 일격이 굉음과
함께 활강시의 정수리 위에 처박혔다.
『둘, 셋, 넷!』
신들린 듯 종으로 횡으로 가차없이 쳐 나가고 긋는 육초량의
철검은 그것에 부딪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일격에 양단해 버리고
마는 흉포함으로 빛났다. 태산이라도 단번에 갈라버리고 말 듯한
힘과, 뇌전 같이 작열하는 검강이 전신(戰神)의 것인 듯했다. 육
초량의 검이 차가운 호선을 그리며 머리 위에서 완만하게 꺾이다
가 다시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차가운 검인이 두개골을 갈라놓는 끔찍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수리에서부터 자로 잰 듯 양단된 활강시의 몸에서 검붉은 액체
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가 다시 마지막으로 남은 한 구의
활강시에게 검을 겨누었을 때였다.
『끼야아-!』
엄청난 소리가 사공영호의 전신에서 터져 나왔다. 깜짝 놀란
육초량이 돌아보자, 거대한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듯한 소리와 함
께 기의 폭풍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질식할 듯한 압력이 지
하광장 전체를 휩쓸며 퍼져 나갔다.
『파천주지통기(破天柱地通氣)!』
육초량이 경악하여 외쳤다. 그 가공할 통기공(通氣功) 앞에서
가슴이 으깨져 처참하게 죽어가던 공야승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
이다. 그런데 지금 다시 그것 앞에 단목굉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것을 본 육초량이 일검을 쳐내며 다급하게 부르짖었다.
『단목선배! 위험, 피해야...』
카캉-!
육초량의 철검이 마지막 한 구의 활강시를 가차없이 동강내며
빠져나왔다. 그는 그것을 확인할 새도 없이 사공영호를 바라보고
힘껏 몸을 날렸다.
『좋다, 통쾌하게 놀아보자!』
육초량의 눈에 건곤일선기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자전신강을
쳐내며 사공영호의 통기공 속으로 뛰어들고 있는 단목굉의 모습
이 보였다.
『안 돼!』
달려가는 기세를 늦추지 않으며 사공영호를 겨누고 일검을 쳐
내려는 데, 꽝! 하는 엄청난 폭음과 함께 단목굉이 던져진 돌덩
이처럼 퉁겨져 나왔다. 육초량은 그에게 가로막혀 검강을 쳐낼
수가 없었다.
『크흐윽-!』
답답한 비명을 터뜨리는 단목굉의 입에서 한 줄기 선혈이 쭉
뿜어져 나가고 있었다.
『단목 선배!』
『사백!』
육초량과 대방이 동시에 외치며 단목굉에게로 몸을 날렸다. 그
것을 본 사공영호가 핼쑥해진 얼굴로 이를 악문 채 초유성을 향
해 재차 덮쳐들었다.
『이놈, 그녀에게서 손을 떼라!』
그의 고함 소리가 처절하게 들렸다.
콰콰콰콰-!
사공영호의 혼원장력이 무저갱의 암흑처럼 짙은 어둠으로 초유
성을 휩쓸어 갔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초유성은 다시는 놓
치지 않겠다는 듯 수련을 품안에 꼭 끌어안은 채 벅찬 희열과 감
동으로 눈물만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삶과 죽음 따위는 지금
의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오직 온 영혼을
기울여 사랑해 온 여인을 다시 찾았다는 것만이 그 순간 그의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유일한 세계요 진실이었다.
초유성의 등을 향해 구름처럼 밀려들고 있는 사공영호의 장력
을 바라보고 있는 수련의 눈에도 한 점의 두려움이 없었다. 사랑
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서 그녀는 그대로 죽어가기를 차라리 원하
고 있는지도 몰랐다.
『허엇-!』
단목굉의 곁에서 비로소 그 광경을 본 육초량이 다급한 신음을
토해냈다. 다시 그를 구하기 위해 달려가기에는 이미 늦어 있었
다. 사공영호의 악랄한 장력이 이미 초유성을 덮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며 육초량은 숨을 멈추고 외면한 채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안 돼!』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귀를 찔렀다. 고개를 돌린 육초
량의 눈에 바람처럼 뛰어들며 사공영호의 일장을 끊어 가고 있는
냉여옥이 보였다. 그녀가 왼손으로 초유성을 밀어내며, 오른손을
뻗어 극성으로 끌어올린 소수겁(素手劫)을 쳐내고 있었다. 백옥
처럼 하얀 수강(手 )이 뻗어나가 사공영호의 혼원장을 받아쳤다.
쾅! 하는 엄청난 격돌음이 터져 나오고, 그녀의 섬세한 몸이 줄
끊어진 연처럼 훌훌 날려갔다.
육초량이 번쩍 몸을 던져 떨어져 내리는 그녀를 받아 안았다.
그녀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 울컥울컥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저는 괜찮아요. 어서 사공 늙은이를 치세요.』
그녀가 억지로 웃어 보였다. 냉여옥을 내려놓고 돌아서는 육초
량의 눈 속에 뜨거운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육초량은 냉여옥의
소수겁과 정면으로 부딪친 후 탁해진 숨을 내뱉으며 기력을 고르
고 있는 사공영호의 앞에 우뚝 섰다.
『놈, 비켜라!』
흉흉하게 빛나는 사공영호의 눈이 육초량을 지나 여전히 초유
성과 수련에게 멎어 있었다. 육초량이 그런 사공영호에게 철검을
겨누었다. 그가 부드득 이를 갈며 소리쳤다.
『사공영호!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네놈을 베고 말겠다!』
살기를 감추지 않고 사납게 기세를 내쏘며 다가서는 그를 피하
듯, 성큼 옆으로 물러선 사공영호의 눈이 여전히 수련을 찾았다.
『수련, 그 자는 이곳에서 죽어야 할 놈이다. 너는 어서 내게로
오너라!』
초유성의 품에 안겨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던 그녀가 사공
영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가지 않겠어요. 저는 오직 이 날만을 기다리며 살아왔답
니다. 제가 이제 초가가를 만났는데 다시 어디로... 누구에게 간
단 말인가요?』
그녀의 허공에 뜬 듯, 꿈에 젖은 듯 몽롱한 음성이 사공영호의
가슴을 무겁게 때렸다. 그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사공영호의 얼굴
에 분노와 절망, 그리고 배신의 고통이 가득 떠올랐다.
『수련, 내가 뭇 사내들의 노리개로 고통받는 너를 구해 본도에
데려온 지 어언 삼 년. 그 동안 한 번이라도 너에게 소홀한 적이
있었느냐?』
수련의 눈 속에 작은 아픔이 스쳐 지나갔다.
『도주께서는 저에게 참으로 잘해 주셨어요. 저는 그것을 늘 감
사하고 있어요.』
그녀의 담담한 말에 사공영호의 눈이 기쁨으로 반짝 빛났다.
그가 감정을 억제하며 부드럽게 다시 말했다.
『이 놈들만 처치해 버리면 이곳에서의 모든 것이 끝난다. 너는
나와 함께 중원으로 가자. 그곳에서 네가 황후 못지 않은 영화를
누리도록 해주마.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원하는 모
든 것을 가질 수 있다. 너는 설마 천만인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버리려는 것은 아니겠지?』
수련은 그런 사공영호를 안타까워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지난
삼 년을 돌이켜 보았다. 사공영호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으며,
헌신적이었는지... 적어도 자신을 대하는 그의 마음에는 한 점의
사심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진심으로 자신을 대했던 것이다. 수
련은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호, 하고 한숨을 쉰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제게는 중원 천하보다도, 그 어떤 보물보다도 바로 이 분, 초
대가가 더 소중하답니다.』
『억!』
사공영호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마음에 큰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린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수련을 바라보았
다. 수련은 마음을 굳게 하고 그런 그에게 다시 담담하게 말해
주었다.
『도주님의 말씀은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저는 이곳에서 이 분
과 함께 죽을지언정 다시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어요.』
『흐흐, 나는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
갑자기 실성한 듯 우왁! 하고 부르짖은 사공영호가 야차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주춤주춤 다가섰다.
『수련, 너는 결코 내 곁을 떠나지 못해!』
그의 앞을 가로막아 선 육초량의 철검이 청광을 번쩍이며 움직
였다.
『그러기 전에 먼저 나의 일검을 받아라!』
중단으로 내려 잡으며 우측 어깨를 내주고 비스듬히 선 육초량
의 철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도 없이 맹렬하게 쳐나갔다. 사공
영호는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육초량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가
이를 갈며 살기?번쩍이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 이... 쳐죽일 꼬마 놈!』
살짝 허리를 틀어 일검을 흘려보낸 사공영호가 손가락을 활짝
펼치고 벼락처럼 달려들며 육초량의 가슴을 잡아왔다. 단순하지
만 비할 수 없이 무겁고 사나운 힘이 실려 있는 웅조신공(熊爪神
功)의 공부였다.
물고기를 낚아채는 흑곰의 날렵한 발톱처럼, 빠르고 거세게 몰
아쳐 오는 조영(爪影)이 순식간에 육초량의 전신을 가두고 강맹
한 지력들을 퉁겨냈다.
『좋아!』
질끈 어금니를 악문 육초량의 철검이 백색의 검강을 은막처럼
두르고 십육방(十六方)을 일시에 치고 베어나갔다. 극변(極變)의
현란함을 가지고 있는 출운산격(出雲散擊)의 어지러운 검격이었
다.
카카캉-!
사공영호의 웅조와 부딪친 철검이 마치 청옥석에 떨어져 퉁겨
지듯 요란하게 진동하며 불똥을 날렸다. 으음, 하는 신음을 흘리
며 한 걸음 물러서는 육초량의 눈에 놀라움이 스쳐갔다. 팔목이
떨어질 듯 저려왔던 것이다. 사공영호의 내력이 이처럼 깊고 두
터우니 그를 이기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육초량을 초조하게
했다. 사공영호의 눈에 이글거리는 살기가 더욱 짙어갔다. 그 또
한 육초량의 철검을 꺾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겠다고 느낀 것이다.
『먼저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놓겠다!』
흉포하게 외친 사공영호가 발끝을 비틀더니 번개처럼 육초량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와 함께 눈앞에서 육초량의 신형이 물방
울이 흩어지듯 종잡을 수 없는 방향감을 가지고 사방으로 맹렬하
게 흩어졌다.
『허엇!』
사공영호의 눈에 언뜻 당혹감이 어렸다. 초식의 일정한 규칙과
틀을 벗어난 육초량의 분수의 보는 의발즉변(意發卽變)의 자유보
(自由步)였다. 그것은 무변(無變) 속에 다변(多變)을 가지고 있
었고, 무정위(無定位) 속에 정위(定位)가 있었다. 틀과 형식에
구애됨이 없는 그러한 보법을 처음 보는 사공영호는 일시지간 어
떻게 대응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끼야앗-!』
그의 시선을 흩트리는 데 성공한 육초량의 철검이 다시 질풍
같은 기세로 떨어졌다.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는
듯 싶더니 쇠망치로 청석을 두드리는 듯한 요란한 굉음이 쩡쩡
울려 나왔다. 그 속에서 무거운 신음을 흘리며 육초량이 쿵쿵거
리고 다섯 걸음이나 물러났다. 창백한 안색으로 버티고 서 있는
사공영호의 어깨 위에서 한 줄기 선혈이 치솟아 올랐다. 이 한
번의 격돌에서 두 사람 모두 손해를 본 것이 분명했다.
『놈, 과연 굉장하구나. 노부의 호신강기를 깰 정도라니...』
아직도 떨리고 있는 가슴의 진통을 눌러 참는 육초량의 얼굴에
경악이 빠르게 스쳐갔다. 말로만 전해 들었던 호신강기라는 것이
었다. 그런 게 설마 있을까 했는데 눈앞의 사공영호에게서 직접
보게 된 것이다.
어깨의 상처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이를 악문 사공영호
가 다시 번개처럼 뛰어들며 연환지(連環指)를 갈겼다. 탄지십팔
해의 금강지력이 뇌전처럼 뻗어 나갔다. 육초량은 넘칠 듯한 투
지를 온몸 가득 끌어올리고 철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부드득 이를 간 육초량이 검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며 눈부
신 백색의 검기를 어지럽게 쳐냈다. 난풍구도(亂風九道)에 이은
십해출횡(十海出橫)과 일소천운(一燒天雲)의 폭풍검세가 숨돌릴
틈 없이 쏟아져 나갔다.
카카카캉-!
귀청을 찢는 요란한 쇳소리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철검이
부러질 듯 크게 휘고, 육초량이 다시 사공영호의 막강한 잠력을
견디지 못한 채 퉁겨져 나왔다. 그림자처럼 쫓아 들어오고 있는
사공영호의 부릅뜬 눈이 와락 다가섰다. 그의 벼락처럼 차오는
발길질은 감리보록에서 나온 출룡십삼각(出龍十三脚)의 절기였다.
크게 놀란 육초량의 신형이 흔들린 순간,
『죽엇!』
마황파진도(魔荒破陣刀)의 도법(刀法)을 운용한 사공영호의 수
강(手 )이 떨어졌다. 그것이 육초량의 정수리 속으로 사정없이
파고들 찰라였다.
씨이이-!
소리 없이 뻗어 나온 한 줄기의 검기가 벼락처럼 사공영호의
우측 어깨를 끊어갔다. 그 위력적인 검기를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경쾌한 절삭음(切削音)과 함께 사공영호의 오른 팔
이 어깨에서부터 매끈하게 잘려 떨어졌다. 하나뿐인 팔이 떨어졌
다는 것보다 자신의 호신강기를 가볍게 베어 버린 검기의 예리함
이 더 크게 사공영호를 경악시켰다.
『으아악-!』
놀라움과 분노, 고통으로 처절하게 외치는 그의 정수리 위로
육초량의 철검이 사정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와 함께 초유성의
검기도 다시 사공영호의 허리를 노리고 은빛 호선을 그리며 날아
들었다.
퍼어억-!
육초량의 철검이 대나무를 쪼개듯 남천일존 사공영호의 정수리
를 두 쪽으로 가르며 쳐내려갔다. 동시에 초유성의 싸늘한 검기
도 그의 허리를 가르고 빠져 나왔다. 십자로 베어져 네 토막으로
갈라진 사공영호의 몸이 모래성이 무너지듯 와르르 무너져 내렸
다.
거친 어깨 숨을 몰아쉬며 헐떡이고 있는 육초량의 눈에는 아직
도 가시지 않은 살기가 남아 있었다. 그 곁에서 초유성은 유수검
을 털어 혈조(血槽)를 타고 흐르는 피를 뿌리고 있었다. 그가 허
무를 가득 담고 가라앉은 눈으로 발아래 흩어져 있는 사공영호의
처참한 주검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아-』
그 끔찍한 모습에 수련은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옥청향은 냉
여옥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어 버린 채 온몸을 떨고 있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가까스로 몸을 추스르며 일어서는 단목굉 곁에서 대방이 떨리
는 손을 합장한 채 불호를 외웠다.
『사공영호야, 사공영호...』
입가의 피를 닦으며 단목굉이 몇 번인가 처연한 어조로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냉여옥이 청향의 얼굴을 자신의 품에 묻어
그 처참한 모습으로부터 가려 주며 길게 탄식했다.
『저토록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될 것을... 무엇을 위하여 인간의
욕망은 존재하는 것일까...』
<5>
『어서 서둘러야 해요.』
초유성의 품에 안겨 몸을 떨고 있던 수련이 문득 생각난 듯 육
초량 일행을 돌아보며 재촉했다.
『반 시진 후면 이 섬의 화맥에 묻어 둔 일만 근의 화약이 터져
요. 더 지체할 여유가 없어요.』
『그래요. 수련 낭자의 말대로 어서 서둘러야 해요.』
냉여옥도 다급한 얼굴로 서둘렀다. 여전히 어깨를 떨고 있는
옥청향을 가슴속에 끌어안고 있는 채였다.
갑자기 풀린 긴장과, 처절했던 혈전의 여파로 멍하니 넋을 잃
고 있던 육초량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초형, 어서 갑시다!』
그가 초유성의 손을 잡았다. 육초량을 바라보는 초유성의 눈에
따뜻한 웃음이 감돌았다.
『그대들은 어서 떠나도록 하시오. 나는 수련과 함께 가야 할
곳이 따로 있소이다.』
『어디로..?』
『하하... 산이 있고 물이 있고 흰 구름이 있으며, 나와 수련을
알아보지 못하는 순박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 바로 그 곳이 아니
겠소?』
『......』
초유성이 부드러운 눈길로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수련을 바라
보았다.
『우리 둘만의 조용한 삶을 위하여 이제는 검 대신 호미를 들
생각이라오.』
수련이 가만히 초유성의 품에서 빠져나와 냉여옥을 바라보았
다.
『공주님을 다시는 뵙지 못하게 되겠군요.』
『......』
『섬의 남쪽 바위틈에 사공영호가 숨겨놓은 배가 있어요. 어서
서두르세요.』
『그럼 행복하시기를 빌겠어요.』
가볍게 목례를 보낸 냉여옥이 청향을 꼭 안아 들고 먼저 몸을
날렸다.
『초형, 언제든 다시 뵐 수 있기를...』
『하하, 그대의 검은 이제 무적지경에 이르렀는데 설마 나에게
또 그 비연참의 일격을 시험하기 위해서라면 사양하겠네.』
굳게 손을 잡아오는 초유성 앞에서 육초량이 무안함으로 얼굴
을 붉혔다.
『형과 겨루어보고 싶은 마음은 지금도 간절하다오.』
하하, 웃은 초유성이 육초량의 어깨를 당겨 품에 안았다.
『잘 가게. 부디 옥소저를 울리지 말고.』
『형도 다시는 수련 낭자와 헤어지는 일이 없기를... 그럼...』
육초량이 초유성과 뜨거운 시선을 나누는걸 보고 있던 단목굉
이 코를 후비며 탄식했다.
『제기랄, 노부의 삼십 년 고련도 지랄이 되고 말았구나. 저 두
어린놈들이 저와 같으니... 에잇, 사공 늙은이와 공야승 그 덜떨
어진 물건들을 따라갈 걸..... 이제는 아무도 노부를 무서워하지
않을 테니 무슨 재미로 살아갈꼬?』
『사백, 그 무슨 서운한 말씀입니까? 정 심심하시면 다시 소림
에 와서...』
단목굉의 처연함을 달래주기 위해 말을 꺼냈던 대방이 기겁을
하고 엉덩이에 불이 붙기라도 한 듯 냅다 내달려 달아나기 시작
했다. 심술로 반짝이는 단목굉의 눈이 그에게 향해진 탓이었다.
『맞다! 노부의 남은 삶에 어찌 낙이 없을 소냐!』
손뼉을 친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대방의 그림자를 보고 번
개처럼 뛰쳐나갔다.
『이놈, 게 섰거라!』
* * * *
쿠쿠쿠쿠-
콰아앙-!
천지를 뒤흔드는 엄청난 폭발과 함께 불기둥이 하늘을 찌르고
치솟았다. 넘실대는 파도 너머 멀리 보이는 생사도 전체가 요란
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낙진을 구름처럼 비산시키며 분화구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불기둥이 하늘 끝까지 닿을 듯했다. 시뻘건 용
암이 마치 악마의 혀처럼 흘러내려 생사도 전체를 불길 속에 잠
기게 하고 있었다.
주위?바닷물들이 무섭게 증발하면서 짙은 운무로 피어올라
퍼져 나갔다.
쿠쿠쿠쿠-
쓰러져 가는 거대한 짐승의 신음처럼 으르렁거리는 굉음이 해
저 깊은 곳에서 떠올랐다. 그리고 콰콰쾅! 하는 무서운 굉음으로
대 폭발을 일으킨 생사도가 수천, 수만 조각으로 갈라진 채 서서
히 바다 속으로 그 모습을 감추어 갔다. 아직도 식을 줄 모르는
불기둥만이 해수의 표면을 뚫고 솟아올라 하늘을 향해 붉은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모든 게 이제 다 끝났는가?』
뱃머리에 서서 그 무서운 모습을 바라보던 육초량이 허탈한 음
성으로 탄식하듯 말했다.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냉여옥이 청향의 손을 잡고 서서 바람에 흩어지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중원에는 진필생 그 자가 남아 있어요. 우리의 생존 사실을
알면 그는 지하로 숨어들어 다시 때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생
사도에서 건너간 수많은 고수들과 함께...』
『......』
『끝이라는 건 영원히 없어요. 죽음이 새로운 삶의 시작이듯,
끝은 곧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말에 불과해요.』
그녀의 말에 육초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다시 시작해야 할 일들이 우리 앞에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구려.』
그의 결연한 모습을 바라보던 냉여옥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
었다.
『호호호... 그래요. 저는 이 순간부터 옥동생이 그랬듯이 육가
가 당신을 지겹도록 쫓아다닐 셈이에요. 그러니 당신은 역시 한
가롭게 쉴 틈이 없겠지요.』
냉여옥의 짜랑짜랑한 말에 옥청향이 샐쭉하여 그녀를 쏘아보았
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따뜻함만이 있을 뿐, 어느 구석에도
미움과 질투는 남아 있지 않았다.
『내 말뜻은 그게 아니라...』
육초량이 무안하여 외면하며 속으로 큰일났다고 중얼거렸다.
두 여자의 틈에서 시달릴 일이 무섭고 끔찍했다.
『하하하, 육사형, 여난에 골치가 아프시거든 다 털어 버리고
소림에 오는 게 어떠시오? 사형의 머리는 소제가 손수 깎아 드리
리다.』
다가와 느물거리며 웃는 대방을 송곳으로 찌르듯 쏘아보기는
냉여옥이나 옥청향이 한결같았다. 그녀들의 손톱이 들썩거리는
것 같았다.
『이크, 취소, 취소!』
대방이 그의 얼굴을 승포 자락으로 감싸 감추며 황급히 물러섰
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한쪽에서 바라보고 있던 단목굉이 호탕
한 대소를 터뜨렸다.
『아하하- 좋다, 좋아. 중이 되기 싫거든 노부에게 오너라. 중
원에 돌아가면 노부는 흩어져 있는 마두들을 끌어 모아 군마성이
나 세워볼까 하는데, 네놈이 원한다면 문지기 정도는 시켜주마.』
육초량은 소림의 석굴에 갇혀 있을 때부터 문지기 운운하던 그
의 말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싫소이다. 대방 저 능청스런 중놈이나 잡아다가 문지기로 삼
으시구려.』
『공지 그 늙은 땡초 대신 어린 중놈이라... 그것도 괜찮겠군.』
단목굉이 군침을 삼키며 힐끗 대방을 돌아보았다.
『으악!』
기겁한 대방이 비명을 터뜨리며 냉큼 선실 속으로 뛰어들어가
버렸다. 그것을 보며 크게 웃는 모두의 눈에 왠지 허전하고 씁쓸
한 감회가 떠올라 있었다.
육초량은 그들로부터 시선을 돌려 멀리 파도에 잠길 듯 위태롭
게 떠 흔들리며 사라져 가고 있는 작은 쪽배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 초유성과 수련도 그들 앞에 새롭게 펼쳐질 또 다른 삶에
대한 기대와, 그 이면의 두려움을 걱정하며 저 바다 끝을 바라보
고 있을 것이었다.
이틀 후면 배는 다시 그들이 떠나왔던 중원에 도달할 것이었
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 어떤 음모와 귀계, 그리고 위험이 기다
리고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 미완의 땅을 향해 나아가
는 뱃머리에 남해의 푸른 파도가 끊임없이 와 부딪치며 흰 포말
을 날리고 있었다.
<완결>
그동안 끝까지 애독해 주시고 댓글로서
격려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 되었습니다 한가위명절 잘보내시고 건강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즐독 하였습니다
즐독 입니다
그동안 수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함니다.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동있게 잘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수고해 주신분 에게 감사 드립니다 !
즐감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흥미있게 잘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