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일산을 일산답게 하는 산</b>
영천사의 '미륵이'가 사는 고봉산으로 오르는 길은 야트막한 구릉의 연속이다. 고파만세 3호의 개혁핫이슈가 '일산의 허파-고봉산이 앓는다'로 잡히자, 나는 비좁아터진 방구석에서 비질비질 땀을 쏟아내며 탱탱볼을 차는 아이들을 불러, 씻기고 옷을 입혔다. 겨우내 뜸했던 고봉산엘 올라봐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산에가자"는 한마디에 이제 겨우 여섯 살배기인 아이들이, 평소에는 칫솔을 입에 문 채 장난도 치고 딴청을 피우느라 한 시간은 족히 걸릴 일들을 단 십 분만에 해낸다. 제 에미 애비를 닮아서 바깥바람을 쐬는 일이라면 만사 제치고 따라나서는 아이들인 탓도 있지만, 산에 오르면 그토록 좋아하는 나무며 꽃이 지천인데다가 재수가 좋은 날은 영천사의 스님에게서 제 대갈통만한 사과 한 개씩이 얻어걸린다는 것을 이미 터득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내가 이 마을에 들어와 산 것도 5년째다. 전생이 역마살로 도배질된 삶이었던지 어느 한곳에 정착 못하고 서울의 동서와 남북, 지하와 지상을 종횡무진하며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내 삶처럼 지난하고 복잡한 서울을 떠나자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한지붕 밑에서 서로의 상채기를 핥으며 기대살다가 순전히 그 놈의 돈 때문에 일산으로 떠난 시라소니 조상구 형이 일산자랑을 엄청 늘어놓는 바람에 혹해서 들어온 일산이었다.
그러나 나는 함께 살자던 상구 형 권유 때문에 일산에 들어왔지만, 그와 나란히 호수마을에 살지 못했다. 거기 역시 서울과 별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철길을 따라 대화까지 가보고 당시에는 찻길도 제대로 뚫리지 않은 가좌동까지 들어가봤지만, 어디는 너무 버글버글해서 또 어디는 너무 불편해서 까탈스런 내 속을 채워주지 못했다.
"휴, 여기도 사람 살 데는 못 되는군. 용인이나 가 봐야 되겠다"
차를 돌려 일산을 마악 빠져나가려고 하던 참인데, 저 멀리 야트막한 산 한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까막눈인지라 무조건 산자락만 보고 차를 달렸다. 대개의 산자락 밑에는 그것이 화려하든 초라하든 집들이 조로롬이 있게 마련이라는 경험칙이 발동한 탓이다. 그리고 마침내 산밑으로 올망졸망하니 서있는 집들의 무리를 발견했다. 그곳이 지금의 중산마을이요, 그 산이 나를 아직껏 여기에 묶어놓은 고봉산이다.
직업 탓에 오밤중을 뜬눈으로 보내야 하는 날이 많은 내게 고봉산은 늘 휴식처요 위안이었다. 모두들 잠든 밤이면 소쩍새가 그 특유의 노랫소리로 온밤을 함께 했고, 아침 예불을 알리는 영천사의 목탁소리는 곧 동이 터온다는 표식이기도 했다. 긴 염불소리가 끝나면 산 중턱에 오른 잠없는 운동객들의 야호 소리가 아침을 깨웠다.
돌도 안 된 아이들이 점점 자라면서 밤낮없이 쿵쾅거려대던 탓에 지금은 그 산자락 밑에서 두어 발자국 비켜난 곳으로 이사를 했지만, 고봉산은 늘 그렇게 밤낮 사시사철을 나와 우리와 함께 했다.
<b>꽃무리와 함께 오르는 산행</b>
아이들을 앞장세우고 늘 그렇듯이 5단지와 3단지의 사잇길로 접어든다. 돌도 안 된 아이들을 안고 업고 중턱까지 오르며 기진해서 헉헉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저만치서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며 제 아빠의 존재를 확인하기도 하고, 때로는 "아빠, 힘들어? 나는 하나투 안 힘들어!"하며 으스대는 아이들을 보노라면 언제 저렇게 컸나 싶어서 대견해지기도 하는 건 숨길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이다. 그런 마음 탓인지 너른 산자락 밑의 푸근함 때문인지 아이를 대하는 것도 한결 부드러워진다. 평소 같으면 "천천히 다니지 못해! 다쳐서 피나면 좋아?" 뭐 이렇게 윽박지르듯이 말하던 것도 "조심하렴, 여기서 넘어지면 집에서 넘어지는 것보다 더 아프단 말야~"라며 간지러운 소리를 내게 된다.
산으로 오르는 입구에 커다란 플랭카드가 하나 걸려 있다. 식목일 행사에 관한 내용인데 '고봉산 땅 한뼘 사기 추진위원회'의 이름으로 돼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밀려들어오는 고봉산을 지키기 위해서 지난해 5월 일산지역의 시민들이 모여서 전 지역민이 땅 한뼘 값인 1만원씩을 모금, 고봉산 일대의 택지지구로 지정된 땅을 사들이자는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고봉산 땅 한뼘 사기 추진위원회는 그 운동을 제안하고 시작한 시민단체다. 산행의 시작부터 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는 고봉산을 보는 것 같아 민망하고 가슴이 먹먹하다.
제 엄마를 따라 하루에 한번 산에 오르던 아이들은 아빠보다 고봉산에 오르는 길을 더 잘 안다. 한참을 앞서 가다가도 진기한 풀이나 개미 꽃을 보면 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뒤쳐진 아빠를 채근하기도 한다. 아파트 단지 안에 요즘 피어있는 것은 기껏 산수유 정도. 그런데 단 5분도 안 걸려서 여기저기 지천으로 핀 꽃무리를 만난다. 진달래다.
"아빠, 무슨 꽃이야?"
"음, 이건 진달래야. 철쭉이라는 꽃도 이거랑 너무 똑같이 생겼는데 철쭉은 잎이 먼저 나고 나중에 꽃이 펴. 진달래는 그 반대로 꽃이 먼저 피고 잎이 나오지. 그러니까 잎이랑 같이 있는 꽃은 철쭉이고, 잎은 없이 꽃만 피어 있는 건 진달래야. 옛날에 아빠가 하늘이 바다만했을 때는 이 꽃을 따먹고 놀았어. 아빠 엄마가 부침개도 부쳐주셨는데..."
"하, 참 이쁘다"
작년에도 꼭같은 말을 했을 테지만 아이들이 여태 그것을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진달래면 어떻고 철쭉이면 어떠랴. 꽃을 보고 아름답다는 걸 느끼고 또 제 입으로 "참 이쁘다"고 말할 줄 아는 마음가짐이라면 그것만으로도 기꺼워지는 아빠다.
"앗, 개미가 간다"
"하늘아, 이리 와봐! 이건 거미야!"
"아빠, 이건 소나무지?"
혼자 걸으면 5분이면 닿을 거리를 아이들과 이런저런 해찰을 하며 걷다보면 30분은 족히 걸린다. 하지만 목적지가 딱히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단 10분 이내에 내려올 수 있는 거리여서 채근할 일도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산이 주는 넉넉함이 비등점 낮은 아빠조차도 이렇게 아이와 노니작거리면서도 조급하지 않은 여유로움을 주었을 테다.
<b>삼국이 고봉산을 탐내다</b>
산중턱에 오르면 일산의 전지역은 물론이고 멀리 고양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암센터며 정발산은 코앞이고, 파주, 북한산 자락까지도 한눈에 들어온다. 시원스런 조망이다. 단냄새를 함빡 머금은 바람이 훅 지나간다. 봄기운이 물씬 배어있다.
"아빠, 사진 찍어줄까?"
"카메라를 안 갖고 왔잖아!"
"내가 가지고 왔어"
"어디?"
아이가 주섬주섬 제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는가 싶더니 손가락으로 네모를 그려보이며 카메라랍시고 들이댄다. 이럴 땐 좀 낯간지럽지만 과장 섞인 웃음으로 아이의 우스갯소리를 받아준다. 제 딴에는 카메라랍시고 들이댔는데 "에이~ 그게 뭐 카메라야!"라고 말하면 졸지에 깨는 아빠가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산 위에서 보는 산 아래의 풍경은 날이 갈수록 달라진다. 지난 가을과 비교해봐도 확연히 다르다. 겨울을 지나는 동안 산밑자락으로 대형아파트가 새로이 들어섰는가 하면 낮은 구릉으로 보이던 구일산도 이젠 대단위 아파트들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마치 고봉산을 차지하기 위해 진격하던 삼국의 군사들처럼, 고봉산을 향한 아파트들의 대공습이 시작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고봉산은 삼국이 한강유역을 놓고 쟁패를 벌이던 시기에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산에 성을 쌓아서 진지를 구축했고, 그 성의 모습 마치 산에 띠를 두른 것 같다고 해서 '테미산' 혹은 띠대자(帶)를 써서 '대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삼국시대에 고봉산은 최초에 백제 땅이었다가 이후 고구려, 신라 순으로 차지를 하게 된다. 한강을 차지하는 나라가 삼국 중 가장 강대국이었다는 학창시절의 역사 교과서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백제는 고봉산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을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막는 중요한 요충지로 활용 하다가,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에 점령당했다. 그후 약 80년 동안 이 지역을 달을성현(達乙省縣)으로 부르며 지배하던 고구려는 신라에게 고봉산을 빼앗기고 한강 이북으로 철수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까지 이 곳이 삼국의 각축장이었다는 사실을 잘 증명하고 있는 또 다른 유적 가운데 하나가 고구려에 의해 축성된 성저토성이다. 이 성은 현재의 대화동 성저마을에 축조되었는데, 높이 2∼3m에 길이 400m 정도의 거대한 토성으로 고구려와 통일신라시대의 토기가 발견되어서 이 지역이 한강 유역의 방어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경덕왕 16년부터 '고봉현'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전한다.(휴, 머리에 쥐나실 분들 많은 줄 안다. 하지만 겨우 208m 되는 고봉산이 이렇게 역사적으로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려다보니 팔자에 없는 '역사 스페셜' 콘티까지 쓰게 되었음을 이해하시라)
<b>자연생태 공원의 축, 고봉산</b>
1300∼1400년 전 삼국의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물밀 듯이 밀려들던 고봉산에 이젠 아파트 군락들이 거대한 굉음을 내며 공습을 시작했다. 쳐들어오는 군사들이야 강력한 힘으로 막으면 된다지만 이런저런 합법을 핑계로 밀고 들어오는 개발이라는 이름의 침략은 무엇으로 막아야 하나. 가슴이 시리다.
현재 고양시의 녹지는 황룡산-고봉산-견달산-풍동숲-정발산-호수공원-한강으로 연결되는 녹색띠를 갖추고 있다. 이 생태축만 지켜진다면 고양시는 천혜의 자연생태공원을 갖는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러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고봉산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경희대 박병권 교수도 "고양시는 아직까지 자연상태의 녹지를 많이 가지고 있고 또 논이라는 습지가 많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기 정화가 이뤄지며 '열섬현상'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진단한 바 있다. 이 아까운 자연생태와 자연정화가 단지 몇몇 인간들의 이기와 이해관계 때문에 마구잡이로 파헤쳐져야 하다니….
산밑자락을 굽어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아이들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깊지 않은 산자락이어서 걱정까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직원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어디서 딴짓이나 하고 사고나 치는 것 같아서 불안한 오너의 심정이 되어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서른발짝을 넘지 않은 모롱이에서 아이들은 나무기둥을 붙들고 하늘만 쳐다본다.
"뭐가 있냐? 뭔데?"
"쉿~ 조용히 해, 아빠!"
제법 은밀한 것이라도 보는 양, 손가락을 입에 대로 떠들지 말라며 가만가만 주의를 준다. 허참, 애들 보고 떠들지 말라는 소리를 해본 적은 있어도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주의를 받기는 난생 처음이다. 그제서야 내 귀에 오래도록 잊었던 노랫소리 하나가 들려온다.
"포로로로롱~ 포로로로롱~"
"뿅뿅 뾰뵤뵤뵹~"
각기 다른 새 두 마리가 한 나뭇가지에 앉아서 노래를 부른다. 새소리가 저처럼 다양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아이들은 나뭇가지에 앉아서 한적한 오후를 보내는 새들이 날아갈세라 제 아빠의 입까지도 틀어막은 것이다.
고봉산을 잘 아는 사람들은 새소리도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는 얘기를 한다. 백마사격장의 총소리 때문에 그렇단다. 지난해에는 그 백마사격장을 고봉산으로 옮기겠다고 해서 온 동네가 한바탕 난리법석을 떨었던 적이 있다. 주민들의 거센 반발 탓이었는지 아니면 또 다른 속내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사격장 이전 계획을 백지화하는 바람에 주민들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던 기억이 새롭다. 만일 그 말도 안 되는 계획이 감행되었더라면, 아이들이 저렇게 홀린 듯이 바라보는 저 새가 과연 아직까지도 이 산을 날아다닐지는 말 안 해도 뻔한 일이다.
고봉산을 아끼는 시민단체들에서 붙여놓은 것으로 보이는 주의표시가 곳곳에 있다. 겨울을 나는 동물들을 위해서 비상식량으로 뿌려놓은 것들을 주워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이런 표지판을 붙여놓았지 싶다. 고양녹색소비자연대, 한국 어린이 식물 연구회, 시민자치를 위한 젊은 일꾼 모임, 고양환경운동연합 등이 요즘 고봉산에 큰 관심을 갖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산에서 겨울을 나는 동물들을 위해 비상식량을 뿌려준다든지 나무마다 이름과 생태를 적어서 걸어두는 오밀조밀한 일들은 주로 '푸른 고봉산을 가꾸는 사람들'에서 하고 있다.
그러고보니 집을 나올 때 아이들 엄마가 하던 말이 생각난다. "푸른 고봉산을 가꾸는 사람들에서도 이번 식목일에 무슨 행사를 한다던데 형은 알아? 몇시에 어디서 모이는지 좀 알아봐 줘" 나올 때는 그냥 귓등으로 흘렸는데 이런저런 표지판을 보니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음... 집에 들어가면 사이트 좀 뒤져봐야지'
마치 산새처럼 포로롱거리며 날 듯이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뒤를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영천사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아이들은 버릇처럼 법당 앞에서 두 손을 모은 채 부처님에게 인사를 하고, 공양간에서 일하시는 할머니에게도 합장을 한다. 지난 여름을 온통 고봉산에서 보낸 아이들은 제법 아는 사람도 많다. 할아버지 한 분이 "하늘이 바다로구나. 오늘은 아빠랑 왔네!"하시며 알은 체를 한다. 또 스님이 기거하는 방문 앞으로 쪼르르 달려간 애들이 뭐라고 한참 동안을 이야기하는가 싶더니 아니나다를까, 손아귀로 한웅큼씩 되는 사탕을 받아서는 입이 찢어져라 함박웃음을 지으며 돌아선다. 그럼 그렇지. 요놈들은 아마 저런 재미에 툭하면 산에 가자고 조르는지 모른다.
초파일이 머지 않은 탓인지 연등접수를 한다는 안내문도 걸렸고, 지난 여름의 누런 미륵이는 어딜 가고 그 새에 까만 미륵이가 아이들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갑자기 엉뚱한 상상이 들어 실실 웃음이 새어나온다. 설마 그럴 리가. 흐흐흐.
고봉산 등반의 중간 기착점 정도가 될 영천사에서 많은 사람들은 걸음을 잠시 쉰다. 절 뒷켠에는 수도꼭지가 달려 있어서 품은 영 아니다 싶지만 물맛 좋은 약수가 있고, 사방이 모두 볼 일 보는 장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야 요긴하지 않겠지만 산중에서 유일하게 화장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 마당 한켠에 놓여진 의자 몇 개는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사랑방 역할을 한다. 또래의 아이가 앉아 있으면 몇번 곁눈질을 하다가 슬그머니 먹을 것을 건네며 말을 붙여보기도 하고, 엄마들은 엄마들대로 인사도 하고 얘기도 나눈다. 얘기라 봐야 대개 아이들 키우는 게 주된 내용이지만 말이다. 워낙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탓에 산사의 고즈넉함은 맛볼 수 없지만 푸근함과 넉넉함, 그리고 절간이 주는 평화로움만은 그 어느 고찰 못지 않은 곳이다.
영천사에서부터는 가파른 길이 시작된다. 가파르다고 해봤자 지금까지의 길보다 경사가 조금 심할 뿐 치악산이나 지리산 자락의 가파름과는 비교도 안 된다. 그나마 어른 걸음으로 1, 2분 아이들도 5, 6분만 걸으면 그것도 끝인데다가, 영천사로 드나드는 차량들의 길목이어서 지금까지 걸어왔던 오솔길과는 비교도 안 되게 폭이 넓다. 그 길의 끝에 만경사와 산밑자락에 새로이 들어선 산들마을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b>입장료 없이도 체험하는 자연학습장</b>
만경사는 영천사와 더불어 고봉산의 대표적인 절인데 법당이 마치 여염집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어 잘 들르질 않는다. 자연 발길은 산들마을 쪽으로 향하고, 그것은 곧 하산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산은 오르는 것보다 내려갈 때 더 많은 주의를 하라고 했던가. 시나브로 나이만 먹어 벌써 40 고개를 넘고 인생의 내리막길을 시작한 내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서 산을 내려가는 일은 늘 씁쓸하다.
이런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는 끊이질 않는다. 강종강종 뛰던 바다가 계단이 아닌 흙길로 내려가다가 주르륵 미끌어진다. 덜컹 마음이 내려앉아서 달려가지만 아빠보다 더 가까이에 있던 하늘이가 먼저 달려가서 손을 잡아 일으켜주고 엉덩이에 묻은 흙도 털어준다. "바다야, 안 다쳤어?"하며 제법 걱정 어린 표정도 짓는다. 손내밀고 잡아주고 털어주고 걱정하는 품이 제법이다. 산은 아이들에게 자연만 가르치는 게 아니구나 싶어서 잠깐동안 우울했던 마음이 환해진다.
아파트 숲 사이를 통과해야 비로소 산에 오르는 길이 나타나는 시작지점과는 달리 산을 내려오면 여기가 정말 신도시 일산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논이 있고 밭이 있다. 한여름을 지나면 이곳 논밭에는 밥상 위에 오르는 온갖 푸성귀, 즉 오이, 호박, 가지, 상추, 토마토 등이 주렁주렁 열린 모습을 볼 수 있다. 멀리 돈들이고 발품까지 팔아가며 자연학습장을 찾아갈 일이 없이 천지사방이 열려진 자연학습장이다.
날이 좀더 풀리면 이곳엔 동네 아이들로 북적거린다. 개구리알도 떠가고 올챙이도 잡는가 하면 폴짝폴짝 뛰는 청개구리를 따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그야말로 자연의 아이들이다. 언젠가는 아이들과 함께 개구리알을 찾느라고 반나절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어릴 적 추억 때문이었는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고양시의 계획대로라면 이 자연학습장은 머잖아 아파트촌으로 뒤바뀔 것이다. 이 자연학습장뿐 아니라 이곳 일대의 2천여 평에 이르는 습지 자체가 개발의 희생양이 된다. 각종 시민단체가 극구 이곳의 개발을 반대하는 이유는 바로 이 습지 때문이다. 고양시는 물론 서울 북부 지역의 유일한 습지로, 이곳에는 아직껏 반딧불이가 살고 송사리가 헤엄친다. 석잠풀, 부들, 금불초 등 습지식물의 서식지요 생태계의 보고라는 판정을 받은 바 있는 이 귀중한 습지가 사라질 판이다.
고양시가 이곳 일대 27만평을 일산2지구 택지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파헤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9년 12월부터다. 이미 지어진 대림아파트도 이곳의 저수지를 메워서 세웠다. 개발계획이 착착 진행된다면 돈을 아무리 들여도 만들어낼 수 없는 이곳의 습지는 물론, 고봉산 산자락이 해발 70m까지 10여만 평이나 뭉텅이로 잘려나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고봉산의 모습이 마치 '호섭이 머리'처럼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모양새만 우스운 것이 아니라 1제곱미터 당 5리터 정도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산림이 사라진다면 해마다 반복되는 경기 북부지역의 수해가 일산에서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다는 점이 더 걱정스럽다.
<b>개발에 밀려 자연과 역사의 현장이 죽는다</b>
자연뿐 아니라 이 지역은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곳이기도 하다. 송학정이라는 이름의 활터 옆에는 문화재 안내판 하나가 붙어 있는 묘소가 보이는데 이곳이 추만 정지운(1509-1561) 선생의 묘소다. 추만 선생에 대해 서울대 교수를 지냈고 지금은 녹색대학의 학장으로 있는 장회익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지금부터 대략 450년 전인 1553년 우리나라 역대의 가장 큰 학자로 뽑히는 퇴계 이황(1501-1570)이 조정에 벼슬을 하면서 서울 서대문 밖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의 조카되는 사람이 천명도(天命圖)라고 하는 도면 하나를 보여주는데, 보니 우주와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는 기본 원리를 몇 가지 도형과 글자로 표현해 놓았는데, 과연 놀랠만한 내용이었다. 이것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추궁해 본 결과 고양 땅에 살고 있는 처사 추만 정지운 선생이 만든 것이라는 것이었다.
퇴계 선생은 “내가 어떻게 이런 큰 학자가 계심을 알지 못했는가”하고 자책하면서 그 분을 바로 모셔 오라고 했다. 그러나 추만 선생은 자기같이 초야에 묻혀 학문이나 하는 사람이 높은 벼슬에 있는 어른을 만날 이유가 없다는 이유에서인지 거듭거듭 초청을 거절했다. 결국 몇 달에 걸친 여러 차례의 초청 끝에 두 분은 만났고, 천명도에 대해 함께 의논하고 연구하면서 여러 차례 수정한 결과 두 분이 합의한 새 천명도를 만들었다. 이 천명도는 후에 퇴계 학문의 기본이 되었으며, 이 안에는 성리학의 기본원리가 가장 압축적으로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이후 이른바 ‘사단칠정(四端七情) 논변’의 발단이 되었던 것은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훗날 추만 선생을 비롯해 고양팔현(남효온, 김정국, 민순, 기준, 정지운, 홍이상, 이신의, 이유겸)이라 불리던 옛 스승들의 뜻을 이어가려는 후학들에 의해 서원이 세워졌으니 그 이름이 문봉서원이다. 조선 숙종 때에 세워졌고 임금이 친히 현판을 하사한 문봉서원은 고양지역 최초의 서원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대원군 때에 서원철폐운동으로 문을 닫고 현재까지도 그 자취를 찾을 수가 없다. 다만 고양시 문봉동이라는 지명만이 문봉서원의 명성을 간직하고 있을 따름이다.
고봉산을 살리려는 시민단체들은 지금의 송학정 터를 사들여 문봉서원을 복원하고 주변의 자연 늪지도 살리겠다는 계획 아래 3억원을 목표로 1인 1구좌 갖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택지개발이 불가피하다면 고봉산과 늪지만이라도 개발지역에서 제외시켜 달라. 그것도 아니라면 역사박물관과 생태학습장으로 꾸밀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시민단체의 외침이 단지 반대를 위한 반대만은 아님을 이곳을 둘러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일이다.
툭 트인 너른 벌판에 말뚝을 박아놓고 공사가 한창이다. 새로 들어선 아파트의 아이들이 다닐 초등학교를 짓는 중이란다. 학교 앞에는 또 문방구가 생길 테고 모르긴 해도 분식집도 들어올 테다. 학교로 이어지는 도로도 만들 테고 아이를 실은 차들도 질주를 할 것이다. 이렇듯 순전히 인간의 이기와 편익 때문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씩 둘씩 자연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가슴이 무겁다.
<b>"살려주세요"-산의 긴 울음을 듣다</b>
일산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여러 이유가 떠도는데 그 중의 하나가 '고봉산'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높을고(高)에 봉우리봉(峰)자를 쓰는 고봉산을 두고 '누구 마음대로 '높을고'를 쓰느냐, 일개 산에 불과한 것을'이라며 비아냥거린 일제에 의해 일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게 그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맞든 틀리든 이 지역의 가장 높은 산이요 생태계의 보고인데다가 역사적 유물까지 산재해 있어 일산의 중심을 이루는 산인 것만은 분명하다. 더욱이 주말이면 신도시에서도 서늘한 산공기도 쐬고 운동도 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든다는 점을 감안하면 돈내고 골프칠 일은 추호도 없는 우리네 서민들에게는 헬스클럽이요 편안한 휴식처인 셈이다. 살려달라는 산울음이 긴 여운으로 귓전을 울리는 것은 단지 나만의 환청은 아닐 테다.
한강쪽으로 해가 기운다. 마음 먹고 걸으면 한시간 정도면 충분할 길을 이리 노니작 저리 노니작거리며 걷다보니 서너 시간을 훌쩍 넘겼다. 아이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하늘이 바다, 힘들어?"
"아니, 하나투 안 힘들어"
"그런데 땀을 흘려? 안 힘들면 땀도 안 나는데"
"옷을 너무 많이 입었잖아"
하긴 집안에서만 뱅뱅 돌다 보니 계절이 오가는지도 모르고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옷을 껴입혔다. 문밖만 나서면 이렇게 봄이 지천인 것을. 아무튼 오늘 저녁 아이들은 긴 단잠에 푹 빠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