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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뉴우스의 마술사
앵커맨 전4권 중 제1권
저자: 로버트 골드버그. 제럴드 제이 골드버그
역자: 박성범
= 차례 =
머리말 1
1. 샌프란시스코: 지진 9
2. 경쟁 45
3. 톰 브로커: 소도읍, 대도시 56
4. 낭독자에서 앵커로 변모 98
5. 텍사스 출신의 투사 139
6. 언론 기업 장악 199
머리말
그들은 가족의 일원 같으며, 그들의 얼굴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 적극적인 댄은,
강하고 단호한 눈매를 지닌 헤비급 선수같이 CBS 카메라 앞에 나와 뉴스를 내보낸다.
친근한 미소와 인상을 지닌 톰은, 회색 머리의 소년 성가대원과 같은 귀여운 용모를
가지고 NBC의 시청률 경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머리가 좀 빠지고,
양복 윗주머니에 화려한 손수건을 착용한, 도시풍의 세련된 피터는 ABC의 멋쟁이 뉴스
통솔자로서, 마치 군대가 정확한 거리를 가지고 빠른 걸음으로 행진하듯 자신의 말을
딱딱 잘라 내보낸다.
누가 래더, 브로커, 그리고 제닝스를 모르는가? 공통적으로 국내 저녁뉴스를
맡고있는 이 세 명의 최고의 언론인들은 이 나라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방송인들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매일 저녁 4천만 시청자들이 그들을 지켜보기 위해 채널을
맞추는 것을 고려하면, 네트워크가 그들에게 연간 8백만 달러가 넘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지급한다는 것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다수의 미국인들에겐 이 세 앵커들이 단순한 언론인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들은
최고의 언론인이며, 그들의 기사거리에 나타나는 많은 정치인들보다도 더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이들을 보지 않으려고, TV 앞에서 벗어나 타오스의 원주민 부락 혹은 페어뱅크스의
이글루(에스키모집)로 가도, 여러분은 벌써 그 곳에 자리잡고 있는 댄, 피터, 혹은
톰을 발견할 것이다. 취재중인 기자들같이 그들은 자신의 실체를 나타내어, 필연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취재하고 있는 기사의 일부가 된다. 인기인들처럼 그들은 그것에
익숙해 있다.
그들의 높은 가시성은 하나의 효과를 갖는데, 그것은 네트워크가 현대의 앵커들을
뉴스의 보도뿐 아니라, 뉴스를 판매하는 데 이용하는 것이다. 즉, 그들은
프로그램이라는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다.
개인 숭배가 TV뉴스에 적합하건 아니건, 네트워크 시스템은 제닝스, 래더, 그리고
브로커에게 언론에 있어 최고의 자리를 제공한다. 만일 네트워크가 그들을 선도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면 그 대가로 그들은 특건, 영향력, 금전, 통제력 측면에서 더 많은
것을 부여받고 얻게된다. 그리고 또한 거기엔 주요 기사를 다룬다는 만족감 또한 있다.
별 큰 사건이 없는 해에도, 뉴스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복잡하고 세밀함을 요구한다.
그러나 빠른 속도로 역사적 발전이 이루어졌던 1989년과 같은 변혁의 해에는,
뉴스산업은 그 흥분과 중요성을 더했다.
비행기 추락사고가 있었고, 쿠데타 시도가 있었으며, 허리케인 휴고는 동부 해안을
강타했고, 서부엔 지진이 있었다. 반면에, 엑슨 발데즈 기름 유출과 지구의 온실화
현상, 그리고 산성비는 환경 파괴의 요인으로 제기되어 곳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술렁이게 했다.
중국에서 꽃피던 민주주의는 천안문 광장의 유혈대학살에서 무참히 짓밟히게 되었다.
그러나 지구 가운데에선 다시 민주주의의 바람이 일었다. 독재자 호네커와 차우세스크
정부는 전복되고, 공산당의 지배는 폴란드,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에서 종식되었다.
소련에서조차도 공개선거를 실시하였다. 그해 말 조용히 끝날수 없다는 듯, 12월에
미 육군은 파나마를 침공하여, 파나마의 폭군이며 얼굴이 얽은 독재자인 마뉴엘
노리에가 장군을 축출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수 시티까지, 천안문광장에서 동베를린까지, 폴란드에서
파나마까지, 1989년은, TV가 가정 필수품이 된 이후 40여년에 걸쳐 있는 뉴스사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해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변덕스럽고 예측할 수 없던 한 해였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 소식을 전해준 것은 TV 뉴스였다. 누가 그 강력한 인상을 잊을수
있겠는가? 탱크 대열에 맞서 홀로 가로막고 있던 중국의 한 학생, 거리를 뛰쳐나와
그들의 국가를 부르던 수백만 체코인들, 베를린장벽을 연장으로 무너뜨리며 즐거워하던
독일인들.
비록 나중에 많은 잡지에선명한 사진들이 게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 비평가
앤디 그런버그의 말처럼, "가슴속에 계속 불타는 격렬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건들이 일어났던 바로 그날 네트워크에 나타난, 때로는 흐릿하고, 때로는 흔들려
보였던 사건의 화상들이다.
이러한 격변하는 역사와 빠르게 밝혀져 보도되는 뉴스 속에서, 네트워크 앵커들,
즉 CBS의 댄 래더, ABC의 피터 제닝스, NBC의 톰 브로커는 그들의 사무실에서 짐을
꾸리고 나와 사건 현장으로 갔다.
래더는 중국에 가서 천안문 광장에 모여있던 학생들과 인터뷰를 했다. 브로커는
독일로 가 베를린장벽의 개방현장에 있었고, 제닝스는 헝가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해말에 세 사람은 미래 세계의 구도에 협의하는 정상회담을 가까이서 취재하였고,
각자는 서로를 능가하고, 또 그들의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열을 올렸다.
NBC 저녁뉴스의 국내 담당 제작자인 잭 체스넛이 말하기를, 그들 세 앵커들이
경쟁적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단편소설 분야가 아닌 뉴스 사업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자신들은 사건에 가장 먼저 접해 그것이 가장 좋은 기사가 되기를 바라고,
또한 그러한 시청률에 반영이 되어 그 경쟁에서 우위에 서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경쟁은
일에 있어서 핵심이 된다. 뉴스사업 종사자들은 그들 스스로를 일컬어 자극 중독자라
즐겨 부른다. 그들은 방송 시작 5초전, 저녁뉴스 방송을 편집하는 것을 시솟 90마일로
달리는 차의 팬 벨트를 바꿔주는 것과 비교한다.
이 방면의 직업에서 선두주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저돌적이며, 마감시간
지향적인 일 중독자들,즉 예를들어 추수감사절 때에 일때문에 밖에 나와 있어서
저녁식사를 걸러도 불평하지 않고, 크리마스때에 자식들과 같이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일하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그러한 종류의 사람들이다.댄 래더는
"자신들이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약간 과장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전파매체의 베터랑 언론인들은 준군사적 조직적 성격으로서의
그들의 직업에 대해 토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최정상에 오르는
것은 모든 것 중에 가장 경쟁적인 것이다.
브로커, 제닝스, 래더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이 네트워크 뉴스 분야에서 정상으로
올라선 것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의 초점을 이룬다. 부분적으론, 그 이야기는 1989년
한 해에 그들이 치뤘던 시청률 전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한 그것은 그들과 함께 팀을
이루어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저녁뉴스 방송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직면했던 그날 그날의 문제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경쟁관계에 있는 세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은 그들이 몸담고 있는 분야를 이해해야 하며, 또한 산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과 같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직업에
있어서 정상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뉴욕, 1990년 6월@ff
1. 샌프란시스코: 지진
태평양 표준 시간으로 오후 5시 40분, 땅이 요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샌 안드레아스 단층을 따라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진행돼 가면서 굉음을 내며 속도를
높이고 그 강도를 더해가는 화물을 적게 실은 열차와 같았다. 마리나 지역으로부터
캐스트로까지, 또 금융 중심가로부터 산 언덕까지, 책장들이 넘어지고 창문들은
금이 가고 커다란 석회벽과 돌덩어리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캔들스틱 구장에서는
야구선수 럭키 핸더슨이 타석에 들어서기 직전이었다. 좌석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강도 6.9의 지진으로 인해 경기장이 물결치듯 요동하기 시작하자 관람객들은
쥐 죽은 듯이 잠잠해졌다.
그런 다음에는 마치 자연재해 역시 또 하나의 스포츠인 것처럼 6만의팬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야구장 전체에 휴대용 "워치맨" 수상기를 갖고 온 사람들은
뉴스에서 자신들의 모습이 나오는 것을 보기 위해 TV를 켰다.
3천 마일 떨어진 곳, 뉴욕에서는 ABC뉴스의 고참 프로듀서인 존 테렌지오가
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월드 뉴스 투나잇(World News tonight)"
방송이 그날 저녁 아무런 사고없이 끝났기 때문에 그는 기분 좋은 마음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화장실로 가는 길에 카운터 옆을 지나면서 그는 벽 위에 설치되어 있는 TV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빌어먹을! 저거 진짜인가?"라고 그가 말했다. 야구협회위원장
페이 빈센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연안 소형 비행선 "굿이어"호에서 촬영한
오클랜드만 다리의 장면들이 보였다. 그것은 완전히 유린당한 모습이었고 제일 꼭대기
도로는 붕괴되어 바닥에 놓여 있었다. 자신의 고정 방송인 "Nightline"을 준비하느라
워싱턴 지국에 있던 테드 카펠은 ABC보도국이 급히 수집한 논평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날 저녁 테렌지오는 집에 갈수 없었다. 택시에 뛰어올라서 그는 도시를 가로질러
웨스트 66가로 갔다.그리고 북적대는 "World News Tonight"뉴스 편집실로 뛰어
들어갔다. 한 시간 채 못 되어 그는 조지 워싱턴 다리를 건너 뉴저지 주의 테터보로
공항으로 가는 차에 몸을 싣고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날 밤 네 대의 비행기가 출발했다. 첫번째로 제트기 리어호가 오전 12시 30분에
ABC의 특별팀을 실은 채 이륙했다. 그들은 세계 어디서든지 생방송을 할 수 있는
소규모의 팀이었지만 놀랄만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턱수염을 기른 테렌지오는 생생한
현장 제작자로서 방송을 할 장소를 물색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으며, 스튜 슈츠맨은
방송을 하는데 필요한 미리 녹화된 필름을 다루는 데 베터랑이었다. 안경을 낀 던라비는
대본을 점검하기도 하는 편집책임자였다. 가운데 앉아있는 피터 제닝스는 앵커먼이었다.
피터 제닝스는 리어호의 앞쪽 우측 좌석에서 일어나레인코트를 벗은 후 6피트
1인치의 체구를 쭉 뻗었다. 그리고는 아래로 숙여서 서류가방을 집어들고 무릎위에
올려놓고 열었다. 이 가방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피터 제닝스가 가지고 다닐 것이라고
기대할 만큼 멋진 서류가방은 아니었다. 그것은 낡고 색이 바랜 노란 오렌지색의
서류가방이었으며 윗부분은 낡아서 너풀거렸고 가죽은 벗겨진 상태였다. 지난 20년동안
전세계로 그의 서류를 날라왔던 것도 바로 그 믿음직한 가방이었으며, 모스크바에서
개최될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정상회담에 대한 보도자료들이 들어 있다.제닝스는
넥타이를 풀어헤친 채로 비행기 안에서 제작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매일 저녁뉴스 시간을 통해서만 피터 제닝스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방송을
하고 있지 않은 그의 모습은 놀랄만한 일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구사하는
캐나다 상류사회의 말씨와 그가 입고 있는 잘 맞춘 옷만큼이나 그가 우아하고
세련되었으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그와 함께 일하는 제작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옷에만 신경쓰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는 피터 제닝스가 항상 셔츠 자락의 한
부분을 능어뜨리고 있느 사람이며 웃을 때면 양볼이 씰룩대면서 얼굴이 밝은
분홍색으로 바뀌는 그런 사람이라고 여러분에게 말해줄 것이다. 한번은 그가
"뉴욕 타임스"에서 가장 옷을 잘 입는 사람들 중 한 명으로 뽑힌 적이 있었다.
신문사에서는 전화를 해서 그가 단골로 가는 런던의 재단사는 누구냐고 물어왔는데
그는 그때 그 신문사에 한 대답을 생각할 때면 지금도 박장대소를 한다. "미스터
마크스와 미스터 스펜서"라고 대답했는데 그것은 싼 런던의 백화점 이름을 가지고
짜맞추었던 것이다. 그때 그 일만 기억하면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웃곤 한다
(글쎄 내가 한 말이 그대로 신문에 나지 않았겠어? 그 기사를 읽어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아나?)
또한 그의 동료들은 그가 단지 익살맞은 장난기만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열심히 주어진 일을 완수해내는 사람이며, 언제나 다음에 할, 모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을 찾아내서 그 속에 몰입하려고 노력하고, 또 늘 뭔가를 하지 않고서는
안된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
펜실바니아 상공에서 조그마한 항공기인 리어호 안에 처박힌 채 피터 제닝스와 그의
제작진들은 서로 질문을 주고 받았다. 어디에 착륙해야 할까? 피해는 얼마나 심할까?
어디에서 제닝스가 보도하는 것이 좋을까? 어떤 장면이 지진에 대한 소식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제닝스는 그 지진에 대한 최신 정보를 요구했다.제작진 가운데 한
사람이 비행기 안에 있는 전화를 집어들고서 뉴욕에 있는 뉴스 편집실과 통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고요한 정적뿐이었다. 결국 그들은 잠시 눈을
붙이기로 결정했다. 세 명의 제작자들은 뒷자리의 긴 의자에 서로 포개진 채로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제닝스는 앞쪽 의자에서 커다란 체구를 쭉 뻗치고 누웠다.
잠은 닥쳐올 시간에 대한 귀중한 필수품이었으며, 쾌활한 모습으로 비극을 대면해야
하는 앵커보다 더 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없다.
3시간 30분 후에 비행기는 연료를 재공급받기 위해서 캔사스주의 살리나 주에 내렸다.
ABC팀은 미국을 종단하여 이미 중간 정도 왓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비행기 급유가 완전히 끝났을 때 테렌지오는 L.A의
편집실에 전화를 걸어 몇가지 지시사항을 얻었다.
(오클랜드는 봉쇄되었음. 샌 호제에 착륙하라. 헬리콥터가 당신들을 오클랜드로
실어가기 위해 대기중이다) 그러나 일단 공중으로 떠오르자마자 리어호의 조종사들이
다른 지시를 받았다. 오클랜드 국제공항이 개방되어 있다고 말하눈 것을 들었다.
조종사들과 토의한 후 제닝스와 그의 팀은 오클랜드로 가서 운명에 맡겨보기로
결정했다.
ABC 멤버들이 탄 비행기가 오클랜드 국제공항에 착륙했을 때는 태평양 표준시간으로
오전 5시 30분(동부시간으로는 8시 30분)이었다. 리어호 안에 설치된 전화로 테렌지오는
마침내 뉴욕과 통화할 수 있었다.그의 가장 커다란 의문은 언제 제닝스가 베이 지역에
대한 특별 생방송을 보도해야 하는가였다. 정규방송 일정을 일단 중단시키고 생생하고
간추린 뉴스를 전달하는 특별보도를 책임지고 있는 제프 그랄닉이 결정된 내용을
알려주었다. 방송 시간은 네 시간 후, 즉 동부는 정오, 서부는 9시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어스름하게 날이 밝아오기도 전에 오클랜드 공항에서 제닝스는 버틀러 항공 터미널에
있는 휴게실로 향하였다. 그는 공항 건너편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두 대의 헬기를
발견할수 있었다. 방송시간까지는 겨우 네 시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 상황을
조망해보고, 보도의 윤곽에 대한 감을 잡기 위해서 공중에 올라가고 싶어서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그와 스튜 슈츠맨은 그날 저녁까지 "World News Tonight"프로를
구성해야만 했다.
동이 트기를 기다리면서 제닝스.던라비.슈츠맨.테렌지오는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결국 그들은 해가 떠오르자마자 앵커와 보도 내용 제작자가
피해 상황을 정찰하기 위해서 헬기 한대를 타고 이륙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테렌지오와
던라비는 월드 시리즈 때문에 설치된 ABC의 이동방송 차량이 있는 오클랜드의
경기장으로 가려고 했고 그곳은 아직까지 동부와 연락이 닿고 있었다. 제닝스는
특별방송이 시작되기 45분 전까지 현장에서부터 돌아와야만 했다.
오전 7시쯤 테렌지오는 오클랜드 경기장에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 그때가 동부시간으로
10시였고 보도국의 일상적인 아침회의 시간이었다. 뉴욕에 있는 본사와 전국에 설치되어
있는 모든 지국들이 그날의 취재내용에 대해서 토론하면서 연결되었다. 물론 최고의
관심거리는 샌프란시스코였다. 사실 너무도 관심이 높아 보도국 부사장인 밥 머피까지도
지금 당장 제닝스가 방송하는 것을 보고 싶어했다.
(지금 당장이라고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테렌지오가 말했다.
(태평양 시간으로 9시까지는 방송이 필요없다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래)
머피가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선수쳤으면 좋겠어. 브로커와 래더는 아직 비행기로 가고 있는
중이야)
그러한 지시가 ABC 뉴스의 충동적인 사장 룬 알럿지에게서부터 전해졌음이 분명했다.
알럿지는 ABC팀이 첫번째로 방송하기를 원했으며 ABC가 뉴스를 독점하기를 원했다.
알럿지의 반응은 예견된 것이었다. 오늘날 보도경쟁에 있어서는 생생한 취재가
핵심이다.앵커맨이 제일 먼저 현장에 도착해서 보도하는 것이 그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방송계에서는 그것을 "팝" 혹은 "깃발을 흔들다(waving the
flag)"라고 한다. 달에서의 닐 암스트롱, 혹은 바하마제도의 콜롬부스와 같이
ABC, CBS, NBC 모두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지역에 자신들의 깃발을 꽂고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깃발 흔들기는 보도의 질과는 거의 상관없는 경우가 흔하다. 그 이름이 나타내
주고 있는 것처럼 "pop"은 단지 현장으로부터의 간략 보도일 뿐이다.
그러나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해서 사건 발생지역 전체응 파악하고 사건의 내용을 알아내는 것이야말로
보도부분에서 승리를 얻을수 있는 방법이었다.
오클랜드 공항에서는 제닝스와 스튜 슈츠맨이 헬기에 실을 카메라 장비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있었는데 그때 알럿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행운은 알럿지의 편이었다. 몇
분 후 헬기는 다시 짐을 내려 놓았고, 제닝스는 ABC 단독 생방송을 위한 카메라 위치로
가고 있었고, 월드 시리즈 보도를 위해 준비된 카메라들과 위성 송신 장비들을 가지고
와서 오클랜드에 있는 붕괴된 니미츠 고속도로 가까이에 설치하였다.
생방송 현장으로 차를 타고 가면서 제닝스는 지방뉴스를 들었다. 그리고나서
운전사에게 여러가지 사항을 상세하게 물었다. 그 운전수는 그 지역을 잘 알고 있는
L.A 지국의 카메라맨이었다.
도중에 길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제닝스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카메라 앞에 설수 있었으며, 리포터 그랙 더브스와 함께 장면을 설명했다.
(안녕하십니까? 오클랜드로부터 직접 생방송으로 보도하고 있는 피터 제닝스입니다)
그리고 단지 몇분만에 제닝스의 일은 끝났다.
테렌지오는 특별보도 책임자인 제프 그랄닉과 통화를 했다. 보도는 성공적이었다.
그들이 첫번째였다. 그들이 승리한 것이다. 사실 너무 큰 성공이어서 그랄닉은
한시간후에 한 번 더 방송하기를 원했다.
그때 피터 제닝스는 기분이 언짢아지기 시작했다.
(이것봐요, 10초마다 특별 생방송을 해야 한다면 언제 가서 "World News Tonight"을
준비할수 있겠소!) 하고 목소리 높여 말했다. 그랄닉은 알럿지와 급히 상의한 후
몇분내에 다시 테렌지오에게 말했다.
(좋아, "World News tonight"을 준비하도록 제닝스를 놔둬)
오전 9시 30분 젠이스와 스튜 슈츠맨은 마침내 마리나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폐허 위를 비행하면서 그 도시를 공중에서 내려다볼수 있었다. 그들이 지진의 위력을
생생하게 체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강도 7.6의 지진의 멕시코시티를
강타했을 때 스튜 슈츠맨이 투숙하고 있던 호텔방의 벽이 심하게 진동했으며 창문들은
덜컹거렸고 침대또한 몹시 심하게 흔들려서 방바닥에 떨어질 지경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그는 어쩔줄을 몰랐다. 복도의 기둥 아래에라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시간조차 없었다. 밖에서는 차량충돌 사고가 일어났고 경적소리가 바람을
타고 강렬하게 들려왔다. 스튜 슈츠맨은 (사실 그때 우리는 죽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 다음날 제닝스가 그 현장엣 스튜 슈츠맨을 만났을때 아주 아이러니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16세기에 건축된 교회들은 그리 큰 손상을 입지 않았ㅇ므에도
불구하고 병원을 포함한 현대식 건축물들은 순식간에 부서진 돌들로 변했던 것이다.
멕시코시티는 박살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프레시디오와 금문교, 어디를 보아도 그 분위기가
놀라울 정도로 평온했다. 이것에 대해 스튜 슈츠맨은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우리는
매우 놀랐습니다. 베이 다리와 고속도로를 제외하고서 샌프란시스코는 완전히
평상시처럼 정상이었습니다. 그날은 햇볕이 비쳤으나 하늘은 흐린 멋진 날이었습니다.
시내는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닝스와 스튜 슈츠맨이 도시를 내려다보며 살피고 있는 동안 테렌지와 던라비는
ABC 시청자들에게 비극의 현장을 전달할수 있는 다른 곳을 찾고 있었다. (문제는
말이야 피터가 방송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어디냐 하는 것야. 어디서 방송할까?
현장의 모든 것을 전달할수 있는 장소가 필요해. 최고의 장면이 되어야 한단 말이야.
가장 적합한 장면으로 시작해야 할 텐데)라고 테렌지오가 혼잣말을 하였다.
니미츠 고속도로 붕괴 현장 근처에 생방송 카메라를 위치시키기 위해 테렌지오는
마치 팬케이크처럼 한 고속도로가 다른 고속도로 위에 이중으로 쌓여져 있는 두 개의
도로를 찾았다. 그 지방 당국은 말하기를 2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오래된 콘크리트
길이 무너지면서 아래 도로를 지나가던 운전자들을 짓뭉개서 사망했다고 말한다.
이곳은 피해의 중심지역인 베이 지역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이었다.
사실 ABC 방송국은 눈길을 끄는 장면과 비행선을 이용한 보도로, 또 거기에 더하여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스포츠 중계자 알 마이클스와 워싱턴에 있는 테드 카펠의 논평
덕택에 다른 모든 방송국들에 대해 기선을 제압하고 있었다. 한편, 댄 래더는 옷을
입기 시작하고 있었고, NBC는 톰 브로커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ABC는 자신들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도 모른채 현장을 생생하게 방송하고 있었다.
그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테렌지오와 던라비는 붕괴된 도로를 다른 각도에서 찾고
있었다. (우리느 기가 막힌 장면을 찾고 있었습니다. 시청자들은 언제나 최고의
장면을 원하곤 하지요)라고 그들이 말했다. 옆에 접해 있는 건물의 주인에게 부탁하여
그들은 사닥다리를 오르기 시작했으며 옥상을 조사하였다. 또 전망장소를 찾으려고
노력하였으나 이용할 수 있는 장소가 마땅치 않아 점점 더 낙담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시간은 11시 30분, 12시, 12시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방송시간이 3시간밖에
남지 않았어. 비상수단을 써야겠는 걸. 이곳을 떠나야겠어.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자)라고 테렌지오가 말했다.
테렌지오와 던라비는 그 곳을 급히 떠나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있는 지방지국 KGO
본부의 ABC 방송국으로 향했다. 한편, 헬기 안에서 제닝스와 스튜 슈츠맨은 이미
그 방송국이 있는 건물위르 선회하고 있었다. 그들은 착륙허가를 기다리며 계속해서
그 위를 돌면서 한 시간 이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그 도시를 날고 있었고 코이트 타워 옆과 붕괴된 오클랜드의 베이 다리를
지나쳐 빙글빙글 돌면서 스튜 슈츠맨과 제닝스는 시계를 보고 또 서로 얼굴을
힐끗힐끗 보고 있었다. 마침내 착륙허가를 받았을 때는 서해안 시간으로 정오가 막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뉴욕 시간으로는 오후 3시가 넘었다. 이제 저녁방송 때까지
3시간 남짓 남기고 있었다.
그 다음 며칠 동안 샌프란시스코 취재를 담당하는 뉴스 팀에게는 수송이 악몽과도
같았다. 길은 통제되었고 교통이 막혔다. 제닝스와 ABC에게도 수송문제는 그들을
당황케 하였다. 제닝스는 말하기를 (나는 그때 전화를 걸어 어떻게 손 좀 쓰라고
말했습니다. 트럭 한 대이든 어떤 것이든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얀색 리무진을 타고 비극의 현장에
나타났습니다. 그때문에 우리는 사앙히 꾸지람을 당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방송국으로 천천히 가고 있던 던라비와 제닝스에게 리무진은 뜻밖의
행운이었음이 드러났다. 교통에 갇혀 있었고, 또 그날 방송할 현장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던 그들은 리무진에 있는 TV를 켜서 지방 방송국의 생방송을 찾으려고 다이얼을
돌리고 있었다. 그들은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장소를 알게 되었다. 그
장소들은 모두 마리나 지역에 있었다.
그 두 장소는 모두 여러 층으로 된, 화려한 치장이 된 목조식 건물로서 지진이
일어나 부서져 있었다.
지진으로 인한 주요 피해자 가운데 하나는 샌프란시스코의 발전소였다. 비상
발전기로방송하고 있던 지방 지국 KGO는 전국으로 나가는 뉴스 프로를 방송할 뿐만
아니라 자체 방송을 하느라 상당히 애를 먹고 있었다.
큰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인공위성을 통해 뉴욕으로 전파를 보내어 다시 전국으로 "World News
Tonight"을 방송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의 문제였다. 20년전에는 현장이 비디오 테이프가 아니라
필름으로 찍혔졌다. 필름은 방송으로 내보내기 전에 현상하고 인화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1970년대 비디오가 도입된 이후에도 생방송으로 내보내는 것은 여전히
어려웠다. 불과 6__8년전에야 비로서 인공위성 연결방송(satellite up links)이
발명되어 확산됨으로써 방송은 현대화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이제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도 완전히 생방송 뉴스쇼를 시청자들에게 쉽게 제공할수 있게 되었다.
인공위성 연결방송을 할 트릭이 L.A에서 북쪽으로 오고 있었다. 던라비와
테렌지오가 그 지방 방송국에 도착했을때 그들은 나쁜 소식을 접했다. 그 차의 차축이
무너져 내렸다는 소식이었다. L.A와 샌프란시스코간의 고속도로에서 망가져서 그 차는
방송시간에 맞추어서 도착할수 없을 것 같았다. 50만 달러의 최신 기술장비가 길가에서
아무 쓸모없이 앉아 있었다. 두번째 차, 그러니까 솔트 레이크에서 보낸 예비차량이
있었다. 마리나의 현장 주소를 받았으나 제시간에 도착할수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제 오후 1시 30분이었다. 방송시간 2시간 전이었다.프런트 거리에 있는
샌프란시스코 방송국 안에서 제닝스와 슈츠맨은 그날 방송될 녹화필름의 양을
점검하고 있었다.
제닝스는 펜을 집어들고서 복사본을 훓어 보기 시작했다. 읽어 나가면서 삭제해야
할 부분은 파란색으로 그어나갔다. 문단과 문단을 읽어가면서 그의 펜은 원고를 날쌔게
움직여 나갔다. 원고 복사본을 훓어 나가면서 제닝스는 큰 소리를 내어 읽기도 하였고
리듬을 위해 단어를 체크하였다. (들판 전역에 걸쳐 끔찍한 상흔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는 잠시 끊었다가 다시, (사람들의 삶속에서...)
를 반복했다. 강조점을 옮겨가며 단어의 리듬을 타려고 애썼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한눈에 우리는 공중에서 가스 누출로 인해 더욱 악화된 지난 밤의 화재를 내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화재는 상당히 진화되었습니다)
제닝스는 책임 프로듀서 폴 프리드만과 전화 통화하면서 방송될 다른 기사에 대해
논의하였다. 바로 그때 전화가 울렸다.솔트 레이크 시티 트럭에서부터 온 전화였다.
첫번째 마리나 현장을 지나 두버째 현장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마리나 지역의 반쯤 붕괴된 건물들 앞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경찰, 소방관들이
무슨 말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또 자주 서로 얼가리는 지시를 내리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어떤 지역은 차단되었다. 어떤 지역은 차단되지 않았다. 또 어떤
지역은 차단될 예정이었다.
흔들거리는 건물들 중 어떤 건물의 발코니에서 한 남자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짐을
옮기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테렌지오는 번뜩 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저기서
방송할 수는 없을까? 테렌지오는 그 사람에게 소리를 지르며 자기가 누구인지 또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설명했다.
그러나 박살난 층계를 올라가면서 주변 여건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게 되었다.
난장판이 된 건물, 전기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나쁜 것은 제닝스를 찍기에는 발코니가
너무 좁다는 것이었다. 테렌지오는 그의 시계를 보면서 혼자소 투덜거렸다. (이거 점점
어렵게 되는 걸) 오후 2시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뉴욕 시간으로는 5시 30분이었다.
이제 방송시간까지 한 시간 조금 넘게 남겨 놓고 있을 뿐이었다. 테렌지오는
던라비에게 책임프로듀서 폴 프리드만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화해 달라고 했다.
(보게나 여기 건물 앞에서 방송할 수 있겠어. 그렇지만 소방관들이 건물을 무너뜨리기
시작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돼. 그러나 누가 알겠어?)
테렌지오는 기술팀과 상의하러 갔다. (좋아 여기서 앵커를 해보자)고 그가 말했다.
기술진들은 각자의 일에 착수하였다. 앵커가 설자리(여기에는 카메라, 모니터, 그리고
헤드세트가 있다)와 인공 위성 트럭을 연결할 전선과 케이블을 설치하였다. 여기서부터
뉴욕까지 방송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테렌지오는 그 건물을 책임지고 있는 소방대장과 친해지고자 하였다.
(전 바쁩니다)하고 과중한 일을 맡고 있는 그 소방대장이 톡 쏘듯이 말했다. (이
건물은 위험해요. 저 건물을 무너뜨리지 않겠다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장비가
도착했을 때 건물들이 내려앉고 있었어요)
태평양 표준 시간으로 3시, 그러니까 방송 반 시간 전에 테렌지오는 인공위성을
통해 연결된 뉴욕의 ABC 국장 찰리 하인즈와 헤드폰을 끼고 통화하고 있었다.
(이 장면 어때요, 찰리?) 그는 프레이밍을 하고 있는 하인즈에게 물었다.
방송시간 15분전에 제닝스가 나타났다. 그는 던라비와 원고를 다듬고 있었다.
테렌지오는 제닝스의 팔을 붙잡고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제닝스, 내가
소방대장에게 말해 주어야겠어) 하고 던라비는 다급하게 말했다.
테렌지오가 이미 그 소방대장에게 장황히 설명하였다. 이것이 그저 무대 위에서
혼자 연기하는 지방 리포터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 전국적인 뉴스가 되는지, 약1500만
사람들에게 방영될 생방송이 되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협조해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제닝스가 나타나 앵커로서의 마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는 소방대장에게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힘주어 말했다. 그것은 단순한 매력
이상이었다. 그것은 앵커맨의 매력이요, 스타의 힘이었다.
(우리는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생방송을 할 겁니다)
소방대장이 다소 누그려졌다.
(방송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30분입니다)
(좋아요. 우리는 지금 건물에 장비를 설치할 겁니다. 그러나 4시까지는 무너뜨리지
않겠어요) 하고 그가 불평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닝스와 테렌지오는 우쭐하여 그 소방대장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리고서는
앵커 자리로 돌아갔다. 방송시작 전 7분까지는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 경찰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들이 물었다.
(이 지역은 절대 통행제한 구역이에요. 이곳을 떠나 주셔야 합니다)
(떠나라고요? 그러나 우리는 소방서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요)
(소방서는 이곳 관할이 아니예요. 우리가 책임지고 있어요)
테렌지오는 그 소방대장에게 급히 뛰어갔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말하기를,
(제발 저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말씀 좀 해주십시오)
경찰관과 소방관이 관할구역을 놓고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 동안 마지막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어 정확히 3시 30분에 방송이 되었다. 시작하는 말은 다음과 같았다.
(ABC 방송 "World News Tonight"의 피터 제닝스입니다. 저는 오늘밤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도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씀드리지면 오늘밤은 심한 피해를
입은 샌프란시스코의 마리나에서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으로는...)
제닝스가 그의 뒤에 있는 파괴 현장을 가리켰다.
(여러분이 지켜보고 계시는 바와같이 지금 제 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그러니까
공공안전을 위협한다는 이유 때문에 마리나 거리에 있는 건물 하나를 부술 것입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는 여전히 건재합니다. 최악의 뉴스는 이것입니다.
샌프란시스코의 오클랜드의 건너편에 위치한 한 장소에서 250명 이상이 죽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일부는 정부의 부주의로 죽었습니다)
한편, 오클랜드 건너편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비행기의 신속한 착륙을 위해
뻗어나 있는 길 가까운 곳에서 댄 래더는 소규모 취재단과 함께 TV 시청자들에게 피해
상황을 보도하느라 분주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다른 곳에서는 톰 브로커가 지진에
대해 그와 유사한 불행한 소식을 보도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그날의 다른 뉴스들(
우주 왕복선 아틀란타, 동독이 지도자 에릭 호네커의 사임)이 동부 해안에서
보도되었지만 ABC 방송국의 국장 찰리 하인즈는 화제를 마리나로 돌려 생방송을
진행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지진은 언제나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우리들에게 상기시켜 준다는 점입니다. 바야흐로 자연은
우리들에게 다가와 목을 움켜 쥐었습니다.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이곳에서 지진에 대한
한 시간 동안의 특보를 가지고서 오늘밤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피터 제닝스였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지금까지 샌프란시스코였습니다)
방송이 끝나고 15분 후에 샌프란시스코 소방서는 그 건물을 부수기 시작햇다. 그러나
그날 밤의 일들이 그 뉴스 취재단들에게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36시간 동안 계속
일해 지친 상태에서 그들은 가장 큰 일, 즉 한 사건으로 계획된 오늘밤 저녁 7시
특보를 직면해야 했다.
피곤하여 제닝스는 책상에서 머리를 뒤로 젖히고 던라비와 스튜 슈츠맨과 함께 원고
작성을 계속해 나갔다. 한편 테렌지오는 새로운 문제를 맞고 있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월드 시리즈 장비부로부터 발전기 트럭 한 대를 주문했다. 시께는 6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잠시 정리하는 가운데 제닝스가 앉게 될 자리가 환하게 비추어졌다. 뉴욕에서는
사람들이 제닝스의 보도르 매우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재해복구가 진행중인 도시에서 전해드립니다)
그는 또박또박 세련되면서도 재치있는 어조로 말했다.
(지진은 태풍과 같이 이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뇌리에서 쉽게
잊혀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닝스가 특보를 시작했을 때 소방서 구조대는 생존자들을 구하기 위해서 돌
조각들을 뒤지고 있었다. 그리고 방송중에 두번째 시체 한구가 들것에 실려 나왔다.
샬롯트 테일러(빈틈없이 제닝스의 분장을 맡고있는 금발의 중년여성)는 테렌지오의
팔을 가볍게 툭 쳤다.
(존, 저 사람을 봐)
숯에 검게 그을린 한 사람이 혼자서 거리를 성큼성큼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저 사람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 사체를 발견해낸 분이에요)
테렌지오는 급히 달려갔다. 그 구조요원이 말하기를,
(예, 우리는 시체 두 구를 발견해냈는데 30대 중반의 남자와 여자였습니다. 정말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로 슬픈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팔을
껴안고 있었습니다)
테렌지오는 광고가 나갈 때 급히 돌아와서는 (피터, 피터, 이 사실을 보도해요)라고
말했다.
무참히 죽은 두 구의 시체가 그 잔해로부터 옮겨질 때 구조요원들은 슬픔과
절망속에서 그들의 헬맷을 벗어 쌓여진 돌부스러기 속으로 던졌다.
다음날이 되면 마리나에 있는 ABC 보도 현장은 CNN과 NBC, 또 지방 방송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방송국에 의해 보도될 것이다. ABC에게는 행운의 날이었다. 그들에게는
행운이 뒤따랐다.
그러나 톰 브로커와 NBC 뉴스팀에게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그날 저녁
특보를 내보내기 직전 만사가 잘못되어 나가는 것 같았다. 발전기는 작동하지 않았고
그저 앵커만을 밝혀주는 희미한 조명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NBC 스텝 전체의 대처가 느렸다는 것이었다. 또
설상가상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NBC의 지방 채널이 그날 밤에 심각한 기술상이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또 이같은 웃지못할 실수들에 더하여 뉴욕에 있는 방송국
본부에는 비상대기팀이 없었으며, 또 그같은 급작스러운 엄청난 기사를 취급할 체제가
없었다. 정규방송이 끝난 후에 소수의 신참 직원들이 근무를 했다. 결국 NBC는 ABC나
CBS보다 약 50분 정도 늦게 현장을 방영했다. 브로커는 다음날 아침까지 방송출연을
하지 않았다. 이같은 형편없는 보도를 벌충하기 위하여 NBC는 다른 경쟁 방송사들 중
어느 방송사보다 밤늦게까지 보도를 계속해야 했다. 그러나 지극히 경쟁적이며 신속한
오늘날의 뉴스보도 세계에서 50분은 영원과 다를 바 없다.
그날 밤 CBS는 내내 댄 래더가 셔츠 바람으로 거의 혼자서 방송을 이끌었다. 그의
방송은 정연했고, 심지어 조심스럽기까지 했다. 마치 그가 계속해서 자연재난과 사상자
수가 얼마나 과장되는 경향이 있는가를 TV 시청자들에게 일깨워 주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매우 많은 비극적인 장면에 출연해 재해방송의 일인자라고 불리우는 그가 한
충격적인 방송이었다.
CBS에게 있어서 샌프란시스코는 NBC처럼 패배는 아니었고 또 승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ABC의 확실한 승리였다.
이 재난이 끝나고 난 뒤에 미국인들에게 남아있는 영상은 첫째날 24시간 방영된
폐허의 장면이었다. 그곳에서 생방송을 하는 분주함속에서 현장에 자리잡고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보여주려는 분주함 속에서 세 방송사는 모두 지진의 일격, 파괴,
화재등을 강조했었다. 사실상 지진이 일어난 상황속에서 200명 이상의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 59명이 죽었을 뿐이었다.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피해가 미미한 것이었다. 그러나
부서진 창 몇 개 때문에 TV가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사체들과 화염에 휩싸인 건물들
때문이다. 모든 방송사의 보도 내용은 여하간 부분적으로 상황을 왜곡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승자가 누구냐고 하는 데 대해서는 여지없이 ABC와 그 방송사의 앵커맨 피터
제닝스였다.@ff
2. 경쟁
미국 사람들은 60년대와 70년 초반에 매일밤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와 식탁에 앉아
헌틀리 브리클리나 월터 크론카이트 방송을 시청했다. TV 시청자 중 거의 80p가
네트워크 뉴스 시청을 매일 밤에 치르는 하나의 의식으로 삼았다. CBS, NBC 그리고
상대적으로 그 정도가 떨어지기는 하지만 ABC에게 있어서 그것은 거대한 이익금을
정확히 분배하는 일종의 중년 남자클럽 같은 것으로 비유할 수도 있다.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첫번째 암시는 70년대 중반에 RCA의 회장 손톤 브레드쇼가
방송계의 미래를 연구하는 연구위원회르 발족시켰을 때에 왔다. 연구위원이었던
카산드라는 미래를 예측하면서 1980년대 말까지 네트워크 시청자들이 상당히 떨어질
것이라는 우울한 소식을 가지고 왔다. 네트워크계에서는 불행하게도 브레드쇼의
전문연구위원회가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1981년에 주요 네트워크 뉴스프로의 시청률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70p, 60p, 가장
최근에는 57p까지 급격히 떨어졌다. 정치 경제적 격동기였으며 또한 지진이 있었던
1989년에 텔레비젼 3대 주요 네트워크 회사는 그들 나름의 중대한 전율을 느꼈다.
시청률이 떨어지면서 CBS, NBC, ABC는 20세기 후반에의 적응이라는 고통을 겪었다.
그들에게 이해관계가 너무도 엄청났다. 1989년 중반까지 네트워크 뉴스의 매 30초
광고비가 5만 달러였다. 30분짜리 뉴스 방송에 6분이 광고에 소요되므로 톰, 댄,
피터는 하룻밤 일하고 일 주일에 60만 달러를, 일 년에 1억 5천만 달러 이상을 벌어다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시청자의 시청관습이 달라짐에 따라 상당한 액수의 돈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변화가 생긴 이유가 무엇인가? 단순하게 말하면 80년대에 들어 선택의 폭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채널수가 늘어났다. 채널이 많아지면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재방송이 많아진다. 70년대에는 유선 TV를 갖고 있는 집이 드물었다. 그러나 80년대
말까지 TV 보유 가정수의 절반이상이 유선방송을 갖게 되었다.
유선방송으로부터 직접적 형태의 경쟁이 있었다. 그것은 테드 터너의 CNN과 CNN의
뉴스프로 "Headline News"가 야기한 뉴스 수집 경쟁이었다. 1980년대 동안 이러한
유선방송들은 애숭이 네트워크의 위치에서 주요 네트워크에 대한 당당한 위협이 되는
위치로 성장하여 국제적인 취재 범위의 폭이 이들 주요 네트워크와 거의 동등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24시간 내내 방송된다는 것이었다.
시청자들은 저녁 6시 30분이나 7시가 아니라 낮이나 밤이나 자기에게 편한 시간에
뉴스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24시간 방송체제는 뉴스를 제공하는 이상적
방법이었으며, 이 덕택에 CNN은 매우 쓸모있게 되었다.
네트워크의 인기를 갉아먹은 마지막 한 요인은 지방의 지국에서 일어난 근본적
변화였다(각 네트워크는 전국에 걸쳐서 200개 이상의 개인 소유의 지국이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는 결합체였다) 새로운 인공위성 기술 덕택에 50만 달러만 있으면 어떤
방송국도 개인적으로 인공위성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지구상의 어떤 곳으로부터도 방송이 가능하게 되었다.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지방뉴스는 지엽적인 것이었다. 예컨대 경찰관, 화재, 살인자들이 고작이었다. 오직
네트워크 뉴스만이 전국적이며 국제적이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그들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또 지국이 보다 독립적이게 되었다. 한때 지국은 자신들을, 손에 동냥그릇을
갖고있는 네트워크의 가난한 이웃으로 보았지만 이제 결코 그렇지 않다. 한 지방
지국도 지방뉴스에서 모든 광고시간을 소유하고 있다. 네트워크 뉴스와 이제 거의
다를 바가 없다. 네트워크의 쪽에서 보면 네트워크는 지국에게 황금시간대 프로를
팔아가지고, 또 7, 8개의 지방 지국 방송국을 직접 소유함으로써 돈을 번다. 80년대
초기에 새롭게 자각한 지국들은 자기들도 뉴스를 방송함으로써 또 "행운의
수레바퀴" 프로를 방송함으로써 더욱 많은 돈을 벌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모든 변화들이 네트워크에게 일격을 가하고 있으며 수지가 맞는 지역에서
타격을 입고 있다. 그 결과 한때 심하지 않았던 시청률 경쟁이 지난 십 년 동안
필사적으로 되었으며, CBS, NBC, ABC는 앞을 다투어 점점 감소되는 시청자들을
잡으려고 애썼다.
이러한 경쟁의 핵심적 요소가 A.C. 닐슨 회사가 운영하는 유명한 주간 TV 시청률
체제인 닐슨이다. 시청자를 신비스럽고도 애매한 점수체제(1점은 TV를 갖고 있는
921,000세대를 가리킨다)와 비율(어떤 프로를 보고있는 전체 TV 시청자에 대한 퍼센트)
로분류함으로써 닐슨은 초기 TV 시대 이후부터 이같은 일지 형식의 수치를 표로
만들었다. 이 표는 광고율을 결정하는 기초로써 역할하였다. 그러나 경쟁이 가열됨에
따라 이 시청률은 활기를 띠어 거액의 돈놀이의 주간 점수표가 되었다. 매주
화요일이면 마치 오즈의 마법사에서 나온 것처럼 결과들이 네트워크 컴퓨터에
나타났다.
닐슨은 얼마나 정확한가? 아무도 모른다. 1987년에 몇몇 네트워크가 그 수치가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불만을 토론한 후 닐슨은 "People Meter"방법, 즉 TV 리모트
조정기와 유사한 버튼식 체제를 제시했다. 최근에 네트워크가 다시 불만을 제기했다.
1991년까지 닐슨은 수동식 People Meter, 즉 시청되는 있는 것을 자동적으로 감시하여
기교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인간적 요소들을 제거한 일종의 전자식 "빅브라더"체제를
도입할 것을 약속했다.
닐슨의 수치가 얼마나 정확한지 그 어느 누구도 자신할 수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수치는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데 동의하는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서 닐슨의 수치는 네트워크 뉴스에게 있어서 훨씬 더 중요하게
되었다.왜냐하면 네트워크의 사장들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네트워크 뉴스의
소유자들(ABC는 캐피탈 시티즈, CBS는 래리 티쉬 로윈스, NBC는 제네럴
일렉트릭사(GE)가그 소유자였다)은 대기업들이었으며 일 수행의 평가로서 수치를
신뢰했다.
1988년이 끝나갈 때 시청률 1위를 기록하려는 투쟁은 가열되어 가고 있었다. 간발의
차이로 3개의 저녁뉴스 방송이 나뉘었다. CBS의 댄 래더가 12.1점 22p로 1위를
차지했고, ABC의 피터 제닝스가 11.4점 21p로 2위, NBC의 톰 브로커가 11.2점 21p로
3위를 차지했다. 이같은 살얼음판을 걷는 접전은 TV 뉴스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60년대 내내 헌틀리 브링클리가 지배했다. NBC 뉴스방송의 책임 프로듀서인 루벤
프랭크는 당시에 NBC 뉴스가 시청률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그야말로
독주였다고 주장했다. 70년대에는 CBS의 월터 크론카이트가 당대를 주름잡았다.
그러나 70년대말과 80년대 초기에 이르자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룬 알럿지가
1977년에 ABC 뉴스국 사장으로 임명되자, 그는 연봉 백만 달러의 앵커맨 시대를
열었으며 눈부신 제작기법으로 네트워크 뉴스의 면모를 쇄신했다. 1981년에 월터
크론카이트가 타의에 의해 물러나게 되었다. 이제 자유 경쟁 시대가 아니었다. 80년대
중반 내내 래더, 브로커, 제닝스가 1위를 차지하려는 노력을 했다. 그러나 래더의
"저녁뉴스"가 거의 수위를 차지했다. CBS, ABC, NBC에게 있어서 저녁뉴스는 활짝
열려진 3마리의 경마시합이 되었다.
그 결과들이 점점 근접해지자, 모든 사람이 격분하게도, 네트워크의 기업 소유주들은
닐슨의 수치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전국에 걸쳐 신문들이 마치 경주라도 하듯
주말의 결과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승자는 격찬을 받았고 패자는 비판을 받았다.
"CBS가 정상을 차지하다!"라고 머릿기사에서 격찬하면 샴페인 마개가 기업본부에서
터졌다. "NBC가 꼴찌하다!"라고 신문이 비판하면 제너럴 일렉트릭사는 인재를
발굴하고자 애썼다.
경쟁이 그토록 격렬하고, 또 결과들이 매우 주의깊게 주목되는 상황에서 어떤
사소한 변화도 시청률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여지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뉴스 사업에 관한 책들과 글들이 도처에서 출간되기 시작했고, TV 뉴스맨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기업체들이 네트워크를 인수함으로써 야기된 불안정의 와중에서도(경영진들이
바뀌고 또 바뀌었으며 책임자들이 고용되고 해고되며, 통신원들은 이 네트워크,
저 네트워크로 옮겨다녔다) 1980년대 상당 부분동안 앵커들은 꾸준히 자리를 지켰다.
저널리즘의 스타가 된 브로커, 제닝스, 래더는 엄청난 봉급을 받았으며, 그 자리를
계속해서 고수했다. 그들은 네트워크 뉴스의 간판 얼굴이며 소위 "살아있는
상징물"이다.
그러나 80년대에 앵커들이 꾸준히 자리를 지켰지만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기업의 규칙들은 어떤 때는 미묘하게, 또 어떤 때는 극적으로 변화되었다. 브로커,
제닝스, 래더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들은 기업
인수자들을 다루었는가? 기업 인수자들은 그들의 뉴스 방송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새로운 긴축정책, 또 이윤창출의 새로운 자세가 사건들을 보도하는 능력을
약화시키지는 않았는가? 그들은 모방과 재창조를 가능케 한 능숙한 기법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정보 및 오락의 위협, 즉 뉴스가 정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오락적인
요소도 가미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했는가? 그들은 앵커맨들이
이 회사 저 회사 옮겨다니는 최근의 경향에 어떻게 적응했는가? 또 생방송에 대한
압력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있어서 네트워크 뉴스의
미래는 어떠한가?@ff
3. 톰 브로커: 소도읍, 대도시
맨하탄 중심부에 위치한 NBC 본부가 있는 록펠러 플라자 30번가의 초저녁이었다.
무대를 거닐고 있던 브로커는 "데이빗 레터맨과 이밤을" 프로의 청중들이 갑자기
박수를 치자 피곤한 듯한 미소를 띄워 보냈다. 5시 밖에 안됐지만 톰 브로커는 녹음을
마친 후 바로 저녁뉴스르르 해야만 했다. 사실 톰 브로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곧 갖게 될 예정이었지만 그는 휴가가 정말로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뉴스 PD인
레터맨은 그에게 휴가를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물었다.
(사우스 다코다주의 양톤으로 갈거야. 고등학교 때 거기서 살았거든)
(어린아이에게는 이상적인 곳임에 틀림없을 거야) 하고 레터맨이 짐짓 심각하게
대답하였다. 브로커는 얼굴을 환히 밝히며 등을 앞으로 구부렸다.
(기가막힌 곳이었어! 톰 소여와 같은 아이들에게는 정말로 멋진 곳이었지!)
남동부의 사우스 다코다 주의 땅은 탁자 위처럼 평평하다. 그 땅은 양톤을 향하여
남쪽으로 차를 몰고갈때 끝없이 펼쳐져 있다. 하늘은 푸른색으로 펼쳐져 있어 이내
가슴이 멈추어질 것만 같다. 옥수수와 콩이 밭 전체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거기에는
세계 최대의 목초지인 게이빌이 있다. 양톤 바로 입구에 1_29도로에는 다음과 같은
표지찬이 있다. (사계절의 마을 바로 이 근처 지역을 인디언 부족 스머티 베어와 그의
인디언 부족인 양톤 무리가 한때 지배한 적이 있었다) 또 다른 표지판이 그 도시 내에
12011명의 주민이 살고 있음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깨끗한 거리는 거의 비어 있는
것처럼 봉니다.
6년전에 좀더 많은 고객을 찾아 헤매는 양톤의 상인들이 주말동안 계속되는 축제인
"강변 보트 축제"를 만들어 여름 방문객들을 유치하고자 하였다. 사우스 다코다 주가
100주년이 되는 해인 1989년 브로커는 퍼레이드의 개선장군이었다. 그는 정말로 출세한
시골뜨기 소년이었다. 브로커는 그 기쁨을 마음껏 누렸다.
그 옆에는 그의 아내이자 전 미스 사우스 다코다였던 메레디스가 하얀 베레모자를
왕관처럼 그녀의 검은 머리에 쓰고서 귀족처럼 미소를 지었다.
퍼레이드가 끝나자 브로커는 기꺼이 사인을 해주고, 그의 팬들 중 한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가 세계의 지도자들과 인터뷰할때 자주 양톤의 큰 길가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곤 한답니다. 그들이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 아세요?)
사실 모스크바에서 고르바초프를 인터뷰하기 직전 브로커는 크렘린의 큰 홀에 있는
빨간 카펫 위에 서서 다음을 회상하였다.
(고르바초프와의 대담을 어떻게 진행한다? 그도 대규모 농업지대의 소도읍 출신이지.
그러면 나도 대평원의 출신이며 콤바인을 몰았던 적이 있다는 것을 말해야겠다. 그도
역시 그랬지. 이거야말로 우리 사이를 연결해주는 공통전인 걸)
성공한 앵커맨 브로커에게 있어 양톤이 갖는 의미가 상당하는 것은 정말로 분명하다.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 젊은 시절에(정말로 이상하기는
하지만) 톰 브로커는 도읍을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브로커 가족은 1955년에 양톤에 정착하였다. 세 명의 아들 가운데 장남이었던
톰 브로커는 당시 15세였으며 고등학교 1학년에 막 들어갈 참이었다. 그는 양톤시
북동부의 가장 가까운 곳으로서 병원이 하나밖에 없던 웹스터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지만 사실 16마일 떨어진 브리스톨이라고 불리우는 훨씬 더 작은 마을에서
살았다. 브로커 가족은 오래 된 브로커호텔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 호텔은 그의 여러
숙모들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낡아가는 3층짜리 숙박업소였다.
그의 부모는 앤소니 브로커와 진 브로커였는데 부양가족이 점점 늘어나자 열심히
일했다.그러나 브리스톨에서는 희망이 없엇다. 그래서 서쪽에 있는 사우스 다코다 주
이글루로 갔다. 거기서 앤소니는 미국 정부 군수품 병참부서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미조리강 유역 계획이 비준되었을대 댐 공사에 일꾼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앤소니가 그의 가족을 이끌고 픽스타운에와 포트 렌델 건설
엔지니어 관리 감독이 된 것은 1948__1949년 무렵이었다. 수입을 돕기 위하여 진
브로커는 지방 우체국에 일자리를 하나 얻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젊은 브로커가
일찍부터 배운 것이었다. 아버지 앤소니가 훨씬 더 남쪽에 있는 개빈스 포인트
댐에서 다른 일자리를 얻게되자 그의 가족들은 양톤으로 이사갔는데, 이때가 브로커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1955년 양톤은 톰 브로커가 본 장소 가운데 가장 큰 곳에 속했다. 그가 새로 다니게
된 3층짜리 빨간색 벽돌의 고등학교는 대략 188명을 수용하고 있었는데 그가 본 학교
중 가장 큰 학교였다. (나는 두려울 정도로 압도당했다)고 그는 기꺼이 인정했다.
(나는 내가 50번 고속도로에서 내려 나의 가족이 이사오기 전 친구 몇 분들과 함께
살고 계셨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양톤 거리를 걸었던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가 이처럼 큰 마을에서 사는 것이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1955년 가을학기에 등록한 후 그는 홀과 교실들, 체육관, 그리고 자습실로
배회하였다. (나는 그 곳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였다)라고 톰 브로커는 회상한다.
경쟁심이 강한 10대의 톰 브로커는 야구, 축구, 육상, 그리고 자기가 받아들여지기
위하여 가입할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하러 나갔다.
특별하게 발이 빠른 것도 아니었고, 또 키가 5피트 11인치요, 체중이 162파운드라서
신체적으로도 그다지 우람하지 않았던 톰 브로커에 대해 그의 축구 코치였던 돈
알란은 그를 똑똑하고 볼을 던질수 있는 훌륭한 쿼터백 후보로서 기억하고 있다.
알란은 자기 팀이 최소한 2개의 터치다운 차이로 이겨 나가고 있는 어떤 경기에도
마지막 10초나 15초를 남겨두고 그를 주저하지 않고 기용하곤 했다.
메모리얼 공원에 있는 표지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양톤 고등학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전교생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야외 식탁이 나란히 한 줄로
놓여져 있고, 종이접시에 담긴 음식을 먹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햄버거 냄새가
제초한 지 얼마되지 않은 풀냄새와 섞여 있었다. 강대가 있는 조그마한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8명으로 구성된 밴드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움파파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톰 브로커는 어두운 그늘 속에 있었는데 하얀 테니스 셔츠와 짧은 바지를 입고 런닝
슈즈를 신고 있었다. 그는 부탁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사인을 해주느라 바빴다.
마치 영화스타 같았다.
강대에서 동창회장 셀리아 마이너가 상을 주기위해 톰 브로커를 불렀다.그녀는 귀를
기울이고 있는 청중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들 가운데 톰 브로커가 고등학교 다니던 때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 또 그가 자기 반을 위해 많ㅇ은 음식을 마련한 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상이 그에게 당연히 주어져야 하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상의 이름을 제1회 아슬아슬하게 날다 동창회상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종이가방에서 꺼내어 그녀는 큰 빨간색 멜빵을 그에게 선사하였다.
(오, 정말 멋지군요!) 톰 브로커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브로커는 즉시
그 멜빵을 입으려고 하였다.
그때 메레디스 브로커가 마이크로 나왔고 "제1회 양톤 고등학교 분실물 취급소상"을
받아달라고 요청받았다. 동창회장은 "메레디스가 1학년 때, 그러니까 33년전 그녀는
1956년 연감을 찾아가는 것을 잊었던 적이 있었습니다"라고 폭로하였다. 그러자
청중들이 폭소를 터뜨렷고 메레디스도 같이 웃었다. (나는 당신이 무엇때문에
어리둥절하는지 알고 있었요)라고 셀리아 마이너가 계속해서 말했다. (톰이 그 연감에
글을 썼습니까?)
마이크 쪽으로 몸을 구부리면서 브로커는 빈정대며 말하기를 (저는 같은 것을
1956년 그 반의 다른 모든 여학생들에게 썼습니다)
셀리아 마이너는 그의 말을 일축했다. (맞습니다. 톰과 메레디스는 내가 1956년
연감에 썼던 것을 여러분 모두와 함께 나누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 책을 펼쳣다.
이제 더이상 무관심 할수가 없었던지 톰은 그가 정말로 그가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알기 위하여 그 페이지를 걱정스러운 듯 훔쳐보았다. (어라...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청중들은 달변의 앵커맨이 불편해 하는 모습이 역력히 드러난 것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책에는 이렇게 써 있습니다. "메레디스, 언제나 가장 잘되기만을 빌겠소,
당신은 놀라운 스타요. 56__57년도 반이 그 업적으로 인해 기억되는 반이 되도록
만듭시다. 당신에게 행운이 있기를, 톰 브로커")
톰과 메레디스의 관계 양상은 두드러진 것이었다. 그러나 미래에 그들이 공동의
목적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 또 양톤 고등학교의 더웅 큰 영광을 위해서
괄목할 만한 합작사업을 하는 동반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가 교묘하게 암시한
것이 사실 더 두드러진 것이었다. 그때에도 브로커는 능란한 조작가였다.
브로커 가족은 부유한 집이 아니었다. 오늘날 브로커에게 왜 그의 어머니는 픽스타운
우체국에서 질문을 하면 그는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순진한 대답을 한다. (어머니는
일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는 당시 결혼한 여성이 집밖에서 일한다는 것이 정말로
드물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진 브로커는 사우스 다코다의 어느
농장에서 일했으며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가까운
친구들이 기억하고 있듯이 그녀는 일을 해야만 했기 때문에 일을 했다. (어려운
시절이었죠. 그들은 돈이 필요했어요) 가족이 야톤의 불베리 거리에 있는 한
조그마한 집으로 이사했을 때 진은 계속해서 일을 했으며, 마을 구두가게에서
일자리를 구하였다. 장남 톰뿐만 아니라 윌리암과 마이클, 그리고 먹고 입혀야 할
세 명의 남자아이들이 있었다. 당시 초기 아버지의 수입은 별로 많지 않았다.
톰 자신도 방과후에 일을 하였다. 그와 이웃에 살았던 한 사람이 말하기를 (제
생각으로는 톰은 항상 일했어요. 그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대학교 다닐 때도 역시
일을 했죠) 톰은 헤니 마을 오사게에서 일을 하엿으며 자신의 여행문을 쓰기도
하였다.
양톤에 새 지방 라디오방송국이 개국된 것은 1955년이었다. KYNT는 서쪽 제3번가
시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톰은 일자리에 응모하여 얻어냈다. 왜 KYNT가 경험도 없는
어린 브로커를 기꺼이 채용했는가에 대해 묻자 당시 광고주 중 나중에 KYNT의 운영자가
된 데를 로우커는 말하기를 (톰은 채용하기가 쉬웠습니다. 그는 대단한 개성이
있었어요. 당시만 해도 그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어떤 카리스마 기질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연감에 브로커는 자신의 취미로 춤추기와 레코드를 들고 있다.
KYNT에서 그가 한 일 중 90p는 디스크 쟈키의 일이었으며, 밤새도록 그가 좋아하는
패츠 도미노와 엘비스의 판을 돌렸다. 여름 동안에는 아침에 그 레코드를 돌렷다.
여름에 보통 그는 새벽 5시 15분에 방송을 시작하곤 하였다. 비록 로우커가 톰은
"야행성 경향"이 있다고 말했지만 그는 늘 믿음직했다.
희끗히끗하게 센 은색빛 나는 머리를 하고 선글라스를 끼는 톰 브로커는 양톤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유명한 연사였다. 그는 백만장자처럼 보였다. 그가 NBC의
"Nightly News" 앵커로 받는 연봉이 정확히 280만 달러 이상이다. 주말에 양톤을
방문하는 브로커와 그의 아내는 루이스 앤 클러스 호수 근처의 비싼 휴양지에서
머물렀으며, 옛 친구들을 호화롭게 대접하였다. 그 곳은 그의 아버지가 일한 댐 옆에
있었다.
1989년 중 가장 추웠던 날 가운데 하나였던 2월 6일에(공교롭게도 이 날은 브로커의
생일이었다) 폭탄을 터뜨리겠다는 전화 위협이 있었다. 몇 차례의 위협 중 세번째
위협이었는데, 양톤 고등학교 교장실에서 이 전화를 받았다. 영하의 날씨 속에서
밖으로 대피한 학생들 가운데 하나가 말했다. (이것은 장난이 아니었어. 적어도
그들은 우리에게 코트를 입게 할 거야. 그러나 아직도 추운걸) 전화를 건 사람이
잡혔을 때 그는 전화가 장난이었다고 주장했다.
양톤에서 성장한 젊은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재미없는 한 요인이 있었는데 그곳에
대한 장미빛 기억을 가지고 있는 브로커조차도 때때로 그 사실을 기꺼이 인정한다.
매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하고 잇다. (사우스 다코다의
어린 시절의 여러 장점들 가운데 하나는 지적으로 관심을 갖을 만한 것이 주변에 없기
때문에 더 많은 자료를 찾아 나서게 된다는 점이다)
자신은 고등학교 때 말썽을 피웠다고 스스로 말하면서 그는 토론하기를 (나는
상당히 운이 좋았어. 끝까지 밀어붙이곤 했지) 또 기억에 남을 만한 술자리, 그리고
싸움이 있었다. (우리는 배를 타고 강위를 거세게 달리곤 했지, 그렇지?) 하고 부머의
바텐더인 제리 헌틀리는 말하면서 자신을 방문한 그 앵커맨과 옛날의 추억들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과거를 회상해 볼 때 톰 브로커는 양톤 고등학교를 사랑하였다. 동창생들에게 이
말을 하면서 그는 자신이 양톤 고등학교를 사랑한 이유는 양톤 고등학교가 모두에게
평등한 학교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댐에서 일하셨지만 나는 의사의 딸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8번가에
세워진 커다란 벽돌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똑같이 취급받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에서 의해서 말입니다. 당신이 양톤 동부에 살든 아니면 서부의 8번가에
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또 당신이 농부의 아들이건 전문 직업인의
아들딸이건 혹은 노동자의 딸이건, 당신이 무엇이었든지간에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그 고등학교에서 똑같이 취급되었습니다)
8번가에 세워진 커다란 벽돌집의 메레디스의 아버지, 즉 거부 메리트 올드 의사의
집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청중들이 많았다. 메리트 올드씨 자신이 의사의
아들이었는데 그는 양톤을 좌지우지하는 주요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농장과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주립학교 이사였으며,
지방학교 이사회장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그 마을의 저명한 은행가들과
사업가들이었다. 따라서 양톤 고등학교가 민주주의적 평등의 이상을 실현하는
고립지역이었던 것도 당연하다.
매력, 활력, 미남, 재능 덕택에 그가 결국 큰 집에 살수 있게 되었지만 그는 그러한
환경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피츠제랄드의 게츠비처럼 그는 출생, 운이라는 우연한
요인들로 인하여 차별받기를 거부한 매우 호감이 가며 또 야심만만한 청년이었다.
또 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자기자신의 플라톤적 사고에서 깨어났다"
알란 코치가 보기에 톰이 메레디스에게 푹 빠져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개서 그는 말하기를 (나는 한 젊은 여성에게 그토록 반해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톰이 메레디스와 연애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3학년때였지만
메레디스는 부끄러움을 타는 바니 위스러이나 사랑병이 걸린 브로커 외에도 여러 다른
남자 친구들을 가지고 있었다. 마조리 그로스는 회상하기를 (그녀는 많은 다른
친구들과 데이트를 했습니다. 그녀는 매우 인기가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소녀였지요.
놀라울 정도지요! 메레디스는 그녀의 아름다운 푸른 눈과 사랑스러운 푸르고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매우 매력적이었죠. 저는 톰이 그녀에게 대해서 어떤
유리한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톰은 상당히 끈질겼죠)
그러나 졸업후에 그들은 서로 각자의 길을 갔다. 메레디스는 미조리 주에 있는
조그마한 2년제 자유주의적 예술학교인 코티대학으로, 톰은 아이오와대학으로 갔다.
브로커는 그때 일어났던 일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어제나 최소한의
공부를 하고도 시간을 재미있게 보내고 또 좋은 학점을 딸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훨씬 더 거친 환경속에서 있게 되면서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나는 그곳의
사회적 환경과 시카고 및 다른 곳에서 온 기가 막히게 잘 생긴 여학생 모두에 대단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궤도를 벗어났지요)
서로 합의하에 아이오와를 떠난 그 방랑자(톰을 가리킴)는 다소 고생을 겪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버밀리온 근처에 있는 사우스 다코다 대학에 등록함으로써 삶의
단편을 줍고자 했다. 생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WNEX 지국에서 일하게 됐다.
톰은 WNEX를 좋아했고 그해 대부분을 거기서 일했다. 그러나 그는 해고당했다.
(제 생각으로는 그 원인이 친구 결혼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톰은 과거일을
기억하려고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사장에게 친구 결혼식에 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죠. 그는 허락했어요. 그래서 나는 결혼식에 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큰 폭풍우가 불어쳤고 방송국에서는 어떤 친구가 동시에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일자리를 빼앗겼죠)
돌이켜 생각하면서 브로커는 그 일이 유용한 경험이 되었다고 한다. 즉, 그에게
뉴스가 발생하고 있을때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중요성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 그 사건은 그에게 상처를 가져다 주었다. USD에서의 그의 학문 생활도 역시
잘 되어 나가지 않았다. 그 대학에서 아저씨와 같은 조언자 역활을 해주었던 파버
교수의 제안, 즉 (술도 진탕 마셔보고, 여자도 상대해 보고, 네 멋대로 노래도
불러보라)는 제안에 따라 브로커는 1960년에 다시 한번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브로커는 미네소타 남서부 지역 안에 있는 약 6000개의 마을 가운데 하나인 마샬의
한 작은 라디오방송국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거기서 그는 4시에서 자정까지 일했다.
브로커와 그방송국 소유주는 곧 서로 다투게 되었다. 그래서 일주일도 채 못되어
브로커는 사우스 다코다로 돌아가야 했다.
메레디스도 역시 사우스 다코다로 돌아왔다. 1959년 여름 양톤의 공화당은 심각한
자금난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양톤의 출납관이요, 은행가인 노만 그로스는 좋은
생각을 제시했다. 미스 양톤 선발대회보다도 더 훌륭한 기금 모금원이 어디
있겠는가? 그로스는 메레디스(당시 그녀는 미조리에 있는 그녀는 미조리에 있는
코티대학 1학년을 마친 후 여름을 보내기 위해 집에 와 있었다)에게 그 대회에
나가도록 권고했다. 메레디스는 그 대회에 참가했고, 그녀가 정말로 놀랍게도 1등을
했다. 그 다음은 주 대회였다. 메레디스가 일어나고 있는 일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그녀는 미스 사우스 다코다 양톤 후보자로 사우스 다코다의 핫
스프링으로 가고 있었다.
그때 브로커는 KYNT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녀와 인터뷰 하기를 열렬히 바라고
있었으며, 그래서 은행가 그로스에게 수상자가 발표되자마자 곧 자기에게 연락해
달라는 약속을 얻어냈다.
그로스의 아내 마조리는 메레디스가 1959년 미스 사우스 다코다로 발표되자마자
그녀의 남편이 톰에게 전화를 걸어 메레디스를 바꾸어 주었음을 회상했다. (음,
톰은 대단히 흥분해 있었습니다. 그가 그녀와의 인터뷰를 끝냈을때 그는 자기의
마이크가 꺼진 줄로 알고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죠. 그러나 마이크는 켜져 있었고,
그 말이 마을 전체로 방송되었습니다. 물론 그 결과 온 마을 사람들이 톰 브로커가
메레디스를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다음에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간에 그 일로 넘어간다는
것은 젊은이들에게는 힘든 일이다. 특별히 브로커에게는 고통스러웠다. (나는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잃었던 2년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고 기꺼이 고백했다.
(나는 그 과정을 통해서 나 자신에 대해서, 또 인생을 어떻게 대해야 한다는 것에
많이 배우게 되었어요) 그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메레디스가 자신이 그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그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친애하는 톰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녀는 그에게 실망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 사이의 관계에 미래가 없음을 알았다. 브로커는 자신이 얼마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을 받았는가를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이 사실을 너는 믿을 수 있겠니?)라고 그는 브로커와 메레디스 모두를 알고 있는
친구에게 그 편지를 보여 주면서 물었다. 그 친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내 생각에는
그녀가 모든 점에서 옳은 것 같아) 그 말은 그가 그의 행동을 청산하도록 하는 데
충분하다고 브로커는 주장한다.
다시 정상적인 궤도에 오르기 위하여 브로커는 사우스 다코다 대학에 재입학 허가를
신청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그는 특별히 정치학에, 예컨대 파버 교수의
주정부와 지방정부에 관한 과목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 그는 논쟁적 주제에 대한 열띤
토론에 참여하기를 좋아했다. 그 당시의 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그는 "모든 사람들이
승자가 되는 토론에 참가하는 데" 묘수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날 캠퍼스에서 톰은 메레디스를 만났다. 그녀는 톰에게 일이 호전되어 가고
있는 것을 알고서는 기뻐했다. 그녀는 말했다. (들어봐, 커피 한 잔 하자. 내가
정말로 생각하고 있는것을 이야기해 줄께) 그들은 다시 데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KTIV에서 일하던 일요일마다 그녀는 그를 시아우스시까지 태워다 주었다.
톰이 저녁방송을 마친후 그들은 늦은 저녁식사를 하러 나갔다. 사우스 시아우스시에는
그들이 식사하기를 좋아하는 조용한 장소가 있었다. 그들은 곧 졸업후의 계획과 꿈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톰은 그녀에게 결혼해 달라고 부탁했다. 메레디스도
사랑하고 있었다. 만사가 톰에게는 흥분되는 것이었다. 그는 정말로 활동적이였다.
그는 활동가였다. (내 생각에는 그녀가 이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 같아요)라고 마조리
그로스는 말한다. (나는 메레디스가 톰에게 있어 인생이 신나게 돌아갈 것이라고
그녀의 어머니에게 말한 것을 알고 있어요)
로마 양식의 기둥이 부조화된 모습으로 세워져 있는 빨간 벽돌의 건물인 옛 양톤의
군청 2층에는 등기소가 있다. 1962년 8월 15일, 22살의 토마스 존 브로커와 21살의
메레디스 린 얼드는 허름한 계단을 올라가 혼인 신고를 했다. 이틀뒤에 톰은 다소
부유하지 못한 조합교회에서 성장하였음에도(그는 픽스타운의 조그마한 조합교회를
다녔다) 메레디스의 부유층 교회 선호에 따라 부유층 교회에서 결혼했다. 마조리
그로스에 따르면 메레디스의 가족들은 (매우 매우 독실한 감리교회 교인들이었다)고
한다.
소년들로 구성된 주의 모의 전직 주지사와 전 미스 사우스 다코다는 가장 미국적인
놀라운 한쌍이었다. 브로커는 제이 게츠비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 즉, 그는
자기가 꿈꾸어 온 여자와 결혼한 것이다. 그들의 신혼여행은 사우스 시아우스시의
플라밍고 모델에서 이틀 밤을 지내는 것이었다.
이 신혼부부는 곧 네브라스카로 떠났다. NBC 지국 오하마 텔레비전 방송국인 KMTV가
톰의 첫 일자리였다. "그들은 처음에 주급 90달러를 제안했다. 그러나 비록 일자리를
구걸하다시피 하며 구한것이었지만 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브로커는 그의 경솔함에
아직까지 놀라고 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집안에서는 처음으로 대학을 나온
사람이었고, 또 결혼한 입장이었으며, 사위의 미래에 대해 다소 미심쩍어하는 장인이
있었다. 나는 100달러가 필요하였다. 그들은 마침내 전혀 임금인상이 없다는 조건으로
내 제안에 승락했다. 그리고는 나에게는 결코 인금인상이 없었다"
일주일에 6일을 브로커는 이른 아침에 근무했다. 그는 그들이 그에게 처리하도록
요구하는 모든 일을 다 보도했다. 예컨대 살인, 농업, 소식, 스캔들, 파업 등이
있었다. KMTV는 조그마한 방송국이었기 때문에 그는 촬영 및 필름 편집에서부터
원고작성, 화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배웠다. 그것은 텔레비전 뉴스에 있어서
귀중한 훈련이었다. 그리고 역사상 처음으로 바로 이해에 신문보다는 텔레비전을 통해
소식을 얻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음해인 1964년에 퀸즈에서 세계박람회가 열렸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미래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뉴욕에 왔다. 브로커 부부는 군중들에 끼여 모노레일, 산업관
등을 지나치며 거닐고 있었다. 그런 후에 그들은 시내를 가로질러가 "투데이"쇼가
방송되는 록펠러 센터에 있는 NBC 스튜디어를 방문했다. "투데이" 사회자인 데이브
게르웨이는 브로커가 숭배하는 인물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이전에 게르웨이를
만난적이 없었지만 오하마의 "투데이" 쇼 시청자들을 위하여 지방뉴스 시간 5분동안에
그 프로를 꼬박꼬박 방송하였다. 그것은 그로서는 놓칠 수 없는 없는 좋은 기회였다.
그는 회상하기를 (나는 "투데이"쇼 창문밖에 서서 다음과 같이 써 있는 표지를
들어올렸습니다. 오하마에서 7시 25분과 8시 25분에 톰 브로커와 함께 "투데이"쇼를
보라.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방송으로 내보냈죠) 그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그는
미소를 짓는다.
오하마에서 3년이 지난 후 1965년에 브로커는 아틀란타에 있는 NBC지국 WSVB
텔레비전의 앵커직을 제안받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 NBC는
당시 203개의 지국을 갖고 있었는데 몇 년 후에 NBC 뉴스 사장이 된 루벤 프랭크에
따르면 대부분의 지국은 신통치 못했으나 아틀란타만은 매우 좋았다고 한다. (우리는
남부에서 매우 열세였습니다) 프랭크는 이를 솔직히 인정했다. (그래서 우리는
아틀란타에 상당한 힘을 기울였죠)
당시 남부의 화제는 시민권 운동이었다. 3월 20일, 존슨 대통령은 앨라배머에서의
자유 행진가들을 보호하라고 군대에게 명령하였다. 남부에서 인종 폭력은
비일비재했다. 브로커가 조오지아에 도착했을 때 때마침 인종평등에 대한 투쟁이 점차
가열되고 있었으며 그곳에 있는 동안에 중요 취재기사가 되었다. 그의 기사는 때때로
"헌틀리 브링클리 보고"를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결과 뉴욕에
있는 NBC 네트워크 본부의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일년이 채 안되어 브로커 부부는 짐을 꾸려서 L.A로 갔다. 거기서 톰은 NBC
네트워크가 소유하고 경영하던 주요 방송국 가운데 하나인 KNBC TV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는 밤 11시 뉴스의 리포터겸 앵커직을 맡았다. 그것은 분명히 야심만만한
26살의 브로커에게는 중요한 디딤돌이었다. 그가 L.A에서 일을 잘한다면 언젠가
네트워크에서의 일자리를 바라볼 수 있었다. 무엇이라도 다 가능한 듯이 보였다.
브로커는 L.A에서 말처럼 열심히 일했다. 날이 밝기전에 일어나서 그는 196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운동(여기서 배우 로널드 레이건이 현직 주지사인 에듬너드
G.팻브라운을 눌러 이겼다)과 같은 정치 기사들을 보도했다. 사실로 브로커는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그래서 KNBC 프로듀서인 스티브 프리드만(나중에
"NBC 저녁뉴스"의 책임 프로듀서가 된다)은 그에게 "경이로운
말"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반전운동이나 로버트 케네디 암살사건, 1971년 실마 지진에 대한 그의 보도는 그가
확고한 저널리스트로 명성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당시 CBS의 L.A 지국 네트워크
통신원이었던 리챠드 스랠켈드는 많은 기사에 있어서 브로커와 적수를 이루기도 했다.
브로커는 언제나 중요 인물들과 친하게 지내는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직업상
이유로 그는 그러한 인물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그는 유명인사들에게 매력을 끌었다.
유명인사들은 그가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안 것 같았다. 브로커와 메레디스가 자주
대접하는 할리우드의 스타들과 정치 인사들뿐만 아니라 그는 부유한 산업가들, 예컨대
강철업의 부호 노튼 사이먼과 알코사의 회장 손톤 브레드쇼에게 환심을 샀다.
브로커 부부는 캘리포니아를 사랑했다. 그들의 세 명의 딸 들 가운데 두 명은
거기서 태어났다. 결혼 이후 그들의 떠돌이 생활 가운데서 다른 어떤 곳보다 그곳에서
오래 살았다. 그들은 그곳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고서 유행하던 말리브 해안 스타일
집을 짓기로 했다. 톰의 친구 노튼 사이먼은 그들에게 자신의 말리브 해안가 집을
빌려주어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거기서 묵게 해주었다.
사이먼은 젊은 브로커를 정말로 좋아했다. 그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그를
파사디나박물관의 이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브로커의 일은 잘 되어 나갔다. 그는 1971년 4월에 월간
뉴스잡지인 "첫번째 화요일" 의 편집 책임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네트워크로부터
받았다. 다음에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브로커는 대규모의 캘리포니아 대표단을
취재함으로써 두각을 나타냈고, 또 NBC의 "저녁뉴스" 앵커로 새로 임명된 존 챈샐러의
주목을 끌었다. 그래서 1973년 네트워크가 CBS의 댄 래더를 대신하여 백악관 보도를
담당할 리포터를 필사적으로 찾고 있을때 브로커가 제안을 받았다.
당시 NBC 뉴스 사장이었던 딕 월드는 서해안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서 그를 찾았다.
브로커는 그를 어웨어 인이라고 불리우는 채식주의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L.A에서 건강식품을 하는 여러 곳 중의 하나였다. 월드에 따르면 "이 멋진 젊은사람은
캘리포니아의 정치, 국가경제, 환경운동, 기타 등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그는 방송계에서 훌류한 인물에 그치지 않고 대단히 명석한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
백악관 기자단은 전세계로부터 온 인쇄 및 전파 매체의 저널리스트들이 한데 섞인
적극적인 사람들이었다. 거기에는 실업계의 최고 인물들도 몇 명 있었다. 당시
브로커는 33살이었는데 백악관 기자로서는 신출내기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입증해
보여야했다. 백아관 기자들 가운데는 드센 고참들이 많았다. 그들의 신조는 경쟁
상대에게는 한 치의 허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맨 처음에 브로커를
무시했으며 상대가 안된다고 간주해 버렸다.그러나 존 챈샐러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브로커가 72년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해낸 일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백악관은
또다른 일이었다. 특별히 권모술수를 쓰는 닉슨 행정부의 방식을 고려해 볼 때 더욱
그러했다.
브로커는 곧 권력의 세계에 적응하였고, 그 세계를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질문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는 저널리스트로서 자신에 대해 대단한
확신을 갖고 있었으며, 바보스럽게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지식이 부족한 듯 보이기를
원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봅 우드워드에 따르면 브로커는 그가 시작할 때 모든 것을
이해하는 척 하지 않았으나, 배우는 속도가 빨랐고 자기 일을 잘 해냈다고 한다.
우드워드는 그를 "리포터 중의 리포터" 라고 불렀다.
백악관 기자단 가운데 그의 경쟁자였던 ABC의 앤 컴톤도 비슷한 인상르 받았다.
"TV 가이드" 프로의 한 인터뷰를 통해 그녀는 말하기를 (톰은 브리핑 때 항상 좋은
질문을 했어요.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 놓치곤 했던 어떤 것에 대한 훌륭한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브로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던 백악관 기자는 피터 리사고였다. 그는
"시카고 데일리 뉴스"지의 기자였다. 그들은 친한 친구가 되었으며 일주일에 한번씩
점심을 먹었다. 브로커는 리사고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인상적인 유일한
기자"라고 했다.
브로커는 그 일을 통해 분명히 성장했다. 그는 지금보다도 더 열심히 일했다.
왜냐하면 그는 수도에서의 정치적 활동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거의 매일 밤 그는
방송되었고 양톤에 있는 그의 친구들과 가족들을 포함하여 수백만의 시청자들이
그것을 보았다.
워싱턴에서 지낸 첫 15개월 동안 브로커는 댄 래더가 워터게이트 사건을 취재했을
때 기록한 인기만큼은 못 되었어도 상당한 시청자를 끌었다. 그를 보고 재미없고
설득력도 없다고 하는 시청자들도 있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래더의 열광적 분위기보다
브로커의 절제있는 차분한 태도를 더 좋아했다.
"마더 존슨"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브로커는 자신의 저널 양식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나는 나의 직업이 중심에 차분히 앉아서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배우처럼 꾸민 듯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댄 래더가 구약성서의 예언자 예레미아처럼 파멸의 저주를 예언하고 그 파멸이 어느
정도가 될지 회의적이었던 반면에 브로커는 시청자들에게 다른 메시지를 제공했다.
즉 정부 체제의 탄력성에 관하여 확신있는 메시지를 제시해 주었다.
1974년 4월 NBC의 성공적인 아침 쇼 "투데이"의 공동 사회자 프랭크 맥기가
뼈암으로 죽자 NBC 실무진들은 신속히 대체인물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짐 하츠를
좋아했다. 그는 중서부 지역 출신오로서 상당히 신선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 NBC
경영진도 동의했다. 그들은 연봉 25만 달러에 계약하였다.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왔을 때 브로커는 그의 앵커맨 존 챈셀러로부터 1975년 1월에
닉슨을 이은 제랄드 R. 포드 대통력과의 한 시간자리 생방송 인터뷰에 같이
참여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브로커는 새 대통령에게 그가 껌 씹는 것과 걸어가는 것을
동시에 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는 포드의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다.
매력과 수려한 외모가 있었다면 브로커가 각광을 받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것들을 대단치 않게 여겼다. 오직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만
칭찬받기를 그가 원했던 것은 당연하다. 마치 예이츠의 시에 나오는 젊은 여자가
"나의 노란 머리가 아니라 오직 나 자신으로만 칭찬받기를" 원했던 것처럼...
언론계의 어떤 사람들은 브로커를 대단치 않게 여겼지만 NBC 뉴스는 그를 매우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그에게 특별 뉴스 진행을 부탁했고, 주말에 "저녁뉴스"
앵커를 맡겼다. 또 1976년 공화당과 민주당의 전당대회 취재기자가 되는 행운을
주었다. 브로커가 참여한 NBC 전당대회 취재반에는 존 챈셀러, 데이비드 브링클리,
캐스린 맥킨, 톰 페티가 포함되어 있었다.
1976년 지미 카터가 백악관의 승자가 되자 브로커는 백악관 기자직을 그만두기로
심했다. 바바라 월터는 "투데이" 쇼를 그만두고 ABC로 갔다.그래서 NBC최고 경여진은
대체인물을 필사적으로 찾았고 브로커에게 그 일을 맡기기로 했다. 그의 시작할때
봉급은 약 35만 달러였다. 1976년 8월 30일 에 톰 브로커는 "투데이"쇼의 새로운
진행자로 처음으로 카메라에 서게 되었다.
"투데이" 쇼는 뉴스, 일기예보, 담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침 7시에서 9시 사이의
프로그램 중 가장 인기있는 프로로서 오랫동안 그 자리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어려움을 맞게 되었다. 아침 그 시간대에 "투데이" 쇼가 상당히 많은 시청자들을
갖은 적은 없었지만 언제나 인기가 있었다. 사실 데이브 게르웨이와 텔레비전을
잘 받는 J. 프레드 머그 "투데이" 쇼의 최고의 기간이었다. 이래로 "투데이"
쇼는 돈을 잘 벌어다 주었다. 그러나 ABC의 "굿 모닝 아메리카" 프로가 이제 만만치
않은 적수가 되자 "투데이"쇼는 이제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31살의 새로운 책임
프로듀서인 폴 프리드만(그는 몇 년 후에 ABC로 가서 피터 제닝스의 "월드 뉴스
투나잇" 프로의 책임 프로듀서가 된다) 아래서 "투데이" 쇼는 즉시 2.7이라는 사상
유례없는 최저 시철류로 곤두박질했다. 브로커는 사태를 바꾸어 놓을 결심을 했다.
브로커가 반모음 발음을 잘 하지 못한다는 점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역려하지만
즉흥대사의 능력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같은 사실은 그와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놀랄만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브로커 자신은 이같은 재능이 KYNT에서 그가 훈련받은 데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생중계 마이크를 갖고서 현장으로 나가야만 했던 적이 있었는데 내 생각으로는
이것이 도움을 준 것 같다. 알다시피 그것은 시간을 때우는 방법, 그러니까
즉흥대사였다)
"투데이"쇼 진행자 브로커는 뉴스와 오락을 혼합하고자 시도했다. 그는 월터 먼데일,
지미 카터, 또 소련 대사에서부터 미국 대사 아나톨리 도브리닌, 도 TV 드라마
"달라스"이 스타 가운데 하나인 버트 레이놀즈, 샬린 틸톤에 이르기까지 놀랄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과 인터뷰했다.
5년 동안 그는 할만큼 충분히 해냈다. 그의 삶을 변화시킬 많은 발전이 있었다.
브로커는 계속 한길을 걸어오면서 느낀 감회를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나의 생애의 긴 굴곡은 항상 진지한 저널리즘이었다. "투데이"쇼는 일종의
좌회전이었다)
"투데이"쇼의 진행자로서 브로커가 마지막 출연을 했을때 미합중국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이 잠시 들러 이별의 말을 해주었고, 또 (새로 하시는 일이 잘 되기를
빌겠습니다)라고 해주었다. 그리고 일기예보를 맡았던 뚱보 스코트는 메릴랜드
대학의 합창을 배경음악으로 하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부르며 그에게 칭송을 돌렸다.
그대는 "투데이"를 떠났지만
우리는 우울하다네.
그러나 우리는 NBC 뉴스를 통해
저녁에 자네를 보게 될 거야@ff
4. 낭독자에서 앵커로 변모
샌디에이고의 작은 마을 태생인 댄 래더는 NBC 방송국 앵커맨으로서 톰브로커와
버금가는 수억 달러의 계약금으로 전자언론 시대에 새롭게 떠올라 위치를 굳혔다.
어론분야에 있어서 고풍의 칩펜데일 가구보다 더욱 가치있으며 미국을 통틀어
3석밖에 없는 이 앵커맨의 자리는 막대한 영향력, 권위와 권력, 그리고 명예를 지닌
자리이다. 이 자리에 앉게되는 행운의 앵커맨은 그 어떤 단막 코미디의 주연보다
TV화면에 자주 등장하여, 마약문제는 물론, 항공 여행의 안전, 그리고 건강과 교육
등에 걸친 다방면의 이슈를 다룬다. 한마디로 이 자리는 엄청난 자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TV는 생필품의 범주에 들지 않았다. 1939년 세계 박람회가
열릴 무렵, TV이 보급 수는 불과 몇 대에 불과하였으며, 히틀러가 유럽을 정복하였던
전쟁 초기에 미국민을 미국민을 뭉치게 하였던 것은 바로 라디오 방송이었다.
미국민들은 저녁식사 이후 전쟁에 대한 작은 위안이라도 얻기 위하여 루즈벨트의
담화문을 들으려고 제니스, 에멀슨, 그리고 에트워트 켄트 등 당시의 라디오 수신기
앞에 모여들곤 하였다. 전쟁의 여파가 마침내 미국에까지 미쳤을 때도 역시, 그
소식은 라디오를 통해 전달되었다.
(여기는 런던입니다...) CBS뉴스의 에드워드 R. 머로우의 숨가쁜 소리가 독일군의
포탄이 떨어지는 빅토리아 역 근처의 어느 옥상에서 들려왔다.
라디오방송은 여러 악조건을 뚫고 미국 시민들을 유럽의 전쟁터에 안내할 수 있었다.
섬광과 신호탄의 불빛 속에서 머로우는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대공탄의 궤적을
묘사하며 영국 전쟁의 개시를 보도하였던 것이다.
전쟁 기간중에 머로우는 에릭 세바레이드, 하워드 K. 스미스, 찰스 콜링우드,
데이비드 슈엠브런, 다니엘 슈어, 리챠드 C. 호테렛, 레리 레수어와 같은 CBS방송의
1급 특파원으로 구성된 보도진의 도움을 받았다. 1945년에 국립여론조사센터가 실시한
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의 61p가 전쟁의 소식을 라디오에 의존하였으며,
단 35p만이 신문을 선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쟁이 끝나고 바로 몇 년 후, 권투와 야구경기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손님들을 끌기
위하여 지방의 선술집에 TV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조 루이스가 등장하면,
으례적으로 TV가 올려져 있던 계산대나 바스툴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곤 하였다.
몇 년 후 TV가 가정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세련된 프로를 요구하는 시청자들의
요구는 네트워크의 빠른 빨전을 유도하였다. TV 뉴스가 1944년 폴 알리의 "NBC News
Break"로 시작되긴 하였지만 아직은 미숙한 단계였다. 1948년에 이르러서야 CBS는
제대로 격식을 갖춘 저녁뉴스를 방송하기 시작하였다.
CBS의 사장인 프랭크 스탠톤은 더글라스 에드워드를 TV뉴스 캐스터로 발탁하였다.
에드워드는 TV 시청자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많은 라디오 청취자를 확보하고
있었으며, TV 방송에 적합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프랭크 스탠톤 사장은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드 본인은 TV 뉴스에 출연하기를 꺼려하였다.당시 방송 관례로는
라디오 통신원이 해당 스폰서로부터 일정액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며, 그 역시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탠톤은 그의수입을 두 배로 인상해
주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당시 TV는 약간 미래 지향적이었고, 그는 현재의 여건을
선호하였지만 별다른 선택이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에드워드는 사장의 제의를
수락하였다.
한편, 머로우는 에드워드의 능력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는 편이었으며,
에드워드의 TV출연 결정은 단지 머로우의 의견을 굳게 하는데 불과하였다. 하워드 K.
스미스는 (라디오가 처음 소개되었을 때 신문기자들의 라디오 출연이 구차한 행동으로
여겨졌던 것처럼, 당시 TV 출연은 그리 바람직스러운 것이 아니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머로우는 TV가 내포하고 있는 연예성(카메라, 분장, 조명 등)을 혐오하였으며,
또한 과연 TV가 라디오만큼 보도성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느냐에 대한 의혹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머로우는 그의 유명한 다큐멘터리 시리즈물인 "See It Now"
를 통해 TV 역시 라디오만큼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에드워드의 경우 그가 TV 캐스터로 발탁된 배경에는 언론분야의 경험보다는 외모,
매너 및 텔레프롬프터를 읽는 능력과 필요할 경우 즉석에서 대사를 만드는 기술 등이
깔려 있었다. 반면에 몇 년 뒤 머로우의 저명인사 대담 프로인 "사람 대 사람"을
시청한 사람들이 동감하듯이 베터랑 리포터인 머로우는 에드워드와는 달리 카메라
앞에서면 몹시 불않하면서 줄담배를 피워대곤 하였다. 그의 질문조차 대본에서
읽혀져야 했을 정도였다.
머로우의 경험으로 비추어볼 때, 유명한 뉴스 리포터가 좋은 앵커맨이 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더글라스 에드워드의 CBS 뉴스"가 처음 전파를 탈 무렵에는 마땅한 후원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 뉴스 프로는 스탠톤 사장에게는 매우 가치있는 것이었다. 3년간의
방송허가를 재발급 받아야 할 시기가 왔을때, 연방방송위원회는 공공서비스 측면에서
이 뉴스 프로를 우호적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당시 뉴스 프로는 수입을 올릴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CBS는 다른 프로에서 자금을 조달하여야만 했다. 이런
이유로 에드워드의 뉴스는 그랜드 센트럴 역 위의 작은 공간에서 제작되었다고
하였고 맨하탄의 지저분한 독일풍 주점을 개조한 곳에서 전파를 타야만 하였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뉴스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캐스터와 연출자, 그리고
기술진들이 함께 뭉쳐야만 하였다.
TV방송이 시작된 지 2년이 되던 해에 에드워드는 후원자를 맞이하였다. 1949년
4월 7일, 오후 7시 30분에 방송되는 15분짜리 흑백 뉴스는 (오즈모빌이 여러분께
뉴스를 보내드립니다. 바로 오즈모빌이 더글라스 에드워드의 CBS 뉴스를 시청자
여러분께 드립니다)라는 아나운서의 음성과 함께 시작되었고, 곧이어 "로켓엔진을
장착한 새로운 오즈모빌"이라는 화려한 선전이 TV 화면을 메웠다.
에드워드는 마치 소년 성가대원과 같은 여린 얼국과 단정히 빗어 붙인 검은 머리,
그리고 우렁차서 라디오 전파에 맞는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의 뉴스를 보여드리겠습니다)라는 에드워드의 음성으로 뉴스가
시작되곤 하였지만 실제의 뉴스 화면은 전무하였고, 마치 라디오 방송이 TV 전파를
타고 오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당시 TV 뉴스는 기초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특파원이 세계 각국에 파견되어 있지 않은 상태여서 뉴스 프로에 특파원의 보도가
소개되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에드워드의 단독 보도로 진행되었다. 자금이 부족한
상황하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모든 면에 많은 허점이 노출되었다. 한 예로,
영농자금의 지원과 가격정책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정부의 농업정책이 소개되던
프로에서 에드워드는 자료 차트 및 그래프가 화면에 소개될 때 어색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켜야 했으며, 곧 바로 어울리지 않는 국군의 날 행사가 이어지는 등 조잡한
연출을 드러낸 적도 있다. 15분짜리 뉴스 프로가 매우 지루하게 느껴지곤 하였다.
개인적으로 에드워드는 CBS와 광고주인 오즈모빌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으나,
그의 탁월함은 매우 조심스럽게 노출되고 있었다. 아무도 화면뒤에 숨겨진 그의
사생활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단지 뉴스를 읽어주는 사람에 불과했던 것이다.
한편, NBC는 CBS와 경쟁하기 위해 1949년부터 저녁뉴스를 시작하였다. 오후 7시
45분부터 8시까지 15분간 방송되던 이 뉴스의 담당으로는 수려한 요모와 쾌활한
성격을 지닌 존 카메룬 스웨이즈가 선발되었다. "카멜 뉴스 카라반"이라는 타이틀로
시작된 이 프로는 CBS의 경우와는 달리 방송 개시부터 후원자의 자금을 지원받았다.
후우너자인 카멜 담배회사는 스웨이즈에게 법을 지키는 시민은 담배를 즐길 줄
안다라고 강조하게끔 지시하였고, 다만 윈스턴 처칠만이 이 부류에서 제외되었다.
이 뉴스의 세트에는 몇 권의 책과 재털이, 그리고 카멜 담배가 놓여있는 책상이
설치되었고, 사회자의 뒤쪽 선반에는 텔리타이프가 보이게끔 되어 있었다. 에드워드의
경우처럼 스웨이즈 역시 즉흥대사와 대본을 자유롭게 구사하며 뉴스를 진행하였는데,
진행 속도가 다소 빠른 감이 있었으며, 그래픽은 직선으로만 처리되어 초기당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뉴스에 방송될 필름을 직접 공수하여야 했던 시기였으므로
간혹 보도가 늦게 되는 적도 있었다. 프로가 끝날 때쯤이면 항상, (자! 이제 세계를
두루 살펴볼 시간입니다)라고 스웨이즈의 자신만만한 설명이있긴 하였지만, 세계의
소식은 항상 영상이 없는 자막으로만 구성되었고,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맨트로 막을 내리곤 하였다.
1942년, 연방정부의 "독점금지법"은 NBC가 소유하고 있던 레드와 블루 등 2개
방송사 중 하나인 블루를 ABC(Almost Broadcasting Co)으로 재탄생하게끔 하였다.
1950년대 중반까지 ABC는 NBC의 4분의 1에도 못미치는 지시만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CBS와 NBC가 저녁뉴스를 방영한 지 4년이 흘러서야 ABC는 존 달리를 뉴스맨으로
발탁하여 뉴스를 시작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CBS 라디오의 고참 특파원이었던 달리는 1949년, ABC로 적을
옮기게 되었다. 당시 ABC는 스텝진 및 자금이 매우 궁핍하였기 때문에, 그는 입사
즉시 사회문제, 스페셜 이슈, 그리고 보도담당 부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저녁뉴스의 사회는 물론, 전당대회, 선거 및 뉴스 논평을 맡기도 했다. 소규모의
자금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방송국 내에서 파티라도 한번 열게되면 일 주일 동안
뉴스 자금의 조달이 곤혹스러울 정도였다. 인기있는 퀴즈프로인 "What is My Line"에서
발휘하였던 것처럼 그는 침착성을 유지할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장비의
부족으로 발생되는 방송 차질을 원만하게 소화하였다. 전국적인 시청망과 많은
시청자를 확보한다는 것이 당시 ABC로서는 매우 과감한 계획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아래와 같은 일대의 사건이 ABC를 뉴스 비지니스계의 막강한 경쟁자로
격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NBC는 1956년 전당대회의 보도를 위해 데이비드 브링클리와 체트 헌틀리라는 새
인물로 보도팀을 구성하였다. 브링클리는 워싱턴을 떠나 스웨이즈 방송을 돕고
있었으며, 영화배우 버트 랑카스터를 닮은 헌틀리는 적지않은 TV 방송 경험을
바탕으로 ABC L.A지국에서 새로운 프로를 진행하고 있었다. 신중한 매너와 탄탄한
방송경력을 지닌 헌틀리는 소년같은 모습을 지녔으며, 경력이 없는 브링클리의 단점을
훌륭하게 커버하였다. 당시 에드워드에게 뒤지고 장기간 방송으로 인기를 잃고 있는
스웨이즈는 바로 이들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1956년 10월, "헌틀리 브링클리 리포트"는 고참 프로듀서인 루벤 프랭크를
등장시켰다. 초기의 시청률이나 광고 유치는 보잘것 없었으며, 작업량 역시 몹시 고된
것이었다. 과로로 인하여 프랭크는 위장병에 시달려야 했으며, 일을 중단하여야만
하였다. 마침내 1959년, 이 프로는 타이틀을 "텍사코 헌틀리 브링클리"로
바꾸면서 텍사코를 광고주로 유치하였고, 1960년에 이르러서는 많은 시청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5년간 그들이 뉴스를 지배하고 있는 동안 프랭크는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는
NBC사장인 로버트 킨터의 지원으로 구성된 보도팀을 매우 흡족하게 여겼으며, 더욱이
그의 팀이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점에 대해 만족하였다. 그 시청률은 중국
교민 마을의 확성기 앞에 웅성거리는 사람들보다도, 영국의 주력 일간지가 확보하고
있는 독자들의 수보다도 많은 것이었다. 프랭크는 방송이 끝날 때마다 (자유세계에
있어서 "헌틀리 브링클리 리포터"의 시청률은 어떤 방송보다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라는 멘트를 삽입하도록 하였다. 이 방송의 시청률은 프라우다가 자랑하는 구독률을
능가하게 되었으며, 2천만 가구의 시청자를 확보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헌틀리와 브링클리는 프랭크의 말처럼 저명인사로 변신하게 되었으며, 방송에서
그들이 하는 마지막 인사인 (굿 나잇 체크, 굿 나잇 데이비드!)는 전국의 간판과
게시물에 인용될 정도였다. TV 코미디언들도 종종 그들의 말투를 인용하였으며,
시청자들은 그 멘트가 그들의 것이란 것을 바로 알곤 하였다. 케네디의 취임연에서
밀톤 버얼은 시나트라의 인기곡인 "Love and Marriage"를 개사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을 정도이다.
(Huntley Brinkley
Huntley Brinkley
한 사람은 무뚝뚝하고,
한 사람은 쾌활하고...)
TV 뉴스맨이 스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네트워크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으며,
뉴스 캐스터는 네트워크의 발전과 함께 점점 더 많은 생방송을 진행하여야 했다. 1963년
노동절을 맞이하여 NBC와 CBS, 두 방송은 뉴스 시간을 15분에서 30분으로 늘렸고,
ABC는 다 늦은 감이 있긴 하였지만 흑백방송이 컬러방송으로 바뀌면서 시청률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외의 정세는 매우 안정된 편이어서 TV를 가진 사람들은
비교적 여유있게 뉴스를 시청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호조건 속에서 TV 뉴스의 시청률은
93p로 상승하였으며, 이중 3분의 1을 헌틀리와 브링클리가 확보하고 있었다.
"헌틀리 브링클리"의 급속한 성장에 자신을 얻은 루벤 프랭크는 타 방송이 이
프로를 능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48년에 제정된 TV 방송 협약의 40주년을
기념하는 기사를 작성하기 위하여 프랭크는 더글라스 에드워드와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었다. 오찬을 함께 하며 과거를 회상하는 자리에서, 에드워드는 프랭크에게 긴장된
어조로 (당신이 우리 프로를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 사실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러한 질문은 1956년 ABC가 "헌틀리 브링클리 리포터"를 시작한 지 30여년이 지난
1988년까지도 에드워드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그러나 헌틀리와
브링클리가 에드워드에 대해 우려하지 않았었다면, 그들의 이러한 성장은 없었을
것이다.
1963년 CBS는 지구지책으로 에드워드를 콧수염과 파이프 담배가 상징적인 CBS 아침
쇼의 월터 크론카이트로 교체하였다. 당시 그는 미국에서 그리 신빙성있는 인물로
평가되지는 않았었다. 그는 기껏해야 평범한 방송인이었던 것이다. 1963년 케네디의
암살사건(이 사건은 TV의 보도성이 라디오에 비하여 뒤떨어진다는 선입견을
해소하는 계기가 되었다)을 타 방송보다 훌륭하게 보도하고 나서야 그는 겨우
시청자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크론카이트가 자신을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는 인물, 케네디 사건을 자세히 파헤친
인물"이라고 소개하자, 한 노한 시청자가 전화로 항의하였던 일례도 있다. 1년 후,
그가 공화당 전당대회 특집이 앵커맨을 맡았을 때, 방송내용이 이상하게 흘러 에드
머로우와 에릭 세바 레이드가 앵커맨 석으로 달려가 내용을 정정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1965년, 크론카이트의 인기는 "NBC 저녁뉴스"의 인기에 필적하기
시작하였으며, 1968년부터는 시청률을 압도하여 명실공히 제1인자로 올라서게 되었다.
이후 10년간 크론카이트의 저녁뉴스는 하루 동안에 일어난 사건을 보도하며 1위의
자리를 고수하였다. 유나이티드 프레스의 기자로 활약한 바 있는 그는 방송 자체를
뉴스에 치중하도록 유도했다. 그의 독주로 특파원들의 역할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그들은 그를 독단적이며 카메라 앞에 서기를 미치도록 좋아하는 인간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중에는 그를 진정한 스타로 불러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자기자신을 노력파이면서 보수적인 뉴스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결국 나중에 그가 경멸하게 되는 개인숭배의 창시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앵커맨"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적용된 인물이 바로 크론카이트였다. 릴레이
레이스에서 근원이 되어, "60 Minutes"의 프로듀서를 지낸 던 휴위트가 1952년
전당대회 방송을 하면서 만들어낸 이 용어는 CBS 뉴스데스크를 차지하는 자가
네트워크의 가장 막강한 인물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CBS 사장이었던 프레드 프랜들리는 크론카이트의 활약을 매우 흡족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는 권위를 지닌 완벽한 앵커맨이었으며, 아저씨 같은 친근감을
가지고 있다고 프레드 프랜들리는 생각하고 있었다. 시청자들은 크론카이트를
사랑하였으며, 믿었고 신봉하였다. 그는 아무도 지니지 못한 장점을 지닌 세기의
앵커맨으로서 평가되었다. 프랜들리가 이처럼 크론카이트를 에드워드나 스웨이즈보다
높게 평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프랜들리는 크론카이트보다 우수한 인물을 많이 알고
있었다.
현대의 앵커맨도 과거처럼 저널리스트의 자질을 지녀야 하지만, 특히
전자언론시대에 있어서는 카리스마적인 분위기를 지녀야 한다. 미디어 전문인들은
이 요소를 "Q_factor"라고 부른다. "맥닐리어 뉴스 아워"의 진행자였던 로버트
맥닐은 NBC에 적을 두고 있을 당시, 그 자신이 이 요소를 지니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결국 3대 앵커맨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말았다. 크론카이트에
버금가는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저널리스트의 기질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능력을
갖추어야 했다. 즉, 용모, 음성, 인격 등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아야 했던 것이다.
맥닐에 의하면 앵커맨은 어떠한 연유에서건 시청자에게 재미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크론카이트의 이러한 호소력을 바탕으로 그와 CBS 뉴스는 미국민의 가슴속에
자리잡을 수 있었다. 헌틀리와 브링클리의 경우처럼 크론카이트 역시 CBS의 간판
인물로 성장하였다. 아무리 안좋은 뉴스가 보도되는 날일지라도 그는 시청자들을 함께
뭉치게 하는 저력을 지니고 있었다. ABC의 에드워드는 (앵커맨은 신문과 같다. 어느
지역에 앵커맨을 파견한다는 것은 그 지역에 신문을 송부하는 것과 같다)라고
앵커맨의 역할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머로우는 시청자들에게 해외특파원으로서 확실히 알려져 있었지만, 그와는 달리
크론카이트는 마치 한밤중에 30분간의 진실을 알리기 위하여 올림푸스 신전으로부터
미국땅에 내려온 신화적인 인물과도 같았다. 시청자들이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였기
때문에 그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그가 가끔씩은 자신이 만든 대사를 방송한다는
사실을 아는 시청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월남전에 있어서 종전주의자에 속했던
그는 1968년 네 번에 걸쳐서 반전에 대한 그의 입장을 확실히 방송한 바 있었다.
그는 (요즈음 들어서 우리가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다고 본다는 것은 여러가지
상황으로 비추어 볼 때, 과거에는 믿지 못하던 낙관론을 따르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백악관에서 크론카이트의 방송을 시청하던 린던 존슨 대통령이 언론담당 보좌관인
조오지 크리스쳔에게 (크론카이트를 잃는다는 것은 나라를 잃게 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할 정도로 크론카이트의 영향력을 인정하였다.
한편, CBS 내에서도 그의 영향력은 상당한 것이었다. 크론카이트는 앵커맨으로서는
처음으로 편집장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CBS의 사장이었던 리차드 새란트가
그러한 결정을 하였는데, 루벤 프랭크는 그가 편집장의 위치에 올라서면 다른
앵커맨들에게까지 여파를 미치게 될 것을 우려하여 그 의견을 반대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앵커맨을 편집장으로 선임할 경우, 그의 영향력이 편집이나 임명 등에까지
미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크론카이크는 자신이 갖게 된 영향력 행사를
자제하였으며, 경영방침의 결정이나 경영 자체에 끼어들지 아니하였다. 그의 친구
고든 모닝이 CBS 부사장직에서 밀려날 때도, 그는 전혀 간섭을 하지 않았다. 그가
간섭할 경우, 그 자신도 파면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크론카이트가 CBS에 재직하고 있는 동안, NBC는 1971년 존 챈샐러를 기용하여 2위의
시청률을 차지하였고 가끔씩의 스페셜 이벤트로 당시 철갑옷으로 불리우던
크론카이트의 시청률을 넘어서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한편, ABC는 계속 뒤져 있는
상태였다. 1964년 ABC는 26세의 캐나다인인 피터 제닝스를 앵커맨으로 기용하였다.
아직은 애송이였던 큰 키의 피터 제닝스는 덜 익은 채로 수확된 포도와도 같았다.
1967년 ABC는 피터 제닝스를 중동지방에 특파하여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하였다.
피터 제닝스의 자리는 곧 CBS 출신인 해리 리즈너와 하워드 K. 스미스로 채워졌으며,
그들의 노력으로 시청률이 높아지긴 했지만 3위의 자리를 벗어나진 못하였다.
시청률을 높이기 위하여 ABC 사장인 프레드 피어스는 NBC "투데이"쇼의
사회자였던 바바라 월터를 100만 불의 스카웃 비용으로 기용하였다. 물론 당시 월터의
인기는 매우 높았지만 쇼 비지니스가 아닌 뉴스 방면의 이러한 액수는 사상 최대였다.
월터의 뉴스 경험이 과연 이만큼의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컸다. 그녀는 단지
저명인사나 스타를 인터뷰하는 사람이었지 저널리스트로는 평가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ABC는 단순히 그녀의 스타 기질만을 보고 엄청난 액수를 지급한 것이었다. 피어스의
거액 스카웃은 앵커맨 스카웃 비용을 백만 불대로 올려놓는 계기가 되었으며, 남성
지배적인 사회에 큰 충격을 가했다. 피어스 스카웃에 대한 크론카이트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는 (TV 뉴스를 쇼 비지니스와 다른 차원에서 진행하려던 우리의
노력은 허사로 끝났다)라고 하며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월터와 리즈너의 공동 진행팀은 주간 뉴스에 여성이 정기적으로 출연하는 새로운
역사를 낳았다. 그러나 이 프로는 두 앵커간의 불협화음으로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못하고 말았다.
1977년은 TV 뉴스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해였다. 비디오 테이프가 필름을 대신하면서
기술의 발전은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또한 같은 해 룬 알럿지는 ABC 뉴스 총책임자로의
등장은 두 가지 매우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즉, 네트워크 뉴스의 모습이
바뀌었으며, 유명 앵커의 탄생이 그것이었다. 알럿지는 현대 3대 앵커의 탄생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알럿지는 TV 스포츠 프로에서 그의 경력을 쌓았으며 매우 혁신적인 연출자로
평가되어 온 인물이었다. 그는 즉시 녹화 기법을 프로축구 중계에 도입하였다. 그러나
ABC 내외의 많은 사람들이 방송 뉴스에 대한 그의 능력을 의심하였다. 알럿지는
뉴스가 오락물로 전도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우려의 일부는 알럿지의 개인 스타일에서 기인되었다. ABC의 부사장 중
한 명이었던 말린 샌더스는 롱 아일랜드의 몬타크에서 보도부문 사장과 뉴스팀간의
회의를 회고하였다. 알럿지는 그의 전형적인 사치 성향으로 수상스키나 리무진 차의
제공을 요구했던 것이다.
샌더스는 몬타크에서 처음 대면한 알럿지의 첫 모습을 땅딸하고 곱슬머리이며
비행기조종사의 안경을 걸치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느 사무실에서도 자주 입곤 했던
가슴까지 열린 하얗고 푸른색의 물방울 무늬가 있는 짧은 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다.
샌더스는 그녀의 신임 상급자의 첫 모습을 보고는 뉴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알럿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프로듀서"라는 프로그램의
주인공의 "무엇이든 가지고 있으면 과시하라!"라는 구절을 신조로 삼고 있었다.
화려한 외모와는 반대로 룬 알럿지의 승부욕은 강했다. 콜롬비아 대학 시절에
레슬링 선수 생활을 한 바 있는 알럿지는 남과의 싸움에서 지기 싫어하였다. 그는 ABC
뉴스를 닐슨 체재로부터 이탈시키려 하였다.
ABC 뉴스의 최고봉으로서 알럿지는 우선 뉴스라기보다는 보기 역겨운 단막
코미디물인 "더 비컬슨"과 흡사한 리즈너와 월터 대신에 3명의 앵커를 기용하였다.
ABC 방송의 앵커로 활약한 바 있던 피터 제닝스와 프랭크 레이놀즈가 재기용되었으며,
나머지 한 명은 뉴스 방송의 첫번째 흑인 앵커로서 워싱턴 지역방송에서 인기를
끌고 있던 맥슨 로빈슨이었다. 알럿지는 맨하탄의 "21"클럽에서 가진 전형적인
방송개시 기념연에서 이 새방송을 "World News Tonight"으로 명명하였다.
빌 모이와 로버트 맥닐을 기용하는 데 실패하였던 것처럼 인기인을 기용하는데
있어서 약간 부족한 그의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서 알럿지는 앵커맨을 뉴스의
장식물화시켰다. 워싱턴을 거점으로 한 레이놀즈는 국내 뉴스를, 런던의 피터 제닝스는
국제뉴스를, 그리고 시카고의 로빈슨은 지방뉴스를 담당하게 하였다.
1977년 5월, ABC 지사 회의에서 알럿지는 (구시대적인 앵커 맨 지위에 관한 개념은
바뀌어야 한다. 이것은 현재의 앵커를 해임시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월트
크론카이트와 멀어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대신에 우리는 더 넓고 발달된 보도
영역을 지녀야 하고, 그럼으로써 더 활기차고 흥미있는 뉴스를 방송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알럿지의 직접적인 개입에도 불구하고, 그가 기용한 3명의 앵커 트로이카는 항상
같은 길을 가지는 않았다. "World News Tonight"은 천천히 그리고 힘겹게 NBC를
따라잡았다. 알럿지가 새로이 기획한 복합데스크나, 시청자의 눈길을 모으기 위한
스크린의 한쪽 구석에 빨간 그래픽 처리등은 경쟁력을 향상시키는데 있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알럿지의 목표는 오직 경쟁사를 따라잡는 것이었다.
ABC의 "World News"는 일류 PD와 대본작가, 그리고 연출가를 필요로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긴급한 것은 뉴욕의 인기 앵커였다.1979년 당시 CBS의 인기방송이었던
"60 Minutes"의 4명의 특파원 중의 한 사람이었고, 시청률 확보에 잠재력을 지니고
있던 댄 래더가 적임자로 떠올랐다. 알럿지는 댄 래더를 기용하기 위한 장기 전략을
구상했다.
CBS는 크론카이트를 대체할 만한 능력을 지닌 댄 래더를 놓으려 하지 않았다. CBS가
댄 래더에게 특별히 제시한 조건은 ABC보다는 조금 미미하였지만 1년 전에는 30만 불을
지급받던 래더에게 제시했던 것이다.
CBS 뉴스 부문 사장이었던 빌 레오날드는 래더의 사건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특히 앵커가 "저녁뉴스" 방송의 실질적인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에게
편집장의 위치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1981년 3월, 크론카이트의 마지막 방송에서 그는 앵커의 교체를 릴레이 경주에
비유하면서 젊고 약간은 미흡한 래더에게 바톤을 넘겼다.
래더를 기용하는데 실패한 알럿지는 다른 인물을 찾기 시작했다. 그해 말쯤, 그는
NBC의 톰 브로커를 찾아냈으며, 바로 톰 브로커가 주장하는 "아주 정당한 교섭작전"에
착수했다. 기성앵커를 반박했던 연설과는 달리 알럿지는 여전히 스타덤에 올라있는
기존 인물만을 원했던 것이다. 마침내 알럿지는 다시 한번 톰 브로커에게
거절당했으며, 이를 계기로 브로커는 연봉 180만 불의 수당으로 NBC의 "Nightly News"
앵커로 영전하게 되었다.
1983년 알럿지는 ABC 방송국 내에서 피터 제닝스를 뉴스 방송의 체제를 흔들어
놓았다. 알럿지는 탁월한 인재들로 "World News Tonight"을 만들려고 노력했으며,
오늘날과 같은 첨단의 네트워크 뉴스를 구성하려 하였다. 이렇듯 ABC 뉴스의 위치를
놓으려는 알럿지의 노력은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3명의 앵커가 등장하는데 있어서
간접적으로나마 영향ㅇ르 끼쳤다. NBC의 브로커가 알럿지를 "방송계의 예언자"라고
칭송한 것은 그리 어긋난 사실이 아니다.
요즈음 브로커, 젠이스, 그리고 래더, 이 3명의 앵커는 방송언론의 스타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의 세계뉴스를 다른 소스보다는 이 세 사람을 통해 얻고
있다. 그들의 신빙성은 대통령에 버금가는 것이다. 그들은 수백만불의 연봉을 받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방송게에서의 그들의 영향력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헌틀리,
브링클리, 혹은 크론카이트와는 달리 그들은 방송국 경영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각각 25__30여 곳의 지점과 100명 가량의 특파원, 100명 가량의 카메라맨,
그리고 200명 가량의 프로듀서와 대본작가를 보유한 대규모 집단의 우두머리인
것이다. 그들의 영향력은 스텝의 기용과 해임에까지도 절대적으로 미치고 있다.
또한 수석 프로듀서는 이제 그들의 프로그램을 컨트롤 할 수 없게 되었다. 루벤
프랭크는 "헌틀리 브링클리 리포트"에 관한 모든 결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체트 데이비드와 같이 지낸 9년 동안 단 한번의 의견차이가 있엇을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프랭크마저도 앵커맨과 수석 프로듀서간의 힘의 균형은
예전과는 달리 변화하였으며, 현재는 앵커맨의 영향력이 월등히 커졌다고 시인하였다.
프랭크는 (나는 래더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CBS 뉴스의 수석 프로듀서인 톰 베타그가
앵커맨을 대신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브로커와 "NBC Nightly
News"의 수석 프로듀서인 빌 휘틀리의 경우, 브로커에게 더 많은 권한이 주어지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단순한 저널리스트인 앵커맨에게 이렇듯 막강한 권한과 엄청난 연봉이 주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 저널리스트들(즉 앵커맨)은 TV 뉴스 초기에는 단순히
뉴스 대사를 읽어주는 사람들에 불과했다. 아직까지도 몇몇 나라에서는 앵커맨은
단순히 뉴스를 보도하는 사람 정도로 평가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손에 쥐어지는 신문
등 인쇄보다 흥미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 오늘날 미국의 앵커맨들이 마치
정치인처럼 대우받고 있는 까닭은 무엇이며, 마치 스타처럼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아마도 그것은 닭과 달걀의 문제와도 흡사한 승진과 명성의
관계에서일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앵커맨 에이전트인 리차드 리브너는 부와 명성에 대한 미국인의
망상에 관하여 이야기한 바 있다. (부와 명성에 대한 사람들의 망상은 매스미디와
함께 시작되었다. 영화배우, 록음악 스타, 그리고 잡지에 게재되는 스포츠 스타나
TV 스타로 이어지는 망상의 흐름은 마침내 TV 저널리스트까지 대상에 넣게 되었다.
이제 뉴스 보도자들마저도 스타덤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잠재적으로 스타가 될 가능성을 지닌 앵커맨들이 진정한 유명인사가
되기까지는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우선 기술적인 발전이 필요한데, 한 예로 CBS의
뉴스 부문 사장이었던 벤 고든 수더가 댄 래더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고안한 엑스트라
클로즈업 기법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뉴욕 타임스"나 "버라이어티"
같은 잡지나 신문지상에 앵커맨에 관한 기사나 선전의 게재와 생방송의 추가 방영,
그리고 스페셜 인터뷰 등이 필요하다. 이기를 얻기 위해 브로커는 1986년 월드 시리즈
기간중에 "NBC 뉴스 다이제스트"를 진행하였으며, 1990년 1월, 수퍼볼 기간중에는
전 미국 대통령인 레이건과 스포츠 관계 인터뷰를 방송하기도 했다. 제닝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월요일 밤의 미식축구"의 하프타임에 뉴스를 방송했으며, 래더는 주간의
골든아워에 "저녁뉴스"와 "48시간"을 라디와 TV를 통해 방송하였다.
미국인들에게 잇어서 3대 방송의 뉴스는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위와 같은 시청률 확보를 위한 경쟁이 초래된다. 스타가 출연하지 않는 "NBC Nightly
News"가 "NBC Nightly News with Tom Brokaw"보다 인기없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기배우의 출연이 많은 관객을 동원하는 것이다. CBS 특파원인
리차드 스랠켈드는 (사람들이 시청하는 이유는 방송 자체보다는 인기인을 보기
위함이다. 그러기 때문에 앵커맨의 이름이 방송 타이틀에 붙여지는 것은 당연하다.
인기인의 확보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아이러니켈하게도 이 세명의 앵커맨들은 매우 흡사하다. 백인, 기혼자, 그리고
2__3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 재산, 중년(상하로 8년 차이), 그리고 프로테스탄트가
그 유사점이다. 그들의 정치 성향마저 중립, 혹은 약간 좌경으로 치우쳐 있어서
비슷한 점을 보여주고 있다. 3명 모두가 외모가 수려하며, 정력적이고 야망이 있으며
경쟁심이 강하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미국의 다수 대중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프레드 프랜들리는 (미국인들이 앵커맨을 형제처럼 느끼는 이유는 바로 형제 같은
앵커맨을 원하기 때문인데, 이로 말미암아 TV는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다. TV
시청자들은 그들이 대통령감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을 화면에서 보고 싶어하는데 바로
앵커맨들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3명의 앵커맨들이 대표하고
있지 않은 점은 소수집단이나 여성인데, 여성의 경우 1989년 다이안 소이어나, 카니
정과 같은 저널리스트가 등장하여 여성의 언론계 진출에 희망을 불어넣었다.
앵커맨의 개인적 성향은 물론 다른 부문에서 3개 방송사의 차이는 별로 크지 않다.
ABC는 "American Agenda"와 "Person df the Week"를, NBC는
"Assignment America"와
"Sportlight"를, 그리고 CBS는 드라마틱한 카메라의 앵글과 댄을 내세우며 방송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방송 프로그램의 내용이 아니라 댄, 피터, 그리고 톰과 같은
앵커맨의 출연이다. 시청률을 높이는 데 있어서 앵커맨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며,
후원자(광고주)에게도 앵커맨은 매우 중요하다. 카트리느 드뉴브가 "샤넬"을,
리카도 몰탈반이 "크라이슬러"를 그리고 빌코스비가 "젤로"의
매출을 높이는 것처럼,
뉴스의 시청률은 앵커맨이 높인다. 선도적인 TV 컨설팅 그룹인 프랭크 N. 모기드
어소시에이트의 브럭 노스콧 사장의 말에 의하면 시청률은 두 가지, 즉 무엇을
방송하느냐와 앵커맨이 누구냐 하는 점에서 좌우된다. 시청자들은 그들 자신이
좋아하는 앵커맨을 보기 위해 채널을 바꾸게 되는 것이다.
요즈음 앵커맨은 전체 네트워크의 대변인 구실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의
선배들과는 달리 많은 요구에 부응하여야 하는 것이다.
브로커는 다음과 같이 앵커맨의 변모를 말한 바 있다. (NBC 방송에 입사하였을 때,
월트 크론카이트나 데이비드 브링클리 같은 사람들이 방송을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그들은 보다 많은 시청자들을 확보하기 위해 몸소 뛰어다녀야만 했다. 그러나 만일
내가 위치타를 지나가거나, 비행기를 갈아타거나 할 경우 한 지점에 연락하여 그
지점의 시청률 확보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말하면, 즉시 내게 로켓을 보내 줄
정도로 앵커맨의 대우는 엄청난 발전을 하였다)
제닝스와 래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곧 방송사업의 경쟁력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네트워크 지사의 성장을 위해 일하며,
뉴욕에서는 오지 사장들과 뉴스 디렉터 등을 만나 홍보를 위해 사진을 촬영하거나
혹은 시청자들과 지사장에게 편지를 보내야 한다.
저널리스트의 교육을 받은 초기의 방송인들은 저명인사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인지에 대해 과소평가 하곤 하였다. 피터 제닝스는 (나는 내가
사람들과 앉아서 나의 생활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 등을 이야기하는 직업을 갖게 될
줄은 몰랐다)라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저널리스트의 기술과 앵커로서의 기술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앵커맨들은 그들이 받는 엄청난 보수에 걸맞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브로커는 그렇게 많은 보수를 원하지 않는다고 홧김에 이야기한바 있지만 그 정도의
보수는 당연하다. 단순한 저널리스트는 브로커의 보수의 아주 작은 일부에 해당하는
금액만을 지급받는다. 앵커맨은 언론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이며, 이것이 바로
그들이 일한 대가를 받는 이유이다.
(초기의 체트, 데이비드 그리고 월터와 같은 방송인들은 상대방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못마땅한 일들로 불유쾌한 하루를 보내기도 했으며, 잘못된 일로 남들을
질책하기도 했다. 그리고 때때로는 다른 주제에 너무 시간을 많이 할애한 까닭으로
허겁지겁 인사를 끝내곤 했다. 지금도 이런 류의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라고 브로커가
말한 바 있다.
또한 래더는 (앵커맨을 보는 시각은 매우 과대평가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그
시각을 과소평가 했었다.그러나 누구든 어떤 다양한 경험을 가졌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앵커맨으로 직업을 택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그 앵커의 중요성이 그 어느 것보다도
크다는 것을 잘 인식 못한다)라고 그의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ff
5. 텍사스 출신의 투사
1931년 10월 31일 텍사스 달톤 출생인 댄 래더는(그의 동료가 말하듯이) (이
험한 세상에서 살기 위해선 매일매일 필사의 노력을 다 해야 한다)고 믿으며 자라왔다.
그는 대공황시대의 노무자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어윈 랙스 래더는 오일
파이프라인을 땅 밑에 설치하는 일을 했는데, 텍사스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그 무덥고
연기나는 일을 하기 위해 매일 땅을 파는 일을 해야만 했다. 어머니 바일은 텍사스
빅토리아의 한 여행자 호텔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했다.
댄 래더가 한살 때 그의 가족은 이른바 "고원"이라고 알려진 휴스턴의 한 황폐한
동네로 이주했다. 오늘날 그 곳은 붕괴 직전의 허스름한 곳으로, 현재 그곳엔 흑인이나
남미 스페이계 사람들이 주로 살고 있다.길은 구멍이 나 있고, 상점들은 "값어치 없는
물건이면 무엇이든 삽니다"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댄 래더의 새 집은 동네와 아주
어울리지 않는 이름의 "왕자가(Prince Street)"에 위치하였다. 이 곳의 시멘트
도로에는 트레일러가 서 있고, 녹슨 포드 자동차와 함께 집 안 마당에는 건물에서
떨어져 나온 페인트 조각들이 가루가 되어 미납 청구서 더미에 짖눌려 뒹굴고 다닌다.
낙서가 가득한 벽은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괴로운 규칙을 없애라"
1030년대 당시의 경제상황은 그리 나쁘지는 않았지만 결코 풍요로운 때는 아니었다고
댄 래더의 남동생 단은 회고한다. 단은 이웃 노무자 가족들의 작지만 깨끗한
목조가옥에 대해 말한다. 그곳은 완전히 빈곤한 곳은 아니지만 그들이 성장하기에
아주 편한 곳은 아니었다. "우리 동네에는 거칠다고 말할 수도 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가령 선택의 기로에 섰다고 합시다. 이때 정도를 걷지 않으면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달리 영향력을 지닌 곳도 잇었다. 침례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래더 가족과 이웃들은 매주 일요일이면 그 교회로 예배가곤 했다. 사실, 열 개의
블록으로 된 그 지역은 금지구역이었다.
그곳에서 주류매매는 금지였다. 그 동네에는 공원도 있었는데 두 형제 모두 시
스포츠연맹에 들어가 그들의 첫사랑인 축구를 하기도 했다. 또는 한 가족이 집에서
라디오 주위에 모여 큰 시합을 듣거나 컨트리 뮤직이나 텍사스 스윙을 듣기도 했다.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행크 우리리암스의 기록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알수
없었을지도 모를 시절과 장소에서 제가 컸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댄 래더가
고개를 저으며 웃는다. (리놀륨 바닥으로 된 부엌에서 봅 윌즈와 그의 텍사스
플레이보이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곤 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댄 래더의 오랜 친구들의 기억에 의하면, 국민학교 때 그는 학교로 걸어가면서
머릿속으로는 늘 축구경기를 상상하곤 했다. 그리고 매 경기를 하나하나 만들어낸다.
"등을 돌려 패스합니다... 돌격준비... 아, 공을 뺏어 뜁니다... 오! 텐
야드 라인에서 걸렸습니다!" 태클과 터치다운이 몇 번씩 나오면, 그는 벌써 몇블록을
지났다.
집에서그는 온통 신문으로 둘러싸였다. (아버지는 아주 충동적으로 신문 구독
했습니다. 열렬한 구독자였는데, 어떤 신문이든 그 내용에 성이 나면 벌떡 의자에서
일어나 그 신문 구독을 끊어 버렸습니다. "포스트", "크로니클",
"프레스"등 동네에 배달되는 모든 신문을 구독했습니다)
겉에서 보면 그의 부모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짝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텍사스
회오리 바람처럼 금방 불끈했다가도 쉬 사라지는 성격으로 강철같은 눈 빛의 거칠은
노동자였다. 반면 그의 어머니 바일은 따뜻하고 우아한 성품의 소유자로 독실한
침례교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자신과 자식들의 운명을 위한 공통된 결정으로
묶여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었죠)라고 남동생 단은 말한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읽기를 좋아하셨죠. 그리고 어머니에겐 우리가 대학에 가는 것은 문제도 되지 않았죠)
댄은 부모 각각의 특징을 이어받았는데, 어머니에게서 남서부의 우아함과 아버지의
검은 눈과 검은 머리, 그리고 급한 성격을 닮았으며, 두 부모가 공통으로 지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추진력과 단호한 결정, 그리고 미래를 성취하려고 하는 갈망이었다.
댄 래더는 그야말로 투사였다.
물론 그 동네에서 래더는 투사가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곳에서는 주먹 쓰는 법을
알고 있어야 했다. 국민학교도 하나의 결투의 대전이었다.
"국민학교 시절에 아이들이 항상 싸우고 했던 것을 기억합니까? 그 또래의 자존심
강한 아이들은 하루에 적어도 한 번은 싸워댔죠. 수업 시작 전에도 싸우고, 쉬는시간,
점심시간, 그리고 방과후에도 결투를 했죠. 주로 새로 전학온 아이를 호되게 때리는
소리와 함께 그 아이를 훈련시키는 것으로 시작됐죠"
이 "고지" 마을에는 활달한 소년 래더에게 대단한 것은 없었지만, 한 가지 그
마을에 자긍심을 가지게 하는 것은 레이건 고등학교였다. 이 학교는 괜찮은
학교였는데, 여기서 그는 수업 외 시간에 학교 신문 스포츠란의 기사를 쓰거나
축구부에서 후진 선수로 활동했다.
어쨌든 그는 축구를 하면서 축구가 그에게 대학에 갈수 있는 티켓을 갖다주리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축구 선수 장학금을 따 경기장의 영광, 그리고 모험과
흥분이 가득한 밝은 미래를 기약하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그러나 그는
150파운드의 깡마른 체격에 그리 빠르지도 않고, 솔직히 말해 훌륭한 선수는 못 되었다.
그가 샘 휴스턴 주립사대축구 장학금을 신청했을 때, 당시 그 학교의 코치는 그를
보고 조소를 했다.
그러나 1950년 2월에 그는 어머니와 함께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두 시간을 걸쳐
텍사스 헌츠빌에 도착했다. 그의 어머니는 대학 등록금과 수업료 40불을 지불하기
위해, 전쟁 때 사둔 그들 가족에겐 아주 중요한 25불짜리 저축성 채권 두 장을 액면
시가보다도 싸게 팔았다. 그녀에겐 그녀의 맏아들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것이니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샘 휴스턴 대학은 동부 아이비리그와 같은 명문은
아니었다. "동산"에 겨우 여섯개의 건물이 모여있고, 그나마 학생수가 2,000명인
것은 이 텍사스 동부 교육기관으로서는 행운을 잡았다고 할 수 있었다. 소나무 숲에
파묻힌 아담하고 평화로운 이 학교에 유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리가 세개뿐인
잡종개 "트리포드"라는 마스코트이다. 학생들은 농촌이나 노동자 출신 계층의 자녀로,
학과도 반은 직업교육, 반은 순수 문학이었다. 학생들은 모두 알고 지낼 정도였다.
곧 샘 휴스턴의 모든 학생들은 올백으로 넘겨 반질반질 빛나는 머리칼의 미남
댄 래더를 알게 되었다. 이 대학의 총장 엘리어트 보어 박사는 그가 여러가지 활동에
참여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1952년 "샘 휴스턴에서 가장 인기있는 학생"으로 뽑혔고,
저학년 대표로도 활동했다. 또, 카발레로 클럽회원이 되어 적십자와 USO(미국위문협회)
의 기금을 모으기도 했다. 댄은 "Press_Capades"쇼의 사회를 맡기도 했으며,
아름다운 여학생들이 "미스 샘 휴스턴"의 왕관을 놓고 겨루는 미인
선발대회를 주최한 바 있다.그리고 어느 해의 "개척시대 기념일"에
수염기르기 대회에서 우승을 한 적도 있다.
그가 따 낼수 오직 하나는 축구팀의 포지션이었다. 그는 축구팀에 소속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그보다 더 크고 빠른 선수들을 당해낼수 없어 결국 그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곧 다른 것으로 옮겨졌다.
(그는 매일 나에게 찾아와서 얘기하곤 했습니다)라고 당시 신문방송학과의 유일한
교수였던 휴 커닝햄이 말한다. (댄은 연습팀에도 낀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죠. "너는 결코 그 팀에 들어갈수 없을거야. 그렇게 된다면
너는 죽게 될 걸!")
커닝햄 교수는 래더를 믿고 기회를 줘야겠다고 결정했고, 그리고 이 열정적인
청년은 곧 그의 정열을 축구에서 저널리즘 쪽으러 옮겼다. 커닝햄 교수는 그가 학비를
벌기 위해 "Lone Star Conference"에 통계자료를 구해 주거나 홍보작업을 해주는 등의
이상한 일거리를 구해 주었다. 물론 그는 "휴스토니안"이라는 신문에 무엇보다도
헌신적이었다. (어느 여름 그 신문을 위해 그와 함께 일한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단순한 리포터였는데 그는 마치 그 신문이 무슨 "뉴욕타임스"라도 되는 것인양
열성적이었죠)라고 현재 샘 휴스턴대학 동창회 이사인 노라 델존스가 회고한다.
그는 친구 세실 터크와 함께 학교 캠퍼스에서 조금 떨어진 오래된 헛간에서
살았는데, 어느 시간이든 신문사로 일하러 가곤 했다. 밤늦도록 커다란 뉴스실을
왔다갔다 하면서 손에는 카피를 들고 편집 사무실로 사용하던 유리막 주변을 오가기도
하고, 편집을 바꾸기도 했다. (댄 래더는 하루 열여섯 시간을 일했죠)라고 휴 커닝햄
교수가 말한다.
(같은 과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가엾게도 그녀는 그외의 데이트는 항상 그
뉴스실에서 였죠)
(네) 하며 엘리어트 보어 박사가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흔들어 보인다. (그는 바쁜
미스터 일꾼이었죠) 래더는 1, 2학년의 두 해를 신문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더 열심히 일해 더 많은 것을 성취하리라고 스스로 다짐하였다. 이
다짐은 그의 투지력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한 결과, 일주일에 두 번
나오는 이 신문의 편집자 자리에 그보다 나을 사람이 없었다. (댄 래더와 경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는 인간 발전기입니다. 그는 길에 들어서면 결국 다른
사람을 앞질러 버립니다)라고 커닝햄 교수가 말한다.
나중에 알려진 것인데, 신문사 편집자라면 직위가 높아야 하는 것이 상례인데
사실은 하급직원으로 채용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의 정기 사설인 "The Editor's Beat
(편집자의 난)"에서 자신이 유정 굴착에 매달려 땅을 파며 보냈던 여름, 운전자 측
창문이 없는 괴상하게 생긴 자신의 중고차, 그리고 구멍난 마루를 통해 방으로
들어오는 자욱한 연기등의 여러가지 주제를 다루었다.
몇 개의 사설 중에서도 아직까지 그의 마음에 남아 울리는 것이 있다. 예를 들자면,
거대 정부에 대한 텍사스 주민들의 깊은 불신감을 담은 사설 "워싱턴을 아십니까,
어르신?"이라는 것이 있다. (이 신뢰의 문제에 있어서 내가 놀란 것은, 수위
아저씨에서부터 고위 공무원에 이르기가지 모든 워싱턴 사람들이 돈과 명성을 위해
살아간다는, 모름지기 훌륭한 정치가란 훌륭한 도둑이 안 되고서는 될 수 없는
듯하다)
현재 래더는 다소 온건파가 되었지만 당시 그의 정치적 지지에 대한 소견은
확실했었다. 한 사설에서 그는 아들래이 스티븐슨을 대통령으로 지지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민주주의자이므로 누구보다도 아들래이를 적극 지지한다.
나는 민주당의 지침을 믿으며, 또 그것이 미국에 번영의 해를 가져다 주었다고 믿는다.
스티븐슨이 대표로 있는 민주당은 이 나라를 불황의 늪에서 일어나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승리를 갖게 하였다. 민주당은 오랫동안 노동자를 대표하여 왔다.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땀흘리는 노동자들은 그 어느 해보다도 지난 20년 동안 더 많은 것을
갖게 된 것이다!)
진정한 텍사스 민주당원으로서 래더는 1952년 맥카시즘과 공산주의 축출의 영향을
시들게했다. "콜롬비아 대학의 칼 W. 앵커맨 학장은, 논란의 대상이 되는 주제에 관한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의견의 표시를 묵과하면 이 맥카시 형의 조사이론이 나온다고
했다. 이와같은 주장은 맥카시보다도 지능지수가 훨씬 높고 더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 앵커맨 교수의 말이지만, 맥카시가 그를 조사
연구하여, "공산주의"로 기울고 있다고 말한다 해도 놀라운 것은 못 된다. 그게
당연한 것이다. 솔직히, 우리는 맥카시의 논리를 부정하는 앵커맨이나 그외 사람들과도
좋은 친분을 해야 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의 목적이 그가 취하는 모든 방법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 분명히 우리나라에서는 학교든 교회든 어느곳에서든 공산주의는
폭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체계적이고 효법적인 규례가 필요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경의 개정판 출판에 관한 사설을 쓴 적이 있는데, 이 사설에는
그의 깊은 신앙심과 텍사스 평원처럼 넓은 그의 정서적인 면이 나타나 있다.
"성경은 사람들의 마음을 겸허하게 하는데... 성경을 읽고 나면 나는 내 자신을
저널리스트라고 부르기를 주저하게 된다. 수년 동안 나는 자신에게 말해오기를 내가
자부심을 느낄만한 것이 잇다면, 저널리스트로서의 노력을 들 수 있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성경을 읽으면 그러한 허영심마저 창피하게 된다. 성경이 세계 최고의 위대한
책이라는 것은 전에도 알고 있었다. 이번 개정판은 오늘날 신문에 쓰이는 문장체와
같은 글로 출판되엇다... 여러분은 스피래인의 소설이 한창 유행일 때 그 소설을
최소한 몇 장이라도 읽어 보려고 시도한 적이 잇을 텐데, 그럼 "이 새로운 책"은 왜
그렇게 해보지 않습니까? 저는 이 책이 스피래인의 소설만큼이나 흥미롭고 감동적일
것이라고 보증합니다(주님, 죄송하지만, 당신은 이런 식으로라도 당신의 책을
사람들에게 팔아야 합니다) 또 저널리스트로서 확신에 차 있는 미숙한 문장가들도
이 책을 읽어봐야 한다고 강력히 부언한다..."
래더가 쓴 어떤 글보다도 놀라운 것은, 그가 다룬 양의 일인데, 그는 한번에
여러개의 공을 공중에 띄워놓고 갖고 놀 줄도 알았다. 휴 커닝햄 교수는 래더가
편집자로서의 임무와 함께 신문사에 스포츠 통계자료를 모아주는 일, 지방의 세인트
브라운 농장 클럽에 결과를 보내주는 일, 신문사 에이젼트로 일하는 등, 서너 개의
일을 함께 했던 것을 기억한다.
래더는 아주 작은 기회가 있으면 그것을 큰 기회로 부풀리게 할 줄도 알았다. 작은
지방 라디오 방송국 K_SAM에 스포츠 자료와 결과를 모아 알려주는 하찮은 일이
주어졌을 때, 래더는 방송국장을 설득하여 자신이 직접 경기 결과를 방송으로 알릴
수 있도록 했다.곧 그는 농장 클럽의 축구 경기 발표를 하기 위해 북극 탐헌가들이
신는 스파이크 신을 묶어 신고 나무로 된 전신주 꼭대기 위의 작은 박스로 떨며 기어
올라갔다. 그 박스는 작은 새 둥지같이 뒤로 기댈 벽도 없고, 마이크 하나만 달랑
있었을 뿐이었는데, 아래로는 운동장이 내려다 보였다.
당시 K_SAM에서 래더와 같이 일했던 잭 니콜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때에도
그는 아주 훌륭히 아나운스먼트를 했죠. 오늘날과 비교해도 그리 다를 게 없을
정도였죠) 당시 그 방송국의 분위기는 매우 엄격했다. 당시 K_SAM의 경영자이자
침례교 목사인 테드로트의 경영방침이 그러했다. 그러나 학교 근처의 방 세 칸짜리
오두막집 안에서, 그리고 헌츠빌까지밖에 나가지 않는 250와트 신호로, 그가 그리도
갈망하던 기회를 잡았다. 그는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의 축구경기 아나운스를
했다. 한 시간짜리 음악 쇼 DJ를 한 적도 있는데, "성경에서"와 같은 세속적인 노래를
담은 45회전판을 제외한 레코드판은 다 틀었다. 그리고 던롭 페인트회사와 같은
고객에게 광고 카피문을 쓴 적도 있었다. 짧은 뉴스도 한적이 있고, 장시간의
심야방송 때에는 "복음성가의 시간"이 나가는 동안 가끔 여자 동료와 부스 밖으로
빠져나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미스터 에브리바디였습니다)라고 라고 K_SAM에서의 동료 잭 니콜은 말한다.
(그는 무슨 일이든지 해냈죠... 그렇다고 그가 굉장한 지성을반드시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죠. 그는 일을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이든 했죠) 그러나
당시에도 두 가지 점만은 분명했다고 니콜은 말한다.
첫째, 그에겐 분명한 재능이 있었다. 그는 언제든지 즉흥적으로 대처할 줄 알고
있었다. "매일 아침마다 우리는 기도문 테이프를 갖고 사인을 했죠. 그런데 하루는 이
친구가 지각을 해서 큐를 시작하기 전에 테이프를 가지러 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자기 머리에서 즉석으로 기도문을 만들어 보냈죠"
두번째로, 이 젊은 래더는 보통의 학생이었지만, 눈은 항상 상패를 향하였다. 니콜은
그 청년의 진지함을 보여주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저에게 스포츠든
무엇이든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지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목표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래더는 당시 목표에 성급한 청년이었지만, 벌써 그때 운동화 끈을 묶어 매고 뛸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1953년 8월의 한 무더운 밤에 그는 샘 휴스턴 대학의
중고등학생 교육학과를 겨우 삼 년 반만에 마치고 졸업했다.
래더는 졸업후 1학년생들에게 꼬박 6개월 동안 저널리즘을 가르친후 해군에
입대했다. 한국전쟁이 터졌는데 그의 군대 복무기간은 겨우 6개월이었다. 의사들이
그가 어렸을 때 류마티즘 열을 앓았던 것을 발견하여 그는 군대에서 나오게 되었다.
(군인으로 가장 불명예스러운 기록 중 하나였죠)라고 래더는 말하면서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의 군복무 시절이 그에게 남겨 준 흔적은 있다.
규율과 애국심, 그리고 해군정신, 이 모든것이 그의 인생을 통해 그에게 박혀 있었다.
요즘도 동료들은 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강인한 해군이야) 후에 그를
틀에 박힌 자유주의자라고 흠을 잡는 이들은 이와같은 그의 다른 면을 모르고 그를
매도하는 것이다. CBS의 한 동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댄의 눈에서 눈물을 보고
싶으면 군대행진을 하거나 북을 두드리고 군인을 묘지에 묻는 것을 보게 하면 됩니다)
다음 해 여름, 래더는 휴스턴 크로니클지에서 시간제로 근무한 적이 있는데, 신문은
그의 주 요새는 아니었다.철자에 완벽하지도 않고 문필가는 더더욱 못 되고 하던 차에,
가을쯤 해서 그 신문사의 계열사인 라디오 방송국 KTRH의 자리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얼른 수락했다. 이것은 "골든 걸프 해안의 목소리" 5만와트 송신력이 있는 방송국으로,
그에겐 대단한 기회였다. 휴스턴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경찰의 사건 기록부에서 시장의
업무에 이르는 모든 분야를 취재하면서 그의 등록 상표인 정력으로 그이 리포터 직을
해나갔다.
(방송국에서 퇴근하지 않고 일했던 적도 많았죠. 이 직업을 모르는 사람에겐 그와
같은 정열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죠. 정말 리얼했죠. 전 그리고 그러한 매순간이
아주 즐거웠죠)라고 그는 회고한다. 그는 오전 5시면 출근했다. 그리고 아침
출근자들을 위한 7시에서 9시까지의 러시아워 프로그램으로 아침뉴스를 한 후, 오후
1시까지 계속 일했다. 그리고 외출을 해서 취재를 한 후 저녁뉴스를 하러 다시
방송국으로 돌아왔다.
댄 래더의 오랜 친구인 빌 존스톤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댄은 항상 KTRH에
있었습니다. 일요일 오후는 뉴스가 없는 유일한 시간이었는데, 글쎄, 이 친구가 일요일
저녁 5시, 6시, 7시에 짤막한 5분 뉴스를 집어 넣자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이렇게 생각했죠. "세상에, 이 녀석 미쳤군. 일요일 하루는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날인데 말야")
빌과 댄이 주말에 친구들가 모이기로 하면, 친구들은 항상 예상하는 것이 있었다.
(댄은 "나 없이 너희들 먼저 시작해"라고 말하죠. 그럼 한 시간 후쯤 방송국에서
댄으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미안하지만 어떻게 나올 수가 없게 됐다구요)라고 빌이
말한다.
댄이 열심히 일하기도 했지만, 그의 관례적인 정력과 뉴스를 만들며서 느끼게 되는
매 순간 순간의 흥분에 점점 더 빠져 들어가게 된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아마도
그는 저널리즘이 밥벌이를 떠나 진짜 일이라고 믿지 못하는 그의 친구와 가족들에게
자신을 증명해 보일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그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이해하지 않았으며 그의 아들이 빨리 깨닫기를 바랐다. 댄의 좋은 치구 빌도
똑같이 댄의 직업의 장래에 대한 확신이 당시엔 없었다. (세일즈나 현실적인 분야가
아니라면 진짜 일한다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저널리즘은 일이 아니야)라고
빌은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래더는 그것을 진짜 일로 만들엇다. 그리고 또 KTRH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낸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진 게벨이라고 하는 예쁜 비서가 있었는데, 래더는
그녀의 웃음에 매료되어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는 그에 필적하는 왕성한 정력의
소유자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믿음성도 있었으며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댄을
돌보았다.
1957년 그들은 결혼했고, 지금도 함께 살고 있다. 댄이 직업상 전세계를 바삐
돌아다니노라면, 그년는 그의 시금석이 된다. 어떠한 위기가 닥쳐와도 그녀는 그를
도와 맑게 울리는 공명판이 되었다. 그들의 오랜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남편
래더에게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남자의 모습을 이해하고, 사랑과 야망으로
아름답게 결합해 댄과 훌륭한 팀을 이루기로 결정하고 그 세대의 규율에 걸맞게
행동하는 강인하고 총명한 여자이다.
라디오에서 TV로 재빨리 옮기면서 그는 한 계단씩 더 올라가는 길에 들어섰다.
휴스턴 채널 2의 CBS 계열사 KHOU는 당시 그가 리포터로 입사할때만 해도 가장
인기도가 낮은 방송국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사후 오래지 않아 그 방송국의 운명은
달라졌고, 또한 래더의 운명도 달라졌다. 그는 저녁 6시와 10시 뉴스 앵커뿐 아니라
뉴스담당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라디오아 TV에서 일했던 50년대중반부터 말기까지는
그가 경험을 쌓은 해, 즉 그의 직업을 익히던 해였다.
꽤 맣은 신발이 닳아 없어졌을 뿐 아니라, 그만큼 그이 경험도 풍부해졌지만 때로는
젊은 호기심이 그를 위험한 곳으로 몬 적도 있었다. 여성지 "레이디스 홈 저널"의 한
기사에는 그가 마약을 복용한 경험이 있다고 쓰여 있다. 모든 것을 보고 듣고 하고
싶은 젊은이 그(댄 래더)가 정말 마리화나를 피웠는가? 댄은 그의 방문자를 꼬박
10초동안 쳐다보았다. (... 저는 법을 준수합니다)라고 그는 어떤 숨김도 떨쳐 버린
듯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우리나라에서 마약을
피워 본 적은 없습니다. 리포터라는 것이 모든 것을 대변할 순 없지만, 리포터로서
모든 것을 시도해 보긴 했습니다. 환각제에 대해서도 아주 많이 알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환각제도 공공연히 사용해 보진 않았습니다만, 호기심으로 인해
많은 흥미로운 것을 알게는 되었습니다. 예를들어 1955년인가 56년에 휴스턴
경찰서에 가서 제 몸에 헤로인을 투입하게 한 후 헤로인에 대한 것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강렬하고 빨리 마약에 빠져들게 되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KHOU에서 일하면서 래더는 지방 TV의 전형으로, 경찰과 시체가 많이 나오는 TV
프로그램같은 "경찰과 악한들" 이야기를 많이 다루었다. 오늘날 용어는 다르지만 그
기본원리는 변함이 없는데, 화염, 권총, 피, 시체, 등과 같은 것들이 시청자들을
불러와서 KHOU의 시청률을 높였다. 그리고 경찰과 갱 사건은 물론, 날씨도 주요
방송주제가 되었다.
휴스턴에서 TV 기상예보는 봄비가 온다든가 가을 낙엽등을 알려주는, 그저 뉴스의
끝 부분을 마무리하는 것 이상의 것이었다. 텍사스의 날씨는 홍수, 태풍, 회오리바람
등 그야말로 격정의 드라마였다. 휴스턴에서의 기상예보는 단순히 기온만 알려주면
되지 않고, 지붕이 앞으로 몇 시간후에 날라게 될 것이라는 것과 같아야 한다.
래더는 KTRH에서 1957년 루이지에나 주를 휩쓸고 나타나 500여명의 사상자를 낸
태풍 오드리를 포함하여 많은 밤을 태풍에 대한 보도를 하며 지새웠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천재는 그에게 항상 좋은 것을 가져다 준 듯하다. 사태가 발생하면
다른 사람들은 보통 낙담하는데, 그는 긴장감의 강도를 한 등급 더 높여서 일을 했다.
그는 "힘든 사태가 발생하면" 실력을 한껏 발휘하는, 그야말로 비상시의 수행자였다.
천재로 인해 그가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음은 질문의 여지가 없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태풍의 자식"이라고 부른다. 1961년 9월 5일 방송국에서 미국기상청으로부터
카리브해안에 있던 저기압이 멕시코를 통과하고 있다는 전신을 받았을 때 그는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폭풍이 대륙을 횡단하여 다시 멕시코만
바다위에 형성하게 되면 정말 위험한 사태로 갈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러나
방송국측은 그의 의견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이틀후인 9월 7일, 폭풍이 "카를라"라는
허리케인으로 발전하자 그들은 이번 기상사태가 뭔가 큰 뉴스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을 인정했다. 래더는 KHOU의 팀이 그저 휴스턴이 아니라 갈베스톤까지 가서
취재를 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는 기상청의 기상측정 레이다 장비가 갈베스톤에
있다고 주장했는데, 방송국 측은 방송장비를 수송해야 하는 경비 문제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래더는, 후에 그의 자서전에서 회고한 듯이, 그의 주장에 아주 완고했다.
(우리는 갈베스톤으로 내려가서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이번 기상예보 뉴스에
몽땅 쏟아야 합니다. 해안 어느 곳에 자리를 잡기만 하면 에이스 카드를 잡은거나
마찬가지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금요일, 그의 주장이 이겨 그날로 그와
그의 팀은 갈베스톤으로 내려갔다.
그는 갈베스톤 기상국으로 들어가 기상국 직원들에게 레이다 사건을 방송으로
내보낼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했다. 이때 그는 TV의 경고 기능을 강조하면서 이는
공공의 이해에 관련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래더는 뉴스를 알고 있었지만, 또한 다른
것, 극적인 효과를 이해하고 있었다. 허리케인이 계속 북상하기만 한다면, 레이다
사진은 간단하고 확실하게 아주 대단한 TV거리가 되고, 그러면 그는 그리도 바라던
대 스토리의 중심에 서게 되는 것이다.
토요일 밤, KHOU 방송국은 허리케인 카를라호가 텍사스 해안 밖 250마일에서
갈베스톤을 향해 진격하고 있는 모습을 생방송으로 내보냈다. 역사상 처음으로
허리케인의 모습이 생방송으로 비춰진 것이다. 래더는 허리케인 카를라호가 어두운
레이다 스크린 상에서 처음에는 초생달, 다음에는 소용돌이 모양으로 변하는 것을
설명했다. 스튜디오 안에서 제작진은 허리케인의 실제 크기를 보고는 놀라 숨을
죽이며 계속 주시햇다. 50마일이나 되는 회오리눈과 크기가 400마일이나 되는 이
허리케인은 곧 멕시코만 일대를 덮쳐 버렸다.
수해 동안 래더의 배짱과 뉴스맨으로서의 본능으로 댄은 알려졌고, 또 그러한
이야기가 이젠 신화적인 것이 되었지만, 그는 그의 경력에 중요하게 될 몇몇 순간에,
바로 필요한 그 순간 그 장소에서 서 있었다. 허리케인 클라라의 경우가 바로 그
순간들 중의 하나였다. 그 다음날로 기상청은 대피난을 명령했다. 35만 명의
대피난으로, 미국 역사상 비전시 중의 가장 큰 피난이었다고 래더는 보도했다.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카를라호가 갈베스톤 남부를 강타하자 수백만 달러의 피해가
발생하였고, 이 허리케인이 해안을 거슬러 옴에 따라 건물이 무너졌다. 그러나
사상자는 총 12명에 불과했다. 래더와 그의 팀은 많은 인명을 구하게 된 데 자부심을
느꼈다. 이 사건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재난의 와중에서 침착을 잃지 않고 36시간동안 계속 태풍에 대한 보도를 훌륭히
진행해 나간 래더의 모습을 지켜본 KHOU의 모회사 CBS 측은 매우 감동하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크론카이트 앵커맨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후에 래더와 경쟁하게 된
로드 머저 역시 CBS 통신원으로 빅토리아 90마일 외곽지역 허리케인 카를라에 대한
보도를 하였다) 허리케인이 지나간 지 몇 주 후, 조금이라도 건져내기 위해 물속으로
들어가 있는 집 잃은 주민들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래더가 엉덩이 높이까지 찬
물속으로 들어가자, 월터 크론카이트는 존경스런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물독사가
있는 물속에 그의 엉덩이까지 물이 차올라 있었다) 그후, CBS 경영진은 30세의 이
텍사스 출신에게 통신원 자리를 주기로 결정했다. 래더는 카를라호에 대한 자신의
업적과, KHOU가 지방뉴스 방송국으로서의 선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에 기뻐,
처음에는 CBS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얼마후 그 제안이 그에게 큰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받아들였다.
1962년 2월 말, 이 초조한 리포터는 뉴욕에 도착하여 겁이났다. 이는 대 순간으로
머로우, 콜링우드 그리고 세바레이드의 본거지인 것이다. 물론 그는 리포터로서의
자신의 능력에 자신만만하였다.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해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는
이 동부 해안지방의 세련미와는 떨어진 고장의 출신인 시걸뜨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기가 대도시에 가는 것이고, 또 예일이나 하버드 출신들과 겨뤄야 할
것이라는 것도 알았죠. 그리고 그 전보다 두 배는 더 열심히 일해야 되리라는
것도요)라고 그의 친구 빌 존스톤은 말한다.
처음에 래더는 그리 세련미를 낼 수 없었다. 오랜 동료 피터 허포드는 그의
저녁식사에 초대되어 자기 집에 나타난 이 텍사스인의 처음 모습을 회상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절대로 잊지 못할 겁니다. 푸른 하늘색 양복에 하얀 양말, 갈색 구두,
자기 생각으로는 성장이라도 하고 왔죠)
요즙도 허포드는 당시의 래더의 모습이 떠오르면 낄낄거리며 웃어댄다. 그러나 그는
물론 다른 모든 이들의 공통적인 댄에 대한 견해는, 래더는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모든 것을 아주 빨리 배웠다. 그리하여 오래지 않아 그는 세빌로우
스타일의 옷을 입고 다녔다.
(그는 출발하자 한 시간에 90마일의 속력으로 달렷습니다)라고 허포드는 말한다.
뉴욕에 온 지 두 달도 안돼서 텍사스 주 달라스의 CBS 남서부 지국의 개국 국장이
되어, 그해 1만 7,500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이것은 이 젊은 통신원에게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그의 가족을 모두 달라스로 데리고 온 후에는 곧 큰 화제거리를 찾아
거리로 나섰다.
1960년대 초 미국내에서 많은 관심을 일으켰던 것은 시민운동이었다. 흑인들은
흑인을 억압하는 짐 크로법의 철폐를 요구하고, 백인은 예전의 법을 그대로
존속시키기 위해 버스를 뒤집거나, 반대파를 쏴 죽이고, 군중에 개를 풀어 달려들게
하는 등 그야말로 폭발적인 상황이었다. 1962년과 63년 래더는 버밍햄, 멤피스, 잭슨
등의 남부지방을 다니면서 그의 표현대로 이른바 "내전"을 취재하였다.
기본적으로 기자들은 양쪽 두 집단 모두에게서 천대받았다. 남부지방의 백인들은
기자를 잘못 교육받은 잘못 교육받은 공산주의의 찌꺼기이거나 그 이하의 것으로
생각했으며, 기자들이 문제를 휘젓는다고 믿었다. 그리고 흑인들은 기자들이 일을
충분히 해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폭동이 일어나면 흑인들은 기자들을 백인이라는
이유로 구타했다. 그리고 백인들은 기자들이 취재장비를 들고 찍지 못하게 그들을
때려댔다. 래더는 여러번 총알을 피해다니기도 했고, 또 폭도들이 직접 자신의
갈비뼈에 총을 들이댄 적이 있을 정도로 이 취재는 위험하였다. 그러나 이 취재는
아주 뜨겁기도 하였다. 그는 야망이 위험을 능가했었다고 고백한다.
(야망이라구요?)라고 당시의 한 CBS 동료가 말한다. (댄이 CBS에 온지 2, 3개월이
되었고 그때 저는 뉴욕에 있었고, 우리는 서로 새벽 2시에 자주 전화통화를 하곤 했죠.
그때 댄은 하루 열 다섯 시간, 열여섯 시간을 하면서도 한번도 불평해 본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그가 전화를 했는데 아주 낙심한 듯했어요. 그래, 저는
호기심이 발동해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말이 "오늘 저녁 방송 봤냐"
는 겁니다. 글쎄, 월터 크론카이트가 그의 이름을 실수했는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댄 래더를 단 래더라고 했답니다. 댄이 제게 묻기를, "나는 커다란 취재를
많이 보았는데, 그 친구 정말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래더가 불평하는
것을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죠)라며 피터 허포드는 낄낄 웃는다.
민권운동을 취재할 때의 또 다른 동료는 이렇게 말한다. (취재때문에 길거리에 나와
있을 때에도 그의 눈은 크론카이트를 바라보았으며 그가 자신의 미래의 인물이 될
것이라고 결정했습니다. 벌써 그때 이미 래더는 자신의길을 알고 있었죠. 마음을
결정하고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일해냈죠)
그렇게 많은 시간을 밖에서 보냈지만, 가족들의 고충 또한 컸다고 래더는 솔직히
고백한다. 자식과 부인은 물론, 취재에 온 정신이 가서 다른 일상적인 흥미도 잊고
지냈다. CBS의 한 동료는 말한다. (봐, 젊고 야망있는 그가 미국에 변화를
가져다줄지도 모를 뉴스를 보도하는 꼭대기에 앉아 있잖아. 맞아 금방 취하는 술 같지.
그는 잘 생겼고, TV에도 나오는데. 버밍햄에도 가고 알라바마에도 가고, 그럼 그곳엔
헤르츠 랜트카 카운트의 아가씨들도 있고 또 비행기 스튜디어스들도 있지.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럼 그는 그의 동료와, 우리가 아는 남자들의 90p와 아주 다를게 없지)
그 다음 수십 년간을 래더는 많은 날을 밖에서 보냈다. 그는 대신 가족들에게
치루었던 대가를 그의 아들과 있었던 한 일화를 들어 설명하였다. 하루는 집에서
그의 아들 단쟈크의 친구가 물었다. (저 삶 누구야?) 그러자 그의 아들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고는 말했다. (응, 댄 래더야)
이야기가 뜨거워질 때마다 댄이 나타나 뉴스의 현장을 맡곤 했다. 그러나 1963년의
우연히 발발한 사건보다 더 큰 취재는 없을 것이다. CBS 뉴올리언즈 지국 개설 중에,
그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텍사스 순회를 취재하라는 본사의 명령을 받았다.
그가 집중하며 다루고자 했던 민중운동을 잠시 취재하지 못하게 되어 좀 화가
났지만, 그의 고장이 이 자유주의적인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
취재에 착수했다.
사실 래더도 말하지만, 그가 1963년 11월 22일 아침에 텍사스에 있었던 것은 뉴스
끝부분에 짧게 덧붙이는 가벼운 대목 때문이었다. 인터뷰 취재 필름을 갖고 뉴스실로
돌아왔을 때, 그는 대통령의 자동차 순회 촬영시 오래 된 벽돌 창고를 지난 부분에서
찍을 마지막 장소였다. 그는 달리 방도가 없어 촬영할때 사용하는 포도금이 있는 노란
CBS 가방을 어깨에 걸머메고 그곳을 향해 갔다.
12시 30분이 좀 못 되어서 래더는 그 유명한 언덕배기에서 30야드쯤 떨어진 곳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대통령이 탄 리무진이 속력을 내면서 예정과는 다른 도로로 달리는
것이었다. 래더는 총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자동차 행렬이 아주 혼란에 빠진 것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가 막 달려서 현장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고 현장은 굉장히 소란하였다. 래더는 다시 방송국으로 달려와 아직 조용한
뉴스실로 가서 경찰단 무선을 틀었다. 파크랜드 병원의 이름이 나오자 얼른 그곳으로
전화를 해서 전화 교환수에게 의사든 누구든간에 정보를 알 수 있는 사람을 바꿔
달라고 졸랐다. 그는 소리쳤다. (나, 기자입니다. CBS의 댄 래더라는 사람이요. 끊지
말아요!) 그리고 결과가 나왔다. 대통령은 저격당한 것이다. 그는 숨을 거두었다.
CBS는 이 내용을 완전히 몇 번 체크한 후 타 방송국보다 먼저 방송했고, 행운의 신은
그날 그들에게 있었다.
뉴스를 전달하는 것은 비극에서 성공하는 사업이다. 그긴 비극적인 주말, 범인 리
하비 오스왈드가 잡히고 새로운 방송이 나갔다. 그리고 이번 사건으로 래더와 CBS
팀은 오늘날 방송학과 교과서에 예가 되어 실려 있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월트
크론카이트가 안경을 벗고 목메인 소리로 대통령의 서거를 알렸던 모습도 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계속하여 보도한 래더의 냉철한 결단력도 잊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암살사건이 발발한 주말 그 당시에 곧 느낀 것을 저는 2, 3주일
후에 느낀 거죠)라고 래더는 "아메리칸 포커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훈련받은
리포터에겐 가능하죠. 만약 권투선수가 되기 위해 훈련받았다면 경기중 상처를 입어도
그 상처를 보이지 않고 은폐해야 한다는 것을 알죠. 프로정신이 있다면. 저는 그
사건이 있은 지2, 3주가 지나서 삼일 동안 계속 애도의 눈물을 흘렸죠)
많은 이들은 당시의 주말에 일어난 사건이 래더의 직업상 전환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그러하다. 사태로 이하여 래더가 CBS에 들어오게 되었고, 또
사태 때문에 그는 스타가 되었다. 그리하여 린던 존손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자 래더는
백악관 출입기자로 임명되었다.
CBS 내부와 외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래더가 존슨 대통령과 텍사스 마피아와 같은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점에서는 그 말이 사실이다. 둘 다
텍사스의 같은 단체 소속이고 또 둘다 제각기 강인하고 대단한 추진력을 지녔다.
그러나 놀랍게도 래더의 자서전에 존슨 대통령에 관한 기술이 있는데, 그에 대해
기술한 내용은 래더 자신에게 적용되기도 한다.
그는 어떻게 딱 부러지게 규정하기 쉬운 남자는 아니다. 비평가들은 그가
자유주의자인지 보수주의자인지 아니면 그저 야망이 큰 것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였다.
어느 면으로 그는 텍사스 인민주의자였다... 나는 항상 그가 오스턴이 보스턴만한
시는 아니라고 자신하지 않은 견해를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즉 보스턴만큼
역사적이고훌륭한 도시, 데이빗 할버스탬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는 놀랄만한 힘과
추진력과 지성,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위험을 내포한 인간이다. 그는 어마어마한
성과마저도 그를 즉각 추진케하는 내재된 공포성을 떨치게 하진 못했다.
텍사스라는 공통적인 배경이 있긴 하지만, 사실 둘의 친분관계는 거의 없다. 래더는
다른 사람들처럼 존슨 대통령이 자신을 교묘히 조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 존슨
대통령 도서관에서 발견된 갈겨 쓴 필체의 메모에는 존슨 대통령의 래더에 관한
감정이 있다. 백악관에 와서 대통령 비서관들의 일하는 모습을 찍고 싶다는 댄 래더의
요청에 대한 1965년 2월 나짜의 이 메모는 당시 보도담당 비서관 죠지 리디가 존슨
대통령에게 전달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답변이 갈겨 쓰여 있다. (이 사람(래더)과
CBS...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잡으려고 안달이다. 그들에게 말하시오... 대통령
비서관은 일하는 사람이지 배우가 아니라고)
그리고 조슨 대통령이 CBS 사장 프랭크 스탠톤에게 전화를 해서 래더에 대해 불평한
적도 여러 번 있고, 기자회견에서 래더의 질문요청을 묵과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보인 적도 몇 번 있다. 또 한번은 존슨 대통령이 래더의 면전에 욕을 퍼부은 적도
있었다.
"텍사스에서 멋있게 일하고 여기로 올라와 큰 인물이 되더니, 당신이 여기로 와서
동부 사람들을 물들게 하고 있군... 당신은 일생에서 가장 큰 실수를 한 것이오.
당신의 가장 큰 장점은 당신이 텍사스 사람이라는 거지. 그리고 나도 텍사스인이고.
지금 당신은 동부 사람들을 갖고 노는데, 아주 사기짓이지. 나는 알지. 그러니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거야"
그가 존슨 대통령을 따라다니며 뉴스감을 찾아다녔지만, 사실 그 역시 자신의
직업에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동료들은 그가 백악관 출입기자로서 존슨 대통령을
따라 독일에 갔을 때의 일을 기억한다. 그들에 의하면, 그때 래더보다도 더
야망있는 기자가 있었다면, 그는 같은 텍사스 출신의 CBS 기자 다니엘 쇼였다.
유럽 주재 기자였던 쇼는 독일을 잘 알고 있었고 존슨 대통령이 방문하게 될 곳도
알고 있었다. 그는 주요내용을 취재해서 다른 사람보다 먼저 뉴욕에 자기가 취재한
뉴스를 보내려고 계획했다. 그리하여 래더가 다른 백악관 기자단과 뛰어다니는 동안
래더의 뉴스거리를 낚아채서 뉴욕으로 보냈다.
옛날에 래더와 같이 일했던 CBS 스텝의 한 삶이 말한다. (댄이 그 사실을 알고는
CBS 본 사무실로 달려가 문짝이 떨어질 것 같이 문을 쾅 닫고, 분노로 백지장처럼
하얗게 된 얼굴로 쇼의 얼굴에 주먹을 갖다대고 이렇게 소리질렀죠. "이 나쁜놈아,
너 또다시 그랬다간 중여버릴테다") 그때의 그 말뜻은 아주 명확했다고 그 스텝은
말한다. 나중에도 서로 기사를 보도하기 위해 서로의 영역을 침범했다.
1965년 래더는 런던 주재 외신 기자로 발탁되면서 그의 야망은 보답을 받았다.
그러나 래더 자신은 새로 임명받은 자리에 그리 신나지도 않았다. 그는 런던을
"퇴보하는 지역"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당시 CBS는 유명한 기자를 뽑아 키우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때 래더의 경우는 실제적인 것이기도 했고 상징적인 것이기도 했다.
래더에게는 또다른 행운이 있었는데, 런던에서의 찰스 콜링우드나, 워싱턴에서의
에릭 세바레이드와 같은 CBS의 훌륭한 기자가 그의 정신적인 조언자였다는 것이다.
대략은 이러했다. "콜링우드는 그에게 옷 입는 법을 가르쳤고 세바레이드는 그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쳤다"
래더가 셰빌로우 양복과 보살리노 모자를 쓰게 된 그의 취향은 콜링우드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두 사람으로부터 래더는 세련미를 배웠다. 그러나 취재에 있어서는 여전히
맹렬한 기자였으며, 1965년 중반, 방송기술장비의 발전으로 런던이 세계의 뜨거운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필연적인 요충지가 되었다. 곧 그는 인도와 파기스탄
접경지대에서 탱크탄을 피해 돌아다니고, 그리이스 내란 초 아테네를 조심스럽게
누볐으며, 중국 공산군이 히말라야 산맥의 1만 4,000피트에 위치한 나튤라 파스에
집군해 있을 때의 긴장감도 몸소 느껴 보았다.
이 기간중, 그의 상사 프레드 프랜들리와 그의 아내 진은 반대했지만, 그가 진정
취재하고 싶었던 곳은 베트남이었다. 위험에 무너질 그는 아니었다. 대어를 낚는데는
마약같은 묘미를 느꼈다. 결국, 그의 상사와 부인은 그의 고집에 어쩔 수 없이 꺾였고,
1965년 말 그는 사이공으로 떠났다.
그가 사이공에 도착했을 때는베트남 주둔 미군이 5만명에서 50만명으로 늘어나,
이미 사태가 커졌을 때였다. 그는 CBS의 교체 근무팀에 소속되었는데 여기에는 몰리
세이퍼, 버나드 칼브, 피터 칼리셔, 빌 스타우트 등과 때로는 찰스 콜링우드도
파견되었다. "대단한 멤버지"라고 당시의 사이공 국장이었던 피터 허포드가 말한다.
(칼리셔는 전문가이고... 세이퍼는 기자로서 손색이 없으며 그가 어딜가든 무슨
일인가 반드시일어났고... 그리고 래더는 호랑이였죠. 종군 기자였는데, 해군
출신이죠. 전쟁의 상황에서 취재하는 동안 그는 만족할 줄 몰랐죠)
사이공의 카라벨호텔에 투숙하면서, 래더와 그의 동료는 하루의 60__70p는 전지에서
보냈다. 그느 전지에 더 오래 남아 있기 위해 그가 취재한 필림을 전시 공문 전달자를
통해 보내곤 했다. 칼리셔나 칼브와 같은 다른 기자들은 주로 정치 관련 취재를 했다.
허포드 국장은 말한다. (그러나 불똥이 선풍기 날개에 튀어 돌아가듯이 사태가 덮쳐
일어나면, 그땐 래더를 보냈습니다)
지금도 CBS의 몇몇 고참 기자들은 당시의 용감한 래더에 관해 말한다. 한번은
래더가 신문기자들과 함께 반정부 무장 수도승들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어둠을 타서
다낭의 한 사원으로 들어간 적이 있다. 인터뷰 중, 정부군이 사원을 포위하여 총을
들이대며 쳐들어왔다. 래더는 이때 다른 기자들을 자기 뒤로 모아 사원의 문을 열고는
TV 라이트를 켜고 소리쳤다. (바오치, 바오치!(기자!)) 그리고 TV 라이트 밑에 있는
백기를 치켜들고, 같이 있었던 기자들을 정부군의 무리를 똑바로 지나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였다.
래더는 용감했지만 무모하지는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행동한 것 외에도,
전장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두가지 방도를 취했다. 때로는 총에 탄알을 장정하고
다녔는데, 몇몇 동료들은 그가 무기에 있어서는 "멸사봉공"의 자세였다고 한다. 또
그는 행운의 부쉬 해트를 언제나 쓰고 다녔다. 1966년 말 베트남을 떠날 때, 그는
그 모자를 동료기자 잭 로렌스에게 선물했는데, 그는 "이 모자는 자신에게도 행운의
모자였다"고 회상한다.
미국에 돌아온 래더는 이번엔 또다른 종류의 전투의 스포라이트에 끼여 들어갔다.
1968년 시카고 민주당 대회에서 경찰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반전시위자 무리속으로
들어가 최루탄으로 쏘아대자 래더가 있던 당시 월터 크론카이트 지휘하의 CBS
전당대회 취재진의 내부 상황 역시 그에 못지 않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평범한 옷차림을 한 신원불명의 경호원들이 왜 보잘것없는 조오지아주의 늙은
대표를 끌어내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래더는 그들의 길을 막고 물었다. 그러자
대머리에 신체가 건장한 그 장정들 중 몇명이 힘센 팔뚝으로 그를 밀어내면서
움직이지 않으면 체포하겠다고 말했다. 그래도 래더는 꼼짝하지 않고 (나를 진짜
체포하지 않을 거라면 나한테서 손을 떼십시오!)라고 소리질럿다. 그들이 그에게
길을 놔주자, 그는 조오지아 주 대표를 만나기 위해 럭비의 풀백 태클하듯이
그들에게서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누가 그의 가슴을 정면으로 강하게 내리치더니 또다른 건장한
사내들이 그를 대회장 바닥뒤로 질질 끌고 가는 것이었다. (월터! 여기 좀
보세요!...)하고 그는 CBS 부스를 향해 소리지르고 쓰러졌다. 이때 CBS 촬영팀은
그가 쓰러져 누워서 격하게 숨을 쉬다가 놀랍게도 곧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는
장면까지 찍었다. (경호원들이 나는 바닥으로 때려 눕혔어요, 해치울 수가 없더군요)
크론카이트는 놀란것이 역력한 모습으로 말했다. (난 굉장한 수의 암살단이 왔구나
했어, 댄)
이에 댄이 대답하길, (걱정마요, 월터. 내가 맞서 싸울 터이니)
이때가 댄이 또다른 폭풍의 중심이 된 TV 방송사에 또다른 고전을 안겨 준
순간이었다. 소란했던 60년대의 어느 시기보다도 이때의 사건은 이후 70년대 초기에서
말기까지 계속 대중매체를 조종하게 된 전위체계에 대한 막연한 회의감, "너희들 대
우리들", "기자 대 정부"의 상태가 잘 요약되는 시대의 사건이었다. 이전에 워싱턴의
기자들은 정부에 있어 편안한 내부사람, 클럽의 소년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 교활한 녀석이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를 알고자 요구하도 있고, 래더는
그들 중에서도 가장 공격적이었다. 래더는 그의 자서전에서 그가 대통령 수석
보좌관 H.R. 할드맨을 처음 만났을 때, 할드맨이 자기에게 열을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신은 린던 존슨의 텍사스 자유당이지. 우리는 당신을 지켜볼 것이오" 그후
7년이 지나도록 그들의 관계는 좀더 우호적이지 못했다.
워싱턴에서 래더와 삼년간 래더와 함께 일한 피터 스투르트반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항상 래더가 뒤집어쓰고 있다고 느꼈죠. 그는 닉슨 대통령에게 그랬던 것처럼
존슨 대통령에게도 아주 끈질겼죠. 그에겐 강인한 기자의 기질이 있어요. 가능한 한
아주 많아 파고들죠. 그는 닉슨 증오자로도 유명한데 사실 진짜 적극적으로 일했을
뿐이죠)
해가 지남에 따라 워터게이트 사건이 결말을 맺고, 70년대에 들어 정치분야가
전국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표명되자, CBS는 이 젊고 패기만만한 기자에게 더욱 열기를
불어넣었다. 사실, 우드워드, 번스타인 드의 다른 기자들도 신종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그의 업적은 눈에 띄었고, TV를 통해 보도하는 그의 모습은 아주
강렬했다. 우익 정치가들은 CBS에 분노의 화살을 꽂고, CBS사장 윌리암 페일리로
하여금 래더의 담당을 백악관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시켰다. 그러나 CBS는 명예를
걸고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래더는? (래더는 아주 표상적이었습니다. 그는
투사였습니다. 그리고 또 싸웠죠)라고 스투르트반은 말한다.
백악관의 할드맨과 에릭맨에게, 길거리에서 큰소리로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래더는 그들을 다방면으로 막아냈다.1970년대 초 닉슨 대통령의 한 지방
대학 연설을 취재하러 래더가 조오지아로 갔을 때 일어난 것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있다.
래더가 대통령을 따라 다니는데 그 지방의 한 빈민 백인이 하루종일 그의 뒤에다
야유를 퍼부어대며 쫓아다녔다. 래더는 그를 무시했다. 그러나 닉슨 대통령의 연설도,
그리고 그의 취재도 끝났는데 그 남자의 야유는 계속되었고, 점점 더 커지고 그칠
줄을 몰랐다. 이때 래더는 그 남자를 가까이 불러서 얼굴을 그 남자의 정면에
들이대고,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천천히 말했다. (꺼져 버려...)
후에, 프로듀서가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이런 것에 피곤하지도 않아요?)
그러자 래더는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짐승이지요. 그리고
아마도 그 중노동자(댄의 아버지)의 자식을 위해서도...)
물론 그때보다 더 악전분투하는 모습이 TV에 나온 적도 있었다. TV 역사의 또다른
고전적 이야기가 된 유명한 해프닝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1974년 3월 휴스턴에서 미리
짜여진 닉슨 대통령의 기자회견에서 일어났다. 이 회견은 반은 질문과 대답시간, 반은
리차드 닉슨의 쇠잔해가는 운세를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 모임의 형식으로 구성되었는데,
회견장은 공화당 지자들로 꽉 차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그는 자신이 질문을 하려
해도 지적받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지적받는다 해도, 제일 먼저 질문을 한 NBC의
톰 브로커와의 경쟁이 되리라. 그러나 그의 차례가 오자, 70년대 초에 유명하던
구룻나룻에 넓은 넥타이를 맨 래더는 일어나 의례대로 시작하였다. (감사합니다, 각하.
CBS 뉴스의 댄 래더입니다) 그러자 청중으로부터 박수갈채가 나왔는데 조만간 야유의
소리가 밑에 깔려 들려왔다. (각하)하고 래더는 다시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소동은
계속되었다. 래더는 대통령을 감시하는 의회의 역할에 관한 질문을 하고 싶었는데,
그 소리 때문에 질문을 시작할 수가 없었다.
이때 닉슨 대통령이 소리내어 말했다. (당신은 지금 바빠서 아주 쫓기고 있습니까?)
이 소리에 청중들이 잠잠해지자, 닉슨 대통령은 그의 드문 야릇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래더도 웃었다. 그리고 청중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그는 입을 다물고 턱을
비볐다. 몇 순간의 여유에 그는 (엉터리같은 이 곳에 더이상 서 있을 수 없다)라고
생각하였다.
(아닙니다, 각하. 그런데 당신이야말로 지금 쫓기고 있나요?) 래더는 항상 이
사건을 중요시하지 않았는데, 이는 "고지"에서 자란 거리의 투사인 댄 래더의 아주
독특한 성격이다. 대통령마저도 그를 괴롭힐 순 없었다. 톰 브로커나 피터 제닝스같은
앵커가 그런 식으로 그런 식으로 대답하는 것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그들은 기껏해야
눈썹을 찡그리며, (마감시간이 임박해서요, 각하)라고 중얼거렸을 것이다.
다음 몇 해동안 "CBS 리포트"와 "60분"에서 시청자들이 인식하고 존경하게 된 것은
거침없이 비난해대는 래더의 모습이었다. 적그적으로 질문공세를 펴고 초점을 맞추어
폭로하며 "60분"을 진행하는 그의 모습은 아주 적격이었다.
"60분"에서 그가 폭로했던 것 중 전형적인 것으로 "쇠고기문제"가 있다. 댄 래더와
그의 제작팀은 한 회사가 소의 품질을 표시하기 위해 위조된 "특등급" 스탬프를
사용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쇠고기 포장공장을 둘러보던 중, 고기가
걸려있는 줄 사이에 서서, 자기 주머니에서 가짜 스탬프를 꺼내서 물었다. (이
스탬프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그를 안내하던 공장장이 얼국이 창백하게 되어, 뒤늦은 반응을 보였다.
(당신들 이 곳을 떠나는 게 좋겠군요)라고 말하는 공장장에 카메라가 촛점을 맞췄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라고 래더가 말했다.
(어쨌든 괜찮은 것 같지 않군요)
(그럼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저에게 말할 기회를 드리지요)라고 래더가 정중하면서도
집요하게 물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 스탬프를 다시 돌려주시겠습니까?)라고 래더가 걸어나가는 공장장의 등을 향해
말했다.
(이것을 어디서 얻었죠?)
이에 래더는 비난조로 그에게 집게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당신이 쇠고기의
등급을 표시하기 위해 소매상들이 쓰는 스탬프와 다른 스탬프를 쓴다고 말해 준
사람에게서 얻었죠)
래더는 빨간 야구 모자 아래에서 턱을 삐죽거리며 서 있는 그를 올가미에 넣기 위해
쏘아보았다.
(오, 맙소사)라고 그 불행한 남자가 머뭇거렸다. (이런 구역질나는 일이...)라고
말하며 공장장은 고개를 숙인 채 쇠고기들이 걸려있는 사이로 걸어갔다. 그는 완전히
패배하였다.
래더가 화면상으로는 투사로 비춰졌다면, 직업상으로는 투사와 거리가 멀었다.
(60년대 말에, 중요한 순간이 제게 찾아왔죠)라고 그가 CBS 일요일 저녁 뉴스 앵커
자리를 가리켜 말했다. 그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그 자리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리포터가 더 높고 나은 일)이라고 생각하여 CBS 아침뉴스의 앵커자리도 거절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저녁뉴스 앵커 자리를 눈여겨 왔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저는 마틴 루터 킹, 민중운동, 케네디 암살사건,
베트남전쟁, 백악관 등을 취재했는데, 제가 해야할 만큼은 다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사인 고든 모닝이 아주 밑에 있는 존 하트를 앵커로 뽑아, 저는 그에게 가서 경위를
물었죠. 그러자 그가 말하길, "나는 자네가 훌륭한 기자라고는 생각해. 그러나 절대로
앵커맨은 안 돼"라는 겁니다. 잘한 짓인지 잘못한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앵커에 대한
생각을 해본 것은 그때가 정말 처음이었죠)
그렇게 말한 래더의 표현이 좀 억지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그 대답에 격한 분위기는
없었다. (그가 저에게 그렇게 말하자 제 속에서 경쟁심의 불길이 일어나 말했죠.
"잠깐 기다리자. 나는 당신이 나를 앵커맨 감으로 부적격이라고 생각한 것과 같은,
나 자신이 뭔가 열등한 것이 있다는 생각은 맘에 들지 않아" 난 앵커맨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앵커맨 경험도 없지만, 기회를 줘 보세요. 아주 잘 해낼 수
있을 겁니다)
결국 CBS는 그에게 주말 앵커 자리의 기회를 주었고, 그는 이 새로운 자리 때문에
백악관과 뉴욕 스튜디오를 왔다갔다 했다. 그리고 CBS 이사진이 월터 크론카이트의
후계자를 결정하기 위해 뜨겁게 논의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을 때에도,래더는 이렇게
말했다.
(신문에서 경기 가사를 읽을 때, 그 시합에 댄, 자네가 끼였었고, 댄, 너는 지고
있다면, 댄은 스스로 말하다. 잠깐 기다리자. 난 내가 시합 중이라는 걸 몰랐어.
시합을 하는 거라면, 이기고 말아야지)@ff
6. 언론 기업 장악
댄 래더와 톰 브로커, 피터 제닝스, 이 세 사람이 선두주자로 달리고 있는 동안
그들이 달리고 있는 트랙이 팔려 버렸다는 사실을 그들은 실감하지 못했다.
1980년대 중반, CBS와 ABC, NBC는 새로운 주인, 거대하고 막강한 기업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새 주인들에게 있어서 뉴스는 신성한 소명도 아니었고 공익사업도 아니었다. 단지
"코스비 쇼"나 "월요일밤의 미식축구"와 마찬가지로 돈을
벌어들이는 또 하나의 방편이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실적인 새 소유주의 생각은 전체
TV 뉴스 사회에 큰 충격파를 던져 주었다.
미국 TV 뉴스의 역사를 훑어봐도, 뉴스가 대중에게 정보를 전달해주는 국가적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는 영국, 캐나다, 유럽에서처럼 비슷한 양상으로 다뤄진 적은
그 어느 때도 없었다. 자본주의의 본산인 미국에서는 BBC처럼 방송국이 국유화된 적은
없었고, 언제나 주주들의 소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래 사주인 일리엄 페일리와
데이빗 사노프 같은 사람들은 보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런
물에서 자랐고, 거기에 매료된 사람들이었다. 설사 뉴스가 이익을 내지 못했다
하더라도 "(손해 보고 싸게 파는)특가품"이라고 생각하고 호의적으로 두도봐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재정적으로는 이문이 남지 않아도 그 물건은 회사 위신을
세우주고 간판으로 내세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CBS의 회장자리에 있었던 페일리는 뉴스가 이익이 남지 않아도 정말로
걱정하지 않는 매스컴의 거물 중 한 사람이었다. "CBS 저녁뉴스"의 고위 제작자인
톰 베타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번은 페일리씨가 주주들 앞에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지요. "어쩌자고 뉴스에서 일 년에 6백만 달러를 손해 보는 겁니까?" 그러자
페일리씨는 말했습니다. "나는 그 6백만달러를 치르고 나서 되돌아오는 그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체면이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하원에 나가 매번
공격받을 때마다, "네 그래요. 우리는 해마다 월터 크론카이트에게 손해를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익사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자신감이기도 했습니다.
회사에게는 후광이었고 공식인가 표시같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CBS는 방송
라이센스를 갱신할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86년이 되자,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해 1월, 언론 복합사회인 캐피탈
시티즈가 ABC를 사들였다. 6월에는 세계 10위권에 드는 산업체인 제넬럴 일렉트릭사가
NBC를 소유하고 있는 RCA를 통째로 인수했다. 그리고 9월, 원로 로랜스 티쉬가 CBS를
손에 넣었다. 불과 아홉달만에 미국의 3대 주요 TV 방송사는 새로운 기업주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방송사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TV
사업, 특히 TV 방송국 사업은 돈을 많이 벌기 때문이다. 80년대 중반만 해도 방송사의
주식 값은 상당히 싸게 매겨져 있었다. RCA의 예를들어 보면 실제 가치보다 거의 100p
낮게 매매되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 방송국은 흥정할 만한 대상이었고, 따 주기만을
기다리는 잘 익은 채 매달린 과일이었던 것이다. NBC 뉴스의 재정담당 국장인 나탈리
헌터는 이렇게 말했다. (세 경우 모두 고전적인 자산놀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35억 달러에 캡 시티즈가 ABC를 손에 넣었고, GE는 63억 달러에 NBC까지
포함해 RCA를 사들였으며, 래리 티쉬는 9억 5천 백만달러에, 자산 50억에서 100억
규모의 CBS의 실권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방송 종사자들에게, 특히 뉴스 부서의
직원들에게 이러한 사고팔기는 영화 "네트워크"에 나오는 끔찍한 장면
같은 악몽이었다.
그 영화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필리스틴(옛날 팔레스타인 남부에 살던 민족)
사람들은 돈에는 밝아도 감각과 지성은 어두운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피터 제닝스는
처음 캡 시티즈의 ABC 인수 소식을 들었을 때의 기분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들은
나치 군대 같았고, 우린 점령당한 프랑스 같았지요"
이에 비하면 CBS의 직원들은 좀 더 낙관적이었다고 할까? CBS 임원의 한
사람이었으므로 어쨌든 CBS 사람인 래리 티쉬가, 남부 출신의 벼락부자 망나나인
테드 테너 같은 외부의 압력에서 회사를 구한 "백기사" 노릇을 한 것이다. 터너사
제시 헬름즈 상원의원 같은 사람들이 방송에 손을 대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그 누가 알겠는가? 대량해고? 편집권 간섭? 일부 부서 매각? 그래서 티쉬가 CBS 주식을
사고 회사의 24.9p의 지배주주가 되었을 때 모든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어떠한 대대적인 변화도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설사 있다 해도 아주 미미한
것이어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했고, 보도 분야에 있어서는 특히 새로
온 경영진에 의한 어떤 영향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다짐했다.
래더의 뉴스팀은 좀더 편히 숨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차츰 기분 나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티쉬는 진정한 CBS의 옹호자가 아니라, 난국에서도 교묘하게 이익을
챙겼고, 이 전쟁같은 인수과정을 좀더 부드럽게 해냈을 뿐 다른 소유주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소문이었다. 그래서 "CBS는 왕(이란의 왕)을 물러나게 하고 호메이니를
들어앉힌 격이다"라는말까지 떠돌았던 것이다.
그런 사실이 밝혀진 1987년은모든 방송사의 보도팀에겐 사기가 저하되는 해였다.
티쉬에 연이어 캡 시티즈와 GE도 방송사를 직접 운영하기 시작했고, 보도 분야에
대해선 확실히 불만이 많았다. 미국의 다른 곳에서도 기업은 바야흐로 경쟁시대,
간소화와 효율성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당시 표어가 "줄여라! 그러면 번다!"
였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니 한때 방송사의 응석받이 귀염둥이였던 뉴스 부서는
무기력하고 능률이 오르지 않는 곳으로 보이게 되었다. 보도요원들은 실리적인 원칙을
갖고 있엇던 것이 아니고 단지 일의 우선 순위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보도분야가
최고급 언론으로 자리잡기 위해 비용이 얼마가 들든 분투 노력하고 있는 동안, 새로운
주인은 단지 수입, 지출 비율과 손익명세서만 따지고 있었다. 언론인들은
"머로우 전총"을 마음속에 새기고 잇는 동안, 기업 정신의 표본들은
"비대는 곧 낭비"라는 규칙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러나 충돌은
불가피했다.
로이터통신과 NBC에서 근무하다 PBS의 "맥닐 리어 리포트"로 옮긴 로버트 맥닐
같은 편견없는 관측자들은 그동안 방송사의 보도분야가 놀랄 만큼 흥청망청 지출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레이건 대통령이 수술을 받던 베데스다 해군병원
밖에 방송사가 진을 쳤던 일을 예로 들었다. 거대한 군단들이 몰려들었었다. 따뜻하게
준비된 식사가 날라져 왔다. 각 방송사의 야영 칠판은 그날의 메뉴를 알리고 서로의
입맛 당기는 요리를 자랑이라도 하듯 서로 경쟁했다. 배가 고픈 신문 기자들은 굶주린
난민처럼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얻어 먹을 것을 찾으러 다녔다.
맥날은 1981년 알지에를통과해 미국인 인질들이 석방될 때의 얘기도 예로 들었다.
가파르게 언덕진 이 도시에서 제작팀들은 그들이 취재하는 기간 동안 사용할 택시란
택시는 글자 그대롤 모조리 끌어모았다. 그래서 신문 기자들은, 다른 신문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도 좀 봐 주십사 하고 애걸을 하고 다녀야 했다. 맥닐의 말에 따르면
"어떤 상황이든 가능한 한 최대의 인력과 장비(그리고 돈)를 투입하고 난 후에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두고 보는 것이 방송사들의 일처리 관례"라는 것이다.
방송 종사자들은 이런 평가의 진실도 인정했다. 방송요원들은 단 이틀 정도 필요한
경우에도 "만일에 대비해서" 5일을 예약하는 것이 보통이다.
게다가 시간 외 비용은 엄청나다. 따라서 보도분야의 예산은 지난 8년동안 8천만
달러에서 약 3억 달러로 치솟았다. 톰브로커는 NBC가 마치 소형 자동차 사용하듯
제트 비행기를 마구 주문했던 것을 돌이켜 보고 껄껄 웃었다.
분명히 그렇게 낭비적인 부분은 감축되어야 했다. 간소화할 필요가 있었다. NBC가
1984년 바닥 수치를 기록 했을 때처럼, 방송국은 더이상 한 해 7천 5백만 달러라는
엄청난 손실을 계속 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회사 경영진이 능률 전문가를 데려왔을때 그들이 자기들이 손봐야 할
분야에 대해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연해졌다. 여러 면에서, 전문가들은
질적인 문제를 양적으로 표시하려 했으니 그 결과는 자명했다. NBC에서는 직원들이
경영 자문단 맥킨지 회사를 대상으로 농담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국내 프로 제작자 존 체스넛은말한다. (그들은 돈의 흐름에는 밝지만, 방송엔
문외한이어서 기상천외한 질문을 서슴치 않고 했습니다. 동부 해안을따라
보스턴에서부터 워싱턴까지 폭설이 진행되는 것에 대한 생방송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제가 보스턴 지국에 전화를 걸어, "그쪽은 무슨 화면을 보여 줄 건가요?
지평성? 찰스 강?"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내 어깨 너머에 서 있던 자문단은
한심하게도 이렇게 되묻도군요. "그들이 뭘 보여 줄 것인가를왜 묻지요? 정말 그렇게
세부적인 데까지 개입합니까?" 그래서 제가 대답했습니다. "이건 텔레비젼이에요.
우리가 말하고 있는 건 그림자라구요!")
새로운 기업 경영주들은 감각도 없었고 언론에 대한 애정도 없었다. 댄 래더는
이윽고 이렇게 말했다. (CBS뉴스는 다른 화의 다른 부서와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역사가 있고, 책임감을 갖고 일합니다) 1987년 작가들의 파동이 시작되었을 때,
NABET(National Association of Broadcast Engineers 및 Trchnicians: 전국방송기술인협회)
의 한 회원은 그때 경영진에게서 들은 말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나한테 질에 대한 실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대체 비용이 얼마나 듭니까?) 이러한
압력때문에 보도예산은 3억 달러에서, 2억 5천만 달러로 깎였다. 한 직원은 이렇게
말한다.
(보통 회사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는 기업 인수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그들은 회사를 사들인 후 빚을 갚기 위해 삭감을 하는 겁니다. 이는 K&K(Kohlberg,
Kravis and Roberts)가 RJR(RJR Nabisco)을 사들여 그중 4개 자회사를 팔아버린 것과
같은 식이지요. 뉴스에선 크게 절약하는 유일한 길은 인력 감축뿐입니다.
노동집약사업이라는 것이지요)
그 후 몇 달 동안, NBC와 ABC는 조기 퇴직, 재임명, 해고 등을 통해 수많은 인력을
감축했다. ABC가 가장 민감했다. NBC는 특정혜택(예를들어 조기 퇴직시 혜택을 주는
것 등) 등을 통해 1,400명의 인원을 1,000명으로 축소시켰다. 뉴스 부서의 약 30p가
감축되면, 스튜디오 카메라맨이 하던일은 로봇이 대신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암흑의 금요일"로 불리워지는 1987년 3월 13일, CBS의 감원은 혹독하게
실행되었다. 보도국 직원 1,200명 중 프로듀서, 기술자, 방송에 출연하던 특파원 등을
합쳐 200명 이상이 일거에 해고당한 것이다. 자동차회사 같은 데서는 그 정도 해고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지만, 언론사에서는 전례없는 일이었다. 이는 공공회사로서는
한번에 가장 큰 규모의 해고사태로, 막대한 항의를 불러 일으켰다. "57번가의 대학살"
이라고 명명된 이 드라마는 모든 신문의 지면을 장식하고 CBS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리차드 코헨 프로듀서는 "뉴욕 타임스"의 특집란에 댄 래더의 서명과 함께 이렇게
기고했다.
(CBS는 "머로우" 시대에서 "평번"의 시대로 가고 있는가?)
강제해고를 비난하면서 코헨과 래더는 티쉬의 치하에서는, 한때 CBS가 누렸던
양질의 특성과 미래가 고갈되고 말 위험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래더나, 다이안 소이어 같은 뉴스 스타들은 해고를 막기 위한 것이라면 자신들의
보수를 깎아도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래더는 또한 실업자를 돕기 위한 안전기금을
모으기 위해 배당된 돈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파동에 환멸을 느낀 앵커는
나중에 이렇게 술회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서, 회사는 가족이 아니라, 회사는 사업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날 3대 방송구의 보도 부서는 더웅 능률적으로 간소화되었다. 낭비적인 지출은
과감히 삭제되었다.
한 프로듀서가 우울하게 (이제 우리 리어왕 제트 비행기는 다시는 못 타보게 되었군)
하고 말했다고 톰 브로커가 전해준다.
그리고 오늘날 3대 방송사의(특히 NBC의) 강력하고 중앙 집중화된 명령체계 덕분에,
예를들어 "Nightly News"나 "Today" 같은 내부 진행 프로들은 베를린장벽 철폐나
몰타 정상회담 같은 큰 사건 특집들과 비용도 나눠쓰고, 그 결과도 나눠 가져야 했다.
혹자는 그렇게 많이 잃은 것이 아니라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NBC의 나탈리 헌터의
얘기가 그렇다.
(중대한 발생뉴스에 대해선 언제고 머뭇거려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도
간섭하지 않습니다. 얼마가 들건, 그저 가서 취재보도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한 인색하고 실리적인 기업정신은 여러가지 면에서 방송 뉴스에
타격을 주고 있다. 방송사는 점점 "1인제도(dne man bands)"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두 명 대신에, 일 많이 하는 한 사람이 필름도 찍고 음향도
녹음하는 두 가지 일을 함께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품질은 어떻게 될
것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중앙 집중화된 지시 체계로 말미암아 모든
뉴스쇼가, 경제만을 고려하는 반면, 한 명의 기자, 카메라맨으로 구선된 팀이 제작을
끝내니, 결과적으로, 다양성 정보성에서 뒤떨어지고, 한 기자 시각에서만 진단한
뉴스가 되는 것이다.
아마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지국이 모두 규모를 축소했다는 점일 것이다. CBS에서는
본, 바르샤바, 방콕, 시애틀 지국이 모두 기구가 축소되었다. NBC는 파리 지국까지도
현재는 대답하는 기계 정도의 역할만 하고 있을 뿐이다.
존 챈샐러(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이지만)는 이렇게 도려내는 부분이 "지방질"
부분에서만 멈추지 않고, "근육"까지 미치고 있다는 점을 걱정하고 있다. 미국 내는
물론, 저세계의 해외 지국까지 기구를 축소하고 폐쇄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는
이유는, 반드시 방송사가 그림을 받지 못한다는 것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림이야,
비슨스나 CNN으로부터 항상 제공받을 수 있으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최근에는
방송사가 이러한 국제적 회사의 주주가 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정말 걱정스러운
것은 취재 그 자체가 어려워지는 일일 것이다. 실제로 화면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고,
그 그림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챈샐러가 "저울
가지고 일하기"라고 일하며 걱정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현장에 분석할 기자가
없었으므로, 외국에서 사온 필름, 그것도 사실 가치없는 것일 수도, 오도된 것일 수도
있는 그런 필름으로 세계를 취재한다는 환상만을 제공하는 것이다.
전 NBC 기자였던 켄 보드는 말한다. (내가 시카고 지국에 들갔을 때만 해도 직원
40명의 거대한 기구였습니다. 우리는 중서부 지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뉴스를
취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단 세 명뿐입니다. 만일 방송사의 높은 분들이 그렇게
줄여도 별 영향이 없다고 말한다면, 글쎄요, 그들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임이 분명합니다)
CBS의 톰 베타그 같은 고참 프로듀서에게는 예산 압력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한 가지 뉴스 거리를 취재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결정은,
보도가치를 따져 보는 것뿐만 아니라, 재정적인 문제도 따져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도쿄 지국으로부터 마닐라로 누굴 보내는 결정을 할 때마다, 같이 가야 할
필름담당, 편집자, 프로듀서, 특파원, 위성시간 등 엄청난 돈이 드는 일임을 고려해야
합니다. 위상 비용만 해도 30분에 수천 달러씩 드는 것이고, 그 외에도 비행기 요금,
호텔비, 음식비, 현지 운전수 고용 등... 이렇게 되면 이 문제는 줄잡아 6__7천
달러짜리 결정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예를 들어, 그렇게 해서 가보았더니 마닐라에서 살해된 미군이 공산주의
게릴라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질투에 찬 애인의 남편의 손에 죽은 것이었다면,
완전히 헛일 하는 것이 된다.
상업적인 기업주 밑에서는 어쨌튼 뉴스 부서도 이익을 창출해내야 하는 것으로
"기대"되고 있고, 뉴스 부서야말로 이익의 중심으로 "간주"되고 있다. 베타크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나는 자비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뉴스에서 손해를 보는 것이 우리들 때문이어서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우리는
GE가 보도부서에서 요구하는 그런 종류의 이익을 제공해 줄수 없다는 얘기지요.
우리도 이익을 낼 수는 있지요. 하지만 엄청나게 큰 돈을 벌어들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도 안되구요"
이익을 보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로 떠오르자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먼 곳에서
어렵게 취재하는 보도물은 아예 제외는 것이었다. 중요하지만 시청자들은 지루해하는,
그래서 시청률이 떨어지고, 결과적으로 광고주를 잃게 되는 것은 제외되고 마는
것이다. 전 CBS 프로듀서 리차드 코헨은 이렇게 말한다. (이젠 더 이상 언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돈 버는 장사를 하고 있을 뿐이지요)
코헨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실리적인 면만 강조하는 풍토는 저널리스적인
정신을 쇠약하게 한다고 말한다. (뉴스는 권위적인 의식을 가진 강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변했습니다. 사람들은
복종적이 되고, 기업놀음에 더 치중하게 되었습니다)
CBS의 기자 벳시 아론은 대기업 체제가 TV뉴스에 치명적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기업이 방송사를 인수한 이후, 대량 해직 사태가 벌어졌고, 사람들이
적잖이 불안해 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전엔 없던 일이지요. 이젠 우린
기회를 만들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실패할지도 모르는데 누가 위험한 뉴스를 만들려고
애쓰겠어요? 이러한 현상은 기자들에게나 앵커들에게나 모두 끔찍한 일입니다. 하지만
기회는 만들어야 합니다. 집세 낼 일, 아이들 걱정하다 보면 훌륭한 기자가 될 수
없는 거지요)
페일리 시대 이후 방송요원들은 두려움에 차 있다. 언제 또 철퇴가 내려질지 모르는
일이어서, 종종 멀찌감치 떨어져 남의 일 보듯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매일매일
이색한 구두쇠 정신과 부딪치다보니 사람들은 자연히 의기소침해졌다.
CBS의 어떤 프로듀서는 이렇게 밝힌다. (에드 그레보(CBS의 재정담당 이사이자
경영행정 부사장) 씨는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서 모든 기가 막힌 조치를 다했습니다.
그중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은 물비누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화장실의 물비누를 모두
없애고 모래비누를 갖다 놓았습니다. 그게 더 싸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생리대 가격도
올렸습니다. 자그마치 500p나요. 그들은 생리대에서까지도 돈을 벌어보자는
속셈이었습니다)
관계자들은 새 사장 마이클 가트너가 초래한 봉급의 인색함에 대해 노발대발했는데,
NBC 뉴스가 특히 심했다. 그런데도, 프로구단 선수처럼 뉴스맨들과 그 관계자가 지난
몇 년 동안 돈을 긁어 모아 온 것에 대해서는 거론도 하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
앵커는 일 년에 2백만~4백만 달러까지 받았고, 주요 고참 특파원들은 50~70만 달러,
보통 수준의 특파원도 평균 15만 달러까지는 받았다.
오늘날 재정 문제를 둘러싼, 피해망상증적인 현상이 전체적으로 만연하고 있다.
몰타에서 열린 정상회담에 관한, "월스트리트 저널"에 게재된 기사에 대한 CBS의
반응을 살펴보자. 이 기사에서, TV 비평 담당 기자인 로버트 골드버그는 ABC와 NBC가
각각 70명, CBS가 약 120명의 요원을 몰타섬에 파견했다고 언뜻 비쳤다. 그러나 긴
기사 가운데 짤막한 이 한 부분은 CBS에, 그야말로 큰 파동을 불러 일으켰다.
톰 베타그 프로듀서와 특별뉴스 담당 레인 베나도스 감독은 알려진 바에 따르면
6번가에 잇는 본사로 달려가 에드 그레보와, 다른 CBS 고위 관리들에게 경위를
설명해야 했다고 한다. 두 사람에게 그 날은 아주 기분 나쁜 날이었다. CBS의 한
내부자의 말에 따르면 그레보씨가, 대체 몰타섬엔 몇 명이나 갔느냐고 호통쳤다고
한다.
이전에는 한 방송사가 경쟁사보다 현장에 더 많은 인원을 배치했다고 하면, 철저한
취재를 위해 조치를 취한 것으로 생각되어 칭찬받는 일이었는데, 새로 온 경영주들
눈에는 많은 인원을 현장에 투입했다는 사실은 방탕한 낭비로 밖에 보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톰 베타크는 이렇게 그 상황을 전했다.
(그 기사가 나온 후 우린 모두 재정회의에 소환되었습니다. 거짓말 보태지 않고
장장 3~4시간 동안 재정 다마당자들에게 경위를 보고해야 했습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지를 읽고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인원이 실제로 필요했나요?" 게다가
누가 그 숫자를 흘렸는지도 알아내라고 요구했습니다)
마침내 누군가가 아주 자세하게 설명했다. "몰타" 같은 외국 취재의 경우에, 모든
방송사는 요원 각자를 위해 우편함 대신 봉투를 놓는데, 그 봉투를 세어보면 몇
명인지 금세 알 수 있다고.
CBS의 한 소식통은 이렇게 전했다. (다시는 봉투를 붙여 놓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우린 그 일로 교훈을 얻은 셈이지요)
(이는 오늘날 모든 사람이 끼어드는 게임입니다. 그렇게 되면 간부들은 말할 겁니다.
"좋지 않아요? 우리 회사가 다른 회사들보다 얼마나 단촐해졌는지 보시오!") 베타크의
말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런 이유로 해서 오늘날 방송사들은 고의로 오보를 흘려 보내고
있다. 숫자를 줄이는 것 정도가 아니라(하기야 이 정도야 그들의 권한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간부들은 진실을 말하는 것 만큼이나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있다. 물론
모든 기업들은 언론이 곤란한 질문을 하면 거짓말로 둘러대곤 한다. 그러나 TV
저널리스트들은 그들 또한 언론의 일원이므로 자부심을 갖을 만도 한데, 오늘날 그들은
자기네들을 기업의 한 직원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CBS의 한 프로듀서는 이렇게 말한다. (보도 담당자들은 요즘 어려운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것이 뉴스를 취재 보도하는 것인지 긴축을 해서
사장에게 잘 보이려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CBS의 몇몇 고위급 인사들은 예를들어
중국을 취재하는데 백만 달러 조금 더 들게 예산이 책정됐다고 말하지만, 실제비용은
거의 두 배 정도(180만에서 2백만 달러) 든다는 것이 내부의 얘기다.
오늘날 3대 방송사의 직원들은 모두 돈 문제에 관해 약간 초조해하는 듯하다.
아프리카에서 유럽, 미국에 이르는 5백만 달러에서 7백만 달러짜리 환경문제
시리즈물은 몰타 정상회담을 취재하기 위해 취소되었다.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가 석방되는 데는 최소한의 인원만 투입했다.
피터 젠이스는 이렇게 주장할지도 모른다. (뉴스가 돈이 없어 고통을 받는다는 데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너무 과장해서 알려진 탓이겠지요)
그러나 제닝스 정도면 가장 행복한 자리에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ABC를
인수한 캐피탈 시티즈는 그 이전에도 매스컴 복합회사였고, 여러모로 보도 부문에는
가장 감각이 잇는 편이었다. ABC는 CBS가 겪은 출혈이나 대외적인 상처, 또 NBC가
경험한 창피함 같은 것은 당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기업이 TV 방송을 인수함으로 해서 생겨난 또다른 중요한 우려는, 모기업이 어떤
형태로든 보도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이다. CBS의 뉴스 프로듀서 톰 베타그는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회사가 저녁뉴스에 무엇이 나가건 무어라 말하지
않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회사가 창피함을 겪어도 그것이 보도에 어떤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아주 민감하고 힘든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니 회사와 보도가 서로 이익이 상충성이 있을 것이라는 잠재성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확실히 뉴스는 회사와 어느 정도 격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콜롬비아 신문방송대학장 조안 코너 같은 전문인들은 말한다. (GE가 NBC를 인수한
것도 이해의 상충을 초래했습니다(예를들어 방위산업이나 핵 에너지 같은 문제에
봉착했을 때). 아직 구체적인 사건이 벌어지진 않았다 해도 곧 일어날 일임엔
틀림없습니다)
실제로 세계에서 가장 큰 산업체의 하나인 GE가 NBC 뉴스를 선전도구로 이용해
자기네 백열전구 판매에서 위대한 영화를 누리자고 할까봐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공공연한 걱정은 끼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좀더 교묘하게, 그러면서
간혹가다가 분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때로는 기자들을 주춤거리게 할
것이다. 기자들과 프로듀서들 스스로 내가 왜 이런 기사를 다뤄 말썽을 일으키느냐
하는 자체 검열을 알아서 하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비행기와 미사일 적재함에
쓰인 GE사의 볼트의 하자에 대한 보도를 스스로 알아서 편리하게 없애버린 것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반면, 아이오와 주의 수 시티에서 비행기 추락사고가 발생했을 때, GE 엔진에
하자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자, 톰 브로커의 "Nightly News"에서는
너무나도 자세하게 그 사진을 보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 앵커는 자신의
신뢰도를 입증이라도 하듯 당당하게 GE를 거론할 입장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날 NBC는 GE사의 주요 감찰조사 따위의 조사 따위의 보도는 하지 않으려는 것이
일반적인 태도다. 그러나 또다시 생각해보면, 잭 웰치가 톰 브로커에게 전화를 걸어
그 기사를 빼라고 명령하지 않는 한, 보도파트와 그 소유주는 다소 불편하지만,
그래도 실행 가능한 공리공생의 관계로 지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전문가들의 전망으로는, 미래에는 회사가 뉴스 부서에 명령을 좀더 부과함으로써
변화가 있으리라는 분석이다. 소문에 따르면 90년대에는 어느 방송국인가가 뉴스
자체 사업을 박탈할지도 모르는데, 그 대상은 세계에서 가장 무자비한 폭군으로
알려진 GE의 잭 웰치 치하의 NBC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나돈다. 그런 소문이 설사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NBC 뉴스의 재정담당 국장 나탈리 헌터는 이렇게 말한다.
(아마도 5년 이내에 NBC의 보도국은 모습을 감추게 될 것입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총 40p의 인원 감축이 있을 것이라는 말도 들린다.
그런 반면 CBS의 래리 티쉬는 4분 1분기의 순이익이 52p 신장은 확보해 놓았지만
90년의 사업전망이 어두운 것에 대해 투덜거린 적이 있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수십
명에 달할 것이라는 또 한 차례의 감원설에 CBS 직원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CBS의 부사장 조지 슈바이쩌의 말이다. (실용화를 따지는 곳에서는, 우리가 그것을
따라야지요) 비록 그의 말의 표현에 어폐가 있을지는 몰라도, 그의 의도는 분명하다.
(새로운 상업방송시대의 공포가 여기에 있다) 댄 래더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오늘날 변한 것 중의 하나라면, 훌륭하고 점잖은 것은 모두 면도날에 딛고 선 같은
위험에 처해 있어서, 우리는 매 순간마다 투쟁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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