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제 오후 6시에 딸과 함께 연세대학교 동문회관엘 갔다.
인천지역동문회 부회장님의 차녀 결혼식이 있었는데, 축의금을 전해 달라는 부탁도 있고 사무국장으로 봉사하고 있기에 가야만 했다.
동문회관은 부대 시설도 주차장 관리 체계도 바뀐 것 같고, 3층 연회장에서 일하는 이들의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혼주되시는 선배님과 반갑게 악수를 하고는 이미 만원이 된 예식홀 맞은 편 식사 공간으로 가서 겨우 자리를 잡았다.
벽면에서는 희미하지만 하얀 천 스크린을 통해 결혼 예식을 중계하였다. 몇 차례 박수를 치니 결혼식이 끝났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내 앞에 와서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다.
내가 동문회에 근무할 때 연회장을 담당하던 지배인인데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며 반가워한다. 나는 그와 악수를 하고는 안부를 물었다.
중국 요리가 나온다는 그의 말에 기다리고 있는데, 양파와 오이 절임이 온 뒤 약 10분이 지나도 코스 요리는 보이지 않았다.
마주치는 시선을 피해 둘 곳을 찾던 나는 이미 동문회에 근무할 때의 시공간으로 이동해 있었다. 의료 보험 혜택 조차도 어려웠던 봉래동 세입 시절 나는 사무국장님과 여직원 한 명과 더불어 이사를 여섯 번 하였다.
19년 동안 청춘을 바쳐 성심성의 껏 일하면서 사무차장, 섭외홍보실장, 기획관리실장, 사업관리실장, 총괄실장, 사무총장 대행 등의 직책을 교홀(驕忽)하지 않게 맡아 보았다.
그 동안 동문회장님이 세 번 바뀌고, 사무총장님도 두 번 바뀌었다.
그 와중에 모교 창립 100주년 기념 사업 후원, 연세대학교의 초대 총장 백낙준 박사 동상 건립, 졸업생들의 사랑방 동문회관 건립, 연세의 정신이 어린 노천극장 확장 사업 완공, 한총련 폭력 시위로 피폐된 종합관 복구 성금 모금, 장학기금 조성 등 동문회 역사에 남을만한 굵직한 사업을 수행하였다.
고되지만 나는 모교에 대한 보은답을 하고 있는 즐거움으로 혼신을 다하였다.
그런데 2년 전 새 회장님이 오시고 사무총장을 임명하셨는데, 이분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하는 책략인지 나에 대해 왜곡과 폄하하기를 주저없이 하였다.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갖고 회장님의 불찰이라고 떠벌리고 다닌다고 하질 않나, 자신이 사비로 내겠다고 하고는 사무국에 청구 한 후 회장님께는 사비로 처리했다고 교묘하게 전하기도 하고, 공식 행사에서 훼방을 놓고는 내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심지어는 모 보직 교수한테 직접 전화를 걸었다고 욕설을 퍼붓는 등 유치한 행태를 계속 하였다.
급기야 나는 2004년 6월 사표를 내고 말았다.
굴절된 시스템을 알리고자 당당하게 나왔지만 회장님을 비롯한 상임부회장단에는 인사를 드릴 기회 조차 주지 않아 마치 죄를 짓고 나가는 형국이었다.
사람이 예순 살이 넘으면 대범해 지고 도량이 생겨 많은 일과 사람을 아우르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무리 은행 밥을 오래 먹었다지만 이 분 한테는 이런 세상 순리와 이치를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두 번째 요리가 나왔다. 나는 콜라 한잔을 따라 마셨다.
사실 나는 얼마전 목장 예배에서 이 분이 믿음을 갖고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알렌,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을 통해 창립된 연세 대학교의 기독교 정신이 강화되도록 기도를 올렸다.
식사를 마치고 딸과 함께 연세 캠퍼스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펜젤러관, 언더우드관, 스팀슨관, 백양로, 청송대, 노천극장, 중앙도서관을 배경으로 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주었다. 딸 아이가 진학하고자 하는 간호대학 앞에서도.
성산대교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이미 내가 받은 외상(外傷)과 내부 상처는 사라지고 말았다.
사랑이 제일이리라