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4일
<난하>
이제부터의 여행기는, 여행 내내 들고 다니며 기록해 둔 손바닥만한 수첩을 이용해야한다. 기록하지 않으면 다닌 곳의 순서도 헷갈리고, 무엇을 보고 왔는지조차 잊어버리는 휘발성 기억 때문에~. 기록해 두었다고 글쓰기가 수월한건 아니다. 빠르게 진행되는 답사와, 답사지의 역사와, 유물과, 갖가지 정보를 설명을 하는 교수들의 말을 기록 하자면, 속기를 해야 할 판이니 그 글씨가 온전히 써지겠는가. 내가 쓰고도 글씨인지 그림인지 모를 기호 같은 글자들 속에 코를 박고, 내가 원하는 내용을 건져내는 작업은 보통일이 아니다.
땅위로 뛰어 내리고 싶어 안달이 난 비구름이, 쥐어짜고 비틀며 찔끔찔끔 내리다 폭우로 쏟아지다 하여 그 동안엔 덥지 않은 여름을 보냈었는데, 오늘부터 맑은 하늘이 땡볕과 폭염을 내려 보내고 있다. 땀띠 나게 더운 염천이지만 여행의 감동이 식기전에 써야한다. 아무튼 시작해 보자.
배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가 늦은 점심을 먹고, 백이숙제의 유적이 있는 ‘루룡’으로 가는 길에 ‘난하’가 있었다. 우리는 ‘난하’ 위에 걸쳐진 다리에서 내려, 넓은 강을 보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난하’는 고조선과 중국을 나누는 국경하천으로 ‘진황도’와 ‘당산시’ 경계를 흐르며, 동쪽으로 대릉하, 요하, 압록강이 차례대로 위치해 있는 곳이다. 지구의 이상기후는 이곳도 예외는 아니어서 많지 않은 강물이 뻘건 흙탕물을 흘려 보내고 있었다.
<이제거리, 청절묘, 이제정>
백이숙제가 살았던 고죽국을 기자조선이 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상서대전>에는 주周의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망시키고, 감옥에 갇힌 기자를 석방했는데 기자는 그를 탐탁치 않게 여겨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는 것이 기자조선의 요지이다.
“중국 사료인 ‘상서대전’ 에 기록된 기자동래설은 조선시대 일부 유학자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일부 사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고조선의 청동문화는 중국과 계통이 다른 비파형동검과 돌널무덤 및 고인돌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논리상 맞지 않아, 최근에 일부 학자들은 오히려 위만조선이나 한 군현 등을 고조선 서쪽 변방에 자리한 고조선의 속국이라고 보고 있다.”
고죽국은 당나라 때는 영평부였고, 명 때는 노령현이라 했는데 그 당시 인구가 1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옛 고죽국 골목길을 걸어 들어가 백이숙제가 먹었던 우물터 ‘이제정’을 살펴보고, 근처에 있는 집터 '이제고리'와 ‘청절묘’로 올라갔다. 백이, 숙제는 ‘수리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먹고 살았다는데, 고사리만 먹고 살았다고 보기에는 깊은 산속이 아니어서, 이곳이 정말 그들이 살았던 곳인가 의구심을 갖게 하였다.
‘이제고리’에서 단체 사진을 찍다가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비문을 가리지 않으려면 앞줄은 앉아야 하는데, 나는 쭈구려 앉는 것이 불편해 비석 뒤 작은 나무 옆에 섰다. 그 나무에 쐐기가 열매처럼 줄줄이 매달려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내 잔등이에 여러 마리의 쐐기가 후드득 떨어져 들러붙었고, 수많은 털들이 옷 속을 파고 들어와 살 속에 박혔다. 옆에 섰던 분이 놀라서 손으로 털어 냈는데, 내 잔등이는 물론이고 쐐기를 털어준 분의 손도 성하지 않았다. 살 속에 박힌 그 털들은 여행하는 동안 소름 끼치게 가렵고 따가워, 아무데서나 등을 드러 내놓고 약을 발라야만 하였다.
*참고로 알아두기 (퍼옴)
기자조선 [箕子朝鮮]
중국 은나라 말기에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건국하였다고 전하는 나라.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대표적인 역사책은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의 《한서(漢書)》 등인데, 사서마다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그 밖의 기자에 관한 기록들은 모두 이들 세 사서에 그 유래와 근거를 두고 있다.
《상서대전》에는 주(周)의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망시키고 감옥에 갇힌 기자를 석방하자, 그는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겨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주의 책봉(冊封)을 받은 기자는 부득이 신하의 예를 차려야 하였으므로 BC 1100년경(무왕 13)에 주나라에 가서 무왕을 만났는데, 무왕은 그에게 홍범9주(洪範九疇)에 대해서 물었다고 한다.
또 《사기》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무왕이 은을 정복한 뒤 기자를 방문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를 묻자 홍범9주를 지어 바쳤다. 이에 무왕이 그를 조선왕으로 봉해주었으나, 기자는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한서》지리지 연조(燕條)에는 은나라가 쇠하여지자 기자가 조선에 가서 그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 ·양잠 ·베짜기 기술을 가르쳤더니, 낙랑조선(樂浪朝鮮) 사회에서는 범금팔조(犯禁八條)가 행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魏略)》에서는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準王)을 기자의 후예로 기술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먼저 문헌상으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자는 기원전 1100년 전후의 인물인데,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쓰여진 《논어》 《죽서기년(竹書紀年)》 등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은 없고 기자의 존재 자체만 언급하고 있다. 기자동래설이 사실이라면 이들 기록에 그에 관한 언급이 있을 법한데 그렇지 않다. 그런데 기자의 동래 사실을 전하는 사서들은 한결같이 모두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쓰여진 것들이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한 기자동래설은 기원전 3~2세기 무렵에 중국인들이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조작해낸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실제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면, 황하유역과 만주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문화가 긴밀하게 관련되어야 함에도, 동북아시아의 청동기문화는 비파형(琵琶形)동검문화로 특징되듯이, 계통상으로 중국 황하유역의 것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뿐만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와서 예의범절과 문화를 전하였다면, 은나라에서 사용된 갑골문(甲骨文)이 고조선지역에서 발견되어야 함에도 현재 발견된 예가 전혀 없다.
이처럼 기자동래설의 모순점이 밝혀지면서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었다.
첫댓글 큰일 날번 하셨네요. 양심선언 하건데, 예강님 아프면 이노릇을 어째. 여행기 못 보쟎어. 머 모모님도 있지만은 그래도 입맛이 예강님쪽이라서, ㅎㅎㅎㅎ
역시 여행은 써야 내것이 된다는말 맞아요~ 어디가 어딘지 다닌 순서도 모르겠는건 저두 똑같죠~ 속기를 배운거나 다름없이 잘 쓰시기에 가능한거겠죠~ 저 난하(패수)를 지나 검독(왕검성)이 있다고 그물이 흘러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흘러간다고 수경주에 실려있다고한다죠~- 영평현이 있던 자리가 오늘날은 창려현이라고 남아있는거 재작년에 봤을때는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지나쳤는데.......
고생하면서 다닌 여행기를 이렇게 편히 앉아 보려니 쪼매 지송하네유.
쐐기털이라 생각만해도 소름돋네요. 괴로우셨겠어요.
난 한방쐐고도 가려웠는데 왼통 잔등이 다~ 아고 그생각만 하면 지금도 머리가 스룰스룰~
핼숙해진 예강님 모습보고 성공한 여행이라고 놀렸었는데....여행기보니 더 그러네요.....하하하 (죄송)
정말 혼나셨군요. 우리집 옆 풀숲에도 쐐기가 있어서 남편이 한 번 쏘였다가 가려워 하는 모습보고 무서운 줄 알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